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기도 하시고, 공생애의 마지막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도 하시지요.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전반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로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수군거립니까? ‘이 사람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세리와 모든 죄인들을 받아들여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벌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하나의 별명을 붙여버립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눅 7:34).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이러한 별명을 붙였지만,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과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기쁨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기쁨이 가득한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모두를 천국의 잔치로 초대하시며,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 –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 – 을 누리며 오늘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MOVE ONE. 기쁨을 잃어버린 아들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모두 세명입니다. 먼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그 재산을 가지고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둘째 아들이 등장하지요. 또한 그러한 탕자까지도 다시 받아주시고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품어주시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이 주로 묘사하는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지요.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건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날려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첫째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를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늘 순종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한 마디로, 누가 보아도 동생은 못됐고 형은 착했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형만한 아우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첫째 아들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점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즐겁게 기쁨을 나눈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바로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마쳤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에서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러자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나아가 온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온 마을이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그 기쁨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25a절)
첫째 아들은 그날도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네요. “밭에 있다가 돌아와”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벌이신 잔치 자리에 아들로서 – 그것도 첫째 아들, 맏이로서 -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집의 장자, 첫째 아들인데 아버지의 바로 옆에 놓인 최고의 상석에 앉아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긴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니, 종들은 처음부터 첫째 아들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이 아들은 어찌 된 일인지 그 기쁨의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본문 28절이 이렇게 기록하거든요.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28a절)
첫째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를 집 밖으로 붙잡아 두었던 것은 자격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막아 선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했기 때문입니까? 분노가 가득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늘 나라의 잔치로 초대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자격과 조건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안타깝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삶,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마음이 첫째 아들과 같이 분노가 가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불평이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조건은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감사가 아니라 분노가 가득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겁니다.
MOVE TWO. 분노의 이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당당히 참여하여 그 누구보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있는 분노가 문제였지요.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들은 마음에 큰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선사하는 기쁨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자,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을 불러다가 그 일의 자초지종을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종은 첫째 아들에게 짧지만 매우 정확하게 그 장면을 보고합니다. 첫째 아들은 이 종의 보고 내용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으니, 종의 보고 내용 안에 이 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이유가 들어 있겠지요. 그 분노의 이유를 찾아보면서, 본문 2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절)
우리가 함께 읽은 종의 보고 내용 가운데 무엇이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본문 27절을 말씀을 다시 볼까요? 종이 이렇게 보고하지요?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동생, 곧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 때문에 첫째 아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곧,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화가 불같이 일어났을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무엇일까요?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입니다. 당신의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에 첫째 아들이 분노했을까요? 네, 저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아들이 분노하게 된 핵심 이유가 이 살진 송아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볼까요?
자, 첫째 아들이 화를 내면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않자,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잔치 자리에 데려가려고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때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쏟아놓는 장면이 본문 29절부터 나옵니다. 첫째 아들이 어떻게 불평하는지 잘 보세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명을 따라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다음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잖아요?’ 이것이 첫째 아들의 불평 내용입니다. 30절도 보십시오. 반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저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 이것이 핵심이 맞잖아요, 첫째 아들에게는 이 ‘살진 송아지’가 문제였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이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성실하게 일을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살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아비지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이지요. 조금 더 확대하면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마음도 똑같았어요. 아버지와의 친밀함이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관심이 없어요. 단지 아버지에게 얻을 보상, 아버지의 재산만 원했지요. 다만, 첫째 아들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식이 동생과 달랐던 것뿐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요구하는 부도덕한 행동을 선택했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도덕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이 화를 내고 분노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핵심 이유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우월감입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본문 29절입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누가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요? “내가, 내가” 나는 아버지의 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의 말씀을 하나도 어김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어요. 반면에 동생은 어떻습니까? 30절이지요.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년들과 함께 삼켜버리지 않았습니까?” 첫째 아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지독한 우월감이지요.
확실히 내가 저 동생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누가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내가 훨씬 더 우월하다니까요. 그러니 보상이 주어져도 내가 더 받아야 되고, 상을 얻어도 내게 더 큰 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문제의 그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잖아요. 나에게는 아직 염소 새끼 한 마리 보상을 주지 않으셨던 분이 말입니다. 내가 그토록 바르게 살았던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설진 송아지로 대변되는 보상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보상이 저 아들에게 주어지니 그러니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 아버지가 준비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말지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목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신앙생활이 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이것은 저의 소원이기 이전에, 여러분 모두를 지금도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우리의 조건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쁘게 생활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수고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찾아오는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불평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살았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형편없다는 생각,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인색하시다는 생각,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도 안된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의 끝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빼앗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가운데 특별히 우월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열등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에 자꾸 찾아오는 보상심리, 우월감, 이 모든 것을 복음의 은혜로 다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에게 앞뒤 계산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MOVE THREE. 아들을 찾아오시는 아버지
첫째 아들은 그 마음의 분노 때문에 아버지가 마련한 기쁨의 잔치 자리를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때 아버지는 직접 그 아들을 찾아러 나와 또다시 잔치 자리에 초대하여 주십니다. 28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심지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내어 타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이 아버지는 집 밖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지요. 이번에도 아버지의 행동은 동일합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직접 또 다른 아들을 기쁨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지금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다. 여러분,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인자하신 아버지, 아들을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와 지금도 함께 있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또 한 가지를 말씀하시지요. ‘나의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다 주셨어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마음껏 사용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권한과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첫째 아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거저, 선물로 주어진 특권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이미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지금도 하늘의 아버지, 자녀를 위해서라면 앞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시고 다 내어주시는 그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특권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이 두 가지 은총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뿐이지요.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시네요. 본문의 마지막 절인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고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고 얻었기로
(그 다음이 결론이지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시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다고 믿으세요? 이 모든 은혜와 이 모든 은총이 나의 공로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진정으로 믿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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