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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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성공 스토리

우리 다 함께 다니엘 6장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 6장 28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한마디로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서 1등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한 후 각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만 선발해서 국가의 지원으로 바벨론에서 조기 유학을 시켰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식민지였던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바벨론에서 조기유학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1장은 그렇게 각 지역에서 최고로 머리 좋다고 하여 뽑혀온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니엘은 청소년 시절부터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 다니엘은 출세의 가도를 달립니다. 바벨론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바벨론 제국의 모든 지식인을 통괄하는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그는 다니엘을 제국의 세 번째 권력자로 삼습니다. 다니엘의 출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이어 메대 나라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 메대 왕 다리오는 처음에 다니엘을 비롯하여 세 명의 총리를 두어 나라 일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 명의 총리 중에서 다니엘을 선택하여 전 제국을 통치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은 이제 왕에 이어 제국의 둘째 가는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니엘은 그 시대 성공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처음 유대인 소년으로서 바벨론에 왔던 다니엘이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니엘의 성공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니엘이 메대 제국의 시대와 바사 제국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다니엘 6장 28절의 말씀은 단지 다니엘이 얼마나 많은 권세를 누렸는지, 다니엘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유했는지, 다니엘이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니엘 시대에도 그렇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도 높은 지위에 오르고, 큰 재물을 얻은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출세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그 윤곽을 드러내면서, 한국의 언론은 미국에 이주한 한국인, 혹은 한국인 2세들 가운데 오바마 행정부를 구성하는 핵심 인사는 누구인지를 주의 깊게 살피곤 했습니다. 미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국제 권력의 핵심부에 위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변화는 그 옛날 다니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가운데 한 명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경이 다니엘에게 집중하고,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당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니엘 6장 28절의 말씀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다니엘 6장 28절의 말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 당시의 시대상황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 시대는 한마디로 포로시대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식민지 시대라는 말입니다.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던 가나안 땅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제사를 드리던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 의해 초토화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던 그들이 바벨론에 끌려와,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사람들을 섬겨야 했고, 그들이 믿는 ‘벨’과 ‘느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다는 이유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갑니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어찌 다니엘뿐이었겠으며, 어찌 다니엘의 세 친구들뿐이었겠습니까?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든지, 하나님을 찬양한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면 바벨론 군대에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바벨론에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벨론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고, 바벨론의 황제를 숭배해야 할 텐데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바벨론의 우상을 거절하거나, 황제 숭배를 거절하면 나에게 바벨론 군대의 칼날이 날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요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어디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용기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니엘의 성공은 그들에게 소망과 비전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신앙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다가 실제로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더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것은 물론이요, 그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다니엘을 보면서 다시금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야, 나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면 하나님께서 지키시겠구나.”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라 여기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겠구나!” 이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니엘의 성공은 자신만을 위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성공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신앙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더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성공이 있었으면 합니다. 다니엘과 같이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좋습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성공을 보며 누군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나 자신을 부인하면서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우리가 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믿음의 선택 위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열매가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구나,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되겠구나”라고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복이, 그러한 은혜, 그러한 믿음의 열매가 우리에게 가득 맺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길이 왜 어려울까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힘이 들죠. 다니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우상은 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바벨론 제국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힘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 사람들인 듯합니다. 바로 그때,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비록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3번씩 기도한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버리지 않는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열매가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니엘의 깨달음과 민족을 위한 회개 


그런데 다니엘의 성공, 다니엘의 형통, 곧 그의 믿음의 열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다니엘 9장 1절과 2절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데 명수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맞추고, 그 해석이 무엇인지 밝히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었지만 그 문제는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누가 풀지요? 다니엘이 풉니다. 벨사살 왕이 활동하던 시절,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썼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석학들이 다 동원되어서 그 글자를 읽고 뜻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죠. 바로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명수입니다. 
그런데 그 다니엘이 평생을 걸쳐 씨름한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평생 그 문제와 씨름하였지만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왜, 어떠한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다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니엘 9장 1절을 보십시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곧 그 통치 원년에, 이때는 이미 다니엘이 바벨론 제국에서 모든 지식인들의 수장,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교육부 장관을 경험한 이후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해결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러던 바로 어느 날, 9장 2절을 보십시오.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이 누구의 책을 보았습니까? 선지자 예레미야의 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셨던 예언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지금까지 한 평생 씨름하던 문제의 해답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이죠?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곧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폐허가 되어있는 상태가 70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70년 뒤에는 회복되리라는 예언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니엘이 보았다는 예레미야의 그 책이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성경책 안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29장을 찾아보십시오. 예레미야 29장 1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예레미야 29장의 사건이 있을 당시는 아직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기 이전입니다. 다만 유대 나라의 운명이 거의 다하여 국가의 최고 엘리트들은 이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태입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죠. 10절 보시겠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입니다. 우리 다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70년의 포로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선지자를 보내셔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꾸짖으셔도,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합니까?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징계를 주셔도, 그때뿐이지 유대인들이 마음으로부터 진정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속해서 머물러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유대인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옮기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경험시키십니다. 그때에야 유대인들이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십니다. 

