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5. 1. 26. 17:07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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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12. 14:46

여러분, 여기에 잘 익은 사과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과를 잘라보면 그 안에 있는 씨앗이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과 하나에 담겨 있는 씨앗의 숫자를 충분히 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사과 씨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 안에 몇 개의 사과가 있는지 셀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 당장은 씨앗 안에 사과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씨앗을 쪼개고 살펴도 그 안에서 사과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씨앗 하나가 땅에 심겼을 때 몇 개의 사과가 열리게 될지, 곧 씨앗 안에 담겨있는 사과의 숫자는 아무도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꼭 이와 같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요, 그런데 자라고 나면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천국이 꼭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매우 작게 시작합니다. 지금 당장은 사람들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어 성장하고 자라나게 됩니다. 마침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고, 새들의 쉼터와 안식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랍니다. 확장합니다. 성장합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해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겨자씨와 같이 매우 작게 자리를 잡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나타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 주님과 살아가는 삶이 하루하루 이어지기만 한다면, 씨앗 하나에 무수히 많은 사과 열매가 담겨 있는 것처럼, 겨자씨 한 알이 마침내 거대한 나무가 되어 새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는 것처럼. 마침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번성하여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시작되는 생수

우리는 송구영신예배와 지난 주일 예배를 통해 에스겔 37장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두 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었지요.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장면이었습니다. 또한 남 유다의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의 막대가 에스겔 선지자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지난주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 두 가지 장면 이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환상 가운데 에스겔은 성전의 각 부분이 아름답게 재건된 것을 보게 됩니다. 성전 안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제사가 다시 시작되는 장면을 보게 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하여 위대한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곧,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장면이지요. 본문 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1절)

성전의 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그 문지방 밑에서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은혜의 샘물, 생수의 강물(Life-giving River)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1절의 뒷부분을 계속 보시면, 그 샘물이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립니다.” 다시 말해, 은혜의 샘물이 성전으로부터 솟아나는데, 그 샘물이 시작되는 지점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을 재건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사람들이 그 안에서 다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전이 따로 있습니다. 성전 제단으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와 –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 성도들의 삶이 살아나고, 황폐한 땅이 되살아나며, 모든 생물이 약동하는 생명의 역사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교회는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고 자랑합니다. 아름다운 예배당 건축에 대해 상을 주는 단체도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그 운영 시스템이 탁월하여 효율적이고 투명한 교회 운영을 자랑합니다.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교회를 모범적인 교회로 알고 굳이 찾아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교회는 다양한 성경공부와 양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필요합니다. 분명히 교회에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향해 품으시는 가장 궁극적인 비전은 그 제단으로부터 은혜의 샘물이 흘러나와서 성도들의 심령을 적시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천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괴롭고 아프고 근심에 쌓여 있던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의 심령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전 제단에서 시작되는 은혜의 물줄기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가정들마다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목천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전입니다. 


점차 확장되는 생수의 강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예루살렘 성전은 그 제단으로부터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제단으로부터 나온 물에 대해 본문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한 가지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2절)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의 구조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본문 2절은 한번 읽어서 쉽게 머릿속에 그려는 구절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목표가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에 단지 본문 2절의 의미만 최대한 간단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절 중간을 보시면 “동쪽을 향한 바깥 문”이 나오지요. 이 문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성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스겔이 서 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1절 말씀이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물은 자연스럽게 이 문, 곧 2절에 나오는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다다르겠죠. 문제는 이 문이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을 기준으로 성전이 있는 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 문의 반대쪽인 에스겔이 있는 곳에는 물이 넘어오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본즉” 에스겔이 그 닫힌 문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합니까? “물이 그 오른쪽 – 그 닫혀 있는 문의 오른쪽을 말합니다. – 그 오른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스며 나오더라” 이 장면이 상상이 되시나요? 문이 열려 있다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나왔을 거예요. 그러나 문이 닫혀 있으니 물줄기가 막혔어요. 그러나 그 문에 물이 스며들어서 그 문을 통과하여 생수가 조금씩 스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며 나오더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물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의성어입니다. 우리말의 의성어 가운데 그 의미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똑똑똑’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어놓은 것처럼 콸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가 아주 조금만 열려서 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장면이지요. 우리말 성경의 번역처럼 물이 스며 나온다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지요. 그렇게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정도였는데, 그저 스며 나오는 정도였는데, 그 조그마한 물방울과 물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매우 강력한 강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3절)

