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4. 8. 19:03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하는, 필수적인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듣고,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였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내가 들은 복음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복음에 감각하였던 우리는 무엇을 하였지요? 바로 기도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기도, 그 많은 나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로 감격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나요?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마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주님께 나의 영혼을 받아주시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그 시작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는 모든 발걸음 위에 언제나 기도가 함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받은 그분의 백성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다양한 사명과 비전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선교의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제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히 전도의 은사와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경제 정의를 실천하는 사명도 주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이 땅의 교육을 바로 세우는 사명도 주십니다. 이처럼 사명은 다양합니다. 비전이 다양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떠한 사명, 어떠한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든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 모두가 상담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환대하고, 위로하고, 양육하는 은사는 몇몇 분들에게만 주어줘도 괜찮습니다. 그분들이 소그룹의 리더로 세워지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은사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몇몇 분들이 계세요. 그들이 교회 학교의 교사로 세워지면 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여 찬양하는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계신 몇몇 분들이 성가대를 서고, 찬양팀에서 봉사하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기도에 있어서 탁월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기도에 있어 전문가가 되십시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여러분 모두는 기도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 집중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중’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중요한 원인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6장 5절과 6절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회당이나 큰 거리의 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도는 무조건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만 기도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은 처음부터 기도하는 장소가 맞습니다. 큰 길의 한쪽 어귀, 길을 가다가 한쪽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왜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자칫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회당이나 큰 거리는 기도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기도입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하면 자꾸 다른 사람을 인식하게 되니, 그렇다면 차라리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여서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나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될 주변 사람들을 인식합니다. 그러니 기도에 집중하지를 못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하니,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집중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드리는 기도, 바로 그러한 기도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쏟으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두 번째는 ‘기도 내용에 마음을 쏟으라’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진심,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쏟지 않고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경우를 ‘중언부언’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주기도문을 외웠던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누군가로부터 주기도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따금 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꼭 주기도문을 같이 외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옆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따라 주기도문을 그저 읊조리다보니 외워진 겁니다. 당연히 주기도분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과거 개역성경에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의미의 어구를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번역했습니다. 주기도문을 처음 외울 당시 제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의 의미를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주기도문을 외우라는 이야기도 제가 어린 시절에 언듯 들었단 말이죠. 그래서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혼자서 주기도문을 외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의미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기도문을 외운 것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기도문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뒤따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면,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려는 그 마음과 자세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주기도문의 소리만을 외우는 것, 딱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입버릇처럼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우리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언부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서 이방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을 많이 해야, 기도의 시간이 길어져야 무엇인가 위대한 신이 자신들에게 복을 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매년 1월 1일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듯,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저리주저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혹시 나에게 복이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말입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인식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래 하나님께서 주셨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주저리주저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높은 기도의 단계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십시오. 물론 기도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매일 5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매일 1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똑같은 30분을 기도하여도 중언부언하며 30분을 보낸 사람과 기도 제목 한 가지 한 가지에 자신의 마음을 쏟은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기도 시간이 계속해서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해온 연수가 길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시간 또한 길어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기도하는 각각의 기도 제목에 우리의 마음이 담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처지를 아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가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기도의 자세, 그 마지막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6장 14절과 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받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에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못할까요?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회개의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이미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 동안 하나님께 수많은 기도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회개의 기도는 얼마나 하셨습니까? 혹시 간구의 기도만 있었을 뿐 회개의 기도가 빠져 버리지는 않으셨나요? 

누군가 회개의 기도는 생략한 채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만을 열심히 드렸다고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간구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네,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은 그 사람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시고, 그를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응답을 주신 것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마음은 교만해집니다. 자신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기도에 회개가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누군가 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는 용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이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회개의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에게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회개의 기도를 드렸던 그분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겸손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겸손한 마음, 다른 사람을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는 바로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죄용서의 확신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외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의 기도 안에 회개의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아무리 회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라고 하여도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회개 거리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였지만 그 안에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기도하고, 큰 길 가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지죠. “나는 이 만큼 기도하고 있으니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경건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어느덧 내 안에 찾아온 교만은 헛된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 받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향해 기도는커녕 고개도 들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은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죄악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당당히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회개하는 마음이어야 하고, 회개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 

구약성경에서 깊은 기도의 경지를 경험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성경에는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회막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특히 모세를 만나신 장소가 바로 회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그런데 그 다음 11절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는데,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함께 있을 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조금만 더 읽어 가다보면 모세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대화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광채가 났습니다(출 34:29). 얼굴의 광채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모세가 하나님과 정말 깊은 영적 교감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가운데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하나님과 더불어 마치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채가 내 얼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마음이 드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다시 말해 첫 장막, 곧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만들었던 성막의 제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회막에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성막을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우리는 모세 시대 만들어진 회막이나 성막, 혹은 여러 가지 제사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지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모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 갈 4:6)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빛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은 이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율법의 시대에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수건으로 덮어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새로운 약속, 곧 복음에 의한 영의 직분에는 더욱 큰 영광이 있기에 수건으로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우리에게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다른 어떠한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그 어떤 수건도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모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에, 하나님을 당당하게 아빠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기도의 중보자로 확신하기에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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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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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6. 06:12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을 움직이셔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느 그리스도인 여자 교수님께서 그리스도인 청년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강의 중간에 그 여자 교수님은 자신이 청년 시절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한 남자를 마음속으로 사모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성을 마음에 두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야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 교수님은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남자 청년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 뒤 정제된 언어로, 매우 아름답고 로맨틱한 언어로 그 남자 청년에게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했습니다. 

그 모든 고백을 다 들은 남자 청년이 이제 대답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도 당신을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그때 그 교수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한 가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구나.”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고백해보시겠습니까? “사랑합니다.” 자, 이제는 옆에 계신 동일한 분에게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그 교수님의 깨달음이 크게 틀리지 않지요? ‘주 안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은 때로 ‘사랑하지 않습니다’는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 ‘저는 당신을 형식적으로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고 숨기는 표현으로 사용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혹은 목사님께서 성도님에게 모든 사람들이 마다하는 교회의 봉사 가운데 하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탁을 받았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의 부탁이고, 때로는 목사님의 부탁이니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해보고 말씀드리지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반드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기도해 보겠다’는 표현으로 감추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언어적 표현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3절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정확한 율법이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탁월하게 해설해 놓은 구절입니다. 구약 성경에 오늘 본문 33절과 정확하게 동일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서 맹세와 관련된 구절들을 두 가지로 정확하게 정리를 해 놓은 조항이지요.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레위기 19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해놓고는 그것이 참말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계명의 제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구약의 율법이 맹세에 대해 가르치는 두 번째 내용도 정확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민수기 30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그 서원과 맹세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하지 마십시오. 아울러,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꼭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거짓 맹세하지 말라 

