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4. 10. 13. 19:19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기도 하시고, 공생애의 마지막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도 하시지요.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전반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로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수군거립니까?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을 받아들여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벌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하나의 별명을 붙여버립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눅 7:34).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이러한 별명을 붙였지만,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과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기쁨이 가득한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초대하시며,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 –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 – 을 누리며 오늘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MOVE ONE. 기쁨을 잃어버린 아들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모두 세명입니다. 먼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그 재산을 가지고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둘째 아들이 등장하지요. 또한 그러한 탕자까지도 다시 받아주시고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품어주시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이 주로 묘사하는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지요.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건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날려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를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늘 순종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한 마디로, 누가 보아도 동생은 못됐고 형은 착했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형만한 아우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첫째 아들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점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즐겁게 기쁨을 나눈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바로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마쳤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에서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러자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나아가 온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온 마을이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그 기쁨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25a절)

첫째 아들은 그날도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네요. “밭에 있다가 돌아와”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벌이신 잔치 자리에 아들로서 – 그것도 첫째 아들, 맏이로서 -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집의 장자, 첫째 아들인데 아버지의 바로 옆에 놓인 최고의 상석에 앉아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긴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니, 종들은 처음부터 첫째 아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이 아들은 어찌 된 일인지 그 기쁨의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본문 28절이 이렇게 기록하거든요.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28a절)

첫째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를 집 밖으로 붙잡아 두었던 것은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막아 선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했기 때문입니까? 분노가 가득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자격과 조건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삶,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마음이 첫째 아들과 같이 분노가 가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불평이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조건은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감사가 아니라 분노가 가득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겁니다. 


MOVE TWO. 분노의 이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당당히 참여하여 그 누구보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있는 분노가 문제였지요.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들은 마음에 큰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선사하는 기쁨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자,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을 불러다가 그 일의 자초지종을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종은 첫째 아들에게 짧지만 매우 정확하게 그 장면을 보고합니다. 첫째 아들은 이 종의 보고 내용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으니, 종의 보고 내용 안에 이 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이유가 들어 있겠지요. 그 분노의 이유를 찾아보면서, 본문 2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절)

우리가 함께 읽은 종의 보고 내용 가운데 무엇이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본문 27절을 말씀을 다시 볼까요? 종이 이렇게 보고하지요?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동생, 곧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 때문에 첫째 아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곧,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화가 불같이 일어났을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무엇일까요?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입니다. 당신의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에 첫째 아들이 분노했을까요? 네, 저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아들이 분노하게 된 핵심 이유가 이 살진 송아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볼까요? 

자, 첫째 아들이 화를 내면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않자,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잔치 자리에 데려가려고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때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쏟아놓는 장면이 본문 29절부터 나옵니다. 첫째 아들이 어떻게 불평하는지 잘 보세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명을 따라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다음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잖아요?’ 이것이 첫째 아들의 불평 내용입니다. 30절도 보십시오. 반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저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 이것이 핵심이 맞잖아요, 첫째 아들에게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이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성실하게 일을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살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아비지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이지요. 조금 더 확대하면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마음도 똑같았어요.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어요. 단지 아버지에게 얻을 보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지요. 다만, 첫째 아들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식이 동생과 달랐던 것뿐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요구하는 부도덕한 행동을 선택했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도덕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이 화를 내고 분노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핵심 이유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우월감입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본문 29절입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누가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요? “내가, 내가” 나는 아버지의 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의 말씀을 하나도 어김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어요. 반면에 동생은 어떻습니까? 30절이지요.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년들과 함께 삼켜버리지 않았습니까?” 첫째 아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지독한 우월감이지요. 

확실히 내가 저 동생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누가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내가 훨씬 더 우월하다니까요. 그러니 보상이 주어져도 내가 더 받아야 되고, 상을 얻어도 내게 더 큰 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문제의 그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잖아요. 나에게는 아직 염소 새끼 한 마리 보상을 주지 않으셨던 분이 말입니다. 내가 그토록 바르게 살았던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설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보상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보상이 저 아들에게 주어지니 그러니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준비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말지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목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신앙생활이 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이것은 저의 소원이기 이전에, 여러분 모두를 지금도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우리의 조건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쁘게 생활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수고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찾아오는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불평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살았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형편없다는 생각,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인색하시다는 생각,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도 안된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의 끝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빼앗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가운데 특별히 우월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열등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에 자꾸 찾아오는 보상심리, 우월감, 이 모든 것을 복음의 은혜로 다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에게 앞뒤 계산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MOVE THREE. 아들을 찾아오시는 아버지

첫째 아들은 그 마음의 분노 때문에 아버지가 마련한 기쁨의 잔치 자리를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때 아버지는 직접 그 아들을 찾아러 나와 또다시 잔치 자리에 초대하여 주십니다. 2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심지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내어 타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이 아버지는 집 밖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지요. 이번에도 아버지의 행동은 동일합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직접 또 다른 아들을 기쁨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지금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다. 여러분,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인자하신 아버지, 아들을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와 지금도 함께 있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또 한 가지를 말씀하시지요. ‘나의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다 주셨어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마음껏 사용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권한과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째 아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거저, 선물로 주어진 특권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이미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지금도 하늘의 아버지,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시고 다 내어주시는 그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특권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은총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뿐이지요.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시네요. 본문의 마지막 절인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고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고 얻었기로
(그 다음이 결론이지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시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다고 믿으세요? 이 모든 은혜와 이 모든 은총이 나의 공로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진정으로 믿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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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10. 6. 14:05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본문의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곤 하지요. 사실, 본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탕자’라는 단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모아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모두 탕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째 아들을 탕자, 곧 방탕하게 생활하면서 재산을 낭비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이 비유의 이름 역시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매우 흥미롭게 풀어낸 기독교의 많은 저술 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은 참 재미있습니다. 탕자라는 단어를 탕부로 바꾸어 그 책의 제목을 <탕부 하나님>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도 이 책의 제목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이미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제목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정한 이유를 그 책에서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탕자라고 했을 때, prodig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윤리적으로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씀씀이가 크다 무모할 정도로 지출이 헤프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둘째 아들이 prodigal 씀씀이가 무모할 정도로 헤프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prodigal 자신의 재산을 앞뒤 보지 않고 펑펑 사용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바로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라는 설명입니다. 이 책에서 제목을 설명하는 대목을 한 두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prodigal하게 모든 것을 주시는 탕부이시다. 


