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2023. 8. 22. 15:4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왜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며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대답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곧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입니다. 이 두 가지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셔서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기와 물과 햇빛을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큰 재물을 얻게 하시고, 세상적인 명성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반면, 특별 은총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영혼의 구원이겠지요.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 등은 모두 신자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곧 특별 은총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교회라는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을 통치하시지요. 하나님은 교회의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실 수도 있고 어느 개인에게 건강과 풍요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베풀기 원하시는 특별한 은총 - 곧 영혼의 구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풍성한 행복 – 은 지금도 우리가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이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에베소서는 성경전체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대한 정의가 등장하는 성경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마지막 절이 교회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엡 1:23).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정의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찬양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3절)

여기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늘의 축복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가 바로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의 축복 One. “하나님의 선택” (4-6절)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절) 

본문 4절 말씀에서 ‘선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네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지요. 표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내용이 본문 5절에도 반복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지요. 영국 복음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존 스토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선언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인생을 믿음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여 성도가 되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에 좌우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믿음의 길에서 탈선하여 하늘의 신령한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의지와 나의 결단은 너무도 쉽게 변하기 때문이지요.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의지력이 강하고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기에 믿음의 시련과 유혹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는 위선자이거나 자신의 참모습을 전혀 알지 못하여 그 마음이 교만해진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폭로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마지막까지 신앙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복음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는 무수히 하나님의 손을 놓쳐버린다 해도, 세상의 유혹에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고 우리의 믿음이 수없이 흔들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손을 붙잡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부터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하늘의 축복 Two. “예수님의 속량” (7-12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첫번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이지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 그 두 번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로 성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예수님의 속량’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7절) 

창세 전, 곧 세상을 창조하시기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하늘의 축복이었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예수님은 하늘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며 우리에게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 인간들이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운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죄인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심판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의지도, 그러한 능력도, 그러한 가능성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선언 그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바로 이때,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은혜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속량의 사건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심으로 우리의 잘못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상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온전한 치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속량 곧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축복 Three. “성령님의 보증” (13-14절)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속량, 곧 죄 용서의 위대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오늘도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유혹도 많고 고통과 슬픔도 넘쳐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보증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13-14a절) 

본문 13절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인’은 도장을 말하지요. 중요한 문서나 계약서에 그 내용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도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도장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정하여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도장,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모든 죄가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도장입니다. 본문 14절은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의심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고 말씀하시네요. 

여러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지금 당장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며 살아간다고 세상적인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무서운 질병이 찾아올 수 있고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이 세상의 온갖 슬픔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인치심, 곧 성령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없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너는 천국의 시민이라고, 너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분명히 보장해 주시는 성령의 도장이 있잖아요. 지금도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가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장해 주시니, 우리는 어떠한 현실을 마주치든 바로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찬송하리로다”(3절) 바울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한 뒤에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6절 말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허락하신 예수님의 속량을 선포한 뒤에도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의 12절,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보증을 말씀한 뒤에도 사도 바울의 입술에는 찬양이 터져나옵니다. 본문의 마지막 14절이지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아니 이 세상은 알 수도 없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오직 교회를 통해 베푸시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경험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장소 역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힘겹고 고단할수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 이 교회, 우리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바로 이 교회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근심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찬송가 438장 1절) 

바로 이 교회에서 하늘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날마다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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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3. 7. 23. 14:53