그러데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하게 율법에서 금지하는 사안이요, 십계명의 제 3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일이 되다보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늘을 두고 거짓말을 하고, 땅을 두고 거짓말을 하고, 혹은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거짓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과 35절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이 구절은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종류의 맹세, 심지어 옳은 일이요, 옳은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맹세를 다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옳은 일을 옳다고 주장하는 일, 사람들이 거짓에 속고 있을 때 그것이 아니라고 사실을 이야기하며 맹세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바가 아니요, 오히려 예수님의 강한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표준새번역은 37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예’라고 말해야 할 때에는 ‘예’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맹세 자체, 특별히 옳은 일을 옳은 일이라고 맹세하는 것까지도 금지한 조항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의 박사라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한다든지, 땅을 두고 맹세를 한다든지, 혹은 예루살렘 성을 두고 자신의 거짓말이 참말이라고 맹세를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예루살렘 성을 두고 거짓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물론이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도 도무지 거짓말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998년 이른바 ‘옷로비의혹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형 회장이 외화밀반입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당시 검찰총장의 아내에게 고가의 옷값을 대신 지불하면서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이러한 의혹을 풀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출두했던 핵심 증인들은 모두 교회의 권사님들이셨지요. 그들은 많은 국민이 TV를 통해 청문회의 전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성경책에 손을 올려놓고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맹세한 것이죠. 당시 핵심 증인들이 모두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면, 그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책에 손을 얹고 진실만 밝히겠다고 맹세하였던 권사님들의 증언은 그 어느 것 하나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그 사건이 있은 직후부터 한국 교회의 성장이 크게 후퇴하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시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섰던 권사님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지요. 만일 그 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그저 성경에 손만 얹고 거짓말을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아니요.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권사님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거짓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일 국회청문회에서 하나님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고, 성경에 손을 얹지도 않고 그저 거짓말만 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교회 권사님들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다 알려졌어요. 그런데 그들이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행동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던 유대인들이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혹은 예루살렘 성을 두고 거짓 맹세하는 행동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언급을 하지 않고 거짓 맹세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맹세를 하는 것은 곧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성도들이 거짓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래도 말이 많다보면 실수도 많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에 거짓이 보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자만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6절입니다.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빌릴 때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죠? “나를 믿고 빌려줘라” 나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자신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한 터럭도, 머리카락 한 가닥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자신의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 하나도 막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무엇으로 나 자신을 믿어 달라고 호언장담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호언하고 장담하였다가 이후에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누구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까요? 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지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당시 과부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며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보니 그들을 위한 헌금이 필요했고, 집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팔아서, 땅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바울과 1차 전도여행을 함께 떠났던 바나바가 대표적인 사람이었지요. 

당시 자신의 밭을 팔아서 헌금했던 사람은 바나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재력이 되는 사람들이 큰 금액을 헌금합니다. 그리고 그 헌금으로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안에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크게 헌금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 소유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들의 땅을 팔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맹세하는 것이죠. 내가 땅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팔아서 헌금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욕심이 자신이 말한 바를 실천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지요. 자신의 땅을 팔아 그 일부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땅을 팔아 그 전부를 헌금한다고 허언장담 했기에, 그렇게 큰 소리를 좀 쳐야 교회에서 인정받을 것 같아 먼저 맹세부터 하였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는 없지요? 우리 교회에는 더더군다나 없지요? 한국 교회에서 많이 일어났던 가장 흔한 예로, 교회가 건축을 비롯해 큰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을 구상할 때, 교인들이 무엇을 합니까? 작정 헌금이라는 것을 합니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하나님께 얼마를 헌금하겠다는 작정을 헌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름다운 일이지요. 이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자존심을 세우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이 보아 왔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허세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시지요. 마태복음 5장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기준이 단순합니다. 옳은 일이면 옳다고 말하고, 그른 일이면 그르다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선택이 옳으면 밀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이 원하는 선택이 옳지 않으면 포기하십시오. 기준은 단순합니다. 

청년들 가운데 어떤 이성이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나의 마음은 별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 대한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지, ‘나도 당신을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버거운 부탁을 했다면, 아무래도 힘들겠다고 단순하게 말씀하십시오. 굳이 기도해 보겠다고 둘러 될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가?” 이 질문에 ‘네’라는 답이 나오면 나의 행동은 그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기준이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깨끗이 포기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깔끔하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이런 저런 수식 어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온유’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크게 잘못 가르치고, 또 잘못 배운 개념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온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또 사도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나열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온유’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다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다고 할 때, 조금 바보스러운 것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권리가 박탈당해도 그저 참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그저 침묵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바보스러운 어떤 성품을 우리는 온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자신이 수고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기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버리죠. 이삭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싸우지 않고 그냥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파요. 그랬더니 이제는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이 그들과 다투나요? 아니죠. 또 다른 곳으로 떠나 우물을 새로 팝니다. 우리는 이삭의 이러한 모습, 조금 바보스러운 모습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구약의 인물은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구절, 곧 민수기 12장 1절과 2절을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곧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모세의 형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지요. 그런데 모세는 잠잠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놓고 성경은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세가 언제나 조용하고, 어떠한 일에도 화를 단 한 번도 내지 않는 사람이던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제사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써 주신 두 돌판을 깨트리면서까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사형을 명령하고, 하루아침에 약 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 그토록 분도하고 분개했던 그가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을 비방할 때는 침묵합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온유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분노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는 잠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유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웠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가리어질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그저 침묵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용기 없음을 온유한 성품이라고, 교회에서는 그러해야 한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라고 말해야 할 때는 예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이 손해를 보고, 여러분 개인이 누군가로부터 비방을 받을 때는 침묵하세요, 그것이 온유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를 참으로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고, 그렇게 온유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유업을 약속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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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4. 07:1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불행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고,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에도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죠. 특별히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며 율법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의 율법을 주신 이유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기 위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10장의 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구약의 율법은 무엇을 위해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사람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참뜻을 잃어버린 채 율법의 규정에만 얽매여 있다면 그 율법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괴로운 짐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살인에 대한 잘못된 교훈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작용해야 하는 율법을 사람들의 삶을 옭아매는 율법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율법의 바른 의미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해석하시는 율법은 십계명의 제 6계명인 살인에 관한 계명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절) 