SCENE ONE. 나눠주시는 탕부 하나님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였지요. 지난 주 본문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지금 당장 나누어 달라고 요청한 이 당돌한 행동은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의 행동에는 “아버지,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께서 죽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당시 사회에서 상식이 있는 아버지라면 유산을 나눠달라는 아들의 요청은 당연히 거절해야 하고, 오히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당시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b절)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여기에서 각각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자신에게 유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의 유산도 이 아버지는 미리 다 나눠 주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아들의 당돌한 요구,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하고 아버지로서 크게 벌을 주어도 무방한 아들의 당돌한 행동에, 오히려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떼어주고 나머지 모든 재산도 큰 아들에게 넘겨주는 아버지.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미리 떼어주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이 이제는 그 몸도 아버지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을 때, 이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성실하게 관리하기는 커녕 그 귀한 재물을 모두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게 될 것을 몰랐을까요? 물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아들의 성품, 아들의 인격, 아들의 그 악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앞뒤 재지 않고 다 나눠줍니다. 그러니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이러한 탕부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에서도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이 호세아 2장 8절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북 이스라엘이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져있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탕부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호세아 2장 8절을 다시 보십시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다 그에게 준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알을 위하여, 곧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말씀이지요. 

호세아의 말씀을 계속 보십시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하나님께서 곡식과 양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도 주시고 금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성한 은혜를 계속 베푸십니다. 마치 아들의 악한 마음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아들의 부당한 요구까지 다 받아들여 재산을 미리 떼어 주시는 오늘 본문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탕부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데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시고 쓸 것을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낌 없이 베풀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재멋대로 행동해도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나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 돌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한 탕부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SCENE TWO. 받아주시는 탕부 하나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낭비할 것을 다 아셨지만, 앞뒤재지 않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셨지요. 그런데 탕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처음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본문 20b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불타올랐지요. 아들을 보고싶은 마음, 그 누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 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쁜 마음. 이 모든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서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직 거리가 멀었으니 한참을 달렸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아들에게 다다른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해요. 계속해서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여러분, 지금 아들이 이 대사를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자기에게 입을 맞추고 있잖아요. 목을 끌어안긴 상태에서, 입을 맞추는 상태에서 어떻게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아들은 자신이 준비해온 대사를 하기는 해야 할텐데, 아버지는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떠듬떠듬 이야기했겠지요. ‘아버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거든요 …’ 그렇게 말을 계속 잊기가 어려운 거지요. 여러분, 이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아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언어를 말하는지, 아들이 그동안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아들이 용기를 내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자 마자 목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가 종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네요. 첫째로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은 누구의 옷이었을까요? 당연히 그 집의 주인인 아버지의 옷이었겠지요.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가장 좋은 옷을 입혀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옷, 그것도 최고의 옷을 입혀주면서 아들의 지위와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둘째로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당시 가락지는 유산을 이어받는 상속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들로서 다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줍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자유인들만 신발을 신었지요. 그러므로 아들에게 다시 신발을 신겨준다는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버지는 이 아들이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어야 하는 유산까지 이 아들이 원한다고 하니 다 주었습니다. 할만큼 했고, 충분히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베풀어 준 것만으로도 탕부, 곧 아들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아낌 없이 모든 것을 주는 아버지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그에게 또 다시 아들의 모든 권한을 다 주고, 자신의 재산을 또 다시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에게만 펑펑 재물을 다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이 얼마나 큰지, 소를 잡어서 온 마을에 잔치를 엽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시는 아버지는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는 탕부 하나님이시지요.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탕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으면,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SCENE THREE.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 주시는 탕부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장면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신 장면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젠가 한 가정이 교회에 새로 등록하여 제가 그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대학생인 두 딸은 오래전 신앙생활을 매우 열심히 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신앙생활을 멀리하던 중 지인의 권유로 다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오래도록 교회를 멀리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의외로 아빠나 엄마가 아닌 첫째 딸이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은 교회 봉사라면 가장 우선순위에 두셨고, 자기와 동생도 교회학교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는 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사고를 당하여 건강을 잃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이곳저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맏딸은 아빠엄마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서 배운대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안 좋아지게 되었지요. 그 장면을 경험하면서 그 딸의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너무하신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답니다. 첫째 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도 울고 같이 심방을 받고있던 아빠도 울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딸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날, 그 가정을 심방하며 제가 함께 나누었던 구절이 조금 전 함께 읽었던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이었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권면했던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께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 우리 가정에게만 – 해도 너무 하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가정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실만큼 여러분의 식구들을 사랑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권면했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탕부 하나님, 곧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손길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성경은 탕부 하나님, 곧 모든 것을 후하게 베풀어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지만 나의 삶에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도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물론,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감정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 한 가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여러분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모두에게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탕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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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9. 30. 09:53

기독교 고전 가운데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모두 아실 줄 압니다. 이 책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손에 들고 있던 이 책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갑니다. 자신의 양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죄의 짐이 자신의 삶을 억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나의 삶을 억누르는 죄의 짐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에게 했던 대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큼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지요. 

