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0. 5. 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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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전은 우리말로 사명이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심부름인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다시 말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명이나 비전의 시작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야망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야망의 시작점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시편 34편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하였다.(삼상 21장 참고) 그런데 다윗이 얼마 전 전쟁터에서 죽였던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 장군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겨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던 것처럼, 블레셋에서는 다윗이 블렉리스트 1호였던 것이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려야 했다.(삼상 21:13) 시편 34편은 다윗이 생존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포기했던 이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선언한다.(10절)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해야 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시편 54편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번에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십 황무지에 숨었을 때다. 십 사람들이 다윗이 그곳에 이른 것을 알고 사울에게 밀고한다.(삼상 23장 참고) 그들은 왜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알렸을까? 얼마 전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으로 가는 길에 아히멜렉 제사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지자, 그는 가차 없이 아히멜렉 제사장과 놉의 모든 제사장들을 죽여 버린다.(삼상 22장) 이 사실이 온 이스라엘에 퍼진 것은 물론이요, 지금 십 사람들 역시 다윗을 보고도 그 사실을 사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제 사울 왕의 눈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의 눈도 피해야 할 위기에서 하나님을 “나를 돕는 분”으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한다.(시 54:4)  

시편 57편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사울의 추격은 계속되고, 다윗은 피하고 피하여 결국 굴속에 들어간다.(삼상 24장 참고) 사울은 다윗이 그곳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발을 가리기 위해 굴속으로 들어온다. 이때, 다윗의 신하들은 사울을 죽여 버리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난리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으셨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는다. 이때를 배경으로 하는 시편 57편에는 다윗의 꿈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사울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는 것이 그의 진정한 꿈이었다. 이 꿈을 위해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울 왕을 죽일 수 없었다. 

시편 51편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영토를 회복하는 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는 일, 그곳으로 하나님의 성막을 옮기는 일, 사울의 남은 가족을 돌보는 일 등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다윗이 그만 실수를 범하고 만다.(삼하 11-12장 참고) 다윗이 젊은 시절 온갖 위험 속에서도 바르고 정직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다윗에게 평안한 때가 찾아오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조금씩 멀리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때 다윗이 철저히 경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는 경험, 성령을 거두시는 경험이었다. 

시편 3편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다윗의 인생 말년에 있었던 사건이다.(삼하 15-18장 참고) 다윗이 젊었을 때 당했던 고난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고히 사울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하나님은 무고히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그를 훈련시키셨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당하는 고통은 그 자신의 허물, 곧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죄의 대가였다.(삼하 12:10-11)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 자신의 죄로 인한 그 상황을 달게 받는다. 그는 밤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다는 사실로 알고 감사하고 있다.(시 3:5) 인생 말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시편 18편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다윗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양을 돌보던 일,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들었을 때의 격분, 그리고 그와의 한판, 계속되는 사울의 위협과 그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 결국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삶. 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징물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시편 18편은 사무엘하 22장에서도 대동소이하게 소개되어 있다. 

 

 