제자들이 평소에 들었던 율법의 조항입니다. 살인에 대해서 어떻게 배우고 들었다는 것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제 6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확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의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여러분,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등장하나요? 아닙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구절은 구약 율법에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이고, 둘째는 실수로, 성경의 표현을 사용하면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입니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죠. 반면에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 곧 부지중에, 의도하지 않았는데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이라는 지정된 장소로 피할 수 있도록 했지요. 왜냐하면 그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았을 때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보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은 살인이라는 하나의 계명을 다루더라도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율법의 전문가들은 살인에 있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죠. 그러면, 왜 예수님 당시 율법의 전문가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들이 구약의 율법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오늘 우리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도피성의 제도에 대해서 율법의 전문가들인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그들의 가르침은 역으로 살인만 저지르지 않으면 심판을 변하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소극적으로 살인하지 말라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요.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의도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면 그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어구를 계속 되뇌기면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 과정과 상황에 대해서는 조금도 묻지 않은 채, 살인을 저지른 몇몇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로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안전지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2절)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은 살인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비록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지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면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머저리라고 욕을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머저리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무시와 멸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요.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투고, 서로 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꼬집으셨습니다.  살인한 사람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최소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한 주 동안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을 행하신 단 한 분도 없으시죠? 여러분 가운데 지난 한 주 동안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막대한 손해를 끼친 악한 행동을 하신 분도 없으시죠?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나 이웃 사랑하기를 나 자신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말씀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요구하시는 바는 나의 마음에 미움과 다툼과 시기심을 모두 벗어나고 나아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갈등과 화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형제와 갈등이 빚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3-24절) 

하나님께 제사하고, 그분을 예배하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놓고 어떤 분들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채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옳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서로 싸우고 다투던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설명 위에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곧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형제들과 최소한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마음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어느 교회 안에 서로 원망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교회는 제 아무리 성령 충만한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우리 시대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과거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그 교회, 그 회중들은 은혜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것들 중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지요? 신앙이 제일 중요하지요?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도 중요하다고 우리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십니다. 최소한 다투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마십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면 형제와 다투고, 싸우고는 관계가 우리 안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5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고발까지 당했겠습니까? 그 두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서로 싸우고, 다투고, 욕하고, 원망하는 관계입니다. 다툼이 일어나서 그 문제가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한시라도 빨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재판관 앞에 서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판관이 너를 옥에 가두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 사이에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만큼 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면 오히려 거북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 앞에 서게 되면 늦으니 그 전에 하루빨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재판관 앞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화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하면 서로 다투고 갈등하던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갈등을 빚었다면, 어찌 단 한 사람의 잘못만 있었겠습니까? 경중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양쪽에 다 갈등과 다툼의 책임이 있죠. 재판정 앞에 가기 전에 화해하면 그 모든 책임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화해하지 못한 채, 그 문제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잘잘못을 따지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직 길을 가고 있을 때에 하루빨리 화해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으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살인을 금지하셨습니다. 살인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창 9:6). 그런데 신약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성도들이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과 근거는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듯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헌신하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물며, 그들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와 자매라면 우리가 어찌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갈등과 다툼을 하루빨리 화해하십시오. 나아가 그들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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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4. 07:11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워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우리의 착하지 않은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짠맛을 간직하고 있는 소금일 수도 있고, 짠맛을 다 잃어버린 소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 세상에 짠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좋든 싫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이미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을 인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안에 켜놓은 빛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이 밝은 지, 어두운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행실로 밝은 빛을 비추면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인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요, 우리가 악한 행실로 어두운 빛을 비추면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또한 인식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됩니다. 


율법의 요구 

이제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충실하게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8절의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의 번역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 원문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 이루어지기 전에는’ 여러분, 차이를 아시겠죠? 그러나 제가 지금 읽어드린 문장 그대로 번역을 한다면, 우리말 어법에 맞지가 않지요. 그래서 개역개정 한글판 성경을 번역하신 분들이 ‘다 이루어지 전에는’아라는 표현대신 ‘다 이루리라’라고 번역하신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이제 우리는 19절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지가 없어지는 때는 언제이냐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이냐고 질문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것은 강조하려는 표현이지요. 이 세상이 쉽게 없어지겠어요?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것도 강조하는 표현이죠. 중요한 건 뭡니까? 율법의 요구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팔복의 그 은혜와 그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누리겠다는 바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율법의 말씀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계명이란 일차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다음 주부터 묵상하게 되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새로운 계명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새롭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이죠. 구약의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를 미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을 바라보면서 정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 됩니다. 

저는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19절에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첫째는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구약의 율법이든,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새로운 계명이든 실천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러한 율법과 계명을 실천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게 되는 은혜와 축복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념하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대회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설교하셨습니다. 그 설교에서 옥 목사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지요. 그 가운데 일부를 제가 발췌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대회에서 이와 같은 설교를 했던 옥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서울의 강남에서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초대형교회로 부흥시켰던 장본인이 자신의 평생의 목회를 돌아보면서 청중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다 보니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한국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예레미야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무섭고 놀라운 일이 뭘까요? 예레미야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절) 여러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왜냐구요? 백성들이 그것을 좋아하거든요. 

미가서 2장을 보면 이런 말씀도 있어요. 제가 읽어드립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말하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절) 무슨 말씀이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백성들의 귀만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 예를 들면 포도주 이야기, 독주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이야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주면 그 사람이 백성들 사이에서 선지자로 인정받는 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말하면 이렇게 되겠죠. 세상의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말씀은 변함이 없는데, 그렇게 부담스러운 말씀은 감추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축복 이야기, 복 받는 이야기만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면 설교 잘하는 목사로 인정받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만큼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작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받는 그 놀라운 축복을 포기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다 준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에 한 가지 소원이 있었잖아요. 팔복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며 제자로 살아가는 그 놀라운 행복, 여러분, 율법의 말씀을 준행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함으로 그 놀라운 행복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넘어서는 의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율법을 강조하셨죠. 그러면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바로 20절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수많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율법의 실천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역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은 아마 두 가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의로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던 기준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정말 큰 충격은 두 번째입니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고, 그 다음에 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생각했거든요. 

여러분,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건을 기억하시죠? 그 청년은 부자였고, 또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킨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았습니까?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그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겁니까, 못 들어간다는 겁니까? 못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이 놀랜 것이 아니라, 누가 놀래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랍니다. 성경에는 ‘제자들이 몹시 놀랐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 생각에는 그 부자 청년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왜 그렇죠? 돈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십계명을 빠짐없이 지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동일한 반응이 아마 마태복음 5장에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람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거죠. 사실은 그 대답이 오늘 본문 첫 구절에 이미 제시가 되어 있었어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오늘 본문 17절 말씀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이기도 하다는 거죠. 여기에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중요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이 무엇인지를 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5장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신명기 5장 1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모세가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2절부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요.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베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여기 호렙산은 시내산을 말하는 것이고, 신명기 5장으로부터 40년 전, 곧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되는 그 언약의 관계를 말하는 거죠. 그로부터 광야 40년의 세월이 지났어요. 모세는 40년 전, 시내산에서의 언약이 너희 조상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맞죠. 40년 전, 그들의 조상과 하나님 사이에 세운 언약이 맞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조상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강조지요. 너희 조상들만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40년 전, 너희 부모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받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지키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에요. 성경의 표현대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이지요. 

