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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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 되게 하는가? 교회는 필연적으로 많은 부수적인 제도들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는 가운데 고대교회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별하는 기준, 곧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되게 하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되어왔다. 니케아 신조는 4가지 교회의 표지(標識)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으로 이는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교회의 표지가 되었다. 이후 종교 개혁가들은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가지 표지를 제시하였고, 개신교신학자들에게 큰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도 니케아 신조의 4가지 표지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도 개혁가들의 두 가지 표지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표지인가보다는 과연 그것들이 우리 교회의 생명력 있는 특징인가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2:20). 교회가 사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12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적 전승’은 신약성서의 범위를 규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도적 전승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 신약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교회의 기초로 받아들인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것으로, 결국 참된 교회란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이다.

복음의 선포를 들은 사람에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 그 마음에 믿음이 생긴다. 교회란 이렇게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긴 사람들의 모임이다. 개혁가들이 주장한 참된 교회의 두 번째 표지인 성례전(세례, 성찬)은 이러한 믿음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칼빈은 성례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1) 복음을 믿어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증표로서 세례를 받고, 지속적인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크리스천의 삶을 영위해나간다. 말씀도, 성례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한평생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크리스천은 참된 교회의 말씀선포와 성례전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지는 오로지 교회의 사도성이지 결코 도덕적 자질이나 교회 성도들의 양적인 숫자가 아니며, 교회 헌법도, 교회의 건물이나 화려한 장식도 아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터를 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요건이다. 이 기준으로 종교 개혁가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외쳤다.2)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외관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 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7: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해지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만일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를 집행하는 일에 있어서 순수성이 훼손 되었다면 그 외향이 아무리 화려하다 할지라도 참된 교회로 볼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만일 우리의 교회가 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예배에 진실함이 있다면 아무리 많은 다른 결점들이 있더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교회를 떠올리며 “교회를 믿습니다”3)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를 참된 교회되게 하는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개혁가들의 전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된다. 첫째, 우리 교회의 참된 교회됨의 표지가 사도성에 있다면, 교회의 내용, 교회가 선전해야 할 그 알맹이는 결코 민주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형태는 민주화된다 할지라도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 그리고 교회를 궁극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은 교회의 구성원 중 그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 참된 교회의 표지가 사도성에 있기에 교회 안의 모든 계급이 사라지게 된다. 사도들의 증언(신약성서)에 따라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내의 갈등과 분열은 근본적으로 참된 교회의 특징일 수 없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사도적 전승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그 알맹이로 가지고 있기에 하나의 교회이다.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요, 주님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다( 4:4-6). 그러므로 같은 신앙을 소유한 모든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교회로서 서로간의 갈등과 분쟁을 용납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한 분리주의자들에게 “왜 당신들은 주님의 옷들을 나누는 죄를 지으려 하는가? 왜 당신들은 주님의 처형자들도 찢지 않은 위로부터 통째로 짠 저 사랑의 옷을 전 세계와 함께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가?4)라고 절규했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가 말한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단일성이다.

셋째, 매주 드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말씀에 응답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전이 시행되는 곳은 바로 예배이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선포와 진실한 응답이 있는 예배 속에 참된 교회 공동체가 있다. 만일 이것을 제외한 다른 어떠한 사교모임 속에서 교회의 친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교회의 친교가 아니라, 거짓 교회의 친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만드는 시작점은 교회의 예배에서부터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특징이 살아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견고히 세워진다고 선포한 후, 교회의 신비한 연합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간다( 2:20-22).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모임은 이미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서로 연합하며 완성되어지는 과정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올바른 성례가 이뤄지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각 지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설명하는 에베소서 2장의 교회를 한번 상상해보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모든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고 성례를 행하는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아름다운 처소로 변해간다. 전 세계로 확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오늘 드리는 예배로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다.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14, 1.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4, 2, 3.