예레미야 29장을 다시 보십시오. 12절과 14절의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바벨론에 보낸 후 약 40년 이상이 흐른 뒤, 다니엘이 이 편지를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이 편지를 보면서 자신이 평생 씨름하던 문제의 대답을 발견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70년 포로 생활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유대 나라가 회복되는 길이 어디에 있어요? 예레미야 29장에서 우리가 읽었잖아요. 12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게 와서 기도하면" 13절,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을 뻔히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3번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야 29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안에 자기 민족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니엘의 이 기도를 기억하셔서, 약속하신 70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니엘은 분명 성공한 인생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그 나라에서 권력 순위 2위에 올랐으니 큰 성공을 한 사람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권력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국가가 바뀌어도 다니엘의 출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크게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성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공이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벨과 느보라는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힘과 위로를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니엘의 성공과 다니엘의 형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무엇입니까? 유대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그 기도에 기름 부어주셔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일생을 통해 맺은 믿음의 열매였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때로 더딜 수 있다 


여러분, 분명히 믿음에는 열매가 맺힙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에는 역사가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며,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나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은 분명히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그 열매로 말미암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도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열매가 뒤따릅니다. 

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두 달간 이어진 믿음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적으로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살리는 능력은 오직 복음으로부터 온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회복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에 재정이 풍성해지면 교회에 활력이 더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뭔가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교회에 활력이 더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택, 믿음으로 인한 우리의 행동이 다니엘과 같이 분명한 열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열매가 때로 더딜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바벨론의 포로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도했을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였어요.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아 들었던 사람들이 '뭐 70년'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들을 고향 예루살렘으로 인도해주셔야지라고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를 고발했고, 이 일로 예레미야는 또다시 감옥에 구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했는데 백성들이 오히려 자기를 감옥에 가둡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현실이지요. 예레미야가 죽기까지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70년의 포로 생활을 하나님의 심판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눈물만 흘릴 뿐이요,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가 됩니다. 
예레미야에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10대라는 소년 시절,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성공입니다. 형통입니다.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큰 짐이 지워져 있습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부담감입니다. 자신이 더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갈수록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레미야의 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 문제 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기원전 587년 다니엘은 10대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재건되었을 때 과연 다니엘이 생존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셔서, 성전 재건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직 살아계셔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든 다니엘은 10대 시절부터 그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약 70년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신이 죽은 이후나, 혹 살아 있어도 자신의 삶이 다 마쳐갈 때 보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눈물은 믿음의 씨앗이 되었고, 다니엘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흘린 눈물은 믿음의 씨앗에 떨어진 빗방울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는 놀라운 열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지금 당장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믿음의 열매가 더딥니다. 지금 당장 내가 믿음으로 선택하고, 믿음으로 실천하며, 믿음으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버린다고 우리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어느 순간 100배, 1000배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우리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우리 교회에 큰 부흥의 물결이 몰아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열매는 때로 더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열매가 뒤따릅니다. 

믿음이란 낡은 지식이 아니라 감격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믿음이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믿음이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임을 깨달은 사람, 믿음이란 십자가의 길임을 깨달은 사람, 그리고 믿음의 열매는 때로 더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바로 우리들이 그러한 사람이 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아름답고, 주변 사람들이 바라볼 때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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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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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신앙에서 십자가의 신앙으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부분을 구분하는 분기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 8장입니다. 마가복음 8장이 마가복음 전체를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중요한 지리적 배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까지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시고, 마가복음 10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서 주로 활동하십니다. 그러니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마가복음 8장이 그 분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서로 지역이 다르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지명이 상징하는 바가 정반대입니다. 갈릴리는 이른바 소외계층, 빈민계층이 생활하던 지역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유대 나라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입니다. 갈릴리가 주변이라면 예루살렘은 중심입니다. 
마가복음을 순서대로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병도 고쳐주시고,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상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물건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도 하시죠.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어디에서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마가복음 전체에 있어서 8장이 8장 이전의 사건과 8장 이후의 사건을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대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딸 오라'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 이후부터 제자들이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고 하니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병 고쳐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이것도 믿음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눈에 무엇 하나 보이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지금 내 삶은 로마의 식민지 유대인의 삶을 살고 있고, 헤롯 왕의 폭정 속에서 고생 고생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료의 손으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회복되고,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물고기와 떡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입니다. 마가복음은 결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마가복음 8장 이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이때부터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섭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말씀을 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너무도 배가 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풍족하게 나눠주실 때는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마가복음이 장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지요.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 곧 은혜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 곧 십자가의 신앙입니까? 마가복음 8장 이전,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음식을 나누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전파하실 때조차,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은 그 은혜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믿음이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그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8장 27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를 끄집어내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시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병을 고쳐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여러분, 이 질문이 우리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이슬람도 알라의 정의와 은혜를 믿습니다. 불교도 부처님의 자비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지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기에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덧붙여집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 혹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등으로만 이야기하고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건 불교의 믿음이 되고, 이슬람의 믿음은 될지라도 기독교의 믿음은 아닙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질문은 던지십니다. 29절입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요, 구원자인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 주고, 물고기 주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은혜의 말씀을 주시고 책망과 저주의 말씀은 주지 않으시기에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아닌 책망과 경고의 말씀도 주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궁핍한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실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을 못 본 척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포기한다면 그것은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요,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 