그리고 신명기 5장 6절부터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다 함께 6절 말씀만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것이 십계명의 첫 서문입니다. 십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두 번 나오거든요? 지금 우리가 살피는 신명기 5장에도 등장하지만, 출애굽기 20장에도 등장합니다. 두 개의 본문 사이에 미미한 차이점이 등장하는데, 십계명의 서문, 곧 신명기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읽은 6절 말씀은 출애굽기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1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외우고 있는데, 사실은 그 십계명 앞에 서문이 있어요. 그 내용을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거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십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의 요구는 드러나는 모습이고, 그 기초가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방식이 율법의 요구인 거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세대가 지나더라도, 그래 하나님과 우리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관계는 우리 부모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나와 우리 세대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라는 그 인식을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라진 거죠. 또 과거 우리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때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경험이 없는 거죠. 그러니 율법의 두 기초를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율법의 요구사항들만 남아 있는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율법이 무거운 짐이지요.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자신의 자랑거리입니다. 율법의 본질이 사라진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리고 온 갈릴리의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 그들의 회당을 찾아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질병과 모든 연약함을 고치십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요. 그들에게 하나님은 저 예루살렘 성, 저 사마리아 성 멀리에 계신 분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찾아오시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겁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죠. 율법의 두 기둥이 다시금 새워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을 완성하시는 그 사역은 동시에 율법을 완성하는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더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율법의 두 기초가 없었습니다. 단지 율법의 요구 사항들, 율법의 표면적인 항목들만 실천했지요. 율법의 기초가 없으니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었고, 자신의 의지였고, 자신의 성실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의는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율법의 두 기초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악 된 본성을 고치셨다는 구원의 감격입니다. 둘째는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기초가 분명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율법과 계명을 우리는 지키는 거죠. 그러니 나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율법을 지키는 거지요. 때로는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일에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두 기초가 튼튼한 우리는 이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훨씬 뛰어넘은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 언약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하십시오. 그 튼튼한 뿌리 위에 하나님의 율법,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다고 인정받는 그 놀라운 행복과 축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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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3. 07:11

중국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위치만 니라는 분이 자신의 책에서 어느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중국 남부 구릉지대에서 벼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지역 교회의 일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벼가 한창 자라는 시기, 어느 날 아침에 자기 논에 나가 보니까, 자기 이웃 사람이 자기 논두렁에 구멍을 내서 그리스도인의 논의 물을 모두 빼내어 자기 논에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대로 물을 다시 복구해 놓았지만 물을 도둑맞는 일은 며칠을 두고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에 와서 기도 제목을 내고, 교회 지도자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의를 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교회 지도자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이지요. 그때 묵묵히 기도하던 교회 지도자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 기도해 보시기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옳은 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옳은 일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실까요?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이 땅의 왕으로 개선행진을 하시기에 마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통치자로, 주권자로 오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자신이 누릴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을 포기하셨습니다. 그 대신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고, 급기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감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옳은 일을 행했다고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 곧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나의 것을 내어 놓는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리의 자리에서 제자의 자리로 

산상보훈의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이 말씀을 누구에게 들려주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연,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일까요? 그 대답은 마태복음 4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부터 보시면,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 지역에 펴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리릴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누가요?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사람들입니까?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혹은 그러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그러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곁을 에워쌉니다. 바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마태복음 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여기서 무리는 4장 25절에 등장하는 바로 그 무리들입니다.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몰려오는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1절 뒷부분을 보시면,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그러자 그 수많은 무리가 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오지는 못하고, 다만 누가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까? ‘제자들이 나아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제자들에게 드디어 입을 열어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산상보훈의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그 가운데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던 열두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산상보훈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초신자라면 무리의 자리에 참여만 하여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나의 육신도 치유되고 나의 영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을 처음 믿은 초신자라면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포도주에 취하고,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떡과 물고기에 배부르면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신앙의 경력이 수십년에 이르는 분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의 섞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수많은 무리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도를 실천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은 어떠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한 목소리로 13절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수많은 무리들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제자입니까?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원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 포도주나 떡이나 물고기를 받아먹는 은혜를 누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4절을 다시 보시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 성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주변지역에 비해 고도가 높거든요.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른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밤중에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빛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그 빛을 보고 ‘저기가 예루살렘이구나’라고 알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리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의 자리로 나아가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받아 누리기만 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향해 나아가면, 이 세상은 우리를 알아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15절도 보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켜면 그 등불을 어디에 놓습니까? 그릇과 같이 음식을 담아두는 말 아래에 두나요? 아니면, 등불을 걸어놓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등경 위에 두나요? 당연히 등경 위에 둡니다. 등불을 켜 놓고는 그 위에 밥그릇을 엎어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처럼,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산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만 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무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는 제자의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희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라고, ‘너희야 말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신 뒤에,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요? 16절 중간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로,” 곧 세상으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 포도주와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시는 은혜만을 받아 누리는 자리에서 벗어나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서 우리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제자의 삶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땅한 권리와 마땅한 자격으로 요구하수 있지만,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던 중국의 한 기독교인 형제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교회 지도자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이야기하고 상담을 하니, 교회 지도자 한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지는 않을지 기도해 보기를 바라오.” 

이 이야기를 들은 중국의 기독교인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혹시 오늘 그 형제가 들려준 말이 주의 뜻이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올바른 일보다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날 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이 형제가 다음 날 새벽 집을 나서 자신의 논으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논두렁에 구멍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 형제의 논에 있던 물은 당연히 이웃의 논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그 형제는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몇날이 못되어 그의 이웃이 그 형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이웃은 더 당황해하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니, 나는 당신이 이 논의 주인인줄 알았는데, 그러면 당신은 소작농이었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형제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이 논의 주인이 저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요,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시작된 형제의 간증을 듣고 그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위치만 니는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형제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하였다.” 

여러분, 우리가 그 어디에서 이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 어디에서 이 형제가 누렸던 충만한 성령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치유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도 큰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를 마시며 떡과 물고기를 받아 먹는 것도 큰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면 옳은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손해보는 것같고, 지금은 내가 바보처럼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나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 수만 있다면, 그 안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의 그 어디에도 없는 참된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hanjin0207.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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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 07:11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팔복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매주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가 얼마나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평생을 목회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매주 설교를 선포하였는데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깊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자신의 설교를 지난 수 십 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매주 자신의 설교를 들었던 성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 목사님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절망감이란 감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죠. 

