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2. 12. 18. 18:35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은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사진집이 195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라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잠시 보시겠습니까? 기차역 뒤에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성이 그 웅덩이를 뛰어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모습이 그 아래의 물에 반사되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매우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사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대목은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발과 그 아래 물에 비췬 그림자의 발이 이제 막 부딪치려는 찰나!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역동성과 함께 안정성을 한 장면에 담은 데 있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자신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밀이나 노하우가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은 수수께끼와 같아서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잘 짜인 각본에 맞춘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폴 드 곤디(Jean François Paul de Gondi)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There is nothing in this world that does not have a decisive moment) 

비록 평범해 보이는 사람과 사물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결정적 순간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던 결정적 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를 살았습니다. 오늘과 같이 의료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대에도 175세이면 매우 장수한 것이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아브라함이지만,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한 순간, 곧 그의 삶을 완벽하게 변화시켰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b-3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바로 이것이 결정적 순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만나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 당신은 75세 되는 그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받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였는데,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정적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질문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과 동일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내가 계획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마치 수수께끼처럼 알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할 때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찾아오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대표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단연코 출애굽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세월은 자그마치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면, 나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이제 나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지요. 430년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손자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그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 무엇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전망이나 기대도 없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사건이지요. 그리하여 출애굽 사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사건과 대해 이야기한 내용과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순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니, 실마리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풀리듯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다고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바로 그때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지금도 기다립니다. 카리티에 브레송이 인용했던 문장, 곧 17세기의 프랑스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곤디의 문장 그대로,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다리라

본문 시편 80편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온 결정적 순간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시편 80편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회상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셨던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러면 1절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두 개의 그룹, 곧 천사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따라가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본문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장면을 회상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시편 80편은 1절부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빛나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마치 모든 사진사들이 포착하고 싶어서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바로 그 순간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 80편은 감사와 찬송의 시가 아니라 간구와 탄식의 시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시편 80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모든 국민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80편은 나라가 멸망한 절망의 상태에서 출애굽이라는 과거의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노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한번 경험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며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이제 다시)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이제 다시) 빛을 비추소서 (1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이제 다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이제 다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준비하고 기다리라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 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은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자신도 그 비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카리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만약 사진을 잘못 찍었다면 그림을 그릴 때 지우개로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다시 그리듯 사진을 다시 찍으면 됩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다 보면,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애굽의 사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최고의 결정적 순간, 곧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리지요. 그런데 여러분, 대림절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삶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나의 삶에 친히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니,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는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제는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린 사진작가가 오늘 또다시 찾아올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스케치를 잘못 그린 화가가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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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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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4. 17:12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어느 집사님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의와 평화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재차 질문하였더니, 그분은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구한말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 성도들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더욱 풍성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지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제왕시

본문 시편 72편은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제왕시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안에 인간 왕을 높이고 인간 왕을 위해 기도하는 시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이 그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1절) 

여기에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편 72편이 왕이 새롭게 등극하였을 때 불렀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72편에는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두 개 등장합니다. 시편 72편의 표제어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20절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고 말씀하지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의 이름을 감안하면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때,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노래가 시편 72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제왕시와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시편에는 오늘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제왕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왕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절대 권력을 소유한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지요.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본문 시편 72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장, 특별히 대부분의 동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간구와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간구와 기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보십시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절) 

본문 11절은 간구와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우리 왕 앞에 모든 왕들이 부복하게 하시고 모든 민족이 다 그분을 섬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추론한 것처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시편을 노래했다면, 그들의 노래는 솔로몬을 위한 중보기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라는 기도였겠지요.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이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72편을 ‘중보기도’라는 생각 하면서 본문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게 해 주시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게 해 주시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시고]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소서] (12-13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 했겠지요.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통해 힘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로 이해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이 땅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고대 사회와 같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하기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땅의 정치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이 땅에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사건으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이 당에 더 이상 삶이 고달파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비록 이 땅에 억울한 희생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롭게 공의롭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은 시편 72편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유대인들이 시편 72편을 처음 노래하였을 때, 그들의 노래는 주로 중보기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서 많은 백성들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고 솔로몬이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를 기도하였겠지요.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그는 우상 숭배에 빠졌고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았지요. 솔로몬의 과오는 이스라엘을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남 유대의 많은 왕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그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져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하는 처지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본문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유대인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물론,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했던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 외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자,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문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실제로 한글 성경의 번역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예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기로다 (11절)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한 왕을 세워주십니다(요 19:19). 그리고 그의 앞에는 모든 왕들이 부복하고 모든 민족이 그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왕은 한 나라의 왕이나 한 민족의 왕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왕 중의 왕, 곧 만왕의 왕이 되시지요. 본문은 그러한 왕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성취되었습니까?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의 생명을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구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네요)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2-14절)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왕과 통치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지요.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어느 인간 통치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셨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대림절을 보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5절) 


