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2. 14. 17:21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문교가 세계의 유명 관광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 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몰려온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서 금문교를 관람하곤 하지요. 그런데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방향에 마련되어 있는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은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그 다리를 배경으로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으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요, 화장실도 없어요.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20-30분을 주차할 때까지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의미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참 많이 보았지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의 일을 하고있을 때 자신을 찾아와 부르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도 모았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고,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장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수 없이 보아왔지만 바로 그날 높은 산에서 뵙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마가복음 9장 2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동일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다음 구절이 설명하지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마가복음 9장 3절)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자, 예수님에게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설명하거나 묘사하기가 참 힘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빨래를 해도 그 옷이 그 정도로 흴 수는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는 모습이요,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그 순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영광스러며 너무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변화된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을 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마땅히 경배하며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아주 잠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출퇴근 길에 바라보았던 금문교나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머물며 사진을 찍는 금문교의 모습이 아니라,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비로소 보이는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의 참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월등히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사건의 목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자 그들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문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과연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마가복음 8장 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로부터 정확히 6일 후,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할 수난과 죽음을 가르치신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시고 그곳에서 변형되셨습니다(cf. 마가복음 9장 2절).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다시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12절).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위치한 마가복음 9장이 채 마치기도 전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모든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31절).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르치시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흐름은 교회의 절기에도 적절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지요. 곧,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그 모습이 변모되었던 오늘 본문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음 주부터 어떠한 절기가 시작되나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비록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계속 말씀하고 계시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이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게 되겠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실 것인데,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40일간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겉모습은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는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며 헌신하였지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뿐이요,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전심으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힘을 내어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십시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 하나님은 높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더라도 주님이 누구인지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넘기 어려운 한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딱 한 번만 일어났고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사건을 의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채포되어 심문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셨잖아요. 과연 단 한 번의 변화산 사건, 그 짧은 시간의 경험이 제자들에게 이 모든 십자가의 길을 넉넉히 이겨낼 힘을 줄 수 있었을까요? 단 한 주의 산상변모주일이 이후 40일에 걸쳐 지속되는 사순절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충분히 불어넣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본문 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장 7절) 

성자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 성부 하나님께서 그름 속에서 직접 말씀해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러면서 이제부터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끊임 없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비록 변화산의 사건은 단 한 번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리니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충분히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를 조금 더 멋지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의 마린카운티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이동하다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와 저의 아내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아픔이 찾아왔고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저희 부부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분명히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은 유학생활 내내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무지개는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경험 후, 지금까지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아름다운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저희 부부에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떠 있던 무지개를 통해 우리 주님의 영광과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던 저희는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도 우리 인생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없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분의 삶에 지금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인생의 산상변모주일에 비하여 우리 인생의 사순절이 더 길고 모질어,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되며 무의식의 저 먼 곳으로 잊힐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삶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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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 5. 17:44

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오신 분에게 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저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성도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저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이 후회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딱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 2020년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얼룩져있기에, 새롭게 시작하는 2021년만큼은 지난 시간을 리셋하여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도 없고, 오늘은 지난 과거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기에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의 장애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제 첫발을 떼려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여호수아 1장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저지하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장애물이란 먼저는 위대한 지도자의 상실이었지요. 여호수아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라는 이름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은 모세를 언급하며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서술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어넣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을 정복을 위해 모세만큼 적합한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던 장애물은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욱 크게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장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실패의 경험입니다. 약 40년 전,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지도자로 모시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나안 정복 시도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향한 큰 죄악을 저지른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들은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패배하여 호르마 지역까지 쫓겨나고 맙니다. 그 후로 40년, 그들은 요단 강 서쪽의 땅 가나안 정복을 단 한차례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실패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발목을 여전히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2020년을 보내고 새로운 2021년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출발을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세상을 떠나버리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있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새 해를 맞이하였고, 새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떨쳐내지 못하여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은 지금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출발의 동력 -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장애물들이 있었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내리 누르던 과거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이유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기 때문도 아니요, 과거의 모든 과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모세를 잃어버린 여호수아, 과거 실패의 경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 1:3-4) 

모세는 떠났지만 모세가 전한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모세가 전한 약속은 모세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살아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실패의 경험은 바로 이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는 모세라는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40년 동안 보류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더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살아 있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모세가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과거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들에게 허락하신 말씀과 약속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는 새로운 출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여러 가지 장애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새로운 출발의 기초는 인간 모세가 아니라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오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가 언제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발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과거의 실패 경험을 떨쳐버리는 담대함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8) 

 