마가복음 8장 31절부터 33절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믿음은 너무도 귀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모르고 있었던 것, 아니 크게 오해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성공과 영광과 능력의 길이라는 착각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3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물론 그 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3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 놓고’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이야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들만 있는 자리지만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은 비유적인, 어떤 영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고난을 받고, 버림 당하고, 죽는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다는 거지요. 그러니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가족을 떠났습니다. 재산도 버렸습니다. 어부라는 직업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단 몇 발자국이지만 걸을 수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No'라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지금은 예수님께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의 길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다고 평가받는 분들에게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이 무척 좋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구세주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어 나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지요. 그리고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영적인 일들을 바라보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고 교회의 목사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든 절대 충성입니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직임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뭐, 대장이나 부장이라는 말이 들어간 직임은 다 해요. 목사님께서 무엇을 맡기듯 '아!! 제가 순종해야지요,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평가되는 분들이 절대 순종하지 못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목사님께서 연말에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혹은 당회가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인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그렇게 믿음 좋다는 분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집사님, 혹은 권사님, 혹은 장로님, 내년에는 교회 봉사를 좀 쉬시죠'라고 이야기하면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분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를 쉬라는 말을 어떻게 듣는지 아십니까? ‘집사님, 이제 교회를 옮기시죠’라고 듣습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믿음 좋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그저 평범하게 예배만 드리고, 모임만 참석하면서 신앙생활하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이제 와서 나를 찬밥신세, 새신자 보듯 하느냐는 거죠. 여러분, 그러한 사람들이 이른바 ‘교회 안의 섭섭이’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란의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섭섭한 마음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나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도 섭섭하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 일이든 했으면 하니까 그와 같은 일이 없다고 반문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다시 반문하죠. 정말 우리 교회에는 섭섭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한분도 안 계시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의 섭섭이’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란을 일어납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무엇 때문에 섭섭하다고 말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섭섭한 게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시키시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힘든 일을 시키셔도 수제자라는 입지, 예수님의 칭찬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비참한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존심이 무너지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입니다. 


제자의 길, 십자가 

우리 마가복음 8장 34-3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였더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길일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의 길이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그 길은 곧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입니다. 

물론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이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 마가복음 8장 이전의 신앙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마가복음 8장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님을 계십니다. 그러면서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복음만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차피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라고 괴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러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크리스천이 되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넘어야 우리는 마가복음 8장 이전의 믿음에서 마가복음 8장 이후의 믿음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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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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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주간지인 <타임>(Time)은 매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각 분야별로 구분해서 10대 뉴스를 선정하고 합니다. 2008년 종교계 10대 뉴스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사건이 여전히 기억에 납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사건은 종교계 안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타임>이 표현한 영문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The economy trumps Religion”입니다. ‘경제라는 폐가 종교라는 폐를 이겼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자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존 멕케인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사람이 마이크 허커비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허커비는 미국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존 멕케인에게 참패하고 말죠. <타임>은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0월의 경선은 유권자들이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국가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람이 전체 미국인의 10%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여러분, 미국은 기독교 국가입니다. 유럽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국가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전체 미국 인구 가운데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보다 눈에 보이는 경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러하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한국은 기독교 국가도 아닙니다. 한국은 미국과 같이 기독교적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도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는커녕, 5% 혹은 그 이하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보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요소를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 곧 이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 곧 교회의 건물이나 시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의 사회적 지휘를 고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이고 우리 교회는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다 함께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입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여러분들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 곧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리스천 된 여러분이 아직 크리스천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자, 나의 얼굴이 변해서 그 누가 보아도 우리 동네 최고의 미녀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자 나의 얼굴이 왕과 같이 빛나고, 제사장과 같은 인품이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나의 변화된 얼굴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이 ‘야,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구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러워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겉모양은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제사장 같은 화려한 복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왕이 쓰는 왕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되던, 넌크리스천이 되던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너무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라고 부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시니, 제사장의 옷도 왕관도 없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나라라고 부르시니, 우리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꼭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고, 꼭 눈에 보이는 재물이 내 손에 들어오고, 꼭 눈에 보이는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고, 꼭 눈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거액의 예금 통장을 확인하고, 꼭 직장에서 승진되었다는 통보를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크리스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과 환경과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기에,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이는 없지만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나의 것임을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성경이 소개하는 다양한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여러분의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지지 않는 것들의 증거


