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16. 2.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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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를 봉사하는 가운데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현실도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토록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던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에베소교회를 세우시고, 에베소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3:8)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바울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처 죽이는 데 앞장섰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에베소교회를 위한 헌신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헌신은 작은 것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교회를 위한 헌신을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선물과 비교해본다면 한 없이 작은 헌신이요, 한 없이 작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자리에서 눈물로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 교회를 위한 우리의 헌신, 교회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크고 귀한 것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더 큰 것이 아닌가요?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에베소교회를 섬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자신의 헌신과 노력은 작은 것들 중에 가장 작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분명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은혜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 은혜의 감격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헌신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작은 헌신과 봉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중에 지극히 작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 곧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에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헌신,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에 복음을 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2:10)

 

하나님께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는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전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헌신과 수고가 귀한 것이지만 그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한다면 작은 것 가운데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그 수고와 헌신을 사용하셔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에베소교회를 통하여, 물론 에베소교회가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 갈등이 있고 위기가 있고,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에베소교회를 통해 이제는 전 우주 가운데 복음을 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요. 하루하루를 살면서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그때마다 회개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일상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한 순종, 우리의 작은 것들 가운데 가장 작은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인가요? 아무런 흠이나 단점이 없나요?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떠한 흠이나 잘못이 전혀 없었던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시는 것처럼, 연약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아니 더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 개개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고 싶어 하세요.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볍게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 가운데,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낙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속해있는 성도들에게 주눅 들지 말고 가슴을 열라고 당부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3:12-1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단 하나도 없고, 교회를 위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이 완전하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범죄 합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너무도 부족하여 그 누구에게 드러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연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세상에 전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교회를 통해서 열방 가운데, 나아가 공중의 천사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전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연약한 모습을 보았다고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우리 교회에 여러 가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교회를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약한 개인을 사용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연약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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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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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서 1장과 2장을 묵상하는 가운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였습니다.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더욱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네 가지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그려준 교회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울이 그려주었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하죠.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입니다.(1:23) 여기서 충만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의 충만함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과거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과거에는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은혜, 복음의 감격이 풍성한 곳, 그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곳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이제부터 주목하여 들어보십시오.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7)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넘치는 현장,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며, 동시에 예전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안에서 화해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2:14).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물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세대가 제 아무리 흘러도 지속되는 교회 안에서는 서로 불화했던 사람들까지도 서로 화목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바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21) 이 문장의 원문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한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서는 누락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자란다’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자라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위한 바울의 사역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는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도들의 헌신이 함께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한 바울의 노력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전체가 바울의 사역에 대한 말씀이지요.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3:1) 바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로, 그리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일, 곧 에베소교회가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말하기를’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에서는 동사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구절을 적으면서 마음에 큰 울컥거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사를 쓰지 않아요. 아니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신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가 비록 감옥에 갇힌다 할지라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가 말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음 세대에 지속적으로 계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그 풍성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바로 그러한 교회 되기를 바라시나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세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바울과 같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편지를 쓰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서술해주지요.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편지로 써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이전에 바울은 먼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감옥에 갇힐 만큼 헌신하며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죠.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3:7)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어 에베소교회를 위해 충성하였고, 그 결과가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헌신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 바로 그 사역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3:2-6)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사도 쓰지 않고 마음에 울컥함을 가지고 자신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에베소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쓰기도 전에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여러분 경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에베소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던 사역은 바울의 사역이 아니라 실상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마음이 울컥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의 마음을 기록하는 바로 이 장면에서 바울이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역과 자신의 헌신이 제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울은 자신을 사용하여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역, 곧 하나님의 경륜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찬양 <우릴 사용하소서>의 가사는 교회를 위한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 희생과 포기와 가난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바로 이 마음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고 이야기하는 바울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양은 후렴구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위해 희생합니다. 포기합니다. 가난이나 고난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헌신이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참된 교회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을 사용하셔서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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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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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 지난 2005 11월을 기준으로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의 결과가 발표되면서 한국 교회는 개신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5 11월을 기준으로 이전 10 동안 가톨릭이 70% 이상 성장하고, 불교 역시 3%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였지만, 유독 기독교만이 1.6% 감소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전, 미국의 영국 식민지 시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미국 기독교가 성장하는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 출발되었습니다. 책의 영어 제목은 The Churching of America입니다. 그런데 책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제목은 바로 『미국 종교 시장에서의 승자와 패자』입니다.

