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과 말씀묵상2017. 12.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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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영성 (0) - 프롤로그

소그룹 영성 (1) -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 (1) "성경적 근거"

소그룹 영성 (2) -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 (2) "방법론적 특징"

소그룹 영성 (3) - 감리교 운동과 속회 (1)

소그룹 영성 (4) - 감리교 운동과 속회 (2)

소그룹 영성 (5) - 순복음 교회와 구역 (1)

소그룹 영성 (6) - 순복음 교회와 구역 (2)

소그룹 영성 (7) - 21세기 한국 개신교회의 소그룹 목회

소그룹 영성 (8) - 개혁교회와 소그룹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 근거에 대한 주장은 20세기 중반부터다시 말해 세계적으로 소그룹 목회가 활기를 띄기 시작한 때로부터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던 1994, 아이스너글는 당시 파편적으로 주장되던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인 근거를 집대성하여 『소그룹 사역을 위한 성경적 기초』(Biblical Foundations for Small Group Ministry) 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지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그룹 목회를 주장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이 책의 주장을 인용하며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아이스너글의 책이 인용되는 이유에 대해 그 책의 탁월성을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중요한 요인은 아마도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 근거가 모든 소그룹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는 아이스너글의 책을 중심으로 소그룹 목회의 지도자들이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소그룹의 성경적 근거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이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려본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창세기 1 26절부터 28절에서 하나님은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점은우리라는 복수 대명사이다. 소그룹 목회의 주창자들은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이 구절에 대한 삼위일체적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하나의 공동체곧 소그룹로 존재하신다고 선언한다. 더불어 주목해야 할 구절은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소그룹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들(복수)을 만드셨으니, 사람들 역시 공동체적 존재라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소그룹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 역시 소그룹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모세가 이드로의 조언을 따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을 세운 장면이다 ( 18). 소그룹 목회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출애굽기 18장의 이 사건은 모세를 중심으로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한 자리에 모였던 대그룹과 분명하게 대비되는 10명을 기본 단위로 한 소그룹 형태를 보여준다. 특별히 메타모델을 주창하는 칼 조지(Carl George) 는 출애굽기 18장의 사건이리더십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출애굽기 18장 이전에는 모세라는 한 사람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에 민족의 모든 사안들이 처리되었는데, 이제부터는 새롭게 새워진 소그룹 지도자들(복수) 중심의 수평적 리더십이 정착되었다. 그런 점에서 출애굽기 18장의 사건은 구조적인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 소그룹 체제가 확립되었음은 물론이요, 소그룹을 통한 다원적 리더십으로의 변화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셋째, 예수님께서 열두명의 제자를 부르신 장면이다(ex. 3:13-15). 소그룹 목회를 지지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열두명을 제자로 부르신 사실에 집중하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셨던 열두 제자의 소그룹 목회야말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소그룹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이스너글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소그룹에 대해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갈망하셨던 소그룹 원형의 반영이자 완성이라고 평가한다.  특별히 제자도를 강조하는 소그룹의 유형 - 예를 들어 가정교회 운동 - 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명의 소그룹 활동을 사용하여 제자도를 전수하셨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결같이 현대 교회의 소그룹 목회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 리더십, 그리고 교육 방법 등을 연구하여 소그룹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넷째, 초대교회가 소그룹(가정교회)의 형태로 모였다는 점이다. 조용기 목사는 1981년에 출판한『성공적인 구역』(Successful Home Cell Group)이라는 책에서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초대교회에는 두 가지의 모임이 존재했다고 지적하였다. 곧 성전에서의 모임과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정모임이 그것이다. 그는 같은 책에서 교회가 시작된 오순절날에만 3,000명이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급성장하는 초대교회에서 12명의 사도들만으로 충분한 목회적 돌봄을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가정 모임의 리더들이 그 공백을 메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용기 목사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소그룹 목회 프로그램의 성경적 근거로 반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무엇보다 전체 회중의 모임과 소그룹 모임이 목회의 두 바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역사적 뿌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소그룹 목회를 지지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인 근거를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은 유형론적으로는 물론이요, 신학적으로도 소그룹 목회를 지지한다. 여기서 유형론적이라는 의미는 현대적 의미의 소그룹과 유사한(혹은 동일한) 형태가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이요, 신학적이라는 의미는 오늘날의 소그룹 목회가 최고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공동체성이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가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그룹 목회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신학적 근거는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소그룹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근거에 대한 비판은 없는가?

