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0. 5. 6. 17:45

2000년 전 유다 땅 베들레헴에는 요셉이라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주변의 모든 친구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같은 마을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여인 마리아와 약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약혼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셉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마리아의 태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요셉 자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만가지의 생각이 요셉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겠지요. 지금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과연 누굴까? 아니, 마리아는 자신과 한 평생을 함께 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자신과 약혼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당시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과 고통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도,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깜빡 잠이 든 요셉의 꿈속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너의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천사는 계속해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셉은 자신의 꿈속에 찾아온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가 낳은 아들에게 ‘예수’라는 놀라운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 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축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치유사건: 죄 용서의 사건 

마태복음을 비롯한 사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동네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가득 그 집에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손을 대어 위로하시며,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건이었음을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5절과 6절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중풍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 주변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질병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야, 안심하라.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 우리말 성경에 ‘작은 자야’라고 번역된 단어의 실제 의미는 ‘어린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신성 모독이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5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다음 구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개인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담겨진 더욱 깊은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주시는 죄인의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병 낫는 것보다

어느 시골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젊은 시절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여럿 낳은 뒤, 그만 남편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그 옛날 시골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자녀들을 돌보며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요? 이번에는 그 여자분 자신의 몸에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소진하고 본인은 한쪽 몸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께서 그분에게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 가면 병 낫는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병이 낫을 수만 있다면 교회에 가보자는 심산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매일 아침 언덕을 넘어서 시골교회의 새벽기도에 계속해서 출석하였습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심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서 서리집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이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여집사님은 중풍을 앓으신 이후 날아계실 동안 몸 한 쪽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출석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기도하였을 지라도 병이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출석한 지 약 7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 여집사님께서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은 자신에게 찾아온 중풍병을 치료하기 위해 교회 출석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기도 제목 역시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간절히 원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병이 낫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집사님은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그 주님을 분명 만나신 분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지금 질병으로 아프세요? 여러분, 지금 마음의 상처로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의 치유가 필요하신가요?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의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개인의 삶과 여러분 가정과 우리 교회에 치유의 능력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는 나와 같은,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죄인의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먼저 서기관들에게 시비를 걸고 계시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죄 용서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중풍병이 낫는 것입니까? 당연히 중풍병이 낫는 거예요. 죄를 용서받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데로 병만 고쳐주셔도 되잖아요. 마태복음 8장까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들에게 죄 용서를 명백하게 선언하신 적이 없었잖아요. 이번에도 그냥 병만 고쳐주시면 서기관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셨단 말이지요. 

여러분, 이후 마태복음 12장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회당에는 손이 마른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시는지 아닌지 유심히 지켜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다 아시면서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사건 바로 다음 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여러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면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시면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품고 그분을 결국에는 십자가로 몰아넣을 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니요.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당당하게 선언하십니다. ‘어린아이여, 너의 죄가 용서받았느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 이유가 없으시지요. 네, 맞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여 너의 죄가 용서받았느니라’ 

복음서를 묵상하면 으레 떠오르는 찬양 가운데 하나가 찬송가 294장입니다. 이 찬양의 가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큰 죄에 빠진 나를 주 예수 건지사 그 넓은 품에 다시 품으신 은혜는

그러나 여러분, 정말 저의 마음을 울리는 가사는 바로 2절입니다. 

옛 날에 유대 땅에 주 예수 다닐 때 그 은혜 받으려고 큰 무리 모였네
눈먼 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으니
나 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받도다

그래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 옛날 유대 땅을 거니실 때 그 은혜받으려고 큰 무리가 몰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어요.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면 서기관들이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것도 다 아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예수님은 중풍병을 앓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네가 죄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눈먼 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으니, 
그 결과로 나와 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받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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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5. 2. 17:40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단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나그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지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의 인생 말년에 애굽의 황제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질문합니다.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 질문에 야곱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야곱은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나그네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130세를 살았던 야곱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절)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몇 세까지 살았습니까?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장수하였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고향을 떠났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아직 약속일 뿐이고 아브라함이 175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땅이라고는 자신의 아내 사라와 자신이 묻힌 막벨라 굴 하나였습니다. 175년 동안 장수하였지만, 나그네로 살았지요. 