3. 이한진, "우리는 교회를 믿는가?", 블로그(http://hanjin0207.tistory.com) 참고.
4. Augustine, Letter, 76,
재인용, 이양호,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 『현대와 신학』, 12 (1989 5),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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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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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능력, 곧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1장은 부활 이후 승천까지 예수께서 하셨던 두 가지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 첫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4)는 말씀이다. 또 하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정지해 있으라는 것과 나아가 선포하라는 것, 두 가지였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받은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또 ‘흩어져’ 전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시작되었다. 이 모임과 흩어짐의 연속이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교회의 시작이요, 교회의 역사이다. 교회는 이와 같이 모이는 힘과 흩어지는 힘, 곧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 있게 강화될 때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에 예배가 있다. 이미 앞장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예배를 언급했다. 예배는 참된 교회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흩어짐’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기독교 교육을 신앙공동체적 차원에서 이해한 기독교 교육학자 John H. Westerhoff Ⅲ는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1)

주일의 예전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인생의 이해와 선택된 삶의 방식을 그 자리에서 집약함으로 공동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포기는 신앙의 소실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공동체의 모든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자로 들이며 끌어들이는 일이다.

물론 예배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그리고 예배가 드려진다고 해서 그곳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더더욱 없다. 크리스천들은 단지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희망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이 세상을 사랑했듯이 오늘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에 반하여 그의 사역에 뒤따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실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교회를 포기할 수 없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예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교회의 구심력, 그 두 번째는 기독교교육이다. 예배가 동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을 다시 일이키는 힘이 된다면 기독교교육은 세대가 바뀌어도 교회의 신앙이 지속되는 능력이다. 이러한 기독교교육의 능력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몇 가지 지식을 넘어 교회 공동체로서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John H. Westerhoff Ⅲ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2)

우리는 타자와의 상호 관련된 활동을 통해서 신앙을 경험하고 표현한다. 신앙이라는 어휘의 의미는 그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해지는 언어와 함께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을 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며, 또한 그 사람들이 동일한 양식으로 그 신앙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신앙을 서로 나누며 또 응답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함께 서로 나누며 상호관련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일이다. 크리스천 부모들의 책임은 자기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일이며, 또한 모든 크리스천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핵심에 예배가 있다면,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도 예배교육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예배의 장소, 시간, 복장 등의 비본질적 내용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말씀에 응답하는 전 과정으로서의 예배를 교육해야 한다. 이 교육은 비단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습득된다. 다시 말해 유치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아동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 중고등부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의 예배가 곧 그 학생들의 이후 예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의 능력은 모이는 힘, 곧 구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구심력을 원심력으로 바꿔내는 힘, 곧 ‘모임’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능력을 교회 밖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끌어낼 때 나타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각의 역할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4:11-12).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크리스천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많은 윤리적 덕목들을 나열하고 있다( 4-6).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 된 풍조를 따라 살며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사람을 불러 그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을 모아 교회를 만드셨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매주 확인하는 크리스천들은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능력이다. 곧 크리스천 개인의 삶과 크리스천 공동체인 교회의 사회참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원심력이 약한 구심력도, 구심력 약한 원심력도 지속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이른바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급격한 교회의 성장, 곧 교회의 모이는 힘이 강해졌지만, 그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원심력은 현재 교회의 구심력까지 약화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의 교회들은 역사적 현실에 따라 교회의 원심력을 강화했지만 상대적으로 모이는 교회로서의 구심력은 약했다. 그 결과 그들이 말하는 원심력까지도 그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의 구심력으로서의 예배와 교회의 원심력으로서의 기독교 윤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영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D. Forrester의 설명을 들어보자.3)

기독교인들의 삶의 전부는 따로 나누어진 시간, 즉 예배의 시간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만약 예배와 기독교인의 삶 사이에 날카로운 분열이 생긴다면, 이것은 예배와 삶 모두를 왜곡하는 것이다. (중략) …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을 거룩하게 하고, 밝게 비출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빵 덩어밝게안에 있는 효모와 같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교회를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정도로, 그래서 윤리적인 과제를 피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예배는 세상 안에서의 삶의 풍요함과 인간화를 위한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밖에서 크리스천의 윤리적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어떤 크리스천이 교회 안에서 진실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교회 밖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1. John H. Westerhoff , 정웅섭 역, 『교회의 신앙교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83, p. 108

