에베소서 강해2016. 3.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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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주인은 한 가족

 

우리는 흔히 가족을 이야기할 때, 혈연에 의한 관계를 주로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지요. 그리고 형제와 자매가 혈연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바울은 아름다운 가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속한 크리스천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 관계가 중요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주인과 종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에 종은 재산이지 식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달랐어요. 성경의 관점은 다릅니다. 자신의 집에 있는 종과 아름다운 가족의 관계를 만들 수 있어야, 비로서 그 가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족이 되는 비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1-4)

 

바울은 먼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정확하게 보시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했기 때문도 아니죠. 그럼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가정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죠.

 

부모에 대한 말씀도 보십시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들을 무엇으로 가르쳐야 합니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주님의 교훈과 주님의 훈계를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그 경외하는 모습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6:5-9)

 

바울은 종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여기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어요. 누구든지 자신이 행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평가하신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종으로서, 그리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상전들에게도 명령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그리고 그 이유가 등장하죠.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주인이든 종이든 상관 없이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든, 주인이든 누구를 경외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아름다운 종과 주인의 관계가 형성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혈연으로만 맺어진 가정관에서 벗어나, 남한과 북한이 한 형제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집 식구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 한 가족 된 이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악을 행하고 손해를 끼쳤을 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한 가족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가정에 대한 개념을 확대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 역시 가정에 대한 바울의 대원칙, 곧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주님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여 행동할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을 가족의 사랑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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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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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 바울은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르러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결코 에베소서 전체에 흐르는 교회라는 주제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가정이 먼저 건전하게 새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많은 가정 사역자들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의 순서가 아내의 역할을 먼저 언급하고 남편의 역할을 이후에 언급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저는 몇몇 가정사역자들의 이러한 해석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관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1)

 

21절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피차’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역할이 복종이고, 남편의 역할이 사랑이라는 구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사랑하며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부부의 관계에요.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주님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는 피차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5:22-23)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죠. 그런데 23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남편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남편의 한계를 분명하게 정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크리스천의 구세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한 가정의 가장이 되십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호 복종의 관계가 가능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한 가정의 주인, 한 가정의 구세주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에요. 그러므로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고,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ㅇ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우리 가정 안에 서로 복종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25-27)

 

바울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부들에게 요구하는 피차 복종과 피차 사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서로 복종해야 하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그리하여 자신의 내어 주시듯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남편에게 그리스도와 같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거나, 아내에게 남편을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가정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가정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됨의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담겨 있다.

 

부부를 위한 바울의 권면은 서로 복종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인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바울은 부부 관계의 중요한 비밀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5:28-33)

 

사도 바울은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이 하나됨의 관계가 얼마나 신비한지, 그것이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이 하나됨의 비밀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위대한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하나됨의 비밀을 숨겨놓았습니다. 그 비밀이 얼마나 큰 지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제 아무리 머리로 정확히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제 아무리 논리적인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한다 할지라도 이 비밀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욱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의 비밀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숨겨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지금까지 바울은 남편과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는 이 비밀은 매우 크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자신 있게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비밀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이야 말로 부부 사이의 하나됨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의 비밀을 깨닫고, 그 하나됨의 비밀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속한 가정에서도 부부가 하나되고, 식구들이 하나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The Calvin’s Commentary, Ephesians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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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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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b).

 

여러분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가정 가정이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공동체적(교회, 가정) 차원

 

저는 먼저 성령 충만에 대해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성령 충만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령의 충만은 개인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7분의 집사님을 선출하는 과정이 나오지요. 바로 그때 교회는 집사님으로 선출할 사람의 조건을 어떻게 정하였습니까? 가장 첫 번째 조건이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요 초대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성령에 더욱 민감하고, 성령이 더욱 충만한 분들이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어서,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어떤 분들은 성령이 충만한데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께서 초대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시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120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어요. 그 자리에 함께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된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됩니다. 다시 말씀 드려 성령의 충만함이 교회 차원으로도 임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뒤,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인데요.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받는 등 교회가 핍박을 받으니 성도들이 진심으로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을 주시는데,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물론 그 자리에 있는 개개인, 각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죠. 그러나 성령 충만이 단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루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충만이 교회 차원에서 임했던 장면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령의 충만함이 가정의 차원에서 임하는 장면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를 초청하지요.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시며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사람을 욥바로 보낸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는 동안 자신의 모든 친척과 주변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 장면을 또한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는 자신의 가정에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모든 식구들, 모든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소원하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식구들 전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 놀라운 장면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각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 가정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교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5-17)

 

바울은 지혜가 없는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알기에,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지혜로운 선택이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흔히 오해하는 바와 같이,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아낀다’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구원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지만, 크리스천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의 시간을 구원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크리스천 된 우리가 성경의 명령과 같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고, 교회를 출석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시간이 흘러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니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던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성령 충만으로부터 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라고도 말씀하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찬양의 말이 크리스천의 입술에서 떠나면 안 되요.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드리고’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답하며’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할 때 예배가 살아나고, 찬양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가득하고 그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예배 안에서 서로 마음이 나누어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바로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서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예배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여,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성도들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그러한 교회, 그러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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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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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어느 조직이든, 혹은 어느 종교든 그 모임이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 필수적입니다.