대림절 찬양

시편 72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시편 72편을 자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작곡가였던 아이작 와츠가 시편 72편을 기초로 작고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Jesus shall reign”으로,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다스리시고>입니다. 이 찬양은 시편 72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하지요. 그래서 햇빛을 받는 모든 곳이 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찬양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이작 와츠는 시편 72편을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기도와 간구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의 2절 가사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니 그 기도 향기 되어서 주 앞에 상달하도다” 아니,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시편 72편의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왜 또다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 완성의 모습도 그려주는데,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6-17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시편 72편을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거짓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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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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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2. 9. 8. 21:18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4장 13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다시는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 이면에는 지금까지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모습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의 언행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을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성도들 가운데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였지요. 이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던 바울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자”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권면에 이어 또 하나의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여기에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서로의 출신과 혈연을 넘어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넘어지게 하는 그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서로 주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가 서로를 비판하지 않고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서로의 앞에 놓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은 아름다운 가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서로 비판하지 말고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도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서로의 약점과 아픔을 공격하거나 드러내지 말고 덮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드러내고 공격할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다투고 분열합니다. 그러나 덮어주고 용서할 때 화목과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식구들이 서로 받아주고 용납하고 포용하여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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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2022. 9. 8. 21:1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장 36-38절)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을 기억한다면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면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번성하여지자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 왕이 그들을 더욱 압제하고 괴롭혔던 역사가 출애굽기 1장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출애굽기 40장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 더욱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장면, 마지막 순간까지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뒤쫓던 장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격분하게 하였던 장면 등.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도 또 하나의 출애굽기 이야기입니다. 지난 9개월을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 못할 때도 많았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대와 같은 거대한 위협 앞에 좌절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우리를 보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아 방황할지라도 그 모든 과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나아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하나님만 믿고 나아갑시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도, 그리고 우리 모든 식구들의 걸음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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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2. 19. 17:25

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본다는 새로운 경험에 흥미도 있지만, 비행기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른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착륙할 때까지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마음에 있었지요.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비행기에 대한 믿음,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 대한 신뢰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이처럼 정반대였다면, 그들의 마음과 감정에 따라 비행기 여행의 안전이 좌우될까요? 그럴 수 없지요. 비행기와 조종사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설령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매우 유사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호수 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호수의 물은 표면만 얼어 있는 살얼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더라도 살얼음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그 사람은 호숫물에 빠지고 말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꽝꽝 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지금 보이는 얼음이 살얼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호수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비록 불안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있기에 그는 호수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겠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확신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신뢰하는지 곧 우리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입니다. 믿음이 확고하고 그리하여 분명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다면, 살얼음을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을 품더라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호수의 얼음이 살얼음 일지 모른다고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무사히 호수를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의 토대는 든든하고 확고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시인의 기도

오늘 본문 시편 80편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편 80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명한 확신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뒤 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 안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노래하는 장면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 대목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2-13절) 

