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선교2017. 7. 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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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팀을 위한 훈련자료입니다. 

단기선교의 (1)정체성, (2)목적, (3)협력, (4)소망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 정체성 http://hanjin0207.tistory.com/476

(2) 목적 http://hanjin0207.tistory.com/477

(4) 소망 http://hanjin0207.tistory.com/479


지난 시간에는 단기선교팀의 정체성과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개인들이 아름다운 팀웍을 이루어야 합니다. 단기선교는 한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팀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단기 선교를 위한 협력을 생각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이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한 몸을 이루는 많은 지체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고전 12:12-27). 하나의 교회는 다양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교회를 한 몸과 많은 지체로 비유하고 나면 여러 가지 적용점이 드러납니다. 먼저, 하나의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다르고, 눈과 코가 다른 것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행동, 나와 같은 감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지체는 다양한 기능을 의미합니다. 손과 발이 다르다는 것은 동시에 손의 기능과 발의 기능이 각각 존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18-19). 결국,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한 몸을 구성하는 다양한 지체이기에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는(26) 운명공동체가 됩니다.

바울은 한 몸을 이루는 많은 지체라는 비유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의 놀라운 혜안에 등장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23) 한 몸을 이루는 운명공동체이기에 덜 귀해 보이는 지체에게 귀한 것을 입혀주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덮어준다는 것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언에서 가장 혁명적인 대목은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다는 주장입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동감 넘치게 하는 것은 힘있고 능력 많은 지체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지체입니다.

한 팀을 이루어 선교지로 출발하는 단기선교팀 역시 한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의 비유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동일한 정체성과 목적을 공유하지만 우리 각자는 성장 배경, 가치관, 일하는 방식, 성격, 은사 등이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서로 다름은 우리가 공유하는 정체성과 목표를 위한 다양한 역할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에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특별히,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는 원리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를 하나의 선교팀으로 묶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단기 선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제시한 한 몸과 많은 지체의 비유는 생각할수록 깊은 통찰력이 넘쳐납니다. 사도 바울의 비유와 같이, 하나의 지역 교회가 한 몸을 이루는 지체와 같다면 그 교회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몸과 많은 지체의 비유로 사도 바울이 묘사하는 교회는 이상적인 천상의 교회가 아니라 문제 많은 이 땅의 고린도교회였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갈등, 음행, 혼란, 부활에 대한 불신앙 등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만 아직 그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선언합니다.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께서 각 지체를 불러 세우신 한 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흠도 많고 실수도 하지만 우리 개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여전히 갈등하고 불의하며 지혜롭지 못하지만 이 땅의 교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것처럼, 여전히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무엇 하나 준비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선교팀의 각 지체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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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7. 7. 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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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팀을 위한 훈련자료입니다. 

단기선교의 (1)정체성, (2)목적, (3)협력, (4)소망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 정체성 http://hanjin0207.tistory.com/476

(3) 협력 http://hanjin0207.tistory.com/478

(4) 소망 http://hanjin0207.tistory.com/479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실제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교회의 모습은 고난과 환란이지요.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최고 리더였던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라는 이름의 섬에 유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환란,’‘궁핍,’‘고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실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단어였고, 무엇보다 일곱 봉인의 재앙이 계속되면서 교회는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6:17)라고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되었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교회의 전체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교회의 참모습을 두 가지 장면으로 묘사합니다. 첫번째 장면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십사만사천 명입니다(1-8).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다는 의미는 환난과 고난의 날이 교회를 뒤덮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뜻이죠(cf. 3).[1]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권력 앞에서 한 없이 약해보이지만, 교회의 참모습을 바라본다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번째 장면은 열방으로부터 일어난 큰 무리입니다(9-12).[2]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영광의 찬양을 부르는 이들은 승리의 공동체, 곧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3]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승리의 찬양을 부르는 교회.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열방으로부터 일어난 승리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여섯 번의 봉인 재앙이 있었지만(6)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일곱 나팔의 재앙이 이어져야 하고(8-11) 용과 짐승의 횡포도 남아 있습니다(12-13). 다시 말해, 교회는 지속되는 일련의 고난이라는 터널 한 가운데 위치해 있을 뿐 아직 그 터널을 통과한 것이 아닙니다.[4]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큰 무리들은 최후의 완전한 승리를 거머쥔 성도들이 아니라, 고난의 터널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힘입어 오늘 하루도 근근이 살아가는 성도들, 그러면서도 구원과 승리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승리의 노래를 믿음으로 선포하는 공동체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최후의 승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교회가 믿음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사실입니다(11-12).

사도행전 이후 오늘까지 이어지는 선교의 여정은 아직 종착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어느 선교사님이나, 어느 선교 단체나, 어느 선교팀도 선교의 최후 승리에 이르렀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지 않으셨기에 우리의 선교는 때로 실패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선교지에 잠시 머무는 단기선교를 통해 위대한 최후의 승리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목표는 언제나 실패로 결론 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선교란 하나님의 이름이 거부당하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받는 선교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거하는 것, 나아가 현실이 어떠하든 믿음으로 아름다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모든 천사들이 우리의 노래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을 영원토록 우리 하나님께 돌리는 위대한 찬송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선교의 목표는 우리의 힘으로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최후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인침 원래적 의미는 세례다(cf. 고후 1:22; 1:13). 요한계시록 7장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 이들은 옷을 입었으며 그들의 손에는 종려가지가 들려 있다(9). ‘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종려가지 승리의 상징이다.

[3] 십사만사천 명과 무리가 각각 다른 대상을 지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 이방인 그리스도인 ). 그러나 교회에 대한 가지 시각이라는 견해가 조금 우세하다. 예를 들어, 첫번째 장면이싸우는 교회’(ecclesia militans) 보여준다면, 두번째 장면이승리하는 교회’(ecclesia triumphans)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4] 최후의 심판은 요한계시록 16 이후에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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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선교2017. 7. 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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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팀을 위한 훈련자료입니다. 