비전의 사람들 _ 01 "아브라함 "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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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2 "요셉"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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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3 “모세”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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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4 “다윗”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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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5. 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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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전은 우리말로 사명이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심부름인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다시 말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명이나 비전의 시작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야망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야망의 시작점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요셉의 시대에 야곱의 가정이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에 거주한지 약 430년이 지났고, 어느덧 야곱의 가족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다.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옮기는 작업을 착수하신다. 이 일에 쓰임 받은 사람이 바로 모세다. 한 마디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받은 사명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라.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에게 좋은 땅을 주시는 데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집트 제국에서 이끌어 낸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기 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되는 것이 모세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참된 비전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전을 선포하신 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조목조목 알려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팠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 뚜껑을 잘 만들어 덮어두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소나 나귀가 지나가다가 미처 구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빠졌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구덩이를 판 사람이 배상을 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짐승을 받는 버릇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주인은 사전에 소를 단속해야 한다. 만일 그 소가 다른 짐승을 받아 죽였다면 주인은 이를 보상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만한 여지가 있다면 내가 먼저 예방하는 것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어떤 사람이 밭에 곡식을 심어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그는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온통 풍성한 곡식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밭에서 곡식을 수확할 때 밭의 모퉁이에서 자란 곡식과 떨어진 이삭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과 그 지역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자연스러운 나눔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노력하여 정당하게 얻은 소득이다. 그러나 소득의 전부를 내 것으로 취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과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율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짐승을 잡아먹는 것을 금지한다.(레 17:3-4)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이 키우는 가축을 잡아먹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한다. 특별히 “화목제”라는 방식을 통해 제사를 드리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일반 백성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레 3장 참고) 
어떤 부자(富者)가 소고기가 먹고 싶었다고 하자. 그래서 소를 한 마리 잡아서 하나님께 화목제로 드렸다. 이제 그 제물에서 피와 기름을 제거하고 구워 먹으면 된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 제물은 그날 당일에 다 먹으라고 명령한다. 만일 그 제물이 서원의 제물일지라도 이틀 안에 고기를 다 먹어야 한다. 
보통 소 한 마리를 잡으면 600근의 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600근의 소고기를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이 하루나 이틀 사이에 다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소를 잡은 부자(富者)는 그 고기를 공짜로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오늘이 지나면 먹을 수 없는 고기를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사겠는가? 자신에게 소를 잡을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A라는 사람은 재력가이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은 재물도 권력도 없다. 만일 B라는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A라는 사람을 쳤는데, 그만 이가 부러졌다고 하자. 아마도 B라는 사람은 오랜 시간 감옥 생활을 하든지 A라는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상황을 바꾸어 A라는 사람이 너무도 화가 나서 B라는 사람의 이를 부러트렸다. 이후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아마 A라는 사람은 자신의 재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므로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의 이를 부러트릴 가능성이 B라는 사람이 A라는 사람의 이를 부러트릴 가능성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트린 사람은 그가 누구든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의미다. 아무리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트렸다면 그 자신의 이도 부러져야 한다. 만일 이 율법이 철저하게 지켜진다면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때리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폭력을 고스란히 자신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힘없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크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다.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 힘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이다. 

 

 

비전의 사람들 _ 01 "아브라함 "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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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2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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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3 “모세”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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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4 “다윗”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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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20. 5. 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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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전은 우리말로 사명이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심부름인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다시 말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명이나 비전의 시작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야망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야망의 시작점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꿈을 꾸었다. 그 꿈이란 열 명의 형들, 나아가 부모님까지 그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이로써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셉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쓰라린 경험을 한다.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찾아갔고 형들은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린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보았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그의 꿈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약 십 년이 지났다. 요셉의 나이도 스물일곱 혹은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이십대 청년 요셉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그의 잘못으로 감옥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보디발 아내의 악랄하고, 비열한 술책에 넘어갔다. 십 년 전, 형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했고 아직 그 아픔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억울한 일을 당해 감옥에 갇혀있다. 과연 내일에 대해 어떠한 꿈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 요셉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꿈의 해석과 성취 역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믿음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을 시중드는 일을 했다. 그 감옥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왕의 미움을 받아 잠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요셉이 이집트 왕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을 시중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요셉이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 들어가 보니,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우거지상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묻는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지난밤에 뭔가 의미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해석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이때 요셉이 한마디 던진다. “해석은,” 꿈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창 40:8) 

십년십 년 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요셉은 알지 못했다. 요셉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억울하고, 가슴 답답한 일만 계속 일어난다. 그때,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지만, 나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께는 내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이 있을 것이다. 십 년 전 나에게 주셨던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요셉에게 있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아닌 자신의 야망을 따라가는 사람이었다면 형들이 자신을 팔아버렸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교활한 올무에 빠뜨려 감옥에 가두었을 때 자신의 꿈과 야망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았던 그는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간다. 

요셉이 모진 고생을 딛고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지 9년이 지나 그는 형들을 만났다. 그리고 오래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꿈을 드디어 해석할 수 있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형들이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버렸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있었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십칠 세의 소년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꾼 이후 그 꿈의 해석을 아는데 약 이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기간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집트와 그 주변 지역에 칠 년의 극심한 가뭄이 몰려올 때 요셉을 통하여 이집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비전이 전해져 내려오는 아브라함 가족이 큰 민족을 이루는 장소로 이집트의 고센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위해 요셉은 반드시 이집트로 가야 했고, 형들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는 나를 향하신 비전이 있고, 그 비전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비전의 사람은 요셉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비전을 믿기 때문이다. 

