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질문한 것이지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자들의 질문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 질문은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가 묻고 답해야만 했던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으로 표현을 조금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복음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삶으로 드러냈고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복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드러나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찌하여 사람들이, 특별히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겼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두 가지로 답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그러한 현상을 인정하셨다는 대답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1절)
여기에는 두 가지 대명사가 대조를 이루고 있지요. “너희”와 “그들”입니다. 너희는 제자들을 가리키고 그들은 무리들을 말합니다. 무리들은 천국의 비밀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참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너희’로 대표되는 제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허락되다’입니다. 본문에 주어가 분명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누가 허락한다는 의미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는 허락하시고 누군가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죠. 사람의 지식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나 박사학위가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이라고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온 사람이라고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신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특별히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겼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찾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두 번째로 구약 성경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하지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14-15절)
초대 교회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근원으로 삼았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성경이지요. 어찌하여 사람들이, 특별히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겼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면서 초대교회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구약성경의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답이 내려졌습니다. 천국의 비밀에 대한 너무도 중요한 특징. 천국은 감추어져 있지만 동시에 드러났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 나아가 초대교회가 던져야 했던 질문에 충분히 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비밀에 대한 더욱 중요한 하나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6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7절)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비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 시대 선지자들과 의인들에게도 사실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들과 의인들조차 알 수 없었던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눈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너희’와 ‘저희’의 구분,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누가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았는가?의 질문으로는 바른 답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바른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신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표면적으로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했던 장면을 예수님께서 그저 언어로 표현한 것뿐이었지요. 어쩌면 바닷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마 13:1)을 찾아오는 길에도 목격했던 장면일지 모릅니다. 혹은 해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도 무리들의 눈에는 저 멀리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 대부분이 농부로서 씨앗을 뿌려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농업이 주된 생산 수단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가장 익숙했던 하나의 장면을 서술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목에 걸고 밭고랑을 따라 씨를 뿌렸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의 일부는 길 위에 떨어지기도 하였고 흙이 별로 없는 돌밭이나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당시 농부는 그러한 씨앗을 다시금 좋은 밭에 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하루 종일 동일한 일을 반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묘사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었지요(9절).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을, 가시떨기에 뿌려진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넘어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로 구분하였지만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모두 하나의 분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마지막의 좋은 밭은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농부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뿌릴 때, 혹은 씨앗을 뿌린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처음 세 개의 밭과 마지막의 좋은 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씨앗을 뿌릴 때, 혹은 씨앗을 뿌리고 이제 막 싹이 올라오는 시점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땅 가운데 오직 길가에 떨어진 씨앗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도 싹이 나오고 줄기가 올라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돌이 간직하고 있는 열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보다 먼저 싹을 틔우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므로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어느 것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인지 결코 속단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다른 마음의 밭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가지는 내가 지금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의 마음이 길가인지, 돌밭인 지, 가시덤불인지, 아니면 좋은 밭인지 결코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농부는 어느 땅에서 열매가 맺힐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도 30배의 결실을 맺을지 아니면 60배나 100배의 결실을 맺을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땅에서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결실을 하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 더 적게 결실한다고 멸시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땅이 되어 결실하는 사람이라면 그 결실의 양을 떠나서 칭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당시 회중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면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당시 회중들이 깜짝 놀랄 만한 대목이 딱 한 곳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장면, 그 가운데 일부가 길가에 떨어지는 장면, 혹은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장면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좋은 밭을 설명하시는 대목에서 그 비유를 처음 들었던 유대인들 대부분이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바로 어떤 씨앗이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평균적인 수확의 양은 뿌린 씨앗의 10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농부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결실을 이야기하십니다. 곧 100배의 수확입니다. [각주:1]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당시의 농업 기술로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100배의 결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만 어느 밭에서 100배의 결실이 나올지 모릅니다. 때로는 내가 뿌리는 씨앗이 길가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는 모습에 절망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오는 모습에 잔뜩 기대하였지만 돌밭과 가시덤불로 판명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농부가 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하나님은 100배의 결실을 허락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는 이삭이 100배의 수확을 얻었고 그 결과 거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창 26:12-13). 이처럼 100배의 수확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본문으로]
2004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당시 출판시장에 큰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사복음서 외에 다른 복음서가 있고, 바로 그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죠. 당시 『다빈치코드』라는 하나의 소설만이 아니라 공중파 다큐멘터리에서도 소설 『다빈치코드』가 전제하고 있는 내용, 곧 성경에 포함된 사복음서 외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있고 그 기록을 보면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가르쳤던 내용과는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내용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대중적인 소설과 공중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는 당시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고등부를 담당하던 전도사였습니다. 중고등부 겨울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소설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나그함마디 문서가 과연 어떠한 문서이고, 고대교회가 나그함마디 문서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저작들은 꼭꼭 숨긴 뒤,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사복음서를 성경에 첨가하였다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수련회 기간 안에 설명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약 성경에 사복음서를 비롯한 27권이 포함되게 된 과정을 조사하면서, 소설 『다빈치코드』의 전제가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지를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다 찾아놓았어요. 이제 그것을 정리해서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코드』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보다는 청년 교사가 이야기를 해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 청년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 청년에게 특강을 해 달라고 부탁했던 거죠.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 청년은 신학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청년이거든요. 그 청년이 자신은 도무지 특강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설득해서 특강 강사로 세웠어요. 그리고 제가 준비한 모든 자료를 다 주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논리적인 흐름을 다 알려줬어요. 자료가 있고,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 되는 거죠.