올해 여름 전국을 강타한 기록적인 호우로 우리나라는 5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이는 2011년 서울 우면산에서 발생한 산사태 이후 호우로 인한 최대규모의 인명 피해였습니다. 특히 청주시 오송 지하차도에서 14명이 사망한 사건은 전 국민을 큰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소연이 있습니다. 이번 피해는 단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하소연입니다. 여러분, 천재는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입니다. 짧은 시간에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하다 보니 큰 홍수가 일어나고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번 재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집중호우라는 자연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해가 단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하지요. 비가 내리는 것,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 것, 지진이나 가뭄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 인간에게도 재해의 큰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인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재앙, 곧 천재가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재앙, 곧 인재가 되는 것은 단지 국가적 차원에서만 발생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기록적인 장맛비가 쏟아지듯, 우리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나 질병 등이 발생할 수 있지요. 태평양 바다에서 태풍이 만들어져 한반도를 강타하듯, 나는 성실하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요인으로부터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큰 충격을 받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쳐 나의 몸과 마음이 흠뻑 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인생의 비바람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우리의 가정에 태풍이 몰려오고 지진이 일어나 우리 가정이 크게 흔들린다 할지라도 날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가르침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전하신 보배로운 말씀, 곧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애매한 것이 전혀 없고 모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앞에 두고 이것이 옳은 지 저것이 옳은 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지 저것이 하나님의 뜻인 지 고민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러한 애매한 지점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특별히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산상보훈의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너무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러한 행동은 큰 죄악이 되겠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을 최대한 억눌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폭력을 가하지도 않았고 살인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다른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만 들어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고 저주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게 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내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볼까요?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하였습니다. 나는 적법한 절차를 지켰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가정에서도 부모가 더 이상 자녀에게 무엇이 옳은 행동이고 무엇이 그른 행동인지 바르게 지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반듯한 언어와 바른 행동을 훈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경 말씀에 따라 성도들에게 무엇이 바른 믿음의 행동인지 정확하게 선포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리 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주변 사람이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바른 교훈을 분명히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기준으로 타협 없이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상보훈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전하셨던 산상보훈의 말씀을 단지 듣는 데서 끝나지 말고 반드시 실천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건축자의 비유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절)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등장하네요.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곧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본문에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대비되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26절)

예수님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강조점은 이 두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차이점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두 사람에게 집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를 언급하시고는 곧이어 그들에게 집이 필요한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25절을 보시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27절도 동일합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러므로 본문이 묘사하는 집이란 날씨가 맑고 따뜻할 때가 아니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까지 심하게 부는 바로 그때 그 인생의 모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건축자만이 아니라, 어리석은 건축자도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그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씨가 아직 맑을 때 건축을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두 번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풍랑이 몰려오는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집을 건축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건축자를 묘사하는 24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지혜로운 건축자도 좋은 집을 짓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건축자를 설명하는 26절도 동일하게 시작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집을 짓는 행위,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행위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배에 참여하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라고,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고 유혹하지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말씀을 통해 무엇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진리의 길인지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를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집을 건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가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핵심 교훈이 무엇입니까?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 집을 짓는 모든 사람들은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를 준비할 생각조차 못하고 집을 건축하지 않았던 사람보다 훨씬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정반대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비바람을 대비하여 집을 지어도 그 건물이 모래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면, 그리하여 인생의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질 건물이라면 그 사람의 운명은 전혀 집을 짓지 않았던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핵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평안할 때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지, 아니면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행하지 않았는지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어찌 따뜻한 햇빛이 비취는 봄날만 계속되겠습니까? 나의 삶에도, 우리 가정에도,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교회에도 비와 홍수와 바람의 한여름 장마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바로 그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그 모든 비바람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요, 말씀을 들었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크게 무너지고 맙니다. 


산상보훈의 약속 

올해 여름 우리 나라에 발생한 집중호우와 그로 인한 많은 인명 피해로 전 국민이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충청도와 전라북도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피해가 컸지요. 그런데 홍수와 재난의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였던 지난주, 전라북도의 군산이 새롭게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산에도 며칠사이에 평균 500mm를 넘어서는 엄청난 집중폭우가 쏟아졌는데 이것은 지난 60년 동안 가장 많은 강수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큰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군산에서는 단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재앙, 곧 천재가 발생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재앙, 곧 인재로 넘어가지 않았던 하나의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상치 못했던 고통과 시련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더라도 우리 가정에 찾아오는 비와 홍수와 바람의 때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비바람이 몰려와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하더라도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낼 수만 있다면, 성도 여러분, 그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4절)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지혜로운 건축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25a절) 

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비가 내립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홍수가 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거친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맑은 날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었다고 홍수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거친 바람이 나를 피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좋든 싫든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거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순종하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쓰러지지 않습니다. 거친 비바람을 맞아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그 어떠한 고난도 반석 위에 지은 든든한 그 집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인생의 기초가 든든합니다. 신앙의 기초가 튼튼합니다. 그러니 그 모든 비바람도 그 사람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삶에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지 아니면 한여름 장마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오늘도 내 귀에 들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한 말씀이라도 실천하십시오. 잠시 흔들릴 수 있는 있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있다면, 그리하여 내 귀에 들리는 주님의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순종하며 실천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도 든든한 반석 위에 인생의 기초를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6절b "그리스도의 세계" 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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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6. 4. 16:55