2. Ibid., p. 163

3. D. Forrester, 김동선역, 『참된 교회와 윤리: 교회론과 윤리학에 대한 재고』,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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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실천신학적 교회론2017. 1. 1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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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취미활동가의 모임인가? 과연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은 취미활동의 하나인가? 물론 모든 신앙인들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가 가르치는 ‘정답’을 읊어대기 이전에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 생활을 돌아본다면, 얼마나 많은 ‘취미활동’으로서의 신앙생활형태가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취미활동의 특징은 ‘내가 좋아서’ 참가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취향이 달라졌거나, 나의 여건이 어려웠을 때,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취미활동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셔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크리스천으로 불러주셨기에, 나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신앙생활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지, 수평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자원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생활은 결코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사도행전과 많은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삶의 전부였다.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았다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지속된다.

콘스탄틴의 회심이 있기까지, 교회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지하 카타콤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졌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지하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313년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드디어 기독교는 지하의 종교에서 벗어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교회의 형태, 특히 예배의 형태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콘스탄틴 이전까지 기독교의 예배는 상당히 간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 기독교 예배는 궁정의전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향불이 교회 예배에도 사용되었고, 교역자들이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가 발전하였다. 반면 회중은 예배에 있어서 훨씬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1) 기독교 내의 이러한 변화는 참된 기독교의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이 교회를 떠나 수도원운동을 시작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4세기 후반, 5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회를 보면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기에 이른다.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에는 속해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보이는 교회’와 의로운 사람이 그 핵심이 되는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제도적 교회 개념이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2)

고대 교회가 밀라노 칙령 이후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재연된다. 조선의 왕조가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기독교는 그 땅에 빠른 속도로 뿌리내린다.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반외세반봉건의 정신으로 한국사회를 선도했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였고, 신사참배 강요에 모든 교단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지켰던 신앙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취미 활동일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냉전체제가 시작된다.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남한 내의 기독교도 서로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수없이 분열을 거듭한다. 민족적으로 남북이 상쟁(相爭)하고 있을 때 기독교는 세계사에 대한 바른 비판 의식을 잃어버리고 기독교 자체가 분열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후 기독교는 당시 집권세력과 급속히 유착되어 급기야 선지자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동조하기까지 한다.3)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를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교회사가 이만열 교수의 지적에 귀 기울여보자.4)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의 특징의 하나는 양적인 팽창이다. 대형교회가 나타났고, 수십만 명이 회집하는 기독교 모임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점차 외적인 대형화 여부에 두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우려할 만한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 진리의 탈을 쓰고 신자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신유의 은사로 대표되는 듯이 오도되어지고 있다. 이 그릇된 축복관이 이제 겨우 형성되어지고 있는 한국의 중산층과, 불안 속에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가야 하는 식자층 및 그 주변의 계층을 기독교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릇된 축복관은 기독교 진리를 은폐시키고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다. 가치관의 타락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물량황금만능주의의 풍조를 쉽사리 의 풍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과 기독교 세력의 증가는 듯불가하고, 일반사회의 윤리도덕의 성장은 엿볼 수 없고 기독교적 가치관의 사회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기독교가 이 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역귉은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회는 취미활동가들의 모임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바 눈에 보이는 교회,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결코 진정한 교회일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회를 부정하고, 천상의 교회만을 바라볼 수도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부족하나마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진정한 교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1-10). 교회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도덕적이고, 정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바울에 의하면 에베소교회 구성원들은 죄와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사람,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던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 곧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것을 덮어주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불러주셨다는 신앙의 사람,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이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교회를 구성한다. 만일 이 믿음을 떠나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그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 혹은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잘못된 축복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면, 우리는 또다시 이를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부정하며 새로운 교회를 찾아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 이형기, 『세계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p. 235

2. E. G. Jay, 주재용 역, 『교회론의 변천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130-131.

3. 한국기독교의 이른바 진보진영은 부정선거에 대해 저항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기독교를 주로 언급하였다.

