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5. 7. 6. 15:04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맥추” 곧 보리를 추수하여 그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를 추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 이른바 ‘보릿고개’를 겪곤 했지요. 보릿고개가 무엇입니까? 지난가을에 거둔 쌀을 비롯한 곡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곡식을 추수해야 양식을 이어갈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열매를 맺는 작물이 아직 충분히 여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추수하는 작물이 보리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지난가을에 거둔 양식은 점점 사라지고 아직 보리는 거둘 수 없었던 그 고비를 이른바 ‘보릿고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경사회에서 마침내 보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겨울과 봄의 힘겨운 시기가 지나가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계절이 찾아왔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보리를 수확한다는 것은 이른바 보릿고개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보리를 시작으로 각종 작물의 추수가 이어지게 된다는 뜻도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리를 풍성하게 추수하게 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쌀도 추수하게 하시고 그 외에도 다양한 곡식들과 채소 그리고 과일의 수확까지 이어지게 하신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농경사회를 살았던 과거의 신앙인들은 보리를 추수한 후 맥추, 곧 보리를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먼저는 보릿고개로 표현되었던 그 어려움의 시기를 이겨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아가 보리 추수를 시작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풍성한 수확의 은혜를 믿기에 먼저 감사를 드렸던 절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농경사회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전히 농사를 짓는 분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에 보릿고개와 같은 시기는 언제나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소진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공급이 이루어져야 또 다시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아직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참고 견디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와 같은 인내와 인고의 시간이 지난 뒤, 하나님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열매를 허락하여 주셨으니, 우리는 지난 상반기를 마치고 새로운 하반기를 시작하는 오늘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보리 추수를 시작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풍성한 추수와 소출에 감사하는 것이 맥추감사절이듯,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상반기에 하나님께서 뿌려놓으신 선하고 아름다운 씨앗들이 하반기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며 감사하는 것이지요.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제는 기근의 시간, 궁핍의 시간, 아픔의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총을 물 붓듯 부어 주시는 은혜의 시간이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시작으로, 여러분 모두의 삶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풍성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빌립보서 1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였는데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작성할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이었지요. 그러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선한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난주 본문의 핵심 구절인 빌립보서 1장 6절은 어떻게 선언합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믿음과 확신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니 그의 몸은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인 빌립보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신다고 선언했던 바울은 이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새 일을 지금도 완성해 가시듯 우리도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감사”라는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Move One. 불완전하기에 더욱 감사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인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지요. ‘내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얻지 못하였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실제로 본문 12절에는 그 목적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무엇인가 생략이 되었다면 그 생략된 단어나 뜻을 찾기 위해 우리는 자연스러운 문맥을 살피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 12절 바로 앞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문맥상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사도 바울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에 대해 다 알지 못하였다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수록, 복음의 능력과 신비는 더욱 크고 깊어 아직 다 깨달을 수 없고 다 체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체험만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13a절) 

바울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아직 목표하는 바를 잡은 것이 아니기에 지금까지 행한 일들, 곧 뒤에 있는 일은 다 잊어버리려 한다고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미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선교사로 이미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전도자로서 행하였던 모든 선교사역과 그가 사도로서 행하였던 모든 목회가 아직 그 무엇 하나 이루거나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고백이지요. 

사람들은 이미 바울 자신을 칭찬합니다. 바울 자신에 대해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선교사라고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믿고 선포하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의 더 깊은 진리를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을 통해 복음의 역사를 놀랍게 일으켜 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행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감사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겠지요. 지금까지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신 하나님께도 감사하겠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행하신 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더라도 풍성한 감사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지금 당장 보리를 추수하여 보릿고개의 시름을 덜어주신 은혜만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미완성의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킬 일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선포하잖아요. 그리하여 바울의 마음에 가득한 감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만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그 일에 대하여 먼저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의 의미로 한 번 더 말씀드린다면, 아직 보리밖에는 추수하지 못하였지만 그렇기에 앞으로 쌀도 추수하고 그 외의 다양한 곡식과 채소도 추수하게 될 것을 믿음으로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이루었다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실 일들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더욱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Move Two. 달려가며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성취한 것도 없다고 말했지요. 그리하여 바울은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