한 국가의 경제력을 평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지표는 GDP, 곧 국내총생산이지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역사도 국내총생산, 특별히 1인당 GDP가 얼마나 급성장하였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1953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이 되었어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54달러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70년대부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1977년 드디어 1인당 GDP 1000달러가 넘어서더니, 불과 6년 뒤인 1983년에 2000달러를 넘어서고, 1990년에 들어서는 6000달러를 달성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1995년에는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하고, IMF 금융위기를 맞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 2만 달러를 넘어, 현재는 1인당 GDP 3만 달러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GDP가 얼마나 급격히 성장했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재와 국민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현격하게 나아졌는지를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지요. 어느 나라의 GDP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총생산, 곧 GDP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GDP 안에는 여가활동의 중요성이 외면된다거나,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봉사 활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등의 한계점입니다. 그리고 GDP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행복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부탄은 국내총생산이 매우 작지만 서구유럽의 부유한 국가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라는 사실에 세계인들이 주목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GDP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총생산, 곧 한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얼마나 많이 소득을 올리는지가 HPI, 곧 국민총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의 삶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GDP는 매우 중요한 지표이고, 국민총행복지수인 HPI 등의 여러 지수에 대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GDP로 대표되는 생산능력, 곧 국민들의 소득이 반드시 국민들의 행복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전도서 6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소유, 곧 나의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것이 반드시 나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2)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전도서 6장 2절은 구체적인 목록이 제시되어 있지요. 곧, 재물과 부요와 존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그 사람은 모두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요? 그리고 전도자는 그 모든 축복의 출처가 어디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재물도 주시고, 부요도 주시고 존귀도 주신 인생, 곧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네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를 허락해 주셨지만, 한 가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여기에 두 가지 개념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첫번째 개념은 소유입니다. 그리고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두 번째 개념은 누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소유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네요. 우리의 삶 속에도 소유는 했지만 그것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있고 우리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지요.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모두 소유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큰 질병을 맞이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로 단명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형편도 있잖아요.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께서 소유는 허락하셨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계속해서 전도자는 또 다른 예를 제시합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전 6:3) 

이번에는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이 등장하네요.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장수의 복과 자녀의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매우 크고 귀한 축복으로 노래하거든요. 십계명에서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장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는 시편 127편은 자녀들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비유하잖아요. 이렇듯 성경은 장수의 축복 그리고 자녀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3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백 명의 자녀를 낳고” - 물론 과장법입지요. 그러나 그만큼 많은 자녀를 낳고 -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반전이 있네요.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이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2절에서는 소유와 누림이라는 개념이 서로 대조적으로 등장했지요? 이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행복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네요.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을지라도, 성도 여러분,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이제 결론입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여러분, 천년을 살면 뭐합니까?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면 뭐 합니까? 그렇게 장수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풍성한 축복을 받으면 무엇합니까?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전도자의 표현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 소유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큰 축복과 큰 소유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만일 큰 축복을 받아 많은 것을 소유했더라도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 조금 작아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소유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부족해 보여도,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과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면서 지금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유를 넘어 행복으로 

전도자는 소유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행복한 삶은 다를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크든지 혹은 작든지 지금 내가 소유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크든 작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펴본 전도서 6장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우리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전도서 6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쩔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니 우리 인간은 거기에 대해 항의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나에게 있는 그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만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자가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비록 천년을 살아도, 심지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헛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소유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동분서주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비결 하나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사하는 인생이지요. 지금 나에게 있는 소유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다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이들은 조금 풍족하게 살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 궁핍하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떨치며 살아가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 어떤 분들은 늘 병약한 육신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많은 축복을 소유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여러분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더 많은 축복,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끝은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가 분명히 가르쳐 주잖아요. 

