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선교2016. 12.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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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옛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의 손에 쥐어줄 편지를 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빌레몬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탈취하여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달라는 부탁이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거론한다. 먼저 편지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 자신과 함께 디모데를 언급하고 수신자로서는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 아킵보를 비롯한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온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다(1-2). 뿐만 아니라 편지의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는 에바브라를 비롯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한다( 23-24).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인 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지 빌레몬 한 사람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라는 새가족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아울러 새가족인 오네시모를 기존의 교회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편지를 작성하면서 바울 개인 이름이 아닌 자신과 함께한 동역자들의 이름으로 발송한 것은 새가족 사역이 한 사람의 역할이 아닌 공동체가 협력해야 하는 사역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은 한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다.


바울에게 있어 새가족 사역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동참해야 하는 사역이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새가족 사역은 보다 전문화된 사역으로 훈련받은 몇몇 사역자들의 역할이 되었다. 19세기까지 북미의 기독교에는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 분야가 전문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20세기에 이르러 교회학교, 찬양대, 젊은이 사역 등 보다 전문화된 사역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새가족 사역(ushers or greeters)이 구체화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1] 특별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품 자체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고객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학적 전략이 소개되면서 새가족 사역은 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2]


교회 내의 한 가지 사역이 전문화된다는 것은 전문 사역자를 위한 별도의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훈련 받은 준비된 일꾼만이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각각의 지역교회가 다양한 교육 형태를 견지하고 있지만 새가족사역이 전문화될수록 새가족 사역자를 위한 교육과정의 존재는 필수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새가족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사전 교육일 수도 있고, 새가족 사역자들의 정규적인 기도회 및 세미나가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전문적인 새가족사역자들 사이에 소속감이 형성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새가족사역으로부터 배제되는 경향이 나타난다.[3] 새가족사역의 특성화 및 전문화가 두드러질수록 새가족사역에 대한 장벽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새가족사역의 효율성을 위해 전문화 및 특성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새가족사역은 특정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사역이다. 크리스토퍼 워커 목사는 새가족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의 존재 목적으로부터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로부터 교회는 믿는 사람들만의 모임이라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전도 및 새가족사역은 교회의 중요한 역할일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사명이 주어졌다면 불신자를 전도하고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을 환대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새가족사역은 교회의 핵심 사역이 된다.[4] 그리고 교회는 가능한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존재 목적인 새가족을 환대하는 사역에 깊이 관여하도록 도와야 한다.


새가족사역이 온 교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기에 전문적인 새가족사역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 , 새가족을 환대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역과 더불어 훈련받은 새가족사역자 이외의 성도들도 새가족을 환대하는 일에 초청하는 일이다. 새가족 전도자, 소그룹의 리더, 양육과정의 교사 등은 새가족사역자들의 좋은 동역자들이다. 나아가, 새가족들과 함께 예배하는 여러 성도들을 새가족사역자의 협력자로 초청할 때 새가족사역은 특정인들만의 사역이 아닌 온 교회의 사역이 될 수 있다.




[1] Christopher Walker, Church Greeter 101: Putting the Pieces Together for an Effective Greeting Team and Ministry (Glen Allen, VA: EvangelismCoach Press, 2013) Kindle Edition, loc 207.

[2] Leslie Parrott, Serving as Church Greeter (Grand Rapid: Zondervan, 2002), 11-12.

[3] 새가족 사역자만을 위한 공간 소품의 활용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있다. 

[4] Christopher Walker, Church Greeter 101, loc 265-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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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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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한 평생 로마 제국 전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바울도 나이가 많아졌고 그의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 바울의 몸은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13) 로마 제국 전역에서 바울의 사역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졌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한 사람들 가운데 빌레몬이 있었다. 그는 브루기아에 거주하는 유력한 사람으로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매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인 빌레몬서는 빌레몬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빌레몬 집에 있는 교회에보낸 편지다( 2).[1] 빌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어서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그들을 섬기며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는 많은 종들도 있었다.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빌레몬의 섬김과 헌신을 늘 칭송하였고 그 소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까지 들려왔다( 7).


그러던 어느날, 빌레몬의 집에 있던 종 가운데 한 명이 주인 몰래 도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종이 그 주인의 집에서 도망하는 일이 종종있었는데 로마 제국의 영토가 너무도 넓었기에 멀리 도망하면 주인이 그 종을 찾아내기가 워낙 어려웠던 점도 그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종이 주인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나면 대부분의 종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까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나곤 하였다. 주인의 집에서 도망하다 붙잡히면 어짜피 살아남기 어려우니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를 대비하여 주인의 집에서 자신의 손으로 움켜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들고 떠났던 것이다.