야곱의 인생을 보십시오. 그는 147세까지 살았습니다. 장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동안 머물지요. 나그네의 인생입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향 땅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곱의 딸 디나가 부족의 추장 아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죠. 이에 분노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그 성읍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제 자신의 고향에서 정착하며 편안히 살 수 있기를 기대했던 야곱은 또다시 그 동네를 피해 떠나가야 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먼 타향 애굽에서 맞이합니다. 나그네 인생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그네 인생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싼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다른 서기관들과 달랐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싼 이유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사람들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수많은 무리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는 장면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18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여러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출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의 중심지인 성전이 있고, 성전이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닦아 놓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의 길을 걸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동일하신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든 안정적인 삶, 모든 영광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도 당시 세계의 중심 로마로 향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유대 땅으로 오셨습니다. 유대 땅 중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아닌 저 북쪽의 변방 가나안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에서 조차 예수님 주변에 무리들이 에워싸니 그들을 피하여 예수님은 길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제 마음이 감동이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을 피하여 갈릴리 호수를 건너 도착하신 장소가 가다라 지방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가다라 지방에서 예수님은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던 두 명의 가련한 여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이 땅에 로마의 황제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저 북방의 언저리 갈릴리에 오셨고,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며 높이 칭송하자 그들을 피하여 귀신 들려 영혼이 다 죽어버린 두 명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나를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로 감격하며, 그 놀라운 사실에 눈물 흘리며 우리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 그것이 성탄절의 의미가 아닌가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스스로 나그네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은혜, 그 사랑이 우리를 모든 죄악과 모든 질병과 모든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인생 

예수님께서 자신을 에워싸는 무리를 보시고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실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그네의 인생을 선택하셨다는 이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한 사람, 어느 서기관이 아주 자랑스럽게 예수님 앞을 가로막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오늘 본문 19절입니다. 우리 19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서기관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만 놓고 본다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 다음 절에서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근거로 우리는 이 서기관이 왜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저는 따르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도대체 어떠한 의도로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군중들 사이에서 칭송받는 장면에 주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니 사람들이 그분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환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을 가득 데리고 왔더니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이 서기관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네, ‘저 예수를 스승으로 모셔야 네 인생이 펴겠구나’라는 계산을 순간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서기관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디서나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결국에는 종교가 중심인 유대 사회에서 출세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그 서기관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한 삶이 아니라 나그네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여우도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할 둥지가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를 두고 쉬실만한 장소조차 없는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나그네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의 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나그네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들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게 되지요.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아왔던 세월은 애굽의 종이었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거듭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평안한 삶을 누리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율법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요. 
급기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70년 동안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삼으십니다. 그들에게 다시금 나그네의 삶이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바로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금 성전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의기양양하게 선포했던 한 서기관에게 우리 주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정해진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 된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요구하실까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오늘 본문에는 서기관 외에도 또 한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 듯 듣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여겨지지요. 이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설명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이 사람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은 것을 분명하지만 아직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어떠한 의미가 될까요? 노쇠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인생을 옆에서 돌보아 드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부터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에 대한 의무가 사라지면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길을 걷겠다고 말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가 제자로서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데 또다시 발목을 잡는 무엇인가가 등장하게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그네의 길을 걷는 우리의 발걸음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본향 

저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한 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히 11:13-16)

여러분, 예수님은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로마의 변방 이스라엘, 그 가운데서도 변방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그 자리를 피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나그네 삶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나그네의 삶을 사셨어요? 네, 예수님의 고향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그네의 삶을 사셨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길을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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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5. 1. 16:55

마태복음 8장 5절부터 13절에서 우리는 한 백부장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능력, 겸손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고 우리 역시 백부장과 같이, 그리고 한 나병환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나의 열정적인 기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와 같은 원리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과 15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왜 들어갔는지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 나병환자와 같이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간구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어떠한 간청이나 간구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나 베드로의 아내가 예수님께 지금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는 장면을 목격하십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베드로나 베드로의 아내가 한번쯤은 등장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쯤 되면 예수님께 어머니를 고쳐달라고 요청할 만도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나 그의 아내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의 손을 만져 병이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베드로의 역할, 베드로 아내의 역할, 심지어는 베드로의 장모 자신의 역할도 그 어느 것 하나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통당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나고 베드로의 장인이 예수님을 수종 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없어요. 물론, 우리가 전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해야지요. 우리 자신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질병으로 고생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큰 상처로 고통스러우세요? 여러분의 영혼이 지금 큰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상처와 질병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십니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니, 우리가 그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순서가 계속 바뀌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질병과 아픔 가운데 있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고쳐주시고, 그 치유를 경험한 우리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위하여 봉사도하고 헌신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 내가 먼저 헌신하고, 내가 먼저 봉사하고, 내가 먼저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손길이 나에게 찾아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치유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치유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신 장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16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날이 저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모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능력이 크신 분이기에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귀신을 내어 쫓으실 수 있고, 말씀 한 마디로 모든 질병을 깨끗하게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날 밤 우리 주님은 자신에게 몰려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다 모아놓고,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의 질병은 떠나갈 지어다’ 선언하셔서 단 한 번에 모두 치유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의 장면이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온갖 병든 환자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있는 구절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 4:40)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어요.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베드로의 장인을 찾아가서 고쳐주셨잖아요. 예수님은 날이 저무는 그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씩 손을 얹어서 고쳐주십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병이 있으세요? 예수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병에 걸러 아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묵상하면서 저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 모두를 치유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여러분,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의미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리고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망가져 버린 영혼, 상처 난 마음을 우리 주님이 치유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다음 구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귀신들을 좇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네, 우리 몸의 질병도 고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치유를 영혼의 치유로만, 마음의 치유로만 바라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말씀 묵상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치유를 육신의 치유로만 바라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우리의 몸을 치유하시는 것,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것,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좋은 치료자가 되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주님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종 