동행 공동체 

여호수아 1장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이 여호수아나 몇몇 개인의 출발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표현되는 전 공동체가 함께 발걸음을 떼는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작하려는 새로운 출발은 요단강 서쪽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의 시대에 요단 동쪽은 점령하였고, 그곳에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차지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요단 서쪽을 점령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단강 서쪽을 향해 전진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은 아홉 지파만의 출발이 되고 맙니다. 12지파로 구성된 전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수 1:14) 

놀랍게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여호수아의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수 1:16) 

오늘 본문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들이 순종한 것은 일차적으로 여호수아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이 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른 지파보다 먼저 요단 동편을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다른 지파들이 요단 서쪽으로 점령하기까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가 선봉에서 전쟁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비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공동체가 어떻게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까요? 그저 한 사람이나 몇몇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향해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인간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과거의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든 새롭게 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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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12. 12. 10:20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3차 대유행은 성탄절 예배마저 온라인 예배를 강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복음을 축하하고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고 때로는 공허함마저 몰려옵니다. 


영접하지 않는 세상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웅장한 필치로 시작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영광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 요한복음의 본문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베어 나오는 것은 비단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성탄절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잠식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곧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본문이 서술하기 때문이지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0)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첫 번째 성탄절이 그러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지만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눅 2:7). 유대 왕 헤롯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율법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영접한 것은 목자들과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몇몇의 박사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첫번째 성탄절을 기억하며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세 번이나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성탄절의 이러한 쓸쓸한 모습은 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나 또다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접하는 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첫번째 성탄절부터 약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둠을 틈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 3장),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물을 맛보았던 사마리아 여인(요 4장), 오래된 병을 치유받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요 5장),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된 맹인(요 9장) 등.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영접하는 자”에 대해서도 서술할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어둠은 여전히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굳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첫번째 성탄절부터 오늘의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한쪽이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배당에 함께 모여 성탄절을 축하하며 기쁨의 예배에 참여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지난 2000년의 긴 세월 언제나 그러하였듯 우리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 넘치는 것이요,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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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7. 08:56

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적과 기적이 무더기로 –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 무더기로 떼로 나타나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일까요?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은 기적을 한 두 번 행하신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기적을 행하셨지요. 바로 모세의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습니다. 자, 그럼 모세의 시대 이후에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바로,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과 이적을 무더기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드리지요.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시대,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무더기로 다발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을 무더기로 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나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았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과 신앙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나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애굽 사람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 말 없이 보내줄 만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열 가지 재앙으로 나라가 다 망해버린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잡아가겠다고 그들을 따라오잖아요. 그러다가 모두가 홍해에서 수장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과 표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 만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잖아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생각해볼까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갈멜산에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데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십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 아세라 신, 그 외의 모든 우상들을 다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 나아올 만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더 이상 어떠한 기적을 보여줘야 하나님을 믿겠어요? 그런데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대한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잖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했다고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이적과 기사를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이적과 표적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이적이든, 표적이든, 기적이든 제 아무리 많은 이적과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믿음과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적과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나의 매일매일의 삶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과 그 사람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요구와 예수님의 거절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짧은 대화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표적을 구합니다. 이적을 구합니다.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십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아예 다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은 바리새인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적이나 기적을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기적이나 이적을 베풀어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어요. 예수님을 힐난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적과 표적을 구했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큰 이적과 기적을 그들의 눈에 보여주어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퀴즈를 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이 한 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가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는가 라는 퀴즈였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그 답을 아시죠? 모세의 시대와 엘리야-엘리사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퀴즈도 가능합니다. 신약 시대에 – 구약 시대가 아니라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곧 기적이 무더기로 다발로 나타났던 시대는 언제였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몇 개 되지 않는 빵과 물고기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 얼마나 많은 기적과 표적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목격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주목해야 할 단어, 곧 이 말씀의 키워드는 바로 “이 세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 세대”라는 구절이 두 번 등장하죠?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세요, 기적을 보여주세요 라고 요청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세대가 어떻게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 곧 그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시대에도 주어지지 않았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성육신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기적이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 무슨 기적을 보여주어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을 너무도 괴롭히던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고쳐주시기도 합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물질의 문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함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 어디에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 가정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우리 가정에도 평안과 행복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한 기적이 있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느 시골에 여러 자녀를 둔 젊은 아기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여럿 나은 두었는데, 그만 남편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시골에서 남편 없이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것만 해도 참 수고로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자분 자신의 몸에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소진하고 본인은 한쪽 몸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채,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자녀들은 키워야 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괴로움만 깊어지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께서 그분에게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회 가면 병 낫는데.” 그 말을 들은 젊은 애기 엄마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다음 날부터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매일 아침 언덕을 넘어서 시골교회의 새벽기도에 출석하였습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열심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에서 서리집사의 직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여집사님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단 하나, 뭘까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지요. 그 여집사님은 풍을 앓으신 이후 날아계신 날 동안에는 몸의 한쪽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셨습니다. 교회에 아무리 출석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기도하였을 지라도 병이 낫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회를 출석한 지 약 7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그 여집사님께서 큰 자신의 딸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출석한 지 7년 만에 자신의 속 마음을 큰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병 낫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중풍병이 나아야 기적이지요. 마비되었던 몸이 다시 힘을 얻어서 열심히 일하며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어야 기적이잖아요. 그러나 이 여집사님은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 여집사님은 하나님의 기적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 여집사님은 비록 자신의 몸이 치유되는 기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분과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이것이 그 여집사님이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까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기적이 여러분의 믿음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경험한 기적과 이적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여러분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선사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 우리 가운데 별다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 괜찮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더욱더 우리의 일상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을 다시 한번 맞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하는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 새로운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은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성탄절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십니다.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거예요. 매년 반복되는 성탄절이지만 지금도 내 마음속에 찾아와 나와 함께 거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말구유가 아닌, 나의 마음에 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생애 최고의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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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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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6 “칼 바르트”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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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7. 08:50