4. 이만열, “한국 기독교 100년 약사”, 『한국기독교 성장 100년』, 기독교문사, 1986,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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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2017. 1.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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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3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여기에 등장하는 명절이란 유대인의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장막절을 의미합니다. 장막절의 마지막날에 있었던 사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 장막절의 마지막 날에는 매우 특별한 종교의식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세의 율법에는 장막절 마지막 날에 어떠한 특별 행사를 가지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마지막 날에 특별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지요. 그 이유는 구약 시대 히스기야가 남 유다의 왕으로 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가 남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 북쪽에서 내려온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였지요. 당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랍사게 장군은 18만 5천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있어도 남 유다는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랍사게 장군이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 천연 요세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무너트리기가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땅 한 중심에 위치하였던 예루살렘은 이후 다윗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군사 전문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점령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토록 예루살렘 성은 군대의 힘만을 가지고는 점령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강이나 하천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나와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을 18만 5천 명의 군인들로 물샐틈 없이 포위만 하고 있으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식수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남 유다는 곧 앗수르 제국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랍사게 장군의 전략은 실패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에는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 곧 기혼샘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까지 물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었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히스기야 왕이 만들었기에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불렀고 유사시에 히스기야 터널이 시작되는 기혼샘의 그 입구를 적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놓기만 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제 아무리 18만 5천 명의 대군이 층층이 에워싼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는 생수가 흘러 들어와 실로암에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적군의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성벽의 튼튼함이나 강력한 군대라기보다는 기혼샘으로부터 히스기야 터널으로 통과하여 실로암 연못에 모이는 한 줄기의 생명수였습니다.


여러분은 긴박한 위기의 순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순간 우리에게 생명의 끈이 되어주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집을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긴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조그마한 물줄기,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의 심령과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고이게 되는 ‘실로암 연못.’ 바로 그 은혜의 물주기가 참된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 주는 생명의 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크고 화려한 장막을 허락하신다면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재물과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높은 지위를 허락하신다면 감사함으로 그것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놀라운 성공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으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을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지켜주리라는 헛된 기대는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개인과 우리 가정에 흘러오는 한 줄기 물길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


히스기야 시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생명의 물줄기를 통해 예루살렘 백성들이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의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룻밤에 멸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사건, 이사야 선지자가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오라고 초대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을 잊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장막절의 마지막날 특별한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 되면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연못에 모인 물을 금항아리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선두로 하여 물이 가득 찬 금항아리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을 선두로 한 그 대열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면 악기 소기가 들려오면서 시편 113편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편 113편, 114편, 115편, 116편, 117편, 그리고 드디어 시편 118편까지 찬양이 이어지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성들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X3) 이렇게 세번 큰 소리로 외치는 그때 대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져온 물 항아리를 성전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 장막절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의식입니다.[1]


이러한 의식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오래 전 히스기야 시대에 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기억이지요. 18만 5천명의 대군이 몰려오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강줄기가 되어 주셨고, 급기야 하루 아침에 모든 적군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왔던 장면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마음이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앗수르의 군대는 오래전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은 로마라는 새로운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매년 장막절을 보내며 실로암의 물을 성전의 제단에 쏟아 놓으며 유대인의 마음에는 어제의 은혜가 아닌 오늘의 은혜를 향한 갈망. 어제의 구원이 아닌 오늘의 구원을 향한 갈망. 어제의 역사가 아닌 지금도 자신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치지는 오늘의 역사에 대한 갈망. 그것이 유대인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 우리의 마음과 비슷한 지도 모르지요. 우리 모두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한 줄기 생명의 강줄기를 흘려보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모든 경험은 아득한 오래전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을 갈망하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기도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생명의 강줄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매년 동일한 장막절 행사에 참여하며 오늘의 은혜를 간구하였던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백성들의 공허한 마음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장막절 행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서 예루살렘 성전 한 중앙에 일어서십니다. 오늘 본문 37절이지요.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히스기야 시대에는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생명의 물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러분 한분 한분의 배에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마음에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심장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단 하나의 조건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 성령의 강줄기를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마음의 죄를 다 회개해야 한다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세상의 관심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사람, 곧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의 조건을 단 한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38절입니다.