바울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라고, 아직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말의 의미는 육상경기보다는 사냥감을 좇아 달려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상경기에서는 1Km를 달린다고 했을 때 내가 500m를 달리면 남은 거리가 500m만 남습니다. 그래서 내가 500m를 마저 달리고 나면 골인점에 도착하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의 경주가 예를 들어 1Km라면, 매년 100m씩 달리는 성도들은 10년이면 도달하게 되는 것이고, 매년 50m씩 달리는 성도라면 20년이 걸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달려야 하는 신앙생활의 경주는 그와 같은 경기가 아닙니다. 

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은 육상 경기장이 아니라 사냥터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가깝다고 말씀드렸지요. 나와 사냥감 사이의 거리가 이번에도 1km라고 가정해보지요. 1km 앞에 있는 사냥감을 따라잡기 위해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래서 500m를 좇아갔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사냥감도 도망을 가겠지요. 그리하여 내가 500m를 쫓아가는 동안 그 사냥감이 약 200m를 도망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최선을 다해서 500m를 달렸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목표물과의 거리는 300m 정도만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그 결과는 500m만 남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700m가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제나 힘차게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작년에는 힘차게 500m를 달릴 수 있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삶의 힘겨운 일들도 일어나고 몸도 아프고 지치면서 목표지점을 향해 약 200m 정도만 달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삶이 힘겨운 중에도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멈추지 않고 200m 정도를 달렸는데, 사냥감은 이번에 더 힘을 내어 300m를 달아났다면 나와 목표물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100m 정도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설명을 듣고 보니 우리가 신앙생활의 진보를 이룬다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완성에 도달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신앙생활의 목표지점과 그 비전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라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더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리고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의 진부를 위해 노력을 해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앞에 목표지점을 조금씩 옮겨주시니,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이 만큼이라도 진보한 것이 아닌가요? 신앙생활을 1년, 5년, 길어야 10년 정도 하면 누구나 다 도달할 목표만 주셨다면 우리 신앙의 성숙이 이미 오래전에 멈추어 버리고 더 이상 꿈도 비전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처음부터 너무 멀고 어려운 목표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생활의 여정을 포기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앞에 눈에 보일 수 있는 비전과 꿈을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도하시거든요.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의 감사는 목표지점에 도달했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 지점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추수맥추감사절의 의미로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지금 당장 올해의 모든 수확을 다 거둘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만 바로 지금 보리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밀을 거두게 하더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콩을 거두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면서 그 각 단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온 모든 과정을 돌아보며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노라 하나님께 풍성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의 일생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마지막 목표점에 이르지 못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2절을 잘 읽어보면 목표점은 잡지 못했지만, 이미 잡은 그리하여 이미 잡혀진 하나의 대상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본문 12절 뒷부분에 이런 말씀이 등장하네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잡으신 것, 곧 이미 붙잡고 계신 것이 있네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께 붙잡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는 구절 앞에 주어가 분명히 등장하지요. “오직 내가” ‘내가, 곧 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는 사실’ 그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의 진정한 감사 제목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도 많이 있고, 나는 하나님의 손을 놓쳐버리는 때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나의 인생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꼭 붙잡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붙잡아주셔서 여전히 미완성의 모습이지만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니 우리는 감사하지요. 아직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잡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열매가 갈수록 풍성해질 것을 확신하니, 비록 미완성의 존재라 할지라도 – 아니 미완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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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4. 29. 09:23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절 예배를 드렸지요.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절은 하루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순절이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절기라면, 부활의 절기는 부활절을 시작으로 성령강림주일까지 모두 50일을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다시 한번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선포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계속해서 부활의 절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격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바랍니다. 