 

 

비전의 사람들 _ 01 "아브라함 "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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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2 "요셉"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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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3 “모세”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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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4 “다윗”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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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20. 5. 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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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비전은 우리말로 사명이다. 사명의 사(使)자는 심부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심부름인가?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다시 말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명이나 비전의 시작점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야망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야망의 시작점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주한다.(창 12:1-4)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지역은 우르다. 우르를 출발하여 하란에 이르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다시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자, 그렇다면 우르, 하란 그리고 가나안이 어떠한 지역이었는지 살펴보자.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를 기억하는가? 역사가들은 황하 강 유역의 황하 문명,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그리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라고 부른다. 당시, 최첨단의 문명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네 지역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시대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자란 ‘우르’와 잠시 자리를 옮겼던 ‘하란’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75세까지 세계 최고의 문화적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주하였던 가나안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를 벗어난 지역이었다. 아브라함은 번화한 대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한 것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주변에 큰 강이 있었다. 강물의 범람을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결국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우르와 하란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자 기근을 경험한다.(창 12:3)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대도시가 아닌 시골로 아브라함을 보내셨을까?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의 내용이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다. 아브라함만 부자가 되고 최고의 문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이다. 이 비전을 위해 아브라함은 모든 문화적 혜택을 뒤로하고 시골 동네로 떠나야 했다. 

둘째, 그렇다면 왜 도시가 아닌 시골인가?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민족이 참된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먼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이 넘쳐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초일류 문명 사회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곳에 기술문명이 있고, 편안한 삶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삶은 없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바로 그 시골 동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갈 것을 명령하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도시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우리의 꿈이 비전이 아닌 야망이라면 우리는 도시로 가야하고 일류 대학에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야 하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과 직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은 도시에서만, 일류 기업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어디서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비전은 시작된다. 

 

 

 

비전의 사람들 _ 01 "아브라함 "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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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2 "요셉"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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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3 “모세”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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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들 _ 04 “다윗”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전(Vision)과 야망(Ambition)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과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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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4. 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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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

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트 코로나, 곧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예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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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전 세계적 유행은 목회 활동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곧, 교회의 친교와 전도 활동은 위축됐지만 예배와 교육에 목회 역량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설교자의 역할 가운데 설교와 강의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대두되고 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의 목회적 변화와 준비"라는 글의 핵심 내용이다. 그렇다면 목회적 관점이 아닌 성도의 관점에서 코로나 시대의 변화는 무엇이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코로나 시대, 신앙생활의 변화 

지극히 상식적인 측면에서 시작하자. 코로나의 확산은 성도들의 교회 활동을 위축시켰다. 이는 성도들의 '참여'가 급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동안 성도들의 관점에서 급증한 것이 있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코로나가 확산되던 시기, 교회의 문은 닫혀있었지만 교회의 모든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다. 목회자들은 여전히 교회를 지켰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찾았다. 매주 예배 영상을 제작하고, 가정 예배 순서지를 배포하며 신앙생활을 위한 다양한 비대면 자료를 쏟아내고 있다. 유튜브에서 '예배'나 '성경 공부'를 검색해보라. 끝을 알 수 없는 콘텐츠 목록이 등장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 목회 활동은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성도들의 관점에서 신앙의 '참여'는 줄었지만, 신앙의 '자료'는 넘쳐난다. 

코로나 시대는 목회자에게 설교와 강의 역량을 요구한다. 목회 활동이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는 성도에게도 나름의 역량을 요구한다. 무한 공급되는 신앙의 자료를 자신만의 시간과 자신만의 장소에서 스스로 활용하여 믿음을 유지하거나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이다. 한 마디로, '개인의 경건'이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개인의 경건 생활은 성도에게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경건 생활이 부족하더라도 이를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교회 활동의 '참여'다. 그런데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코로나 시대는 개인의 경건이 신앙의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를 보내며 자신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성도들이 있다. 신앙의 '참여'는 줄고 그 대신 신앙의 '자료'가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신앙생활이 나태해진다는 성도들도 있다. 신앙의 '자료'만 풍성해졌지 신앙의 '참여'가 없기 때문이다. 마주친 현실이 같은데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다. 개인 경건의 차이다. 