오늘 설교의 본문은 이른바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으로, 한 번의 설교로는 그 내용을 충분히 다루기 어려울 듯하여 오늘부터 두 세 주에 걸쳐 함께 묵상하려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단연코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향해 변함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 곧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내가 얼마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는 절망적인 존재인 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떠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나를 다시 맞아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하여 주시는 복음의 풍성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Scene. 아버지를 떠남

자, 오늘의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당돌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11-12a절)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2절의 말씀 그대로 “나에게 돌아올 분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 곧 지금이 아니라 때가 되어야 나에게 돌아오게 될 분깃, 곧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자신이 받게 될 바로 그 유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나 아버지와의 교제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그의 관심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어요. 그 재산을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달라는 요청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던 둘째 아들의 마음은 그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13a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은 후, “며칠이 안 되어”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 지 아버지의 재산을 받자마자 짐을 싸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그 아들이 그동안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좋아서인가요? 아버지와 친밀한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단 한가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그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유산을 미리 받았을 때 미련 없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받게 되는 유산을 요청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특별히 고대 중동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청하는 것은 ‘나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죽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 매우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아들이 저지른 큰 잘못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한 행동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으면 근면하고 성실하게 그것을 잘 관리해야 했지만 그는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비판 받아야 하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아들의 가장 큰 실수, 이 아들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멀리하면서, 그 마음으로는 아버지와 어떠한 교제나 교류를 원하지 않으면서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힘들고 지치고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를 원합니까? 지난 한 주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궁핍하고 부족하여 괴로웠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도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시고 우리 가정의 살림도 좀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셨나요? 어쩌면 육신의 질병과 아픔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저는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여러분이 드리는 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에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응답해주시기를 바래요.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의 축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유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어떠한 친밀함도, 하나님과의 어떠한 깊은 교제도, 하나님과의 어떤 깊은 만남도 바라지 않은 채, 하나님을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몸이 지금 예배당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과 같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버린 탕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마음으로 떠났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4절이 그 결말이지요.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4절)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상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만 있으면 호의호식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원히 살 수 있을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더 아버지를 떠나면 비로소 궁핍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을 잃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지금 내 손에 움켜진 재물도 모래알처럼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내 몸이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병들게 되어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사라지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죄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유혹의 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바로 이곳이 바로 축복의 장소입니다. 


Scene Two. 돌이킴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자마자, 아버지의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재물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의 형편을 본문 15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나라 백성 중” 여기에서 그 나라 백성이라는 표현은 이방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5절을 계속보시면, 이방 나라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붙여”삽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자유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악독한 주인의 폭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어요. 15절을 계속 보시면, 이 사람은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 유대인들 가증하게 여겼던 돼지를 치는 일을 시킵니다. 돼지를 돌보는 일을 시키면서도 제대로 보상을 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시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하고 하지만 그조차도 이 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처지에 처하게 되자, 드디어 이 둘째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구절이겠네요. 본문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절) 

본문 17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돌이키는 데 있어요. 

둘째 아들이 드디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습니까? 17절을 계속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어찌 양식만 풍족했겠습니까?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양식만 아니라 은혜도 풍성합니다. 용서와 관용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풍성합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17절의 뒷부분이지요. “나는 여기서”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도 풍부하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데, 나는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으니 지금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였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니 모든 것이 궁핍해졌구나, 내가 예전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단 하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뿐이지요. 그래서 본문 18절로 이어집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18a절) 

여기에서 핵심 단어가 무엇일까요? “아버지께 가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아버지를 떠난 자리입니다. 여기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곳에서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제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절망입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예요.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야겠다.’ 

우리 가운데, 인생에 결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대로는 안되겠으니,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말씀을 듣는 자리,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8절을 계속 보시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때문에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아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9절을 계속보세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간청하잖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 가는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지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체면입니다, 체면. 내가 지금까지 나 스스로를 자랑하면서 강한 척, 괜찮은 척, 아무 문제 없는 척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겠다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나의 체면이 구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이 옳다고, 나의 말이 옳고 나의 행동이 다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돌이키려니 괜히 부끄러워 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이키지 않으면 – 스스로 돌이키지 않으면 –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어요. 지금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없다고요. 

반면, 우리는 본문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저 멀리서 뛰어나와 아들을 맞아주시잖아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자격이 없어도, 나에게 면목이 없어도, 나의 체면이 좀 깎여도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이지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 지금 우리의 형편을 “스스로 돌이켜” 되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라면, 지금 나의 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왔다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그 결단이 여러분 마음 속에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결심으로부터 여러분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Scene Three. 세리와 죄인의 돌이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하나의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장면도 묘사해주고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이 시작하는 1절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세리와 죄인들이, 그것도 그 시대의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마침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사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세리들과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셨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아버지의 집을 떠난 수많은 아들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사건, 우리 교회 안에 수많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사건, 비록 몸은 예배당 안에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멀리 떠나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에게만 참된 소망이 있는 줄 깨달아.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결단하며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역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스스로 돌이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그 넓은 품으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를 안아 주시고, 우리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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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4. 4. 28. 09:10

오늘 주례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신랑 군)과 (신부 양)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신랑 군)은 (신부 양)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요. (신부 양)도 (신랑 군)을 남편으로 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지요? 그런데 이처럼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결정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세요? (신부 양)보다 더 좋은 신붓감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으니 이쪽으로 보면서 이야기해 봐야겠네요.) (신랑 군)보다 더 좋은 신랑감이 설마 이 세상에 설마 한 명도 없을까요? 어때요? 한번 더 생각해 볼 생각이 없으신가요? 지금이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신랑감에 대해, 혹은 신붓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요. 재차 강조하지만,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 드리는 이 마지막 기회를 잡으시겠어요? 