닫힌 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날, 곧 부활절 저녁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라고 되어 있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새벽에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다시 살아나셨기에 더 이상 무덤에 안치되어 있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절 새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이 거의 흘러서 그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그날 하루 동안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요?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요 20:1-2). 여인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지요(요 20:3-10).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제자들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막달라 마리아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입니다(요 20:8).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그날, 하루가 지나는 동안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여러 차례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날 하루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수차례 들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슬픔과 두려움과 걱정을 다 물리치고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19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19a절)

여기에 그들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바로 ‘두려움’이네요.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대인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고 있으니,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어찌 그들이 방문만 꼭 닫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 문도 꼭 닫고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딱 한 번만 듣고도 내 마음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염려와 불평이 다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단 한 번만 듣고도 부활의 확신, 천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미 수차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열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두려움과 불안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이미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스스로를 바라보며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마음이 연약하여 늘 흔들리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오늘도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 예배의 자리를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방문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마음이 두려움에 가득하였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아가 그 마음의 문도 꼭 닫아 두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도 제자들에게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 주일 저녁에 열명의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후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행하였던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소망이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19a절)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문을 닫고 있어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들을 넉넉히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b절)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오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십니다. 그들이 굳게 닫아둔 문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 안으로 예수님께서 쑥 들어가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에 쑥 들어가셔서 그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는데요. 본문 20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주셨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늘 함께 계셨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모를 리 없지요.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만으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못 박혔던 손도 보여주시고, 창이 찔렸던 옆구리도 보여 주시네요. 그렇게 제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올 수 있도록 제자들의 마음에 확신과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20절의 뒷부분이지요.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말씀을 한번 들었다고 우리 마음의 모든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부활절도 보내고 부활의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더라도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 지금 앉아 계시니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여러분의 닫힌 마음을 찾아가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 걱정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방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를 찾아와 주셨지요.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났습니다. 부활주일을 지나고 그다음 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면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 되겠네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날도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모여 있던 열한 명의 제자들 중에는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가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바로 도마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는 부활절부터 한 주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26절은 이렇게 묘사하네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26a절) 

여러분 본문 26절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부활의 주님을 다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본문 26절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 곧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부활의 주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분들이지요.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로만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성도들이 믿음과 확신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추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렇게 순수성만 강조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 모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예수님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도마를 위해 다시 한번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를 찾아가십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이번에도 주목해야 할 단어는 무엇일까요? “오사”라는 단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찾아가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다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난주에도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찾아가셨을 때 도마라는 제자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도마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지난주와 똑같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조금도 귀찮다 여기지 않으시고, 한 주 전과 동일한 행동과 동일한 말씀을 똑같이 하시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도마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시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여러분, 이 장면에서 도마라는 개인 인물이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주 전,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기 전까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문을 걸어 잠겄잖아요.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과 도마의 차이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냐 믿음이 약한 사람이냐의 차이라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주 전에 만났느냐 한 주 후에 만났느냐는 시간의 차이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정말 집중해야 할 대목은 예수님께서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도마를 위해, 한 주 뒤에 제자들의 모임에 한번 더 찾아와서 예수님의 손과 예수님의 옆구리를 또다시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찾아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이번에는 도마가 정말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이와같은 믿음의 고백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분들이 바로 이곳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역사가 매주 우리 교회 안에 가득히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조금 빠를 수는 있고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이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이 지난 그 다음 주일, 예수님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모임에 직접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이 두 번째 방문은 당연히 도마 개인에게 큰 유익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두 번째 방문은 도마에게만 유익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까요? 물론, 열 명의 제자들은 한주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번 부활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부활의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찾아오시고 도마에게도 예수님의 못 박히신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그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던 열 명의 제자들은 다신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겠지요.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부활의 절기를 보내는 이 기간 동안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매주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매주 우리 교회를 찾아오셔서 아직 부활의 복음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도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은혜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여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에 쉽게 잠식당하지만, 
매주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부활의 생명,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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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3. 2. 14:51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이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쭉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습니다.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주차할 때까지 30분 이상을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번이라도 올라가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높은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28-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이전에 산 아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날 산 위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9절) 