빌레몬의 집에 있었던 종으로 그 주인의 재산을 탈취하여 도망하였던 오네시모는 운 좋게 자신의 모든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주인의 눈을 피해 멀리 도망하였고, 그의 손에는 지금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재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할리 없었다. 자신의 출신을 숨긴 채 좌충우돌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가운데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신분이나 처지는 그대로였지만 오네시모는 하나님께서 빚으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귀한 일꾼이 되었다.


오네시모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과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갈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죄의식이 더욱 깊어졌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사도 바울을 찾아가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했을 것이다. 자신이 브루기아의 빌레몬이라는 주인을 섬기던 종이었으며 그곳에서 도망쳐 나올 때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눈물로 고백하였다.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초지종을 알게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의 손에 쥐어줄 한 장의 편지를 쓴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다.


빌레몬서의 내용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교훈을 던져주지만, 특별히 새가족사역과 관련하여 많은 통찰력을 준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빌레몬의 가정에는 교회 공동체가 있었으며 빌레몬서의 수신자가 빌레몬 개인이지만 동시에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새신자인 오네시모를 교회를 대표하는 기존 신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며 온 교회 성도들이 오네시모를 맞이하며 환영하도록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새가족 사역이란 새로운 신자가 기존의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새가족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의 신자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있다. 사회적 신분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수도 있고, 국적이나 언어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처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아니 만나서는 안되는 사이도 있다. 바로 그때 새가족 사역자는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새가족이 기존 교회의 성도들과 화해하고 새로운 교회 구성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그 가정에 있는 교회가 오네시모를 마음으로부터 영접하고 환대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한장의 편지를 쓴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곧 사도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었다.

 



[1] 빌레몬서의 수신자는 주로 “너”라는 단수로 표시되어 있지만 인사말과 결어는 “너희”라는 복수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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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16. 12. 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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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위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인류의 구원은 한 아기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탄생이라는 의미로 성탄이라 부르죠. 그런데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하는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입니다. 한 아기가 바로 우리에게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 천상에서, 혹은 신비한 어떤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곧 인간 세상 안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a)

 

하나님이신 바로 그분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구절은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한 한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9 6절의 예언처럼 인류의 구원자가 한 아기로 우리에게태어난 바로 그 사건, 그것이 거룩한 성탄의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피상적인 의미 곧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는 날이라는 사실 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행사와 들뜬 분위기에는 동참하면서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는 말씀, 곧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의 삶 깊숙이 찾아오신 사건이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성탄절을 맞이하여 온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개인의 마음 속에 영접하지 않는다면 2016년의 성탄절 역시 매년 찾아오는 그저 12월의 한날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9 6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1531년 성탄절 설교에서 이사야 9 6절을 본문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주어졌습니다’. ‘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그는 우리에게, 우리 손에 주어진 선물이라는 말입니다.”[1]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았지요. 생명을 선물로 받았고, 필요한 물질과 건강과 가정과 친구와 교회와 그 밖에 수많은 것들을 우리는 선물로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탄생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승천은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재림은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광이 되는 것입니다.

 

올해의 성탄절을 기다리며 2000년 전 예루살렘의 마구간으로 오셨던 그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을 열여 영접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되십니다.

 


[1] 마틴 루터,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1531 12 25일 성탄절 오후 예배 설교), 권진호 역, <그말씀>, 20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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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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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2. 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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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오후 5시에 심방하기로 약속하셨는데 갑자기 오전 10시에 목사님이 도착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당장 청소하고, 음식 준비하고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39)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는 특권 중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주방일에 집중하면서 그의 마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와 같은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처음에는 기쁨과 감사로 시작했지요.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분주해지죠.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41-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는 일차적으로 음식의 숫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지 음식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의도하신 바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이 그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39)

 