 

위에서 지적한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신학적 근거에 대한 타당성 있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의 가정 모임과 현대적 의미의 소그룹 목회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문화적 차이에 대한 지적이다. 탐린은소그룹 교회: 신학적으로 건전한가?”라는 글에서 소그룹의 성경적 근거가 단순한 본문 제시(proof-text)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신약의 교회가 가정 단위의 작은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 성경의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 사이에는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에 이를 현대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소그룹 형태의 작은 단위 모임을 찾아낼 수도 있고, 소그룹의 강점인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본문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소그룹 목회 유형들은 소그룹으로 모인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신학적/영성적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제다가 성경이 어느 특정한 유형의 소그룹 목회를 지지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이 작은 단위의 모임인 소그룹을 지지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지라도, 그것이 오늘날의 모든 소그룹 목회에 성경적/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소그룹 목회의 신학적 건전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 소그룹 프로그램의 배경이 되는 신학 및 영성을 탐구해야 하며, 이러한 연구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접근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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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17. 12. 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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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영성 (0) - 프롤로그

소그룹 영성 (1) -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 (1) "성경적 근거"

소그룹 영성 (2) -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 (2) "방법론적 특징"

소그룹 영성 (3) - 감리교 운동과 속회 (1)

소그룹 영성 (4) - 감리교 운동과 속회 (2)

소그룹 영성 (5) - 순복음 교회와 구역 (1)

소그룹 영성 (6) - 순복음 교회와 구역 (2)

소그룹 영성 (7) - 21세기 한국 개신교회의 소그룹 목회

소그룹 영성 (8) - 개혁교회와 소그룹

 

 

소그룹 목회 프로그램이 쏟아지듯 소개되고 있다. 소그룹의 기본단위를 표현하는 용어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구역속회외에도 ,’ ‘,’ 다락방,’ ‘목장등이 등장하면서 보편적인 정의가 정립되지 않은 용어들이 혼용되는 형국이다. 이에 더하여 제자훈련, D12, G12, 알파 등 이른바 잘 나가는목회 프로그램들도 나름대로의 소그룹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목회 일선에 있는 현장 목회자들은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소그룹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자신의 목회에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형국이다.

 

교회 성장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경구가 하나 있다.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원리는 그렇지 않으며,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Methods are many, Principles are few, Methods may change, But principles never do.) 위의 경구를 다음과 같이 소그룹 목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소그룹의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소그룹의 원리는 그렇지 않으며, 소그룹의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소그룹의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목회자들이 소그룹의 활성화를 간절히 원하기에 새롭게 부상하는 소그룹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져보지만 그것들이 지역교회에서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변화무쌍한 소그룹 방법론만을 추구할 뿐 소그룹 안에 면면히 흐르는 원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그룹 목회를 신학적/목회적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첫째는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이다. 아무리 새로운 소그룹 방법론을 주창하더라도, 수 세기 동안 반복적으로 주장되어온 소그룹 목회의 성경적 근거 및 방법론적 특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신약시대의 가정교회 모임이 오늘날 소그룹 목회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모든 소그룹 프로그램의 공통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이 창안한 소그룹 프로그램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 신약시대의 교회 원형에 가장 가까운 성경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러한 주장이 새로운 소그룹 프로그램을 기존의 프로그램과 구별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가정교회 모임이 소그룹 목회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모든 소그룹 프로그램에 공통된 보편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그룹 목회의 다양성이다. 보편적인 성경적 근거 및 방법론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소그룹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한다. 여기서의 다양성은 주로 신학적 차이보다는 방법론적 차이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구역과 속회는 확연히 구별되는 방법론적 차이를 드러낸다. 구역 중심의 소그룹 시스템에서는 구역이라는 한 종류의 소그룹이 존재하는 반면, 속회 중심의 소그룹 시스템에서는 속회,’ ‘신도반,’ ‘선발신도반이라는 다층적 소그룹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구역 방식을 따르면서도, 다양한 목회 사역을 위해 별도의 소그룹을 조직하는 이른바 메타모델은 소그룹 목회의또 다른유형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의 방법론적 차이가 소그룹 목회의 다양성을 낳는다.

 

셋째는 소그룹 목회의 영성이다. 소그룹 목회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소그룹의 다양성), 이러한 유형들은 그것을 채택한 교회공동체의 영성을 반영한다. 영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및 정의가 가능하지만, ‘소그룹과 영성을 다루는 이번 강의에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정의하자.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인간에 대한 이해 및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긴밀히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유형의 소그룹 목회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에 근거한 영성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웨슬리 신학(아르미니안주의)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웨슬리 영성은그리스도인의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소그룹 유형, 곧 다층적 구조의 속회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많은 현장 목회자들이 소그룹에 대한 위의 세 가지 원리를 학습할 기회가 없었기에 소그룹 목회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에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주요 신학교에서 위의 내용을 강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중에 출판된 다양한 소그룹 목회 관련 서적들 역시 소그룹의 보편성만을 서술하거나, 소그룹의 다양한 유형들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거나, 혹은 자신이 지지하는 소그룹 방법론이 가장 효과적이고 신학적으로도 건전한 유형이라고 주장할 뿐, 소그룹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구별하고 다양성을 영성의 차이와 연결하여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건대, 소그룹 목회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은 신생하는 개별 프로그램들을 추적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다양하며 변하기 쉬운 목회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숨겨진 원리를 발견해야 하듯, 매일같이 새롭게 소개되는 변화무쌍한 소그룹 목회 프로그램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그룹 목회의 핵심 원리 세 가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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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그룹 목회의 보편성 가운데 하나인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성경은 특정한 소그룹의 유형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소그룹 유형(혹은 방법론) / 성경적이라고 말할 있는 기준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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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7. 1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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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득 저, 부흥과개혁사 출판)라는 제목의 도서가 한국 교회 안에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다. 기독교가 복음의 정신을 따르기보다는 현대 경영학 이론에 따라 성장과 부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작금의 한국 교회가 경영학적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이러한 현상의 근원을 레슬리 뉴비긴이 근대 서구 문화를 분석하며 지적한 계몽주의적 특징 곧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으로부터 설명할 수도 있다.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복음과 서구문화
국내도서
저자 :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 홍병룡역
출판 : IVP 2005.06.10
상세보기