 

책의 저자인 로드니 스타크와 로저 핑크는 1776년부터 1850년까지 미국의 주요 교단이었던 회중주의와 성공회가 침체하고, 오히려 신흥 교단이었던 감리교와 침례교가 급성장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다양한 원인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가 바로 목회자들의 학력 차이입니다. 당시 미국의 주요 교단이었던 회중주의 목회자들은 95% 대학 졸업생들이었는데 반하여 침례교 목회자는 11.5%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고, 감리교의 경우에는 거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에 대하여 로드니 스타크와 로저 핑크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분명하게, 종교적인 참여는 인구의 교육이 증가하여도 줄어들지 않는다. 대신에 종교가 학자들의 비평과 관심의 초점이 될수록 설교 내용은 점점 세상적이 되어 가며, 점점 확신 없는 설교를 하게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미국의 하버드와 예일에서 공부하였던 회중주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사변적인 학문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감리교와 침례교 목회자들은 비록 대학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있게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의 학력 수준이 올라간다고 하여 교회의 부흥이 저해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으로, 단순한 비평과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원리를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시금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한국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 가운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역시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지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많아지지만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누리는 복음의 삶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려주는 교회의 모습을 단어로 표현하라면, 저는 ‘부흥’이라 표현하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2:21-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 원문에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단어인데 개역개정성경에는 누락되어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단어는 바로 ‘자란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자란다’는 단어를 포함하여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자라나는 곳입니다. 지속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식구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니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흘러넘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성전으로 자라나는 , 바로 부흥의 현장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부흥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이러한 부흥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흥의 기초

 

신약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분명 정체하는 교회가 아니라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미 한국의 기독교는 교인의 숫자가 정체 혹은 침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신약 성경이 부흥하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쇠태하고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의 교회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을까요?

 

교회의 부흥을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의 기초가 분명히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흥하는 교회의 든든한 기초는 무엇일까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 2:20)

 

바울은 교회가 개의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진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도들의 기초이고 둘째는 선지자들의 기초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의 기초는 신약성경의 전통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기초는 구약성경의 전통으로 이해할 있지요. 그러므로 교회의 든든한 가지 기초는 무엇입니까? 신약과 구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퉁이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 신구약 성경의 든든히 기반하여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풍성하게 선포되고, 또한 경험되는 , 바로 그것이 교회의 기본기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기초, 교회의 기본기가 든든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언제든 부흥은 교회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한국 기독교 안에도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이 있고, 전도 세미나가 있습니다. 최근 시작된 어느 전도 세미나에는 일주일 안에 전도를 위한 총체적인 매뉴얼을 교육하는데, 수천 명의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매뉴얼이 중요하지요, 교회의 어떠한 사역이든 매뉴얼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부흥을 바라면서 전도 프로그램, 전도 매뉴얼, 전도 노하우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서 어느덧 사라져버린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부흥의 길은 우리 교회 안에 신구약 성경에 근거한 복음의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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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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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무엇을 생각합니까?

 

과거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과거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바울은 11절과 12절에서 우리의 과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때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제는’입니다. ‘그때는’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

 

 

출애굽기의 구조

 