단기선교의 (1)정체성, (2)목적, (3)협력, (4)소망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2) 목적 http://hanjin0207.tistory.com/477

(3) 협력 http://hanjin0207.tistory.com/478

(4) 소망 http://hanjin0207.tistory.com/47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항상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14).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서술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전해줄 디도를 만나지 못해 복음의 문이 열린 드로아를 떠나야했던 장면을 언급했습니다(13). 바울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였으며, 항상 개선가[1]를 부르며 선교지를 방문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을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성공주의 원칙을 가지고 바울의 권위를 공격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우셨다면 어디를 가든 성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처하지만 선교지에서 저렇게 고난을 받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반대자들의 공격을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14). 바울은 향기의 비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2]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는 것이죠(15-16).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를 폄하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선교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는지 여부가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반응에 따라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큰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감당하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 너무도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6b)[3]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과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하나님의 사명에 합당한가?”를 질문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무게를 가늠해보지 못한 이들의 가벼운 질문이었습니다. 사명의 무게를 양쪽 어깨로 메어본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내어 놓습니다(17). 바울을 반대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강점을 내세우기 위해 복음에 자신들의 특징을 첨가하였습니다.[4]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강점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교만 때문이었습니. 그러나 사명의 무게를 가늠해 바울은 자신에게 선교를 감당할 자격도 강점도 없기에 하나님으로부터’(from God),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그리고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말할 뿐입니다.[5]

올해 여름에도, 한국교회의 많은 단기선교팀이 나름대로의 목적과 비전을 선포하며 선교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팀의 구성 및 준비상황을 평가하며 누가 더 준비되었는가?’ 혹은 어느 팀이 더 많은 강점을 가졌는가?’를 질문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 가벼운 질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누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과연 어느 팀이 선교의 사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기에 합당할 수 있는가?” “과연 나와 우리 팀은 어떻게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무리 질문을 해도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고, 우리는 자격이 안되며,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하는 그때, 예수님은 비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되어 항상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며, 어디에서든 우리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시는’(14)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14절의 승리하다’(쓰리암뷰오)는 로마 군대의 개선 행진을 묘사하는 단어다.

[2] 바울이 사용한 향기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의미는 승리이다. 로마 군대가 개선식을 거행할 때 로마 시는 향을 태우며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헬레니즘계 유대교에서는 지혜를 향기로 묘사하곤 했다(cf. 시락 24:20-21). 그러나 바울이 명백하게 언급하는 의미는 구원받는 사람과 망하는 사람 사이의 심판적 의미다.

[3]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이 질문의 의미를 어떻게 내가 그러한 사자가 될 수 있겠느냐?”로 해석한다.

[4]혼잡하게하다’(카페류오)는 포도주에 물을 타는 것과 같이 희석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5] 원문에서 동사는 말하다뿐이며, 세 개의 전치사 구(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말하다는 동사 앞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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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17. 7.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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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인간의 무지

 

오래전 어느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마차도 없었습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지요. 한 사람은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말을 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지요. 마차 안에서 인간이 켜놓은 등불을 누리던 부자는 결코 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별빛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빛도 자신의 앞길을 비춰주지 않는다고 여겼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1]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이라는 등불을 켰지만,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밝히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던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일침이기도 합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조그마한 등불과 같은 진리, 기껏해야 조그마한 마차 안을 밝힐 수 있는 등불을 켜 놓고는 그곳에 만족하며 온 하늘에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이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전체는 인간들의 말잔치처럼 보입니다. 욥기에서 사건을 묘사하는 대목은 그저 1-2, 그리고 마지막 42장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우리는 욥기가 의인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내용은 그저 욥기 1-2장에 조금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대신 욥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은 욥이 쏟아놓은 언어, 욥의 세 친구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입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렇 궁 저렇 궁 참 많은 말을 합니다. 끝도 없고 결론도 없이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계속해서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안다고 하지만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거저 입술로만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욥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합니다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문장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지 그 한 문장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천국 영생은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선언하고 있지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다 헤아려보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나의 마음에 조그마한 등불은 켰지만 오히려 그 등불 때문에 밤하늘에 가득 펼쳐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면 제 3기 전도폭발훈련을 마치는 지금, 우리는 욥과 같이 고백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변화] 하나님의 개입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기는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저 마차 안에서 누리는 밝은 등불 정도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자신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욥기 42장에 이르러 욥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욥이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많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풍문만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몰려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등장해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23:8-9)

 

욥은 당대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대해 많은 지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탄식이 있었어요. ‘내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보이고 뒤로 가도 하나님이 안보인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탄식. 그 깊은 탄식이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은 그 답답한 심정이 해결되었다는 선언을 하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저 하나님께 대해 귀로 들은 풍월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만 이야기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님을 직접 뵈옵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들은 풍월만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 이 장면 사이에 과연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욥기 전체를 통해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욥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의인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어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지식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나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무리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고난의 현장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고난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번째, 매우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평생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달려가고 있던 그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당한 고난의 사건이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선언하십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주도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수많은 생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죠.

욥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이 있었는데, 첫째는 고난의 현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마차 안에 있는 부유한 남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그 안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등불과 같은 조그마한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마차 안에 있는 따뜻한 공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고난의 광풍이 찾아와요. 그 거대한 광풍은 마차를 지금이라도 뒤집어 놓을 것처럼 무섭게 휘몰아칩니다. 그 거대한 광풍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는 고난의 광풍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분석도, 그 어떠한 해석도 그 무서운 광풍을 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차 안에서는 도무지 지금 불어닦치는 광풍을 이겨낼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마지못해 조그마한 마차로부터 밖으로 뛰어나오는 거에요. 처음 마차를 뛰쳐나올 때에는 어두움의 공포가 몰려옵니다. 처음 마차에서 뛰쳐나올 때에는 한 밤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의 온 몸을 엄습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눈에는 비로서 하늘에 가득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안락한 마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눈을 들어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그러고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교재의 내용을 글로 읽고 암기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방식은 고난이었고, 아픔이었고, 인생의 광풍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전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깨닫지도 못한 일을 입술로만 떠들어 댔던 우리에게 강풍을 보내어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나라고 비록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하며, 차가운 밤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지만 조그마한 마차를 벗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온 땅을 뒤엎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오늘 본문 5절의 이 고백은 성경 말씀을 달달 암기한 사람들의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교재의 내용을 달달 외운 사람들은 오늘 본문 5절이 아니라 3절을 고백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문제로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던 분들, 그래서 그동안 안주하였던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나를 막아주는 조그마한 마차라는 보호막이 사라져버렸을 때 비로서 등장하는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던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생의 광풍 앞에서 눈물 흘리셨던 분들이 많으시죠? 지금도 고난의 광풍을 만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신 분들 많으시죠? 여러분, 여러분이 안주하고 계신 그 조그마한 마차를 박차고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그마한 등불도 안락하지만, 때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그곳에는 등불이 주는 편안함도 없고, 그곳에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주는 천막 하나 없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과] 인식의 확대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고, 비로서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풍문 정도를 넘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뵙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욥은 새로운 영적인 단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6)