자, 우리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 왕이 엘리사를 붙잡기 위해 군대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람 왕이 군대를 보내면서까지 엘리사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는 엘리사가 아람 왕의 전략을 미리 다 알고 그것을 북 이스라엘의 왕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살던 성을 완전히 포위하죠. 그 장면을 보면서 엘리사의 사환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큰 일 났다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죠. 그 사환의 눈이 열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람의 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불 병거와 불말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 엘리사는 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람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잡기 위해 도단을 둘러싼 아람의 군대를 오히려 사마리아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이 열리도록 합니다. 아람 군대는 자신들이 큰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아람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처음에 아람 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자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그제야 불말과 불 병거를 볼 수가 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가 아람 군대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죠? 엘리사의 사환이 믿음의 눈이 열려서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바라보지 못하여도,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람 군대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굳이 자신의 사환이 눈이 열려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볼 수 있도록 했을까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마 열왕기하의 이 사건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의 사건인 듯합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시돈이라는 나라의 공주였던 이세벨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은 온통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엘리야의 활동으로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리는 놀라운 기적이 발생하죠. 그 외에도 엘리야와 엘리사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북 이스라엘에 가득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데 익숙한 북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기적을 본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했던 열왕기하 6장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저 산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불말과 불 병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눈이 없이는 제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분명한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업에서 크게 실패했는데, 그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그 질병이 치유 받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경우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이상형을 단 하나의 조건도 어긋남 없이 만나 결혼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떠한 기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갈멜산의 기적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증거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고, 그 믿음이 내 삶을 아름다고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응답하시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숙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일어납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을 우리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 3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죠?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기에 아는 것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히브리서 11장 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보이는 것은 타나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과거에도 다 눈으로 볼 수 있었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과거에 나타났던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직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분명히 나타날 사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선언하시지만 이 약속이 눈에 보이는 지금 당장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라거나, 무의미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세계가 우리의 인생을 값지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바꾸는 유일한 지름길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1686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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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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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스트리트에서 회자되는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장은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움직인다” 투자라는 것은 매우 이성적인 행동으로 보입니다. 과연 누가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투자를 하면서, 수익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그러면서도 안정성이 더욱 확보되는 곳이 어디인지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의 소중한 재물을 투자하지 않겠어요? 투자라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하며, 마땅히 그러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금융시장이 밀집되어 있는 월스트리트에서 사람들의 투자 행태를 가만히 보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뭡니까? 첫째로 탐심, 그리고 둘째로 두려움에 따라서 사람들의 투자 행위가 결정되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누군가 주식에 투자를 합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주식 투자를 통해서 수익을 올리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주식 투자를 통해 소득을 늘리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주식 가격이 낮을 때 주식을 사들여서, 주식 가격이 높아지면 그 주식을 파는 겁니다. 가격이 낮은 주식을 사서 높은 가격에 팔면 수익이 생깁니다.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사람들이 이 단순한 원리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한참 주가가 상승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변에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내 친구들 중에도 주식에 투자를 했더니 두배가 됐다, 세배가 됐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주가가 뛰면서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도 큰 수입을 얻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마음이 생길까요? “탐심”이 생깁니다. 나도 손쉽게 큰돈을 벌고 싶다는 거죠.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주식에 투자해요. 그런데 이미 그때는 늦었습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주식으로 큰돈을 만졌다면, 이미 주식 시장은 가열될 만큼 가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식 가격이 낮을 때 사서, 가격이 오리면 팔아야 하는데, 탐심의 마음 때문에 높은 가격의 주식을 사는 거지요. 그렇게 높은 가격에 주식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주가가 어떻게 될까요? 떨어집니다. 주식 가격이 떨어지고, 자신이 구입한 주식의 평가액이 자꾸만 낮아지는 거지요. 주변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주식이 반토막이 났다, 누구는 빚을 내어서 투자했다가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다. 뭐 이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이런 소식을 계속 듣게 되면 어떤 마음이 찾아올까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다가 나도 크게 손해 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내게 몰려오자 이제 어떤 결정을 내립니까? 주식을 빨리 팔자. 지금, 주가가 떨어질 만큼 떨어졌는데, 두려운 마음에 주식을 처분합니다. 결국 대부분의 개미 투자자들이 높은 가격에 주식을 샀다가 낮은 가격에 주식을 팝니다. 이상적인 판단이 아니에요. 마음에 생기는 탐욕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단지 시장에서만, 금융 투자에 있어서만 인간이 두려움과 욕심에 따라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전도서 5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언어생활에서 실언을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한 상태라면 앞뒤를 생각해보고 상황에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급한 마음이 들고, 조급한 마음이 생기니 우리의 언어에서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말과 행동에 있어서 실수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두려움’입니다. 


아하스의 두려움 

성경을 보면 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던 경우가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남 유다의 아하스 왕도 바로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7장 1-2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자, 이사야 7장의 시대적 배경이 등장합니다. 당시 남 유다를 다스리는 왕은 누구입니까? 아하스 왕입니다. 아람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누구입니까? 르신 왕입니다. 끝으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은 누구입니까?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입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와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것도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러분, 두 개의 나라가 연합하여서 남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것도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국가의 위기인가요? 위기가 아닌가요? 위기죠. 위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위기가 아닙니다. 이사야 7장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그 뒤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두 나라의 군사력을 합쳐도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함락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두 나라가 연합하여 예루살렘 수도를 공격하는 국가의 최대 위기 상태이지만, 실제로는 위기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합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세계사에서 “북이스라엘-아람 전쟁”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전쟁을 계기로 아람과 이스라엘은 국력의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기울기 시작하느 국운을 다시 세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앗수르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할 나라가 무슨 군사력이 대단하고, 무슨 국력이 대단해서 다른 나라를 점령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별로 큰 위기의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 유다를 다스리던 아하스 왕의 마음에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사야 7장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하스 왕의 마음이 어떻다고요?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잖아요, 갈대가 흔들리잖아요, 꼭 그와 같이 아하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두려움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상력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내 자신의 잘못된 상상력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지면 나의 언어와 행동에 실수가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스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제 말씀하십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하스 왕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언어와 행동 속에 “호들갑”은 다 떠나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부지깽이가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장작을 다 집어넣고는 불이 활활 피어오르도록 이렇게 저렇게 불을 헤치는 데 사용하는 조그마한 나뭇가지가 부지깽이입니다. 여러분, 아궁이에 장작을 다 넣었어요. 이제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해요. 그러면 내 손에 있는 부지깽이도 타오르는 불길에 던져 넣습니다. 그 부지깽이가 다 타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시간문제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남유다를 공격해오는 북이스라엘의 군대와 아람의 군대가 꼭 “연기 나는 부지깽이”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4절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호들갑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TV를 켜서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에 뭐 그렇게 문제도 많고 사건도 많은지, 우리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호들갑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 돌아가면 자녀들을 보면서 고민이 산더미처럼 몰려오시나요?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놈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의 자녀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해가 바뀌고 나이가 한살씩 더해지면서 건강에 대한 걱정이 몰려오세요? 병원에 갈 때마다 새로운 병명이 하나씩 들려서 병원에 가는 것이 싫고 두렵고 내 몸에 큰 질병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십니까?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들갑 떨지 마세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아하스의 실책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하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국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에, 조급한 마음에 자충수를 두기 시작하죠.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해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저 북동쪽에 있는 앗시리아 제국 – 성경의 이름으로는 앗수르제국 - 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합니다.  열왕기하를 보면 아하스 왕이 앗수르제국의 군대를 끌어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온갖 보물을 다 가져다 바쳤고, 심지어는 앗수르제국의 우상까지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요청하는 거지요. 그러자 당시 신흥 제국이었던 앗수르가 군대를 일으킵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몰려오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급기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지요. 그런데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하스 왕을 이어 남 유다를 다스린 왕이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입니다. 자, 아하스 왕이 죽고 히스기야가 남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미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제국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어디를 공격할까요? 남 유다, 자신들에게 군사력을 요청하였던 남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시대에 그 유명한 랍사게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앗수르 제국의 장군 랍사게가 18만 5천 명의 대군을 몰고 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며 남 유다의 군대가 투항할 것을 요청했던 사건이죠. 물론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로 그 위기는 모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큰 국가의 위기는 어디로부터 시작된 겁니까? 바로, 아하스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아람을 두려워하고, 북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앗수르를 두려워하는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물리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두려움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두려운 마음, 조급한 마음, 호들갑 떠는 마음으로 실언을 하게 되고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의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온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내게 몰려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낙심하지 말라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9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9절 뒷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두려움의 문제,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굳게 서는 문제는 결국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 공격이 예루살렘을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눈에 보이는 현실은 국가의 위기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든든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위해 이사야 선지자도 보내고, 하나님의 말씀도 주십니다. 