수련회 첫째 날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다빈치코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 5분 정도는 논리적으로 잘 설명했어요. 그런데 그 5분의 내용은 『다빈치코드』가 전제로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논리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강의가 시작된 지 5분 정도가 지난 이후부터 이 청년의 머리가 백지가 된 거예요. 그때부터 더듬기 시작했는데, 맨 뒤에 앉아 있던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수했구나. 그냥 내가 할 걸….
그런데 여러분,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 5분이 지나자 그 청년의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 뒤로부터 약 20분 동안 그 청년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청년이 울먹거리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지금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TV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고, 소설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든 상관없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거죠.
그날의 수련회가 끝나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수련회에서 제가 한 설교를 기억하고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저에게 이야기한 학생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당시 수련회에 참여했던 학생들 중 대부분이 그 청년 교사가 수련회 때 눈물을 흘리며 『다빈치코드』에 대해 이야기했었다는 사실, 그 선생님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음을 제가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언어의 힘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MBC 아나운서였던 백지연 씨가 언젠가 스피치에 대해서, 특별히 목회자들의 스피치인 설교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백지연 아나운서는 매주일 예배에 참여하여 설교를 듣는 평신도들, 백지연 아나운서 자신을 포함한 평신도들은 매우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는 것이 별로 없기에 설교자들은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백지연 아나운서는 평신도들이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똑똑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진심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것은 공기를 울리는 소리이지만, 사람이 소통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진심이거든요. 우리의 언어에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묻어 나오고, 사람들은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아야 열매가 좋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언어 생활이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33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우리가 함께 읽은 33절의 개역개정판 성경의 번역은 마치 언행일치를 명령하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든지, 아니면 나무도 나쁘고 열매도 나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일하라는 말씀으로 들리죠.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표준새번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읽어드리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네,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이와 같은 의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나무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열매는 무엇을 가리키나요?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좋으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도 아름답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마음에 악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은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결심을 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공격적이며 악한 언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과 언어의 관계를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인간의 마음과 언어의 관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5절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창고로, 인간의 언어를 창고에서 꺼낸 물건으로 비유하시죠. 휴지통에 온갖 음식 쓰레기를 채워놓았는데 제 아무리 탁월한 요리사라 할지라도 어떻게 거기에서 먹기 좋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겠어요? 냉장고에 온갖 좋은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아야 그곳에서 맛 좋은 음식을 꺼낼 수 있는 거지요. 우리의 마음에 비교의식, 열등감이나 우월감, 혹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은데,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있겠느냐고요.
여러분, 진심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기 원하세요? 여러분의 언어와 여러분의 행동이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이 가득하기를 소원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 넘쳐흐를 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와 우리와 행동이 크리스천다운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언어는,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여러분에게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기준으로 우리의 마음을 평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36절과 3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아니 예수님,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배웠는데요.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수가 있나요? 때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에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평가하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 이렇게 질문하지 마십시오. 말씀드렸잖아요.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언어를 통해 묻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평가하실 때, 사람을 심판하실 때 그의 언어를 통해 평가하시고, 그의 언어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급기야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마 12:22-24).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을 평가하시죠. 바리새인의 마음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이 가득 차 있다는 있다는 증거로 무엇을 들이대십니까?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쏟아 놓았던 그 비난의 언어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우리 인간도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결국에는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누군가의 마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무엘 선지자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거든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사무엘의 예언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모두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꼭 그렇게만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사무엘의 말에는 힘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서 사무엘이 한 마디 하면 그 말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넘어서, 사무엘은 그의 언어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사무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그의 말이 헛되지를 않았던 것이죠. 사무엘의 언어에 대해 이토록 칭찬하고 있는 사무엘상의 말씀은 실상, 사무엘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평가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단순한 말 실수였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말하는 기술이 부족해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도 변명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논리는 명쾌합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여러분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여러분을 평가할 때도, 나아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평가하실 때도 그 기준은 여러분이 평소에 내뱉는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현장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 그 두 번째는 우리의 마음이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향해 독설을 퍼붓자 예수님은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악독한지를 지적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폭력적인 언어만 공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대해 매우 중요한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만일 누군가 어느 집을 약탈하려 한다면, 그 집을 지키고 있는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으면 그 집을 약탈할 수 없다는 비유입니다(마 12:29).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강한 자가 지키고 있는 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어두움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예수님의 공격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안에 어두움의 세력과 빛의 세력이 서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이 어딘지 아세요? 크리스천과 안티기독교가 갈등하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이 아니라고요.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은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당연하지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거든요. 