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5. 3. 21. 09:57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가 진정한 용기에 대해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요.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두려움을 마주하지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두려운 마음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면, 그리하여 그때의 경험으로부터 일종의 트라우마가 형성되어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더 큰 두려움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제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두려운 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처음부터 제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신앙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두려운 마음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두려움을 정복하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항해하던 중에 큰 풍랑을 맞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만난 거대한 풍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장소와 위치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시면, 배가 이미 육지를 수 리나 떠났을 때 바람이 거세지고 물결이 일어났다고 서술하지요. 제자들이 거대한 풍랑을 맞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육지에서 수리를 떠난 곳이지요. 그런데 성경책 중에는 이 대목을 “바다 한 가운데”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거대한 풍랑을 맞이한 지점은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난 장소, 곧 바다의 한 가운데라는 의미입니다.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풍랑을 맞이했다면 쉽게 돌아올 수라도 있었겠지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풍랑을 맞이하면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에게 닥친 그 밤의 풍랑은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습니까? 바다의 한 가운데에서 만납니다. 그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태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풍랑의 특징으로 풍랑을 맞이한 장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그 풍랑을 맞이한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해가 저물어 갈 때, 곧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저녁식사로 음식을 나누어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루가 끝나가는 밤 시간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수 리를 항해한 뒤, 곧 한 밤에 거대한 풍랑을 맞이했겠지요. 그러면 이 풍랑이 언제까지 이어집니까? 오늘 본문 2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여기에 등장하는 밤사경은 지금의 시간으로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가 됩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해가 저무는 밤시간부터 이제 곧 해가 떠오르는 새벽까지 하룻밤을 꼬박 거대한 풍랑과 맞서 싸우느라 기진맥진했다는 뜻이 되겠네요.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어렵고 다시 돌아오기에도 어려운 바다의 한 가운데, 그것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그 시간에 제자들은 고난의 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날 밤 제자들이 맞이한 거대한 풍랑에 대해 가장 의아한 점은 제자들이 왜 그 밤에 바다 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는가라는 점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결이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기상이 악화하여 거센 풍랑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한데, 도대체 제자들은 그 밤에 왜 바다 한 가운데로 항해를 시작했을까요? 그 대답이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22절에 등장하거든요.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2절)

누가 그 밤에 제자들의 항해를 재촉하였습니까? 예수님이 재촉하셨네요. 여러분, 제자들은 그 밤에 예수님 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 직후의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은 풍성하게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신데, 제자들의 입장에서 왜 예수님 곁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예수님을 남겨둔 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라고 재촉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배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만난 풍랑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했나요?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죄를 범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풍랑을 당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러한 요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을 접어두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당하는 인생의 풍랑이요, 고난의 밤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매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삶이 늘 형통하기만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면 형통의 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생의 풍랑이나 고난의 밤은 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인생의 풍랑이나 고난의 밤을 다 비켜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의 가르침이 그와 다르니 저로서는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해를 시작했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인생의 가장 힘겨운 밤을 맞이하고 고난의 풍랑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의 밤도 인생의 풍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신앙이 있든 신앙이 없든 상관 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풍랑과 고난의 밤을 맞이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마음에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선사하는데, 인생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함몰되지 않고 그 모든 역경을 마침내 이겨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후의 목적지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거대한 풍랑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인생이 크게 흔들리며 요동치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더하여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으로 여러분의 삶에 찾아온 거대한 풍랑을 모두 이겨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큰 풍랑을 맞아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큰 풍랑을 맞아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으니, 이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실 것으로 예상이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위기로부터 구해줄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풍랑을 잔잔하게 만들어 주시거나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즉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즉시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네요. 지금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밤이 새도록 풍랑을 맞아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난 즉시 풍랑을 잔잔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보다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네요.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워 주시지는 않고, 가장 먼저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제자들이 만난 거대한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지도 그리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요? 거대한 풍랑으로 밤이 새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다고요?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실 듯한데요.

여러분, 조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지난밤이 새도록 제자들 앞에는 거대한 풍랑이 있었지요. 그러면 그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좌초했나요? 제자들이 바다에 빠졌나요? 그 결과 제자들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었나요? 아닙니다. 밤이 새도록 거대한 풍랑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사실 제자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난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고생했지요. 바닷물이 일어나서 온몸이 땀과 바닷물로 흠뻑 젖었겠지요. 이렇게 고생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무서운 풍랑이 몰아치면서 하룻밤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실제로 제자들 중에는 다친 사람도 없고 바닷물에 빠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으세요? 어떻게 그 거대한 풍랑이 제자들이 탄 배를 덮치고 있는데, 배가 좌초되지 않고 제자들이 바다에 빠지지도 않고 다치거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저는 그 비밀에 대한 대답이 본문 23절에 담겨 있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재촉하셨습니다. 다른 무리들도 모두 흩어보내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 밤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네요. 그러면 제자들을 풍랑이 이는 바다로 보내신 예수님은 그 밤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겠지요. 오늘 밤 그들에게 고난의 밤이 찾아올 것인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셨겠지요. 그 결과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거대한 풍랑을 맞아야 했지만, 그 어떠한 풍랑도 그 어떠한 물결도 제자들을 삼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셨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니, 여러분의 삶에 아무리 어두운 고난의 밤과 인생의 풍랑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삶은 안전합니다.  