나[예수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9절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에서도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령의 충만을 입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덧붙이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을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헌금을 힘껏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열심히 기도하며 종교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야 구원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교정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오해는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지만, 성령의 충만을 입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처럼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단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십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한 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여 ‘이제는 됐으니 너에게 성령의 강줄기를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회개하고 또 회개를 해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여 ‘이제는 됐다. 너의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다 회개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성결한 삶을 살고 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이제는 됐다고, 너가 그토록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제는 너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만큼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 만큼 성결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있는 단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성경의 충만을 성령의 강줄기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 안에서 생수를 마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과 같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33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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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7. 1. 1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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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회사를 전공한 한 역사신학자가 어떻게 세계기독교(global christianity)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자서전적 서술이다.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와 신학의 중심추가 전통적으로 비기독교권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명백학 현상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역동성을 서구기독교를 넘어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 특별히 한국의 목회자와 신학자 - 에게 마크 놀(Mark A. Noll)의 학문적 여정은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준다. 
 
나는 왜 세계기독교인이 되었는가
국내도서
저자 : 마크 A. 놀(Mark A. Noll) / 배덕만역
출판 : 복있는사람 2016.09.08
상세보기

 

세계기독교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지역성에 집중해야 한다. 세계기독교에 대한 일반적 서술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다양성을 놓치기 쉽다. 마크 놀은 역사학자답게 세계기독교에 대한 탐구를 구체적인 사료에 근거하여 순차적으로   넓혀나간다. 때로는 통계를 인용하지만 동시에 숫자의 한계도 지적한다. 각 지역의 기독교를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여러 지역의 기독교가 어떠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정 지역의 기독교가 어떠한 점에서 일반적이며 어떠한 점에서 특수한지를 파악해나가는 방식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서 세계기독교가 눈 앞에 들어올 수 있다. 
 
세계기독교 연구는 자신이 속한 기독교와 그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국 교회사를 전공한 마크 놀에게 북미의 기독교를 캐나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도와준 인물은 조지 롤릭이었다. 동일한 북미 기독교로 여길 수 있는 캐나다와 미국이지만, 조지 롤릭의 영향으로 마크 놀은 캐나다 기독교와 미국 기독교의 공동점과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마크 놀은 시각을 남쪽으로 돌려 남미를 관찰할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는 많은 점에서 서구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바라보게 되는 곳은 서구 기독교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시아에 속해 있으며, 한국 기독교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먼저 아시아적 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을 배제한 아시아 기독교에 대한 무지가 한국의 교회와 신학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데 일차적인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세계기독교를 향한 선봉에는 선교학이 위치한다. 마크 놀의 역사 서술이 세계기독교를 지향하는 학문적 여정에도 선교학이라는 파트너가 놓여있었다. 마크 놀은 담대하게 선언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부족에 대해서 선교학자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적 측면과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마크 놀, 194) 한국 기독교는 세계 2위의 선교사 숫자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세계기독교를 서술할 수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신학적 지혜를 들으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선교지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수혜자로 보는 관점을 넘어 그들의 현장으로부터 세계기독교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는 자세를 보유한다면 한국기독교는 보다 넓은 세계기독교적 관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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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7. 1.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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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빌레몬서를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빌레몬서는 짧은 한 장의 편지이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의 새가족 사역이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빌레몬서에는 체계화된 어떤 조직이나 프로그램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에 새가족을 환대하는 어떤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의도했다는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1] 그저 오네시모 한 사람을 환대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열정이 있었고, 오네시모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라는 빌레몬을 향한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가 소개하는 새가족 사역의 주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는 새가족 사역자다.