구약 출애굽기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구조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먼저 야곱이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애집트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언급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물론이요, 그의 아들인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죽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은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 완전히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학대받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인 40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인 회막 만드는 일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막 제작을 완성했다는 기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막 제작이 마치니,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그 성막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40장의 마지막절인 38절은 이렇게 끝이납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성막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회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땅의 이방인이었지요. 노예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지요.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마치는 40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백성의 눈앞에 활짝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기억하다’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지금까지의 삶을 기억해보십시오. 출애굽기 안에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많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도 슬픔과 기쁨이 마구 혼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과거에 우리가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살아가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한 식구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도 이와 동일하다고 확신합니다. 비록 과거에 출애굽기 1장과 같은 모습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출애굽기 1장이고, 최근 며칠, 몇 주에 일어난 상황은 출애굽기 1장의 장면일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넓은 손길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지금도 출애굽기 40장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화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때에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살던 우리를 지금은 하나님의 시민, 하나님의 한 식구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과거의 삶, 곧 ‘그때에’의 삶과 ‘이제는’의 삶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그 차이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화해’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멀리 있던 두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여기에서 멀리 있던 두 대상, 곧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나뉘고 다투던 두 대상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렇게 구별되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헐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상황, 곧 출애굽기 1장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도요, 거룩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한 식구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론, 우리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깨끗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상의 풍속을 쫓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상태로 옮겨왔다는 그 사실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뛰어 넘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그 전에 다투고, 시기하고, 분열하고, 싸우던 대상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화해의 근거 -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과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지독한 분열과 다툼과 미움의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허무시고, 그들이 화평하도록 하셨습니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6-18)

 

예수 그리스도께 오셔서 첫째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곧 이방인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곧 유대인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좋은 소식, 혹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문 헬라어 단어에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살려 표현하면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도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한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 데 있었던 이방인들과 가까운 데 있었던 유대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의 종노릇하고 있던 출애굽기 1장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다듬어질수록 점차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교회 안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구별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 화해하고 평화합니다. 과거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서로 싸우고 대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였지만 그 모든 막힌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허물어지는 바로 그 현장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지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8)

 

그 하나 되는 장소, 그 현장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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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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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독교 일각에서는 크리스천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어휘 중에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용어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독교가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있어서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언듯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이 교회에 출석하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형제, 혹은 자매라는 호칭에 대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 예배 시간에 사용되는 봉독이니, 권속이니 하는 등의 단어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생소한 언어인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몇몇 분들은 기독교가 세상과 더욱 소통하기 위하여 교회의 언어를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언어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작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그 대표적인 단어로 꼭 한 가지를 지적하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은혜’라는 단어를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은혜’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은혜’라는 단어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란 세상 사람들의 용어로 운이 좋은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은혜’라는 개념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듣고 사용하는 그 어떠한 용어나, 그 어떠한 설명으로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기독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선물을 공짜로 받았을 때,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라는 단어를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어 크리스천이 된 사람이 아니면 제 아무리 쉬운 설명을 듣는다 하더라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은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들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인간의 노력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의 감격이 다시금 되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가득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9) 그 누구도 자기가 의로워서, 자신이 거룩하여서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평안함이 없고, 서로 간에 시기하고 경쟁하며 그 안에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 스스로를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서로 비교하며 그 안에서 열등감에 빠지고, 그 안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서로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스스로 교만하여집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모든 비교의식이 사라지고, 비교의식으로 말미암은 교만한 마음이나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은혜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들이 사라집니다. 모든 비교의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경험이 날마다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인간적인 자랑이 다 사라져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비교하며 상처받는 일이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도 다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목적: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우리말 성경에서 ‘만드신 바’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창조물’ 혹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재창조, 처음의 창조가 아닌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범죄 하지요. 결국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재창조의 은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보십시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역사는 온전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선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를 섬기고, 이 세상에서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 그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결심에 결심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흘러 넘칠 때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에 앞장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개인이 혹은 여러분의 식구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을 밝히 비추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라시나요? 그 비결은 잔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고자 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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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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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 3(John H. Westerhoff ) 1976년 기독교교육학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주목받고 있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스터호프 3세는 이 책의 제목에서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질문하고는 그 책의 제 1장 제목을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잡았습니다. 1970년대 당시, 미국 기독교교육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삼스럽게 존 웨스터호프 3세의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에베소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기 원하는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은 신앙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던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넘치는 현장, 바로 그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며, 동시에 교회란 예전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흘러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2: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사도 바울은 단순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한 세대만이 아니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자녀 세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대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가득한 교회, 바로 그러한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가정, 바로 그 가정이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복음의 핵심 3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였지만, 그 은혜를 한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언 어떻게 우리의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가정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대가 세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크게 3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1-3)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일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끊임 없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4)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까?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셧다는 구절 앞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여러분,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긍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허물로 죄로 죽었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깊이, 이 사랑의 넓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사랑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둘째로 또한 함께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1:20).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하늘에 앉히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실감이 나십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단어나,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는 단어나 원문을 보면 분명한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3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새길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반복하여 되뇔 때 세대가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제가 이 땅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진리만큼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만큼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가득 부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복음의 진리가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고, 나아가 우리를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 그 충만하심을 날마다 되새기며 복음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 여러분의 전 생애는 물론이요,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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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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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23)