 

근대 서구 문화를 특징 짓는 계몽주의적 관점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한다. “서구 문화의 결정적인 특징, 곧 인간의 삶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누고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두 가지 특징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라는 점이다.”(p. 48) 공적 영역은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가치의 영역은 배제한 채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혹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 ‘사실의 영역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목적과 가치를 이야기하기에 공적 영역에 자리를 잡을 수 없으며, 개인의 선택이 보장되는 사적 영역에 위치한다. 근대 서구 문화에서 사적 영역에 내몰린 기독교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정받을 수 없기에, 개인으로부터 선택받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토머스 루크먼(Thomas Luckman)은 이렇게 표현한다. “일단 종교가 사적인 문제로 규정되면 각 개인은 궁극적인 의미들로 즐비한 진열장에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p. 185 재인용) 종교는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안전한 터전을 찾았지만, 결국에는 상품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북미에서 교파주의가 크게 일어나게 된 하나의 사회학적 배경 역시 개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상품명(label)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근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군사정권시대를 경험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에 더욱 주눅이 들었다. 군사정권시절, 복음주의 기독교가 내세운 정교분리원칙은 레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계몽주의 정신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한국 기독교가 진열대에 전시된 상품이 되고, 개개의 교회는 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마케팅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회학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만일, 한국 교회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지적을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근대 서구 문화 속에서 사적 영역의 상품으로 전락한 기독교를 다시금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내려 했던 레슬리 뉴비긴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모든 나라를 향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통치와 주권을 선포하는 복음의 담지


자와 같다
.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권세를 추종하는 잘못된 충성을 회개하고 유일하게 참된 주권자를 믿음으로써, 다 함께 모든 자연과 모든 나라와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단 한 분, 곧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키는 표지요 도구요 맛보기가 되자고 요청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나와 안전한 종교적 거류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왕권을 전하는 일꾼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부르는 것이다.”(p. 159)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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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17. 12. 1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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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소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거나, 현재 시간을 무시하고 바로 5년 뒤 혹은 10년 뒤로 앞서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이하며, 열두 달과 365일로 구성되어 있는 2017년을 하루하루 살아가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은 우리의 한계를 명확히 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장소가 있고 태어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시간과 그 장소 역시 주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토록 자명한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기 자신은 영원히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 90:12)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 그래서 나 자신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분명한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은 이 글을 받아 읽게 될 독자들의 형편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입니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다스리고 있었던 소아시아라는 지역적 한계 안에 있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였던 네로와 도미티안이 로마의 황제로 앉아 있는 시간적 한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속국인 소아시아라는 공간적 제약, 기독교를 박해하는 네로와 도니티안 시대라는 시간적 제약을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요한계시록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소개합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패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1:8)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 나에게도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자신의 모든 일이 창조주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두려움과 경외함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1]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갈 때, 하나님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을 선물로 주십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hanjin0207.tistory.com



[1] John Calvin, Institutes, 1. 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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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17. 12. 1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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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무리하며 새로운 한해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근거로 내일을 예측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죠. 그 중에서는 희망차고 기대가 되는 예측이 있는 가하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때로는 두려움이 생기게 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 그리스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어김없이 다가오는 내일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참된 신앙인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째로, 참된 신앙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보다 삶의 기준이 조금 높지요. 사람들의 생각이나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기에 더욱 엄격한 경건과 선행이 우리들에게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지난 일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기준에 도달하기에는 참으로 멀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인으로 올해에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혹은 성경을 많이 읽어보겠다고, 혹은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겠다고 다짐하며 한해를 시작하였지만 연말이 되면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한 것뿐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한 남성으로, 가장으로 가정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겠다고 노력해보았지만 여전히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더 잘 해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지요.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연약한 죄인일 뿐인데, 성경의 기준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의 소망을 경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기준과 나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차이를 인식합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의 기준과 나의 모습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합니다. 바로 그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기준과 나의 현실 사이를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우리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너무도 멋진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을 “보좌에 앉으신 이”로 묘사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선언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다면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할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 한 말씀을 덧붙이지요.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지난 일년, 리의 모습을 진실하게 돌아본다면 그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지금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분께서 신실하고 참되다고까지 덧붙이시면서 선언하셨다는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내일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지 않겠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날마다 새롭게 빚으시고,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망이 넘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간이 흐르고 또 한해가 지나간다는 사실은 절망과 포기의 이유가 아니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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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17. 12.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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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당혹감이 찾아오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장면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똑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약 3년 정도의 공생애 사건이 있은 이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건이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점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당혹감은 비단 성경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당혹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 더욱 성숙하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이죠.