 

여기에 등장하는 거두어들이고라는 말은 풀어졌다, 녹았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욥의 마음에 있던 갈등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죠.[2] 아울러, 6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1차적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욥은 자신의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에 대해 회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 도저히 그 무엇과 비교할 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3], 곧 영적으로 크게 성숙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6절의 의미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욥이 자신의 마음에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이 놀랍도록 성숙하였다고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티끌과 재라는 구절입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라는 구절은 욥기를 제외하면 구약성경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바로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 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아니 45, 아니 40, 아니 30, 아니 20, 하나님 소돔성에 의인이 최소한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묘사하며 티끌과 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 18:27)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티끌과 같다고 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요.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한 없이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욥 역시 동일한 의미로 티끌과 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았던 욥은 자기 자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티끌로 보이고 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 자신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 그래서 티끌이요 재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대화 파트너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아브라함을 소돔성을 멸망시킬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협상의 대상자, 대화의 파트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용했던 티글과 재라는 용어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나약한 인간의 연약함이 표현되어 있는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고난 앞에서 자신이 만족하고 안주하였던 마차 안이 작은 등불로부터 뛰쳐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는 어두운 밤 길을 헤매는 방황의 장소였고 칠흑간은 어두움 속에서 살갗을 애이는 온갖 추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하늘에 가늑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소였지요. 비로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티끌과 재와 같은 욥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마치 다 깨달은 듯 유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바를 말하는 것이요 스스로 알 수 도 없는 일을 말하는 미련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동안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던 마차 안의 작은 등불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그 경험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그저 풍문으로 들은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마음으로부터 진실되게 선포하는 참된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여러분을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십니다.

  

 

 


 

[1]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비유. 필립 얀시, 홍종락 , <수상한 소문> (서울: 포이에마: 2013), 21.

[2] J. Gerald Janze, <욥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333. 

[3] Francis L. Anderson, Job: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Downers Grove, Illinois: IVP Academic, 2015), 287. 한편, 이군호는 욥의 회개가 교만에 대한 회개였다고 주장한다. 이군호, <욥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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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연구 07 “욥의 회개와 결말” (32장)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에 걸친 폭풍우 언설을 통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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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성경공부" 목차 (Contents)

욥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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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17. 5. 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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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선입관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인데, 야고보서는 믿음을 부정하고 행위만을 강조하는 서신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복음의 핵심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서신들 예를 들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에 비해 그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적지 않은 분들이 야고보서의 대표적인 암송구절인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바른 복음의 진리로부터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지요. 실제로,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무리 읽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 인간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선포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고보서는 기독교의 신앙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누구이며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 지를 설명하는 서신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지만,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상충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진리를 대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말씀이지요.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행위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선물입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대표적인 신약성경의 책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경건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경건생활을 쌓아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잖아요.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고 싶은 것이지요. 그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곧 경건한 삶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의 말씀을 순차적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경건한 삶의 모습을 깨닫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삶을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시련: 경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에 대한 첫번째 가르침, 곧 야고보서의 첫번째 주제는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1:2)

 

말씀 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고난의 주제를 언급합니다. 만일 누군가 기독교의 진리, 곧 복음의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난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하는데 당신은 교회에 나오면 수입의 10%를 꼬박꼬박 교회에 헌금하게 될 것이라고,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헌신을 해야 한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무수한 고난을 당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전도하시는 분은 없지요. 그 대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복음을 전하겠지요. 그러나 야고보서는 이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아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16:24)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우리가 참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우리의 눈 앞에는 고난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3절은 너희 믿음의 시련”, 곧 믿음의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건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 한다면, 그 과정에는 거센 바람도 맞아야 하고, 비에 온 몸을 적시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시인이 봄 날에 피는 아름다운 꽃은 한결같이 바람과 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고 노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믿음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때로는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때로는 비가 내려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3-4)



고난을 바라보는 복음의 관점


그러데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그 뒤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그 이유를 3절이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5:3-4)


그러고 보면 이와 같은 말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쁨게 여기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나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와 같은 로마서의 말씀은 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세상의 관점에서는 결코 있을 수도 없는 교훈이지요. 도저히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2] 그러면서 제 마음에 한 가지 참 중요한 교훈이 떠오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1 2절의 말씀은 도저희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가능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믿음의 길, 순종의 길, 경건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극심한 고난을 받은 믿음의 시련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여 이겨내셨기에 그 뒤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고 만민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실 수가 있었잖아요.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하는 로마서와 인간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야고보서가 그 내용에 있어 서로 상충한다는 주장은 틀렸습니다. 로마서 역시 복음의 능력으로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기뻐한다고 선언하고, 야고보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기초로 하여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여도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가 있느냐구요?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기어졌기에 그 복음이 아름다운 경건의 꽃과 경건의 열매로 이어지기 위해 때로는 강풍과 비바람을 맞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을 우리 가슴에 새겨진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가르치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건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입어 그 고난을 이겨내는 삶입니다.[3]



지혜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


야고보서는 믿음의 시련이 찾아올 때 온전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죠. 다시 말해, 고난의 현장까지도 복음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곧 복음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누가 주시나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만을 이야기한다고요?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야고보서는 고난 중에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은혜로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고 선언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꾸짖으시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수 있도록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늘의 지혜를 넉넉히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어요. 언제나 넉넉히 주시는 분이시고,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만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믿을 수 없는지를 오늘 본문 6절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6)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바닷가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이 불어 올 때는 파도가 높이 솟구쳐올라갑니다. 그러나 곧 아래쪽으로 푹빠지고 말지요. 이렇게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푹 내려가는 파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니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잠시 잠깐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 같으면 마음이 교만해져서 높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요. 그러면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마치 파도가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한층 고양되었다가 금방 가라앉고 마는 모습이지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1:8)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로 고난까지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 저곳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줄 수 있는 믿음의 항구는 오직 우리에게 풍성한 하늘의 지혜를 예비하신 우리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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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17. 5. 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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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때로는 원치 않게 잠시 멈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지만 그 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잠시 멈춤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Scene One #1. 성전 재건에서의 잠시 멈춤

 

유대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 유대 백성은 자유롭게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명령을 내립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싸인으로 알고 이미 정착하고 있었던 바벨론 땅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물론, 바벨론에서 그들은 포로의 신분이요 이방인의 자리였지만 나름대로 당대 최고의 문화를 누렸던 바벨론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정착을 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 번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리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꿈과 비전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박차고 일어나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명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결코 쉽고 안전한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70년 전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모든 성읍과 성전과 성벽이 초토화된 이후, 그 누구도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폐허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하나님의 꿈과 비전, 곧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어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꼭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준비를 시작하자 그것을 방해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참으로 치밀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독립된 국가가 이룬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건축을 방해하려는 이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지요.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를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성벽을 건축하려고 준비한다는 거짓 조서를 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하수에로 황제는 그들의 편지를 사실로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대인들의 모든 건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시작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방해가 없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원치 않게 잠시 멈추는 사건, 잠시 멈춤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Scene One. #2. 다시 시작되는 성전 재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크게 낙심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명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가 그들입니다.