마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장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많이 고치시고, 병든 환자를 많이 고치시는 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에 중요한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17절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지금 마태가 인용한 구절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53장은 고난당하는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오늘 마태가 인용하는 구절의 이사야 말씀을 제가 봉독해 드립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좋은 치유자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든 몸과,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아파하는 우리의 영혼을 바라보시며 찾아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얹으시고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당하는 종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아파하는 우리의 영혼을 고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상하고 찢긴 영혼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품고 살아오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 모든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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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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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8. 16:31

성경을 읽으며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치유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여 주시지요.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면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13절)

여러분, 우리의 치유는 저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치유를 얻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조금 더 기다리라 말씀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치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떠한 것인지,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중보의 능력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중보의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5-6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께 구했는지 성경은 ‘간구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예수님을 찾아 병을 고쳐달라고 했던 이유가, 자신이 병이 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집안 식구가 병이 들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자기 집 종을 위해 간구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자신의 자녀가 병에서 치유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은 이 백부장뿐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집 하인이 죽으면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나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간청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 집 하인이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여러분, 중풍병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큰 아픔을 느끼는 병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인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인을 향한 백부장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와 그를 위해 간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모든 소그룹이 중보기도의 능력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질병으로 고통하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환우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마음에 상처를 받아 아파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죄악으로 영혼이 병들어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자신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하인을 위하여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했던 백부장과 같이,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병든 환우를 돌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목회자가 먼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늘 부족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 하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요, 그저 로마의 한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자신의 하인을 위해 간절히 간구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감동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근거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중보 기도가 다시금 새로워지십시오. 우리 교회의 모든 소그룹은 날마다 중보기도하는 모임이 되십시오. 몸이 아픈 사람,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사람, 여러 가지 죄악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겸손의 능력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겸손의 능력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출애굽기 1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웠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직책입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100명의 부하를 통솔하는 지휘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는 백부장이 이끄는 백인대가 군대 조직의 중추였습니다. 한 마디로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특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의 첫 번째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어쩌면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면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예수님께 이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만일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백부장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자신을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서 철저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 군대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방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로마의 황제가 그 누구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지요. 로마의 군인으로서 이 백부장은 황제보다도 더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는 로마의 황제보다도 더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경우든,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100명의 로마 군인을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지위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튜헨리라는 분은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백부장은] 군대의 장교로서 마을을 통치하는 자이므로 스스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서 그리스도께 나아가 간구하였던 것이다. 주목하라,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구걸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들으십시오. “주목하라,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구걸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겸손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과 모든 연약함을 고치십니다.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치유하지 못하는 질병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이라는 지독한 질병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겸손하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한 병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질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나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다는 교만, 그 교만한 마음이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건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바디매오에게 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바디매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의 요청은 수락하여 주시지요.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드렸던 부탁과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드렸던 부탁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그 핵심적인 차이는 예수님께 요청하는 요구사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있지요. 다시 말씀드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예수님,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형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실 때 우리에게 높은 자리를 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은 자신 있었어요.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셨지요? 지금까지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셨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여러분이 우리 주님께 당당하게 나가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큰 질병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병자만이 아니라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마을을 통치하는 백부장도,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제자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구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백부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8절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말씀으로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역시 군인입니다. 그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네, 그에게는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통솔하는 부하 군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관이 명령 한 마디로 부하 군사를 움직이고 통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질병이 떠나갈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이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백부장이 배웠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만 백부장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는 믿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우리의 영혼은 치유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회복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대역전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0-12절)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감탄하십니다. 중보기도의 능력, 겸손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는 깜짝 놀라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선언을 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시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여기까지는 백부장과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따르는 자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방인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아 있지만, 정작 그 나라의 본 자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깨어나십시오. 다시 한번 믿음의 횃불을 치켜드십시오. 중보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구걸하십시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다시금 불붙어 우리 가운데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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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8. 16:02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사건, 특별히 치유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때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오해는 다음의 몇 가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은 단지 예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와 같이 당시의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었던 불치병을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정작 예수님께 표적을 요청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제가 봉독해 드립니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38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까? 그 이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다음 절을 제가 읽어 드립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40절) 

예수님은 분명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역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에는 그 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치유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축소하는 일반적인 오해, 그 두 번째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만 일어난 사건이라는 오해입니다. 2000년 전 유대사회, 다시 말해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던 바로 그 시대에나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오해입니다. 이러한 오해로부터 조금 발전한 것이, 예수님의 시대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치유의 사건이 예수님 시대에만, 혹은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시는 시기에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지요.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표적이 따르는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치유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만 모두 아홉 번이나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말씀,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던 마태는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집중적으로 기록합니다. 실제로 마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곧 복음을 선포하시는 사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 그리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입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서술하면서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사역,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과 동일한 수준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을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신 사역을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깁니까? 