저 역시 교회에서 매주 설교하는 목사로서 그와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매주 제가 전하는 설교가 얼마나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러분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가 저의 관심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그와 같은 고민에 조금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설교하면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 세 가지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세 번의 설교를 다 마친 후,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 한명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 세 가지를 설교하는 동안 바로 자신에게 설교의 내용과 동일한 시험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 안에 뜨끔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저는 한 주 동안 설교를 준비해서 최선을 다해 설교합니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많이 잊어버리거든요. 한 주 동안 저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말씀은 주로 내가 이미 설교한 말씀보다는, 내가 다음 주에 설교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저의 고민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과거에 나의 설교가 어떻게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가장 먼저 고민했다면, 이제는 그에 앞서 나의 설교가 어떻게 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안에 기도제목이 생겨요.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저의 설교를 적용하며 실천하는 것은 저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저도 저의 설교를 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무리를 넘어 제자의 삶으로 

마태복음을 순차적으로 설교하다보니 설교를 하기에도, 그리고 설교를 듣기에도 참 부담스러운 산상보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곧 살인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산상수훈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나는 너무도 큰 죄인이 됩니다. 수시로 살인죄를 저지르잖아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게 이런 말씀도 하시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도 어떻게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겁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은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듯 산상보훈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여러분들의 심령은 얼마나 가난한지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은 이것저것 욕심이 많아요. 가난하지 않거든요. 어떻게 나의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을까요? 고민하게 되죠.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데, 저의 마음은 애통하는 것도 아니고 온유하지도 않거든요.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씀이지요. 설교하기에도 부담스럽고, 설교를 듣기에도 부담스러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상보훈의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지 않고 피하고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산상보훈의 말씀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삶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뜻 들으면 매우 옳은 이야기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산상보훈이야 말로 우리가 따라야할 삶의 지침이 맞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산상보훈이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삶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그 저의는 무엇일까요? 산상보훈의 말씀은 현실적으로 실천하기에는 불가능한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어차피 이상적인 말씀이니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산상보훈의 기준이 아닌, 그 보다 조금 더 낮은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귀의 함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디에도 산상보훈의 말씀이 저 하늘나라에서만 지킬 수 있는 교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이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보훈의 교훈을 피해가는 두 번째 방법은 산상보훈이 인간의 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라고요. 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시죠.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을 행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남자들 가운데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서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여성들 가운데 멋진 남자를 보며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산상보훈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살인자요, 모든 사람이 간음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명 역시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아닌, 그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구절로만 이해한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은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구약에는 율법이 있지요. 바울은 율법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옳습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더러운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이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합니다. 산상보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이 시작되는 오늘 본문 1절과 2절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다 함께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태복음 4장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마태복음 4장 2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의 모든 병과 모든 연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4장 25절의 말씀과 같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사람들이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5장 1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께 나아오지요?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모든 백성이 지금 산으로 다 올라오나요?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아니지요. 제자들, 12명의 제자들만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 제자들을 향해서 입을 열어 산상보훈을 가르치십니다. 

저는 산상보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그 열쇠가 바로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무리가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감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임했다는 거죠. 지금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감격했던 사람들이에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잔치 자리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고, 배가 고픈 백성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풍성히 나눠주십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그런데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와요,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해주시지 않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산상보훈의 교훈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제자들,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12명의 제자들에게만 산상보훈을 전하십니다. 그러니 산상보훈의 말씀은 그저 이상적인 말씀도 아니고,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제자의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속해도 좋습니다. 행복해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려요.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기뻐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면 설교자로서 저의 고민이 조금 바뀌었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여러분, 제가 산상보훈을 설교하면서 이 말씀을 실천하는 제자의 무리에 들기를 소원합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매주 설교를 하는 목사이지만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마음으로 소원을 품어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의 삶, 제자의 삶, 곧 산상보훈을 실천하는 삶을 소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클로드 로랭의 <산상보훈> 

클로드 로랭의 그림 가운데 <산상보훈>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절과 2절을 기초로 한 그림입니다. 잠시 그 그림을 보시겠습니까? 

 

클로드 로랭, <산상보훈>


지금 중앙에 높이 서 있는 산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바로 그 산입니다. 그 산 위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시고, 그 주위에 12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자세히 보면, 12명의 제자들 그룹을 비롯해서 5가지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 나무와 잔디 속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관심 정도만 표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 아이를 안고 있다거나 양을 돌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룹은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 열광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을 모으고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랭은 매우 재미있는 그림을 첨가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한 관심만을 표명하는 사람들과 여기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계곡이 있습니다.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계곡 위로 아주 작은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 다리를 통과해야 관심정도만 보이는 무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무리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하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이 절벽이 얼마나 크게만 느껴지는 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차이는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물론 관심만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다리를 건너 예수님께 열광하는 단계로 이른 것도 대단하죠, 훌륭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절벽을 오르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로랭은 이 절벽을 오르는 사람도 그려 넣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절벽이나,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계단이 있습니다. 물론 산이 높아요. 그러나 계단이 있어서 얼마든지 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직접 들고 실천하는 크리스천의 삶,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단계까지 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단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복 되도다 

저는 로랭이 그린 <산상보훈>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팔복에 대한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팔복의 말씀에 의하면 이 그림에서 제자들의 얼굴이 어떠해야 합니까? 기뻐야 합니다. 행복해서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이 힘들죠. 그러나 그 길은 행복한 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에서 제 마음에 가장 들지 않은 부분은 예수님께서 계신 산 위로 올라가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너무 힘든 표정으로 계단에 쓰러져 있어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산상보훈을 실천하는 크리스천은 복됩니다. 행복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십시오. 
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제가 지금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복이 있다는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읽으려면 복이 있다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원문의 형태가 강조구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을 강조하지 않아요.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물론 팔복의 각 항목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다시 말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자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복됩니다. 행복합니다. 기뻐요. 즐겁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보훈을 주신 이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행을 하고, 자신의 괴롭게 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여서 결국에는 그저 초라하게 살아야 할 것처럼 생각해요. 아닙니다. 산상보훈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께서 나눠주시는 포도주와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는 것도 행복하고 즐겁지만,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그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행복을 주고 싶은 것이에요. 

저는 우리 모두가 그 놀라운 행복에 그냥 폭 빠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을 살아갈수록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행복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금식 기도를 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얼굴을 깨끗이 씻고 기름을 바르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면 예수님, 나의 몸은 너무 힘들고 나의 마음은 너무 슬픈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런 척 다중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까? 아니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 하나님, 나의 금식 가운데 임하시는 그 하나님, 그분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기쁘고 몸이 새 힘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 안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기쁘고 얼굴이 밝아지는 겁니다. 
저는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산상보훈이 알려주는 그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천다운 우리의 생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예수님께서도 복되다고 감탄할 만한 행복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 함께 부를 찬양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누가 축복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 예수님으로부터 포도주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사람도 물론 복된 사람이죠.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복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찬양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주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고 주를 항상 찬송하는 사람” 
그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팔복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죠. 
마음이 가난하여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우리 주님을 간절치 찾는 사람들, 그 주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 아무리 높은 산도 결국에는 올라가고 마는 사람들, 그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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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1. 07:11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충만하심이 우리 가운데 가득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장소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해서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으로 주로 갈릴리에서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부의 사역으로 주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던 공생애 초기에 어떠한 사역을 하셨는지를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마태복음 4장 2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갈릴리는 어느 특정한 동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는 넓은 범위를 나타내죠. 이미 마태복음 4장에 등장했던 나사렛, 가버나움, 벳세다, 스불론, 납달리 이 모든 지역이 다 갈릴리에 속해있는 지역입니다. 이뿐이 아니지요. 수많은 동네가 갈릴리라는 지역에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찾아 다니셨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시대 활동했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 시대 갈릴리에는 200개 이상의 성과 마을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모든 성과 마을을 대부분 다 찾아 다녔다고 기록하였습니다.[각주:1]  
 