 

학개와 스그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 가슴에 품었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베르시아의 황제에게 거짓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잖아요?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들이 건축하려는 것은 군사적 목적을 가진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며, 이것은 이미 오래전 고레스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황제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죠. 드디어 답변이 도착했어요. 황제가 모든 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이 거짓이고, 유대인들의 설명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성전 건축은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잠시 멈추어야 할 상황, 잠시 방해를 받는 상황, 억울하게 누명을 써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Scene Two #1. 바울에게 닥친 잠시 멈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사명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지요. 바울은 이와 같은 사명을 가슴에 품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서 큰 환란과 고난을 받을 것은 예상하였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고난을 당하고 매를 맞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위한 발걸음이 가로막혀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로마까지 가야 하는 바울의 발목을 붙잡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지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규합해서 바울을 해치려고,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바울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바울을 보호하려고 하고. 예루살렘에 일대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예루살렘의 통치권이 유대인들에게 있지 않았지요. 그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예루살렘의 소동에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이 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잖아요. 그러므로 로마 시민이 공정한 재판도 없이 유대인 무리에 의해 피살당하도록 놓아 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재판을 합니다. 그는 바울을 한 편에 세우고 다른 한 편에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재판을 위해 양쪽의 의견을 듣지요. 그 결과 유대인들은 대단히 소리를 높여서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리 그들의 논리를 들어봐도 바울을 죽일 만한 구체적인 범죄 사실이 없는 거에요. 그저 시기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고발하지만, 증거도 없고 범죄 사실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을 그대로 석방하고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만일 바울을 풀어준다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 결정에 불복하고 로마 제국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로마 군대의 천부장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에서 바울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로마 시민인 바울을 증거나 명확한 죄도 없이 처형할 수도 없으니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결국 로마 군대의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 곧 당시 유대 지역 전체를 통치하고 있었던 벨릭스 총독에게 이 사건을 넘깁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들은 가이사랴라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천부장은 군대의 호위 속에서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물론, 바울을 죽이려고 그를 고소하고 고발했던 유대인들도 함께 가이사랴로 올가 갔지요. 그런데 유대 총독 벨릭스 역시 무엇이라고 딱히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이 처해있던 상황과 동일하지요. 유대인의 손을 들어주자니 로마 시민인 바울을 죄도 없이 처형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바울의 손을 들어주자니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을 향해 불만이 고조되면서 자신의 유대 지역 통치가 어려워 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벨릭스 총독 역시 이 재판의 판결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성경은 그 기간이 2년 이었다고 기록합니다. 2년 동안 바울은 재판을 받는 죄인의 신분, 그러나 유죄도 무죄도 판결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신분으로 그저 가이사랴에게 재판의 결과만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의 공백이 흐른 뒤 유대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뀝니다. 이제 새롭게 유대 땅을 다스리게 된 총독 베스도가 드디어 바울을 다시 한번 신문하고 재판을 하는 장면을 오늘 본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있는 25장과 바로 앞의 24장 사이에는 2년 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존재하고 있어요. , 바울의 마지막 사명을 위한 로마로 가는 길에 원치 않게 멈출 수 밖에 없었던 잠시 멈춤의 시간이었습니다.

 

2년 동안 사도, 바울의 전도하고 선교하는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멈출 수 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습니까? 사도 바울은 1, 2, 3차 전도여행으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조금 더 넓게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성령께서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신다는 그 말씀을 따라 복음의 역사가 쉼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에서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주장으로 복음 전도의 길이 멈추어 버렸어요. ‘잠시 멈춤이지요.

 

 

Scene Two #2. 로마를 향한 발걸음

 

드디어 2년의 공백이 끝나 갈 때 쯤, 벨릭스의 뒤를 이어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베스도 총독이 사도 바울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이지요.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6)

 

재판은 재개하였지만 2년 전의 모습이 여전히 동일하게 전개됩니다. 먼저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꺼내지요.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7)

 

그들의 주장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또 한가지 그들의 주장에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 역시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바울 역시 계속해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8)

 

어쩌면 2년 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치러지던 재판과 지금 베스도 총독이 주최하는 재판이 이와 같이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원고측인 유대인들의 주장과 자세도, 피고측인 바울의 주장과 자세도 모두가 2년 전과 동일합니다.

 

이제 베스도 총독이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2년 전과 동일하게 쉽게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 줄 수가 없어요. 더욱이 베스도는 이제 막 총독으로 부임을 했기에 유대인들의 입장을 더욱 무시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을 처벌하려니 증거도 없이 로마 시민을 사형시킬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베스도는 제 3의 길을 선택합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9)

 

베스도 총독은 지금 바울이 유죄 혹은 무죄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재판의 장소를 지금 이곳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재판을 하자는 것은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제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분명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바울은 죽여야 되겠어요. 그래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마 군대의 호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무력으로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요. 베스도 총독은 그와 같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통치 기반이 되어줄 유대인의 청을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이 지난 2년 동안 자신의 마음에 있었던 중대한 결심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 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0-11)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가이사 곧 로마의 황제 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로마 시민에게는 지역의 재판이 불공정하다고 생각될 때 황제가 있는 로마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로마를 향한 자신의 발걸음이 묶여 있을 때 마음에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비록 죄인의 신분이고, 비록 피고인의 신분이라도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로마로 가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그 다음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주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가이사께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노라

 