여러분, 아하스는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자입니다. 자신의 절대 권력이 아하스 왕을 든든하게 세워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가 우리의 인생을 든든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하스는 앗수르 황제 디글랏빌레셀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금은보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엄청난 재물이죠. 그러나 그러한 재물이 있다고 해서 그의 삶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것도 아니죠. 

우리는 때로 오해합니다. 착각을 해요. 내가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내가 조금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내가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나의 삶에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나의 삶이 든든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든든해 질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잖아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도 지켜주신다는 믿음,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이 오직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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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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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 로마서 1장 15절과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는 사실을 묵상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미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다시금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까? 로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감동, 구원의 감격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조차 없는 죄인인데 나의 그 많은 죄악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시간이 오래 흐르면 내 마음에 불행히도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복음의 감격이 껍데기만 남아요. 복음이라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지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감격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신앙생활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감격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 같고 교회 사람들이 흉볼 것 같아서 합니다. 그러니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죠. 

신앙생활이 오래되면서 내 마음에 있던 구원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은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율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 10장의 주인공 마르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가 마르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서 적지 않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모습을 본받는다고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늘 본문의 참된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한 율법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웃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시죠. 이웃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는 분명 이웃 사랑의 실천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죠. 그것은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들에게 치료비를 받지 않으셨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선포하셨지만 그들에게 강사료를 받지 않으셨다고요.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시죠? 한 번은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너무 배가 고프니 길 가에 있던 밀 이삭을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죠. 제자들이 배 부르게 먹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면 굳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손으로 비볐겠어요? 배가 고픈 거죠. 그렇게 허기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마르다가 영접한 겁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지금 복음을 전하면서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르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가 없었던, 말씀은 뒷전이고 그저 일만 하는 경건하지 못한 여자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랑의 실천가입니다. 


마리아와의 비교의식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과 40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우리 시대에도 언니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여동생이 귀한 손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언니 마음에 불평이 생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의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사건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일종의 노예이고, 남성의 재산이었습니다. 당연히 율법 교육의 대상자가 되지 못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회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느 랍비보다도 존경받는 예수님께서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집중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리아는 당시의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곧 음식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마르다의 속이 뒤틀릴까요, 안 뒤틀릴까요? 당연히 뒤틀리죠. 

만일, 그날 마리아가 집에 없었다면 어떨까요? 만일 그랬다면 마르다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대접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초대할 때에 마르다에게 기쁨이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의 마을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급하게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했죠. 그리고 예수님과 그 일행을 급하게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왜요? 그 예수님이 너무 좋았거든요.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있었어요. 그 감격으로 말미암아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 그리고 그 외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 수 십 명을 기쁨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가죠.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자기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참 연약합니다. 우리는 한 때 은혜를 받아요. 예수님이 너무 좋은 거죠. 그분에 대한 감격이 우리 안에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안에 있는 은혜와 감격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을 하루 빨리 제거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단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존재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비교의식입니다. 은혜받았다고 생각되면, 꼭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생깁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받은 은혜를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함정을 파놓은 거죠. 

누군가 예수님을 믿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신앙생활을 멀리합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열정이 자연스럽게 식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은 사람만큼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면서도 교회 안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오랜 시간 신앙생활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막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성도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죠. 내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교회 안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있던 은혜와 감격이 다 사라지고, 신앙생활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로 감동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그 뒤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라도 우리의 은혜를 빼앗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시금 여러분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 속에서 은혜를 소멸하지 마십시오. 