제가 어느 성도님의 가정을 심방하는데,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으로 “나의 등 뒤에서”라는 곡을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 찬양을 선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큰 아픔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제 등 뒤에 계신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 등 뒤에서 저를 붙잡고 계셨더라고요.” 네, 맞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인생의 풍랑을 맞이한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생을 풍랑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도 안전하를 나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제 아무리 거대한 인생의 풍랑이 우리를 덮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니, 인생의 풍랑이 여러분의 삶을 결코 침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의 문제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떠한 질병도 여러분을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내기를 바랍니다. 
재정의 문제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혀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왜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에 몰려드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풍랑을 이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과정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바다 위를 걸어가는 사건이지요.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나에게 오라” 초청하셨고, 예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걸으며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한 번 물리쳤다고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본문 30절은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뼈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0절) 

여러분, 이 장면도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위험해 보이지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람이 빠져가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러나 사실은 결코 위험한 장면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31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시거든요. 베드로가 잠시 물에 빠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의 생명을 결코 해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다 건져 주신다고요. 그러므로 베드로의 안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장면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31절을 계속 보세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의 마음에 또다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무엇으로 이어집니까? “왜 의심하였느냐?” 그것은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가장 귀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고 마네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이 두려워하는 현실은 사실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정말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말로 우리 인생에 소망이 없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지만, 반대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진정한 용기는 우리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까? 인생의 풍랑을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까? 고난의 밤을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인가요? 아닙니다. 누가 어떠한 풍랑을 맞았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난의 밤이 찾아오고 인생의 풍랑이 휘몰아쳐오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에게도 두려워할만한 인생의 풍랑은 언제든 몰려오지요.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찾아오는 두려움을 물리치지 못하여 의심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면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더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을 힘입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셔서, 우리 인생의 모든 풍랑과 고난의 밤을 넉넉히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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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3. 2. 14:51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이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쭉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습니다.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주차할 때까지 30분 이상을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번이라도 올라가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높은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28-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이전에 산 아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날 산 위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9절) 

이 구절에서 “용모”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와 같이” 빛났다고 했으니, 이것은 비유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그저 “해와같이”라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29절을 계속보시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네요. 마가복음에는 이 장면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는 장면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날에 보았던 예수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로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 특별한 날에 산 위에서 ‘변형’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의 눈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잠시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위대한 영광이 잠시 잠깐 제자들의 눈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친밀하신 분이시지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가정 집에도 들어가셔서 그 가정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각 가정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굶주리거나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어 빈손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풍성과 충만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게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태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전히 가득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꿇어 경배해야 하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별세 (30-31절) 

제자들이 산 위에 올라가니,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 광채가 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겹쳐서 일어납니다. 곧,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흐름, 곧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1절)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네요.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 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뒤 다시 한번 자신의 수난과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체없이 나아가시는 것이 계속되는 누가복음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출발점에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자신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변화산의 사건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이러한 흐름은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 곧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 ‘산상’이지요 – 용모가 변화된 사건 – ‘변모’입니다 –, 그리하여 산상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오는 수요일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게 되지요. 이러한 교회력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되신 사건 후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목상하며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겉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로 지금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지만, 나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분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시니, 다시금 힘을 내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그 고난의 끝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그의 말을 들으라 (32-3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네, 그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3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을 금방 떠나고 말았네요.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아 베드로는 아쉬웠던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을 모시고, 모세를 모시고, 엘리야를 모시자고 제안하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33절 뒷부분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영광의 장면이 짧게 끝나 아쉬워하는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5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목격하였으니 – 그 장면을 직접 보았으니 –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딱 한 번만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 곁에 늘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주시잖아요. 그러므로 변화산의 그 위대한 장면을 한번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더 크고 위대한 장면을 보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의 진면목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좁은 길을 타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그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너무도 멋진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너무도 아름다웠던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유학 생활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경험 이후 지금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빛나던 무지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다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분명히 있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비록 여러분의 삶에 인생의 사순절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상변모주일은 일년에 단 한주로 너무도 짧은 반면, 우리 인생의 사순절은 일년에 40일이나 되어 너무도 길고 모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있었던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전 생애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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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5. 2. 9. 16:34

기독교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르침, 곧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주신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지요. 나는 죄인인데, 나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는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세리를 부르신 예수님

우리는 지난 주에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7절)

예수님께서 이번에 제자로 부르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레위라는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름이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이름을 마태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는 우리가 흔히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본문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셨지요. 이번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어부들이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장면과 세리가 세관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느낀 감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칭찬받을만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직을 당하고 지탄을 받을만한 장면이었지요. 왜 그렇습니까? 당시는 로마 제국이 유대인을 지배하던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라는 직업은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직업이었으니,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요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배신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은 세리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맡기면서 각 지역마다 세금으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총액만 정해두었습니다. 세리들은 현대적 개념의 월급과 같은 수입이 없었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양도받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둬 로마제국이 정해둔 금액만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가 자신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세금을 과도하게 걷거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온갖 불의를 행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그 시대 가장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두 개의 직업군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창녀’였다면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당연히 경건한 유대인이라 자청하던 사람들은 세리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이 회당,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지금 세관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남성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죄악을 바로 지금 행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이라고요? 죄인을 위한 복음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세관에 있던 레위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그 죄인을 자신의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일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8절)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으니, 그 세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걷은 세금, 돈이 가득했겠지요. 여러분, 그 시대는 지금처럼 세금을 계좌로 송금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실물 화폐로 모든 거래가 진행되던 시대였지요. 그러니 세금을 걷으면 다 실물 화폐로 거두었을 것이고, 그 모든 세금을 당연히 세관에 보관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한평생 물고기를 따라다녔던 어부가 두 배를 가득 채운 만선의 축복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한평생 돈을 추구했던 세리, 자신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방하였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까지도 다 참아내며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세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 모든 돈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본문 28절의 말씀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일어나”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지요. 여전히 레위는 신앙도 민족도 다 버리고 오직 돈만 쫓아가는 ‘죄의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으니, 이제 그 죄악 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돈만 좇았던 사람이, 이제는 돈을 등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악에 물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회개의 사건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난 레위의 삶에 이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됩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29절) 