그 이유는 2000년 전 유대 사회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 한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 매우 중요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나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합니다. 제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고 말해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뿌리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의 영혼을 병들어 죽게 만드는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예수님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병환자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한 나병환자가.” 1절에는 “수많은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나병환자 한 명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요청한 사람은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9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8) 

여러분, 나 자신의 육신에,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에,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이 간절함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굻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 

자신에게 예수님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던 한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2-3절)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저를 깨끗하게 치유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저를 깨끗하게 고쳐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신다고요? 주님께서 원하신데요.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원하신다고요.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이 더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온갖 종류의 아픔과 슬픔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가정이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루 빨리 그 가정을 치유하고자 하신다고요. 여러분, 우리의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어떠한 마음을 품으실까요? 하루라도 빨리 우리 교회를 치유하고 싶으신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방법도 주의하여 보십시오.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손으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고치셨어요. 3절 뒷부분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치유의 방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대십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어느 부분에 손을 대셨을까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병이 가장 심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치유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질병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예수님은 그의 상처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육신의 질병이 심해서 고통스러우세요? 예수님께서 더욱 안쓰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쓰리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손을 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큰 질병에 걸려 있습니까? 비록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만큼은 여러분의 죄악을 멀리하시기보다 가까이에서 손을 대시며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님께 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4절)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명령, 곧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을 찾아가라는 명령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해석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사역을 계획하고 계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되기까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모세의 율법이 정해놓은 바대로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신 것은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라는 명령이라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설명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한 가지 던져줍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레위기에서 나병환자를 제사장들이 진찰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은 진찰하는 것이지 나병을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나병환자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은 나병환자가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아직 치유받지 못한 환자가 있다면 그를 돌보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고치는 일은 누가 하십니까? 네, 예수님만 하십니다. 교회가 이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성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네, 우리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했던 것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어요. 우리의 질병을 우리가 치유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질병, 우리 영혼의 질병을 우리 스스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께 매어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치유를 위하여, 마음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다른 데를 가도 소용없습니다. 제사장이 나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그분에게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영혼의 질병을,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레위기 13-14장 “진찰과 치료”

레위기 13장과 14장은 제사장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역할 하나를 소개해줍니다. 곧, 나병 환자를 진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암’이라는 병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건강검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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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3. 07:21

책을 무척 사랑하고, 책을 마음으로 아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신이 매우 아끼는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책을 빌려간 친구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천하며 빌려준 그 책은 좋은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책에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YBH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친구에게 질문했습니다. “자네가 이 책에 그토록 많이 적어 놓았던 Y. B. H. 는 무슨 의미인가?” 

그러자 책을 빌려준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Y. B. H.는 ‘Yes, but how?’의 약자이네. 나는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저자가 쓴 내용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그의 생각이 삶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네. 그래서 ‘Yes, but how?’하는 표시를 한 걸세.” 버논 그라운즈라는 분이 쓰신 <생산적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의 서문에 소개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읽는 수많은 신앙 서적들, 경건 서적들의 내용을 생생한 현실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지금까지 수 없이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지금까지 묵상했던 산상보훈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말씀 실천의 장애물 - 거짓 선지자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천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실천을 방해하는 요소가 등장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 그 첫 번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절)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뒤집는 거짓 선지자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특징을 어떻게 묘사하십니까?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모양은 화려하고, 겉모양은 순수해 보이지만 내면의 의도는 추악하다고 위협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 전체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조심해야 할 그들의 특징이 22절과 23절에 등장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것,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은사이지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지칭하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령의 권능, 성령의 은사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 곧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기보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가득한 삶, 그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요,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에 관심이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성령의 은사, 신비한 능력에 더 집중하게 합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공하며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제자의 삶은 계속해서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떠나도록 하셨지요. 70명의 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주님께 매우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능력, 곧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고는 너무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우리는 귀신이 우리 앞에 굴복하면 기뻐하고, 귀신이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슬퍼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을 칭찬하면 기뻐하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슬퍼합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큰 교회를 목회하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능력의 종인 것처럼 칭찬을 받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며 적은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면 능력이 적은 종인 것처럼 주눅이 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권능, 능력, 크기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뒷전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 실천의 장애물 – 내적 변화 없음 