지난 2년 동안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었습니다. 로마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지금 진행되는 재판이 하루 빨리 해결되기를 원했겠지요. 억울한 재판이니, 상대방의 공격이나 주장이 거짓이니, 유대인들이 자신을 모함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여 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돼요. 자신을 재판하던 천부장은 재판을 미루고 미루다 유대 총독에게 미루어버렸어요. 당시 유대 총독으로 있던 벨릭스는 재판의 마지막 판결을 또다시 미루고 미루면서 자신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할 때까지도 2년 동안 판결을 안내려요. 그 모든 과정에서 바울은 결심을 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이 재판을 통해 풀리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죠. 자신의 죄인의 신분, 피고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여전히 피고인,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장에 품고 로마로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원치 않는 잠시 멈춤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경우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던 유대인들과 같이 용기를 내어 다시금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바울의 경우와 같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내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더욱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바울은 자신을 무고하게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공격을 그저 참아냅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자신의 억울함을 재판을 통해 풀어내는 일보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명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잠시 멈춤의 상황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2)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판결도 없었던 재판이 드디어 한 가지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의 장소를 로마로 옮겨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는다는 결정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분명한 사명과 꿈과 비전이 있는데, 원치 않는 일로 억울한 일로 계속해서 나의 발목이 붙잡혀 있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억울함을 푸는 일도 중요하지요. 내 앞에 놓인 과제를 하루 빨리 해결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러나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가 달려왔던 전도의 일, 교회를 섬기는 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속상하지만, 억울하지만, 지금 당장 내 앞에 놓여 있는 과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위한 선택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로마로 가는 길, 곧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을 성취하는 그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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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인물 설교2017. 5. 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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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미해결 과제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교회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꼭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인물, 곧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어떤 모델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은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니엘 당시 바벨론 제국은 전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 한 후 각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만 선발해서 국가의 지원으로 바벨론에서 조기 유학을 시켰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식민지였던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바벨론에서 조기유학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1장은 그렇게 각 지역에서 최고로 머리 좋다고 하여 뽑혀온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가장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반에서 1등하는 것도 쉽지 않고,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데, 다니엘은 유대 나라 전국에서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수제들이 모인 바벨론 황제 직속의 최고 명문학교에서 전 세계 1등을 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를 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학생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또한, 다니엘은 공부도 잘하면서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흔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공부한다고 주일 예배도 빠지고, 신앙생활은 뒷전인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다니엘은 늘 학교 공부에서 1등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했던 학생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성경을 읽으라고 큐티를 하라고 기도하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다니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잖아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장면도 등장해요.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왕이 주는 음식까지도 거절하지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도 다니엘과 같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먼저 공부를 잘했어요. 신앙생활도 참 잘합니다. 거기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까지도 참 좋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친구는 다니엘보다 공부를 쪼~~ 끔 못해서 전 세계에서 2, 3, 4등합니다. 1등은 다니엘이지요.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이 중요한 신앙의 기로점에 서 있을 때 다니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는 친구였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만나러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친구는 한 사람도 안보여요. 그러니 우리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이 공부도 잘하고 믿음도 좋은 최고의 친구들과 늘 교제하고 사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모든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닮기를 원하는 모델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청소년 시기, 청년 시기, 나아가 장년의 시기를 보냈던 다니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그 앞에 있는 모든 문제가 하나도 남김이 없이 해결되었을까요?

 

사실 다니엘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문제 해결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다니엘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해결되곤 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다니엘 이전에 눈의 띄는 문제 해결사는 단연코 요셉이었던 것 같아요.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이지요.

예를 들어,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바로가 하루는 꿈을 꿉니다. 살진 소 일곱이 등장하였다가 그 뒤에 여윈 소 일곱이 나타나서 살진 소 일곱을 모두 먹어버리는 꿈이었지요. 바로가 곧 이어 또 하나의 꿈을 꿉니다. 매우 충실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 그 뒤에 아주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애굽의 모든 지식인들 박사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꿈을 해석하죠? 바로 요셉입니다. 바로의 그 꿈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예고한 꿈이라는 사실을 요셉이 해석해내요.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요셉은 7년 풍년 뒤에 올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그 방법으로 각 지역에 감독관을 세워 7년 풍년의 기간에 소출의 1/5을 바로의 이름으로 각 성에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확한 해석이요 탁월한 해법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보여주었던 요셉의 탁월한 실력이 인정을 받아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설교의 주인공 다니엘은 바로 그 요셉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죠. 그런데 꿈을 꾼 사람이 말이 없어요. 자신이 어떠한 꿈을 꾸었는지를 맞추고, 그에 대한 해석도 내어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옛날 요셉은 그래도 바로의 꿈을 듣기는 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꿈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 꿈의 해석도 내어 놓아라고 명령합니다. 아니, 어젯 밤에 내가 꾸었던 꿈도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력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옆집 사람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 어려운 문제를 누가 맞추지요? 다니엘이 맞추는 거에요. 여러분, 이처럼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데 달인이었어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릴께요. 다니엘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해결을 하는 사람이니 그의 앞에는 어떠한 문제든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떠한 문제든 그것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 문제가 그 즉시 다 해결되었을까요?

 

다니엘은 학생 시절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그 문제의 정답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사람이었어요. 다니엘은 성인이 되어 바벨론 제국의 관료가 되어 다양한 제국의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그 마음에 있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 다니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어요.

 

다니엘의 청소년 시절, 다니엘의 학창시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도 다니엘에게는 답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질문을 바꿔볼까요?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거에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아무리 전 세계에서 1등을 해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 답을 찾으려는 하나의 몸부림이 바벨론 황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장면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니엘이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던 바벨론 제국의 고위 관료로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질문, “나는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가?” ,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미결과제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다니엘 개인의 문제를 넘어 자기 민족 유대인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되지요. 그 질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 민족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였는가?”

 

이 질문도 다시 풀어볼까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무리 공부를 하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제 아무리 기도하여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다니엘의 겉모습만 바라보면, 그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니엘은 어떤 문제든 열심히 기도하면 다 해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지요. 다니엘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제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보니 모든 문제가 척척 해결되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도 우리 앞에는 언제나 남모르는 아픔과 숙제와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요.