예수님 당시 여성은 율법 교육의 대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그 어떠한 율법의 교사도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였던 한 여성에게 집중하여 말씀을 전하거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라는 한 여인의 집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만난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는 예수님의 모습.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도폭발은 수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전도의 모습은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지난 달 전도폭발팀 25명이 경기도 양평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5명의 잘 훈련된 팀이 2 3일 동안 전도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보고해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통계를 보면, 전도폭발팀 25명이 2 3일 동안 복음을 전한 사람의 숫자는 고작 36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치듯 지나가며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분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분의 삶과 그분의 생각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소개하고, 또한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몇 명만 만나든지 혹은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해도 충분하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사역,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사역을 꿈꾼다면 그 열매는 보잘 것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에게 이것 저것 많은 것, 풍성한 것, 사람들이 칭찬할만한 어떤 것으로 준비하려다 그 마음만 분주했던 마르다의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으로 의미 있는 몇가지, 아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로 그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안내하는 바로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분주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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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6. 12. 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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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기독교의 신학적 자기 반성은 축소주의’(reductionism)을 피해갈 수 없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사회 구원을 비판하며 구원의 총체성을 개인 구원으로 축소시켰다. 교회의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못한 채 교회는 영적인 영역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원론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복음주의 기독교는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교회의 하나님, 혹은 믿는 자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하였다. 물론, 복음주의 기독교가 구원론, 교회론, 창조론에 있어서 통전적인 이해를 시도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신학적 축소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
국내도서
저자 : 스티븐 커트
출판 : 에클레시아북스 2013.04.18
상세보기

 

영국 뉴 몰든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 in New Malden)의 교구 목사인 스티븐 커트(Stephen Kuhrt)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Tom Wright for Everyone)에서 복음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자신이 품을 수 밖에 없었던 신학적 질문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소개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소망이라는 것이 단지 죽음 이후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교회의 사회 참여는 교회의 복음전파와 동등한 중요성이 부여될 수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개인적인 죄에만 의미가 있고 구조적인 죄와는 무관한가 등이다( 2). 스티븐 커트가 제시하는 의문들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복음주의 교회의 축소주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만일 복음주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축소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회자라면 스티븐 커트와 유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에 존재하는 축소주의라는 신학적 결점을 인정한다면,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축소주의를 극복하고 통전적 목회(holistic ministry)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통전적 목회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요구한다. 어떤이들은 존 스트토(John Stott)를 중심으로 한 로잔언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이들은 에큐메니컬 정신(Ecumenicalism)에서 그 신학적 원동력을 구할 수도 있다. 스티븐 커트는 통전적 목회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톰 라이트(Tom Wright)의 성경신학에서 찾는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 관점에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창조 세계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신약 성경의 중심 주제들 회개, 속죄, 부활, 천국, 종말 등 을 재해석한다.( 3장 참고) 스티븐 커트는 이러한 톰 라이트의 신약 신학을 근거로 다양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통전적 접근을 시도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회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스티븐 커트의 노력을 소개하는 책이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이다.

 

복음주의 전통에서 목회를 하면서 축소주의 경향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통전적 목회를 실천하려는 혹은 이미 실천하고 있는 스티븐 커트의 노력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게다가, 자신이 추구하는 목회의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톰 라이트의 신학을 적용하는 것도 좋은 시도로 볼 수 있다. 영국이든, 한국이든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목회에 있어서 보다 통전적인 신학적 확대를 추구하려면 스티븐 커트가 그러하듯 분명하고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찾아 그것을 자신의 목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 라이트의 신학을 자신의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숙고가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 대한 저자의 분명한 입장이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이나 샌더스(E. P. Sanders) 등의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바울의 새 관점은 바울 신학을 1세기 유대교 전통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바울의 새 관점에 의하면, 1세기 유대교에는 행위를 통한 구원을 추구하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고 이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율법에 대한 준수를 추구하는 유대교 전통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이러한 유대교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주장이다. 바울의 새 관점이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은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강조하는 유대교 전통에 서 있었다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듯 유대교는 행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는 도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두 종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도 사라진다. 그런데 톰 라이트의 신학은 넓게 보아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이것이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와 복음주의 학자들이 톰 라이트를 비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톰 라이트의 신학을 목회 현장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톰 라이트의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최소한 톰 라이트가 동의하는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내용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스티븐 커트는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에서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논의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칭의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톰 라이트가 바울의 새 관점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그것도 괄호 안에 언급한 정도이다(101). 물론, 바울의 새 관점이 이 책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티븐 커트 자신이 톰 라이트의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톰 라이트의 신학이 자신의 목회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그 전 과정을 보여주는 책에서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밝히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라 하겠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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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16. 11. 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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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요,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의 순서를 채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지금도 듣고 계시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과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사랑이라는 감정은 멀리서 동경하거나 그저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하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을 우리의 마음에 들려주기도 하시죠.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과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한 평생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우리는 많은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도의 제목이 그 즉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도 때로는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을 주실 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응답을 언제 주실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한마디 한마디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혹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의 한 평생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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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6. 11.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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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꼭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그것이 선행조건이 되어야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 좋은 일이죠? 구약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죠? 그래서 유대 출신 교사나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겠지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할 것은 해야지!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확신 속에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와 선교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은 없을까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요. 그래서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을 위한 목적이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 사도가 드디어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베드로와 동고동락하셨지요.