기독교가 매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과 비슷하게, 불교 역시 매년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지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 곧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나의 주인이 탄생하신 날이기에 기념하고 또 기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혹은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에 대한 개념이 없지요. 불교에서 석가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듯, 불교도 석가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 있어서 롤 모델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그들이 지속적으로 본받으려는 어떤 모델이 있어야 그 모델을 중심으로 그 종교가 하나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이르러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다운 삶을 강조하지요. 예전의 이방인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에 이르러 바울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원리 하나를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5:1-2)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본받고 따르라고 제시되는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만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세상을 닮으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본받으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지적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5:3-7)

 

우리에게 본을 받으라고 보여주는 모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분의 은자 하심, 그분의 그 깊은 사랑,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갈 수 있다면, 그분만 닮아갈 수 있다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유혹의 손길이 교회 안에 존재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교회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너희를 유혹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빛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모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관과 삶의 모델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넘어, 이제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5:8-13)

 

우리 크리스천은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아름다운 행동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세상의 어두운 세력이 더욱 강력할수록, 여러분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교회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빛이 이 땅에 비췰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 자는 자여 일어나라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는 두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모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닮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어두움을 책망하는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 두 가지를 강조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5:14)

 

여기서 ‘잠자는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먼저는 에베소교회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와 우리 교회를 의미하죠. 그러면 ‘죽은 자들’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과 잠자는 사람은 외관상 비슷합니다.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에 세상 속에서 더러움과 방탕과 탐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에 비슷해요. 그러나 여러분, 겉보기가 비슷하다고 모든 것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비록 빛의 자녀와 같이 살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잠 자는 사람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지 못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죽은 자들이 아니라 잠자는 자들입니다. 언제라도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자고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잠자고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을 간직했으며, 그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잠자던 교회가 깨어날 것입니다. 잠자던 교회가 일어나 하나님의 빛을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비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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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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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지난번 본문에 대한 적용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방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거센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어 크리스천이 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방인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곧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말씀에 대한 적용입니다.

 

우리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우리 가운데 말씀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의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의 구체적인 삶(윤리)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4:25-29)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언어의 문제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이죠.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언어를 통해 교회에서 은혜가 되고, 덕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많이 상처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월급을 적게 주어서인가요? 아닙니다. 교회에서 너무도 많은 일을 시켰기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교회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죠. ‘언어’에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하는 말을 들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죄하는 ‘언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세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두 번째로 분노의 문제를 다룹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매우 깊이 묵상한 나머지, 분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다만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마땅히 버려야 할 것들을 나열하면서 ‘악독’ 다음에 ‘노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30) 분노는 버려야 할 덕목입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면, 그날 저녁까지 지속적으로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저녁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향한 분한 마음을 품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7)라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틈을 타서 교회를 공격하고, 가정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라는 말씀이지요? 바로, ‘분노’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에서 화를 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분노가 생기고, 화가 나기 시작하면 마귀는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 교회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도둑질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도록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행위가 과거 이방인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은 단지 도둑질을 멈추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번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벗어 새로운 사람으로 옷 입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벗어 새로운 사람으로 옷 입었다면 그 증거는 무엇이 될까요? 자신의 탐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말이 변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언어에 거짓이 사라지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힘을 주는 언어가 우리의 입술에 있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나의 성품이 변하여 분노를 다스리는 성품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잘못된 관행이 있었다면 변화되어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윤리의 근거 –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4:30-32)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빚어질 때 기뻐하시고,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할 때 슬퍼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데, 바울은 그 근거를 소개하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고, 우리의 품성이 달라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것은 우리 개인의 열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지금도 계속해서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더욱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조금씩 또 조금씩 빚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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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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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귀소본능

 