 

 

거리감 -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들었으며 예수님의 삶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있어요.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쩌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 3절과 4절이 묘사하고 있지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겉모습이에요. 요한복음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매우 문학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지요. 9절을 보시면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배에 올라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죠? 바닷가에 서계십니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배와 예수님께서 계신 바닷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 거리가 약 50칸쯤 되었다고 말하는데(8),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00m가 조금 못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약 100m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한 때는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였고, 한 때는 한 방에서 잠을 자고, 한 때는 그분의 품에 안겨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오신 거에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긴 거리가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 요한복음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의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4절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이지요. “날이 새어갈 때에이것은 빛 줄기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밝은 새벽 빛이 비추었다는 의미도 아니죠. 어두움과 빛이 서로 섞여있는 상황, 빛이 비추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광명이 드러나지는 않아 그 영광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 곧 우리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삶에 열매가 없다고 느껴지세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세요. 그것은 그저 우리의 겉모습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예수님을 만났던 경험도 있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에 대한 체험도 분명히 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사랑의 음성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과거의 경험일 뿐 지금 나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약 100m에 이르는 거리가 있어 내가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며 바닷가에 서 계시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이 아직 걷히지 않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지 1년이 더 지나간들, 3년이 지나간들, 아니 10년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 각성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조금도 성숙하지 않은 채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깨우침 주님이시라

 

어두움과 빛이 섞여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그때. 어디선가 베드로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마디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이 먼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베드로를 향해 외치죠.


주님이시라


어떻게 베드로보다, 혹은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았는지는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가 아직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제자들에게 소리쳤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이 여기 계신다

 

베드로의 영혼을 깨우는 이 외침에 베드로는 급하게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하지요.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8절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예수님께서 계신 육지로 올라오는 거에요. 드디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약 100m 정도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놓여있었던 100m 는 제자들이 수영을 하든, 배를 타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는 거리였던 것이죠. 사도 요한의 그 한마디 주님이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라는 그 외침이 제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100m를 이동하게 말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전도자들이 감당하고자 했던 역할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보좌에서 이 땅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 어떠한 전도자의 선언도 공허한 울림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 전도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이시라,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 “우리 인생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분이시라고 소리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외침은 사실 우리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전도훈련까지 받는다고 박수를 받지만 우리 스스로가 내 모습을 가장 잘 알죠. 여전히 주님과의 거리가 있어요. 여전히 바닷가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예수님을 못 본 척 내버려두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해 소리를 치고 싶은 거에요.


주님이 여기 계신데, 왜 그물만 붙잡고 있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바다로 뛰어들지 않고 있느냐?”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발견하셨다면, 여러분께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사도 요한과 같이 소리 치십시오. “주님이 여기에 있다, “주님이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소리 치십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어두움을 뚫고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한 외침이 들린다면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여러분의 귓가에 분명히 들린다면 용기를 내어 바다로 뛰어 내리십시오. 어두움과 추위를 무릅써야 하겠지만, 그 바다 저편에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식사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00m 정도의 거리를 베드로는 수영을 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는 8절과 그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육지에 도착한 9절 사이에는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시간의 흐름이 숨어있겠지요. 그렇게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육지에 도착하자 잘 준비된 식탁을 발견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9)

 

여러분도 숯불에 음식을 구워보신 적 있으시죠? 특별히 야외에서 숯불로 음식을 구우려면 인내가 필요해요. 숯불이 막 피어오를 때, 열기가 화로에 가득할 때는 음식을 잘 구워낼  수 없어요. 불이 활활 타오르다가 어느 정도 잦아들어서 불길이 아니라 열기가 화로에서 흘러나올 때 그 열기로 음식을 구웠을 때 가장 맛이 좋은 숯불 구이가 되는 것이지요. 제자들에 육지에 올라와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막 불이 타오른 것이 아닙니다. 숯불을 피우고 어느 정도 불길이 잦아든 후 그 위에 생선도 굽고 떡도 굽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누가 불을 피우고 누가 제자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10절에 그 답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준비하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하신 것 같아요. 준비하신 숯불에 생선 한 두 마리를 더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잡은 생선을 얼마나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죠? “조금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실제로 필요한 물고기는 그저 예수님과 본문에 등장하는 7명의 제자들이 아침식사로 나눌 수 있는 두세 마리의 물고기면 충분한 거에요.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모여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생선과 떡도 굽고 그날 새벽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한두 마리 더 놓고 이제 요리가 시작됩니다. 지난 밤 바닷가에서 추위를 견디어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피워 두신 숯불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기 시작하지요.