여러분, 인류역사에서 베드로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린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했어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3년 동안 풍성히 받아 누렸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선택하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와 목적이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즐겁고 기쁘신가요? 여러분, 오랜 시간 교회를 출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고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간증이 풍성하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여 주시고 교회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 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 수록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이제 베드로는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선언을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수긍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지난 수천년 동안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고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을 성수하고, 여러 가지 기도회에도 참여하고,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하신다고요? 그것이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아직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과의 차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했을 지라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

 

신앙생활을 10, 20, 30년을 하신 분들 혹은 교회를 위해 대단히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나 이제 막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이나 이제 등록한 새가족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울러, 교회를 위해 온갖 봉사와 충성을 다 바쳤던 분이나 이제 교회에 막 등록한 분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하게 권면 했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 모두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불신자나 새가족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신앙의 경륜 등을 가지고 새가족과 불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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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16. 6.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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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고귀한 희생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순교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죽음을 당한 이유– 곧, 죽음의 원인, 그들의 사명, 그들의 활동 – 가 그들을 순교자로 만든다.[1] 그런 점에서 순교에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을 순교자로 만드는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들의 삶이다. 베드로전서 219-20절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한다. 고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삶이 고난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그들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에 대한 탐구이다. 죽음의 한 순간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을만큼 그들의 기나긴 삶의 여정을 통해 추구하였던 궁극적인 가치를 쫓아가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순교자(martyr)라는 영어 단어는 증인(witness)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단어로부터 유래하였다. 사도 요한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언명하였을 때, 요한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점에서 그는 이미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었다( 1:9).[2]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순교한 사람들 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증인의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리비아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 선교사 로니 스미스(Ronnie Smith)의 순교가 있은 후, 그의 아내 애니타 스미스(Anita Smith)는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 애쉬랜드대학교(Ashland University)의 종교학 교수 크레그 호비(Craig Hovey)순교자는 한 사람이지만, 증인은 두 명”(one martyr but two witnesses)”이라고 평가한다.[3] 동일한 논리를 전라남도 신안군에 증동리교회를 비롯한 10여개의 교회를 설립한 문준경 전도사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녀는 기독교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한 사람의 순교자로 마치지 않았고, 그의 사역은 수많은 증인들 –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 등 – 을 배출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순교에 대한 각오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교자들의 삶을 탐구하는 이유는 그들을 순교자로 만든 참된 이유, 곧 그들의 증인된 삶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1] Craig Hovey, “Being and Witnessness: Minding the Gap between Martyrs and Witnesses,” Anglican Theological Review, 97 no 2 Spr 2015, 265-6.

[2] 요한계시록 1장에 등장하는 증인 의미에 대해서는 N. T. Wright, Revelation for Everyon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4 참고하라.

[3] Craig Hovey, “Being and Witnessness: Minding the Gap between Martyrs and Witnesses,”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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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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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적고 있을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사정은 어때요? 평안한가요? 만사 형통인가요?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정이라는 것이 뻔해요.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리면, 그 소식이 교회 성도들의 위로가 될 거라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겠습니까?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 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나,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고 있으나 그 안에서도 에베소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과 얼마나 깊이 만나고 있는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알려지면, 그것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위로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평안한 일만 있겠어요. 신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삶 가운데 힘이 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잖아요. 그러한 간증이 우리 교회에 풍성하고, 그 간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기고 –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에베소에 보내죠. 그의 이름이 바로 두기고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6:21-22)

 