레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여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잔치를 베풀고 있네요. 오직 돈을 좇아 살아갔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며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만 당하던 레위의 집에 먼저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면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천국의 잔치를 맛보며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불러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실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돈만 쫓아가던 세리도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됩니다. 하물며, 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에 앉아계신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지 못하시겠냐고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회개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말씀만 따라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셔서, 예수님을 모시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으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세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회개하고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0절) 

이 장면에서 누가 비방합니까?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네요.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 곧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향해 비방합니까? “그 제자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네요. 어떻게 비방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서 어떻게 세리 –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라고 말씀드렸지요 –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교제하느냐고 비방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사람들의 출신, 특별히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었던 레위의 출신을 몰라서 이렇게 비방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다 알지요. 다 알면서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너희가 어떻게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느냐’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비아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아, 맞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너희가 원래 죄인이었지. 너희가 원래 세리였지. 너희가 원래 제자가 될 자격도 없었던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지. 그러니 너희들이 여전히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구나.’ 뭐~ 그런 식의 조롱이었어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의 마음에 뿌리 깊게 박힌 마음이 무엇입니까? 자만심이지요, 자만심. 너희 같은 죄인들이 무슨 제자냐? 너희 같은 출신들이 무슨 제자가 될 수 있느냐? 적어도 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한평생 예루살렘에서 율법의 법도를 정통으로 배운 사람이나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철저한 교만의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 설교의 제목을 떠올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이지요.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너희들은 다 죄인이지만, 나야말로 의인이라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머물만한 조그마한 자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는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저 구별된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들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제자들이 자신을 향한 비방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신하여 대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1절) 

예수님께서 먼저 비유로 대답하시네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시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의하실 것이 하나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의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의 관점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다 병들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아니, 다 죽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

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과 심판의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두 가지고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먼저, 자신이 신앙의 관점에서 심하게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그 서기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해요. 온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해요. 특별히 그들은 교만의 죄, 위선의 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조금 안다고 율법을 조금 지켰다고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자신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인 척,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의인인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중한 질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확신하니, 그들에게 최고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반면, 예수님은 또 하나의 분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 그리하여 자신이 영적으로 중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지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시라고 예수님께 무릎으로 기도했던 베드로,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스스로도 혐오하였던 세리 마태와 같은 이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결론을 내리십니다. 본문 32절이지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2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곧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생의 은혜.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은혜, 과연 누가 받아 누리게 됩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 못할 죄인도 없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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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5. 2. 8. 10:24

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데이빗 왓슨의 논리를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만일 어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당연히 그 교회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교회는 출석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여있지만, 그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심지어 그 교회 성도들조차 부끄러워 다른 사람을 교회로 초대하거나 인도하지 않으니,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쇠퇴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박해를 받아 교회가 쇠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큰 고난을 받아 쇠퇴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회, 곧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때로 박해를 받기도 하고, 때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문제지 결국은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교회에 재정이 넘쳐나고, 심지어 세상의 권력까지 교회가 틀어쥐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이 사라진 교회는 시간이 문제지 결국 쇠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길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미움도, 다툼도, 시기도, 갈등도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와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올해 우리가 선포했던 표어와 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Move One. 예수님의 부르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1절).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곧 갈릴리 호숫가에 계실 때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2절)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셨네요. 이 배는 지난 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출항했다가 돌아온 배였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이 배에서 내렸고 지난밤에 사용한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고 있었던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장면은 당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어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부라는 직업은 몇 세대를 이어 가업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 외에도 갈릴리 해변에는 많은 어부들이 살고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보신 그 장면 – 곧 본문 2절이 묘사하는 어부들의 모습은 – 당시에 누구라도 목격할 수 있는 흔한 장면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 2절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적합한 매우 중요한 장점 하나가 드러난다고 설명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장점이란 ‘성실함’이지요. 네, 맞습니다. 베드로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지난 밤에도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소득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그물을 씻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분명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성실하여도,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더라도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라도 그들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의 형편에 대해 한 가지를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이미 많은 스승들, 많은 랍비들이 있었고 그들도 자신을 따르는 여러 제자들을 두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랍비들을 따라 그들의 제자가 되었던 학생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열심히 배웠던 사람들, 그리하여 이름난 선생님이나 랍비들이 주로 살았던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이지요. 한 마디로, 예루살렘에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웠던 사람들이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시몬 베드로와 같이 저 북쪽의 변방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이들을 친히 찾아가 제자로 불러주신다는 사실이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셨던 장면 곧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거나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모습은 당시 갈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그려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 – 곧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 – 은 당시 갈릴리 해변은 물론이고 유대 나라 전체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당시 스승으로 불리던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제자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들이 아니 모여 있는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의 어부들을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아주고 계시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찾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께서 지금도 아무런 조건도 없는 우리를 주님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을 축복하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Move Two. 말씀에 대한 순종

 

예수님께서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데, 가장 먼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3절)

 