오늘 대림절의 네 개 초가 모두 불이 밝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고,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성탄절이 찾아오겠지요.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기에 우리 모두는 또다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대림절 기간을 말씀과 기도로 보내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의 생활이 바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별로 묵상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성탄절을 맞이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림절 네 번째 주일, 곧 성탄절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여러분은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영접하지 않은 세상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여러분,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대림절과 성탄절의 영원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요한복음 1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예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땅, 곧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예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조금 전 읽어드린 요한복음 말씀은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선언하지요. 이처럼 온 세상의 창조자,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온 세상이 – 모든 사람들이 – 이 땅에 오신 창조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전 읽어드린 요한복음 말씀이 어떻게 이어집니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의 주인이시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날을 상상해 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욱 풍성하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던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 성경 미가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가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가 언제인지 또한 정확하게 기록하셨습니다. 이 정도이면, 당시 모든 백성들이 나아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분을 영접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복음서 전체를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아도, 우리 주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사람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만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으로 누가 떠오르십니까? 네, 동방의 박사들이 떠오르지요. 동방의 박사들은 구약의 말씀을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별을 따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방으로부터 준비하여 온 귀한 선물들,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우리 주님께 바치며 성탄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러면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 외에,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도 주시고 수많은 이적과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해 주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요? 사실, 잘 떠오르지 않지요. 굳이 꼽아본다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의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고 찬양하였던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분을 떠올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분들 외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며 성탄을 축하하였던 인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당시 유대 땅 베들레헴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해산을 앞둔 마리아는 여관에 머물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고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누일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 베들레헴뿐인가요? 예루살렘에는 구약성경에 해박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심지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들러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에 계시냐고 질문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미가서를 인용하며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여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해 주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참으로 정확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여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선물을 준비해두셨습니까? 아니면, 2000년 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덧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이제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동방의 박사들과 같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미리 준비하셨던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진리의 말씀이어서, 예수님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또다시 성큰 다가온 지금도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는 성도들의 숫자는 여전히 매우 적은 것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천사의 메시지와 천군의 찬양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도 동방의 박사들과 달리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기다리며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에도 목자들은 생업에 몰두하고 있었지요.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8절)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 밤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의 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어떠한 기대도 없습니다. 목자들은 그저 자신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도 사는 것이 너무 바빠,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서는 미쳐 마음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성탄을 전혀 준비하지도 기다리지도 못했던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9a절)

계속해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세히 알려줍니다. 10절부터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0절)

천사들의 메시지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모든 사람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야 할 기쁨의 그 소식을 전한다는 말씀이지요.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등장하지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1절)

다윗의 동네, 곧 이곳 베들레헴에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는 위대한 성탄의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 구원자가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 곧 성탄의 기쁜 소식은 지금 당장 우리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 하는 바로 그 소식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목자들에게 성탄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목격한 것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13절부터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3-14절)

천사가 기쁨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수많은 천군이 내려와서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비록 목자들의 시선에는 구세주의 탄생이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목자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니 저 하늘에서는 수많은 천사와 천군이 아기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천사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목자들은 모든 신경이 온통 자신들이 돌보는 양떼에 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에 온 마음이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매일을 바쁘게 살다 보니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목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직접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알려주고,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장면을 바라보자 이제 그들의 마음은 온통 예수님의 성탄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지요. 