아~~ 아쉽군요. 매우 애석하게도, 여기 두 사람은 제가 드린 마지막 기회를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결혼식의 주례자로 서 있는 제가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여기 서 있는 두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선택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나의 배우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권리조차 모두 사라졌습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탐구하고,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잘한 결정인지 백 번을 자문하고 천 번을 생각해봐도 됩니다. 아니,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앞두고 당연히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오늘 이 순간부터 그러한 모든 생각을 철저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 두 분은 한평생 절대 잊지 마십시오. 두 분에게는 배우자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권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언약의 관계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부부의 관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면 ‘약속’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언약이란 약속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점심 식사 약속부터 친구나 동료를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약속을 하며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키지 못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은 약속은 얼마든지 어길 수 있고,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하셨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신랑 군)과 (신부 양)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약속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언약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 언약이라는 기독교 용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의미하기에 사람들 사이의 약속과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서도 언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딱 두 가지 관계입니다. 무엇일까요? 첫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언약의 관계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태어나 보니, 지금 저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들의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저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외에 다른 누군가가 여러분의 부모님이 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도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두 가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번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네, 부부 관계입니다. 태어나 보니, 나의 부모님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요.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의 부모님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 군)과 (신부 양)이 지금 이 시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결혼은 두 분의 선택이었어요. 그러나 지금부터는 두 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두 분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언약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여러분이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지만 결코 부모님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이제부터 여러분의 배우자는 여러분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이기에 영원히 이 부부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남녀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행복을 꿈꾸었는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에 결혼이 언약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찾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다정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보다 수입이 조금만 더 많은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가정적인 사람이라면, 이 사람보다 조금만 더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나의 배우자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배우자에게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계속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결혼을 언약의 관계로 여기는 부부는 어떨까요? 다른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그러니 성격도 바꿀 수 없고, 외모도 바꿀 수 없고, 수입도 바꿀 수 없고, 습관이나 버릇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밖에 없네요. 무엇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성격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입이나 소비 형태도 받아들이고, 습관이나 버릇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지만. (아~ 이 두 사람에게는 아직 공감이 안되나 보네요. 그래도 이것이 사실이니 저는 계속 말해야겠습니다) 성격도 마음에 안 들고, 외모도 마음에 안 들고, 습관이나 버릇도 마음에 안 들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배우자이니 내가 더 사랑하고 내가 더 섬기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은 나의 순간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지어주셔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 겹 줄

결혼을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언약으로 받아들이는 부부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전도서 4장의 말씀입니다. 전도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과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대조하며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러한 대조는 12절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11-12a절) 

여러분, 한 사람이라면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패합니다. 망합니다. 실패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출중하면 성공하고, 반대로 무능하면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근면하고 성실해서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면 성공하는 것이요, 반대로 게으르고 나태하면 실패한다고 생각하지요.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학식을 갖춘 사람은 성공하고, 반대로 배우기를 싫어하여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으면 실패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인지 무능한 사람인지, 많은 배운 사람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인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게으른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딱 한 가지, “한 사람이면 패합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아무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다녀도, 이 세상의 모진 비바람을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사람이면 반드시 패합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한 사람 곁에 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모질게 닥쳐와도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을 맞서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한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 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에게 찾아오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함께 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내 곁에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나와 동일하게 지식도 부족하고 능력이나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곁에 있더라도 도움이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경험이 많고 인맥이 넓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는 전혀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요, 부부는 언약의 관계로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맞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 한 사람이라면 패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능히 맞설 수 있지요. 여기에 한 사람이 더해져서 세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서 4장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신랑 군)이 제 아무리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신랑 군) 한 사람이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부 양)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라는 분명한 믿음으로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풍랑을 맞서 이겨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언약 관계, 자녀가 더해진다면 이 가정은 세 겹 줄과 같이 든든하여 결코 끊어지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네요.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지 공부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아이든지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예체능에 탁월한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는 아이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녀로 말미암아 이 가정은 든든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우자로 믿고 언약의 관계를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성경의 이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함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신랑 군)에게 (신부 양)이 곁에 있으니 그저 행복하고, 
(신부 양)도 (신랑 군)이 곁에 있으니 날마다 행복하고, 
이들 부부에게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해집니다. 

그 조건은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남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남편이다, 
이 여자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아내다, 
이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내가 사랑할 우리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그리고 우리를 한 식구로 묶어 주셨으니 
나는 그저 사랑하고 섬긴다는 이 언약의 마음만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있기에 늘 행복하고, 자녀들이 태어날수록 더욱 행복한 믿음의 든든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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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4. 4. 20. 10:33

시편 57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1절)

 

본문 1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지금 시인의 처지를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재앙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재앙들이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이 재앙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재앙, 곧 많은 재앙이 그에게 닥쳐온 상황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본문 1절을 통해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는 점, 여전히 재앙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 마지막에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겠습니다라고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에 큰 재앙이 찾아오더라도 짧은 시간에 그 재앙이 지나간다면, 재앙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당황하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그 재앙을 인내하고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의 강도와 상관없이 그 재앙이 오래도록 지속된다면, 아니 하나의 재앙이 지나갔는데 또 다른 재앙이 찾아와서 재앙들이쉴 새 없이 나의 삶을 소용돌이치게 한다면, 그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이겨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겠습니까?

질병이라는 재앙과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아파도 너무 아파도 일시적으로 통증을 일으켰을 뿐 머지않아 완전히 치유되어 더 이상 그 질병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러한 아픔은 한두 번 참고 견딜 수 있지요. 그러나 어느 질병이 만성이 되어 우리의 일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힌다면, (조금 전 간증을 해주신 박영자 집사님처럼) 아무리 치료를 받고 아무리 약을 먹어도 완치되지 않는 질병에 걸린다면 그것은 참아 견디기가 너무 힘든 재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재앙이 꼭 그와 같습니다. 여러 재앙이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재앙이 언제 마칠지 도저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시인은 지금도 계속되는 재앙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그의 기도 내용에 집중하면서 본문 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하네요.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어디로 피합니까?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 여기에서 날개 그늘이라는 이미지는 마치 어머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 혹은 어미 새가 주변의 수많은 맹수로부터 아기 새를 품고 지켜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온갖 재앙이 계속되고 있지요, 하나의 재앙이 지나가면 또 다른 재앙이 찾아오니 과연 언제 그 모든 재앙이 끝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둥지에 알을 품고 있는 어미새와 같이, 어린 아기 새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어미 새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주님의 날개 그늘로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재앙이 지속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재앙이 끝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여러분을 떠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여러분이 지금 큰 재앙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더욱 여러분의 처지를 눈여겨보시며 그분의 넓은 품으로 여러분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때에,

흔히 나는 너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을 기억하라.