물론,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족한 분들도 계시고 또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궁핍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신 분이 계시고 다른 사람들보다 허약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비록 소유가 적어도, 비록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적어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천년을 살아도, 아니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오늘 하루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은 고사하고 앞으로 백 년도 살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오늘 하루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푸며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이제 시작된 한 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 그것이 크고 풍성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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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23. 5. 31. 21:02

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흥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데이빗 왓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 공동체에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부흥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성도들의 예배 출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의 종결을 사실상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교회는 코로나 이전의 출석인원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요. 이처럼 최근 몇년간 교회의 출석인원이 급격히 감소한 데는 코로나 팬데믹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데이빗 왓슨의 주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우리 시대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 이유도, 아니 우리 시대 교회가 오히려 쇠퇴하는 이유도 외부의 어떤 요소보다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자꾸 쇠퇴한다고 눈에 보이는 출석 인원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 없음을 더욱 근심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 성도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사라진다면 
그 교회는 시간이 문제지 반드시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목상의 제자

사도 바울의 3차전도여행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초대교회에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명칭이었을 뿐 참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고 알려줍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a절) 

이때 그들의 대답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2b절)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답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니 당황스러운 상황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3a절) 

에베소에서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세례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그들이 받은 세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의 대답은 제자라는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3b절) 

여러분,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고, 요한의 사역 위에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나아가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 이미 수십 년 이전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세례 요한의 세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고, 단 한 번도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 적도 없는 “이름뿐인 제자”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까지 성령 하나님께서 열두명의 사도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펼치셨는지 웅장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지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그 자리에 있었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체험하였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 일곱 분의 집사님들, 바울과 실라 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데 쓰임 받았던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사도행전은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지 약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니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그 초대교회 안에 이름뿐인 제자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일찍이 데이빗 왓슨이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제자도를 잃어버리면, 그리하여 복음의 능력도 모르고 성령의 역사도 체험하지 못한 이름뿐인 제자들 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인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나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참된 제자도가 사라진 것이 문제입니다. 


두란노 학당

오순절에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로 시작된 초대교회였지만,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지나자 교회 안에는 이름뿐인 제자들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의 역사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8절) 

바울이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해 가르쳤습니까? 바로 회당입니다. 사도행전을 처음부터 계속 읽어오면, 바울이 이미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하는 지역의 회당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그 마을에 세워진 회당에 매주 안식일마다 모였지요. 바울은 1차전도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3차 전도여행을 다니는 지금까지 회당을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이 사역의 중심이 되었고 유대인들이 주된 선교의 대상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네요. 9절을 계속 보십시오.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잖아요. 자, 지금까지 바울은 회당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9b절)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던 바울이 이제는 두란논 서원에서 강론을 시작하네요. 우리말 성경에서 “서원”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콜레’인데 학교를 의미라는 School의 어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서원 혹은 학당 정도의 의미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자,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던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어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장소가 바뀌자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변화가 따라왔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회당은 사람들이 주로 안식일에 모이던 장소였지요. 그런데 두란노 서원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니 - 9절의 뒷부분이 말씀하는 것처럼 “두란노 서원에서” 그다음입니다 - “날마다” 복음을 강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본문 9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던 대상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니 어떤 사람들, 곧 회당에 참여하였던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였고 심지어 복음을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그리고 본문 9절을 계속해서 무엇을 말씀하지요?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매일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두란노에서 말씀을 집중적으로, 매일 가르쳤던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 안식일에 모이는 회당을 포기한 바울은 이제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매일, 곧 집중적으로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온전히 맡기는 참된 제자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로 세우는 일에 바울은 자신의 남은 모든 사역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회당을 떠나 두란노에서 사역을 시작한 바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0절) 