우리의 마음이 비교의식, 열등감, 우월감, 미움, 시기, 다툼, 탐욕 등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은 참된 크리스천의 말과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가장 점령하고 싶어 하는 고지는 어디일까요? 당연히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지키고 싶은 요새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당연히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마음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사로잡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에 성령의 충만함이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말과 행동으로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능력이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참된 안식은, 참된 쉼은 안식일이나 주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입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참된 안식이나 참된 쉼은 안식일이나 주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21절까지, 마태복음은 안식일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2장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 바로 앞에 등장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1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위대한 초청의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이 매우 수고롭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매우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예수님께 나아오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신 그 말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이와 같은 배열을 했겠습니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참된 쉼은 바로 안식일 혹은 주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은 안식일 혹은 주일에 시작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하루 종일 집에 누워서 잠을 자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잠이 부족하게 될 것이고, 하루 종일 쉰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쉼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면, 여러분 먼저 예수님의 이 약속은 안식일로부터, 바로 주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에 쉼이 없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에 회당에 있으면서도 참된 쉼이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손이 마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9절과 1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대화하시던 바로 장소를 떠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태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회당’이라는 단어 앞에 어떠한 단어가 붙어 있습니까? 바로 ‘그들의’ 회당입니다. 아니 회당이면 회당이지 그들의 회당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왜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였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자신의 생명처럼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다양한 규정을 지어 놓고는 그것들을 다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그들의 회당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안식일에 대해 강조하지만, 그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쪽 손이 마른 이 사람은 벽돌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이 마르니 어떻게 자신의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자신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이 겪었을 아픔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이라나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든 상관없이 손을 움직이지 못하니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겠죠.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에 아무런 일을 안 합니다.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안식일 규례는 어기지 않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데로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면 뭐합니까? 안식일은 지키지만 그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는데요. 우리가 때로는 몸이 너무 힘들어 삶이 지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이 버겁고 힘이 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지금 한쪽 손이 마른 이 사람은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외향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쉼이 없고, 그의 삶은 곤고하기만 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한 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입니다. 10절에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무엇을 질문합니까?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이 옳은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안식일에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옳지 않은가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에는 보다 중요하고, 보다 핵심적인 질문이 빠졌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일을 지키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 마른 사람과 같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안식과 참된 쉼으로의 초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일이 되면 예배에 참여하지요, 주일이 되면 성도들을 만나죠. 주일이 되면 교회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를 하죠. 그러나 그 마음에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없고, 주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시작되는 한 주를 힘 있게 살아갈 힘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회당에 있던’ 한쪽 손이 마른 바로 그 사람입니다.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
회당 안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십계명의 말씀을 어쩔 수 없이 지킬 수 밖에 없었던 사람,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쉼이 없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죠. 오늘 본문 11절과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우리는 양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집을 팔기 위해 부동산에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얼마나 얼어붙었는지 그 누구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요.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값을 형편없이 부릅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집을 제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다음날 출국을 해서 주일 오전 밖에는 계약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같으면 주일 오전 예배 빠지고 부동산에 가서 도장을 찍겠습니까? 아니면 계약을 포기하고 주일 예배에 참여하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지 아시잖아요. 바리새인에게 양 한 마리는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양한 마리는 그 자체가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잃어버릴 상황에서는 안식일 제도고 뭐고 상관이 없어요. 당장 가서 자기 재산을 챙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정죄하려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그 다음 구절입니다. 1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셨죠?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다음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요.
사람은 자신의 재산, 자신의 재물을 지키는 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관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쉼을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애뜻한 심정이 느껴지세요? 안식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안식일의 규례와 같이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지만, 그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시름과 고난이 가득한 그 한 사람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 한 사람이 양 한 마리와 비교할 수 없도록 귀하지 않느냐?’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이 타는 듯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시름과 고난이 가득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 안에도 여전히 쉼이 없고, 교회 안에도 여전히 위로가 없고, 교회 안에도 여전히 평안을 발견하지 못하는 바로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너희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냐’고 말씀하시며 여러분을 찾아가십니다.
손 마른 사람의 순종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참된 쉼을 주십니다. 그의 손을 고쳐주시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손을 내밀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말 번역은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 곧 ‘손을 내밀라’는 표현의 원어적 의미는 ‘손을 펼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명령은 손을 펼치면서 내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손이 마르는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 부분도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손이 시들어서 – 마치 꽃이 시들 듯이 - 오그라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손을 내밀어 펼쳐보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은 순종하기 매우 쉬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펼쳐 내보이라는 명령은 순종할 수가 없는 말씀이죠.