산상보훈의 말씀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그 첫 번째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이유가 등장합니다. 곧,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6-18절)

나무는 좋은데 나쁜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나무가 나쁜데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가시나무가 아무리 포도 열매를 맺고자 하여도, 가시나무에서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가시뿐입니다. 엉겅퀴가 아무리 무화과 열매를 맺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하여도 엉겅퀴에서 무화과 열매가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는 잠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지라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때의 결심일 뿐, 나의 속 사람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자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성령께서 지배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나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나의 결심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데 어떻게 우리의 결심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의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누가복음에도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오늘 본문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것을 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창고로, 인간의 행동이나 언어를 창고에서 꺼낸 물건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휴지통에 온갖 쓰레기를 가득 채워놓았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맛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겠습니까? 냉장고에 온갖 좋은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아야 그곳에서 맛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비교의식, 열등감이나 우월감, 혹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순간적인 결심과 감정적인 헌신으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먼저 나의 마음을 성령께서 바꿔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의 단어, 하나의 표현에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의 표현은 바로 22절에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씀 중에서 제 마음이, 그리고 저의 시선이 고정되었던 하나의 표현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22절의 말씀은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한두 명의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성령의 권능,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사만 강조하지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걸어온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습니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그 길이 크고 넓어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 제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제외하고라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문이 아닌, 넓은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사 시대와 비슷하지요. 사사시대 율법이 없었나요? 아니요. 율법이 있었어요. 사사시대에 율법이 선포되지 않았나요? 아니요, 율법이 선포되었어요. 사사시대에 선지자들이 없었습니까? 아니요, 사사시대에도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그들의 죄악을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우상이 가져다주는 힘, 우상이 가져다주는 풍성함, 우상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좇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따르는 삶, 율법의 정신에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 6:15) 

여러분, 이것은 그가 굉장히 겸손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자신의 조국이 미디안이라는 나라를 섬기고, 모든 백성이 미디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그때, 기드온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실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디안을 섬기고 있을 때, 혼자서 미디안과 싸워 승리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선언하는 일 역시 힘에 겨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그때, 홀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려워요.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제자의 삶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과감히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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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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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2. 11:4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좁은 문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작지만, 넓은 문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도 설명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은 크고 넓습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험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탄탄대로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크고 넓은 길이 자신 앞에 펼쳐지기를 바라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물에 있어서도 크게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상식입니다. 
모든 사람은 좁고 협착한 길, 꼬불꼬불하고 험한 인생의 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려 해도 필요한 자본이 없고, 평안하고 단란한 가정을 원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인생은 그 누구도 싫어합니다. 그러한 인생의 길은 피하고 싶은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들이 모두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그 길,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선호하는 크고 넓은 그 길은 피하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거부하는 좁고 협착한 그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선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복음의 능력, 말씀의 권능은 인간의 상식적인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상식적인 선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머무르고 있기에 우리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단과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예수님은 13절과 14절에서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제자의 삶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 바로 앞 구절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령을 하시죠. 무엇이든지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너희도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초등학생이라도, 아니 유치원생이라도 다 이해하고 있는 논리입니다. 사람들이 감정이 상해서 서로 말싸움을 할 때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어?” 무슨 뜻이지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 단순한 이야기, 이 상식적인 원리를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말씀과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상식적인 원칙,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너희도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을 대부분 사람들이 행동으로 실천하나요? 예수님께서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을 걸어간다고 선언하셨잖아요. 다시 말해,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 곧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원칙을 지키며 순종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단과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제자로서의 삶이 저 천상에서나 가능한, 혹은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리는 영적인 음성을 직접 들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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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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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1. 07:05

구약의 선지서를 공부하고 묵상하다 보면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도 달라 충격을 받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번성했을 때는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이제 발흥하기 시작한 앗수르 제국이 있었고, 북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전통적인 강대국 애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앗수르 제국과 애굽 제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평화를 누렸고, 정치적인 평화 위에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나라 북 이스라엘을 이끌던 여로보암 2세는 앗수르 제국과 애굽 제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국제 정세를 십분 활용하여 국가의 번영을 이루었던 것이죠.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이름은 아모스이고, 호세아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북 이스라엘이 곧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삶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이 나라는 곧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예언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거죠. 

아모스가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던 시대에, 북이스라엘 벧엘이라는 지역에서 선지자로 있던 아마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아마샤라는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에게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아모스 7장에 나와 있는 그 보고의 내용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암 7:10-11)

이것이 아마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에게 보고한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보고의 내용이 뭡니까? 이 땅, 북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견딜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이 국가의 번영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도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예언합니까?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나라가 망할 거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니 그 땅이 견디지를 못하지요. 