예수님 주변에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배의 갑판에 오르셔서 – 마치 지금 제가 강대상 위에 있고 여러분들이 회중석에 앉아계신 것처럼 – 모든 사람들을 한 눈에 바라보며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배가 누구의 배입니까? 3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당연히 그 자리에 시몬 베드로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베드로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부르실 때 우리를 가장 먼저 이끄시는 장소가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앞으로 수없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던 그 장소는 기적을 체험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먼저 여러분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리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은 동일하고,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동일할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더라도.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면, 여러분을 특별히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사로잡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은 “말씀을 마치시고”라고 되어 있네요. 그리고 이제 시몬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더 깊은 장소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지요.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갈릴리 호수의 특정한 장소, 곧 수심이 깊은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더욱 깊은 뜻도 담겨 있으니, 시몬 베드로에게 더 깊은 신앙의 세계, 더 깊은 믿음의 세계, 더 깊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이지요.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네, 사실입니다. 그날 밤 시몬만이 아닙니다. 시몬과 함께 동업하였던 야고보와 요한도 그날만큼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물고기를 전혀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에게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5절을 계속 보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지난 밤, 밤을 새우며 그물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거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현실적인 조건이 충분하지요. 그런데 어디 그뿐인가요?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목수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어부인 베드로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이번에도 실패하면 조금 전에 씻어서 정리해두었던 그물을 다시 손질해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현실적인 조건은 너무너무 많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제자는 어떠한 사람이라고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이 한 가지를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셔야 해요.

 

 

Move Three. 두 가지 기적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니”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절 말씀도 보십시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귿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배 두 척이 모두 만선이 되는 큰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보면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깜짝 놀랐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말씀하시네요. 본문 10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0절)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역자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만큼 놀라웠던 것이지요. 그렇게 날라고 무서워하던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 베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 바로 그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진짜 기적은 이제부터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베드로에게 배 두척이 모두 물고기로 가득하는 만선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지요. 그런데 진정한 기적은 이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1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1절)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배를 육지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지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버려두었다고 했으니, 조금 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두 배를 가득 채웠던 물고기도 포함되었을까요? 네, 당연히 포함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애에 처음으로 경험해 본 배 두 척에 물고기가 가득 차는 만선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 얼마나 귀한 지 그 모든 물고기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물고기가 배 두 척에 가득하게 집은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물고기를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기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가 행한 기적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를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재물,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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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1. 26. 17:07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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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12. 14:46

여러분, 여기에 잘 익은 사과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과를 잘라보면 그 안에 있는 씨앗이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과 하나에 담겨 있는 씨앗의 숫자를 충분히 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사과 씨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 안에 몇 개의 사과가 있는지 셀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 당장은 씨앗 안에 사과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씨앗을 쪼개고 살펴도 그 안에서 사과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씨앗 하나가 땅에 심겼을 때 몇 개의 사과가 열리게 될지, 곧 씨앗 안에 담겨있는 사과의 숫자는 아무도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꼭 이와 같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요, 그런데 자라고 나면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천국이 꼭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매우 작게 시작합니다. 지금 당장은 사람들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어 성장하고 자라나게 됩니다. 마침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고, 새들의 쉼터와 안식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랍니다. 확장합니다. 성장합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해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겨자씨와 같이 매우 작게 자리를 잡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나타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 주님과 살아가는 삶이 하루하루 이어지기만 한다면, 씨앗 하나에 무수히 많은 사과 열매가 담겨 있는 것처럼, 겨자씨 한 알이 마침내 거대한 나무가 되어 새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는 것처럼. 마침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번성하여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시작되는 생수

우리는 송구영신예배와 지난 주일 예배를 통해 에스겔 37장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두 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었지요.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장면이었습니다. 또한 남 유다의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의 막대가 에스겔 선지자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지난주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 두 가지 장면 이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위대한 비전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환상 가운데 에스겔은 성전의 각 부분이 아름답게 재건된 것을 보게 됩니다. 성전 안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제사가 다시 시작되는 장면을 보게 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하여 위대한 비전을 선포하십니다. 곧,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장면이지요. 본문 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1절)

성전의 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그 문지방 밑에서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은혜의 샘물, 생수의 강물(Life-giving River)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1절의 뒷부분을 계속 보시면, 그 샘물이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립니다.” 다시 말해, 은혜의 샘물이 성전으로부터 솟아나는데, 그 샘물이 시작되는 지점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을 재건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사람들이 그 안에서 다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전이 따로 있습니다. 성전 제단으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와 –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 성도들의 삶이 살아나고, 황폐한 땅이 되살아나며, 모든 생물이 약동하는 생명의 역사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교회는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고 자랑합니다. 아름다운 예배당 건축에 대해 상을 주는 단체도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그 운영 시스템이 탁월하여 효율적이고 투명한 교회 운영을 자랑합니다.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교회를 모범적인 교회로 알고 굳이 찾아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교회는 다양한 성경공부와 양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필요합니다. 분명히 교회에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향해 품으시는 가장 궁극적인 비전은 그 제단으로부터 은혜의 샘물이 흘러나와서 성도들의 심령을 적시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천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괴롭고 아프고 근심에 쌓여 있던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때마다,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의 심령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전 제단에서 시작되는 은혜의 물줄기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가정들마다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목천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전입니다. 