여러분,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모든 동네를 다 찾아다니셨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야지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성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의 이 질문은 단지 논쟁을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 마음 깊은 곳에서 꼭 알고 싶은 질문이지요. 자신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사마리아 성에서 하나님을 예배 했어요. 자신도 사마리아 성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장소를 찾아가는 거지요. 그렇게 찾아간 사마리아 성에서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그 여인의 마음속에 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마리아 성이 아니라 예루살렘까지 찾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가라는 정말 깊은 고민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을 만날만한 장소로 두 곳을 제시하지요? 첫째는 사마리아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러면 갈릴리는? 없어요. 하나님을 만날 만한 장소에서 예선 탈락입니다. 그 누구도 갈릴리와 같은 촌구석에서, 갈릴리와 같이 저주받은 땅에서 상상도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는 답이 무엇입니까? 이 산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뭐예요? 너희가 아버지를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아닙니다. 예루살렘, 아닙니다. 갈릴리, 상관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받아들이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세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땅 갈릴리에는 하나님이 안계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갈릴리에 200개가 넘는 성과 마을이 있더라도 우리 주님은 모든 마을을 다 찾아가십니다. 여러분, 갈릴리에 200개의 마을이 아니라, 2천개의 마을 2만 개의 마을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다 찾아가지 않으셨을까요? 아니요. 갈릴리에 아무리 많은 마음과 성이 있었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그 마을을 다 찾아다니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못 찾아가실 마을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각자의 형편이 어찌하든, 매 주일 참여하는 예배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다 

마태복음 4장 23절은 공생애 초기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며 행하셨던 사역을 크게 3가지로 요약합니다. 우리 다시 한 번 2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셨던 3가지 사역이 소개되고 있지요. 첫째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둘째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셋째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것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셨던 일입니다. 

갈릴리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갈릴리의 각 마을을 직접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굳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굳이 유명하다는 어떤 모임이나 집회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첫째로 가르치시고, 둘째로 선포하시고, 셋째로 고치시죠. 바로 이 3가지의 사역, 예수님으로 인한 바로 이 3 가지의 역사가 오늘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갈릴리에서의 예수님 사역, 그 첫 번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기적으로 회당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마치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을 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시작되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씨앗을 뿌리는 비유를 통해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씨앗을 뿌리는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가시덤불이 가득한 곳에 떨어지고 또 어떤 씨앗은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길가에 떨어진 씨앗도,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죠.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 비유에서 씨앗이 떨어진 장소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듣고 배우려 합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려는 노력이 없다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는 시간이 없이 어떻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여러분,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려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무엇인지 더욱 깊이 알아가려는 열망이 여러분들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여기서 ‘전파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선포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는 ‘설교한다’라고도 번역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선포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설명이 필요 없어요. 설득이 아닙니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가운데 복음의 선포가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치의 오류도 없기에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셨다는 믿음이 있기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죠. 여러분, 비록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에게 인간적인 연약함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매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평소에 하는 이야기는 다 무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영혼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말씀의 권위가 살아나고,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일어보면,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고 말씀하는데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백성 중의 모든 병과”,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은 몸의 질병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도 고치십니다. 몸의 질병, 마음의 연약함, 영혼의 아픔,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고치십니다. 바로 다음 절인 24절을 보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2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 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람들의 종류가 나옵니다. 모든 않는 자, 다시 말해서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영혼이 아픈 그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다시 말해서 몸의 질병입니다. 또 “귀신 들린 자”, 그의 영혼이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귀신에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간질하는 자”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아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풍병자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나의 몸인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질병, 이 모든 것을 누가 고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십니다. 아멘. 
저는 우리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역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셨다는 것이 우리가 병원에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의학적인 기술을 통해서 병이 치료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의 모든 질명과 모든 연약함을 고치셨다는 말씀은 불치의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이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는 불치병 중의 불치병입니다. 그러니 감기가 걸렸는데 하나님께 기도해서 낳았다는 그런 정도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낳는 거지요. 그런데 불치의 질병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는 질병들, 아무리 좋은 상담가를 만나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내 마음이 아픔, 그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우리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다 

우리 끝으로 마태복음 4장 25절 말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각 성과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3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죠, 둘째로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인간의 모든 질병과 약함을 고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는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로 따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찾아오면 이 3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계속해서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이 다 치유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가정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더욱 깊숙이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지고,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치유가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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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튜헨리주석」, 마 4: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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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3. 31. 07:11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사명을 위한 인생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실함이 하나님의 사명은 아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요한과 야고보 형제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8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시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의 어부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어떤 분들은 오늘의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특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지금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성실한 사람이라는 설명입니다. 물고기가 잡히기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동네로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면서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그가 베드로와 안드레였고 하나님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거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부모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누구를 도와서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시고,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사람은 누구라는 거죠? 부모님을 잘 돕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 이와 같은 설명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열정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맡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실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설명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에 오늘 본문을 바르게 적용하는 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실할 사람을 선택하시고, 성실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실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워요.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우리 시대에 정말 밤을 새우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부로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 성실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보다는 무엇인가 열심히는 살지만 하나님의 사명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밤을 새워서 열심히 그물을 던집니다. 성실하지요. 그의 가족들이 바라볼 때 든든한 아버지, 든든한 남편, 든든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습니다.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인간미가 흐르고, 사람의 냄새가 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세우고, 열심히 일해서 교회에 십일조 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그러한 열심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가치,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 하나님의 사명 

이제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삶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꾸십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9절)

베드로와 안드레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니 그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다보면 가족식구들도 먹여 살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그 이상의 어떠한 이상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삶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삶에 그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여러분, 당시에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아먹고 사는 어부들이 왜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베대, 이렇게 다섯 명 뿐이었겠습니까? 많은 어부들이 있었겠죠. 그리고 그들 중에는 베드로보더 더 성실하고,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데 그러한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중요하죠?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부르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다가 삶을 마무리 할 때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라가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는 고상한 철학과 사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던져서,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철학과 이상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람찬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도 계세요. 그러나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달려가는 분들은 결국 그 모든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나의 머리에서 나온 이상도 아니고, 나의 경험과 삶에서 나온 꿈도 아니고 나의 가치관에서 나온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가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를 절대 포기할 수도 없고,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지 못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따라가는 가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당대에 다 성취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씀 속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리스도인의 가치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분명히 들어갑니다. 그러나 전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4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물론 전도도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고 때때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제자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일상 속에 파묻혀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이 들리고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의 삶이 제자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선택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4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들이 반응합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절)