한 번은 예수님께 몇몇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몸에 중풍이 와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의 형편을 아는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채로 메어서 예수님께 데려온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는데, 그 환자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너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6) 몸에 풍이 와서 조금도 못 움직이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바로 그 일을 명령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바쁜 일상 속에서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바쁜 거 같아요.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등산이라도 가고 쉬면서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은 월요일부터 금요일, 혹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주일이 되어 또다시 아침 일찍부터 교회를 가야 해요. 이런 모습을 보면 주일에 쉼을 얻고 휴식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지만, 여전히 쉼을 누리지 못하던 가련한 한 사람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주일에 쉼을 얻으십시오. 쉼을 누리세요. 주일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십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쉼이 되고요. 말씀을 듣는 것이 쉼이 되고요. 교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쉼이 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 쉼이 됩니다. 그 놀라운 쉼의 비밀, 우리에게 쉼과 휴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분히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식일,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주일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신앙심이 깊은지 얕은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누군가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여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보면 압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주일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본 중에 기본이요,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기초 하나가 다시금 반듯하게 놓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율법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율법입니다. 안식일은 한 주에 하루는 쉬라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안식일이 아닙니까?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은혜, 일상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는 은혜가 안식일입니다. 쉼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애굽에서 종으로 살면서 쉼이라고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선물로 주십니다. 은혜지요. 심지어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진영에 함께 살고 있는 노예, 종, 그리고 가축까지도 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율법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제도 자체는 사람들에게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얼마나 엄격하게 율법으로 요구하시는지 보십시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출 31:14)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선고하십니다. 실제로 민수기에 보면 안식일을 어겨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군가 안식일에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옆에 있던 사람이 보고 모세와 아론에게 알렸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처분이 무엇인지 기다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5장 35절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해 안식일을 어긴 이 사람은 사형을 당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한 주를 보내면서 안식일 하루만큼은 모든 업무와 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께 집중하는 안식일은 분명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하고, 바람직한 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율법이 아닌 그저 권고사항으로 제시하셨다면 안식일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었을까요? “안식일에는 좀 쉬는 것이 너희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최소한 한 주에 하루만큼은 하나님께 집중해야 너희의 영혼이 새로운 힘을 얻고, 너희의 종이나 가축까지도 쉬게 한다면 너희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이스라엘 백성의 재량권 아래에 두었다면,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육식보다는 채식이 몸에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육식을 피하지 못하고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규칙적으로 운동하지 못하고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나의 영혼이 성숙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아무리 좋은 안식일의 제도를 알려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율법으로 정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못 박아놓지 않으면 인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안식일을 율법으로 제정하셨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은혜입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과 만나 교제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라고 하여 율법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때로 주일을 지키기가 부담되고, 때로 마음이 분주하고 어떠한 일로 말미암아 마음에 조급함이 생길 때, 주일이 은혜이면서 동시에 율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속에 썩 내키지는 않고, 예배를 빠지면서까지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주일을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죠. 그런 경우가 많으시죠? 특별히,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부담스러운 일이 있는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바로 그때, 주일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율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는 주에는 더욱 모든 순서에 다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일을 율법의 차원에서도 지켜 나갈 때, 주일에 담겨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더욱더 깊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안식일을 율법으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어긴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되었고, 그에 따라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율법의 조항을 자세히 묵상하다 보면 안식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8절부터 10절까지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켜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자신의 일을 할 것이지만, 일곱 번째 안식일만큼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 그들의 가족, 그들의 종과 가축,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손님들까지도 모든 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신학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율법으로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만물을 만드신 창조의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순차적으로 온 만물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가정을, 그리고 우리의 교회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아름답게 빚어가고 계셔요. 하나님의 그 섭리 안에 일주일에 한 번 우리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나의 인생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복된 날,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이 두 번 등장하죠.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본 출애굽기 20장과 더불어 신명기 5장에도 십계명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5장 12절부터 15절의 말씀도 함께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 5장 12절부터 14절까지는 출애굽기와 동일한 안식일의 규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다른 부분이 있지요. 바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신학적 이유를 밝힌 부분입니다. 바로 15절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구원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 곧 꼭 지켜야 하는 율법이지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날이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처음 율법으로 주어지는 그 순간부터 율법이지만 동시에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키는 주일도 마찬가지죠. 주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교정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 오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리새인이죠.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1절과 2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지금 바리새인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안식일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니 어길 수 없다는 거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런 노동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아가 안식일을 보다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유대교 랍비들이 가르쳐준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합니다. 분명히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교정해주시기 위해 3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장 3절부터 5절까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구약성경 가운데 안식일을 율법으로만 이해하면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구절을 소개하십니다. 먼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가면서 너무도 배가 고파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떡을 먹었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다윗이 범죄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또 하나의 장면은 안식일에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노동’을 하도록 율법이 규정해놓은 부분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예수님은 안식일을 율법으로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을 교정해주십니다. 안식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만일 우리가 안식일을, 혹은 주일을 율법이 아닌 은혜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말씀을 주실까요? 안식일이나 주일을 은혜로만 여겨서 거의 방종으로 흐를 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으실까요?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나의 개인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선택할 때 예수님은 안식일이 십계명에 기록된 계명이 아니냐고, 안식일을 어긴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지 않으실까요?
만일 우리 가운데 주일을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만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래서 주일을 지키지만 그 안에서 참된 자유와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주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라고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만일 우리 가운데 주일을 율법이 아닌 은혜로만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주일을 지키는 일이 좌우되는 분들이 계시다면, 주일이 은혜이면서 동시에 율법이라고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의 유일한 주인 – 예수님
안식일을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만 생각했던 바리새인의 오해를 지적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지적하십니다. 오늘 본문 6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런데 호세아 6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던 거죠. 그들은 제사를 드려요. 안식일 규정에 따라서 제사를 드렸다고요.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호세아 선지자는 안식일 제도, 제사 제도보다 더욱 중요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율법의 계명, 율법의 문제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시죠. 8절을 보시면,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안식일은, 그리고 주일은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율법이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율법으로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일을 율법으로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주일에 대한 자유를 무한히 허락하신 말씀으로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안식일은 지켜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율법이면서 동시에 은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는 것뿐입니다. 주일은 우리에게 율법으로 다가와요. 왜 그렇습니까? 주일의 주인은 우리가 이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주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께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기 위해 주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은 율법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안식일과 주일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율법의 제도와, 모든 율법의 규정과, 모든 제사의 절차가 안식일과 주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면서 누구를 만나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 안으로 다시금 깊숙이 빠져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일의 주인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경구절에도 이와 같은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소개하며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베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거든요.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입니까?