시편 80편이 묘사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 12절과 13절이 묘사하는 내용은 북이스라엘이 아람이나 앗수르제국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침략을 당하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현재 형편은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이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현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은 본문 16절입니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6절)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습니다.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모든 주민이 앗수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시인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신명기 언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신명기 언약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르칩니다.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임하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직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은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요. 다윗의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완전히 불탔습니다. 그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입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 믿음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악인은 벌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저 악한 앗수르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10개의 지파가 모두 멸망했잖아요. 그러니 신명기 언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를 이렇게 이방인의 손에 던져주시니 다윗 언약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처럼 사마리아 성이 점령당하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계십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게 기도하고 있지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의 흔들리고 나의 확신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가 흔들리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의 마음도 흔들렸고, 시편 80편을 읊조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나의 눈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믿음의 대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바로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다시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내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표현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바로 그 법궤에 두 개의 그룹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오늘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완전히 멸망해 버린 절망의 현장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민족의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시인은 2절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도는 확신에 찬 기도라기보다는 믿음이 흔들릴 때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상이지요. 시인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기도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보내며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읽곤 하였습니다. 교회가 대림절 기간에 시편 80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본문 시편 80편에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시인이 기도하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를 기다리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여 가슴 답답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인생에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성탄절이 오지 않아 여전히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만 계속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시편 80편에서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편 80편이 계속 노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는 그 반대의 방향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3절) 

본문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여기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이니, 본문 3절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마치, 비행기를 탑승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비행기에 결함이 없고 그 비행기의 조종사가 잘 훈련을 받은 베테랑이라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겨울의 강추위로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얼음의 강도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성탄의 진리가 우리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도 나의 두 다리로 얼어있는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도 절망적이고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 그것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발걸음까지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 믿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찾아올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믿음의 걸음을 계속 내딛으십시오.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이 찾아오듯, 오늘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께서 깊숙이 찾아오시는 그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감정은 요동치고 흔들릴 수 있지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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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1. 21. 16:58

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운집한 파티장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시끄러운 파티장 안에서도 연인들은 주변의 소음은 무시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큰 불편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칵테일파티 현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콜린 체리라는 분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 과정에는 ‘칵테일파티 현상’이 일관성 있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참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때로는 기쁨의 함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요.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길을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처럼 예배당을 찾아 하나님을 예배하면 함께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TV와 라디오, 최근에는 핸드폰을 통해 나와 상관없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도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귀에는 매일 수많은 목소리와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지요. 그리고 이른바 ‘칵테일파티 효과’는 지금도 우리의 머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무엇을 듣고 무엇은 버릴 것인지 선택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담아 있는 것은 나의 귀가 들은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들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나온 일 년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보다 풍성한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지요. 올해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달려온 10개월 동안, 우리의 귀에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찌 감사할 것들만 있겠습니까? 지난 10개월 동안 여러분의 삶에 등장한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 가운데 불평하고 걱정할 거리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처지와 환경에 대한 불평과 근심으로 가득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나에게 들린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선택하여 듣고 마음에 쌓아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평과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은 모두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주셔서 나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무너트리는 생각과 이야기는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언어들만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충만

오늘 본문에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여러 권면이 등장하지요.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오늘은 본문의 여러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을 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충만’이요, 그 두 번째는 ‘찬양’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실천’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라 하라”(15a절) 계속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b절) 하나님께서 성도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의 목적이 등장하네요. 그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마음의 평강이지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골로새교회 성도들이여,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십시오’라는 권면입니다.

본문 16절에는 또 하나의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야기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은 넓은 의미로 신구약성경이라고 적용할 수도 있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15절과 16절의 말씀을 종합하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너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고, 너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장한다, 혹은 풍성하게 한다는 것은 거의 동일한 의미죠.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지요.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잘못을 행할 때에도,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죄를 범할 그때에도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는 것을 넘어,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며 기도하는 바는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 곧 예수님의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하며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런 점에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충만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요,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해지는 것이요,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충만한 삶을 위해, 지금도 여러분의 귓가에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겠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에 집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온전히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감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찬양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5절)

바로 여기에 “감사하는 자”, 곧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 등장하지요. 눈치 채신 것처럼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이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자, 그러면 감사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절)

본문 15절과 16절에 감사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감사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보다는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참 고맙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라는 권면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곧,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충만의 삶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해지면 그 충만한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합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지요. 나아가 감사하는 사람은 그 충만한 은혜를 자신의 입을 열어 표현합니다. 바로 그것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입니다.