거의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소위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귀소본능이란 동물이 자신의 서식지나 산란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가도 다시금 자신의 서식지나 산란 장소로 돌아오는 성질을 말하지요. 개는 아무리 먼 길을 떠나도 그 집을 다시 찾아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둘기도 자신의 서식지에서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어는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동물들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때 우리는 사람들의 귀소본능을 보게 됩니다. 오랜 시간 외지에서 살던 분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귀소본능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는데, 지속적으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면 전 ‘데마’라는 사람을 꼽겠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4:10). 데마는 분명 사도 바울을 따랐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의 깊이를 교육받았을 거예요. 그러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과거의 자신이 빠져 살았던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에도 ‘귀소본능’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귀소’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을 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은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아직은 악이 횡횡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세상의 탐욕과 술수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본성은 지속적으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과거에 예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던 이방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잖아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앙의 귀소본능, 곧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의 휘귀본능이 없나요? 세상은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세상은 물질이 하나님이고, 욕망이 하나님이고, 쾌락이 하나님이지요.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상의 유혹이 이처럼 강한데, 귀소본능은 또한 우리의 본성이에요. 우리가 주의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세상의 풍조대로 휩쓸리는 것이 우리의 본래적인 특성이라고요.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협하는 강력한 사탄의 무기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신앙의 회귀본능입니다.

 

성도는 신분상 새사람이지만 

실존적으로 옛사람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

 

에베소교회가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세지자, 바울은 이방인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간곡히,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모습이 얼마나 확연히 다른 것인지를 오늘 본문 전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크리스천

목표

목표상실(허망함, 17)

진리(21)

분별력

총명이 어두워짐(18)

그리스도에게 듣고 배움(21)

행위

방탕, 욕심대로 행함(19)

의와 진리의 거룩함(24)

Basic Source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남(18)

하나님을 따라(24)

 

왜 사도 바울이 이방인과 크리스천의 차이를 이렇게 자세히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우리의 신분에 합당하지 않게, 곧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크리스천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종과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모습과 크리스천의 모습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제발 너희 신분, 곧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았던 때를 기억하라

 

바울이 예수님을 믿어 이방인에서 크리스천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마치 옷을 갈아입는 장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22, 24)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옷을 벗고 옷을 입는 것은 세례의식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이에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21)

 

여기서 ‘듣고’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는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세례 교육은 우리 시대의 교육과 전혀 달랐거든요. 그들은 최소한 40일을 교육받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사순절 기간은 초대교회에서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교육을 받았던 기간입니다. 바울은 지금 세례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의 옛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세례 받았을 때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 사건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세례를 한 번만 받아요.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그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인류 역사상 단 한 차례만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하며 묵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면서 우리는 신앙의 귀소본능을 이길 수가 있는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세례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맞게 우리의 삶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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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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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모습

 

바울은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의 모습과 믿음이 성숙했을 때의 모습을 비교하며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면 그 말이 또 맞는 것 같아요. 복음 안에서 나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세상의 온갖 유혹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바로 그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도, 내 곁의 어떤 사람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봐야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저 적당히 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마음이 흔들려요. 그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성숙한 믿음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 여기에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이고, 두 번째는 ‘사랑 안에서 참된 일을 하라’입니다. 정리하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참된 것을 행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 그것이 믿음의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의 성숙한 믿음이 우리 교회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믿음의 성숙을 허락해주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숙한 믿음은 무엇보다 주변의 유혹과 속임수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 속에서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유혹과 속임수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모든 유혹과 속임수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마음이 되어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도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어요.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더욱 믿음이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성장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더욱 자라야 해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을 위한 훈련

 

저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저의 대답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그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잘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죠.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꼭 필요한데, 그 과정에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나기 위해, 이 두꺼운 성경을 폭넓게 공부하고 깊이 묵상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시간과 더욱 많은 노력을 요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저 식사하기에 앞서 1분 이내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의 깊이를 더하여 하루에 최소한 한 시간 이상 하나님과 기도로 교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성경 66권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보다 더욱 어렵고 고단한 과정인 듯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바꾸어나가기 위해, 성경 66권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보다, 아울러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과정이 하나 더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과정입니다. 기도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가는 것, 우리의 감성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갖는 것, 우리의 의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오랜 시간 훈련 받지 않고는 성장하는 측면이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훈련의 시간을 그 누구의 도움이나 협력이 없이 저 혼자 해내야 한다면 저는 포기하고 말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제 아무리 의지가 강하여 결심한 바는 반드시 행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 혼자서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감성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갖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직분입니다.