고린도후서의 세상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의 세상의 죄악 된 사람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은 언뜻 상충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가지 말씀이 모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은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는 한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크리스천이 이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가운데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갈 수 있다는 위험성은 날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후서의 말씀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의 말씀과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모두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의 말씀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 없는 생활 습관에 휩쓸리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지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죄를 범하고 온갖 악행을 행하는 세상 사람들과도 사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세상과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수도원 전통입니다. 수도원 전통은 약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까. 물론 수도원 운동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균형감을 가지고 유지하였던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경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시간들이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에,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세상의 문화와 짝하여 동일한 멍에를 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는데, 세상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그 안에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경우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세 가톨릭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잡았고, 세상의 통치자들을 지배하였지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의 믿음과 신념을 지키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나타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불화
오늘 본문 역시, 언뜻 보면 다른 본문과 상충하는 듯 보입니다. 오늘 본문 34-36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런데 에베소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이 짧은 구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중간의 모든 막힌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정반대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화평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말씀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말씀을 따르겠어요?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동일한 질문을 물어 오신다면 저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도 저의 대답은 두 구절의 말씀이 모두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 말씀은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두 구절 모두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옳습니다. 진리입니다. 복음은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곧 우리가 복음 안에서 모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네, 에베소서의 이 말씀은 귀한 진리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아름다운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음이 들어가는 바로 그 자리에 복음으로 말미암는 불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는 간증을 여러분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았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도 사실입니다. 진리예요.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때로는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말씀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하게 된다는 이 두 가지 말씀을 모두 받아들이는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를 향해 미움의 감정이 있다면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화평이 깨어지고 불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간가와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화평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복음을 마음에 세기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우리 주변에는 화평이 아니라 갈등과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누구와 화평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7절부터 39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모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정의
손양원 목사님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분이시지요. 1948년 당시는 한한도 전체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손 목사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기독교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었고, 이들은 결국 당시 좌익 청년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10월 21일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강철민이라는 청년의 주도로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지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강철민을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우리 시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 가운데 충만하였던 손양원 목사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셨습니다. 모든 막힌 담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베소서 2장의 말씀과 언뜻 보기에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손양원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일제말기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어쩔 수 없이 신사에 절을 하였지요.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그래서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들을 이른바 ‘옥중 성도’라고 부르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1940년 9월 25일 당시 애양원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손양원 목사님을 잡아가기 위해 형사 두 명이 손 목사님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손 목사님은 감옥에 갇혀있었지요. 그런데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님이 경찰에 의해 끌려가던 바로 그날, 손양원 목사님의 아버지가 손 목사님의 뒷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애비야,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까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래이.” [각주:1] 마태복음 10장 37절부터 39절까지가 어떠한 말씀인가요? 오늘 본문이지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당시 손 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실제로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5년여의 세월 동안 투옥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가족들로서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감옥에 투옥되자, 그분이 목회하셨던 순천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손 목사님의 자녀들은 고아원에 가서 생활하게 되요. 그 과정에서 손 목사님의 사모님이 겪었을 삶의 애환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 시대 자신의 믿음을 지지키 위해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순교하신 분들의 믿음은 위대한 것이었지만, 그분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와 가정에 큰 아픔과 시련을 주는 것은 타당한가?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시며 공양해야 한다는 사실이 눈앞에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자녀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지요. 그러나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이 투옥과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에베소서 2장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이 아닌 검을 주신다는 말씀이 모두 너무도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능력은 우리가 진리를 따를 때 발휘하게 됩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나아가 옳은 것을 당당히 행하는 것, 이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능력입니다. 때로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불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과 관계가 소원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결단이 없이는 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본문은 분명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얻게 되는 놀라운 상이 있습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선지자에게 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영접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상을 약속하십니다. 또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에게도 의인의 상이 있습니다. 의인에게 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를 영접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상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42절을 보면 그저 냉수 한 그릇 대접하면 그에게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판단합니다. 그리고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거절합니다. 비록 그 선택이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와 손해를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때로는 그 선택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손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의 욥기를 처음 1장부터 42장까지 진지하게 정독하여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구약의 욥기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기 전에 저는 욥기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설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욥과 같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은혜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욥은 재산을 자녀들을 다 잃어버리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신의 몸이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욥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은 욥에게 처음보다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설교를 들은 이후에 실제로 욥기를 처음 1장부터 42장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들었던 설교의 주제는 욥기 전체가 가르치는 핵심 주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의롭게 된 우리가 고난이 몰려오는 순간에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이 욥기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욥기의 매우 작은 부분입니다. 욥기의 핵심 주제는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크리스천 역시 큰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크리스천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것이죠.