어느덧 대림절의 마지막 네번째 주간을 맞이하지만, 2000년 전 유대인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지도 못하였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온 마음으로 축하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성탄의 메시지가 들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지금도 천사와 천군이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그 장면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가득 찬다면, 지금까지 성탄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2024년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축하하고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예수님 영접 

예수님의 탄생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던 목자들이지만, 그들에게 천사들이 전하는 말씀이 들리고 천군의 찬양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이제 목자들은 자신의 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찾아 나섭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5절) 

16절의 말씀입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습니다. 목자들은 지금까지 전혀 성탄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제는 빠르게 움직입니다. 빠르게 걸음을 이동하여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성탄의 메시지가 들르시나요? 여러분의 귀에 성탄의 찬양이 들리시나요? 이제는 여러분도 걸음을 빠르게 이동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오늘 본문의 목자들처럼 하던 일을 멈추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았던 세상의 일에서 돌이키십시오. 이제는 빨리 움직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그 예수님을 향해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떠나가자 빨리 움직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지요. 그 결론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20절)

결론이 무엇입니까? “목자들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 이 세상의 구세주가 오셨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군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듣게하십니다. 천사들의 음성과 천군의 찬양 소리에 마음을 돌이켜 빨리 예수님을 찾았던 목자들은 비록 성탄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을 영접하는 위대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요한복음 1장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박사들처럼, 혹은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목자들처럼 뒤늦게라도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목자들처럼 뒤늦게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요한복음 1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해주시는 성탄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천군도 함께 찬양하는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그 마음에 영접하고 모셔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권세를 지금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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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5. 17:07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일이 되면 설날이 찾아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또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옵니다. 이처럼 사연스럽게 흘러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간을 연대기적인 시간 ,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 특별히 오늘의 설교본문인 스바냐서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과 구별되는 독특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표현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온다는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압도하는 그때, 바로 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바로 그때,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한해 한해 연대기적인 시간, 곧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살아가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 외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새해가 여러분에게 단지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사건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지배하는 시대 

오늘 본문 스바냐서는 바로 크로노스의 시대에 카이로스를 선포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스바냐서의 시간적인 배경을 소개하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의 이름에 세명이나 등장합니다.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처음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몬”입니다. 아몬이라는 이름 뒤에 ‘왕’이라는 표시가 없지만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은 남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자, 그리고 아몬 이후에 또 다른 왕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누구입니까?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1장 1절에서 “요시야” 다음에 등장하는 남 유다를 다스렸던 어느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까? 스바냐는 누구의 현손이죠?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자, 다시 정리를 하죠.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를 밝혀주는 스바냐 1장 1절의 말씀에는 세 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간대로 정리하면, 히스기야, 아몬,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히스기야와 아몬 사이에 한 명의 왕이 더 있는데, 그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다시 말해, 스바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남 유다를 네 명의 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곧,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그리고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띄지 않는 크로노스의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왕 가운데 두 명의 왕은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곧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아 사이에 놓여있는 므낫세와 아몬은 성경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선한 왕의 시대와 악한 왕의 시대, 하나님을 섬기는 왕과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왕의 시대가 서로 섞여 있는 시대입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어떤 왕은 집권해서 우상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든 하나님을 섬기게 하든, 한 나라 전체가 왕의 영향력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든 이방 우상을 함께 섬기든 사람들의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면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해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 당장 모든 이방의 우상을 제거하고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섰으면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축복이 막 눈에 보여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도 바뀌고 국가의 권력을 뒤흔드는 사람들도 바뀝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를 지라도, 아무리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대로 선을 행합니다. 제 아무리 연대기적인 시간이 흘러도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고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올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지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여주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도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만같습니다. 새해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나누어보지만, 경제는 위축되고 정치는 변화가 없으며 우리네 삶은 크게 변화가 없으리라는 낙심이 우리 사이에 퍼져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찾아왔지만 새로운 희망이 없고 새로운 기대가 없습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 여호와의 날 

바로 이때, 사람들이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갈 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가 바로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스뱌나 1장 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익숙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곧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곧 임할 것이기에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침묵하라고,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1장 14절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습니다. 가깝고도 빠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곧 여호와의 날이 가깝게 다가왔으니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임하면 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용사들, 권력자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죠?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 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의 계획인 인간의 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1장 18절의 상반절만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날,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바로 그 날이 임하면 제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춘 용사라도, 제 아무리 “은과 금”을 그득히 쌓아놓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심판의 날, 곧 여호와의 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로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쌓아놓은 권세와 부귀가 모두 무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남유다를 다스리던 시기부터,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용사와 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 권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쥐고 있는 힘과 권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금과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가 아니라 자신의 재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연대기적인 시간만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되어도 힘이 있는 장수들과 용사들은 여전히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금이나 은이 풍성한 부자들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변함없이 풍족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한 이후, 다시 말해 남 유다를 다스리던 요시야 왕의 사망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서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 성은 앗수르의 뒤를 이어 전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시간에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무너트리니 그동안 은과 금을 풍성하게 쌓아놓고 재력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세상을 호령하던 용사들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스바냐 선지자가 선언했던 여호와의 날, 곧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연대기적 시간만을 살아갑니다.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는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건 상관없이 세계 역사의 주관자 되시며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기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분 개인의 인생 시간표에 여러분의 각 가정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특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이르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이 여러분을 압도하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새해를 축하하며 기념하는 오늘, 매년 찾아오는 날짜의 반복을 넘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때, 인류의 역사를 종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카이로스를 위한 준비 