 

사도바울의 정의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가 충만하여 흘러 넘치는 바로 그 현장이 교회입니다.

 

여기서 충만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 구원의 은혜의 충만함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과거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과거에는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은혜, 복음의 감격이 풍성한 곳, 그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또 요한복음 1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러분, 교회는 바로 충만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곳,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충만함이란 없는 것을 짜내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함께 찬양을 한 곡 부르더라도, 우리가 짧은 시간 한 마다의 기도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서, 복음의 능력이 충만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없는 은혜를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이 참된 교회의 모임이라면, 우리 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우리 교회 안에 은혜의 풍성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넘치는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찬양 한 곳을 하더라도 눈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저 성도들이 서로 만나면 구원의 감격이 나누어집니다. 복음의 능력이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하게 경험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정의하면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바울의 정의에 의하면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에베소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8-19)

 

바울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그 충만하심이 에베소교회에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귀한 진리가 숨겨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큰 감격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참된 교회로 지속적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 어떻게요? - 지속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와 성만찬의 관계

 

저는 이쯤에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전통인 세례와 성만찬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경우에 오해를 합니다. 특별히 성만찬에 대해 오해하죠. 그 오해란 이것입니다. 성만찬은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의식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성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만찬에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건을 나뭇가지가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나뭇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뭇가지가 잘려진 상태로 방치되면 곧 그 생명이 사라지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의 영혼은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며 의식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만일 나뭇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지만, 그 나무로부터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나뭇가지가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나뭇가지는 비록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을 지라도 머지않아 생명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분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을 지라도, 다시 말해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곧 시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접붙여진 가지가 나무로부터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의 영혼이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는 그 현장이 바로 세례라면,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아 누리는 현장이 바로 ‘성만찬’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전통에, 세례와 더불어 성만찬이 위치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을 기념하는 세례는 또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을 경험하는 장소, 바로 그 장소가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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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2. 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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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와 가정은 공통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의 관계가 ‘계약’이 아닌 ‘언약’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어느 가정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자녀가 되고,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됩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계약이 아닙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계약서를 이행하듯이 양육하겠습니까? 또 어느 자녀가 나이 들어 병든 부모를 공양할 때 계약서를 이행하듯이 공양하겠습니까? 그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부모이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배우자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가족으로 대하는 것이죠.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이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지금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혹은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겠노라고 계약서를 썼기에 참석하신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같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형제와 자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 다른 성도들과 서로 같은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자고 계약서를 작성하신 분이 계시면 또 한 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그 누구와도 계약서를 쓴 적이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도 ‘계약’이 아닌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같은 교회의 교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이끌리어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이지 인간의 계약이나 이해관계로 특정한 교회의 성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계약의 관계는 계약서의 조항이 이행될 때에만 효력이 있습니다. 계약 사항이 이행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계약의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관계는 비록 서로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계약이 아닌 언약의 관계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교회와 성도의 관계가 계약의 관계라면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겠지요. 그러나 교회는 계약이 아닌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때로는 너무도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감사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어떠한 내용으로 기도하였는지 그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먼저 에베소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말하지요.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5~16)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곧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에베소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나요? 아닙니다. 에베소교회를 세웠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으니, 그들에게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귀에까지 들렸을 것이고,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바울은 에베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알고 있는 바울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교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다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우리의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바울의 기도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제목도 등장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주셔서 어떻게 하시기를 기도합니까?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니,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모르나요? 하나님을 안 믿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18절부터 소개되어 있지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8-19)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비전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비전은 영광이 아주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 풍성함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요약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그 비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는 교회의 현실에 집중한 나머지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도, 그 비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영광도, 그 비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언약의 관점