 

 

직분의 제정자 예수 그리스도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11-12)

 

여기에는 교회의 직분이 다섯 가지로 등장합니다. ,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직분은 무엇이며, 그것을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지를 논의하는 것은 교회에 별로 유익이 없어요.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분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의 역할은 성도들이 온전하여 지도록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말의 주어는 5가지의 직분자들이 아니라 ‘성도들’이라는 것이 성서주석가들의 중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흔히 직분자들만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직분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로 세워진 사람은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성도들까지도 한 마음이 되어서 서로 힘을 북돋아주고 교회의 성장과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 안에 직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또 연결됩니다. 이것은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한 설명이지요. 성도들 개개인 모두가 다 연결이 되어 서로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의 각 지체들, 각각의 성도들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교회에 직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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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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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그리고 크리스천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놀라운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도 부릅니다. 온 만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 질문에 전도와 선교로 대답할 것입니다.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교회는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모든 노력, 교회의 모든 예산, 교회의 모든 인력을 전도와 선교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 옳은 지적입니다. 교회는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에 앞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가 사회 봉사와 구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온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힘으로 억누르는 통치가 아니지요. 우리 주님은 온 만물을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부름 받은 교회는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 그리하여 주변 사람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하고 아름다운 손길로 봉사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한 모든 노력에 앞서는 한 가지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1-3)

 

에베소서 4장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를 부르셔서 열방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절 뒷부분에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 교회에 약점이나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교회를 사용하셔서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는 위대한 꿈과 비전을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꿈과 그 비전에 참여한 사람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어떻게 지켜요?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놀라운 비전과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열방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족속들에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우리의 모든 마음으로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온 세상에 사랑과 정의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데 결정적인 장애요소가 있으니, 곧 성도들의 마음이 서로 나뉘어지고, 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7)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행하고자 하시는 위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꿈에 집중되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교회가 황폐해져요, 무너집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뒤로 연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 1절부터 10절까지를 설명하면서 많은 성경의 전문가들은 에베소 교회에 성도들 간의 갈등과 다툼이 매우 심하였을 것이라고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역했던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쓰임 받는 교회가 되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지요. 그런데 바울에게 들리는 소식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나뉘어지고, 서로 다투며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였던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사역했던 교회가 다시금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서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하나됨을 지켜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4:4-10)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한 분이시지만,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은혜를 베푸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함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각자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의 개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그보다 더욱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각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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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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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에는 바울의 기도제목, 즉 바울이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도문이 두 번 등장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15-19)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교회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는 에베소교회를 위한 계획과 비전이 있는데,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4-19)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최선을 다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지성과, 자신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였지요. 아울러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간절함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흘렸을 눈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토록 간절히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였던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3:20-21)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며 계획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선언하고는 자신의 입으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적어놓은 구절 바로 뒤에 글씨로 직접 “아멘”이라고 붙여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를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알기 위해 에베소서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그리고 있는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고, 우리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 교회 안에는 화해와 화목의 사건이 일어나며, 우리 교회는 날마다 성장하여 부흥하는 교회되는 그 장면을 마음에 그리며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셨던 것, 소원하였던 것, 꿈꾸었던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하여 기도하였던 그 기도의 제목과 그 기도의 내용 이상으로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본문의 말씀을 읽고, 마지막에 ‘아멘’ 부분은 우리 모두가 한 목소리로 봉독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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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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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면,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4장부터 6장까지를 또 한 부분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6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엇이고, 그 복음이 충만한 교회는 어떠한 곳인지를 밝혀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말씀의 마지막 내용은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3:14-15)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단어가 ‘이러므로’라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오늘 본문 앞 절에서 바울은 바울 자신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기까지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며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가고 계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에베소교회의 일꾼으로 삼아주셔서 바울이 교회의 사역자가 되었으므로,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에베소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바꾸어 가시는 일에 일꾼으로, 도구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교회 행정을 처리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주셨으므로 자신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제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소그룹의 리더로 책임을 맡으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 소그룹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성가대로, 혹은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이 성가대원이나 교사로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성가대원들, 교회학교 학생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그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요,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이 되게하소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서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모든 족속에서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제 아무리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넘쳐흐르는 교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화목이 일어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부흥하는 교회, 그것이 바울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모습은 바로 에베소교회라는 구체적인 교회 현장에서 현실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꿈이 불분명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울이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올려드렸던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교회에 대한 비전의 말씀이 바로 에베소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 - 그 족속에는 에베소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 족속에는 우리 민족도 포함됩니다. - 그 모든 민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입니다.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교회입니다. 그 충만한 은혜 안에서 화해와 화목의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적으로 자라나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곧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현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6-17)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덧붙여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지나놓고 나면 별로 큰 문제도 아닌데, 그때는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우리의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중심이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고, 강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 예수님과 내가 단단히 묶여 있을 때, 우리는 몰려오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의 강건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기도를 따라 우리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속사람의 강건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8-19)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속적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욱 깊은 은혜, 더욱 깊은 사랑, 더욱 깊은 은혜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더욱 깊이, 더욱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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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