마태복음 4장 20절과 22절은 모두 동일한 두 개의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동사는 ‘버려두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사는 ‘따르니라’입니다.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그동안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로서의 삶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많이 달라요.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 가운데 두 명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베드로의 형제였던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개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시자마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장차 게바가 되리라" 반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반석, 교회의 든든한 반석이 될 비전을 선언하셨던 겁니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스토리는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4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이야기 중에 최소한 하나는 거짓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죠. 이 두 가지의 사건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모두 일어난 일입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1장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났던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 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기 전에 수많은 무리를 가르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셨는지,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땅에서 조금 떨어지신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배가 베드로의 배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는 고기를 잡는 자신의 일상 속에 살아갑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베드로', '게바', 곧 반석이라는 비전이 그의 삶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로서의 삶,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르는 삶을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드디어 아무런 비전도 없이 살아가던 예전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도전 하고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모르는 분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예수님께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지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꾸준히 비전을 주십니다. 이제는 거기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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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3. 27. 07:55

마태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 역사를 멋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데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완성됩니다. 그러니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에 오늘 본문을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마태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 다윗,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주에 묵상하였던 마태복음 1장 2절부터 6절 상반 절까지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를 서술했습니다. 이 기간이 대략적으로 약 1,000년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를 서술하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안에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을 새로 첨가합니다. 바로, 바벨론에서의 포로입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아브라함의 시대, 다윗의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분명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 또 하나의 시기가 여전히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태복음 1장 6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족보인데,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론 포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포로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이고, 출애굽을 기념하는 의식이 유월절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포로의 시기인 듯합니다. 여러분,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포로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최근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든, 예수님을 모르는 넌크리스천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크리스천들이 더 큰 마음의 아픔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을 생각할 때 포로의 시기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나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물질의 복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문제도 힘이 드는데, 내가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생각도 밀려옵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절망 

마태복음 1장 6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짧은 한 문장 속에는 다윗에 대한 역설적인 두 가지 사실이 들어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왕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이스라엘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왕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7절부터 등장하는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6절에 등장하는 다윗의 이름 뒤에만 왕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러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밧세바만이 자신의 이름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다말의 경우, 마태는 엘과 오난의 아내라고 기록하지 않고 다말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보아스에게서 오벳을 낳은 룻도 기룐의 아내라고 적지 않고 그냥 룻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다윗만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적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입니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까지도,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여자를 얻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였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0절에 히스기야가 있었고, 요시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정치를 잘 하기로 이름난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를 다스리는 왕의 이름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 왕들보다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유대 나라에 이방인의 우상을 옮겨 다 놓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성군 중의 성군이라고 불리는 다윗 왕조차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으니 그의 후손들은 보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다윗으로부터 14대가 지난 후, 바벨론 포로 시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처음에 예수님의 족보를 적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는 다윗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근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다윗 왕의 혈통에서 아하스와 같이 악한 왕이 나올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다윗 왕의 혈통에서 므낫세와 같이 악한 왕이 나올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다윗 왕의 후손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바로 그때에, 마태는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아하스와 므낫세가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 누가 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생각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렇게 양복을 잘 입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저 자신은 알거든요.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많은 사람들은 나와 우리 가정을 다윗 왕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희망 

마태복음 1장 12절부터 1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간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습니다. 그 정도의 세월이 흘렀으니 더 이상의 희망도 없습니다. 더 이상의 기대도 없습니다. 철저한 절망입니다. 다윗부터 요시야까지는 다윗 왕조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윗 왕조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의 마지막은 바벨론의 포로였습니다. 다윗 왕조가 제 아무리 화려했을 지라도, 인간이 세운 왕국은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이 그 안에 자리 잡게 되고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자라에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됩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은 별로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스룹바벨 정도입니다. 그것도 바벨론의 포로 이전에 등장했던 사람들의 신분이 주로 왕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참으로 무명하고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크리스천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 포로의 시기, 곧 자신의 연약한 본성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는 절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1. 바벨론 포로는 회개의 기간이다 

저는 이 시간에 복음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의 시기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소개하려 합니다. 그 첫째로, 바벨론 포로의 시기는 바로 ‘회개의 시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적어 내려갑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예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서론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족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기록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겉은 다윗 왕의 모습이지만,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사역을 하다보면, 수련회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련회가 큰 열기 속에서 진행되면 수련회 이후 각 부서나 교회에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련회에서 다른 어떠한 때보다도 회개를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의 한 부서가, 혹은 교회 성도들 전체가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는 경험은 그 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 아쉬운 수련회는 다른 기도는 열심히 했으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혹은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도가 없는 수련회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회개가 없는 기도는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날마다 내 안에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오래되면서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나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잘 못 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그 안에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니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내 마음에 복음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냉랭하고 차가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다윗 왕조의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로, 구약의 시대에서 신약의 시대로, 율법의 신앙생활에서 복음의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그 과정에는 반드시 바벨론에서의 포로 과정이 필요합니다. 곧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도를 되찾으시기 바라니다. 우리 교회가 회개의 기도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감격이 다시금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2.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침묵 기간입니다 

둘째로, 바벨론 포로의 기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시간’입니다. 

다윗 왕조 시대,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주신 약속, 곧 그의 왕위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 성을 둘러싼 18만 5천 명의 앗수르 제국 군대를 하루 밤 사이에 물러져 추신 사건 아니겠습니까? 다윗 왕조의 시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까? 아니요. 침묵하십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70년이 되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또 다시 다윗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또 다시 침묵하십니다.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시간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버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역사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의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로마의 권력과 분봉 왕 헤롯의 권력에 아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와 헤롯 왕의 권력을 더 신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역사라 보이지 않는 시기, 곧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때가 바로 바벨론의 포로 시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바벨론 포로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마태복음 1장 13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손놓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들의 족보가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족보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잘 들리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바벨론 포로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손을 놓고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 포로의 시기에도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꾸준히 그 계획의 성취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스룹바벨부터 요셉에 이르는 족보를 당시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준비하며 그 족보가 이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한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하나의 예가 아닌가요? 그 찬란했던 다윗 왕조 역시 바벨론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절망이지요. 인간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계속해서 이어오시면서 인류 구원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분명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절망 가운데 희망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절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된다고 말할 때, 반드시 바벨론의 포로 기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과의 차이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희망은,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경제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좋은 내일이 펼쳐지리라는 희망입니다. 아니요. 우리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시기가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약할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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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3. 25. 07:29

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시작은 온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창세기가 온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출발하였다면,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태복음 1장 1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족보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다윗,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인류의 언어가 흐트러졌고 모든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창 11장).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시면서 말이죠.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계보가 새롭게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위치입니다. 