본문에 등장하는 천 척을 길이를 나타내는 현대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500m가 됩니다. 처음에는 똑똑 떨어지는 물이었는데, 약 500m를 지나고 나니 발목에 차는 물이 됩니다. 4절도 보십시오. 또 다시 500m를 흐르니 이번에는 무릎오 오르는 물이 되고, 계속해서 허리에 오르는 물이 되네요.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본문 5절을 보시면 또 다시 500m를 지나자 이번에는 건너지 못할 거대한 강줄기가 됩니다. 그 시작은 무엇입니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었습니다. 단지 스며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라고 성장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주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혼을 적시는 충만한 은혜를 예비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날마다 생명의 생수가 흐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의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그 은혜의 물줄기가 성전의 문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까지 흘러가는 것은 왜 이렇게 힘겨운지요. 예배 시간에는 은혜를 받은 듯한데,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막상 예배당의 문을 열고 나가 삶의 현장으로 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금방 사라지는 듯한 경험도 하게 되지요. 성전제단에는 분명 풍성한 은혜의 물줄기가 가득한데, 성전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저 스며나오는 은혜,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은혜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아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기만 해도 사실은 충분합니다. 성전의 문에서 스며나오는 은혜, 똑똑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이라도 오늘 나의 마음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안에는 생명이 있어 자라나게 됩니다. 성장하게 됩니다. 마침내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뒤덮는 위대한 성령의 역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사람이 수영을 할만한 물이 되고, 스며나오던 물이 사람이 건널 수 없는 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워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하나님께서 더욱 놀라운 비전을 이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본문 9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9절)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흘러들어가는 곳마다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모든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이 강물이 무엇을 살아나게 합니까?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강물보다 훨씬 더 큰 바닷물을 되살려냅니다. 처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똑똑똑 떨어질 때는 이 작은 은혜가 저 거대한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과 씨앗 하나에 도저히 셀 수 없는 무수한 사과 열매가 담겨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 한 알이지만 마침내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풍성해져 마침내 이 거대한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마지막 12절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2절)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랍니다. 그 잎이 시들지 않습니다. 열매가 끊이지 않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구절이 있지요. 네,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날마다,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노래하는 시편이지요. 시편 1편이 노래하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편 1편 3절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늘 묵상하는 사람, 그리하여 매일 크고 풍성한 은혜가 아니더라도 그 심령에 말씀의 은혜가 똑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생수의 강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 잎사귀는 마르지 않습니다. 시절을 따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인생의 열매가 풍성합니다. 

2025년을 시작하며, 우리는 함께 모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시작으로, 1월 1일 저녁부터 수요기도회를 하였지요. 1월 2일과 3일에는 총동원 새벽기도회를 했고요, 지난 한주동안 신년특별저녁기도회에서 열심히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2025년을 기도하며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2025년 새해는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날들 속에서 우리의 삶에 크고 풍성한 은혜가 매일같이 부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날마다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똑똑똑 떨어지는, 스며나오는 듯한 은혜의 생물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 그리고 매일 있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작지만 생명력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잠깐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마다 똑똑똑 떨어지는 은혜의 샘물이 여러분의 심령에 끊이지 않고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마침내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어 수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로 여러분의 삶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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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6. 17:06

올해 우리의 표어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주제 성구는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하는 에스겔 37장 14절의 말씀이지요. 우리는 지난 송구영신예배를 통해 에스겔 37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어떠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가운데 깊은 골짜기로 이끌어가셨는데, 그 안에는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마른 뼈들이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뼈가 서로 연결되고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니 마른 뼈가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올해 주제 성구인 에스겔 37장 14절 말씀이 선포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곧,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 바로 이것이 올해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영적 각성이요 영적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올해 2025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영적 부흥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고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 우리 각사람의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나아가 우리의 가정마다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가 살아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바로 그 현장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의 계속되는 말씀, 곧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대한 부흥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시네요.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16a절)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두 개의 막대기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막대기에는 어떤 글씨를 쓰라고 말씀하십니까?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다’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남쪽의 유대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은 남 유다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은 남 유다와 그 안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또 다른 막대기에도 써야 하는 글씨를 알려주시지요? 본문 16절을 뒷부분을 보십시오.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6절)

하나의 막대기는 남 유다를 의미하는 글씨를 써야 합니다. 다른 하나에는 어떤 글씨를 써야 하지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야 합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의 막대기”는 북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를 보면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는 표현은 북 이스라엘과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막대기 두 개를 가져와서 그 하나에는 북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이라고 쓰고, 또 하나의 막대기에는 남 유다와 그 백성들이라고 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본문 17절로 이어집니다. 본문 1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7절)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남 유다를 의미하는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막대기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은 매우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 갈등의 씨앗은 사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안에 여러 차례 내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갈등하였던 결정적인 계기는 사울 왕의 통치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북쪽 지파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유다 출신으로 남쪽 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요. 다윗의 세력을 두려워하였던 사울은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화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서로 갈등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함께 목숨을 잃어버렸을 때 겉으로 표출되고 맙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남쪽의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북쪽의 열 개 지파는 사울의 또 다른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노력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남과 북의 갈등과 감정은 조금도 치유되지 못하여 솔로몬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뉜 뒤 지금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역사를 짧게나마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나라가 가장 부강하고 가장 강성하여 번성하였던 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던 기간입니까? 아니면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되었던 때입니까?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렸던 시기, 곧 이스라엘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었던 바로 그 시대가 하나님의 축복이 온 이스라엘에 가득하여가장 강성하고 가장 번영하는 국가를 이루었던 시기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에는, 잠시 잠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축복을 주기도 하셨지만,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마치 깨진 그릇에 담긴 물이 쉽게 새어나가는 것처럼, 금방 메마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치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하여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가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됨이지요. 온 이스라엘이 지금까지의 갈등과 분열을 다 치유하고 하나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이 어디 하나 새어 나가지 않고 그들의 삶에 가득 차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넘치는 은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른 뼈가 살아가는 듯한 놀라운 부흥을 약속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대전제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하나 됨이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새해에 여러분의 가정에 놀라운 하늘의 은총을 부어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이 서로 마음이 상하고 깨지고 나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셔도 그 모든 은혜가 깨어진 그릇처럼 다 새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2025년 새해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나뉘고 다툰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은혜가 금방 다 새어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고 넘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축복을 부어주셔도 그 은혜가 다 세어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쳐나기를 원하신다면, 한 해를 시작하는 바로 지금 가장 먼저 여러분의 가정이 서로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들 사이의 관계가 단단하게 이어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대로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겠지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2025년 새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한번 여쭈어볼까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2025년 새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혹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새어나가는 곳이 없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오래된 갈등이니 지금 이대로가 편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사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갈등도 사사시대는 물론이요 사울의 시대,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던 분열 왕국의 시대를 다 지날 때까지 이스라엘의 남과 북의 갈등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갈등과 분열은 치유될 수 없다고, 있는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부흥을 위해 남과 북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그 강력한 비전을 에스겔에게 선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비전 그대로, 오직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리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지요. 그렇게 하나 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제 놀라운 축복을 아낌없이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기에 앞서 반드시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20절입니다.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 앞에서 손에 잡고 (20절) 