저는 사도 바울에게, 그리고 에베소교회 안에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죠.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 그렇다면 두기고가 사랑을 받는 형제이며,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삶이나 그분의 사역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두기고가 교회에서 말을 전하면 그 말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고, 얼마나 언어에 절제가 있었는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두기고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 저 두기고가 사도 바울 자신의 상황을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면 그것이 나쁜 소문으로 돌아가거나 바울에 대한, 교회에 대한 염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왜 이리도 소문이 빠른지요. 소문이 빠를 뿐만 아니라 소문이 돌면서 없던 사실이 마구 덧붙여지죠. 교회 안에는 언제나 마음에 큰 고민이 있는 사람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 인간 관계로 말미암아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교회 안에서는 나누어지고 서로 기도해주거든요.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누군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퍼트려요.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확대되면서 그 당사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두기고와 같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요, 원래부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상황에 관심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위해 걱정해주고 기도해주는 공동체가 교회잖아요. 그렇다 보니 한 순간 말을 잘못 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소문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에베소교회에는 두기고와 같은 ‘사랑을 받고,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상황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 그러한 직분자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울 – 교회를 위한 기도의 사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6:23-24)

 

어떤 분들은 바울의 서신에 언제나 이와 비슷한 축복의 문장이 등장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정해진 형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대동소이한 축복의 말로 마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진심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열심과 열정이 그 정도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에베소교회에 가득하기를 원하는 사도 바울의 진심이 이 마지막 인사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로서 ‘교회를 위한 기도’ 시리즈 설교는 마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은 우리 교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 없이 기도하는 기도의 일꾼들이 되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 없이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에베소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하였던 사도 바울의 바로 그 마음으로,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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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16. 3. 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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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에게 언젠가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일반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만약 저에게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1]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E. M. 바운즈는 자신의 책,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아니요, 기발한 방법도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기계에 임하지 않고 사람에게 임하신다. 성령은 계획에 기름을 붓지 않고, 사람에게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2]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곧 에베소서의 마지막 권면의 말을 적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하라’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권면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까?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는 점입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 혹은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 기도에 집중하였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기도 생활이 나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사실, 우리의 삶에 집중적으로 기도가 필요한 시기가 있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실 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항상’ 기도하라는 것이고,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기도의 생활이 슬럼프에 빠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영적으로 슬럼프에 빠져계시면 그때 더욱 기도해야 하고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지려 할 때 기도의 줄만큼은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하지 않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어 사단은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 순간 뜨겁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뭐지요? 지속적으로 기도에 힘 쓴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습니까? 아니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어쩌면, 한 순간 내 인생에 큰 어려움이 찾아올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나, 나의 삶이 평안할 때나 상관 없이 지속적으로 기도 생활에 힘쓰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개인이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의지력을 가진 사람으로는 거의 불가능해요. 그런데 교회 안에는 지속적인 기도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에 기도의 불이 지펴지면 항상,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왜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어요? 왜 교회는 모든 모임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칩니까? 그 이유는 단순해요. 교회에는 언제나 정기적인 기도 모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언제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편안하게 교회를 찾을 수가 있잖아요.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성도 개개인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성도들 개개인이 기도에 능한 사람들이 된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고, 기도에 능한 교회가 된다는 의미는 우리 교회 안에 다양한 기도의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서 뜨거운 기도의 열기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지, 곧 기도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를 설명합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어느 목사님께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참으로 진솔한 고백을 하신 적이 있어요. 교회에서 새벽기도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남아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은 새벽기도가 끝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에 더 많이 기도하고 싶고, 더 깊이 있게 기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더라는 거에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개인이 오랜 시간을 갖고 깊이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진솔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께서 새벽 시간에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하나 찾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일까요? 새벽기도가 끝나면 성경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찬송가를 다시 펴는 것도 아니고, 바로 교회 수첩을 꺼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역별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거에요. 교회 수첩을 보고 기도하다 보니, 오늘 기도해야 할 목록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더랍니다. 시간만 빨리 지나는 게 아니라 기도의 깊이가 더해지더라는 겁니다. ,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의 능력입니다.

 

 

목회자를 위한 기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으로는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를 말씀하셨죠. 그리고 중보기도의 중요한 대상으로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6:19-20)

 

바울의 이름 앞에는 하나의 호칭이 따라다닙니다. 그 호칭은 바로 ‘사도’라는 것이죠. 사도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 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부족하지 않은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에 능통하였고, 로마의 시민으로서 로마의 통치권이 유효한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의 편지를 보면 그의 언어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도 받았고, 그 개인에게 충분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중요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저 역시 여러분에게 동일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신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고,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1] 이한진 편역, 『열매 맺는 기도』 (서울: 겨자씨, 2006), p. 13.

[2] E.M.바운즈, 이정윤 역, 『기도의 능력』 (서울: 생명의말씀사),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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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