여러분, 이 말씀은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두란노 서원을 찾아와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 10절이 묘사하는 바는,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을 통해 그 제자들이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그 흔적이 여러 가지로 등장하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골로새교회입니다. 신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두란노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었던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지요(골 1:7).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0여년이 흐른 뒤,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초대교회에도 이름뿐인 제자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복음의 능력도, 성령의 역사도 조금씩 잃어버리기 시작했지요.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교회가 새롭게 복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때,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성장을 멈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시대의 교회는 오히려 계속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록 겉모습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을지라도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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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5. 5. 22:3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가치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을 더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정의, 사랑, 자유와 같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재물, 권세, 특권 등에 우리의 마음이 쉽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신앙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바라볼 때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중요하게 고려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얼마나 화려한지 혹은 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등에 더 집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이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저 천국에 우리의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손해를 감내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오늘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의 자세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절)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내리는 믿음의 정의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나의 삶에 성취된 것처럼 그 말씀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우리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어디 그뿐인가요?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근거로 여러분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이 아무리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는 때로 질병으로 아파하고, 삶의 여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나에게 지금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차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이 말씀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바로 지금 하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바로 이곳에서 왕 같은 제사장답게 우리의 사명을 위해 묵묵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 절망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의 능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 믿음은 마침내 보이지 않던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눈에 보이는 현실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3절에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절)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본문 3절 하반절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어떻게 말씀하시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우리가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는 것들이 과거에는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심지어 믿음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다 보면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강조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구약성경의 수많은 예를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먼저 아브라함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을 주십니다. 너를 통해 큰 자손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통해 바다의 모래와 같은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아들 한 명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한평생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믿음이 있기에, 그는 과거의 이름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때가 이르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 주어지잖아요.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믿음의 역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중요하게 다루는 또 한 사람은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모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애굽, 이집트의 그 막강한 군사력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지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리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불가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애굽의 화려한 궁궐을 다 뒤로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자신의 삶을 바치잖아요. 마침내 세월이 흘러 모세의 마음에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은 내일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면, 오늘과 동일한 내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득한 새로운 내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지금 나의 눈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귀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약속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절망과 고통과 아픔뿐이라고 가슴 답답해하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의 비전으로 삼아 한 걸음씩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위해 나아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기에, 마침내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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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민수기 성경공부2023. 5. 3. 19:11

가데스를 떠난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을 점령하면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친다(1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에돔과 모압은 침략하지 않은 채 그들의 국경을 돌아 이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국경에 진을 친 것이 모압 왕 발락에게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 (7-14절)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사주하였다. 이에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갔다(7절). 여기에서 복채라는 단어가 주목을 끈다. 발람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언하던 사람이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12절) 

하나님은 발람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청에 따르지 말고 그들이 보낸 사신들과 함께 동행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 (15-20절)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발락의 사신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발락은 포기하지 않았고, 처음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낸다(15절). 발람은 그들의 청도 거절하지만(18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0절) 

본문을 읽으며 독자들은 어리둥절할지 모른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발람에게 발락의 사신들과 동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떠날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발락의 청에 응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선지자 발람은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를 읽어보면(민 22-24장),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선한 선지자처럼 보인다. 반면 성경의 다른 본문은 발람에 대해 돈에 미혹된 선지자로 묘사한다(cf. 민 31:8; 신 23:4-5; 벧후 2:15; 유 11; 계 2:14). 그러면 성경은 발람을 의인이라고 말씀하는가, 아니면 악인이라고 말씀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기억할 점이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그것이 거룩한 성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때로는 미래의 일을 알아맞추기도 한다(신 13:1-5). 하나님께서 사울을 패위 하기로 결정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예언했다(삼상 19:23-24). 가야바 제사장도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했다(요 11:51-52). 유대인 마술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다(행 19:13-16).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가득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미성숙을 책망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셨다(마 7:21-23).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수기 본문 역시 발람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복채를 받고(민 22:7) 수시로 점술을 사용하는 사람(민 24:1)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달하는 그의 능력을 그 내면의 거룩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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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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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민수기 성경공부2023. 4. 29. 16:46

가나안 족속에 대한 첫 번째 승리(민 21:1-3)에 이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동편을 점령한다. 