스바냐 선지자는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살아가는 남유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스바냐 2장 1절에서 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바로 그 때가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는, 연대기적인 시간에서는 그저 한해 한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은과 금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힘을 길러 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을 압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 인간이 모아두었던 은과 금은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갖추어놓았던 힘과 권세는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그 대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 겸손하게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나타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구하고 겸신히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이 기쁨은 모든 유대인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기쁨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기쁨은 연대기적인 시간, 한 해가 흐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 연대기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는 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겸손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더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하나님의 기쁨의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새로운 한 해동안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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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5. 12:33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우찌무라 간조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는 뒤로하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저는 그분의 일기 가운데 한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쓴 것은 우찌무라 간조가 뉴 잉글랜드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아직 밀린 학비를 다 납입하지 못하였고, 뉴 잉글랜드의 그 추운 겨울을 난로 하나 없이 보내고 있던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통곡의 소리 and 기쁨의 소리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지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윗과 솔로몬의 왕좌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 남아 있는 성전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회파 될 대로 회파 되었으며 그렇게 70년 동안 그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돌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 달에” 그들은 분명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돌아왔다고 서술하지요. 왜냐하면 여전히 예루살렘에는 성전의 터가 남아있었고, 성전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전으로 기능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다시금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성전 재건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에 그 옛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재건하였던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자,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는 오늘 본문에서 함께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 그 현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2절의 마지막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다시금 고향 땅에 돌아오게 하셨다는 커다란 기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쟁취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니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을 친히 만나주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어질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유대인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어 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2절에는 기쁨의 소리도 들렸지만 정반대의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립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특별히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 – 곧 솔로몬 성전 – 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합니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기 전 그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 70년 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이 다 불타는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들은 70년이 흐른 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이 그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그 장면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합니다. 

그러니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고,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리, 곧 대성 통곡과 기쁨의 탄성이 어찌나 컸는지 그 장면을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만큼 한쪽에서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성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어떻게 묘사합니까?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 두 가지 소리를 조금만 멀리서 들으면 이 커다란 소리가 즐거움의 함성 소리인지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소리인지 도무지 분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인생은 슬픔의 조각과 기쁨의 조각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들지요. 어떠한 조각은 기쁨의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어떠한 조각은 통곡의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게 기쁨의 조각과 슬픔의 조각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우리의 인생일진대 한 개인의 삶을 그 누가 기쁨의 인생이라고, 혹은 슬픔의 인생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장면이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통곡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사건 중에는 과연 이것이 기쁨의 장면인지 혹은 슬픔의 장면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가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이유만 되던가요? 슬픔의 이유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느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기쁨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의 소리만 들리던가요? 자녀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고 나아가 통곡해야 했던 순간이 우리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젊은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들을 축하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라도 우리에게 기쁨의 소리만 들려주는 곳은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이라는 장소는 기쁨의 소리와 더불어 슬픔의 소리도 함께 들리는 공간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은 그 안에 기쁨의 함성 소리도 들리고 동시에 슬픔과 통곡의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조금만 거리를 두고 들어 보면 이것이 슬픔의 소리인지 통곡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 소리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는 그 현장에는 기쁨의 함성 소리와 슬픔의 탄식 소리가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바로 이 장면에는 기쁨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라는 두 가지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쪽 편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너무도 우렁찼고, 다른 한쪽에서는 슬픔의 통곡이 너무도 요란하여 사람들의 귓전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이 장면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제 3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계속 이어지는 11절 앞부분을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편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다른 한편에서는 슬픔에 싸여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 찬양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었다고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 곧 그들이 노래했던 감사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통곡과 슬픔의 소리는 잦아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현실 속에서 기쁨의 요소는 더욱 풍성해지고 탄식과 슬픔의 이유는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쁨의 소리와 함께 통곡과 슬픔의 소리도 크고 웅장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리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는 찬양의 가사, 곧 감사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바로 그 장면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찬양은 언제부터, 과연 언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울려 퍼지고 있었을까요? 