지금 에스겔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남 유다의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의 막대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번영과 번성에 대한 약속을 주시는데,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남과 북의 막대기들이 함께 이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번성과 번영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네요. 먼저 21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21절)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은 연약할 때로 연약해져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 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그 사로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곧 회복과 치유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정결한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축복이지요)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마침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 되었을 때,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26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26a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화평의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되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여 주십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던 그들은 연약한 민족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북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바벨론 제국이 남 유다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주셔서 번영하게 됩니다, 번성하게 됩니다, 번창하게 됩니다. 그들의 번영과 그들의 번성이 어느 정도일까요? 본문의 마지막 28절이 그것에 대해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셔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됩니까? “열국이 다 알게 됩니다.” 모든 열국이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번성이 이스라엘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2025년 새해에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입니까? 먼저는 회복과 치유의 은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셔서 번영하고 번성하고 번창하는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성은 나 혼자만 누리는 번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 되어 누리는 번성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과 갈등과 다툼이 있다면 하루 속히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깨어진 그릇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담을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목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안에 번성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되어 번성하는”(X2) 2025년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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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1. 10:27

우리가 믿음의 표준으로 삼는 성경은 다른 책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약속과 성취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이렇게 보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말씀하실 때부터 약속의 말씀을 주셨네요. ‘내가 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75세 되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고, 단 한 평의 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어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들 한 명, 땅 한 평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겠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계속되는 실패로 말미암아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지금도 여전히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b)

어떤 분은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가정적으로도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만 그 자신의 몸에 못쓸 병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절망하죠.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어떤 분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마음에는 큰 근심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지요. 자기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마음을 닫아버려요.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 

이처럼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위대한 점은 성경이 기록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지만, 더불어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자신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귓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Move One. 하나님의 약속 (1-6절)

하루는 성령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가운데 깊은 골짜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골짜기에는 사람들의 뼈가 가득 쌓여 있었지요. 그 장면을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2절)

골짜기에 가득했던 뼈들의 특징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네요.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심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무엇이지요? 아주 말라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뼈들은 최근에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뼈가 아닙니다. 그 뼈가 매우 마를 만큼 오래전에 죽음을 당했고 그 진액이 모두 사라져 버린 뼈들이었지요. 한 마디로 그들의 회생 가능성은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바짝 마른 뼈들을 향해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4절)

하나님께서 먼저 에스겔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명이지요. 아니, 이미 죽은 뼈들이잖아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모든 진액이 빠져나가 바짝 마른 뼈들이잖아요. 그들에게는 이미 생명이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러한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고 대언하라고 말씀하네요. 4절의 뒷부분에도 동일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버린 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참 놀라운 신앙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향해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버린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들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향해 선포하시는 말씀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5절) 아멘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무리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마른 뼈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교회의 부흥, 영적인 부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참된 부흥은 언제나 그 중심에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2025년 새해,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죽은 지 오래되어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도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에도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마침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2025년 새해, 하나님께서 이 강단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하여 주셔서,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 마침내 수많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Move Two. 큰 군대를 이루다 (7-10절)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도 넘치도록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약속하는 말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여 주시지요. 오늘의 본문 6절 이전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라면, 본문 7절 이후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마른 뼈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7절)

7절 말씀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에” 3절부터 6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구체적으로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에스겔 선지자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이제 이 뼈와 저 뼈가 서로 이어져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뼈가 이어졌습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그 위에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뼈가 이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이 모든 과정에 에스겔 선지자가 개입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개입한 영역은 무엇이지요? 딱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을 뿐입니다. 나머지 일, 그러니까 뼈가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 안에 생기가 없었지요. 그런데 생기가 들어가는 장면도 동일합니다. 본문 10절도 보십시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0절) 

이번에도 에스겔의 역할은 딱 한가지만 등장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만 했는데, 하나님께서 또다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계속 일으켜주십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극히 큰 군대”가 되었네요. 단지 생명만 붙어있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전쟁에 나설 수 있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부흥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참된 부흥은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지만, 뼈가 이어지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는 일련의 과정은 처음부터 성령께서 주도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이처럼 참된 부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만일 2025년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는 부흥,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는 부흥, 우리의 교회가 새롭게 되는 참된 부흥이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새해 2025년에 거대한 부흥의 물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참된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그 부흥을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를 바라보며 기대를 넘어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약속하신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모두의 영혼에 참된 부흥을 반드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Move Three.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11-14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도 살아나는 기적과 부흥의 현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과 부흥의 현장에 대해 본문의 마지막 14절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본문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