아모리 왕 시혼 (21-32절) 

모세는 아모리 국경에 도착하여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낸다(cf 민 21:13). 그 내용은 에돔 왕에게 요청했던 바와 동일하다(cf 민 20:14-21).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왕의 대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다(22절). 그리고 아모리 왕 시혼의 반응 역시 모압 왕의 대답과 동일했다. 모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히려 무력으로 막아섰다(23절). 그런데 이에 대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대응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국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아모리는 하나님께서 점령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그 땅을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 (24절) 

위의 구절에서 '아른논부터 얍복까지'는 모세가 처음 아모리 왕 시혼에게 요청했던 '왕의 길'(the King's Highway)이 통과하는 경로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암몬의 국경에서 멈추었는데, 위의 구절은 그 이유로 암몬의 강력한 군사력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문제와 별개로,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암몬을 점령하지 않은 이유가 에돔을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신 2:19). 만일, 이스라엘이 암몬을 침공하지 못했던 핵심 이유가 그들의 군사력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아모리의 땅도 점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헤스본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도성이라 
시혼이 그 전 모압 왕을 치고 
그의 모든 땅을 아르논까지 그의 손에서 빼앗았더라 (26절)  

아모리 왕 시혼의 군대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으로 모압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였고, 고대의 시인들이 시혼의 강력한 군사력을 노래할 정도였다(27-30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땅을 다시 아모리 왕 시혼의 손에서 빼앗았으니, 이것은 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후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입다는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그 땅에 대해  암몬 자손과 논쟁한다. 이스라엘이 암몬 왕에게 빼앗은 그 지역은 암몬이나 모압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었다고 입다는 정확하게 설명한다(삿 11:14-22). 


바산 왕 옥 (33-35절) 

아모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방향을 바꾸어 바산 길로 올라갔다. 그러자 바산 왕 옥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다(3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34절)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했고 모세와 이스라엘은 바산 왕 옥을 물리쳤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요단 동편의 점령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요단 동편만이 아니라 요단 서편까지 포함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단 동편의 점령은 이제 곧 요단 서편도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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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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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성경공부2023. 4. 28. 20:47

호르마 (1-3절)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반역 사건 직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후 드디어 가나안 족속을 대상으로 첫 번째 승리를 거둔다. 이는 실패와 패배의 시대가 마치고 승리와 정복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3절) 

호르마의 뜻은 '완전히 멸함'이다. 가나안 백성을 대상으로 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진멸의 기조를 유지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벗어나 이방인의 우상을 경배하는 배교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들 대부분을 진멸하였다. 


구리 뱀 (4-9절) 

광야를 떠돌며 이스라엘 백성은 음식에 대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음식 때문에 불평했던 성경의 마지막 기록이다. 불평의 내용은 지금까지 지속되었던 이야기의 반복이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5절) 

위의 구절에서 '만나'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폄하한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을 하찮게 여기며 불평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신다. 불뱀이 사람들을 물으니 죽음에 이르게 된다(6절). 그러나 모세의 중보기도에 하나님은 치유법도 알려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는 놋으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았고, 불뱀에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치유를 받았다. 

불뱀에 물린 사람에 대한 치유법으로 하나님은 왜 뱀의 형상을 만들어 쳐다보게 하셨을까? 성경은 그 원리에 대해 침묵하기에 정확한 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데, 고든 웬헴(Gordon J. Wenham)은 율법의 정결예식에서 그 힌트를 찾는다. 율법의 정결예식에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물건이나 행위가 동시에 부정을 치유하는 방법이 된다는 주장이다. 동물을 죽이는 제사가 죽을 운명의 인간을 살린다. 죽은 가축의 피를 뿌리는 행위나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가 주검으로 부정해진 사람을 정결하게 만든다. 동일한 원리로 불뱀에 물려 위독해진 사람이 뱀의 형상을 보아 치료를 얻는다는 설명이다. 

고든 웬헴은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율법이 정한 정결예식에서 부정을 입은 사람은 제물이든 피든 혹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든 사람을 정결하게 만드는 재료에 직접 접촉해야 한다. 접촉을 통해 정결하게 만드는 효력이 개인에게 발휘된다. 그러면 본문이 소개하는 놋뱀 사건에서 접촉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신체적 접촉(physical contact)을 시각적 접촉(visual contact)이 대신하는 경우다. 신체적 접촉아 아니더라도 치유를 위해서는 시각적 접촉이 매우 중요하다. 본문에서 놋뱀을 쳐다보아 치유를 얻는다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다(8-9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예수님은 본문의 놋뱀 사건을 언급하며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도 율법이 규정한  정결예식의 원리가 작동한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십자가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접촉을 통해 치유의 능력이 실제로 작동하듯, 신체적 접촉이나 시각적 접촉이 아니라 믿음의 접촉으로(그를 믿는 자마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얻게 된다. 