 

, 이제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12a)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시죠.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3)

 

그날 아침 식사 당번은 예수님이셨나봐요. 제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요리하신 음식을 직접 가져다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여 지쳤있던 제자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멀리만 계셔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의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아침 식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날의 따뜻한 아침식사를 묘사하면서 요한복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삽입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12b)

 

저 멀리 바닷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도 그들의 심령을 일으켜 깨우는 외침 주님이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던져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그곳에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따뜻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비로서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따뜻한 식사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비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주님은 찾아오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그물에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과의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큰 물고기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저 주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생선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생선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내어 놓는 그 작은 생선을 주님의 숯불 위에 올려주시며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따뜻한 아침식사에 여러분을 불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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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7. 11.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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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의 하나님

 

나훔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1]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1:2a)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1:3a)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인간의 죄악을 인내하시지만, 그렇다고 벌을 거두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에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1:6a)

 

우리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비로서 두번째 교훈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7a)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으며, 하나님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재앙과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뿐입니다.[2]

 

 

역사 속에 들어나는 하나님의 성품

 

나훔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곧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이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나훔서의 주제이기도 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성의 멸망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시기는 아마도 앗수르제국의 힘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3] , 니느웨 성을 수도로한 앗수르 제국이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감추어진 죄악상을 정확히 꿰뚤어

보고 계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3:1)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그들의 겉모습은 힘이 넘치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웠지만 그들의 도성에는 거짓, 포악, 탈취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은 시체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느웨의 죄악을 직시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3:5-6)

 

모든 사람들이 니느웨 성의 화려함과 강한 군사력에 넉을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바라보시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지만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앗수르 제국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애굽의 오랜 수도였던 노아몬입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으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3:8-10)

 

애굽의 수도였던 노아몬(지금의 테베)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보다 더욱 힘이 강하였고 동맹국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훔 선지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으로 재앙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은 나훔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이 알아야 했던 두 번째 진리 곧 하나님만이 환난 날에 피할 산성이 되어주신다 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앗수르 제국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지요.

 

 

재앙의 날을 이겨내는 두 가지 진리

 

재앙과 아픔의 시간이 때로는 우리 앞을 막아 설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러면 기도를 통해 깨닫는 첫번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재앙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구나.” 기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재난과 아픔을 당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재앙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1:7a) 사방이 막혀있는 현실 속에서도 이 하나의 진리가 들려오기에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나훔 1:2-8은 운율을 갖춘 알파벳노래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은 니느웨에 대한 두 권의 예언서(나훔&요나)가 상호 보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훔서가 끝까지 거스르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1:3) 요나서가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4:2), 나훔서 역시 하나님을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선언하며(1:7) 요나서 역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한다(1:2). Cf. 노세영, <나훔, 하박국, 스바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48-49. 

[3] Ralph L. Smith, <미가-말라기>, vol. 19 of WBC (서울: 솔로몬: 200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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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17. 11.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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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기독교 신앙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외관적인 특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특정한 지역 교회에 등록을 하거나, 자신의 신상명세서에 기독교인이라고 기록하거나, 혹은 음식을 앞에 두고 식사 기도를 하거나,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특징이 한 사람의 내면에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규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해볼 수 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 없이, 신구약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재,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을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으며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길에 접어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그 안의 다양한 교단과 종파를 모두 포괄한 의미다. 다양한 교단과 종파들 사이에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기독교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의 핵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1]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과 관련한 예배, 기도, 말씀 생활, 봉사 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삶에 등장하는 가정, 고난, 소명, 재물 등의 주제를 담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 공동체와 관련된 주제들, 곧 정의, 평화, 민족, 생태계 등의 주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핵심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성경에 대한 단순화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수렴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함께 다를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예배는 신적 존재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참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기독교인이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인간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답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과정은 자신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과제와 주제들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출발점이지만, 삶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과제와 주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기독교인들 개개인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어떠한 기독교인도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으며 그들이 마주치는 과제 역시 다양하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모습의 신앙 여정을 지나온 성도들이라도 그 모든 과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동일한 고백에 이르게 된다.

 

인생의 모든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1]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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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7. 10. 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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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폭발 신교재(JUST EE)의 특징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새로운 교재를 출판하여 2017년 하반기부터 판매하고 있다. 이번에 도입한 교재는 전도폭발 클래식 버전(CLASSIC EE)을 전도폭발 저스트 버전(JUST EE)으로 개정한 것으로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시대적, 교회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설명한다.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기존의 교재를 개정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핵심은 전도폭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함이다. , 전도폭발 훈련은 (1) 훈련 과정이 힘들지만 (2) 노력한 것에 비해 성과가 적은 프로그램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교회 안에 확산되어 있다는 현실 인식이다.[1]

 