본문 16절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가지 용어는 그 지시하는 바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는 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할 때 시편을 외우곤 했거든요.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도 시편을 찬양으로 부르는 것은 예배의 매우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또 ‘신령한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노래는 대중이 부르는 통속적인 민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노래’라고 했으니 사람들에게 익숙한 멜로디나 민요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를 덧붙인 노래를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본문 16절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16절의 마지막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여러분의 입술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10개월의 은혜를 기억하며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찬양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의 찬양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실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이지요. 자, 이제 감사하는 사람의 마지막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도 감사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러면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의 앞 구절이지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우리는 이미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과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성령의 충만을 누립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마음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니 그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의 모습은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인 ‘찬양’은 주로 예배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지금처럼 여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표현하지요. 또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예배할 때, 혹은 자신의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 이외에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실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지요.

2000년 교회사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 안토니우스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AD 3세기와 4세기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다짐하며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생을 바쳤던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르지요. 성 안토니우스는 당시 사막의 수도사들 가운데 가장 혹독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훈련하였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 안토니우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우스, 너의 영혼은 알렉산드리아에 거하는 한 구두 수선공만큼도 완전하지 못하구나.” 안토니우스는 깜쪽 놀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 구두 수선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지요. “자, 이리로 와서 저에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기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러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선생님, 저로 말하면 선행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일 뿐입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가 거주하는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제 일을 시작하는데,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해서 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늘 거짓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은 진실하게 지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보잘것 없이 시간을 보낸 때에는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교훈합니다. 이것이 제 단순한 생활의 전부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5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분별하고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분별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하게 하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마음의 진실함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거짓을 멀리하십시오. 사람들과의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십시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교훈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충만과 찬양과 실천의 삶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감사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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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6. 24. 11:02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명, 북한군 전사자는 약 52만 명,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사자는 약 30만 7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숫자만 해도 100만 명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군인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죠. 625 전쟁으로 사망한 민간인의 숫자는 약 24만 4천 명이요, 그 외에도 실종자나 부상자는 더욱 많으며 그 과정에서 부모를 잃고 버려진 전쟁고아도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은 인명피해만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의 경제는 사실상 초기화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남한 제조업의 약 42%, 북한 공업의 약 60%가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의 파괴와 도로, 교량, 철도 등의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625 전쟁은 예배당을 비롯한 기독교 시설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그 마음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해졌습니다. 이처럼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는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허락해 주시기를, 나아가 하루속히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의 시대, 평화의 시대

모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요단 동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고,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40년 간 광야에서 생활했던 시대에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은 성인이 되어 모세의 지위 아래 요단 동편을 점령하였고, 나아가 여호수아의 지위를 받으며 요단 서편을 점령하였습니다. 가히 그들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여호수아 22장에 이르면 전쟁의 시대가 마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수 22:1-2) 

여기에서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했다는 듯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명령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수 22:3) 

지금 여호수아가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이라는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안정의 시대, 정착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수 22:4)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완벽한 평화는 아닙니다.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국지전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모세의 시대, 나아가 여호수아의 시대에 펼쳤던 전면전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정착의 시대요 평화의 시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사람이 어느 시점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요단 동편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 서편을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반면, 그들의 다음 세대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야기하는 그 전쟁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한 지역에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지 답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약 7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625 전쟁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기보다는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남과 북은 전쟁을 끝낸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이지요. 그래서 625 전쟁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국지전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 70여 년 전 이 땅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교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분명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 전쟁의 시대를 지나 안정과 평화의 시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이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스라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가장 큰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시대, 곧 이스라엘 12지파가 함께 힘을 합해 적군을 상대할 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그들에게 놓여 있었습니다. 그 문제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은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이스라엘은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쪽과 서쪽으로 분명히 나뉘어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단 동쪽에는 두 지파와 반지파가 정착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와 반지 파는 요단 서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강이나 바다가 있어도 그 위에 다리를 놓고 차도나 철도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요단강과 사해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여러분, 여호수아 3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으로 요단강의 물이 멈추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에요. 그런데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정착의 시대, 평화의 시대에 요단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서편으로 건너올 일도 없거니와 요단 서편에 정착한 아홉 지파와 반 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갈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이 서로 왕래를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되지 않겠어요? 이러한 위험이 지금 평화의 때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위험성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약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입니까?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었지만 온 한반도를 뒤덮었던 625 전쟁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평화의 시대를 보낸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서로 왕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들이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정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요단 강과 사해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이 서로 나뉘어 있는 문제는 단지 정서적으로 나뉘고, 문화적으로 괴리감이 생긴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직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 그 위험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수 22:24-25) 