 


코로나 시대, 교회의 역할 

코로나 시대는 성도의 참여가 불가능하여 신앙생활이 개인 경건에 좌우된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는 교회가 미래를 걱정하거나 기대하는 이유다. 코로나 이후 교회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개인 경건의 강조가 성도의 영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가 폭증하고 성도 개인의 영적 갈망이 이를 수용한다면 미래의 기독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다. 반면, 코로나 이후 교회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성도의 개인 경건을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자료'만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교회 출석의 급감을 우려한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교회의 미래에 대한 섣부른 기대도, 때 이른 걱정도 잠시 미뤄두자. 다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한국 교회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성도의 '개인 경건'이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안타깝지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지금은 교회가 개인 영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다. 그래서 교회와 목회자들은 '자료'를 쏟아놓는다. 코로나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 자료를 제작하고 배부하면서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 자료만으로는 성도의 개인 경건이 고양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자료 제작에만 온 힘을 쏟지 말고, 코로나 이전의 목회를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성도 개인의 경건이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목회 활동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그 평가에 근거하여 코로나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교회는 변화를 꾀해야 한다. 지향점은 뚜렷하다. 목회자에게는 설교와 강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요, 성도에게는 개인 경건을 함양할 수 있는 목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목표가 정해졌고 지금까지의 목회 활동을 철저히 평가했다면, 이제는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기술이라는 것이 TV와 인터넷 정도였지만 교회는 온라인 예배가 기존의 예배를 대체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영국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하나님께서 친히 디자인하신 최고의 시청각 자료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회중 앞에 서 있는 목회자요, 둘째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다. 아무리 매스미디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이 두 가지가 복음을 전파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각주:1]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교회는 또다시 온라인 예배를 고민한다. 수많은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여 게시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 무한 공급되는 '자료'는 하나님께서 계발하신 도구를 결코 뛰어넘을 수도, 대체할 수도 없다. 코로나 시대의 교회가 목회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성도 개인의 경건을 고양하기 위해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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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예배 출석 및 헌금 - 일반적 통념을 검증한다 -

올해 상반기, 한국의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줄었으며, 헌금액은 어떻게 변했을까? 최근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배 출석과 헌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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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 "탄식"

거대한 재앙을 맞이할 때 기독교인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신학적 응답이다. 쉽게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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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The Challenge of Preaching Today (Grand Rapids: Eerdmans 1982), 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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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4. 1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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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비드(Post-COVID).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된 세상을 일컫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수많은 지식인이 포스트 코로나, 곧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예측하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떤 이들은 교회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을, 어떤 이들은 보다 긍정적인 예측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에 이와 관련된 미래 예측이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측이 많으니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후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 그 가운데 무엇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인지는 지금 시점에서 판단할 수 없다. 구약의 전도자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전 7:14) 

포스트 코비드 혹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와 목회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한두 달의 경험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코로나19의 확산이 목회 현장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였는지는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미래에 대한 예측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두었다. 


코로나로 인한 목회 변화 

전통적으로 교회의 역할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한다. 예배, 교육, 봉사, 전도, 친교. 이 가운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 가지 영역으로, 곧 친교와 전도다. 지역교회의 부목사 가운데 친교와 전도 관련 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은 2020년 상반기 대부분의 사역에서 손을 놓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민하고 대안을 찾으려 해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친교와 전도를 시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회의 활동 가운데 봉사는 친교와 전도에 비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기존의 방식은 아니다. 어르신,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은 많이 위축되었지만, 코로나 피해가 가장 큰 대구 지역에 방역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봉사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과 방식이 변했지만 봉사 활동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의 다섯 가지 역할 가운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교회의 목회 역량이 오히려 집중되는 영역이 있다. 곧, 예배와 교육이다. 코로나의 집단 감염과 관련하여 교회의 예배가 중요한 이슈를 형성하고, 오프라인 혹은 집합 예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으니, 이러한 시기에 여러 분야의 사역에 흩어졌던 목회 역량이 먼저는 예배에, 그리고 교육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오프라인 예배가 불가능한 시기에도 모든 교회가 - 결코 예외가 없을 것이다 -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를 시행하고 있다. 