이스라엘은 마른 뼈와 같이 모든 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약속하십니까? 1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곧 성령으로 다시금 충만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영혼의 참된 부흥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우리 가정의 참된 부흥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우리 교회의 큰 부흥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2025년 우리의 표어 그대로이지요.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실 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교회의 부흥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이지요. 그런데 그 뒤에 어떤 말씀이 이어집니까?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알리라”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2025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 기적과 부흥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요? 이 일을 말하고 또한 이루어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2025년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의 말씀이지만, 2025년의 열두달이 모두 지나고 2025년을 마무리하는 새해의 연말이 되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더 이상 미래에 일어날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성취의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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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4. 12. 29. 16:25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성장에 있을 것입니다. ‘우후죽순’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나면 대나무 순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지요. 그런데 대나무가 수직으로 높이 자라면서도, 그것도 매우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거친 비바람에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 이유는 그 마디에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자라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마디를 형성하는데 집중합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는 일을 멈추고 내부에 힘을 집중하여 마디를 형성하고 나면 성장의 튼튼한 기초가 형성되어 또다시 수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탄절을 보내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아직 새해를 맞이하지 않은 바로 지금, 대나무가 위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고 하나의 마디를 형성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앞으로 나가기 위한 튼튼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의 설교 제목 그대로,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머지않아 허락하실 2025년 새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쌓이는 오늘 송년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과거 – 아픔과 은혜

오늘 본문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전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마칠 때쯤, 곧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었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강 동편을 점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광야 생활이 청산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깐만 과거를 되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보겠습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1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네 아들”은 지금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다음 세대를 말합니다. 곧, 지금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아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네 아들” 곧 그들의 다음 세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출생하게 될 첫번째 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세대와 달리 애굽에서의 생활 혹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세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지나온 과거를 반드시 회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새해를 소망 가운데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2025년 새해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역사를 펼치시기를 원하십니까?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있는데, 마치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마디를 형성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고 그 내부로 힘을 집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새해 2025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기 전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입니다. 우리가 옛적에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회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건을 기억합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모세는 계속해서 본문 22절에서 출애굽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억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2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는 동안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여 주셔서 그들을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큰 구원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루 이틀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겨운 일인데, 1년이나 2년도 아니고 40년을 살았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세월에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주셨으니,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적군이 그들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친히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이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무엇입니까? 큰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를 주셔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모습처럼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진맥진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지난 한해 동안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근근이 살아온 것이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실패가, 때로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회상할 때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으니,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모든 고비를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전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니, 한편으로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니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본문 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3절)

모세가 가만히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 모든 사건과 시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뜻과 비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뜻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이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종으로 살던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까? 본문 23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의 지난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마실 물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지요.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모진 광야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신 깊은 뜻과 비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뜻은 마침내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4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삶에도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나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듯한 괴로움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때마다 시마다 새 힘을 주고 용기를 주려고 무엇보다 피할 길을 주셔서 올해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온 성도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지기를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애굽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게 하셨던 것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광야 4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2025년은 지난 2024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주가 지나 1월의 첫번째 주일이 되면, 또다시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48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주셨고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를 지난 48년 동안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출애굽의 역사를 넘어, 광야 40년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과 경외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고통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어보자, 내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무엇입니까? 오래전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이제 곧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벗어나고, 늘 궁핍에 시달렸던 광야를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펼쳐질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시지만,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든 광야에서도 심지어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이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야 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조건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4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온 마음을 다해 힘 써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을 늘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친히 가르치신 최고의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어, 본문 24절의 말씀 그대로 “항상 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예비하신 새로운 역사가 새해 2025년에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나의 삶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 한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며칠 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25년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분들에게는 헌신과 봉사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모든 힘과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십시오.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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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4. 12. 16. 15:33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소망이 있다면 인내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지금의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을 넘어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하루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과 낙관은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1-2절)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희망, 곧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 어디를 보아도 미래에 대한 낙관이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소망과 희망을 선포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먼저 본문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이 어떤지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전에 고통받던 자들”이라고 말씀하네요. 네, 이스라엘은 지금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현실을 묘사하는 첫 번째 단어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시작하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두움, 곧 흑암 가운데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곧 고통과 흑암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밝은 전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큰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더라도, 그 고통의 끝에는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과 2절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이고 둘째는 흑암입니다. 현실도 고통스러운데 지금의 모습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밝은 전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고통과 흑암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여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한 나라가 거대한 제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완벽하게 정복되었으니 그 국가적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이것이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죠. 한 나라가 이미 국가의 운명이 다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과연 이스라엘 열 지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나 긍정적인 전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북 이스라엘의 현실은 먼저 고통이고 또한 흑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소망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나의 모습,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불가능한 바로 그때. 나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도 같은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삶에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너희의 미래에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비췰 것이다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본문 2절 말씀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을 앞뒤좌우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지금도 큰 고통 가운데 있지만,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새해도 어둡게만 느껴지십니까? 그리하여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보다는 체념과 낙심에 빠져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여러분에게 선포하시는 소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여러분에게 모든 흑암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터널을 지난 여러분에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밝은 광명의 날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고 계실지라도, 
이제 하나님께서 복음의 밝은 광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시니,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복의 말씀을 듣고 절망과 낙심이 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슬픔 대신 찬양을 (3-5절)

북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3절)

우리가 함께 읽은 개역개정성경에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본문 3절부터 5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찬양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직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멸망을 당한 처참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3절의 “창성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소망과 희망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지금 이스라엘 열 지파는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선포해 주셨으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에 소망과 희망이 생겨나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뒷부분도 보세요.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 등장하는 ‘추수’와 ‘탈취물’이라는 단어는 각각 하나의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지요. ‘추수’라는 단어에는 어떠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까? 농사의 비유가 담겨 있지요. 농부가 지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을 때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저 수고하고 노동을 할 뿐이지요.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그 힘겨운 농사의 수고가 다 보상을 받게 되잖아요. ‘탈취물’이라는 단어도 전쟁이라는 비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적군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괴롭고 피 말리는 과정일까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지난 후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 곧 전리품을 얻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셨을 때, 북 이스라엘의 형편은 먼저 고통이었고 또한 흑암 곧 내일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희복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시니 지금은 고통이고, 지금은 농사를 짓는 수고의 시간이고, 지금은 전쟁을 치르는 피 말리는 시간일지라도. 그들의 내일은 소망과 희망을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추수의 기쁨,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에 오실 때에는 비록 우리의 마음이 흑암이어서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시작되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어디에 계시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날들이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6-7절)