여러분, 지금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결코 괜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에는 요단강을 건너 서로 왕래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장소로 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임재하시니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는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 곧 성소에 가야 제사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는 요단 동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 서편에 있거든요. 그러니 요단 동편에 정착해야 하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야 요단 동편에 정착을 해도 한평생 전쟁의 시대를 보내며 하나님을 섬겨왔으니 그 믿음이 변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요단 동편에 거주한 지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22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했던 그 걱정이 실제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서 현실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은 휴전선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왕래가 멈추었지요. 이산가족이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도 크고 시간은 흐르는데 그리운 고향 땅을 찾아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슬픔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쟁 후 70여년이 흐르면서, 남과 북은 문화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며 살아가는 모습도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민족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남한과 북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함께 모여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남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 가득 차 있어요. 서울의 밤하늘은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휴전선 이북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요단의 서편이든, 요단의 동편이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38선 이북이든 38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휴전선 이남이든 상관없이 우리 민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단 서편의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아무리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더라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와 반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만 아름다운 예배당에 함께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북녘의 동포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깊은 지하 교회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어찌 온전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자신들의 후손이 너무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단 동편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요단강 가에 제단을 하나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지요. 여호수아 22장 마지막절은 그 제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4) 

본문이 설명하듯이 ‘엣’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34절은 그 앞에 매우 중요한 표현을 첨가하고 있네요. “우리 사이에”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할까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와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지파를 모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엣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지요. 요단 서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뿐만 아니라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625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휴전선 남쪽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휴전선 북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그들의 후손이 요단 동편에 거주하든지 요단 서편에 거주하든지 상관없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엣이라는 이름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625 전쟁을 기억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지파들이 ‘엣’이라는 제단을 쌓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마음으로 오늘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여 주셔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휴전선 이남이든 휴전선 이북이든 이 땅 한반도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넘치며 이 땅 한반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넘쳐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마침내 복음 안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는 그날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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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4. 4. 17:25

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였습니다. 먼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을 부활절 날짜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따라 아빕월 14일 – 그런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빕월을 닛산월이라고 불렀어요 – 그러니까 닛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고, 그날 저녁에 붙잡혀 바로 다음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그 날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금식도 하고 성만찬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해진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키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지겠지요. 마치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해 놓으니 매년 성탄절의 요일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AD 2세기경,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던 것과 달리,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을 중심으로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요.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기독교에서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 곧 주일에 부활절을 지킬 수 있도록 날짜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집니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AD 2세기 소아시아 교회와 로마의 교회는 서로 다른 날 부활절을 기념하는 두 가지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각주:1]

그런데 이러한 전통에는 날짜와 요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준보다 더 중요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닛산월 14일, 곧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기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지요. 반면,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삼는 전통은 바로 그 요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 가운데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더 그르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고대교회로부터 견지하였던 진리의 두 기둥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 기독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리,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입니다. 