점차 확장되는 생수의 강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예루살렘 성전은 그 제단으로부터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제단으로부터 나온 물에 대해 본문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한 가지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2절)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의 구조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본문 2절은 한번 읽어서 쉽게 머릿속에 그려는 구절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목표가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에 단지 본문 2절의 의미만 최대한 간단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절 중간을 보시면 “동쪽을 향한 바깥 문”이 나오지요. 이 문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성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스겔이 서 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1절 말씀이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려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물은 자연스럽게 이 문, 곧 2절에 나오는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다다르겠죠. 문제는 이 문이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을 기준으로 성전이 있는 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 문의 반대쪽인 에스겔이 있는 곳에는 물이 넘어오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본즉” 에스겔이 그 닫힌 문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합니까? “물이 그 오른쪽 – 그 닫혀 있는 문의 오른쪽을 말합니다. – 그 오른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스며 나오더라” 이 장면이 상상이 되시나요? 문이 열려 있다면 물줄기가 시원하게 나왔을 거예요. 그러나 문이 닫혀 있으니 물줄기가 막혔어요. 그러나 그 문에 물이 스며들어서 그 문을 통과하여 생수가 조금씩 스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며 나오더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물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의성어입니다. 우리말의 의성어 가운데 그 의미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똑똑똑’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어놓은 것처럼 콸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가 아주 조금만 열려서 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장면이지요. 우리말 성경의 번역처럼 물이 스며 나온다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지요. 그렇게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샘물이 똑똑 떨어지는 정도였는데, 그저 스며 나오는 정도였는데, 그 조그마한 물방울과 물줄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매우 강력한 강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3절)

본문에 등장하는 천 척을 길이를 나타내는 현대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500m가 됩니다. 처음에는 똑똑 떨어지는 물이었는데, 약 500m를 지나고 나니 발목에 차는 물이 됩니다. 4절도 보십시오. 또 다시 500m를 흐르니 이번에는 무릎오 오르는 물이 되고, 계속해서 허리에 오르는 물이 되네요.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본문 5절을 보시면 또 다시 500m를 지나자 이번에는 건너지 못할 거대한 강줄기가 됩니다. 그 시작은 무엇입니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었습니다. 단지 스며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라고 성장하고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주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혼을 적시는 충만한 은혜를 예비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제단으로부터 날마다 생명의 생수가 흐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의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그 은혜의 물줄기가 성전의 문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까지 흘러가는 것은 왜 이렇게 힘겨운지요. 예배 시간에는 은혜를 받은 듯한데,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막상 예배당의 문을 열고 나가 삶의 현장으로 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금방 사라지는 듯한 경험도 하게 되지요. 성전제단에는 분명 풍성한 은혜의 물줄기가 가득한데, 성전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저 스며나오는 은혜,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은혜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아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기만 해도 사실은 충분합니다. 성전의 문에서 스며나오는 은혜, 똑똑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이라도 오늘 나의 마음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안에는 생명이 있어 자라나게 됩니다. 성장하게 됩니다. 마침내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뒤덮는 위대한 성령의 역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대한 강물이 되어 사람이 수영을 할만한 물이 되고, 스며나오던 물이 사람이 건널 수 없는 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워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은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하나님께서 더욱 놀라운 비전을 이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본문 9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9절)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흘러들어가는 곳마다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본문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모든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이 강물이 무엇을 살아나게 합니까?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강물보다 훨씬 더 큰 바닷물을 되살려냅니다. 처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똑똑똑 떨어질 때는 이 작은 은혜가 저 거대한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과 씨앗 하나에 도저히 셀 수 없는 무수한 사과 열매가 담겨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 한 알이지만 마침내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풍성해져 마침내 이 거대한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마지막 12절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2절)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랍니다. 그 잎이 시들지 않습니다. 열매가 끊이지 않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구절이 있지요. 네,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날마다,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노래하는 시편이지요. 시편 1편이 노래하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편 1편 3절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늘 묵상하는 사람, 그리하여 매일 크고 풍성한 은혜가 아니더라도 그 심령에 말씀의 은혜가 똑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생수의 강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 잎사귀는 마르지 않습니다. 시절을 따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인생의 열매가 풍성합니다. 

2025년을 시작하며, 우리는 함께 모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시작으로, 1월 1일 저녁부터 수요기도회를 하였지요. 1월 2일과 3일에는 총동원 새벽기도회를 했고요, 지난 한주동안 신년특별저녁기도회에서 열심히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2025년을 기도하며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2025년 새해는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날들 속에서 우리의 삶에 크고 풍성한 은혜가 매일같이 부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날마다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똑똑똑 떨어지는, 스며나오는 듯한 은혜의 생물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 그리고 매일 있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작지만 생명력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잠깐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마다 똑똑똑 떨어지는 은혜의 샘물이 여러분의 심령에 끊이지 않고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마침내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어 수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로 여러분의 삶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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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6. 17:06

올해 우리의 표어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주제 성구는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하는 에스겔 37장 14절의 말씀이지요. 우리는 지난 송구영신예배를 통해 에스겔 37장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어떠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가운데 깊은 골짜기로 이끌어가셨는데, 그 안에는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마른 뼈들이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뼈가 서로 연결되고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니 마른 뼈가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올해 주제 성구인 에스겔 37장 14절 말씀이 선포됩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곧,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 바로 이것이 올해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영적 각성이요 영적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올해 2025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영적 부흥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고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 우리 각사람의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나아가 우리의 가정마다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가 살아나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바로 그 현장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의 계속되는 말씀, 곧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대한 부흥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시네요.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16a절)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두 개의 막대기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막대기에는 어떤 글씨를 쓰라고 말씀하십니까?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다’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남쪽의 유대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은 남 유다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은 남 유다와 그 안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또 다른 막대기에도 써야 하는 글씨를 알려주시지요? 본문 16절을 뒷부분을 보십시오.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6절)