고통과 흑암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소망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해 주시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6절과 7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6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큰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깊은 흑암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6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이는,” 그 이유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어주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은 현재의 고통을 넘어 내일에 대한 흑암이 되어, 내일에 대한 절망으로 내일에 대한 낙심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렇게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를 소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7b절) 

그러나 여러분,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7절의 마지막 구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를 이렇게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이미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이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내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 안에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니 이제 그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주변의 환경과 조건이 좋아 이제는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나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나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현실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이유, 그것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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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10. 13. 19:19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기도 하시고, 공생애의 마지막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도 하시지요.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전반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로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수군거립니까?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을 받아들여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벌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하나의 별명을 붙여버립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눅 7:34).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이러한 별명을 붙였지만,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과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기쁨이 가득한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초대하시며,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 –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 – 을 누리며 오늘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MOVE ONE. 기쁨을 잃어버린 아들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모두 세명입니다. 먼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그 재산을 가지고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둘째 아들이 등장하지요. 또한 그러한 탕자까지도 다시 받아주시고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품어주시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이 주로 묘사하는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지요.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건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날려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를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늘 순종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한 마디로, 누가 보아도 동생은 못됐고 형은 착했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형만한 아우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첫째 아들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점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즐겁게 기쁨을 나눈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바로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마쳤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에서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러자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나아가 온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온 마을이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그 기쁨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25a절)

첫째 아들은 그날도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네요. “밭에 있다가 돌아와”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벌이신 잔치 자리에 아들로서 – 그것도 첫째 아들, 맏이로서 -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집의 장자, 첫째 아들인데 아버지의 바로 옆에 놓인 최고의 상석에 앉아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긴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니, 종들은 처음부터 첫째 아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이 아들은 어찌 된 일인지 그 기쁨의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본문 28절이 이렇게 기록하거든요.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28a절)

첫째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를 집 밖으로 붙잡아 두었던 것은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막아 선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했기 때문입니까? 분노가 가득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자격과 조건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삶,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마음이 첫째 아들과 같이 분노가 가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불평이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조건은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감사가 아니라 분노가 가득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겁니다. 


MOVE TWO. 분노의 이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당당히 참여하여 그 누구보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있는 분노가 문제였지요.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들은 마음에 큰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선사하는 기쁨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자,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을 불러다가 그 일의 자초지종을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종은 첫째 아들에게 짧지만 매우 정확하게 그 장면을 보고합니다. 첫째 아들은 이 종의 보고 내용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으니, 종의 보고 내용 안에 이 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이유가 들어 있겠지요. 그 분노의 이유를 찾아보면서, 본문 2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절)

우리가 함께 읽은 종의 보고 내용 가운데 무엇이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본문 27절을 말씀을 다시 볼까요? 종이 이렇게 보고하지요?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동생, 곧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 때문에 첫째 아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곧,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화가 불같이 일어났을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무엇일까요?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입니다. 당신의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에 첫째 아들이 분노했을까요? 네, 저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아들이 분노하게 된 핵심 이유가 이 살진 송아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볼까요? 

자, 첫째 아들이 화를 내면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않자,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잔치 자리에 데려가려고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때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쏟아놓는 장면이 본문 29절부터 나옵니다. 첫째 아들이 어떻게 불평하는지 잘 보세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명을 따라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다음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잖아요?’ 이것이 첫째 아들의 불평 내용입니다. 30절도 보십시오. 반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저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 이것이 핵심이 맞잖아요, 첫째 아들에게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이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성실하게 일을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살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아비지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이지요. 조금 더 확대하면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마음도 똑같았어요.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어요. 단지 아버지에게 얻을 보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지요. 다만, 첫째 아들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식이 동생과 달랐던 것뿐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요구하는 부도덕한 행동을 선택했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도덕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이 화를 내고 분노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핵심 이유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우월감입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본문 29절입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누가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요? “내가, 내가” 나는 아버지의 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의 말씀을 하나도 어김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어요. 반면에 동생은 어떻습니까? 30절이지요.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년들과 함께 삼켜버리지 않았습니까?” 첫째 아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지독한 우월감이지요. 