복음의 두 기둥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진리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면서 복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지요. 그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절과 4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이요, 또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시기만 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에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셨다면 이번에도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의 상태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게는 지난 사순절이요 짧게는 지난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셨다면 이제는 부활의 복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만 있으면 안돼요,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인생의 참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바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부활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새로운 희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의 두 기둥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1a절)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이야기하면,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전한 복음,’ 그 복음은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요 또한 너희가 이미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복음을 알려주고 가르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처음 믿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복음의 은혜가 나의 마음에 가득 넘쳐서 찬양을 한 곡 불러도 감격이 되고, 기도를 한마디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1~2년이 아니라, 10년이나 20년, 혹은 그 이상 하신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느꼈던 그 구원의 감격이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혹은 10년이 지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그렇게 나의 삶에 소망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구원의 감격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흩어져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어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로 치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점차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면서 세상의 걱정, 세상의 염려, 세상의 자랑, 세상의 관심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기에서 알게 한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알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알려주겠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죠, 설명할 수 있죠. 마음으로 동의하죠. 그러나 그 복음이 그들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니,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오늘 본문을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면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강조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자,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두 가지 기둥을 서술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보세요.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중략)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지금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보이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괴로워는 우리 각 사람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곧 객관적인 진리로서 부활을 실현하신 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열두 사도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오백여 형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야고보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도 바울을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 명씩 찾아가 만나주시니 그들의 삶에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참된 소망이 임하게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삶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시고 임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가 영생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절 논쟁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좀더 구체적으로 AD 2세기 고대교회에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고, 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계산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절을 계산하는 기준이 다르다 보니, 한쪽에서는 부활절을 맞이하였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고난주간을 보내며 금식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이지곤 하였지요. 그래서 교회는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자, 그러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과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는 전통 가운데 무엇이 점차 기독교 전역에 확산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요. 21세기 이 땅의 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지만 그 대신 매년 요일이 다르고, 부활절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매년 주일에 지키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AD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매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계산법을 간단히만 말씀을 드릴까요? “매년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맞이하게 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편할까요? 닛산월 14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편할까요? 당연히 사람들이 부활절 절기를 지키는 데는 닛산월 14일이 훨씬 편하죠? AD 2세기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검색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손쉬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포기하고 주일이라는 요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진리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가운데 더욱 중요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서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고난주간과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부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은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하잖아요. 그러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지요. 계산이 복잡하다고요? 기억하기 어렵다고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계산하기 아무리 어려워도, 기억하기 힘들어도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곧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그들이 행한 위대한 사건과 업적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로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나타나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일이 많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에 너무도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그 토대부터 바꾸어 놓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실 때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이 찾아오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실 때 허무한 우리 인생이 비로소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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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립 샤프,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이길상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205-2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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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3. 28. 17:24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먼저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이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함께 묵상하였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거듭남의 비밀 등을 먼저 머리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지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하여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두번째 요소인 동의는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종파가 가르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파로 분류되는 이단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동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데,’ (그들은 성육신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은 대속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겠어?’ (마음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입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세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있고 동의하지만 믿음의 마지막 세 번째 요소인 신뢰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이순신 장군이 군사전문가로서 매우 큰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큰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그 누구도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우리나라와 민족을 지켜줄 수 있다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동의와 신뢰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이제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맡기는 신뢰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인간에게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지식,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라는 동의,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 가운데 어느 단계에 있으십니까? 


고통과 신뢰

시편 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은 지금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한 두개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편 31편 9절) 

시편 31편은 지금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아픔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시편 31편 10a절) 

지금 시인은 고통과 근심 때문에 몸과 마음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만성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분위기가 암울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시편 31편의 분위기는 이러한 예상과는 정반대입니다. 큰 고통 중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아픔이 지속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소망이요, 오히려 평안입니다. 참 놀라운 반전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아픔 속에서도 시편 31편은 어떻게 그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31편 3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든든히 깔려있고, 그 위에 간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편 31편 4절) 

지금 대적자들이 쳐놓은 그물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그물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고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시편 31편의 뒷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편 14절)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기에 “그러하여도”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앞에 9절부터 13절까지 시인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그리고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그러한 일이 모두 자신의 삶에 닥쳐오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저는 시편 31편을 읽을수록 이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신뢰가 형성되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당당함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으니 그 마음에 드넓은 대양과도 같은 평강이 넘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큰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지요. 물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의 일생 동안 뼈아픈 가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 사람을 누가 불쌍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표제어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굳이 다윗의 삶을 이 시편에 대입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다윗이 누렸던 권력과 다윗이 이룬 성취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편 31편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부러운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지고 특별히 목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도 시편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을 너무도 닮고 싶어요.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더니 재정의 문제도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고 자녀들에 대한 근심도 모두 다 사라졌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 같아요. 그 대신 한 평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때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도 그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은 더욱 풍성해져서 이제는 나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가득하다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큰 확신과 평안을 누렸던 한 신앙인의 믿음의 깊이를 헤아려보십시오. 그에게 닥친 고통이나 환란이 사라졌든 그렇지 않든, 그가 당한 아픔이 이후에 전화위복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인생의 굴곡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뿌리 깊게 내렸기에 이제는 그 어떠한 아픔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의 거인, 믿음의 어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몰려옵니다. 시편 31편이 노래하듯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은 나의 일생동안 지속되며 나의 모든 날은 괴로움의 연속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크기나 그 아픔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삶에 거대한 고난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우리의 신앙은 정말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평화를 누리며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뢰와 수용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가 시편 31편을 묵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시편 31편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시편 31편 5절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시편 31편 5a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일곱가지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라는 뜻으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였기에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인용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다 인내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시편 31편을 인용하며 성부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을 인내하신 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이 끝나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그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십시오.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였던 모습, 곧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누리며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신앙의 거인은 결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곧 신뢰는 수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지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에 곧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뢰는 예수님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지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죽음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넉넉히 받아들이며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의 마음이 있다면 그 신뢰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가실지 몰라도, 심지어 지금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나에게 복이 아닌 화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곧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지식은 있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지식과 동의의 단계까지는 나아갔지만 여전히 신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를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신뢰를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여드리죠.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빠가 지켜보고 있었죠. 아빠는 높은 바위에 올라간 아이에게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높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면 혹은 바위 아래에 건장한 남자가 서 있기는 하지만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이 아이는 바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이미지에서 저의 시선이 머무는 장명은 아이의 표정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밑에 있는 아빠의 표정을 보면 어금니가 보일만큼 웃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아래에 아빠가 없다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저 사진에서 아이에게 불안한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 아래에 나의 아빠가 있고 나는 그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도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수용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시편 31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거인이요, 믿음의 어른으로 성숙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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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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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2. 28. 17:21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고난