너희가 싸움에서 실패하고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너희가 애쓴 수고에 대한 보상이 가장 크고 값있게 베풀어질 때가 가까이 있음을 기억하라.

 

어느 것도 너희가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단지 현재의 순간적인 느낌에 따라 판단하거나,

스스로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지 말며,

마치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실망하거나 완전히 포기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3, 30, 9-10.

 

성도 여러분, 지금 큰 재앙 아래를 지나고 계십니까?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육신의 질병,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형편,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는 사람 사이의 관계, 수십년을 기도하였지만 여전히 믿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배우자와 가족들.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재앙들이 쉼 없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재앙 아리에 있는 바로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확신을 넘어 사명의 기도로

 

오늘 본문 시편 57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요. 보다 구체적으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서 다윗이 안전한 장소는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어디든지, 그리고 누구든지 다윗을 발견하면 사울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였고 이스라엘의 빼어난 군인들이 그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다윗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지요. 사울 왕의 통치 권한이 미치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다윗이 안전한 곳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숨어 있었고, 다윗은 그곳에서 자신을 여전히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곳이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자신이 굴 안에 숨어 있듯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다윗을 감싸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였겠지요. 다윗의 이 간절한 기도는 본문 2절에도 계속됩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2절)

 

다윗은 기도 가운데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어떠한 확신입니까? 본문 1절이 노래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님의 날개 그늘로 나를 지금도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지요. 그리고 본문 2절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지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다윗의 참으로 놀라운 점은 큰 재앙 아래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고 확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윗의 참으로 놀라운 점은 그 큰 고통 속에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명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5절)

 

지금 다윗은 굴 속에서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을 이렇게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다윗이 피해있는 굴을 벗어나면, 그곳은 온통 어둠의 세력이고 사울의 무자비한 칼날이 날뛰는 현장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사울의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다윗은 그 무서운 현실을 피해 초라하게 굴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비전을 더욱 불타오릅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사울의 불의가 가득해 보이지만,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뒤덮는 그날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사울의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시 세우지는 그 날을 위해 내가 다시 일어서겠다는 헌신입니다. 다윗의 비전은 본문 7절부터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지금도 도저히 멈추지 않는 재앙 아래에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재앙을 당하는 바로 지금도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여러분을 지켜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하여 다윗과 같이 여러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밤에도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나아가, 나의 질병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을 지라도, 나의 형편이 여전히 궁핍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비전을 선포하며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셔서, 여러분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깨끗이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높아지는 바로 그 일에 크게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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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4. 3. 28. 15:51

미국 국방부의 거대한 구축함이 항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3킬로미터 전방에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빛은 이 거대한 구축함의 항로 위에 정확히 놓여 있었지요. 구축함은 그 불빛을 향해 급히 신호를 보냈습니다. “너희가 우리 항로 위에 놓여 있으니 우로 20도 방향을 바꾸어 항해하라.” 그러자 그 불빛 쪽에서 곧바로 회신이 왔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으니, 너희가 좌로 20도 방향을 바꾸라.” 이에 구축함은 다시 신호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미 국방부의 명령을 받아 항해 중이다. 그리고 여기의 함장은 미해군 중장이다. 그러니 빨리 방향을 바꾸어 항해하라.” 그러자 불빛 쪽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저는 미 해군의 일등병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등대지기입니다.”여러분, 결국 누가 방향을 바꿔야 합니까? 등대입니까? 아니면 거대한 구축함입니까?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지요. 성도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르면, 그리하여 성경의 말씀과 나의 가치관이 서로 상충하면 누가 입장을 바꾸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다르면 당연히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등대지기에게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바꾸라고 명령하는 해군 중장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교정하기를 매우 싫어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리고 오른 본문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됩니다. 


청지기의 직분


자,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청지기라는 용어는 주로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단어이지요. 여러분,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란 주인을 대신해서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재산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관리하는 권한은 청지기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 청지기라는 지위와 그 권한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신약성경은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의 소유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또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다 주었지만 여전히 그 모든 소유권은 주인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 건강 ∙ 재물 ∙ 능력 ∙ 지위 이 모든 것은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많은 것이 주어져 있지만, 나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강조하는 청지기 의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청지기 의식의 반대말은 주인 의식입니다. 

흔히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 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대부분은 칭찬받고 박수 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교회는 회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한 이동원 목사님께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우려할 만한 모든 일들은 
청지기 의식에서 떠나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우리를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청지기에게는 사용권이 있지만 소유권은 없습니다. 주인이 허락한 시간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해야 합니다. 주인이 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의 것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 나의 것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교회, 우리의 것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저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아름답게 보전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청지기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청지기를 고용했습니다. 그에게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그가 능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는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지합니다. 해고를 통지받은 청지기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의 고민을 들어보십시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3절) 

깊은 고민에 빠졌던 청지기가 마침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청지기의 자리에 있을 때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은 50말로 고쳐주고,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의 행동이 본문 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 