먼저 훈련 과정이 힘들다는 인식의 중심에는 암기가 놓여있다. 전도폭발은 복음제시 개요를 암기하게 되어 있고, 성경구절 및 예화 역시 암기하도록 요구한다. 전도폭발은 매주 일정 분량을 암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장에서 실습해야 하기에 암기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암기 외에도 매주 숙제 및 학기말 시험은 전도폭발이 강도높은 훈련이라는 악명을 얻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힘든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전도 현장에서는 활용도가 낮다는 비판도 있다. 복음제시 전문은 약 45분 분량인데 전도 현장 특히 노방전도 에서는 너무 길어서 전도대상자가 집중하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훈련을 받을 때 45분 분량으로 암기를 하였기에 전도의 현장에서 20, 혹은 10분 이내로 복음의 핵심만을 제시해야 할 때 융통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전도폭발에 대한 위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재 JUST EE를 출판하게 되었다.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공식적으로 7가지 항목이 개정되었다고 밝히지만,[2]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복음제시의 단순화. 기존의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20분 분량으로 줄였다. 복음제시의 개요는 그대로이지만, 성경구절 및 예화가 생략되거나 교체되었다. 복음제시를 단순하게 개정한 것은 두 가지 대상에게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데, 먼저는 훈련을 받는 사람(훈련생)이며 또한 복음제시를 듣는 사람(전도 대상자)이다. 다시 말해, 훈련 과정에서의 부담을 줄어주고 전도 현장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변경한 것이다.

 

복음제시를 개정하였기에, 그에 따르는 훈련 교재 역시 개정할 수 밖에 없었다.[3]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13주 과정에서 12주 과정으로 짧아진 것이지만, 이는 기존 CLASSIC EE 5~7주 과정(3) 5~6주 과정(2)으로 재편성한 것으로 내용상의 큰 변화는 아니다. JUST EE 교재에서 내용상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1단계 교재가 20분으로 조정된 <복음제시 1단계>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2단계 교재는 CLASSIC EE의 복음 제시와 거의 비슷한 분량의 <복음제시 2단계>를 추가로 학습한다는 점이다. CLASSIC EE 1단계에서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학습하고 2단계에서는 훈련자 교육을 받는데 비하여, JUST EE 1단계에서 20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학습하고 2단계에서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학습하는 구성이다.[4]

 

 

복음제시의 점증적 확대

 

새롭게 개정된 전도폭발 교재를 지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답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기존의 CLASSIC EE 교재로는 JUST EE 교재가 추구하는 방향, (1) 훈련의 부담을 줄이면서 (2) 보다 실용적인 훈련을 추구하기에 부족하였는가? 필자는 지역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진행하는 사람으로 JUST EE의 출판을 환영하면서도 CLASSIC EE 교재만으로도 얼마든지 JUST EE가 추구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폭발은 암기와 과제가 많고 현장 실습에 대한 부담이 가중하다는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나아가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학습하였기에 전도 현장에 따라 20, 혹은 10분 이하로 복음을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므로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20분 분량으로 단순화 시키면 훈련생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전도 현장에서 보다 자유롭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JUST EE의 핵심이다. 그러나 CLASSIC EE에서도 복음제시를 학습할 때 은혜 인간 하나님 그리스도 믿음의 순서로 암기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그 대신 복음제시 개요를 먼저 학습하고, 그 위에 성경구절과 예화 등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학습합니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훈련생들이 복음을 학습할 때, 복음제시 전문을 암기하기보다는 복음의 개요(outline)을 학습한 뒤 그 위에 내용을 점증적으로 채워가도록 안내한다. 먼저, 개요의 골격[5]이 어긋나지 않도록 충분히 학습한다. 그리고 삼 분짜리 복음제시를 제공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오 분, 그리고 팔 분짜리 복음제시로 확대시켜준다. 계속해서 복음제시를 확대하여 구체적인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일 분 이든, 한 시간이든 복음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한다. 짧은 복음제시와 함께 긴 복음제시를 제공하여, 훈련생들이 주어진 자료들을 가지고 기본적인 개요 위에 자신들의 복음제시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한다.[6]

 

제임스 케네디 목사가 제시한 점증적 확대방식을 지역교회에서 받아들인다면 전도폭발 복음제시 전문이 45분 분량이든 20분 분량이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훈련생들은 전도폭발 복음제시 개요를 먼저 학습하고 그 위에 성경구절과 예화를 추가하여 3분짜리 복음제시, 5분짜리 복음제시, 10분짜리 복음제시를 자유롭게 전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만일 지역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시행하면서 훈련자들이 45분 복음제시를 암기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면서도 현장에서는 3분 혹은 5분 혹은 10분 동안 복음을 제시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점증적 확대의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통째로 암기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복음제시 개요를 먼저 암기하고 그 위에 살을 덧붙이는 점증적 확대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CLASSIC EE과 새롭게 개정된 JUST EE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단 하나다. CLASSIC EE에서는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1단계에서 모두 학습하고 2단계에서는 1단계를 복습하며 다지는 과정이라면, JUST EE에서는 1단계에서는 20분 분량까지만 학습을 하고 2단계에서 45분 분량의 복음제시를 학습한는 점이다. 전도폭발 한국본부가 제시하는 것처럼 20분 복음제시를 최종 목표를 생각한다면 JUST EE가 훈련의 부담을 줄여준 것일 수 있지만, JUST EE <복음제시 2단계>를 최종 목표로 생각한다면, 제임스 케네디 목사가 제시한 점증적 확대의 방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전도폭발 훈련의 현장에서는 CLASSIC EE로부터 JUST EE의 변화는 훈련 진도의 속도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전도 폭발은 수료인가 반복인가?