확실히 내가 저 동생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누가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내가 훨씬 더 우월하다니까요. 그러니 보상이 주어져도 내가 더 받아야 되고, 상을 얻어도 내게 더 큰 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문제의 그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잖아요. 나에게는 아직 염소 새끼 한 마리 보상을 주지 않으셨던 분이 말입니다. 내가 그토록 바르게 살았던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설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보상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보상이 저 아들에게 주어지니 그러니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준비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말지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목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신앙생활이 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이것은 저의 소원이기 이전에, 여러분 모두를 지금도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우리의 조건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쁘게 생활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수고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찾아오는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불평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살았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형편없다는 생각,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인색하시다는 생각,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도 안된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의 끝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빼앗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가운데 특별히 우월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열등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에 자꾸 찾아오는 보상심리, 우월감, 이 모든 것을 복음의 은혜로 다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에게 앞뒤 계산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MOVE THREE. 아들을 찾아오시는 아버지

첫째 아들은 그 마음의 분노 때문에 아버지가 마련한 기쁨의 잔치 자리를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때 아버지는 직접 그 아들을 찾아러 나와 또다시 잔치 자리에 초대하여 주십니다. 2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심지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내어 타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이 아버지는 집 밖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지요. 이번에도 아버지의 행동은 동일합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직접 또 다른 아들을 기쁨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지금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다. 여러분,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인자하신 아버지, 아들을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와 지금도 함께 있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또 한 가지를 말씀하시지요. ‘나의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다 주셨어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마음껏 사용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권한과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째 아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거저, 선물로 주어진 특권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이미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지금도 하늘의 아버지,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시고 다 내어주시는 그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특권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은총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뿐이지요.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시네요. 본문의 마지막 절인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고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고 얻었기로
(그 다음이 결론이지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시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다고 믿으세요? 이 모든 은혜와 이 모든 은총이 나의 공로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진정으로 믿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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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10. 6. 14:05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본문의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곤 하지요. 사실, 본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탕자’라는 단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모아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모두 탕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째 아들을 탕자, 곧 방탕하게 생활하면서 재산을 낭비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이 비유의 이름 역시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매우 흥미롭게 풀어낸 기독교의 많은 저술 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은 참 재미있습니다. 탕자라는 단어를 탕부로 바꾸어 그 책의 제목을 <탕부 하나님>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도 이 책의 제목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이미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제목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정한 이유를 그 책에서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탕자라고 했을 때, prodig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윤리적으로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씀씀이가 크다 무모할 정도로 지출이 헤프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둘째 아들이 prodigal 씀씀이가 무모할 정도로 헤프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prodigal 자신의 재산을 앞뒤 보지 않고 펑펑 사용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바로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라는 설명입니다. 이 책에서 제목을 설명하는 대목을 한 두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prodigal하게 모든 것을 주시는 탕부이시다. 


SCENE ONE. 나눠주시는 탕부 하나님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였지요. 지난 주 본문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지금 당장 나누어 달라고 요청한 이 당돌한 행동은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의 행동에는 “아버지,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께서 죽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회에서 상식이 있는 아버지라면 유산을 나눠달라는 아들의 요청은 당연히 거절해야 하고, 오히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당시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b절)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여기에서 각각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자신에게 유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의 유산도 이 아버지는 미리 다 나눠 주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아들의 당돌한 요구,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하고 아버지로서 크게 벌을 주어도 무방한 아들의 당돌한 행동에, 오히려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떼어주고 나머지 모든 재산도 큰 아들에게 넘겨주는 아버지.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 떼어주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이 이제는 그 몸도 아버지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을 때, 이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성실하게 관리하기는 커녕 그 귀한 재물을 모두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게 될 것을 몰랐을까요? 물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아들의 성품, 아들의 인격, 아들의 그 악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앞뒤 재지 않고 다 나눠줍니다. 그러니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이러한 탕부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에서도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이 호세아 2장 8절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북 이스라엘이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져있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호세아 2장 8절을 다시 보십시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다 그에게 준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알을 위하여, 곧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말씀이지요. 

호세아의 말씀을 계속 보십시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하나님께서 곡식과 양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도 주시고 금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성한 은혜를 계속 베푸십니다. 마치 아들의 악한 마음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아들의 부당한 요구까지 다 받아들여 재산을 미리 떼어 주시는 오늘 본문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탕부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데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시고 쓸 것을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낌 없이 베풀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재멋대로 행동해도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나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 돌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한 탕부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SCENE TWO. 받아주시는 탕부 하나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낭비할 것을 다 아셨지만, 앞뒤재지 않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셨지요. 그런데 탕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처음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본문 20b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불타올랐지요. 아들을 보고싶은 마음, 그 누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 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쁜 마음. 이 모든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서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직 거리가 멀었으니 한참을 달렸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아들에게 다다른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해요. 계속해서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여러분, 지금 아들이 이 대사를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자기에게 입을 맞추고 있잖아요. 목을 끌어안긴 상태에서, 입을 맞추는 상태에서 어떻게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아들은 자신이 준비해온 대사를 하기는 해야 할텐데, 아버지는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떠듬떠듬 이야기했겠지요. ‘아버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거든요 …’ 그렇게 말을 계속 잊기가 어려운 거지요. 여러분, 이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아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언어를 말하는지, 아들이 그동안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아들이 용기를 내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자 마자 목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가 종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네요. 첫째로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은 누구의 옷이었을까요? 당연히 그 집의 주인인 아버지의 옷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가장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최고의 옷을 입혀주면서 아들의 지위와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둘째로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당시 가락지는 유산을 이어받는 상속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들로서 다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줍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자유인들만 신발을 신었지요. 그러므로 아들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준다는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버지는 이 아들이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어야 하는 유산까지 이 아들이 원한다고 하니 다 주었습니다. 할만큼 했고, 충분히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베풀어 준 것만으로도 탕부, 곧 아들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아낌 없이 모든 것을 주는 아버지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그에게 또 다시 아들의 모든 권한을 다 주고, 자신의 재산을 또 다시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에게만 펑펑 재물을 다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이 얼마나 큰지, 소를 잡어서 온 마을에 잔치를 엽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시는 아버지는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탕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으면,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SCENE THREE.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신 장면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젠가 한 가정이 교회에 새로 등록하여 제가 그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대학생인 두 딸은 오래전 신앙생활을 매우 열심히 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신앙생활을 멀리하던 중 지인의 권유로 다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오래도록 교회를 멀리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의외로 아빠나 엄마가 아닌 첫째 딸이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은 교회 봉사라면 가장 우선순위에 두셨고, 자기와 동생도 교회학교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는 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사고를 당하여 건강을 잃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이곳저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맏딸은 아빠엄마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운대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안 좋아지게 되었지요. 그 장면을 경험하면서 그 딸의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너무하신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답니다. 첫째 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도 울고 같이 심방을 받고있던 아빠도 울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딸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날, 그 가정을 심방하며 제가 함께 나누었던 구절이 조금 전 함께 읽었던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이었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권면했던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께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 우리 가정에게만 – 해도 너무 하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가정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실만큼 여러분의 식구들을 사랑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권면했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탕부 하나님, 곧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손길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성경은 탕부 하나님, 곧 모든 것을 후하게 베풀어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지만 나의 삶에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도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물론,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감정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 한 가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여러분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모두에게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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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9. 30. 09:53