주인이 청지기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칭찬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가 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성경을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본문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난해구절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비유가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 주인의 입장에 있다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보세요. 우리가 그 주인의 입장이라면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주인의 입장에서 이 청지기를 칭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해하기 힘들면 이해하기 힘들수록 여러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면 정확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여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우십니까? 신앙생활의 횟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인의 입장에서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주인이 청지기를 고용한 이유도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청지기로 고용하니 주인의 재산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해고를 통보했더니 빚을 탕감해 주면서 주인의 재산이 더 줄어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만 입혔으니 어떻게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청지기를 칭찬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인의 재산이 늘어났느냐 줄어들었느냐에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 인간이 좀 손해를 보게 한들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소유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강조점은 주인의 재산이 줄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청지기가 해고 통지를 받았고, 청지기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어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청지기는 주인이 아닙니다. 청지기로 있을 때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청지기의 직분만 빼앗으면,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남지 않지요.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재물이 많든 적든, 우리는 내 손에 있는 재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많든 적든 언젠가 내 손에 있던 모든 재물이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그때가 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때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 손에 있는 모든 재물이 사라지는 그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9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永住)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9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네,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마음껏 사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권한을 가지고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청지기로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재물을 주인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재물의 바른 용도는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의 바른 용도는 내일에 더 큰 부를 이루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의 바른 용도는 지금 나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재물의 바른 용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 내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기름과 포도주를 허비하고 여관비를 지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해야 하는 바른 재물의 사용법입니다. 그렇게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永住)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9절)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나는 성경말씀 중에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는 마음이 편안했는데,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나니 마음이 괴로워지는 분들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은 재물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비록 세상은 재물을 내일의 더 큰 부를 쌓기 위해 사용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궁핍한 사람들 ∙ 환란을 당한 사람들 ∙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친구와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영주할 처소”,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가정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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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4. 2. 25. 16:32

“팰럼시스트”(Palimpses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복기지”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양피지에 글씨를 써서 그 내용을 후대에 남겨주곤 했습니다. 글을 쓸 수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후대에 정보와 지혜를 남겨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 양피지가 그 시대에 얼마나 귀하였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그 양피지를 재활용하곤 했습니다. 한번 글씨를 쓰고 난 뒤에 사람들은 그 글씨를 최대한 깨끗하게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방식이지요. 여러분 중에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 노트를 재활용하였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노트에 연필로 글씨를 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노트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기존의 글씨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위에 또 다시 글씨를 쓰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글씨를 지워도 글씨의 자국은 남게 되거든요. 그 옛날 양피지에 쓴 글씨를 아무리 열심히 지워도 자국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피지를 몇차례 재활용하고 나면, 또렷한 글씨 아래에 글씨를 수차례 쓰고 지웠던 연한 자국이 남아 있게 되는 데, 그것을 팰럼시스트 곧 복기지라고 부릅니다. 

“팰럼시스트”라는 개념은 여러 분야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건축학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이 현대적 건물로 모두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간과 배치 안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흐릿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국가나 문화의 흔적을 현대 도시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건축이나 도시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도 팰럼시스트는 존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은 과거의 생각이나 과거의 관습을 버리고 현대적 문화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자세히 관찰하면 말끔하게 지워낼 수 없는 오랜 역사와 관습이 팰럼시스트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각에서 벗어나고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가봇에서 미스바로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팰럼시스트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 깊이 새겨진 팰럼시스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팰럼시스트 가운데 마지막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20)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죄성이라는 팰럼시스트가 깊이 새겨져 있어서 그것을 씻어내고 그것을 지워내기 너무도 힘겹고 버거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다 보니,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노예근성이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팰럼시스트가 새겨졌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현재]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직업 언약을 맺었고, [미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비전인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은 포기하고 애굽 사람을 섬기는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노예근성의 팰럼시스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보다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들, 곧 바알이나 아세라 등을 섬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주변 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민족의 고난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의 마음은 그때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잠시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시면, 그들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느냐는 듯이 우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 이번에는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숭배라는 뿌리깊은 죄성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침내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루에 죽고, 이 소식을 들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로 이가봇이라고 아이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습성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으니, 그러한 사사시대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마음에 우상숭배의 팰럼시스트가 제 아무리 뿌리 깊게 박혀 있더라도,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이가봇의 시대가 지속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부터 우상숭배의 뿌리깊은 죄성을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무엘을 마치 사사의 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의해 크게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사무엘이라는 사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쳐 주시고 그들에게 다시 평화를 주십니다. 이 동일한 사건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구약성경 사사기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었던 이야기들과 전혀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미스바의 회개를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사무엘이 다스리던 시대는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의 시대를 지나,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악습을 철저하게 끊어냅니다.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과 함께 그들의 우상을 데려오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상 숭배라는 깊은 죄성에 빠진 시대를 이가봇의 시대라 부른다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최소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은 더 이상 섬기지 않는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참으로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모든 죄악 된 습관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마침내 모두 제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죄악이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모든 죄악을 깨끗이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죄악이 가득 넘치고 있는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가봇의 시대를 종결하시고 미스바의 시대를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펼치실 것을 믿기에,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소망 가운데 기도해야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의 시대를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가봇의 시대가 미스바의 시대로 전환하는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미스바에서 일어난 회개의 사건이 그 이전의 사건과 다른 결과를 맺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 때문에 미스바에서의 회개 사건은 사사시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펼치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2절)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늘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성도 여러분, 20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 빼앗겼던 언약궤는 분명히 이스라엘 영토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셔서 선지자로 세워주셨고, 사무엘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라는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가봇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도,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어도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떻게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까? 비로소 온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의 변화입니다. 