 

우리 주변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하고 늘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만사가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요. 그러서 우리는 더욱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바로 바로 응답도 받고 만사가 형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 내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나? 나의 기도가 부족한가? 내가 무엇인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계속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여러분, 아무런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어보이는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에게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도 척척 해답을 내놓았던 다니엘 조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에게 집사님, 기도하시라기도하면 하나님께 그 문제 해결하신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 집사님께서 기도하게 계십니다. 그토록 마음이 아프고 힘든데 왜 기도를 안하겠어요. 기도를 안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요,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기도생활이나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다고 너무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오늘과 같은 휴일에 수요예배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이면 여러분은 충분히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침내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

 

그러면 이제 궁금해지죠? 아니, 다니엘과 같이 믿음이 좋고 실력도 있고 신실한 사람이 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나아가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이 뜻을 묻는 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그토록 오래도록 침묵하셨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하고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 왜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미해결과제가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니엘이 그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받는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해 ( 9:1)


여기에 다니엘 9장의 시간적 배경을 명확하게 표시해 놓고 있지요. 다니엘은 10대 청소년 시절에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온 것을 제 1차 바벨론 포로의 때라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죠 지금 다니엘 9 1절이 묘사하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첫해는 다니엘이 다니엘이 유대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한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었습니다. 60년 동안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질문, 나는 유대인인가 바벨론 사람인가?” 자신의 문제를 넘어 민족의 문제로 바꾸어 본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치열하게 씨름하였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자그마치 60년입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니엘 9 2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9:2)

 

다니엘의 눈에 드디어 예레미야 선지자의 편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예레미야 29장에서 여전히 유대땅에 머물러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나와요. 다니엘이 60여년동안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는데, 바로 이 시점에 드디어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이 한 평생 풀지 못했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범죄가 창궐하여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는 사실, 포로생활 70년이 지나면 그들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요, 예루살렘에 참된 회복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이미 계획해 놓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다니엘은 그저 기도하면서 답답해 했던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60년 전에 알려주셨으니 다니엘에게 10대 시절부터 알려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이 70년이 거의 되어가는 시점, 곧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건너온 지 약 6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 아무리 기도하고,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하고,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나의 삶 속에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 하나님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왜 그 60여년의 세월 동안 다니엘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다니엘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70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왜 이렇게 단기적인 응답을 추구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오늘 기도하여 내일 응답받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주에 기도하면 다음주에 응답 받기를 원하고요, 이번달에 기도하면 다음달에 응답받기를 원해요. 아무리 늦어도 올해 기도하면 내년에는 응답이 되기를 기대해요. 이러한 우리의 조급한 기도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생각할 때 너무도 초라한 기도가 아닐까요?

 

적어도 10년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적어도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기도가 지금 당장의 기도 응답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다니엘의 기도와 같이 60, 아니 한 평생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하는 보다 넉넉한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족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은 6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왜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와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 왜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야 했는지, 나아가 하나님은 다니엘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신지 기도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지요.

이제 다니엘은 다시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다니엘 9장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니엘에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소개해주고 있어요.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은 오늘 본문 9 19절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 9:19)

 

60여 년을 기도한 뒤, 다니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을 통해 유대인들을 새롭게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이제 70년이 거의 차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뜨겁게 기도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주여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시해하여 주십시오.’

, 주님의 성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주님의 택함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사람들이오니, 주님의 계획과 같이 70년의 포로생활 이후 저 예루사렘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간절히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 유명한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는 놀랍게 응답을 받습니다. 아니, 다니엘이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쯤 이미 하나님은 응답을 예비해주고 계셨어요. 그 내용이 다니엘서 9장 뒷부분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등장해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니엘이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데 다니엘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금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공동체를 재건하는 그 일에 다니엘이 동참할 수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대열에 함께 했을까요? 구약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오지 못한 것 같아요. 다니엘이 기도했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도 받았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회복되었지요.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다니엘을 통해서 된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예수아라는 또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었고 광야 40년 동안 참으로 기도하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였던 모세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요. 그렇다고 모세의 충성과 모세의 기도가 헛된 것이 결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다니엘의 기도는 응답 받았어요.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일이지 다니엘의 역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었기에 60여년 동안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이 직접 앞장설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한 평생 붙잡고 기도하였던 기도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내가 주도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있으십니까?

 

기독교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욕구를 관철시키는 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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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17. 2. 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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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의 많은 목사님들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진학을 했기에 장신대에서 공부한 기간이 다른 목사님들에 조금 더 길어서 총 9년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 재학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 있어서 20대 전체를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 동안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제 마음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장로회신학대학교도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지원을 받고 정해진 입시 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신학교입니다. 목회자 후보생이 되기 위해 매년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하고 신학생에 되기 위해 정해진 입시 시험을 봅니다. 특별히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 과정을 지원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지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실은 매년 어김없이 학교 정원보다 적게는 두 세배, 많게는 네다섯배까지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압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원에 지원한 학생들 가운데 오직 1/2 혹은 1/3, 아니 적게는 4/1 혹은 1/5 정도만 신학교에 합격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외의 학생들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일까요? 신학교에 지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 한 사람도 제외 없이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지원을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신다는 분명한 확신과 간증을 가지고 신학대학원 입시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였지만 그들이 다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그들이 다 합격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원자의 숫자가 학교 정원의 몇배 이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저에게는 이 현상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모두가 기도하는 분들이었고, 모두가 주님의 일에 충성스러운 분들이었는데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이곳 저곳 헤매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왔다고 확신했는데, 그곳에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으신가요?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저지하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였던 에베소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의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발걸음은 사도 바울 개인의 인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여정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2022절에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0 22절은 바울이 에베소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고별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20:2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행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이라고 분명한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렇게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잠시 두로라는 지역에 약 일주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약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바울은 두로라는 지역에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만나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 21:4)

 

두로라는 지역에 있었던 제자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도 바울에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성령의 뜻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일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예루살렘을 가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성령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이곳 저곳 갈팡지팡하게 되지 않겠냐고요.