이 구절에서 “용모”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와 같이” 빛났다고 했으니, 이것은 비유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그저 “해와같이”라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29절을 계속보시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네요. 마가복음에는 이 장면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는 장면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날에 보았던 예수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로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 특별한 날에 산 위에서 ‘변형’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의 눈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잠시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위대한 영광이 잠시 잠깐 제자들의 눈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친밀하신 분이시지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가정 집에도 들어가셔서 그 가정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각 가정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굶주리거나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어 빈손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풍성과 충만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게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태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전히 가득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꿇어 경배해야 하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별세 (30-31절) 

제자들이 산 위에 올라가니,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 광채가 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겹쳐서 일어납니다. 곧,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흐름, 곧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1절)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네요.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 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뒤 다시 한번 자신의 수난과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체없이 나아가시는 것이 계속되는 누가복음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출발점에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자신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변화산의 사건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이러한 흐름은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 곧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 ‘산상’이지요 – 용모가 변화된 사건 – ‘변모’입니다 –, 그리하여 산상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오는 수요일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게 되지요. 이러한 교회력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되신 사건 후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목상하며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겉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로 지금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지만, 나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분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시니, 다시금 힘을 내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그 고난의 끝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그의 말을 들으라 (32-3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네, 그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3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을 금방 떠나고 말았네요.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아 베드로는 아쉬웠던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을 모시고, 모세를 모시고, 엘리야를 모시자고 제안하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33절 뒷부분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영광의 장면이 짧게 끝나 아쉬워하는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5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목격하였으니 – 그 장면을 직접 보았으니 –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딱 한 번만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 곁에 늘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주시잖아요. 그러므로 변화산의 그 위대한 장면을 한번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더 크고 위대한 장면을 보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의 진면목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좁은 길을 타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그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너무도 멋진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너무도 아름다웠던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유학 생활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경험 이후 지금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빛나던 무지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다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분명히 있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비록 여러분의 삶에 인생의 사순절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상변모주일은 일년에 단 한주로 너무도 짧은 반면, 우리 인생의 사순절은 일년에 40일이나 되어 너무도 길고 모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있었던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전 생애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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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1. 26. 17:07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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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4. 12. 29. 16:25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성장에 있을 것입니다. ‘우후죽순’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나면 대나무 순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지요. 그런데 대나무가 수직으로 높이 자라면서도, 그것도 매우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거친 비바람에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 이유는 그 마디에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자라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마디를 형성하는데 집중합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는 일을 멈추고 내부에 힘을 집중하여 마디를 형성하고 나면 성장의 튼튼한 기초가 형성되어 또다시 수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탄절을 보내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아직 새해를 맞이하지 않은 바로 지금, 대나무가 위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고 하나의 마디를 형성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앞으로 나가기 위한 튼튼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의 설교 제목 그대로,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머지않아 허락하실 2025년 새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쌓이는 오늘 송년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과거 – 아픔과 은혜

오늘 본문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전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마칠 때쯤, 곧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었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강 동편을 점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광야 생활이 청산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깐만 과거를 되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보겠습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1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네 아들”은 지금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다음 세대를 말합니다. 곧, 지금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아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네 아들” 곧 그들의 다음 세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출생하게 될 첫번째 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세대와 달리 애굽에서의 생활 혹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세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지나온 과거를 반드시 회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새해를 소망 가운데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2025년 새해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역사를 펼치시기를 원하십니까?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있는데, 마치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마디를 형성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고 그 내부로 힘을 집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새해 2025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기 전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입니다. 우리가 옛적에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회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건을 기억합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모세는 계속해서 본문 22절에서 출애굽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억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2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는 동안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여 주셔서 그들을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큰 구원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루 이틀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겨운 일인데, 1년이나 2년도 아니고 40년을 살았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세월에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주셨으니,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적군이 그들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친히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이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무엇입니까? 큰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를 주셔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모습처럼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진맥진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지난 한해 동안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근근이 살아온 것이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실패가, 때로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회상할 때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으니,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모든 고비를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전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니, 한편으로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니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본문 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3절)