 

전도폭발 한국본부에서 새로운 교재 JUST EE를 출판한 것 역시 전도폭발 훈련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 곧 점증적 확대방식을 우리 시대에 새롭게 발현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CLASSIC EE역시 점증적 확대의 방식이 훈련의 원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지역교회가 45분 복음제시를 통째로 암기하도록 훈련하였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새로운 교재 JUST EE1단계와 2단계 구성을 통해 점증적 확대의 방식을 지역교회가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점증적 확대의 원리 외에 지역교회에서 새롭게 추구해야 하는 전도폭발 훈련의 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필자는 단 하나의 원리가 전도폭발 훈련 전체를 견인한다고 생각한다. , “현장실습이 훈련의 핵심이다는 원리다.[7]

 

전도폭발 훈련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교실 수업이고, 또 하나는 현장 실습이다. 그런데 교실 수업과 현장 실습 사이에는 방법론적 차이가 존재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방법론적 차이란 수료반복의 차이다. 목회 프로그램은 방법론적 차이에 따라 크게 수료하는 프로그램과 반복하는 프로그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료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제자훈련이다. 제자훈련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수료증이 발급되고, 수료증을 받은 사람은 스텝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반복하는 프로그램은 아무리 오랜 시간 참여하여도 수료증이 발급되지 않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은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구역 예배나 큐티 나눔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전도폭발은 수료하는 프로그램인가, ‘반복하는 프로그램인가? 언듯 보기에 전도폭발은 1단계부터 5단계까지 구성된 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1단계를 수료하면 전도자 수료증이, 2단계 이상을 수료하면 훈련자 자격증이 발급된다(CLASSIC EE 기준). 그러나 전도폭발은 교실 수업과 현장 실습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기억해보라. 교실 수업은 단계별 강의가 중심이 되기에 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현장 실습은 다르다. 1단계부터 5단계까지 혹은 5단계를 수료한 사람들까지도 현장 실습을 주도하는 훈련자와 뒤따라가는 훈련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 방문 전도와 노방전도를 통해 매 학기 팀 전도를 9회 이상, 개인 전도를 2회 이상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도폭발의 현장 실습은 훈련 단계와 상관없이 반복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전도폭발의 기본 원리에 따르면, “현장실습이 훈련의 핵심이다.” 만일 지역교회의 전도폭발 훈련에서 4단계, 혹은 5단계를 수료한 사람이 훈련자나 교사로 참여하지 않는 한 전도폭발에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라면, 그것은 전도폭발이 수료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는 증거요, 곧 현장실습보다는 교실 수업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이 실제적으로 현장 실습에 그 핵심을 둔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4단계, 혹은 5단계를 수료하더라도 지속적으로 현장 실습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전도폭발의 개정된 교재를 이야기하면서 전도폭발의 기본원리인 현장실습이 훈련의 핵심이다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전도폭발 한국본부에서는 교재를 개정하여 JUST EE 버전을 내어놓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목회 현장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지속하다 보면 훈련생 모집에 점차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전도폭발 훈련의 과정이 어렵고 힘들다는 인식은 지역교회가 훈련생 모집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전도폭발이 수료하는 프로그램이 된다면 지역교회는 날마다 새로운 훈련생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특별히, 두 사람의 훈련생에게 한 사람의 훈련자를 배치하는 구조이기에, 전도폭발 훈련을 받은 성도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난 학기보다 두배로 많은 훈련생을 모집해야 한다.[8] 한국 교회가 성장기를 지나 정체기 혹은 쇠퇴기에 접어든 지금 매 학기 두 배의 훈련생을 모집해야 한다는 부담은 전도폭발 훈련 자체를 마비시키는 원인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법은 오히려 간단히 찾을 수 있다. 전도폭발 훈련을 수료하는 프로그램이 아닌 지속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실 수업의 단계를 기준으로 훈련자/훈련생을 구성하는 기준을 느슨하게 하고, 그 대신 단계와 상관없이 현장 실습을 지속할 수 있는 구조와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 현실에 맞춰 적절한 숫자의 훈련생을 모집할 수 있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한 현장 실습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교재의 개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전도폭발을 시행하는 목회자들의 역할이다. 전도폭발을 현장실습 중심의 훈련으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교재가 출판되더라고 그 훈련은 시간이 갈 수록 힘이 들지만 성과는 적은 훈련이 되고 말 것이다.

 

 

 

 



[1]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공식 문서에서수정 보안의 이유 다음의 다섯 가지로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1) 전도폭발 45분의 복음제시 암기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과, 전도 대상자들 역시 복음제시 저체를 한번에 듣기에는 너무 버겁다는 견해 (2) 전도폭발사역은 암기와 더불어 숙제점검, 현장실습, 종합시험, 구두복음제시 시험 등등 다양한 점검으로 너무 버겁다는 견해 (3) 전도폭발사역은 시대적 흐름에 비해 훈련 기간이 길다는 견해 (4) 교재가 너무 크고 디자인이 낙후되고 휴대하기가 불편하다는 견해 (5) 13 훈련을 마친 훈련생들이 1단계 훈련사역의 분량이 너무 많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가 어려워 훈련자 되기를 기피하고 있다는 견해.” 국제전도폭발 한국본부, <지역교회에 보낸 공문>, 2017 6.