친교 및 전도 활동이 멈춰선 가운데, 예배는 새로운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기에 교회의 모든 역량은 예배에 집중된다. 온라인 예배는 예배 현장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과정이 필수다. 많은 교회는 예배 영상을 제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더라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도들이 오프라인 예배에 참여하고, 이를 영상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예배 준비에 있어 참석자에 대한 사전 확인, 예배 참여 전 발열검사 및 손 소독, 전교인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예배 안내 등 예배준비는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온라인 예배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교회는 온라인을 통한 교육 활동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학교가 온라인으로 개학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교회의 새로운 교육 활동을 자극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은 지난 한두 달, 가장 크게 위축된 교회의 목회 영역은 친교와 전도다. 반면, 교회의 역량은 예배와 교육에 집중되고 있다. 


더욱 중요해진 목회 역량 - 설교와 강의 

코로나19의 여파로 목회 영역에 따라 위축과 집중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목회 역량이 무엇인지는 드러난다. 곧, 설교와 강의다. 코로나 이전에도 목회자에게 설교와 강의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목회라는 활동은 흔히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다각화된 활동이다. 설교와 강의가 중요하지만 행정력, 친화력, 공감능력, 긍휼히 여기는 마음, 운영능력, 전도의 은사, 찬양의 은사 등 목회자의 역할은 참으로 다양하며 교회와 성도들은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목회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는 목회 활동의 양극화를 가져왔고, 그 어느 때보다 설교와 강의가 중요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지속되는 지금, 목회자들은 다시금 자신의 목회 역량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 집중해서 훈련할 목회 역량이 있다면 단연코 설교와 강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지난 한 두 달의 변화와 같이 예배와 교육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중요할 것이라고 쉽게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교회의 활동 가운데 끝까지 지속될 영역은 예배와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미래를 예측하기에 앞서 목회자로서 자신의 설교 능력과 강의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준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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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18. 5.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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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보완성이라는 개념은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폴 밀그롬(Paul Milgrom) 교수와 존 로버트(John Roberts) 교수가 제안한 개념이다. , 기업들의 성공을 분석할 때 하나의 요소가 다른 요소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업이 내린 중요한 결정들 사이의 연결관계 (상호보완성)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촘촘하게 묶인 결정들의 집합이 하나의 경영 전략(strategy)이 된다.[1] 상호보완성과 대비되는 개념은 모방이다. 우수한 조직이나 단체를 따라잡기 위해 그들의 결정이나 선택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한 결정은 하나의 전략으로 묶여 있기에 그 가운데 일부를 모방한다고 기대했던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하버드대학교의 바라트 아난드(Bharat Anand) 교수는 상호보완성의 구체적인 예로 월마트(Walmart)의 성공을 꼽는다. 월마트는 매장을 관리하는 지역사무소를 폐쇄하여 비용의 2%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월마트의 이러한 결정은 물류를 관리하는 IT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그만큼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물류회사가 IT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채 월마트를 모방하여 지역사무소를 폐쇄한다면 비용 절감의 효과를 얻지 못할뿐더러 매장의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또한, 월마트는 도시보다는 외곽 지역에 매장을 열어 다른 업체와의 경쟁을 최소화하였다. 월마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 역시 특정 지역을 담당하는 창고와 유통센터를 건축하고 그 지역 안에 매장을 모아 놓았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이번에도 어느 유통회사가 월마트를 그저 모방하여 유통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외곽 지역에 매장을 연다면 제품을 공급하는 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회 현장에서도 이른바 벤치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목회 방식을 흉내 내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는 성공한 프로그램이 우리 교회에서는 신통치 않다는 경험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그 이유도 상호보완성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벤치마케팅은 모방의 일종이다. 그러나 상호보완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특정 프로그램만을 도입한다면 기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교회가 제자훈련을 시행한다는 선택은 언제나 좋은 결정처럼 보인다. 교인의 자리에 머무르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취지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도입을 상호보완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제자훈련의 교재와 진행 방식만을 고민하지 말고, 제자훈련과 관련된 교회의 인프라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 내의 소그룹 기반이다. 다양한 형태의 제자훈련이 가능하지만 국제제자훈련원의 CAL세미나가 주도하는 제자훈련은 소그룹의 형태를 갖춘다. 나아가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교회의 일꾼들은 주로 교회의 소그룹 리더로 활동한다.[2] 그러므로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지역교회 안에 얼마나 소그룹 기반이 갖춰져 있는 지에 따라 그 효과가 좌우된다.