욥은 몸에 병을 얻었습니다. 자녀들을 마음에 묻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만하면 큰 고난이요,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친구들이 와서 그에게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정죄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에게도 어렵고 힘든 시기가 찾아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서 낙방할 수가 있고요. 원치 않는 질병이 찾아올 수도 있고요.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고통과 고난은 더욱 참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죠? 우리에게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범하였나?’ ‘내가 알지 못하는 죄악이 있나?’ 고민을 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크게 떠오르는 것이 없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러실까?’ ‘하나님은 나에게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이미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큰데, 거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포함하여 고민하게 되니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 - 인내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왜 저는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였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잘 경험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이와 같이 질문한다면, 예수님은 ‘왜냐하면’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같이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24절과 25절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처음부터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한 마리의 양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셨던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였지만 그분에게 돌아온 것은 뭐예요?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세상의 출세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나 칭찬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인내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절)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3절)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가 참아야 합니까? 그냥 저희에게 좋은 길을 주시면 안 되시나요?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왔고,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살아왔고, 그래도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조금만 좋은 것으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인으로 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죄인들이 자신을 거역한 일을 참으셨기에, 우리도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의 원리 - 하나님의 섭리
예수님께서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가르침을 주시지요. 오늘 본문 26절부터 28절까지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인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28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리 떼 한 가운데 양 한 마리가 던져졌는데 이리 떼가 그 양을 가만히 놓아두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그마한 잘못만 발견하면, 혹은 우리에게 조그마한 불행만 찾아오면 세상 사람들은 교묘하게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인내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혼이 그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의 초두에 욥기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욥기를 1장부터 읽기 시작해서 20장 혹은 30장까지 읽고 머물러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욥기는 처음 1장부터 천천히 정독하며 마지막까지 읽기조차 쉬운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의 고난은 한두 장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뒤에 장황하게 욥이 왜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한 채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욥기를 처음부터 20장 혹은 30장까지만 읽고 멈추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의인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 고난도 견디기 힘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그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았는지 조차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바로 그와 같이 답답한 매일의 삶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욥기를 42장까지 다 읽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과정이 지루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42장까지 다 읽으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의인의 고난을 왜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에 많은 고난을 뒤따릅니다. 괴롭지요. 힘이 들지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신뢰해야 할 ‘섭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28절부터 31절까지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참새 두 마리가” 여기에서 한 마리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수 없이 많은 참새를 만들어놓으셨지만, 그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생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그렇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는 귀한 생명이라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이겠습니까? 우리의 개인의 모든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그 다음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귀하게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사람은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왜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한 마리 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나 자신을 붙잡고 계신 것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 한 가지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 삶의 처음과 마지막을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며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관심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라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제는 거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기독교 윤리학자였던 리처드 리버라는 분이 1951년 저술한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 원 제목을 그대로 옮겨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리처드 니버 교수는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제시합니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세상 문화에 대하여 견지하였던 자세나 태도는 다섯 가지의 큰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니버 교수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대하는 태도의 다섯 가지 유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리처드 니버는 먼저 기독교가 세상 문화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문화는 악한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문화를 거부하려는 태도가 지난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자주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입니다. 이 유형에 속한 기독교는 세상의 문화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가 세상 문화를 대하는 태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마지막 유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태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유형입니다. 첫 번째 유형과 같이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 악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두 번째 유형과 같이 세상의 문화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가지고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가는 기독교의 모습,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은 지난 50년 간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입문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 문화를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는 좋은 자료였지요. 다시 말해, 리처드 니버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세상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기독교의 복음과 성경의 가치에 따라 세상의 문화를 오히려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미국 드류대학교의 레너드 스윗 교수라는 분이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레너드 스윗 교수는 리처드 니버 교수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가 지금 우리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리처드 니버의 책을 읽으면 세상에서 길들여진, 이미 세상의 문화를 거역할 수 없는 기독교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상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가치관과 상충하는 많은 장면에 직면하게 됩니다. 성경은 낮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도 크게 된다고 말씀하지만, 세상은 그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편법을 써서라도,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챙겨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요구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많은 영상물에는 폭력과 왜곡된 성이 무차별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그저 악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며 거부하고 살 수만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 할 수도 없죠. 그래서 교회는 그동안 리처드 리버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문화를 조금씩 변혁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이 시대의 문화를 성경적으로 기독교의 정신으로 변혁시켜 왔나요? 아닙니다. 사실은 교회 역시 세상의 흐름 속에 거의 함몰되어 있지요. 여기에는 미국의 교회이든, 한국의 교회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레너드 스윗 교수의 주장처럼, 마치 그리스도인 자신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 가운데 보낸 양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교육하신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 속에 파송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두명의 사도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지만 세상 가운데 파송 받은 제자들, 세상 가운데 파송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이리 떼 가운데 떨어트려진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주일을 기다리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있어 주일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감하십니까? 주일이 되어 예배에 참여하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고 자신에게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함께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이 가장 기다려지고, 주일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동시에 평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닌가요?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우리 크리스천 청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아십니다.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요, 오히려 이리 떼에 던져진 양의 모습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훤히 할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크리스천을 세상 가운데 밀어 넣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런데 이 문장의 우리말 번역은 조금 의역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양과 같은 너희를 이리들 가운데 보낸다.’ 양과 같은 우리를 이리 떼 한가운데 보내시는 분이 누구세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할 수 있을까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크리스천으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살아갈 때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에 굴복하던가요?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힘과 능력이 없어요. 바로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리 떼와 같은 이 세상 속에 양과 같은 우리를 던져 넣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새를 벗어나라는 명령
구약의 다윗은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의도, 곧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지 다윗은 사울 왕이 거주하는 왕궁에서 사울의 신하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자 다윗은 왕궁을 피해 도망가지요. 여러분,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유대나라를 떠나 가장 먼저 망명을 갔던 나라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블레셋 나라에 망명을 가지요. 블레셋 나라의 가드라는 도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다윗이 망명할 지역을 처음에는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블레셋 지역으로 갔는데, 블레셋의 모든 백성들은 이미 다윗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얼마 전 전쟁터에서 죽인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 나라의 최고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백성들 입장에서 다윗은 민족의 영웅 골리앗을 쳐 죽인 국가의 주적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그 길이 급하기는 급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자신이 얼마 전에 블레셋의 전쟁 영웅 골리앗을 죽여놓고는 자기 목숨을 구제하기 위해 바로 그 블레셋에 갔단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사람들은 금방 다윗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민족의 주적인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자, 다윗이 다급한 마음으로 꾀를 하나 내었으니, 곧 미친 척 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 민족의 전쟁 영웅 골리앗을 쳐 죽일만한 그런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었죠. 그래서 간신히 자신의 목숨을 건져냅니다.
