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맥추” 곧 보리를 추수하여 그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를 추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 이른바 ‘보릿고개’를 겪곤 했지요. 보릿고개가 무엇입니까? 지난가을에 거둔 쌀을 비롯한 곡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곡식을 추수해야 양식을 이어갈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열매를 맺는 작물이 아직 충분히 여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추수하는 작물이 보리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지난가을에 거둔 양식은 점점 사라지고 아직 보리는 거둘 수 없었던 그 고비를 이른바 ‘보릿고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경사회에서 마침내 보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겨울과 봄의 힘겨운 시기가 지나가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계절이 찾아왔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보리를 수확한다는 것은 이른바 보릿고개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보리를 시작으로 각종 작물의 추수가 이어지게 된다는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리를 풍성하게 추수하게 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쌀도 추수하게 하시고 그 외에도 다양한 곡식들과 채소 그리고 과일의 수확까지 이어지게 하신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농경사회를 살았던 과거의 신앙인들은 보리를 추수한 후 맥추, 곧 보리를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먼저는 보릿고개로 표현되었던 그 어려움의 시기를 이겨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아가 보리 추수를 시작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풍성한 수확의 은혜를 믿기에 먼저 감사를 드렸던 절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농경사회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전히 농사를 짓는 분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에 보릿고개와 같은 시기는 언제나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소진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공급이 이루어져야 또 다시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아직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참고 견디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와 같은 인내와 인고의 시간이 지난 뒤, 하나님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열매를 허락하여 주셨으니, 우리는 지난 상반기를 마치고 새로운 하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보리 추수를 시작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풍성한 추수와 소출에 감사하는 것이 맥추감사절이듯,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상반기에 하나님께서 뿌려놓으신 선하고 아름다운 씨앗들이 하반기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며 감사하는 것이지요.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제는 기근의 시간, 궁핍의 시간, 아픔의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총을 물 붓듯 부어 주시는 은혜의 시간이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시작으로, 여러분 모두의 삶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풍성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빌립보서 1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였는데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작성할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이었지요. 그러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선한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난주 본문의 핵심 구절인 빌립보서 1장 6절은 어떻게 선언합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믿음과 확신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니 그의 몸은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인 빌립보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신다고 선언했던 바울은 이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새 일을 지금도 완성해 가시듯 우리도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감사”라는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Move One. 불완전하기에 더욱 감사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인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지요. ‘내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얻지 못하였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실제로 본문 12절에는 그 목적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무엇인가 생략이 되었다면 그 생략된 단어나 뜻을 찾기 위해 우리는 자연스러운 문맥을 살피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 12절 바로 앞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문맥상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사도 바울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에 대해 다 알지 못하였다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수록, 복음의 능력과 신비는 더욱 크고 깊어 아직 다 깨달을 수 없고 다 체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체험만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13a절)
바울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아직 목표하는 바를 잡은 것이 아니기에 지금까지 행한 일들, 곧 뒤에 있는 일은 다 잊어버리려 한다고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미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선교사로 이미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전도자로서 행하였던 모든 선교사역과 그가 사도로서 행하였던 모든 목회가 아직 그 무엇 하나 이루거나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고백이지요.
사람들은 이미 바울 자신을 칭찬합니다. 바울 자신에 대해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선교사라고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믿고 선포하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의 더 깊은 진리를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을 통해 복음의 역사를 놀랍게 일으켜 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행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감사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겠지요. 지금까지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신 하나님께도 감사하겠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행하신 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더라도 풍성한 감사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지금 당장 보리를 추수하여 보릿고개의 시름을 덜어주신 은혜만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미완성의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킬 일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선포하잖아요. 그리하여 바울의 마음에 가득한 감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만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그 일에 대하여 먼저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의 의미로 한 번 더 말씀드린다면, 아직 보리밖에는 추수하지 못하였지만 그렇기에 앞으로 쌀도 추수하고 그 외의 다양한 곡식과 채소도 추수하게 될 것을 믿음으로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이루었다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실 일들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더욱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Move Two. 달려가며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성취한 것도 없다고 말했지요. 그리하여 바울은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
바울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라고, 아직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말의 의미는 육상경기보다는 사냥감을 좇아 달려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상경기에서는 1Km를 달린다고 했을 때 내가 500m를 달리면 남은 거리가 500m만 남습니다. 그래서 내가 500m를 마저 달리고 나면 골인점에 도착하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의 경주가 예를 들어 1Km라면, 매년 100m씩 달리는 성도들은 10년이면 도달하게 되는 것이고, 매년 50m씩 달리는 성도라면 20년이 걸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달려야 하는 신앙생활의 경주는 그와 같은 경기가 아닙니다.
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은 육상 경기장이 아니라 사냥터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가깝다고 말씀드렸지요. 나와 사냥감 사이의 거리가 이번에도 1km라고 가정해보지요. 1km 앞에 있는 사냥감을 따라잡기 위해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래서 500m를 좇아갔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사냥감도 도망을 가겠지요. 그리하여 내가 500m를 쫓아가는 동안 그 사냥감이 약 200m를 도망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최선을 다해서 500m를 달렸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목표물과의 거리는 300m 정도만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그 결과는 500m만 남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700m가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제나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작년에는 힘차게 500m를 달릴 수 있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삶의 힘겨운 일들도 일어나고 몸도 아프고 지치면서 목표지점을 향해 약 200m 정도만 달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삶이 힘겨운 중에도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멈추지 않고 200m 정도를 달렸는데, 사냥감은 이번에 더 힘을 내어 300m를 달아났다면 나와 목표물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100m 정도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가 신앙생활의 진보를 이룬다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완성에 도달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신앙생활의 목표지점과 그 비전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라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더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리고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의 진부를 위해 노력을 해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앞에 목표지점을 조금씩 옮겨주시니,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이 만큼이라도 진보한 것이 아닌가요? 신앙생활을 1년, 5년, 길어야 10년 정도 하면 누구나 다 도달할 목표만 주셨다면 우리 신앙의 성숙이 이미 오래전에 멈추어 버리고 더 이상 꿈도 비전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처음부터 너무 멀고 어려운 목표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생활의 여정을 포기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앞에 눈에 보일 수 있는 비전과 꿈을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도하시거든요.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의 감사는 목표지점에 도달했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 지점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추수맥추감사절의 의미로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지금 당장 올해의 모든 수확을 다 거둘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만 바로 지금 보리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밀을 거두게 하더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콩을 거두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면서 그 각 단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온 모든 과정을 돌아보며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노라 하나님께 풍성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의 일생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마지막 목표점에 이르지 못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2절을 잘 읽어보면 목표점은 잡지 못했지만, 이미 잡은 그리하여 이미 잡혀진 하나의 대상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본문 12절 뒷부분에 이런 말씀이 등장하네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잡으신 것, 곧 이미 붙잡고 계신 것이 있네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께 붙잡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는 구절 앞에 주어가 분명히 등장하지요. “오직 내가” ‘내가, 곧 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의 진정한 감사 제목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도 많이 있고, 나는 하나님의 손을 놓쳐버리는 때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나의 인생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꼭 붙잡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붙잡아주셔서 여전히 미완성의 모습이지만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니 우리는 감사하지요. 아직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잡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열매가 갈수록 풍성해질 것을 확신하니, 비록 미완성의 존재라 할지라도 – 아니 미완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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