 

바울과 에베소교회의 관계는 계약의 관계가 아니라,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계약의 관계로 에베소교회를 바라보았다면,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는 에베소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약의 관계로 에베소교회를 바라보았습니다. 에베소교회의 현재 모습이 바울이 원하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랑과 애정의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에베소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더욱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으로 에베소교회를 바라봅니다. 그러자,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기대와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으로 에베소교회를 바라보자, 하나님의 비전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언약의 관점으로 에베소교회를 바라보자,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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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 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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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족부’라는 이름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하여 새로운 가족이 되신 분들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새가족부’라는 단어의 영어식 표현인 ‘Hospitality Ministry’는 새가족부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새가족부 사역자의 역할은 바로 “환대”(hospitality)입니다.


환대(hospitality)는 병원이라는 단어의 hospital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원을 찾은 환자를 정성껏 받아들이고 돌봐야 하듯, 새가족부 사역자는 우리 교회를 처음 찾은 분들을 환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에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재정상태, 도덕적 자질 등에 따라 환자를 취급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를 상실한 것이겠지요. 새가족부 사역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온 분들이라면 그들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 없이 우리는 그 모든 분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행정 처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 관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맡겨진 한 영혼을 바라보며 그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바로 그 분을 환대하는 것, 이것이 새가족부 사역자로 세워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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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5. 12. 21.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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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교회로부터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신학 논쟁 가운데 하나는 어느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어느 교회가 거짓된 교회인지를 구별할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어느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인정받기 위해서는가지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지 기준이란,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통일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여전히 참된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를 설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참된 교회의 기준으로 가지를 내세웠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것과 세례와 성만찬이 올바르게 실행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별하는 번째 기준은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라도, 안에 복음의 핵심이 빠져있으면 그것은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 이단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안에는 복음의 진리가 빠져있어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단자들의 모임을 참된 교회라고 부를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별하는 번째 기준은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인 성도들이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 나가는 , 바로 그것이 참된 교회의 번째 특징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모임이 있고, 교회 안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고, 교회 안에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온갖 종류의 모임이 있을지라도,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성만찬을 시행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만날 없다면,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이고, 교회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그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떠한 공동체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1 7절을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사도 바울과 에베소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바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7절은 이렇게 읽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3가지 특징이 등장하죠? 1)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서, 2) 예수님의 피로 3) 속량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3) 속량 사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잖아요. 그렇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여,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이 선포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사함을 받은 감격으로 드려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우리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결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1 8절과 9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일도 우리가 결단하고, 우리가 열심을 내고, 우리가 노력한다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있을까요?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주 교회에 모여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이유가 아닌가요?

 

세 가지 기도 제목

 

시간 함께 기도할 세 가지 기도제목을 이렇게 내어놓고 싶습니다.

첫번째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참된 교회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 예배를 참된 예배 되게 하소서. 참된 교회의 기준은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사함을 받은 감격으로 드리는 예배라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셔야 우리가 복음을 깨달을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우리가 복음을 믿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번째 기도의 제목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옵소서입니다. (11-1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우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들의 계획과 인간들의 행동에 따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계획을 세울 , 어떠한 일을 언제까지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그렇죠?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실 , 언제 일을 이루시겠다는 시간표가 없을까요? 우리는 교회가 세워진 것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인 믿습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실 것인데, 역시 우리 인간들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날 바로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을 말하지는 않죠.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들어 사용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기다릴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번째 기도 제목은 우리 교회가 성령 하나님의 증거를 확신하게 하옵소서입니다.(13-14)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하나의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교회가 복음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선포된 말씀을 믿어 구원받은 감격으로 예배하는 참된 교회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때가 언제인지는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인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성령으로 인을, 도장을 새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귀한 도구라고 성령으로 인을, 도장을 치셨습니다.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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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