돌이켜보면 사도 바울은 불신자였으며, 복음을 적대하는 박해자였다. 바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가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그때 바울의 발걸음을 예수님께서 직접 막아 서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예수님은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고통과 아픔을 읽으며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으로 묘사하셨고, 예수님의 따듯한 환대와 권면 속에서 바울은 박해자의 길에서 전도자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도자가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회심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 장면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9:26)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교회에 정착할 수 없었던 바울의 모습은 이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옛 주인 빌레몬을 찾아갈 수 없는 오네시모의 모습과 흡사했다. 바울은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새가족 환영회나 성경공부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바울의 새가족 사역자가 되기로 자처한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정착할 수 있었고, 나아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cf. 9:27; 11:25-26). 바울이 새가족 사역자가 되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 훨씬 이전에, 바울은 바나바로부터 새가족 사역의 수혜를 받았으며 그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개인의 따뜻한 환대와 섬김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새가족 사역의 실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역자와 새가족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실행되는 전도, 정착, 양육이 새가족 사역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가족 사역은 누가 만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으며 바나바와 같은 새가족 사역자의 도움을 받았던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위에 누군가의 따뜻한 환대를 받아보았던 사람들이 새가족 사역자로 세워질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새가족 사역은 실체를 갖게 된다.




[1] 빌레몬서에는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 전반에 대한 바울의 입장도 드러나지 않는다. 빌레몬서는 오직 오네시모 사람의 경우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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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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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새가족 사역의 목표는 전도, 정착, 양육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추구했던 전도, 정착, 양육의 중심에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분명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바울이 추구하는 전도는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 속에서, 바울이 추구하는 정착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바울이 추구하는 양육은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새가족 사역이 전도, 정착, 양육을 목표로 할 때 그 형태는 사역자 한 사람과 새가족 한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일대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새가족 사역은 실체가 사라진 형식적 활동일 뿐이다.


새가족 사역에 있어서 구체적인 새가족 사역의 목표인 전도, 정착, 양육에 있어서 일대일의 원리를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28절에서 선언적으로 명시하였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전도와 양육의 자세를 묘사하는 이 짧은 구절의 목적어는 언제나 각 사람이다.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을 양육하여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데 집중하는 것이 바울이 추구했던 사역의 형태였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형편에 집중하기보다 주변의 한 사람, 오네시모에게 집중하여 그를 전도하고 양육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새가족 사역을 엿볼 수 있는 서신이다.


신약성경에 포함된 사도바울의 서신은 교회를 수신자로 하는 편지들과 개인이 수신자로 되어 있는 편지들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개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은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며 기록한 바울의 후기 서신에 속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와 선교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는 여러 지역의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서신을 작성하기보다는 자신의 뒤를 이어 전도와 양육을 감당해야 하는 개인에게 정성을 다해 편지를 기록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바울에게는 전도와 선교 사역의 열매가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숫자나, 교회의 성장 속도가 아니라 디모데,’ ‘디도,’ ‘빌레몬,’ ‘오네시모와 같은 분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개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새가족 사역은 교회가 함께 하는 사역이요, 지역 교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그렇기에 지역 교회마다 새가족 사역을 위한 체계화된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이를 운영하는 전문화된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가족 사역의 초점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새가족 사역의 목적이 전도, 정착, 양육이라면 새가족 사역은 언제나 믿음을 시작하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믿음의 성숙을 경험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새가족 사역의 열매는 프로그램도 아니요, 성경공부 수료자의 숫자도 아니라 우리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이요, 우리의 섬김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영적 성숙을 경험한 분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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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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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바울이나 빌레몬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오네시모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양자 관계를 넘어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사이의 삼자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그리고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에서 바울이 기대하는 바는 빌레몬이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빌레몬은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었다( 5).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빌레몬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14b, 20). , 바울은 빌레몬이 보여주는 현재의 믿음과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그가 지속적으로 영적 성숙을 경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그가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돕는 일을 양육이라고 부른다면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명백한 의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양육이다. 그리고 빌레몬서를 살펴보면 양육의 몇 가지 원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양육의 특징이다. 바울은 빌레몬이 이미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믿음과 사랑이 반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지금도 바울과 많은 성도들은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7).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의 사건을 계기로 빌레몬이 다시 한 번 선행을 베풀고 이로 말미암아 바울 자신과 성도들이 기쁨을 얻게하라고 권면한다(20). 그런 점에서 영적 성숙 목회적 측면에서의 양육 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속성’(continuity)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가 신앙생활의 경험이 짧든지 길든지 상관 없이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추구해야 하며, 교회는 그를 돕기 위해 지속적으로 양육해야 한다.