모압으로 가는 길 (10-20절) 

매우 빠른 템포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빠른 템포의 서술은 약속의 땅이 눈 앞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본문이 나열하는 여정의 뒷부분(14-20절)은 바로 다음 단락에 등장하는 요단 동편 지역인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친 사건(민 21:21-35)을 예견하게 만든다. 본문의 여정에는 아모리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 (14-15절)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 (17-18절) 

<여호와의 전쟁기>는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기원과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유명한 노래를 모아두었던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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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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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성경공부2023. 4. 28. 20:39

광야 40년의 세월이 지나며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한 세대가 저무는 장면은 한편 쓸쓸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 


에돔의 국경을 돌아가다 (14-21절) 

이제 때가 되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이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에돔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였다. 왕의 대로란 다메색과 애굽을 연결하는 길로,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교역의 통로였다. 모세는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의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7절) 

본문이 기록한 모세의 요청은 당시의 일반적인 외교문서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먼저 수신자를 언급하고, 요청한다는 문구가 등장하며(Thus Says), 자신이 처한 형편을 서술하고, 마지막에 요청 내용을 밝힌다. 모세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정중히 제안하였다. 그러나 에돔 왕은 무력시위까지 서슴지 않고 모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21절) 

본문의 강조점은 에돔을 대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자세에 있다. 이제 때가 되어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공격하고 그들을 점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국으로(14절, 에서와 야곱의 형제 관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에돔의 땅은 조금도 허락하신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모세는 에돔 왕이 거절하자 방향을 바꾸어 에돔 국경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아론의 죽음과 엘르아살의 취임 (22-29절)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출발하여 호르 산에 이르자, 하나님은 아론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25-26절) 

아론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이 30일 동안 애곡하였다. 이처럼 아론의 죽음은 모든 백성에게 큰 슬픔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슬픔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셔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신다. 이후 민수기 27장에는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장면이 등장한다(민 27:12-23). 모세와 아론은 므리바에서 불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위해 그들을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엘르아살과 여호수아를 세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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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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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성경공부2023. 4. 27. 22:15

민수기 20장과 21장은 가데스에서 모압 평지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모세오경의 본론에 해당하는 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는 애굽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크게 세 번의 중요한 이동 과정이 등장하는데(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민수기 20장과 21장은 그 마지막 여정이다. 


미리암의 죽음 (1절)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로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여성 지도자였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1절) 

여성 지도자였던 미리암의 죽음은 시간의 흐름을 강력히 표현한다. 가데스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40년 광야 생활을 명령하셨다. 그 40년은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리암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세대가 저물고 있다. 

미리암의 죽음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모세와 아론의 운명, 곧 그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을 암시한다. 본문 1절은 "첫째 달에"라고 기록하여 정확한 연도를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리암의 죽음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 역시 세상을 떠난다는 점에서(민 20:22-29)  미리암의 죽음은 광야 40년이 거의 마칠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아론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뒤 40년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민 33:38). 


므리바 사건 (2-13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쏟아 놓았다. 물이 없다고 백성이 불평하는 본문의 사건은 출애굽 직후에 일어난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출 17:1-7). 두 사건 모두 마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셨고, 그곳의 이름을 므리바로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무도 유사한 사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출애굽기 17장의 사건과 본문의 사건은 확연히 다른 점이 존재한다. 바로 모세의 행동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다. 

출애굽기 17장의 사건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다. 그런데 본문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전혀 다르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8절) 

본문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들고 반석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게 만드는 모세의 행동을 출애굽기와는 전혀 다르게 명령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반석을 향해 명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통을 쳤고(10절),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려쳤다(11절).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백성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2절) 

모세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두 가지로 평가하신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불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멸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불신이 되는가?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특별히 구약성경은 순종이 곧 믿음이요 불순종이 곧 불신이다. 아울러, 모세의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멸시였던 이유로 모세가 내려친 반석이 하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cf. 시 18:2 롬 10:2). 

미리암의 죽음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판결이 내렸다. 출애굽의 지도자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그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씁쓸한 장면이다. 그들과 함께 출애굽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도 종말을 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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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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