하나의 막대기는 남 유다를 의미하는 글씨를 써야 합니다. 다른 하나에는 어떤 글씨를 써야 하지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야 합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의 막대기”는 북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를 보면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는 표현은 북 이스라엘과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막대기 두 개를 가져와서 그 하나에는 북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이라고 쓰고, 또 하나의 막대기에는 남 유다와 그 백성들이라고 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본문 17절로 이어집니다. 본문 17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7절)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남 유다를 의미하는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막대기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은 매우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 갈등의 씨앗은 사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안에 여러 차례 내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갈등하였던 결정적인 계기는 사울 왕의 통치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북쪽 지파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유다 출신으로 남쪽 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요. 다윗의 세력을 두려워하였던 사울은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화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서로 갈등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함께 목숨을 잃어버렸을 때 겉으로 표출되고 맙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남쪽의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북쪽의 열 개 지파는 사울의 또 다른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노력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남과 북의 갈등과 감정은 조금도 치유되지 못하여 솔로몬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뉜 뒤 지금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역사를 짧게나마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나라가 가장 부강하고 가장 강성하여 번성하였던 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던 기간입니까? 아니면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되었던 때입니까?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렸던 시기, 곧 이스라엘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었던 바로 그 시대가 하나님의 축복이 온 이스라엘에 가득하여가장 강성하고 가장 번영하는 국가를 이루었던 시기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에는, 잠시 잠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축복을 주기도 하셨지만,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마치 깨진 그릇에 담긴 물이 쉽게 새어나가는 것처럼, 금방 메마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치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하여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가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됨이지요. 온 이스라엘이 지금까지의 갈등과 분열을 다 치유하고 하나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이 어디 하나 새어 나가지 않고 그들의 삶에 가득 차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넘치는 은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른 뼈가 살아가는 듯한 놀라운 부흥을 약속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대전제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하나 됨이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새해에 여러분의 가정에 놀라운 하늘의 은총을 부어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이 서로 마음이 상하고 깨지고 나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셔도 그 모든 은혜가 깨어진 그릇처럼 다 새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2025년 새해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나뉘고 다툰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은혜가 금방 다 새어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고 넘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축복을 부어주셔도 그 은혜가 다 세어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쳐나기를 원하신다면, 한 해를 시작하는 바로 지금 가장 먼저 여러분의 가정이 서로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들 사이의 관계가 단단하게 이어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대로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겠지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2025년 새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한번 여쭈어볼까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2025년 새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혹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새어나가는 곳이 없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오래된 갈등이니 지금 이대로가 편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사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갈등도 사사시대는 물론이요 사울의 시대,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던 분열 왕국의 시대를 다 지날 때까지 이스라엘의 남과 북의 갈등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갈등과 분열은 치유될 수 없다고, 있는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부흥을 위해 남과 북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그 강력한 비전을 에스겔에게 선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비전 그대로, 오직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리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지요. 그렇게 하나 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제 놀라운 축복을 아낌없이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기에 앞서 반드시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20절입니다.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 앞에서 손에 잡고 (20절) 

지금 에스겔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남 유다의 막대기와 북 이스라엘의 막대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번영과 번성에 대한 약속을 주시는데,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남과 북의 막대기들이 함께 이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번성과 번영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네요. 먼저 21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21절)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은 연약할 때로 연약해져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 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그 사로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곧 회복과 치유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정결한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축복이지요)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마침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 되었을 때,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26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26a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화평의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되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여 주십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던 그들은 연약한 민족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북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바벨론 제국이 남 유다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주셔서 번영하게 됩니다, 번성하게 됩니다, 번창하게 됩니다. 그들의 번영과 그들의 번성이 어느 정도일까요? 본문의 마지막 28절이 그것에 대해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셔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됩니까? “열국이 다 알게 됩니다.” 모든 열국이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번성이 이스라엘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2025년 새해에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입니까? 먼저는 회복과 치유의 은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셔서 번영하고 번성하고 번창하는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성은 나 혼자만 누리는 번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 되어 누리는 번성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과 갈등과 다툼이 있다면 하루 속히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깨어진 그릇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담을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화목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안에 번성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되어 번성하는”(X2) 2025년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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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1. 1. 10:27

우리가 믿음의 표준으로 삼는 성경은 다른 책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약속과 성취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이렇게 보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말씀하실 때부터 약속의 말씀을 주셨네요. ‘내가 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이미 75세 되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고, 단 한 평의 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어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들 한 명, 땅 한 평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겠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계속되는 실패로 말미암아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지금도 여전히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b)

어떤 분은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가정적으로도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만 그 자신의 몸에 못쓸 병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절망하죠.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

어떤 분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마음에는 큰 근심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지요. 자기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마음을 닫아버려요. 바로 그때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 

이처럼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위대한 점은 성경이 기록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지만, 더불어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자신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귓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Move One. 하나님의 약속 (1-6절)

하루는 성령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가운데 깊은 골짜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골짜기에는 사람들의 뼈가 가득 쌓여 있었지요. 그 장면을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2절)

골짜기에 가득했던 뼈들의 특징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네요.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심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무엇이지요? 아주 말라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뼈들은 최근에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뼈가 아닙니다. 그 뼈가 매우 마를 만큼 오래전에 죽음을 당했고 그 진액이 모두 사라져 버린 뼈들이었지요. 한 마디로 그들의 회생 가능성은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바짝 마른 뼈들을 향해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4절)