남유다의 선지자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번영하였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아모스와 호세아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를 보내셔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선지자를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보내신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 보내신 선자자들 가운데 남유다가 멸망하는 시점에 활동하셨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남 유다의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을 구해주시고, 우리를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당시 백성들이 열심히 기도했던 기도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19절) 또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21절) 

제가 읽어드린 기도의 내용이 유대 백성들의 기도인지,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의 기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백성들도 이와 같이 기도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와 같이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으니 백성들도 간절히 기도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들리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렘 15:1)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선지자도 백성들의 기도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 없으니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라’는 거예요. 에스겔 선지자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 중에는 남 유다 백성들을 불의 땔감으로 쓰겠다는 말씀도 있어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그 나무를 어디에 사용하겠냐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못 맺는 포도나무는 무엇을 만들기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불을 때는 땔감으로나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번영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셔서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남 유다가 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지 않겠냐고, 그래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겠냐고 백성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의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남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제국으로 끌려갔습니다. 남 유다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때, 유대 백성들이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희복의 메시지를 예언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예루살렘 성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그 발 강 가에서 듣고 슬퍼하던 에스겔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겔 37장). 이미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의 성전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겔 47장). 

모든 사람이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아직은 해볼만 하다고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절망을 선언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의 믿을만한 구석이 있을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때, 나의 힘과 나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때,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린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구하세요. 찾으세요. 그리고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기도, 찾는 기도, 그리고 두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아주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절)

오늘의 본문에서 핵심 구절을 뽑으라면 저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얻게 되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보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지 않을 때가 있더라고요. 언제입니까? 아들이 독립하면 더 이상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장성하여서 독립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아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부모님의 필요를 공급하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다 성장하여 독립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 그것도 아주 어린아이, 이제 막 태어나 부모의 손길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아들을 염두에 두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어떠한 기도일까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배가 고프지만 스스로 먹을 것을 챙겨서 허기를 달랠 수 없기에 그저 ‘앙~~~’하고 아빠와 엄마를 향해 우는 그 울음과 같은 기도입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나에게 철저히 절망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 빨리 스스로에게 절망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대해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빨리 절망하십시오. 그 절망 가운데 피어나는 기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요.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기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기도했을 지 한번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3년 동안은 그다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그 밤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입장에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을 먹일 음식이 없어도,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거든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공격을 해와도,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다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을 이끌어갈 책임이 누구에게 주어졌지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떠나고 안 계세요.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베드로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공격을 해오면 베드로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 무거운 책임이 주어졌는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요. 베드로 자신에게는 리더십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많은 사람들을 먹일 돈도 양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려주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만한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구하고, 또 구하고, 또 구합니다. 찾고, 또 찾고, 또 찾습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그 결과 성령께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강하게 임하시고, 그들이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또 어떻게 기도했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바울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가문 좋죠. 학벌 좋죠. 그가 걸어온 경력은 그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이력서는 화려합니다. 그러니 굳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바울은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을 잃어버립니다. 

유대교에서 열심을 내었던 자신의 과거 화려한 경력이, 이제는 유대교 입장에서는 바울을 배신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도 바울은 경계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주변에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것이죠. 그 절망 가운데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기도합니다. 바로 그때 자기 스스로에게 철저히 절망했던 바울이 하나님께 어떠한 기도를 드렸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였고 그 결과 바울 역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에 부흥이 보이지 않는다는 탄식의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한국 교회에 부흥이 없습니다. 몇몇 성장하는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교회를 옮긴 경우, 이른바 수평이동이 대부분입니다. 한국 교회에 더 이상 부흥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 사라졌습니다. 

만일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가 여전히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로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 교회가 아직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자랑이 사라져야 합니다.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의 놀라운 부흥의 기억을 하루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했던 위대한 역사를 잊어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아무리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철저히 절망해야 합니다. 그 절망 가운데 우리는 비로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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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20. 10:34

구약성경 전도서 7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옳지 않은 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많은 꾀를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점에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만들어졌기에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피하고 싶어요. 그래서 잔꾀를 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정직한 율법의 말씀에 자신의 목적을 위한 꾀를 덧입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의 율법, 특별히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분명하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하면 살인한 자는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의도가 무엇인지를 평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마음에 앙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만일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우연히 실수로 누군가를 죽였다면 도피성이라는 장소에 피해서 또 다른 보복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도피성에 대한 제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조금 변형시켰습니다. 어떻게 바꾸었지요?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머저리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무시와 멸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정직하게 만드셨기에, 그들도 자신의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요.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최소한 살인하지 않았으니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얕은 꾀였습니다(마 5:21-26).   