자,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곧, 솔로몬 성전이지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시는 장면을 그려주는 여대하 5장은 바로 그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역대하 5장 13절은 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여기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는 감사의 찬양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역대하 5장 1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이제 찬양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히 있도다’ 이 찬양의 가사는 놀랍게도 오늘 본문 에스라 3장에서 들리는 감사의 찬양과 그 가사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왕국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지요. 급기야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0년,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그 순간까지 예루살렘에서 펼쳐진 수많은 역사적 현장들은 기쁨의 조각과 슬픔과 통곡의 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웅장한 모자이크였으며, 어떠한 조각은 그 자체가 기쁨의 조각인지 슬픔의 조각인지조차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간 삶의 여러 단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들을 관통하여 솔로몬의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의 성전에 이르기까지 그 500년에 걸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감사의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우리는 기쁨의 소식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의 소식에 그 무엇보다 빨리 반응합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 없이 번갈아 가며 기쁨과 슬픔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여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감사의 찬양 소리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가득 찬 슬픔과 통곡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밀어넣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기쁨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기쁨의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모든 과정이 기쁨의 장면이었는지 슬픔의 장면이었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슬픔의 그 순간순간마다 그리도 격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기쁨의 함성 소리를 조금만 잠재울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귓전에 들리는 슬픔의 통곡 소리를 조금만 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는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우찌무라 간조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과 그 영원한 인자하심을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며 살아간다면 제 아무리 시간이 흐를 지라도, 그 어떠한 사건이 우리를 휘몰아치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것이요,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천국을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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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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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2. 07:04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가하는 사람이 나와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 지구상에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그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 우리가 살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만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있고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나의 직장 상사가 기독교인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우리의 가정 안에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고 적대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불신 남편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 

베드로전서를 읽는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가정 안에, 특별히 자신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믿는 않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명령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그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불신자이고 때로는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때에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그 이유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말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 남편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가족 전도’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까운 사람에게는, 특별히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어려울까요?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복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멀리 있는 사람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언어와 우리의 말만 듣게 되지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특별히 우리의 가족들은 우리의 행동을 바라본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내들에게,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입술로만 예수님을 전한다고 우리의 남편이나 우리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꾸미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보다 아름답게 다듬어 가는 노력으로부터 우리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가 자라난 가정도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청년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 친구는 자신의 삶으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어요. 최근 우리 교회를 등록한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더라도 자신의 친구는 그 마음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친구는 저에게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게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작은 계기 하나에도 이 청년의 마음에 ‘나도 내 친구와 같이 신앙을 갖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기 되었고 스스로 자원하여 가까이에 있는 우리 교회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과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자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변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의 삶이 먼저 변화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남편과 우리의 아내와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변화된 마음과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교훈 

오늘 본문은 아내에게 주는 명령에 이어 남편들에게 주는 명령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아내라면 마땅히 그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안든지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남편이라면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들에게 주는 권면과 동일하게 남편에게도 언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라고 명령합니다. 나아가 단순한 한 두 가지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존경하고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는 마음으로부터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7절을 다시 보시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리라” 이렇게 명령하고는 계속해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아내와 나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믿음을 방해하는 박해자인지 상관 없이 나의 배우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면, 제 아무리 우리의 가정 안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기도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반복되는 권면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의 식구들이, 여러분의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회방할지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 남편, 불신자 아내, 불신자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나의 믿음과 나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어떻게 할까요?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강조를 하여도 성도들이 악을 악으로 갚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식구들에게 악한 말과 행동을 할까봐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악에서 따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울이시되 주의 얼굴을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비록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과 회방꾼들이 여러분 주변에 가득할지라도, 여러분은 악에서 떠나시고 선을 행하시며 무엇보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의 길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12절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눈은 여러분을 향하시고, 하나님의 귀는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에 기울여주십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의 모든 가정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복된 가정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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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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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0. 20:41

 