모세가 가만히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 모든 사건과 시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뜻과 비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뜻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이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종으로 살던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까? 본문 23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의 지난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마실 물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지요.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모진 광야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신 깊은 뜻과 비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뜻은 마침내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4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삶에도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나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듯한 괴로움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때마다 시마다 새 힘을 주고 용기를 주려고 무엇보다 피할 길을 주셔서 올해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온 성도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지기를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애굽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게 하셨던 것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광야 4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2025년은 지난 2024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주가 지나 1월의 첫번째 주일이 되면, 또다시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48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주셨고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를 지난 48년 동안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출애굽의 역사를 넘어, 광야 40년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과 경외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고통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어보자, 내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무엇입니까? 오래전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이제 곧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벗어나고, 늘 궁핍에 시달렸던 광야를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펼쳐질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시지만,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든 광야에서도 심지어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이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야 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조건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4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온 마음을 다해 힘 써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을 늘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친히 가르치신 최고의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어, 본문 24절의 말씀 그대로 “항상 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예비하신 새로운 역사가 새해 2025년에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나의 삶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 한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며칠 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25년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분들에게는 헌신과 봉사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모든 힘과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십시오.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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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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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29. 21:07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교훈을 얻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깊이 묵상해야 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던 중,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십자가는 어떠한 장소입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한 인류 최악의 범죄가 펼쳐진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갔던 우리의 죄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해습니다. 그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자, 레슬리 뉴비긴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분의 은혜로운 용서의 대상임이 밝혀진 곳이다.”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이 기도에서 제외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악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죄악에 얼룩져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로 내모는 나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침내 우리에게 또 다른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 용서하셨다는 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입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의논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초대 교회에 무엇인가 큰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가 얼마나 컸는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른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루었던 핵심 의제는 단 한 가지였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5장 1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행 15:1)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그들을 율법교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들,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여기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태어난 지 팔 일이 지나면 할례를 받았거든요. 그러므로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대상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는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이 명령하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습니다. 그들이 할례에 대해 가르쳤던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복음의 진리를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담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곧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초대교회 성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가르칩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이방인에게는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지요.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반박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우리’로 호칭하는 대상이 있고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있지요. 베드로가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곧 율법에 대해 모르고 그 율법을 준행하지도 않던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나 우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온 유대인이나 그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던 이방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어떤 점에서 차이나 차별이 없을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첫째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이 죄인이지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 없이 살았지요. 그러니 그들이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했기에 의인일까요? 과연 구약성경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는 의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주범이었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지요. 그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방인들 역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11절) 

여기에서도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명사가 등장하네요.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유대인을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은 어떤 뜻이 되지요? ‘그들과 같은 이방인도, 우리와 같은 유대인도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믿음이었고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믿음이지요. 


십자가의 가르침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복음의 은혜를 나 자신에게는 너무도 쉽게 적용하지만 그 동일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는 너무도 인색한 것은 아닐까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학장이었던 필립 클레이턴이라는 신학자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의 크고 더러운 죄악은 눈과 같이 희어졌다고 믿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 예컨대 흑인이나 멕시칸이나 아시아인들 – 도 그들의 모든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눈과 같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쳤던 유대 출신의 교사들이 범했던 오류, 미국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범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없다고 여러분은 자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십자가는 한평생 교회를 출석하며 충성으로 봉사하는 여러분들과 이제 막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새신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동일하게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은 풍성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도 바울이 그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너희만이 아니라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1b)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넓게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였다면, 이번 사순절에는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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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3. 5. 16:40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에 대해 사유해보면, 인생의 고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또 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결책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일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할 때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이 모가 나고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길 수가 있지요. 내가 평안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니 그 또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레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이나 평안할 때는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거든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일어날 때, 곧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합니다. 그러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은 허물어집니다. 이처럼 홍수가 몰려올 때, 곧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고난의 일반적인 특징을 한두 가지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왔을 때만 그것이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바라보며 공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는 아픔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경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입니다. 욥이 큰 고통을 당하였지요.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욥 자신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욥 자신의 아픔일 뿐 친구들의 아픔은 아니라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헨리 나우웬은 “가장 치유하기 힘든 아픔은 나 자신의 상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언제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나에게 아픔이 찾아올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사유도, 그리고 동서고금을 박론한 인생의 지혜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은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위대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25a절) 