 

마태복음 5장 21-26절 / 그리스도의 형제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을 움직이셔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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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간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요. 구약의 율법, 특별히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간음하지 말지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박사들이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현재 자신들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간음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양심에 비추어볼 때 간음이 죄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또다시 꾀를 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음에 대한 율법의 예외 조항을 찾아냅니다. 이혼에 대한 예외조항입니다. 율법은 이혼을 금지하지만 만일 이혼을 하게 된다면, 여자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외 조항을 이용해서 자신의 아내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내어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드셨고, 하나님은 정직한 율법을 주셨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많은 꾀들을 내었습니다(마 5:27-3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금 누가 듣고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듣고 있나요? 아닙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율법의 박사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아니요, 예수님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거나 병 고침을 받은 많은 무리들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시고 부르신 제자들입니다(마 5: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내용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정직한 율법에 인간의 잔꾀들을 포함시켰는지를 지적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1-12절 / 축복의 사람

하나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는 팔복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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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잘못을 지적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에 인간의 잔꾀를 첨가하지 말라는 예방 차원이었겠지요.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길을 따르면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직하게 만들어 놓으신 인간은 그가 제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가 제 아무리 교회의 중직자라 할지라도, 그가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라 할지라도 많은 꾀를 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1-2절)

예수님으로부터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는 못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는 데에만 탁월한 사람들이 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으로 우리 가족들, 나의 자녀들, 나의 친구들을 비판하는 탁월한 무기는 갖추었지만,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우리들에게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잔꾀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제자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매주 교회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의 개인적인 경건 시간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말씀이요, 여러분들이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나의 잘못에 더욱 민감하라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예를 세 가지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를 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으로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얼굴을 우거지상으로 만들고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옷을 땅에 질질 끌면서 다녔습니다.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기도하고 또 구제하는 사람들, 얼굴을 흉하게 하면서 구제하는 사람들은 사실 당시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야, 참, 저들이야 말로 경건한 사람들이구나’라고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과 거리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는 사람들, 얼굴을 흉하게 하면서까지 금식하는 사람들은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분명하게 그들의 속마음을 꼬집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 인간은 똑같구나. 저들이 민족의 지도자들이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기 위한 심산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의 원래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으신 이유가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무시하라는 의도였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과 동일한 잘못, 곧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가지고 나의 삶을 돌아보기 이전에 꼭 다른 사람을 평가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고 싶어서, 그 말씀을 내가 잘 아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던 잘못된 마음, 곧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싶은 외식하는 마음이 제자들에게도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아니.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쩌면 더 크게 제자들에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지만 내가 열두 명의 제자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티끌 하나만큼 있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의로운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티끌과 같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택함 받은 제자라고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티끌과 같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칭찬받는 우리들,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우리들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이 들보와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 고린도전서 8장 1절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참으로 그렇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요. 그 지식이 설령 성경 지식이요, 하나님의 대한 지식일 지라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었으면, 먼저 나에게 적용해야 할 텐데.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받아야 할 텐데. 우리는 자꾸 잔꾀를 내요. 그래서 나에게 들리는 말씀, 바로 나를 위한 말씀, 내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은 우리 가족을 위한 말씀이요, 그 말씀은 나의 친구를 위한 말씀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갈등의 씨앗이 되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절) 

예수님께서 참으로 답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죽 답답하시면 이런 비유를 다 드시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개나 돼지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자신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은 어찌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지, 그것이 너무도 답답하셔서, 나에게 주신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마치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면 개와 돼지가 그것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고 아무리 일러주어도, 그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기에 그 사람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그 다음 구절입니다.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자신이 깨달은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전해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것을 물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발견하는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는 인간의 잔꾀가 교회 안에, 그리고 가정 안에 분란이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들렸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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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0. 4. 9. 17:53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6장 1절에서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지요. 잠시 앞으로 넘어가셔서 6장 1절의 말씀을 우리가 한 목소리로 봉독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참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신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입니다. 아울러, 마태복음 6장 1절의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를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상을 구하는 신앙이라면 참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거짓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의 믿음과 우리 모두의 신앙이 거짓 믿음, 거짓 신앙이 아니라 참된 신앙이요, 참된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을 던져버리십시오. 그것은 모두가 거짓 신앙입니다. 오직 나의 믿음과 나의 신앙이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보상을 받기 위해 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신앙이요,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된 신앙과 참된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하신 뒤에, 오늘 본문부터 참된 신앙, 참된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매우 강력한 공격 세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보이고, 하나님께만 보상을 받으려는 참된 믿음과 참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대한 장애물이 세 가지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재물에 대한 탐심이 자꾸 우리의 마음을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상을 받는 일에 관심을 두게 하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신앙의 장애물, 그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등장하는 말씀으로 ‘세상의 염려’입니다. 뭐 그렇게 염려할 것이 많은지,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자꾸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상을 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그 세 번째 장애물은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등장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고, 내가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내가 평가하려는 유혹, 바로 그것이 참된 신앙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이 세 가지 장애물을 잘 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에 대한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내일에 대해 염려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에서 돌이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하나님께만 보이고, 하나님께만 상을 구하는 참된 믿음과 신앙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바라보라 