 

제자훈련과 소그룹 기반의 상호보완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면, 소그룹의 활성화를 꾀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훈련만을 도입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교회 안에 소그룹이 역동성이 없기에 제자훈련의 수료자들은 배운 것을 펼칠 사역의 장이 없다. 때로는 목회자가 진행하는 제자훈련반 역시 소그룹의 역동성을 잃어버려 단순한 성경공부로 전락한다. 교회의 핵심 양육 시스템으로 제자훈련을 도입하였지만, 교회가 진행하는 또 하나의 성경공부 과정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지역교회들이 큐티를 도입하였다. 평신도들이 정기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자신의 묵상을 교우들과 나누며 말씀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도록 하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큐티 역시 상호보완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해 좋은 취지가 무력해지는 경우가 많다. 큐티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강해설교다. 큐티는 관찰 묵상 적용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는 관찰 해석 적용이라는 귀납법적 성경연구의 방법론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미 정해 놓은 주제로 접근하는 것(연역적 성경연구)이 아니라 성경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의미를 관찰하고 묵상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귀납법적 성경 연구의 방법론을 강단에서 풀어내는 것이 강해설교다.

 

평신도들은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성경 본문을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묵상하는 큐티를 어려워한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이 큐티를 훈련할 수 있는 기회는 어디에서 올까?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더욱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는 기회는 예배 중의 설교로부터 얻는다. 만일 설교자가 연역적인 방법 예컨대, 삼대지 설교 을 주로 사용한다면 회중들 역시 성경을 연역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데 익숙해진다. 반면, 설교자가 귀납법적인 방식의 강해설교를 선호한다면 평신도들 역시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접근하는데 훨씬 더 익숙해진다. 한국 교회의 큐티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가 강해설교자였다는 점을 기억해보라.

 

제자훈련과 구역모임(소그룹), 큐티와 강해설교는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양자는 상호보완성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 현장의 상호보완성을 고려한다면 지역교회를 통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모방이 아니라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목회 정보보다 자신의 목회 현장을 통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천신학적 교회론(practical ecclesiology)이다.