하나님께서 먼저 에스겔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명이지요. 아니, 이미 죽은 뼈들이잖아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모든 진액이 빠져나가 바짝 마른 뼈들이잖아요. 그들에게는 이미 생명이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러한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고 대언하라고 말씀하네요. 4절의 뒷부분에도 동일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버린 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참 놀라운 신앙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향해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버린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들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향해 선포하시는 말씀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5절) 아멘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무리 죽은 지 오래되어 바짝 마른 뼈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얻게 됩니다. 교회의 부흥, 영적인 부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참된 부흥은 언제나 그 중심에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2025년 새해,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죽은 지 오래되어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도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에도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마침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2025년 새해, 하나님께서 이 강단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하여 주셔서,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 마침내 수많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Move Two. 큰 군대를 이루다 (7-10절)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도 넘치도록 성취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약속하는 말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여 주시지요. 오늘의 본문 6절 이전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라면, 본문 7절 이후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마른 뼈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7절)

7절 말씀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에” 3절부터 6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구체적으로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에스겔 선지자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이제 이 뼈와 저 뼈가 서로 이어져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뼈가 이어졌습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그 위에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뼈가 이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이 모든 과정에 에스겔 선지자가 개입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개입한 영역은 무엇이지요? 딱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을 뿐입니다. 나머지 일, 그러니까 뼈가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 안에 생기가 없었지요. 그런데 생기가 들어가는 장면도 동일합니다. 본문 10절도 보십시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0절) 

이번에도 에스겔의 역할은 딱 한가지만 등장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만 했는데, 하나님께서 또다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계속 일으켜주십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극히 큰 군대”가 되었네요. 단지 생명만 붙어있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전쟁에 나설 수 있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부흥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참된 부흥은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지만, 뼈가 이어지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그 위에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는 일련의 과정은 처음부터 성령께서 주도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이처럼 참된 부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만일 2025년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는 부흥,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는 부흥, 우리의 교회가 새롭게 되는 참된 부흥이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새해 2025년에 거대한 부흥의 물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참된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그 부흥을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를 바라보며 기대를 넘어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약속하신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모두의 영혼에 참된 부흥을 반드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Move Three.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11-14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도 살아나는 기적과 부흥의 현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과 부흥의 현장에 대해 본문의 마지막 14절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본문 14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

이스라엘은 마른 뼈와 같이 모든 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약속하십니까? 1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곧 성령으로 다시금 충만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영혼의 참된 부흥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우리 가정의 참된 부흥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우리 교회의 큰 부흥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2025년 우리의 표어 그대로이지요.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실 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교회의 부흥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이지요. 그런데 그 뒤에 어떤 말씀이 이어집니까?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알리라”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2025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 기적과 부흥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요? 이 일을 말하고 또한 이루어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2025년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의 말씀이지만, 2025년의 열두달이 모두 지나고 2025년을 마무리하는 새해의 연말이 되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더 이상 미래에 일어날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성취의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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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4. 12. 29. 16:25

대나무의 성장은 다른 식물의 성장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그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뻗는데 반하여, 대나무는 수직 방향으로만 성장을 하지요. 그리고 대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성장에 있을 것입니다. ‘우후죽순’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나면 대나무 순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지요. 그런데 대나무가 수직으로 높이 자라면서도, 그것도 매우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거친 비바람에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 이유는 그 마디에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자라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마디를 형성하는데 집중합니다. 그렇게 위로 올라가는 일을 멈추고 내부에 힘을 집중하여 마디를 형성하고 나면 성장의 튼튼한 기초가 형성되어 또다시 수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탄절을 보내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아직 새해를 맞이하지 않은 바로 지금, 대나무가 위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잠시 성장을 멈추고 하나의 마디를 형성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앞으로 나가기 위한 튼튼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의 설교 제목 그대로,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머지않아 허락하실 2025년 새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쌓이는 오늘 송년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과거 – 아픔과 은혜

오늘 본문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전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마칠 때쯤, 곧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었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강 동편을 점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광야 생활이 청산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깐만 과거를 되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보겠습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1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네 아들”은 지금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다음 세대를 말합니다. 곧, 지금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아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네 아들” 곧 그들의 다음 세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출생하게 될 첫번째 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부모의 세대와 달리 애굽에서의 생활 혹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모두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세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지나온 과거를 반드시 회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새해를 소망 가운데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2025년 새해에 여러분에게 새로운 역사를 펼치시기를 원하십니까?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 새로운 현실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있는데, 마치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마디를 형성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고 그 내부로 힘을 집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새해 2025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기 전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입니다. 우리가 옛적에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회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건을 기억합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모세는 계속해서 본문 22절에서 출애굽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억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2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는 동안 바로의 종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여 주셔서 그들을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큰 구원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루 이틀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겨운 일인데, 1년이나 2년도 아니고 40년을 살았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세월에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주셨으니,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적군이 그들을 공격할 때 하나님은 친히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이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무엇입니까? 큰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를 주셔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았던 모습처럼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진맥진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지난 한해 동안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근근이 살아온 것이 과거에 대한 솔직한 회상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실패가, 때로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회상할 때 우리는 또 한 가지를 기억할 수 있으니,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모든 고비를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전

모세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니, 한편으로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니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본문 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3절)