오늘은 세 가지 장애물 가운데 ‘재물에 대한 욕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9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쌓아둔 재물’과 ‘땅에 쌓아둔 재물’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땅에 쌓아둔 재물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여기서 좀은 벌레를 의미하고 동록은 곰팡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쌓아둔 재물은 곤충이 먹어버리기도 하고, 곰팡이가 피어서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특징이지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두 번째 특징을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이것이 이 땅에 쌓아둔 보물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물론 우리시대에는 예수님의 시대와 달리 재물을 창고에 쌓아두지는 않고, 은행 계좌에 맡겨 놓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행 계좌에 벌레나 곰팡이가 생길 리 없고, 도둑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진리가 아닌가요? 마치 시간이 흐르면 창고 안에 있는 곡식에 벌레가 생기고 곰팡이가 피듯이 우리의 돈을 은행 계좌에 넣어두면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데, 물질이라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어느덧 없어지고 사라져 버려요. 어디 그뿐인가요? 나의 돈을, 나의 물질을 은행 계좌에 넣어두면 안전하게 보존될 것 같은데, 몇 푼 되지도 않는 나의 돈을 노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의 재물은 유한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요. 물질만 있으면 우리 가정에 행복이 올 것 같고, 은행계좌에 예치금의 액수가 커질 수록 나의 노후는 보장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이 세상의 물질은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재물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에,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쌓아둔 보물과 대조되는 하늘에 쌓아둔 보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늘에 보물을 가득가득 쌓아둔 사람이 있고요, 하늘에 보물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 똑같이 풍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하루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이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야지, 그 안에 곡식을 가득 채워 넣어야지, 이제부터는 내가 평안히 쉬고 즐겨야지.’ 그 부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이 비유의 말씀을 다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이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십니다. 예수님의 이 평가를 귀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러분,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에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땅에는 많은 재물을 쌓아두었지만 정작 하나님께 대해서는 가난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단한 재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재물을 주셨다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경제적 궁핍하여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풍성한 응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 이 세상에서 조금 궁핍하게 살아가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과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과 재물은 유한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조금 부요하신 분도 계시고, 조금 궁핍한 분도 계시지만,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하나님께 대하여 궁핍하신 분이 계셔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 가운데 단 한 분도 예외 없이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이 세상의 물질은 유한한 것이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의 재물을 모으는 일에 그토록 골몰해 있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재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인간의 신체 가운데 하나인 ‘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연 어떠한 의미일까요? 재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예수님은 왜 갑자기 인간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 저 하늘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우리는 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이 세상의 것들, 이 세상의 물질과 이 세상의 쾌락과 이 세상의 유혹에 어두워지면 우리는 저 하늘에 재물을 쌓지 못한 채,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이 땅의 것들만을 쫓아가다 인생을 마감하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 세상의 것은 덧없는 것이고, 저 하늘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저 하늘의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저의 영의 눈이 열려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제발 저에게 믿음의 눈이 열려서 세상의 관점이 아닌 믿음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날마다 기도로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의 눈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되요. 그래서 자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을 인식하는 거짓 신앙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러분,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있으십시오. 바로 그때만이 우리의 눈이 이 땅의 것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만 상을 구하는 참된 믿음과 참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물질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본문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도 없습니다. 한 손으로는 물질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으려는 자세는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분명하게 못을 밖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소개했던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어느 농부가 목장에서 일을 하다가 얼굴에 매우 기쁜 표정을 하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그는 당장 아내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여보, 오늘 너무도 좋은 일이 있었어. 우리 소가 새끼를 두 마리나 낳았어. 한 마리 새끼는 흰색이고, 다른 한 마리 새끼는 얼룩무늬야.” 두 마리의 어린 송아지가 생겼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는 이 농부가 아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지금 태어난 두 마리 송아지를 잘 키워서 한 마리는 팔아서 하나님의 사업에 씁시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팔아서 우리와 우리 식구들을 위해 씁시다. 그러자 이 아내가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소를 주님의 사업을 위해 쓰면 좋을까요?” 그 남편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은 송아지들이 어리니 잘 키워서 나중에 어떤 소를 주님께 드릴지 생각해 봅시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농부가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집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아내를 부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여보, 큰일 났어요.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아내가 다도기며 말합니다. “여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그러나 농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친 주님의 소가 죽었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머뭇머뭇하면, 어제나 주님의 소는 죽고 나의 소는 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여러분의 물질도, 여러분의 시간도, 여러분의 정성도 쏟아 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큰 액수, 많은 액수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담아 여러분의 손에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십시오. 그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잠시 있다 사라질 이 땅의 재물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여러분의 재물과 보물을 가득가득 쌓아놓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가난하고, 이 땅에서는 비록 풍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풍요로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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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