<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에 이은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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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그 연설은 온 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의 연설은 책으로도 출판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 연설과 책의 제목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입니다. 그 제목에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러셀은 그의 강연과 이 책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습니다. 러셀의 연설과 그의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그에 대한 기독교 내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표적인 영국 복음주의 사상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Why I Am A Christian)라는 책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루터교 교인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매우 열심이 있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로 제일 먼저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바로 덧붙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 곧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배경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두 번째 이유로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어느 날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독교적 배경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 어느 날 존 스토트는 성서유니온이 주관하는 집회에서 한 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하셨던 배쉬라는 분은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든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이 선포가 젊은 스토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존 스토트는 배쉬라는 분을 바로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배쉬는 다시 한번 존 스토트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 권면했다고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이 말씀을 들은 존 스토트는 그날 밤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존 스토트는 자신이 회심을 경험했던 이날의 사건을 서술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신이 배쉬라는 분의 말씀과 그의 권면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지만, 그날 저녁 들었던 말씀과 권면, 혹은 자신의 결단이 존 스토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 스토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존 스토트의 글을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라, 
제가 원하는 길로 도망할 때조차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에 믿음을 포기해버릴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분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나는 모태신앙이요,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웠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대답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저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서, 혹은 가족의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으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나는 내 스스로의 결단으로, 그 누구의 권면이나 충고가 아니라 내 스스로 기독교를 선택하였습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한 분들이 모두 여러분과 같이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과정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금까지도 신앙생활을 하는 그 결정적인 이유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존 스토트와 같이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기도 하였고, 물론 친구와 가족의 전도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던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나하만 장군

여러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큰 용사’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기만 하면 승리 소식을 가져오는 당시 아람 나라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그에 대해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묘사할 만큼 그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권세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그에게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으니 곧, 그 자신이 나병 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이 몸에 질병, 그것도 나병이라는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에 걸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까? 그저 나아만이 운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아람 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람 나라로 잡혀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지요. 아람 나라에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아람에 포로로 끌려오면서 이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미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아만의 집에서 나아만 아내의 심부름을 하던 이스라엘 소녀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비록 아람 나라에 끌려와 있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거침없이 주인에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나아만의 아내가 심부름시키던 종이 이스라엘 소녀였고, 또 그 소녀가 하나님과 엘리사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확고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우연이었을까요? 이번만큼은 나아만이 너무도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에 이번에도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여종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종을 보내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선지자가 직접 나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가 자신의 환부를 붙잡고 기도해준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너무 화가 난 나아만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로 그때 곁을 지키고 있던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말리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손해 볼 일 없으니 그저 한 번 해보자고 설득하지요. 
여러분, 이 장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바로 그 시점에 나아만을 수행했던 부하들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장군을 설득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장군의 눈치만 보면서 같이 엘리사에게 욕을 해대며 아람으로 돌아올만한 부하들이 그 자리에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나아만의 곁에는 지혜로운 부하들, 그래서 장군을 설득하는 부하들이 있었단 말이죠. 여러분,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저 나아만이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나아만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아만 장군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7번 씻고 나병에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아람 사람 나아만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병에 들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아만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람에서 섬겼던 모든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거북한 포장지

하나님의 선물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은 때로 초라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포장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그 위대한 선물을 지금 당장이라도 받을 텐데, 문제는 포장이 초라하단 말이에요. 나아만의 경우가 그렇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하나님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선물을 무엇으로 포장하셨습니까? 나병, 한센병으로 포장하셨다고요. 

나아만의 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들을 통하여 다윗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물의 포장지가 뭡니까? 그 위대한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는 바로 남편의 죽음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도, 며느리인 룻도 모두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잖아요. 그러니 나오미와 룻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저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으로부터 다시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요셉이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도 정말 위대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위대한 선물이란 그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출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하여 7년의 극심한 흉년을 지나는 동안 그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요, 이집트 지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명,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까요? 형제들로부터 받은 배신, 그리고 누명과 감옥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잖아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초라한 포장지, 아니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병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을지라도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남편의 죽임이라는 너무도 거북한 포장지 안에 다윗 가문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형들로부터의 배신이라는 결코 받고 싶지 않은 포장지 안에는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위대한 선물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비록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의 포장지가 너무도 초라하고 때로는 너무도 거북할 지라도 그 안에 감겨 있는 하나님의 선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어느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곤 하셨지요. 선교사님이 후원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도착하였을 때도 동일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많은 현지 사람들이 그 선교사님을 미워하고 적대감을 표출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선교지에 도착한 지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고 맙니다. 여러분, 십 년이나 일 년을 제가 한 달이라고 잘못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일 년도 아니고, 육 개월도 아니고,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아서 그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야반도주를 하고 맙니다. 