그리고 다윗은 정 반대편 나라로 다시 망명을 시도합니다. 블레셋 나라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나라로 망명을 떠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는 모압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사실, 모압이라는 나라는 다윗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숨어있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다윗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이죠. 오벳의 아버지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누구일까요? 네, 바로 룻이죠. 그리고 룻은 모압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압 사람들에게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모압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모압의 왕은 자신을 찾아온 다윗을 대하는 방식이 블레셋의 가드 왕과는 달랐습니다. 모압의 왕은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여서 그들이 모압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여러분, 이미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국경을 넘어서까지 군대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행히 이스라엘 서쪽에 있었던 블레셋은 몰라도, 이스라엘 동쪽에 있던 모압에서는 다윗과 그의 가족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압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합니다.
그런데, 모압에 머물며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 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 선지자의 이름은 갓이죠. 갓 선지자가 다윗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다윗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모압 땅은 요새와도 같습니다. 사울의 칼날이 도무지 넘볼 수 없는 요새, 그곳이 모압입니다. 그런데 그 요새를 떠나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십니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유다 땅은 사울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유다 땅에는 사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주둔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요새가 아닌 유다 땅으로 내모십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양과 같은 다윗을 안전한 요새에서 끄집어내셔서 이리 떼 한 가운데인 유다 땅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우리, 양과 같은 우리 크리스천을 이리 떼와 같은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이리 떼와 같은 세상 한 가운데 던져 넣으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 던져 넣으시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다 함께 18절 말씀을 봉독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리 떼 가운데 던져진 양과 같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다보면 억울하게 총독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재판받을 때가 있어요.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리 떼 가운데 던져진 양이 어떠한 경우를 안 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양이 이리 떼에 던져진 것과 같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세상 가운데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만일 모압 땅 그 요새에 거하였다면, 다윗은 사울이라는 큰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모압이라는 요새를 떠나서, 유다 땅으로 옮기십니다. 유다 땅에서 다윗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이리 떼에 던져진 어린양 한 마리와 같은 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과 같은 다윗이 이리 떼 한가운데 떨어진 것과 같은 바로 그 유다 땅에서 모압이라는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윗 본인에게는 물론이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친히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우리 크리스천은 오늘과 같이 매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성도들 간의 교제를 나누지만, 하루가 지나 월요일이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친다 할지라도 이 세상의 직장과 학교에 파송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여러분 나를 이 세상 가운데 크리스천으로 파송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 세상 가운데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요구되는 것 - 지혜 & 순결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세상 가운데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리고는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과 같이, 세상 가운데 파송된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두 가지 덕목을 말씀하시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6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두 가지 덕목은 첫째로 지혜요, 둘째로 순결입니다.
먼저 지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0절까지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리 떼의 실체는 17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서 심문을 당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19절). 사람들이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나를 모함할 때, 무엇이 진리요 무엇이 참인지를 들어낼 수 있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하지요. 바로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의 대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양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참인지 그 자리에서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두 번째 덕목은 바로 순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순결의 덕목에 대해서도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럼요. 이리 떼 한 가운데 던져진 양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결심만 하여도 여러분은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네, 이것이 순결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애쓰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순결입니다.
저는 하루의 시간이 흘러 내일 또 다시 세상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여러분들에게 순결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순결은 인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뭐 그리 다르냐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종교는 종교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을 단념하도록 계속해서 재촉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내, 곧 순결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두 가지 덕목을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순결입니다. 그런데 지혜든, 순결이든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은 내 안에서 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먼저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19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세상 가운데 크리스천으로 살다가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드러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순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피하면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인내가 마지막에 다다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내하지만, 그 인내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그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인내를 붙잡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가 지나면, 또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이리 떼 한가운데 던져진 한 마리 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를 이 세상 한 복판에 던져 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는 소원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도 주시고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인내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후기 사역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초기 사역을 크게 3가지 사역으로 요약해서 설명해줍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등장하지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9:35)
여기서 모든 도시와 마을은 주로 갈릴리에 있는 다양한 도시와 마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1) 가르치시며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3)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초기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대표적인 활동 세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구절이 이미 마태복음에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찾아보십시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마태는 자신이 요약한 예수님의 초기 사역 세 가지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기록해 왔습니다. 가장 먼저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사역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지요.