자,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 그 두번째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자,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절)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모든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숭배라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바른 길로 그들의 삶을 돌이키라는 요구입니다. 곧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한 백성들이 사무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4절)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다시 한번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하여 미스바의 대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6절)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어서 하나님 앞에 쏟아 부었지요. 지금 그들의 마음이 꼭 그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자신들의 깨어진 마음 상한 마음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쏟는 행동에는 그들 자신의 마음도 이처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으로 깊이 통회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한 마음을 내어드리는 철저한 회개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가봇의 시대를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까? 언약궤가 이스라엘에 들어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위에 우상숭배를 비롯한 뿌리깊은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니 비로소 이가봇의 시대는 끝나는 것이요 미스바의 시대는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교회들이 어떻게 이가봇의 시간을 끝내고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 이가봇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요, 또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철저히 통회하는 진실한 회개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 그리고 나 안에 깊이 뿌리 박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순절이 마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 이가봇의 시대가 끝나고 미스바의 시대를 맞이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새로운 미스바의 시대를 활짝 펼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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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4. 2. 4. 14:47

올해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여, 치유하게 하소서”입니다. 이 표어에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주제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은 헨리 나우웬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의 주제가 바로 치유와 회복, 그리고 사명입니다. 이 책에서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의 정체성으로 책의 제목인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를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사역자는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온몸과 마음이 튼튼하여 상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온몸이 상처로 가득하여 그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헨리 나우웬이 서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줍니다. 그 고정관념이 무엇일까요? 지금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상처가 모두 치유되어야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나의 질병이 치유되어야,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이지요. 나는 여전히 몸이 병약하고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남아 있기에 아직은 다른 사람을 아픔을 보듬는 치유자가 될 수 없다는 자기변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몸이 여전히 병들어 아프다 하더라도, 아니 나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큰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참된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루의 사역,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안식일 하루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1) 

아마도 안식일의 오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에 깜짝 놀라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 회당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나오라” 명령하시니 그 즉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며 회당에 있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되지요. 

같은 날이었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회당에서 나와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을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그 집에도 병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자 그토록 심했던 열병이 그 즉시 나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던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고쳐주신 사람은 여자였지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사람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곧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던 시몬의 장모는 열병, 곧 몸에 발생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장소는 회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공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장소는 그의 개인 집으로 사적인 공간이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같은 날에 행하신 두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사건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남자든 여자든 구별 없이, 귀신이 들려 마음과 영혼에 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든 몸에 병이 들어 아파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당이라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공적 장소는 물론이요 안식일에도 회당을 찾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병상에 누워있는 개인의 가정집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치유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시고, 같은 날 시몬의 장모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해가 저물자, 가버나움에 있는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2절) 

이 구절에서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오네요. 어떤 질병이든 누구의 아픔이든 상관없이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본문 34절입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34a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치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와 아픔이 있어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지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만이 아니라, 주일이 되었음에도 몸이 너무도 아파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능력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어제의 치유와 오늘의 사명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곳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후 시몬의 집에 들어가서 또다시 병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는데,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병자를 치유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5절) 

예수님께서 새벽부터 기도하시네요.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부터 기도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7절)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 곧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는 그 “모든 사람”은 어제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치유를 경험했던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지금 또다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전해주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의 질병도 돌보아 달라는 요청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십니다. 본문 3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8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전도”라는 단어가 우리의 시선을 이끕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거나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라고 표현하지 전도하셨다고는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에서 전도라는 단어는 제자들 혹은 이후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활동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전도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전도의 여정에 초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시지요. “그곳에서도 전도하자”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무엇을 권하시죠?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도 전도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이었던 “어제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치유와 회복의 사건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전도하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명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언급한 헨리 나우웬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매우 인상적으로 비유로 묘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잠이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참된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군데씩 풀었다가 
다시 싸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한 번에 다 풀어놓고 “하나님 나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리를 치유해주셔서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치유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명자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나의 상처를 한 번에 한 곳만 풀어서 치료합니다. 그런데 아직 나의 몸에서 많은 상처가 남아있거든요. 그러나 어제 예수님께서 나의 상처 한 곳을 치료해 주었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의 남은 상처를 모두 싸매어 두는 사람이지요.

자신의 장모님이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과 모든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우리를 치유해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아 달하는 요청입니다. “어제”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또다시 들려달라는 요청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비유를 인용하면,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상처를 다 풀어놓고 그 모든 아픔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치유해 주셔야 주님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이미 치유를 경험하지 않았느냐고, 어제 이미 권위 있는 새 교훈을 듣지 않았느냐고, 언제까지 나에게는 더 큰 은혜와 더 큰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전도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외면하겠느냐고.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치유하는 손길을 경험하였으니 그 정도는 다시 싸매어두고 나와 함께 사명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정말 믿으시나요? 여러분은 모든 아픔과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질병과 아픔도 치유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남은 상처를 이제는 싸매고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십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괴롭지만, 어제의 은혜를 오늘도 요청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시고, 어제의 은혜를 받았으니 오늘은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사명을 위해 전진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는 시간이지요. 나아가 성만찬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늘의 풍성한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온갖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던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만찬에는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넘어, 이제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는 ‘전도’의 의미 곧 사명의 의미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나요? 성만찬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두가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내일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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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3. 12. 13. 20:56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은혜”가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도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까닥 없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여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반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니, 사랑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드린 이 질문은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우스 땅에 욥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성심성의껏 섬겼던 분이지요. 그런데 욥에 대해 사단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장 9절) 