잘 보이려는 허세 

마르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의 행동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동네를 찾았다는 그 감격 속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동이잖아요. 그런데 마르다의 이 은혜로운 행동이 율법의 행동으로 뒤바뀝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마리아와의 비교의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0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르다가 살고 있는 마을로 오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지 마르다가 급히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계획되지 않았던 식사 손님이 한 분이라도 오게 되면, 주부들은 그때부터 분주해지죠.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고, 수 십 명이 되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급하게 자신의 집으로 모셨으니 마르다는 급한 일이 얼마나 늘어났겠어요. 그러면 음식 종류가 조금 적어도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와 같은 밥에 반찬을 먹는 것이 아니니, 떡만 나누어도 돼요. 그런데 마르다는 많이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많다는 것은 수십 명이 먹을 만큼 많이 준비한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종류의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대답으로 더욱 분명해 집니다. 41절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여기서 '한 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분명한 의미 하나는 음식의 한 가지 종류입니다. 마르다는 짧은 시간에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세입니다. 이미 급하게 손님이 초대되었고, 수 십 명의 손님이 이미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몇 가지만 하든지 하나만 해도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마르다의 형편을 뻔히 알면서 예수님께서 음식 종류가 왜 이렇게 적으냐고 나무랄 예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르다의 마음에, 처음 초대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던 거지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졌어요.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된 은혜의 행동이 그 많은 음식을 다 해야만 하는 율법의 행위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형편과 처지를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족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형편에 따라 표현하면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화려할 수도 있고, 때로는 소박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마르다의 형편을 뻔히 아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마른 떡 조각으로 대접하면 어때요? 그 마음을 예수님이 기뻐하신다고요. 그런데 마르다는 더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의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지고, 결국에는 처음의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러한 마르다의 실수가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가 아름다운 건물을 건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최고의 음향과 영상과 조명 시설을 갖출 필요는 없어요. 형편에 따라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이 변치 않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를 비교하죠.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합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께 양고기로 대접해드렸는데, 내가 어떻게 마른 떡으로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는가라고 경쟁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으나 나중에는 사른 사람들과의 경쟁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다시 한 번 축복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사실로 감동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의 형편을 다 아시고, 나의 조그마한 정성에도 감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위로하시는 예수님

이 시간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마지막으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41절과 42절입니다. 우리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저는 이 말씀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을 모두 아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먼저는 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르다야 마르다야" 여러분, 이것은 질책의 어조가 아닙니다. 간절함이요, 안타까움입니다. 마르다를 향한 안타까움이요, 마르다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마르다의 마음을 위로하시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여러분, 지금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의 일손일까요? 아닙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원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10명의 일꾼, 100명의 노예가 있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일들을 만들면서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그러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어떻게요?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으로도 예수님은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일을 해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세요. 만족하신다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교회의 일을 한다고 마음이 분주하신 분들은 마르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도 위로하십니다. 마리아가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는 2천 년 전 유대사회입니다. 제 아무리 마리아라 할지라도 여성이 노예나 재산으로 취급받고, 교육의 대상자가 될 수 없던 시절에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집중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 마음에 불안할까요, 불안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불안하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잖아요. 급기야 자기 언니가 예수님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뭡니까? 42절 뒷부분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리아가 앞으로 주방 일을 하나도 하지 말고 무조건 말씀만 들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이후에도 마리아가 주방에서 일을 하죠. 집안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이 기쁨은 빼앗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누가 일을 하고, 누가 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누가 일을 화려하게 했고, 누가 일을 소박하게 했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할 때에도 은혜로 시작했던 일이 율법의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다릅니다. 마르다가 하루 저녁 일하는 것, 마리아가 하루 저녁 일하지 않는 것, 그것은 예수님께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마리아든 마르다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 은혜로 하지, 율법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신앙생활이 은혜입니까? 아니면 율법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넘치는 자발적인 행위입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고, 또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으니까 하는 타율적 행동입니까? 

만일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바꾼다면 일을 줄이십시오. 교회에 일꾼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한 가지를 하더라도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다면 그것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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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6. 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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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로마서 1장 15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함께 읽은 15절의 말씀에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한 가지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만 있다면, 무엇하기를 원합니까? 로마에 있는 너희, 곧 로마 교회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원 그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한다, 혹은 전도한다고 했을 때 누구를 찾아가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나요?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믿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에게는 또다시 전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그것은 오해입니다. 틀린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로마에 있는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 곧 전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곧 갈라디아 지방, 마게도냐 지방,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거쳐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사도 바울이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 로마 교회에도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 아주 귀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들에게도 무엇이 필요해요?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너무나 즐겁습니다. 내 마음에 감격이 흘러 넘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히 눈을 들 수조차 없는 죄인인데 나의 그 많은 죄악이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말하죠.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요. 이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것이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시간이 흐르면 불행히도,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내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복음의 감격이 껍데기만 남아요. 복음이라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알지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그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로마 교회는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마음에 복음의 감격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들에게 다시금 무엇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까요? 복음 전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이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복음의 감격이 남아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감격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감동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내가 죄인이었는데, 내가 매일 범죄 하는 사단의 종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그 놀라운 은혜의 감격이 여러분들 마음에 흘러넘치냐고요. 

머리로 알고 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 나에게 또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복음의 능력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만 말씀해보세요. 여러분들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흘러넘치고 있는지만 말하십시오. 다시 질문드리죠. 여러분, 지금 마음속에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약 나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흘러넘치고 있지 않다면 선교지에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바로 우리가 다시금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로마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한 이후에 – 그것이 15절의 말씀이지요 - 왜 그토록 자신이 복음에 집착하는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복음에 자신이 붙잡혀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절) 

바울은 지금 복음을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복음에는 우리 개인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이 바로 어디요? 복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함께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절) 

바울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런도전서 1장 22절부터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2-25절) 

여러분,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여요. 시시해 보입니다. 별거 없는 것처럼 들린다고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압니다. 복음이야 말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누구에게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분문의 마지막인 17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1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무엇으로 산다고요? 믿음으로 삽니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일까요? 당연히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분명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믿음이 아니고요, 복음에 대한 믿음, 오직 복음만을 붙잡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란(1) / 로마서 1장 15-17절 "복음, 하나님의 능력"

믿음이란(2)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율법이 아닌 은혜"

믿음이란(3) / 이사야 7장 1-9절 "믿음이 아니고서는"

믿음이란(4) / 히브리서 11장 1-3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능력"

믿음이란(5) / 마가복음 8장 27-35절 "십자가의 길"

믿음이란(6) / 다니엘 9장 1-2절 "믿음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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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4. 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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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1-9절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어,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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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2) - "마음을 지키라" / 잠언 4장 20-27절

[다음 세대] 신명기 6장 1-9절 /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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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교훈, 그 세 번째 시간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자녀에게 남기는 아버지의 교훈을 찾아본다면 디모데후서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라고 말하는데, 이는 바울이 자신의 남은 삶을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교훈이 디모데후서인 것입니다. 