빌레몬서는 양육의 근거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준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지금은 멀리 도망쳐온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이 사랑으로 용납할 것을 권면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이라고 묘사한다( 14).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근거로 빌레몬에게 이와 같은 선한 일을 행하라고 권면하는가?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빌레몬 역시 바울 자신에게 진 빚이 있음을 언급한다( 19).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에게 어떠한 빚을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기에 바울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빌레몬의 빚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빌레몬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인 축복에 대한 빚이라는 주장이다.[1] 빌레몬이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나아가 지속적으로 믿음과 사랑의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근거, 곧 모든 영적 성숙(혹은 양육)의 근거는 오직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마지막으로, 빌레몬서는 양육의 내용에 대해서도 중요한 암시를 준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로몬으로부터 도망쳐온 사실을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영원히 두게 함이라고 강조한다( 15). 여기에서 떠나게 된 것이라는 번역의 헬라어 원문은 단 하나의 단어(에코리스테)인데 이른바 신적 수동태라는 어법이 사용되었다. 신적 수동태란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역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라는 주어를 생략하고 인간을 문장의 주어로 내세우면서 수동태의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문장에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의 활동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게 되는데 이러한 언어적 기술을 신적 수동태라고 부른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것은 오네시모 개인의 악한 행동이었지만, 바울은 신적 수동태라는 방식으로 그 뒤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암시한다. 오네시모는 자의적으로 악한 행동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인 형제로 받아들이는 계기로 만드셨다(cf. 45:4-8).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하며 빌레몬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그러므로 빌레몬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양육(영적 성숙)의 내용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새가족 사역의 목표에 양육을 포함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 혹은 교회에 등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가족사역은 그들을 전도하고 그들이 지역 교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집중하고, 믿음의 지속적인 성장은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양육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지속성에 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영적 성숙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새신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새가족 사역이 지역교회의 모든 양육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섬기는 새가족의 영적 성숙은 새가족사역자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1] "[빌레몬] 바울에게 자신의 영적 생명을 빚졌고, 그것은 오네시모가 입히고 바울이 갚아야 빚보다 훨씬 것이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회심했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피터 T. 오브라이언, <골로새서 빌레몬서>,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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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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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바울이나 빌레몬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오네시모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양자 관계를 넘어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사이의 삼자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그리고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바울이 기대하는 바는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 교회가 오네시모라는 새신자를 환영하고 나아가 오네시모를 참된 의미의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부탁하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16)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을 나오기 전, 그의 자리는 ‘종’이었다. 빌레몬의 가정에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오네시모는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종’의 자리가 아니라 ‘형제’의 자리로 인도하라고 부탁한다. 계속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7)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동역자’라는 단어는 ‘코이노노스’라는 단어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참된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의 파생어이다.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는 바울의 부탁은 바울과 빌레몬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누리듯이 새신자 오네시모와도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라는 의미다.[1] 그러므로 새가족 사역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새가족이 지역 교회에 정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새가족 사역은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새가족 사역자들이 좋은 팀웍을 이루어 새신자들에게 이른바 ‘체계화된 호의’(organized friendliness)[2]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과 그의 가정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새가족 사역은 새신자에게 ‘체계화된 호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참된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될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새가족 사역의 목표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더 이상 ‘방문자’나 ‘새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는 것, 곧 엄격한 의미의 교회 정착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작성하였고, 그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냈다. 과연 빌레몬은 바울의 간청에 순종하였을까? 문서화된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빌레몬이 바울의 간청대로 오네시모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평가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빌레몬서가 신약성경 27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편지의 내용이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 교회의 실천으로 현실이 되었고,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자신의 특별한 자유 증서’로 소중히 간직하였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이후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데 바울의 편지들을 함께 모아 편집하는 일에 오네시모가 일익을 감당하게 되었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었던 이 편지를 신약성경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다.[3] 이러한 가설이 옳다면 바울과 빌레몬을 비롯한 지역교회 성도들의 새가족 사역으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교회 공동체에 정착하였고, 시간이 지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자들이 추구하는 새가족의 교회 정착이란 단순한 주일 예배 출석을 넘어 성도들과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요, 나아가 지역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일이다.