[1] 얀 리브킨(Jan Rivkin)은 상호보완성을 갖춘 기업의 강점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기업의 성공 전략을 찾아내거나 분석하기 어렵다. (2) 성공적인 기업의 한 두 가지 선택을 흉내 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결정들의 집합인 전략을 통째로 모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2] 사랑의교회 양육시스템에서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수료한 사람이 소그룹(다락방)의 리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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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17. 11.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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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기독교 신앙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외관적인 특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정한 지역 교회에 등록을 하거나, 자신의 신상명세서에 기독교인이라고 기록하거나, 혹은 음식을 앞에 두고 식사 기도를 하거나,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특징이 한 사람의 내면에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규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해볼 수 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 없이, 신구약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재,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을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으며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길에 접어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그 안의 다양한 교단과 종파를 모두 포괄한 의미다. 다양한 교단과 종파들 사이에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기독교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의 핵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1]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과 관련한 예배, 기도, 말씀 생활, 봉사 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삶에 등장하는 가정, 고난, 소명, 재물 등의 주제를 담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 공동체와 관련된 주제들, 곧 정의, 평화, 민족, 생태계 등의 주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핵심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성경에 대한 단순화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수렴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함께 다를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예배는 신적 존재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참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기독교인이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인간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답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과정은 자신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과제와 주제들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출발점이지만,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과제와 주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기독교인들 개개인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어떠한 기독교인도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으며 그들이 마주치는 과제 역시 다양하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모습의 신앙 여정을 지나온 성도들이라도 그 모든 과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동일한 고백에 이르게 된다.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1]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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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16. 6.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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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고귀한 희생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순교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죽음을 당한 이유– 곧, 죽음의 원인, 그들의 사명, 그들의 활동 – 가 그들을 순교자로 만든다.[1] 그런 점에서 순교에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을 순교자로 만드는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들의 삶이다. 베드로전서 219-20절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한다. 고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삶이 고난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그들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에 대한 탐구이다. 죽음의 한 순간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을만큼 그들의 기나긴 삶의 여정을 통해 추구하였던 궁극적인 가치를 쫓아가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순교자(martyr)라는 영어 단어는 증인(witness)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단어로부터 유래하였다. 사도 요한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언명하였을 때, 요한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점에서 그는 이미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었다( 1:9).[2]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순교한 사람들 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증인의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리비아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 선교사 로니 스미스(Ronnie Smith)의 순교가 있은 후, 그의 아내 애니타 스미스(Anita Smith)는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 애쉬랜드대학교(Ashland University)의 종교학 교수 크레그 호비(Craig Hovey)순교자는 한 사람이지만, 증인은 두 명”(one martyr but two witnesses)”이라고 평가한다.[3] 동일한 논리를 전라남도 신안군에 증동리교회를 비롯한 10여개의 교회를 설립한 문준경 전도사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녀는 기독교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한 사람의 순교자로 마치지 않았고, 그의 사역은 수많은 증인들 –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 등 – 을 배출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순교에 대한 각오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교자들의 삶을 탐구하는 이유는 그들을 순교자로 만든 참된 이유, 곧 그들의 증인된 삶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1] Craig Hovey, “Being and Witnessness: Minding the Gap between Martyrs and Witnesses,” Anglican Theological Review, 97 no 2 Spr 2015, 265-6.

[2] 요한계시록 1장에 등장하는 증인 의미에 대해서는 N. T. Wright, Revelation for Everyon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4 참고하라.

[3] Craig Hovey, “Being and Witnessness: Minding the Gap between Martyrs and Witnesses,”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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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문학2015. 12. 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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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의 세월을 사셨던 고인의 살아생전 나는 고인을 한번 만나 뵈었다.

짧은 만남이었고, 짧은 대화였지만 고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잊을 없는 만남이었다. 

 

고인은 기독교 신앙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녀들이 아무리 권면을 해도 완고한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느덧 95세가 되었고, 조그마한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의사는 자녀들에게 어머니와 이별할 시간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있겠지만, 

아들과 며느리의 마음에는 말로 다할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아직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마음만 애태우고 있는데, 

병실을 돌아다니며 전도지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다. 

며느리는 조급한 마음에 전도자를 붙잡고 시어머니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전도자는 교회의 전도대를 지도하는 나에게 모든 소식을 알려왔다. 

 

병실에 들어가 그분을 마주대하였을 ,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정확한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분명한 언어로 인사를 건네셨다. 

"목사님,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아가 모두 빠져 발음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구사하는 언어와 단어만큼은 놀랍도록 명확하였다. 

그분의 의식이 또렷하다는 것을 확인한 ,

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분은 ""라고 분명히 대답하셨고, 우리는 함께 영접기도를 드렸다. 

 

번의 만남이 있은 열흘째 되는 , 

며느리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가 고인의 부고 소식을 알려주었다. 

위로예배를 인도하고 유족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고인의 큰아들이 나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께서 저희 어머니를 만나신 이후, 어머니께서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몇번이고 저에게 '목사님께서 오셨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인을 마지막까지 간호하였던 며느리는

내가 고인을 만났던 순간에 고인의 의식이 가장 또렷하고 분명했노라고 증언하면서, 

그날 이후 고인께서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수없이 고백하였다고 전해주었다. 

 

장례예배에 함께 참여하였던 어느 권사님은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장례식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노라고 기쁨을 표현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또렷할 만큼 건강하셨으며,

삶을 마감하기 직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참으로 감사한 장례예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다가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보다,

비록 장수와 건강의 복은 없을지라도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있는 가장 기쁨인 것을 

전도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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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