 

자, 바울은 서신의 처음부터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아버지의 교훈을 기록합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전 1:8) 

 

지금까지도 복음을 전하다고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리하여 그 누구보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삶을 값지게 살아가는 길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죠. 그러나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듯이 고생하지 않고, 역경을 겪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놓여있는 아픔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안쓰럽습니다. 생각만 해도 부모의 마음은 아파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에 쓰임 받는 것이 우리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신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도 바울을 따라 이렇게 권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비유를 통한 권면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권면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받아들이기 너무도 어려운 것이기에 몇 가지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곧, 군인, 운동 선수, 그리고 농부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3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5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6절)

 

군인은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운동선수는 법대로, 곧 경기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주도 주님께서 정해주신 규칙대로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인생 최고의 성취는 주님께서 정해주신 방식을 따라 고난을 견디어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비유로 디모데를 다시금 권면합니다. 그러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바로 그 길만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성공적인 인생길이라고 간절히 교훈하였던 것이지요. 

 

 

미쁘다 이 말이여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기쁘게 감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감내하라고 교훈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교훈하면서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또 설명하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교훈을 이 모든 비유보다 더욱 중요한 하나의 가르침으로 확증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절)

 

바로 여기에 사도 바울이 아들 디모데에게 남긴 교훈의 핵심이 있습니다. 

 

"복음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과정을 기쁨으로 감내하며 최후의 승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한 승리의 길을 교훈할 수 있을까요? 그 핵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곤란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여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승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아들 디모데에게 분명히 교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이 위대한 아버지의 교훈은 단지 디모데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교훈하였습니다. 나아가, 디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권면하였고, 초대교회의 모든 다음 세대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권면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고요? 본문 11절에 등장하는 "미쁘다 이 말이여"가 그 증거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 시대, 초대교회 안에 회자되었던 말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절)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12a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13절)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언어를 계속해서 반복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자, 그러면 주님과 함께 살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지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신실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 초대교회는 사도 바울 개인만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그들의 자녀에게,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 반복하여 교훈하였고, 부모 세대 역시 이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세대 이후, 디모데의 시대가 등장합니다. 디도의 시대가 등장합니다. 마가의 시대, 누가의 시대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들의 시대도 위대했지만 그들의 뒤를 이은 다음 세대는 더욱 위대하여 그들에 의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부모 세대를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주님과 함께 죽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우리는 신실하는 못하지만 주님은 언제까지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자녀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훈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디모데의 시대, 디도의 시대, 마가와 누가의 시대가 지난 후 이른바 "속사도교부의 시대"라 불리는 기독교 역사의 황금시대가 등장하여 전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 세대인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교훈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지금의 고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믿음, 그리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 마침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가장 위대한 인생의 교훈을 우리의 자녀 세대에게 전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부모로서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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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4. 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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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 신명기 6장 1-9절 /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어,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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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교훈,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잠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주제는 단연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마음뿐, 그 누구도 자녀의 삶을 직접 책임져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역할이란 자녀들이 자신의 인생을 직접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언이 이야기하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잠언의 너무도 유명한 구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곧,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부모 세대가 자녀의 인생을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 지혜를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은 '지혜로운 자녀가 되게 하소서,' '지혜로운 다음 세대가 일어나게 하소서'입니다. 


마음 _ 지혜가 머무는 장소 

본문 20절과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아버지가 주는 교훈, 곧 지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그 교훈을 깊이 간직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본문 21절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지혜를 지키는 장소가 등장합니다. 어디입니까?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러므로 잠언이,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혜가 머무는 장소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23절)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혜를 지키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요,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혜는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똑똑한 머리, 좋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똑똑한 머리를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을 간직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다음 세대의 모습은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을 소유한 세대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아버지의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지키라,' 특별히 '지혜의 마음을 지키라'입니다. 


마음 _ 감정과 이성과 의지 

그렇다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첫째로, 마음은 '감정'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기쁨, 슬픔, 즐거움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요. 마음을 지킨다는 첫번째 의미는 우리 마음의 감정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권면합니다(살전 5:16). 잠언 17장 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강조합니다. 본문 21절도 지혜를 마음속에 지키라 말씀하면서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라고 덧붙입니다(23절). 곧,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감정을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은 '이성'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감정과 함께 이성이 함께 자리잡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로운 이성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마음을 지켜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앞의 일을 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마음은 '의지'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의지와 행동을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지요. 잠언에서는 술, 죄인의 형통, 음녀 등이 인간의 의지를 흐트러트리는 유혹의 요소로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을 지키라 권면하는 본문의 마지막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27절)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감정과 이성과 의지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곧, 마음을 지킨다는 말은 감정과 이성과 의지 - 지정의 - 로 대표되는 우리의 전 인격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지혜로운 마음을 소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을 지키는 이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들의 삶 속에도 수많은 역경과 시련이 찾아오겠지만, 그때마다 부모가 일일이 이끌어줄 수는 없겠지만 우리 자녀들이 스스로 마음을 지켜 전 인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차게 걸어갈 수가 있다면 그들은 가장 복된 인생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 할 아버지의 교훈, 그것은 '마음을 지키라'입니다. 