지금까지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아픔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고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범죄 때문에 당하신 대속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지요. 분명히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어 단지 이 신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가’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께 옮겨갔습니다. 전가되었지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내가 지은 수많은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에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전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공로와 은혜가 이제는 우리에게로 전가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절)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합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사고락을 같이합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과 합해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합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예수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죽음이요,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6장 3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곧 우리의 고난이 된다고 말씀하지요. 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할 때,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과 하나되기를 추구하십시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고, 바로 그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례와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르치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중요한 현장이 어디인지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서 지금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였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한평생 세례를 한번 받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이미 접붙여진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은 어디일까요? 오늘도 우리가 행하게 되는 성만찬 예식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살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받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이 신비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그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이 있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여 주실 것이요, 바로 그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얻고 예수님의 부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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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7:41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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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80편 “믿음이 흔들릴 때”

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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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시편 80편 1-2절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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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이사야 9장 1-7절 “소망의 이유”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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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성탄절] 이사야 9장 6절 "성탄을 기다리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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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누가복음 2장 8-20절 "성탄을 준비하셨습니까?"

오늘 대림절의 네 개 초가 모두 불이 밝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고,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성탄절이 찾아오겠지요.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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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요한복음 1장 1-14절 “영접하지 않는 세상, 영접하는 성도”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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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마가복음 8장 11-13절 "내 생애 최고의 기적"

오늘은 여러분에게 성경 퀴즈를 하나 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기적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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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시편 97편 1절 “만백성 기뻐하여라”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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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주일] 신명기 6장 20-24절 “회상과 비전”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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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창세기 35장 1-7절 “야곱, 다시 출발선에 서다”

지구의 여러 나라들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는 태평양의 서쪽에 위치해 있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매우 일찍 새해를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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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여호수아 1장 “새롭게 출발하는 공동체”

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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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스바냐 2장 1-3절 "카이로스의 시간을 준비하라"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입니다. 매년 음력으로 1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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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요한계시록 21장 5절 "만물을 새롭게"

한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한해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근거로 내일을 예측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죠. 그 중에서는 희망차고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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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요한계시록 21장 6절 "유한한 시간, 그러나 무한한 소망"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소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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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수세주일] 마가복음 1장 9-13절/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작년 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TV 드라마 가운데 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도 작년 말 열심히 이 드라마를 챙겨 보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실 것으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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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변모주일] 마가복음 9장 2-8절 “보라, 그리고 들으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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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22편 “고난과 구원”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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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편 32편 1-11절 “죄 용서의 축복”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Cur Deur Homo?)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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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도행전 15장 9-11절 “모두에게 동일한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교회력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지요.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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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로마서 4장 25절 “우리의 범죄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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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시편 31편 5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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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4장 32-42절 "겟세마네, 영혼의 고난"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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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마가복음 15장 1-15절 "누가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는 오늘의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하나있습니다.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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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장 19-23절 / 부활의 능력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약함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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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태복음 28장 1-10절 "두려움과 큰 기쁨"

코로나19의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2020년 부활절은 많은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활절 예배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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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마가복음 16장 1-8절 “무덤에서 뛰쳐나가”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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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누가복음 24장 / 부활의 증인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함께 했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믿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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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요한복음 20장 19-29절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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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부활의 복음”

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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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믿음의 가정" / 여호수아 24장 14-18절