목자의 마음
이처럼 마태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각각의 사역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세 가지 사역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집중하는 부분은 바로 그다음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5절과 36절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세 가지 사역을 주로 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만들었던 비결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무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들을 향한 목자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바로 그 목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셨고, 바로 그 목자의 마음으로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바로 그 목자의 마음으로 모든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질병을 치유하는 사역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역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목자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목자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자의 심정이란 가난한데 자식이 많은 엄마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줄 게 없어요. 먹을 것이 없다고 엄마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주고 싶고, 손톱이라도 빼주고 싶고, 막 쫓아다니면서 무엇이든 먹이고 싶은 겁니다. 그게 목자의 심정이지요.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마음으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바로 그 마음으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어찌,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향한 마음이었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동일한 마음으로 천국의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예수님은 동일한 목자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예수님은 동일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마음으로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7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추수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습니다. 추수할 때를 맞이한 농부의 심정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것은 해변에서 수많은 모래알을 바라보는 피서객의 마음과 다릅니다. 해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도, 논과 밭에 널려있는 곡식알도 많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변에 있는 수많은 모래알을 보면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곡식이 논이나 밭에 가득한 모습을 보면, 농부는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농부에게 있어서 논과 밭에 널려있는 곡식 하나하나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래알이 많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 성경의 표현대로 무리가 몰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해변의 모래알과 같이 생각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지금 당장 추수하고, 지금 당장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주어야 한다는 농부의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무엇이 없습니까? 추수할 일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종교가, 곧 유대교가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자 정치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교에 입문하였고,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가운데 유능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한탄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추수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추수하는 일꾼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까? 그들에게 성경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그들이 정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구제를 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들이 종교적인 혹은 정치적인 조직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없었던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 곧 목자의 심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은 무리를 바라보며 추수할 알곡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사람들을 보면서 목자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꾼을 위한 기도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러면 이른바 ‘평신도’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네요.’ ‘하나님,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그들도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소그룹 리더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목자의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평하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불명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8절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물론, 이 구절은 추수할 일꾼을 새롭게 보내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일꾼이 ‘추수할 일꾼’, 곧 목자의 심정을 품은 일꾼이 되도록 기도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일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세워진 일꾼들이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 교회의 성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곧 목자의 심정을 품은 일꾼으로 세워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마 9:30-31)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명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였는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신 사건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셔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계속해서 퍼집니다. 31절은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그 온 땅에 퍼뜨렸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바로 그때, 온 세상에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크게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반응은 ‘그저 놀라는 것’입니다. 본문 32절과 33절입니다.
“그들이 나갈 땡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어떤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귀신에 사로잡혔던 영혼이 자유를 얻고, 그의 입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랍게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 자세히 보십시오. 33절에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무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그저 놀랍게 여기는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보면서 그저 놀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TV에서 놀라운 사건에 대해 보도를 하면,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흥미롭게 시청한 TV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신이 나서 이야기할 지도 모르죠.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놀라운 사건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을 자유하게 하셨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혹은 그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놀랍게 여길 뿐입니다. 그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일으킨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삶도 변화시켜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본문 33절이 가르쳐주듯,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의 무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단순히 놀라운 일에 그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보여준 두 번째 반응은 오히려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귀신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영혼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치유 사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놓고,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응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나 자신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6절과 27절입니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6절에 ‘그 소문’은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민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누가 들었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명의 소경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들린 예수님에 대한 소식에 놀라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두 명의 소경에게 어린 소녀가 살아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린 소녀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두 명의 소경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런데 이 소경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라면, 자신의 눈을 고쳐주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들 마음에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죠.
이 대목에서 어떤 분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자신의 삶에 적용했던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잖아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에 큰 질병이 없으니 예수님께 간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저 역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믿지만, 저는 귀신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고, 몸에 불치의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저에게 적용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와 같은 질문이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들이 계십니까? 만일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은 정말로 건강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정말로 아무런 상처가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정말로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예수님께서 언젠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적용의 단계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어린 소녀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두 명의 소경은 예수님을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곧바로 반응하여 주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잘 보십시오. 두 맹인이 앉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것이 아닙니다. 두 맹인이 그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두 맹인이 ‘따라오며’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리시고는 그 장소를 떠나시지요. 그 집을 떠나 이동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소리 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예수님께서 그냥 집에 들어가 버리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부터 예수님이 머무셨던 집까지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길을 걸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버리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소리 질렀던 사람들은 소경입니다. 맹인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리 소리쳐도 그냥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앞이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소리만 듣고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보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는 않고 그저 자신의 집을 향해 휑하니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이 소경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저분 예수가 우리의 눈을 고쳐줄까라는 의심이 마음에 들지 않겠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과 같이 그저 휑하니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번 기도하였지만,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예수님의 응답이 당장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들어옵니다. ‘맞아, 역시 성경의 사건은 성경의 사건일 뿐이야.’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성경에나 있는 사건이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다른 교회의 이야기들은 역시 다른 교회의 이야기일 뿐이야.’ ‘나와는 상관이 없어.’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쑥 들어오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묵상한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나의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그 의심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명의 맹인이 보여준 믿음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러도 예수님께서 휑하니 자신이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 버릴 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그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그러자 맹인들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나요? 아닙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맹인들이 그에게”, “예수님께 나아오거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도 모든 질병과 아픔으로부터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또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으로,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아직도 예수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머무는 집을 향해 휑하니 지나가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과 같이 끝까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그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명의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 집에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곧 그들의 눈을 고쳐주셨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앞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예수님의 집까지 따라갔으면 이제 고쳐주실만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고비를 더 넘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 2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니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까지 따라온 두 명의 맹인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를 뽑으라면, ‘이 일’이라는 단어를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이 이미 죽어버린 어린 소녀를 살린 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께서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맹인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수많은 치유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들, 바로 그 맹인들에게 필요한 ‘그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실 것으로 믿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께서 성경 시대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 다른 가정들, 다른 교회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믿느냐고 질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그 기대의 제목, 곧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그 기도의 제목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두 맹인이 예수님의 그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하자,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여도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집까지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의 바로 그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응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역사를 바로 나의 삶 가운데, 우리의 가정 가운데, 우리의 교회 가운데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