문제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마음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결심을 하였지만 나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조절하지 못하여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지키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녀들에게 마음을 지키지 못한다고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달라고 우리 부모 세대가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3) -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디모데후서 2장 1-13절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1-9절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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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연구 06 "지혜로운 마음"

“지혜와 마음”(잠언 연구 05)에서는 솔로몬의 예를 통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와 마음의 관계를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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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4. 1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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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어,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음 세대] 창세기 18장 18-19절 “자녀들을 가르치게 하려고”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거주하는 아브람을 부르시며 두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그를 통해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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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특징 - 자녀에게 가르치라 

이제 오랜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의 자손은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배우고 지켜야 할 내용을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율법의 중요한 특징도 일찍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와 동일하게 자기 자신만 율법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자녀들에게 곧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명기 6장 1절 말씀입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설명하면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곧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율법의 말씀을 들려주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 곧 가나안 땅에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지요. 그러므로 율법의 말씀은 모세를 통해 그것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먼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율법은 일차적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분명한 책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녀들에게, 그리고 손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도 율법을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가 율법을 행하는 것이요, 그다음에 아들에게 율법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요, 나아가 손자들도 율법의 말씀을 따라 한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순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부모 세대가 스스로 반드시 질문해야 할 물음은 이것입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가?” “과연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위치와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진 이후, 우리는 비로소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들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 문자(Letter)인가 영(Spirit)인가 / 고린도후서 3장 6-11절

사도 바울은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을 극명하게 대비하여 설명한다. 옛 언약은 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쓴 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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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핵심 - 하나님을 사랑하라  


모세는 율법을 설명하면서, 율법의 특징은 모세로부터 율법을 직접 전해들은 부모 세대가 먼저 지키며 순종하고 나아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선언합니다. 신명기 6장 4절과 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모세가 가르치는 율법의 핵심은 구체적인 조항이 아닙니다. 율법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곧 우리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확증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하루는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실한 사랑.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핵심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가 세대가 세대를 이어 지키고 간직해야 할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자녀들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할 아버지의 교훈이 있다면 그 첫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아버지 

저에게는 아직 어린 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여러 가지로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저의 기도 제목이 되었지요. 저의 간절한 소원, 저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먼 훗날 제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장성한 저의 두 자녀가 아버지를 기억할 때, 우리의 아버지는 좋은 집에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우리를 양육하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를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양육하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먼 훗날, 저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할 때, 아버지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이요,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먼 훗날,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할 때 여러분을 어떠한 모습으로 기억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지요. 출애굽, 홍해를 가르는 사건, 광야 40년의 지도자! 그러나 모세를 기억했던 다음 세대는 모세에 대해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까요? 출애굽의 사건도 위대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은 놀라움 그 자체였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했던 것이 아닐까요? 한 평생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모세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자, 그들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였던 모세를 기억하며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아들과 딸이 먼 훗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할 때,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셨노라 고백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자녀들도 여러분의 모습을 따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위대한 다음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 잠언 4장 20-27절 / 아버지의 교훈(2) - 마음을 지키라

[다음 세대] 신명기 6장 1-9절 /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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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3) -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디모데후서 2장 1-13절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1-9절 우리는 이전 시간에 창세기 18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아브라함 개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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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0. 4. 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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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거주하는 아브람을 부르시며 두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바로 그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먼저 후손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지요. 결국 아브라함은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친아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곁에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되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 바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지요. 

또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셨으니 아브라함은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소식이 없자, 이번에는 사라가 나섭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나야 한다면, 나이 많은 사라 자신이 아니라 하갈이라는 여종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하나님은 이제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날 아들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이제야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알려주십니다. 

75세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아 아들의 이름 '이삭'을 알기까지 아브라함은 24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도 지나고 보면 눈 깜짝할 순간인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자녀에 대한 약속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땅에 대한 약속도 점차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이 거주한 지 어느덧 20여 년이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자녀 세대, 우리의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결코 하루 아침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짧은 관점으로는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긴 호흡으로 신앙생활의 시간이 차츰 쌓이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자녀들 인생의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비록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 

자,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도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땅에 대한 약속도 구체화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앞으로 펼치실 더욱 놀라운 일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18절과 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크게 보아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로 나눌 수 있지요. 먼저 단기목표는 18절입니다.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민족,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민족, 그리하여 이 세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 행복하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향한 마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이 강대한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민족이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기 목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위대한 장기 목표를 말씀하시는데, 19절이 그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여기에서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의 주체는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가장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고 이 세상에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민족을 일으키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본문이 묘사하는 단기 목표에 우리의 마음이 묶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그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면 충분하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우리 부모 세대의 마음이 좁아졌을 뿐,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더욱 크고 위대한 꿈을 품고 계십니다. 곧,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를 통하여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세대, 공의와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세대가 일어나는 꿈입니다. 


아브라함의 역할 - 훈육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놀라운 꿈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아브라함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본문 19절에 "행하게 하려고"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녀들,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도록 하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본문 19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역할은 잘 가르치는 것이요,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훈육"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훈육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동일한 사명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부모 세대에게도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날로 죄악으로 가득해지지만 우리의 자녀들만큼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세대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 자녀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요, 비전입니다. 다만, 그 위대한 비전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바로 그 자녀들을 훈육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을 가르쳐, 자녀들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말과 행동으로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항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훈육하는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훈육하는 어머니가 되십시오. 자녀를 훈육하는 우리 부모 세대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 세대는 역사의 어둠 속에서도 복음의 빛을 비추는 궁창의 빛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cf. 단 12:3)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1)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1-9절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2) - "마음을 지키라" / 잠언 4장 20-27절

[다음 세대] 아버지의 교훈(3) -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디모데후서 2장 1-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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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