 

성령의 복합적인 마음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장면을 가만히 묵상을 해봤어요. 그러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떠오르더라고요.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어떻게 해서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는 사도 바울도 모두 동일하신 성령 하나님의 그 넓은 마음을 일부분씩 대변하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이제 군대에 입대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가면 고생하는 것을 다 알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군대에 입대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래도 군대에 입대하라고, 군대를 다녀와야 더 성숙해진다고 격려하면서 아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목표하는 바가 있어서 고시원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머니는 말리는 겁니다. 자녀가 큰 뜻을 품은 것은 알겠지만 홀로 외로움 속에서 밤낮 공부해야 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생각하면서 가급적이면 사랑하는 자녀가 그 고난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시원에 들어가려는 자녀를 말립니다. 그런데 한편에서 아버지는 격려는 합니다. 잘 생각했다고.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뜻을 이루어보라고. 아빠가 늘 기도하면서 힘이 되어 줄 테니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 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인가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서로 상충되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져 보다 넓고 보다 큰 부모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사도 바울을 바라보며 성령 하나님께서 동일한 마음을 품고 계셨다는 겁니다. 한편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가면 고생할텐데 고난이 있을 텐데 가급적 그 길을 피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성령 하나님의 그 마음을 두로에 살고 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도 있으신 거에요. 고난이 있지만, 아픔이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이 복된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영광스로운 길이니 힘을 내어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격려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 바울이 품은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누가 뭐라 해도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살아 숨쉰다면 우리 가운데 의견의 불일치가 다 사라지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십시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성령의 충만을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 할지라도 우리의 좁은 마음으로 무한하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확신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내가 성령 하나님의 그 크신 생각과 마음을 모두 이해했다고 교만을 부릴 수 없습니다. 나아가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두로 지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첨예한 의견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의견만 들어보면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행한 행동을 보십시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21:5)

 

그들은 의견이 달랐습니다. 서로 상충하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지기 전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합니다. 각자의 의견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았을까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교회, 성령으로 살아 숨쉬는 교회는 의견의 충돌이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의견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내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다른 성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간절히 구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바로 그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과 바울의 고집

 

사도 바울이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도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겪었던 일과 비슷한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빌립 집사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사도 바울을 향해 예언을 합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 21:10-11)

 

이렇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예언하니 그곳에 있던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21:12)

 

빌립 집사님의 집에 함께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일하신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 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 21:13)

 

빌립 집사님의 가정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주시는 분명한 확신과 소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뒤에 일어난 사건과 결과를 다 알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쉽게 답을 내리지만, 지금 21장에 등장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다시금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1:14)

 

가이사랴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빌립 집사님을 비롯한 주님의 일꾼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그들이 기도 제목을 보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기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며 기도의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빌립 집사님의 가정에 있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견과 사도 바울의 의견이 충돌할 때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알고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행하는 그 놀라운 역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충돌할 때가 많이 있어요. 아무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 나의 의견, 나의 뜻을 다 내려놓고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

 

제가 거의 10년 동안, 20대 전체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매년 입시철마다 학교가 정한 정원보다 훨씬더 많은 숫자의 지원자가 몰리는 현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장신대를 졸업하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저에게는 그 시절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머물면서 유학을 하는 동안 참으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저와 박사 과정을 입학도 같이 하고 졸업도 같이 하신 분이 계십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수업도 같이 참여하고 서로 좋은 교제를 나누었던 분이지요. 그분은 저보다 연배도 높았고, 사회 경험도 훨씬 많은 분이셨어요. 그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참 잘 준비된 목회자라는 생각을 그분과 교제하는 동안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참 귀한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분이었지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저와 그 목사님은 동일한 학위를 받았습니다. 같이 사진도 찍고 우리 가족과 그 목사님의 가족이 함께 기뻐하며 서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미 한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여하고는 곧 한국으로 돌아와 교회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몇달 여유를 가지고 가족들과 한국으로 돌아와 목회지를 알아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앰블런스에 실려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뇌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계속해서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목사님은 별세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보아도 그 사건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준비되고, 그렇게 균형 잡히고, 그렇게 기대할만한 목회자를 이처럼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 있는 시대에 하나님은 왜 데려가셨을까요? 함께 공부했고, 함께 졸업했던 저와 비교해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저보다는 그 목사님이 더욱 잘 준비되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목사님을 치시고 저는 여전히 교회의 목회 현장에 놓아두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어느 날 그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한 가지 깨달음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데려가신 장면을 통해 저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 부족한 저를 넘겨두시고 잘 준비된 그 목사님을 데려가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여전히 사역자로 세워주시고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는 것이 저의 자격이나 저의 노력이나 저의 자질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제가 기억하기를 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그 목사님의 별세 소식은 제 마음을 한 동안 큰 아픔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하나님, 왜 저를 남겨두시고 그 분을 데려가셨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하십니까? 모든 것이 해석이 되십니까? 우리가 제 아무리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으로 살아 숨쉰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의견의 충돌도 일어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이곳 저곳을 해메이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뜻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이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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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17. 1.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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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Choung. True Story: A Christianity Worth Believing in
 
한국어로는 <냅킨 전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는 저자가 미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면서 발생한 문제제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제임스 정(James Choung)의 문제 제기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과연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인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복음은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의 안나라는 등장인물로 대표되는 현대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복음 제시를 참된 의미의 ‘복된 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복음은 지나치게 개인적(personal)이며 동시에 근시안적(myopic)이다. 
 
제임스 정은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하는 복음제시의 방향은 크게 3가지다. (1) 결정(decision)에서 변화(transformation)로, (2) 개인(individual)에서 공동체(community)로, (3) 죽음이후(afterlife)로부터 선교적 삶(mission life)으로. 그는 이와 같은 방향성 안에서 (1) 선을 위한 창조(design for good), (2) 타락한 세상(damaged by evil), (3) 선을 위한 회복 (restored for better), 그리고 (4) 치유를 위한 파송(sent together to heal)이라는 네 단계의 복음제시를 제안한다. 그리고 각 단계는 개인적(personal) 측면, 관계적(relational) 측면, 조직적(systemic) 측면에서 내용을 설명하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어 번역은 이와 같은 복음제시가 노트에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냅킨 전도”라고 제목을 붙인 듯 하지만, 그것이 제임스 정이 제안하는 복음제시의 핵심은 아니다. 
 