기독교 고전 가운데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모두 아실 줄 압니다. 이 책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손에 들고 있던 이 책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갑니다. 자신의 양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죄의 짐이 자신의 삶을 억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나의 삶을 억누르는 죄의 짐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에게 했던 대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큼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지요. 

오늘 설교의 본문은 이른바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으로, 한 번의 설교로는 그 내용을 충분히 다루기 어려울 듯하여 오늘부터 두 세 주에 걸쳐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단연코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향해 변함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 곧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내가 얼마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는 절망적인 존재인 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떠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나를 다시 맞아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하여 주시는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Scene. 아버지를 떠남

자, 오늘의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2절의 말씀 그대로 “나에게 돌아올 분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 곧 지금이 아니라 때가 되어야 나에게 돌아오게 될 분깃, 곧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자신이 받게 될 바로 그 유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나 아버지와의 교제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그의 관심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어요. 그 재산을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달라는 요청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던 둘째 아들의 마음은 그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13a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은 후, “며칠이 안 되어”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 지 아버지의 재산을 받자마자 짐을 싸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그 아들이 그동안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좋아서인가요? 아버지와 친밀한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그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유산을 미리 받았을 때 미련 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받게 되는 유산을 요청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특별히 고대 중동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것은 ‘나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죽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 매우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아들이 저지른 큰 잘못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한 행동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으면 근면하고 성실하게 그것을 잘 관리해야 했지만 그는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하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아들의 가장 큰 실수, 이 아들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멀리하면서, 그 마음으로는 아버지와 어떠한 교제나 교류를 원하지 않으면서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힘들고 지치고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를 원합니까? 지난 한 주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궁핍하고 부족하여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도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시고 우리 가정의 살림도 좀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셨나요? 어쩌면 육신의 질병과 아픔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저는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여러분이 드리는 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에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응답해주시기를 바래요.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축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유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어떠한 친밀함도, 하나님과의 어떠한 깊은 교제도, 하나님과의 어떤 깊은 만남도 바라지 않은 채, 하나님을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몸이 지금 예배당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과 같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버린 탕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마음으로 떠났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4절이 그 결말이지요.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4절)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상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만 있으면 호의호식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원히 살 수 있을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더 아버지를 떠나면 비로소 궁핍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을 잃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지금 내 손에 움켜진 재물도 모래알처럼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내 몸이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병들게 되어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사라지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죄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유혹의 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바로 이곳이 바로 축복의 장소입니다. 


Scene Two. 돌이킴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자마자, 아버지의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재물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의 형편을 본문 15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나라 백성 중” 여기에서 그 나라 백성이라는 표현은 이방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5절을 계속보시면, 이방 나라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붙여”삽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자유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악독한 주인의 폭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어요. 15절을 계속 보시면, 이 사람은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 유대인들 가증하게 여겼던 돼지를 치는 일을 시킵니다. 돼지를 돌보는 일을 시키면서도 제대로 보상을 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시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하고 하지만 그조차도 이 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처지에 처하게 되자, 드디어 이 둘째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구절이겠네요. 본문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절) 

본문 17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돌이키는 데 있어요. 

둘째 아들이 드디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습니까? 17절을 계속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어찌 양식만 풍족했겠습니까?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양식만 아니라 은혜도 풍성합니다. 용서와 관용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풍성합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17절의 뒷부분이지요. “나는 여기서”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도 풍부하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데, 나는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으니 지금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였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니 모든 것이 궁핍해졌구나, 내가 예전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단 하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뿐이지요. 그래서 본문 18절로 이어집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18a절) 

여기에서 핵심 단어가 무엇일까요? “아버지께 가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아버지를 떠난 자리입니다. 여기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곳에서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제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절망입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예요.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야겠다.’ 

우리 가운데,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대로는 안되겠으니,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말씀을 듣는 자리,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8절을 계속 보시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때문에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아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9절을 계속보세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간청하잖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 가는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지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체면입니다, 체면. 내가 지금까지 나 스스로를 자랑하면서 강한 척, 괜찮은 척, 아무 문제 없는 척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겠다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나의 체면이 구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이 옳다고, 나의 말이 옳고 나의 행동이 다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돌이키려니 괜히 부끄러워 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이키지 않으면 – 스스로 돌이키지 않으면 –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어요. 지금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없다고요. 