[1] Cf. 피터 T. 오브라이언, 골로새서 빌레몬서, vol 44 of WBC (서울: 솔로몬, 2008), 505-9.  녹스(John Knox) 그의 Philemon among the Letters of Paul에서 빌레몬서의 실질적 수신자가 아킵보였다고 주장한다. 교회 공동체의 목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아킵보에게 오네시모를 기독교 공동체의 지체로 받아들이도록 권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바울의 저술 목적이 빌레몬 사람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머물지 않고,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교회가 그를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Leslie Parrott 제안하는 용어로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 ‘환영 받고 있으며 그들의 필요가 충족된다고 느낌’을 지칭한다. Leslie Parrott, Serving as Church Greeter, 13.

[3] 피터 T. 오브라이언, 골로새서 빌레몬서, vol 44 of WBC,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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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6. 12.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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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바울이나 빌레몬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오네시모다. 그런 점에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양자 관계를 넘어 바울,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사이의 삼자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그리고 오네시모와 바울의 관계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빌레몬서를 바울의 새가족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새가족 사역이란 매주일 예배당 문 앞에 서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처음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교회 생활을 안내하는 일이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오네시모의 손에 쥐어준 바울의 모든 노력을 그의 새가족 사역이라고 평가한다면, 빌레몬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의도 곧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에서, 그리고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는 넓은 의미에서 새가족 사역의 목표가 된다.

먼저,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바울이 기대하는 바는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는 것이요, 나아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네시모는 비록 그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효한’(useful)이지만 오네시모의 실제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11a). 그러한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변화되기 시작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고(16), 이제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11b).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해 나의 심복[심장]’(my very inner being)이라고 부르는 데 이 단어는 주로 어린 자녀와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나아가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가족 사역자로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수행하였던 첫번째 역할은 오네시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되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전도였다.


전도가 새가족사역에 포함되는가? 만일 전도를 교회 밖에 있는 사람(unchurched people)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 나아가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전도는 새가족사역자의 역할이 아니다. 이러한 정의에서 전도는 새가족사역에 선행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를 진리를 찾는 사람들 (seeker)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전도는 새가족사역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미 교회의 예배를 출석하고 지역 교회에 등록하여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복음을 들어야 하는 구도자’(seeker)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버티대학교의 데이빗 얼리(David Early) 교수는 전도를 참된 회심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참된 회심에 이르는 네 단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로 궁금증을 품는 단계 (Curious), 둘째로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단계 (Convicted), 셋째로 죄 용서의 확신을 갖는 단계 (Convinced), 끝으로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단계(Converted).[1] 어떤 이들은 참된 회심의 모든 단계를 경험한 이후 교회를 찾는다. 그러나 교회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을 품은 단계에서, 혹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거나 죄 용서의 확신을 갖는 정도에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므로 새가족 사역자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환대하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여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참된 회심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새가족 사역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오네시모라는 초신자를 빌레몬으로 대표되는 기존교회가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곧 오네시모를 전도하는 바울의 역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근거로 빌레몬에게 자신의 재산을 훔쳐 도망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납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겠는가?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의 가족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한 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4:4-6). 지역교회를 처음 찾은 새가족이 기존 교회의 한 식구가 되는 길도 다르지 않다. 새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된 회심을 경험할 때 비로소 새가족과 기존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한 식구가 될 수 있는 기초가 놓인 것이요, 새가족 사역자는 이를 위해 먼저 새가족을 전도해야 한다.




[1] David Early and David Wheeler, Evangelism is … : How to Share Jesus with Passion and Confidence (Nashville: B&H Academic Publishing Group, 2010),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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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