모세가 가만히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 모든 사건과 시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뜻과 비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뜻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이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종으로 살던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까? 본문 23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애굽의 지난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마실 물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지요.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모진 광야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신 깊은 뜻과 비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뜻은 마침내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4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삶에도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나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 같은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었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듯한 괴로움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때마다 시마다 새 힘을 주고 용기를 주려고 무엇보다 피할 길을 주셔서 올해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온 성도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지기를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애굽에서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게 하셨던 것처럼,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허락하셔서 광야 4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2025년은 지난 2024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주가 지나 1월의 첫번째 주일이 되면, 또다시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48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여 주셨고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교회를 지난 48년 동안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출애굽의 역사를 넘어, 광야 40년의 시간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해의 표어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과 경외

모세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고통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어보자, 내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무엇입니까? 오래전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이제 곧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벗어나고, 늘 궁핍에 시달렸던 광야를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펼쳐질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시지만,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든 광야에서도 심지어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이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야 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조건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4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온 마음을 다해 힘 써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을 늘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친히 가르치신 최고의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어, 본문 24절의 말씀 그대로 “항상 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새해 2025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예비하신 새로운 역사가 새해 2025년에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나의 삶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 한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며칠 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25년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많은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분들에게는 헌신과 봉사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모든 힘과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십시오.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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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24. 12. 16. 15:33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지요.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소망이 있다면 인내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지금의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을 넘어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하루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오늘 하루를 우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소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희망, 곧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소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소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소망과 낙관은 어떻게 다를까요? 

몰트만이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품게 될 때 우리는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지난 수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며 준비했습니다. 그 학생은 내신도 좋고 수능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입시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이것이 낙관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제 그 상품을 시장에 판매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업가는 이제 곧 출시할 상품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낙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낙관은 존재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열심히 신앙훈련에 참여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의 믿음과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겠구나 낙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지금, 여러분의 새해는 낙관적이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인생은 이대로만 계속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희망, 곧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과거나 현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 나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이것 역시 예를 들어 볼까요? 나이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금이라도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비전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1-2절)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희망, 곧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 어디를 보아도 미래에 대한 낙관이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소망과 희망을 선포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먼저 본문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이 어떤지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전에 고통받던 자들”이라고 말씀하네요. 네, 이스라엘은 지금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현실을 묘사하는 첫 번째 단어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본문 2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시작하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두움, 곧 흑암 가운데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곧 고통과 흑암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밝은 전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큰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더라도, 그 고통의 끝에는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과 2절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이고 둘째는 흑암입니다. 현실도 고통스러운데 지금의 모습을 아무리 살펴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밝은 전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고통과 흑암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여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한 나라가 거대한 제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완벽하게 정복되었으니 그 국가적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이것이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죠. 한 나라가 이미 국가의 운명이 다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과연 이스라엘 열 지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나 긍정적인 전망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북 이스라엘의 현실은 먼저 고통이고 또한 흑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소망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나의 모습,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불가능한 바로 그때. 나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도 같은 내일에 대한 긍정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삶에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너희의 미래에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비췰 것이다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소망입니다. 

본문 2절 말씀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을 앞뒤좌우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지금도 큰 고통 가운데 있지만,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새해도 어둡게만 느껴지십니까? 그리하여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보다는 체념과 낙심에 빠져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여러분에게 선포하시는 소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여러분에게 모든 흑암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터널을 지난 여러분에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밝은 광명의 날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고 계실지라도, 
이제 하나님께서 복음의 밝은 광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시니,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회복의 말씀을 듣고 절망과 낙심이 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슬픔 대신 찬양을 (3-5절)

북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3절)

우리가 함께 읽은 개역개정성경에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본문 3절부터 5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찬양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직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멸망을 당한 처참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3절의 “창성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소망과 희망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지금 이스라엘 열 지파는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철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선포해 주셨으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에 소망과 희망이 생겨나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뒷부분도 보세요.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 등장하는 ‘추수’와 ‘탈취물’이라는 단어는 각각 하나의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지요. ‘추수’라는 단어에는 어떠한 비유가 담겨 있습니까? 농사의 비유가 담겨 있지요. 농부가 지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을 때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저 수고하고 노동을 할 뿐이지요.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그 힘겨운 농사의 수고가 다 보상을 받게 되잖아요. ‘탈취물’이라는 단어도 전쟁이라는 비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적군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괴롭고 피 말리는 과정일까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지난 후 전쟁에서 승리하면 ‘탈취물,’ 곧 전리품을 얻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셨을 때, 북 이스라엘의 형편은 먼저 고통이었고 또한 흑암 곧 내일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희복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시니 지금은 고통이고, 지금은 농사를 짓는 수고의 시간이고, 지금은 전쟁을 치르는 피 말리는 시간일지라도. 그들의 내일은 소망과 희망을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추수의 기쁨,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에 오실 때에는 비록 우리의 마음이 흑암이어서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시작되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어디에 계시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날들이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6-7절)

고통과 흑암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소망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해 주시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6절과 7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6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큰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깊은 흑암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밝은 빛이 비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6절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이는,” 그 이유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어주신 그분이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은 현재의 고통을 넘어 내일에 대한 흑암이 되어, 내일에 대한 절망으로 내일에 대한 낙심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렇게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를 소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큰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품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7b절) 

그러나 여러분,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7절의 마지막 구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를 이렇게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이미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이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내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모습 안에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니 이제 그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주변의 환경과 조건이 좋아 이제는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나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나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현실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이유, 그것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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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