둘째로 다윗입니다. 다윗으로부터 비로소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다윗 이전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정의 진정한 시작점, [각주:1] 나아가 이스라엘 역사상 왕정의 최고 전성기는 다윗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 대한 분명한 경계는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온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시대가 얼마나 좋으셨는지,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왕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다윗과 그의 시대를 그 기준으로 삼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위대한 것이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져 드디어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관점에서 전 세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마태복음 1장 1절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나님은 기원전 2천년 경,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천년 경,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중동지역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약 천 년이 흐른 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에 소개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펼치시는지를 살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우리의 삶에 커다란 시련이 찾아오면 우리는 목회자들을 찾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교만해지지 않도록 잠시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산은 워낙 스케일이 크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나의 앞에 닦친 단 하나의 시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약 2천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여줍니다. 이 정도 스케일이 되니,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열심히 묵상하다보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장자라고 믿음의 계보가 아니다 

오늘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를 묵상합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족보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2절부터 5절까지 한 목소로리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족보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이 족보가 장자로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습니까?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인가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기 14년 전,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자를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계보는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이어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이삭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이라고요. 

그러면 그 뒤에 등장하는 족보는 어떻습니까? 2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삭의 첫째 아들이 야곱인가요? 아닙니다. 이삭의 첫째 아들은 에서입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이죠. 게다가 에서와 야곱은 모두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계보는 이삭의 첫째 아들 에서가 아닌 둘째 아들 야곱에게 이어집니다. 그 다음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야곱의 4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지요. 

조금 더 볼까요? 3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창세기를 조금 공부하신 분들은 다말이 유다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 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기 이전에, 이미 3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곧 엘, 오난, 셀라입니다.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이 없이 죽었지요. 그러면 그 다음 장자의 권한이 누구에게 가야 합니까? 셋째 아들 셀라에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믿음의 계보는 베레스에게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도 특이한 사실이 눈에 띕니다.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세라 가운데 누가 형이지요? 세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계보는 오히려 동생인 베레스에게 이어지죠. 

베레스 이후로,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그리고 이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이 몇째 아들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아는 또 하나의 예가 등장하네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모두 7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이 몇째 아들입니까? 막내아들입니다. 오히려 막내가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윗이 왕이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위로 올라가서 요셉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가장 출세했던 사람은 이집트의 국무 총리였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 가운데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은 요셉의 넷째 형 유다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계보는 장자라고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셨다고 그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자녀라고 반드시 그 마음에 믿음이 반듯하리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교회 중직자의 자녀라고 어렸을 때부터 믿음의 뿌리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그 또한 오산입니다. 제가 청소년부서 담당 교역자로 있을 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신앙 교육이 가장 어려운 학생은 첫째로 목회자 자녀이고, 둘째로 교회 중직자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교회가 너무도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편안함을 뒤집어 말하면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의 감격을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과거의 헌신이 밑받침된 교회는 장자의 권한이 반드시 첫째 아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러한 위기 속에 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교회에서 철야로 기도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로 넘어오면서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건물은 남아 있고, 과거의 화려한 역사도 남아 있지만 교회는 무기력합니다. 그 중요한 하나의 이유를 저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찾게 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자녀의 신앙 교육에 너무도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아니, 목회자 자녀인데, 아니, 장로의 아들과 딸인데, 아니 안수 집사 혹은 권사의 자녀인데 그 믿음이 어디 가겠느냐고 안일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믿음의 계보에서 장자의 이름은 찾아보기기 힘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 족보의 여성들 

마태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족보를 묵상하다보면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우리 다 함께 3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누구를 통해 낳았습니까? 다말을 통해 낳았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참 이상한 족보입니다. 또 5절을 보십시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누구를 통해 낳았습니까? 라합니다. 라합이라는 여성 앞에는 어떠한 수식어가 붙지요? ‘기생’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그 뒤에 보아스는 오벳을 낳는데 누구를 통해 낳습니까? 룻을 통해 낳습니다. 룻은 사별자입니다. 첫 남편을 자신의 고향 모압에서 먼저 보내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와 결혼을 한 여성이지요. 한 마디로 예수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 같이 가족관계에 있어서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가 살피는 3명의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 없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가나안 사람입니다.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지요. 그리고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룻은 모압 사람입니다. 다 이방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가정에 아픔과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이 믿음의 계보에 포함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방 여인이 의인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됩니까? 어떻게 가정의 아픔이 있는 여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됩니까? 그런데 포함돼요.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겉모습을 보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출신만 놓고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만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복음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행적인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면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말씀일까요? 족보만 자랑하다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말, 라합, 룻과 같이 이방 여인이라도 지금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면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후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도 이와 같지 않나요?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죠. 우리 로마서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부터 32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들은 의롭지 않아요. 율법도 몰라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깊이 모릅니다. 그러니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유로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어달립니다. 그런데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당당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족보를 의지합니다. 그러니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족보,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마태가 참으로 멋있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멋지게 쓸 수가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술하면서, 결국에는 족보를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의인의 족보를 서술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나의 아버지가 누구고, 나의 어머니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라합과 보아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또 하나의 사실을 더 나누면서 설교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입니다. 5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살몬에 대해서는 성경의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여리고에 살던 여인이었거든요. 그러므로 살몬과 라합이 결혼을 하여 보아스를 낳은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에서 가나안을 점령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자 그들은 사사시대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시대이죠. 마태복음 1장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합니다. 룻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구약 성경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라합과 룻은 사사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제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없으신가요? 

믿음의 계보에서 라합과 룻이 부각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그 이름 앞에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는 라합은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고 성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남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자신의 고향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셨지만 자신을 멀리 떠나려고만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 여인이고 가정에 큰 아픔이 있는 여인들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베들레헴까지 시어머니를 찾아온 라합이나 룻 가운데 누구를 더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당연히 라합과 룻이 귀하죠. 그러니 믿음의 계보에 라합과 룻이 들어갑니다. 

라합과 룻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흠이 하나도 없기에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흠이 있어요, 잘못이 있습니다. 가정의 아픔이 있었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 그래도 자신은 섬기겠다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오는 그들의 결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때 예수 믿음 지 3대가 되고 예수 믿은 지 4대가 되는 가문에서 꼭 믿음의 영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나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나는 주님을 섬기겠다고 마음먹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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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약학자 기민석은 지파동맹이라는 옛질서에서 벗어나 왕국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선 것은 다윗으로부터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기민석, <구약의 뒷골목 풍경> (서울: 예책, 2013), 208-213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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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