이번 가정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주제는 다섯 가지입니다. 믿음의 가정, 소망의 가정, 사랑의 가정, 축복의 가정, 그리고 행복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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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소망의 가정" / 사무엘상 1장 10-18절

오늘의 주제는 소망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언듯 보면 소망은 힘이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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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사랑의 가정" / 룻기 1장 15-21절

오늘 주제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난 이틀에 걸쳐 함께 생각해본 믿음과 소망과 함께 기독교의 3대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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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축복의 가정" / 요한삼서 2-4절

오늘 주제는 축복의 가정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6장을 보면, 제사장의 축복문이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은 민수기 6장에 등장하는 축복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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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행복의 가정" / 시편 128편 1-6절

오늘의 주제는 행복의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앞에 등장하는 시편 127편과 함께 시편에서 가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시편 128편은 아름다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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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베드로전서 3장 1-12절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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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느헤미야 1장 1-11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면,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국제 정세가 시시각각 변할수록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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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예배] 여호수아 22장 34절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는 큰 전쟁의 소용돌이기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숫자의 차이가 있지만,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의 숫자가 약 19만 4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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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 빌립보서 3장 12-14절,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맥추” 곧 보리를 추수하여 그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를 추수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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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에스라 3장 8-13절 “통곡과 기쁨, 그리고 감사”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의 이름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회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에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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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골로새서 3장 15-17절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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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1장 3-4절 “성장하는 믿음”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규모가 작아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매우 멋진 공원입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제너럴셔먼트리’(General Sherma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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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마땅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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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출애굽기 40장 36-38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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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가정예배] 로마서 12장 13절 "서로 주의하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4장 13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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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3. 2. 26. 16:57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 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는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인지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못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라도 가볍게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선언하면 모두 끝나는 일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깊이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죄악을 깊이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살펴보는 일이지요. 바로 그때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깊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죄 용서의 복

본문 시편 32편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시편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던 이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그 복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어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2절) 

다윗이 노래하는 신앙의 참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 것, 나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신앙의 참된 축복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인물인데,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길이 있었을까요? 구약의 율법에 따라 범죄한 모든 인간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죄를 저지른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가축을 끌고 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위한 속죄가 되게 하셨습니다(cf. 레 1:4).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죄악을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 용서의 방법에 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조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도 그리고 신약성경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죄용서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복을 받으셨습니까? 마음의 평안, 가정의 화목, 교우들과의 교제, 물질의 축복 등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입을 열지 아니할 때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죄 용서의 축복을 노래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죄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선포합니다. 본문 3절부터 이제 다윗 자신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여기에서 입을 열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죄의식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하루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쇠할 정도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다윗이 지금 묘사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죄를 범하였지요. 곧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의 잘못이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고 씨앗이 되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곧,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있었습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당연히 다윗 자신의 아이였지요. 그런데 다윗은 오늘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윗은 명령을 내려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전쟁에 대해 질문하는 듯하더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아에게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하룻밤 휴가를 줍니다. 다윗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분명히 다윗 자신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면서 그 아이를 다윗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우리아의 아이로 바꾸려는 시도였지요. 그런데 우리아는 그날 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시도가 이렇게 실패합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본문 3절 그대로이지요.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다윗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입을 열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게 되지요.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입니다. 그렇게 밧세바는 사별하였고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행동한 다윗의 의도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마치 다윗과 밧세바의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다윗의 두번째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처리하고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합법적인 혼인관계를 맺었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자인 다윗 왕을 공개적으로 비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다윗의 죄악은 감추어지는 듯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가 없잖아요. 다윗이 큰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다윗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감히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짓누르고 계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메마름입니다(4절). 나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깊이 숨겨두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결코 감출 수 없으니 우리의 영혼은 메마름, 곧 영적 기근과 영적 고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영적인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몸에 큰 질병이 찾아온다거나, 삶의 환경이 급격히 변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겪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큰 죄악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순식간에 바싹 메말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나의 죄를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숨길 수 없기에 회개하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복할 때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숨기려 할 때 그의 영혼을 메말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을 다윗은 얼마나 큰 수치와 모욕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받더라도 회개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절) 