제임스 정의 복음제시는 전통적인 복음전도방법(사영리, 다리예화, 전도폭발 등)의 개인적이고 사후 세계에 초점을 맞춘 전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전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의 표현대로 "성경에 대한 전체적 조망”(the entire scope of the Bible, p. 168), 곧 “세상을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the basics of a Christian worldview, p. 200)을 최대한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복음제시의 형태로 구성한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정이 제시하는 성경의 '진정한 이야기’(true story)를 전도 현장에서 활용한다면 복음 전도자 역시 복음에 대한 보다 넓은 관점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전도 대상자는 복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 책은 갈렙(Caleb)이라는 한 대학생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넓어지는 과정, 나아가 그러한 생각의 변화를 자신의 친구 안나(Anna)에게 전하는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한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두 명의 중요한 멘토[스승]가 있다. 곧, 갈렙이 섬기는 예배팀의 책임자인 제프(Jeff Corbin) 목사와 갈렙이 다니는 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살렌드라(Shalandra) 교수다. 제프는 존경받는 목회자이지만 여전히 개인적이고 타세중심적인 복음전도에 집중하는 전형으로 등장한다. 반면, 살렌드라는 갈렙에게 보다 넓은 복음의 의미를 전해준 사람으로 등장한다. 갈렙으로 대표되는 기독 청년에게 제프와 같은 목회자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 아니면 살렌드라와 같은 멘토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느냐에 따라 그의 복음 이해는 달라지는 것이다. 곧, 목회자의 복음 이해는 그가 양성하는 전도자의 복음제시 내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제임스 정의 복음제시는 전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지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제임스 정은 전통적인 복음제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이후(afterlife)에 대한 강조보다는 선교적 삶(mission life)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음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경향을 복음에 대한 왜곡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왜곡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무엇을 줄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 크게 집중하게 되었다”(p. 197)고 진단한다. 만일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전도 대상자에게 사후 세계에 얻게 되는 천국보다는 이 땅에서의 선교적 사명에 집중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과제가 있다. 곧, 전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들어오게될 교회 공동체를 받는 것에 익숙한 수동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선교적 사명에 민감한 능동적인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채 복음 제시에만 사명, 선교, 제자도 등을 강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전통적인 복음제시가 그토록 선교적 삶보다는 죽음 이후의 천국에 집중하는 이유 가운데 받는 것에만 익숙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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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학2017. 1.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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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3가지 주체를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이고, 둘째는 회중이며, 마지막으로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전통적으로 설교의 세가지 요소 가운데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사실이 다른 요소들에 비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현대 복음주의교회의 전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성령 하나님이 여러 저자들의 손을 빌어 성경을 기록하였듯,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이러한 논거의 뒤에는 설교자의 위치에 대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곧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도구(mere instruments)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더하거나 빼지 말고 고스란히 회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와 더불어, 설교자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설교자의 역할을 ‘중재자’(mediator)로 소개한다. 곧, 기독교의 진리가 회중들이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어 기독교의 진리와 현실 사이의 연관성(relevance)을 맺어주는 역할이다.[1] 그런데 설교자가 기독교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그의 마음에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2] 그러므로 나인홀드 니버에게 있어 설교자란 단지 말씀을 전달하는 스피커가 되어서 입력된 신호를 보다 큰 음량으로 출력하는 것을 넘어서, 설교자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 마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청중들이 처한 현실과의 연관성을 맺어주는 중재자다.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찰스 피니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설교자를 단순한 “말씀의 도구”로 묘사하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한다. “우리는 목회자를 죄인의 회개를 위한 도구라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사람은 도구 이상이다.”[3] 찰스 피니는 계속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교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나이아가랴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우연히 그를 목격했다면, 그를 향해 ‘멈춰’라고 소리지를 것이다. 찰스 피니는 ‘멈춰’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설교자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이 비유에서 피니가 강조하는 바는 설교자가 단지 ‘멈춰’라는 말을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폭포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고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있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면 ‘멈춰’라는 말이 실제로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참된 역할은 성경을 연구하여 그 메시지를 잘 짜여진 한편의 설교로 전달하는 ‘말씀의 도구’를 넘어 청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 곧 설교자는 말씀의 도구가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여과없이 전달해야 한다 – 를 넘어 설교자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한가지 중요한 논의점에 다다르게 된다. 곧, 원고 설교와 즉흥설교에 대한 논의다. 파머(H. H. Farmer)는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의 장단점을 구분하면서 원고로 작성된 설교는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는 반면, 즉흥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I-Thou Encounter)에서 발생하는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4] 그러나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는 설교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맞물리는 접촉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말씀의 도구이기에 성경의 메시지를 연구하여 그것을 청중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야 한다는 견해에서는 당연히 원고 설교가 즉흥설교보다 권장되어 마땅하다. 설교자가 철저히 준비하여 완결된 설교 – 곧 성경의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담아낸 원고 – 를 청중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역할이 단지 ‘멈춰’라는 단어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던 찰스 피니는 원고 설교보다 즉흥설교를 선호하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원고 설교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고 설교는 복음에 거대한 능력(great power)를 제공하지는 못한다.”[5] 찰스 피니에 의하면, 설교자의 역할은 회중들의 영혼을 일깨워 회개로 인도하는 것인데, 설교자가 자신이 기록한 원고에 얽매이면 청중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자신이 설교하는 회중을 바라보고 있다면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이 따라오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회중이 어떠한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회자가 확인한다면, 그는 잠시 설교의 진행을 멈추고 그 내용을 다시 설명해줄 수 있다. 회중이 그 설명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면 목회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며 설교를 더욱 진행하기에 앞서 회중들의 마음에 그 내용을 분명하게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마치 에세이나 책을 읽는 것처럼 자신이 작성한 원고의 순서대로 설교하는 목회자라면 특정 부분을 반복할 수 없고 청중들고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6]


설교자는 말씀이라는 내용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변함 없이 보존하는 용기가 아니며, 설교자의 역할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설교자는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듯 기독교의 진리[전통]를 오늘을 살아가는 청중들의 삶에 연관시키는 중재자이며, 존 스토트가 묘사하듯 성서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설교자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매주 한 편의 잘짜여진 설교를 작성하여 사람들 앞에 자신의 원고를 실수 없이 읽어내려가는 역할에 머무를 수 없다. 원고 설교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즉흥 설교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존 스토트는 이와 같은 설교자의 역할을 “다리를 놓는 것”(bridge building)이라고 묘사하였다. Cf. John Stott, I Believe in Preaching (London: Hodder & Stoughton, 1982); 계지영, 이 시대를 향한 설교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42-44.

[2] Ursula M. Niebuhr, introduction to Justice and Mercy, by Reinhold Niebuhr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7).

[3]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12th Lecture on Revival. http://www.whatsaiththescripture.com/Text.Only/pdfs/Revival_Lectures_Text.pdf (accessed January 19, 2017). 

[4] H. H. Farmer, “The I-Thou Encounter,” Major themes in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2),126.

[5] Charles G. Finney, “How To Preach The Gospel”.

[6] Ibid. 피니가 원고 설교보다 즉흥 설교를 옹호한다고하여 준비 없는 설교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즉흥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훈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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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