[2] 전도폭발 한국본부가 제시하는 공식적인 개정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2) 교재가 예쁘게 단장되었습니다. (3) 교과 과정이 조금 쉬워졌습니다. (4) 교실 수업과 전도 현장의 연계성을 강화하였습니다. (5) 복음제시가 단순화 되었습니다. (6) 훈련자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7) I단계를 수료하면 훈련자 자격증을, II단계 이상은 수료증을 드립니다.” 국제전도폭발 한국본부, <JUST EE 설명회 자료>

[3] 2017 하반기에는 JUST EE 위한 1 단계와 2 단계 교재를 출판하였고, 3단계 이상은 2018 출판 예정이다. 그러나 복음제시를 학습하는 단계가 1단계와 2단계이므로, 3단계 이상 교재의 개정은 전도폭발을 시행하는 지역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핵심적인 변화는 아니다.

[4] 전도폭발 한국본부는 2단계 복음제시를 선택사항으로 제공하기에 1단계 훈련을 마친 사람이 훈련자가 있다는 점에서준훈련자 제도가 없어졌습니다라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5] 제임스 케네디는 복음제시에 있어서 개요를 골격’(skeleton)으로, 성경 구절을 근육’(muscle)으로, 예화를 ’(flesh) 비유한다. D. James Kennedy, Evangelism Explosion: Equipping Churches for Friendship, Evangelism, Discipleship, and Healthy Growth, 4th ed.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1996), 15.

[6] D. James Kennedy, Evangelism Explosion, 15-16.

[7] Cf. D. James Kennedy, Evangelism Explosion, 7-8.

[8] 전도폭발은 훈련받은 전도자의 숫자가 제곱의 방식으로 확대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Cf. D. James Kennedy, Evangelism Explosion, 8. 이것은 부흥의 시대에는 크나큰 장점일 수 있지만, 정체기의 시대에는 두배의 훈련생을 모집해야 한다는 크나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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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7. 8. 3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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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팀을 위한 훈련자료입니다. 

단기선교의 (1)정체성, (2)목적, (3)협력, (4)소망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 정체성 http://hanjin0207.tistory.com/476

(2) 목적 http://hanjin0207.tistory.com/477

(3) 협력 http://hanjin0207.tistory.com/478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기에 신앙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그러나 누구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없으며, 우리의 언어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극히 일부분만을 서술할 밖에 없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인들이 쏟아놓는 많은 언어들 속에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욥기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3) 욥기는 욥과 친구들이 나누었던 하나님에 대한 무수한 언어들의 나열입니다.[1] 그런데 그토록 차고 넘쳤던 그들의 언어는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없는 인간들의 말잔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깨닫지 못한 내뱉는 언어였고,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논리를 짜맞추었지만 그것은 헤아릴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결코 담아낼 없었습니다.

드디어 욥은 더욱 깊은 단계의 영적인 체험에 다다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2]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이 있었기에 욥은 풍문으로만 들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할 있었을까요? 욥기 전체를 통해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욥의 고난은 물론 현실적인 아픔이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욥의 고난이란 지금까지의 신앙관으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섬기면 형통의 대로가 열릴 것이라는 기존의 신앙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없는 현실이 욥의 앞에 펼쳐졌습니다. 나아가,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욥의 눈을 열어 하늘과 땅과 우주 만물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38-41).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것입니다.

욥은 드디어 수박 겉핥기 식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6)[3]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티끌과 , 구약성경에서 욥기를 제외하고 한번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지요( 18:27). ‘티끌과 라는 표현이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숨겨진 의미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티끌과 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사명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욥의 고백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죠. 고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티끌과 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 역사를 위한 동역자로 불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선교지은 단기선교팀에게 고난의 현장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고난이란 단지 낯선 문화와 기후,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며 누리던 권리들의 포기 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앙관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없는 현실, 지금 땅에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부르짖음입니다(cf. 왕하 2:14).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 우리는 비로서 풍문으로만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실존을 휘감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며 티끌과 같은 우리를 복음의 일꾼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 우리의 눈을 열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 이것이 단기선교를 떠나는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1] 42장으로 구성된 욥기 가운데 1장과 2장은 욥의 고난을 서술하지만, 3장이후부터 욥과 친구들 사이에 오갔던 하나님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욥기는 스토리보다는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대화) 주된 내용이다.

[2] 욥이 자신의 귀에 들리는 풍문으로만 하나님을 알았을 ,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지 못하여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하였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없구나”( 23:8-9)

[3]거두어들이고라는 말은 풀어졌다, 녹았다는 의미다. 특별히 욥의 마음에 있던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1차적 의미의 회개가 아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에 대해 회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회개 하나님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 도저히 무엇과 비교할 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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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