다윗이 자신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께 다 자복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그를 짓누르는 듯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그의 뼈가 쇠하고 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서 그의 영혼이 바싹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6a절) 

이 구절에서 “주를 만날 기회”라는 번역에 미주가 되어 있지요. 미주를 보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까? “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라” 죄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까요? 당연히 회개의 기도지요. 다윗은 계속해서 회개가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와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6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거대한 홍수를 마주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모두 회개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홍수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홍수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홍수가 와도 두렵지 않고 홍수가 그 사람을 쓰러트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권이지요.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절) 

아니, 앞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짓눌러서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져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은신처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보호하신다고 노래하네요.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지요? 딱 한 가지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되니 이제는 환난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 용서의 축복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동행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환란이 찾아오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회개라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시작된 사순절 기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회개가 깊어질수록 사순절을 보내며 누리는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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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25. 16:45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많이 듣고 또 부릅니다. 캐럴이라는 단어는 전 세계적으로 성탄절 음악, 성탄절 찬양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캐럴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야외 축제 등에 참여하면서 함께 기쁨을 표현했던 노래를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는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표현한 음악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에도 성탄절의 기쁨을 노래하는 곡이 많지요. 예를 들어, 찬송가 117장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가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이 찬양의 마지막 후렴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주 오셨네” 어디 그뿐인가요? 성탄절이 되면 수없이 듣고 부르는 찬송가 115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크리스마스 캐럴만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인사합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운 성탄이라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인사를 통해, 그리고 노래를 통해 성탄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 그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시는 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싶어 먼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경로를 변경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 바로 위에 머무르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 2:10)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어린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직 30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준비한 예물을 드린 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후 성경의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동방의 박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이 주어졌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헤롯의 눈길을 피해 조심조심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지요. 이처럼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그 어떠한 유익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성탄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수여한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쁜 성탄절, 즐거운 성탄절, 곧 성탄의 기쁨입니다. 

마태복음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던 동방의 박사들을 소개한다면,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을 소개합니다. 목자들은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날도 목자들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밖에서 가축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천사는 목자들에게 매우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인류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1) 

여러분,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자들의 입장에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었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까지는 아직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30년이 흐르는 동안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목자들은 나이 많은 노인이 되거나 혹은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그날 밤 예수님을 찾아온 목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기쁨의 성탄, 즐거움의 성탄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공생애는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공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탄생, 곧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사도 요한은 동방의 박사들이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아기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사도 요한에게도 하나님은 성탄의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입니다.


만백성 기뻐하여라

본문 시편 97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시편 97편 1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인은 누구에게 기뻐하고 누구에게 즐거워하라고 초대합니까?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1b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워하자고, 바다에 떠있는 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만백성이 함께 기뻐하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탄이 선사하는 크고 위대한 기쁨은 성도들의 기쁨을 넘어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시편 97편 1절 말씀을 유심히 관찰하면 우리는 먼저 누가 기뻐해야 하는지 기쁨의 주체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 97편 1절은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1a절)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니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하고 바다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하자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을 때, 그리고 시내산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약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다스려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는 회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위에 구름과 불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에서 정해진 율법의 절차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통치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장면을 다 소개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편 97편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그때의 장면을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지금 시인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고 노래하며 만백성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감정만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기쁨이라는 감정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은 큰 두려움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위인,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로 향을 피워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잖아요. 이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을 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악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절차상의 문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 불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도 아닌 레위인, 레위인도 아닌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97편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나아가 만백성이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요 곧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사건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나아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성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며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선포했던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에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날 매우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지금 나의 삶에 성탄이 선사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이날,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성탄의 즐거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Merry Christmas,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를 친히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하였던 시인의 마음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며 기쁨으로 경배하였던 동방의 박사들과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득 채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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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