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시편 25편과 마찬가지로 탄식시입니다. 곧, 깊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이지요. 성경은 일반적으로 신앙인이 당하는 고통에는 다 목적이 있고, 그에 따르는 유익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지금 당장 너무도 아프고 쓰리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감추어진 성도의 유익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은 시편에 너무도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인 시편 34편의 몇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19절)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경은 고난을 통해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을 시편에서 찾아본다면, 시편 119편이 될 것 같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편 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고난을 통해 또다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고난을 통과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더욱 성숙할 나 자신을 소망하게 됩니다. 


시편 22편의 고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상황도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삶에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 아픔은 너무도 쓰라렸지만,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시고 나아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고통은 더해가기만 하고 그 아픔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2편이 꼭 그와 같은 고난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 

지금 시인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찾아왔다거나, 지금 당장 극심한 궁핍에 시달린다거나,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자들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정황이 그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편 2절)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고난이 찾아왔다고요? 아닙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기도했다고 말하잖아요.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밤낮 부르짖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신앙인들에게도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신다는 말이 최소한 시편 22편에는 안 맞아요.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기억하며 기도하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 4-5절) 

이 구절에서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다윗의 시’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지만, 시편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150편으로 묶여진 것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라는 점을 기억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그 무엇이 되었든,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에게 행하셨던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였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과거에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구원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어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편 22편 6절) 

인간이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배웠고, 성경을 통해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인가 봐요. 내가 사람이라면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셔야 하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그들을 큰 고통에서 구하여 주셨다면서요. 나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믿으며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만은 외면하고 계시니,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벌레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시편 22편의 깊은 탄식입니다. 


대속의 고난

여러분, 어떠세요? 성경이 고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시편 22편과 부합하지 않죠.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으로는 시편 22편의 탄식이 해석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시편 22편의 탄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시편 22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것은 ‘대속의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그것을 ‘대속’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마태복음은 그 의미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장 46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1절 외에도,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묘사하는 장면이 참 많아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16절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편 22편 16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잖아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17-18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죄를 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밤과 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어요.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였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귀를 닫으셨으며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섭고 그토록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무거웠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무서워야 했고,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치명적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참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인간들이 겪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감당하시는 대속의 고난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을 예언한 또 다른 예언자인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4-6절) 


구원의 은혜

시편 22편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견디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대속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모습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만, 시편 22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의 대전제는 시편 22편의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이 묘사하는 대속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22절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편 22절)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형제들에게 선포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편 22편 24절) 

우리가 곤고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아왔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위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까지와 후반부, 곧 22절 이후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집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21절 이전, 곧 전반부에서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대적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뿐, 그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11절)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를 버리셨지요. 철저히 한 사람의 고독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후, 곧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이 등장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특징 하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홀로, 고독하게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의 고독한 대속의 고난이 우리 모두의 구원과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 하나님은 그 죄를 벌하지 않고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너희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모질었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안셀무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범죄 한 인간이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버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직접 체험하였던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1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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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