사단의 논리는 맹백합니다. 욥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이유는 딱 한가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만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면, 사단의 표현 그대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외면하셔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의 복을 빼앗아 가셔도, 하나님께서 내 몸에서 건강의 복을 가져가시더라도 여러분은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시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범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조금만 나에게 주신 복을 가져 가시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욥과 같이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찬양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관점 - 사랑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참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남성이고 또 한 사람은 여성이었지요. 그들을 성별부터 달랐네요. 그런데 본문에서 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의인과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한 바리새인이” 그렇습니다. 이 남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로 바리새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남자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남자의 집에 들어온 여자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묘사합니까?  37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를 지은 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의 죄에 대해 옹호하려는 분들도 계신 듯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구조 때문에 이 여인이 죄를 범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단 한 마디로 변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백하게 말씀하지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이 여자가 많은 죄를 – 적은 죄가 아닙니다 –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cf. 47절). 이렇게 그 여자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자와 이 여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차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있지요. 하나님, 혹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섬기는 신적인 존재는 인간을 바라볼 때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은 하나님께 호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이것이 어느 사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교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의인이냐 죄인이냐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실까요? 오늘 본문 42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지 찾아보며 본문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누가 더 사랑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바리새인’으로 불리던 남자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이라 불렸던 사람보다 훨씬 의롭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은 죄를 지은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남성에게 주어져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리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본문 44절부터 보십시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44a절)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4b절)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당연히 바리새인 남자가 아니라 이 여자입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5절)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의롭게 사는 남자가 아니라, 많은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러나 그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56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남자와 죄인이라 불리던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이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변하지 않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건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새벽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경건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기도 하고, 언제나 바르고 정직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경건하게 가꾸어가려는 노력은 너무도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평가함에 있어 ‘누가 더 의로운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고 ‘누가 더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욥을 고소했던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까닭없이 이유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비록 기도 응답이 더딜지라도, 바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의 복과 재물의 복과 자녀의 복을 잠시 가져가실 지라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욥이 그러했고, 신약시대에 본문이 묘사하는 죄 지은 여자가 그러했지요.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가 한결같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죄용서의 관계 

죄를 지은 여자는 비록 바리새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여자를 보시며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선포하시네요. 바로 여기에 사랑과 죄 용서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죄용서를 누리는 깊이는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시잖아요. 

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약 오천 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약 오백만원 정도를 빌려주었지요. 그런데 오백만원을 빌려쓴 사람이든 오천만원을 빌려 쓴 사람이든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못낼 형편입니다. 그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천만원을 빌린 사람에게 그 오천만원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오백만원을 빌린 사람에게도 그 오백만원을 다 탕감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시름을 덜겠느냐고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명백합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 은혜가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저 적당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태산보다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신 죄 용서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본문의 여인처럼 뜨겁게 사랑합니다. 본문 4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47a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7b절) 

자,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적당히, 그저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도로만 적당히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왜 죄인이었던 그 여자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대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많이 지었던 그 여자는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여인의 마음에는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였기 때문이지요.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희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의 건강을 빼앗아가셔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녀의 복과 재물을 복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이 제 아무리 강력할 지라도 우리는 사단의 모든 공격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까닭 없이, 심지어 우리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 11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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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3. 12. 10. 16:26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여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요.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은 낙관과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는 낙관을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0”에 가까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그 누구도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바로 이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낙관적 전망이 어려운 환경 (1-8절)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오늘 본문은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한 현실을 묘사합니다. 구약성경에 조금만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와 룻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와 룻기가 그려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두운 사사시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던 혼돈의 시대였지요. 사무엘상이 시작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시대의 깊은 어두움이 계속되는 사사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이 그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3절) 

이 사람, 곧 엘가나가 매년 절기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던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엘가나의 믿음은 순수하고 아름답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올라가는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매우 악한 제사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장 12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실로에 올라가면 무엇합니까? 그곳에서 버젓이 제사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였으니 무슨 내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가능하겠어요? 

홉니와 비느하스만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감각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지요.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3절)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는 엘리는 그가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4장 18b절) 행실이 매우 나쁜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비대하여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실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시대이니, 여러분 과연 어디에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묘사하는 한나 개인의 처지를 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불가능합니다. 한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임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살았던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있고 없고는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 하나가 장수라면 또 하나는 바로 많은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유무는 당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요소였지요. 그래서 본문은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지만 그것이 한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지요.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여인 한나에게는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합니다. 한나에게 내일에 대한 낙관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6a절)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본문 6절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막으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도 그리고 한나라는 한 여인의 인생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 곧 낙관이 불가능합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참 많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분들의 걱정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자세히 관찰해 볼 때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참 많이 들려옵니다. 코로나 이후에 급격히 감소한 예배 출석인원이나 교회의 재정이나, 고령화에 따른 교회학교의 붕괴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지금의 한국 교회 안에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낙관의 이유가 조금이라도 내재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모든 긍정적인 낙관을 차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전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소망과 기쁨 (9-18절) 

모든 낙관이 사라지고 절망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소망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본문 10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무엇하지요?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여인과 같이 자녀를 출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옆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해 줍니다.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술에 취한 것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한나가 대화를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대화를 아무리 많이 읽어보아도 한나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엘리 제사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힌트가 하나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한나의 기도는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혼자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 엘리는 한나가 어떠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하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그다음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한나의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한나의 대답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볼까요? 한나가 “아멘”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축복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아멘”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마다 평강이 임하시고,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이 있으시든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가 사실 여러분이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기도제목을 알려주신 분들의 기도 제목은 알지만, 더 많은 성도님들의 가정과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은 제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엘리의 축복에 대해 한나가 “아멘”으로 반응했어요. 그러자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18절 말씀을 우리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대해 “아멘”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근심빛이 사라졌어요. 아직 아이를 잉태한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를 낳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믿고 “아멘”으로 반응하자 그 마음에 소망이 생긴거에요.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잘 먹습니다. 평안히 잠듭니다.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한나의 삶은 그 이전 같았을까요? 브닌나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한나를 괴롭혔겠지요.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일어나기 전에는 브닌나의 괴롭힘에 마음이 요동하고 분노가 치밀어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한나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고 나니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더 이상 한나의 마음이 요동치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한나의 품에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사무엘이라는 아들이 아닙니다. 
한나의 삶을 천국으로 바꾼 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소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다시 말씀드려 볼까요?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주어지는 재물도 성공도 기도의 응답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을 천국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삶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소망을 품으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손 안에 움켜잡은 것이 적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분명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은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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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