반면, 우리는 본문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저 멀리서 뛰어나와 아들을 맞아주시잖아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자격이 없어도, 나에게 면목이 없어도, 나의 체면이 좀 깎여도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이지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 지금 우리의 형편을 “스스로 돌이켜” 되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라면, 지금 나의 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왔다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그 결단이 여러분 마음 속에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결심으로부터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Scene Three. 세리와 죄인의 돌이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하나의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장면도 묘사해주고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이 시작하는 1절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세리와 죄인들이, 그것도 그 시대의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마침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사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세리들과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셨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아버지의 집을 떠난 수많은 아들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사건, 우리 교회 안에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사건, 비록 몸은 예배당 안에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멀리 떠나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에게만 참된 소망이 있는 줄 깨달아.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결단하며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역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스스로 돌이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그 넓은 품으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를 안아 주시고, 우리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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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4. 4. 28. 09:10

오늘 주례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신랑 군)과 (신부 양)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신랑 군)은 (신부 양)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요. (신부 양)도 (신랑 군)을 남편으로 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지요? 그런데 이처럼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결정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세요? (신부 양)보다 더 좋은 신붓감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으니 이쪽으로 보면서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신랑 군)보다 더 좋은 신랑감이 설마 이 세상에 설마 한 명도 없을까요? 어때요? 한번 더 생각해 볼 생각이 없으신가요? 지금이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신랑감에 대해, 혹은 신붓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요. 재차 강조하지만,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 드리는 이 마지막 기회를 잡으시겠어요? 

아~~ 아쉽군요. 매우 애석하게도, 여기 두 사람은 제가 드린 마지막 기회를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결혼식의 주례자로 서 있는 제가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여기 서 있는 두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나의 배우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권리조차 모두 사라졌습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탐구하고,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잘한 결정인지 백 번을 자문하고 천 번을 생각해봐도 됩니다. 아니,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앞두고 당연히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오늘 이 순간부터 그러한 모든 생각을 철저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 두 분은 한평생 절대 잊지 마십시오. 두 분에게는 배우자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권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언약의 관계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부부의 관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면 ‘약속’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언약이란 약속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점심 식사 약속부터 친구나 동료를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약속을 하며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키지 못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은 약속은 얼마든지 어길 수 있고,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하셨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신랑 군)과 (신부 양)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약속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언약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언약이라는 기독교 용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의미하기에 사람들 사이의 약속과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서도 언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딱 두 가지 관계입니다. 무엇일까요? 첫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언약의 관계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태어나 보니, 지금 저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들의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저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외에 다른 누군가가 여러분의 부모님이 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도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두 가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번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네, 부부 관계입니다. 태어나 보니, 나의 부모님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요.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의 부모님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 군)과 (신부 양)이 지금 이 시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결혼은 두 분의 선택이었어요. 그러나 지금부터는 두 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두 분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언약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여러분이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지만 결코 부모님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이제부터 여러분의 배우자는 여러분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이기에 영원히 이 부부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남녀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행복을 꿈꾸었는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결혼이 언약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찾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다정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보다 수입이 조금만 더 많은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가정적인 사람이라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나의 배우자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배우자에게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계속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여기는 부부는 어떨까요? 다른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그러니 성격도 바꿀 수 없고, 외모도 바꿀 수 없고, 수입도 바꿀 수 없고, 습관이나 버릇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밖에 없네요. 무엇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성격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입이나 소비 형태도 받아들이고, 습관이나 버릇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지만. (아~ 이 두 사람에게는 아직 공감이 안되나 보네요. 그래도 이것이 사실이니 저는 계속 말해야겠습니다)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배우자이니 내가 더 사랑하고 내가 더 섬기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은 나의 순간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지어주셔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 겹 줄

결혼을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언약으로 받아들이는 부부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전도서 4장의 말씀입니다. 전도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과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대조하며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러한 대조는 12절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11-12a절) 

여러분, 한 사람이라면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패합니다. 망합니다. 실패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출중하면 성공하고, 반대로 무능하면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해서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면 성공하는 것이요, 반대로 게으르고 나태하면 실패한다고 생각하지요.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학식을 갖춘 사람은 성공하고, 반대로 배우기를 싫어하여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으면 실패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인지 무능한 사람인지, 많은 배운 사람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인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게으른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딱 한 가지,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아무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다녀도, 이 세상의 모진 비바람을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사람이면 반드시 패합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한 사람 곁에 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모질게 닥쳐와도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맞서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한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 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에게 찾아오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함께 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내 곁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나와 동일하게 지식도 부족하고 능력이나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곁에 있더라도 도움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경험이 많고 인맥이 넓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는 전혀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요, 부부는 언약의 관계로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맞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 한 사람이라면 패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능히 맞설 수 있지요. 여기에 한 사람이 더해져서 세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신랑 군)이 제 아무리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신랑 군) 한 사람이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부 양)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라는 분명한 믿음으로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풍랑을 맞서 이겨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언약 관계, 자녀가 더해진다면 이 가정은 세 겹 줄과 같이 든든하여 결코 끊어지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네요.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지 공부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아이든지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예체능에 탁월한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는 아이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녀로 말미암아 이 가정은 든든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우자로 믿고 언약의 관계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성경의 이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함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신랑 군)에게 (신부 양)이 곁에 있으니 그저 행복하고, 
(신부 양)도 (신랑 군)이 곁에 있으니 날마다 행복하고, 
이들 부부에게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해집니다. 

그 조건은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남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남편이다, 
이 여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아내다, 
이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우리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그리고 우리를 한 식구로 묶어 주셨으니 
나는 그저 사랑하고 섬긴다는 이 언약의 마음만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있기에 늘 행복하고,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한 믿음의 든든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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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