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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