선교지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결신자도 별로 없었습니다. 결신자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들었던 대부분의 현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선교사님이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현지인들이 자신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기독교에 대해, 선교사님이 전해준 복음에 대해 아주 강력한 반감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선교 실패한 거죠? 아니, 선교지에서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났고 선교사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몇 명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기독교에 대해, 복음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가득해졌으니 그 선교는 당연히 실패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선교사님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선교지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고작 3주간만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유대인들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깊은 밤 어두움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야 베뢰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철저한 실패 아닌가요? 이 정도면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는 성도도 없고, 교회도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워요. 지난주에 함께 묵상하였던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과연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이처럼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모두가 순종적이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인 설명도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가 일어나며,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사도 바울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어떻게 하여 주셨습니까? ‘택하여 주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그다음에 ‘너희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성도로 부른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교회로 부른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선교사 바울이 그들을 불렀기에 그들이 응답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어요. 그러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0개월 동안 어떠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처럼 실패를 경험하셨습니까? 나아만 장군처럼 못쓸 질병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잡았나요? 나오미와 룻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셨습니까? 혹 요셉과 같이 가족 간의 관계가 불화를 넘어 비극으로 치닫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하셨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불러 생명이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는 포장지는 초라하고, 아니 너무도 거북하여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그 안에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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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1 “존 스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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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6. 10. 20:33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2,600년이라고 하니 제 아무리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제너럴셔먼트리의 연수를 가늠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2,600년 된 제너럴셔먼트리는 높이가 83m, 나무 밑동의 둘레가 31m에 이릅니다. 제너럴셔먼트리와 거의 동시대의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제너럴셔먼트리 역시 지금까지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6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든세 번이나 거대한 화재를 이겨내고도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제부터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에 의하면 제너럴셔면트리는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공원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란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 가운데 동물들은 태어나고 성장하여 성체가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러나 나무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고 제너럴셔먼트리처럼 2,600년 동안 여든세 번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성장하는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성장 곡선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의 믿음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라나는 경향과 동일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듯, 어린 동물이 성장하듯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하고 나면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믿음이나 신앙이 그 상태로 머무거나 혹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은 동물의 성장 곡선이 아니라 나무의 성장 곡선과 유사합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안내문처럼 나무는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혼도 끝없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며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오늘도, 내일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믿음과 사랑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이 쇠약해지더라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통해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3절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치지 않는 감사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이제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여기에 ‘더욱’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그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랐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더욱 자라났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나니, 그 믿음과 더불어 풍성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곧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성장하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정체되어 있거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자라나셨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오늘도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과거에 성장하였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성도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도 더욱 풍성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성도들 서로 간에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사랑이 풍성해진 것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데살로니가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그곳을 떠나 있지만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였던 사도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는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 나타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을 찾아서 1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3:10)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주야로, 밤과 낮으로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를 다시금 방문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여전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한절 내려오셔서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절에도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이 등장합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살전 3:11)

그런데 이번에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었어요. 그러나 바울의 보다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것이요,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셔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그들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날수록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들며, 과연 무엇이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단 하나의 단어로 대답한다면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요,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이 더욱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사랑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더욱 풍성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을 위하여, 여러분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풍성한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밤과 낮으로 기도하시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의 믿음은 반드시 성장할 것이요, 여러분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박해와 환난 가운데 더욱 빛나는 믿음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지나치고 싶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두 가지로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 제목이 하나 남았네요. 과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도한 것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방문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후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는 사도 바울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막혔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계속 막히자 자신의 발로 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하여 자신의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오늘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교지의 바쁜 일정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데살로니가에는 사도 바울을 내어 쫓았던, 그리고 여전히 바울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바울은 꿈에도 그리던 데살로니가를 결코 방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사도 바울을 공격하였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가만히 두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은 그들이 처한 환경을 ‘박해’, 그리고 ‘환란’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동일하게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의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달라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이처럼 박해를 계속 받으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질 텐데, 이처럼 계속하여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 같은데, 하루빨리 사도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더욱 성장하고 더욱 풍성해질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간절한 바울과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계셨단 말이에요.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 사람들은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그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오히려 너희의 인내가 빛이 나고, 오히려 너희의 믿음이 자라나 너희의 믿음과, 너희의 사랑과, 너희의 인내가 하나님의 여러 교회 앞에 자랑거리가 되었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지금 당장 우리를 그 모든 괴로움에서 건져내기보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힘이 들죠. 물론 그 과정이 어렵죠.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 과정을 벗어나고 싶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너무도 쉽게 벗어나면 삶의 모진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어떡하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아픔과 역경을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며 우리의 인내가 더욱 강건해진다면, 그리하여 인생의 수많은 고비와 난관 앞에서 신앙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이 된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2,6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여든 번이 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지금까지도 성장하는 제너럴셔먼트리처럼, 아니 여든 번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산불의 화마를 온몸으로 맞이하였기에 모든 병충해를 다 이겨내고 더욱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이제는 그 어떠한 산물도, 그 어떠한 비바람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고목이 되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든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날마다 새 힘을 주신다면 비록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멈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장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더욱 풍성해져 삶의 모든 풍파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아래의 설교로 이어지는 감사절 시리즈 설교입니다>

 

[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영국의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27년 사우스 런던(South London)의 시청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연설을 하였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당시 워낙 유명한 사상가였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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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