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023. 2. 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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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향한 인사 하겠습니다. 
“전도하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하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야 말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5절) 

오늘 본문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세요? “두루 다니사” 예수님은 두루 다니면서 어떠한 사역을 하셨나요? 35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고쳐주시는 전도자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는 일을 위해 한 곳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어요. 그저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어느 특정한 회당의 담임 목회자, 혹은 담임 회당장의 직함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시대의 유명한 목사님들을 생각하면 그분들이 한평생 섬기셨던 교회가 떠오르지요. 예를 들어 최초의 한국 장로교 선교사이신 언더우드 목사님을 생각하면 어느 교회가 떠오르세요? 새문안교회가 떠오르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모든 한국교회 성도들이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을 생각하면 어떤 교회가 떠오르세요? 영락교회가 떠오릅니다. 하용조 목사님을 생각하면 어느 교회가 떠오르세요? 온누리교회가 생각납니다. 외국의 예를 들어볼까요? 릭 워랜 목사님을 생각하면 어느 교회가 떠오르세요? 새들백교회가 떠오르지요. 이처럼 우리 시대의 유명한 목사님들을 생각하면 그분들이 한평생 섬기셨던 교회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최고의 전도자였던 분, 곧 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어느 교회가 떠오르세요? 교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정답입니다. 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은 하나의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셨던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의 활동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회당을 섬기는 회당장 혹은 가버나움의 회당을 섬기는 회당장이라는 직함을 가지신 적이 없어요. 그 대신 “두루 다니사”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복음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전도인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직분과 직책을 가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조금 더 닮아가기를 원한다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걸음이 필요한 것이죠. 여기에는 직분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나의 발걸음이 예수님을 닮아 두루 다니며 전도인의 발걸음을 걸어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서 –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서 –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의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전도대의 이름으로 모인 여러분이야 말로 예수님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 닮아가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발걸음, 특별히 전도대원으로서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려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앞뒤에 계신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전도하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최선을 다하여 전도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전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도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6절) 

여러분, 전도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마음이 드시나요?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람들이 별로 불쌍해 보이지 않아요. 뭐~ 저만하면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듯하고,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다 건강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참 신기하지요. 전도의 현장에 나가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돼요. 특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 세상적으로 보면 남부러울 것이 없고, 인간적으로 보면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복음을 전한다는 우리보다 더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 까지도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천국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영혼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영혼이 불쌍히 여겨지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전도학을 가르치는 어느 목사님은 전도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 전도의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는데, 그 말씀이란 바로 “너의 이웃을 너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전도의 현장에 나아가면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리고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전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 어떠한 직책도 가지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자신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어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하루 세끼 풍성히 먹을 양식이 없어서 제자들은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먹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리를 바라보시며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해 하는 모습을 정확히 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궁휼히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도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그들의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전도대로 모인 우리 모두에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 수많은 무리들 – 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 깊은 곳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전도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 일꾼을 부르심

예수님께서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이곳저곳을 돌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7절) 

교회 안에만 있으면 “추수할 것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교회 안에서는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전도의 현장으로 나가면 추수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내가 전도의 현장에서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우선 내가 전도의 현장에 나아가기만 하면 바로 그곳에서 깨닫는 한 가지 사실, 추수할 것이 너무도 많아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권면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울러, 추수할 것은 너무도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간절힌 기도의 제목을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38절) 

우리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전도대에 속한 한분 한분은 하나님께 간절힌 기도의 제목이 있으실 겁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시오. 단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저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기도해야 하는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십니다. 곧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우리의 함께 전도할 전도자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면, 그것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전도한 것이 아니라 전도대가 함께 전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팀이고 함께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몇 명 전도했다, 다른 사람이 몇 명 전도했다,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마세요. 먼저 우리와 함께 전도할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함께 전도할 사람들을 권면하고 불러 주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일꾼은 적습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6절b "그리스도의 세계" 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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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3. 2. 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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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기다. 저자인 에릭 와이너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열 개의 나라를 여행했다. 잘 쓰인 여행기가 그렇듯, 이 책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돈과 행복

행복을 위해 돈은 어떠한 역할을 할까? 과연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인가, 아니면 필요조건인가, 그것도 아니면 관련이 없는가? 에릭 와이너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따라가며 돈의 역할에 대해 계속 질문한다. 그가 카타르를 여행한 이유도 돈과 행복의 관계를 밝히기 위함이었다. 카타르는 석유를 통해 갑자기 부를 쌓은 나라다. 만일 돈이 행복을 보장한다면 카타르는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카타르를 방문하여 카타르 사람을 만나보면서 그는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에릭 와이너는 몰도바가 불행한 이유가 가난 때문인지 질문한다. 그가 여행한 열 개의 국가 가운데 몰도바는 유일하게 행복이 아닌 불행의 이유를 찾기 위해 여행한 장소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난이 불행의 결정적 요소라는 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돈과 행복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불확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상투적으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상황이 단순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p. 315) 저자는 이러한 깨달음을 행복에 대해 적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 전반에 대한 진리다. 돈과 행복의 관계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행복은 부산물이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이 책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행복은 부산물이다." 행복은 부산물이기에 행복을 잡으려고 달려가면 오히려 행복을 놓친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을 살다보면 행복은 어느새 내 곁에 있다. 너새니얼 호손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p. 440) 행복한 삶과 가치 있는 삶은 다른 개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치를 추구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행복이 달아난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행복은 가치 있는 삶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부산물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행복을 찾기 위해 그토록 먼 여행길을 떠났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며,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상징이다.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 열 개의 나라를 여행한 저자가 행복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돈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돈이 우리 생각대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중요하다. 친구도 중요하다. 시기심은 해롭다.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그렇다. 바닷가는 선택 사항이다. 신뢰는 그렇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감히 더 나아가는 건 종잡을 수 없는 바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다." (p.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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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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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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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자(마 8:34), 예수님은 지체 없이 그 마을을 떠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천국 복음은 더욱 분명하고 넓게 전파된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용서를 선포하신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절) 

본문은 중풍병자의 상태나 그를 데려온 과정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지붕을 뚫었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생략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죄 용서에 대한 선포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단순하고 명백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6절)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그러나 그에 앞서 죄 용서를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에게 죄 용서의 권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죄 용서를 선포하시고 또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8절). 여기에서 권능이란 당연히 병을 고치는 권능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능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중풍병자를 고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강력히 선포하셨다. 이제 본문은 그 하나의 예를 소개한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9절)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요 세관은 죄인의 자리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은 마태로 하여금 세관이라는 죄인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처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은혜가 마태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믿음이란 조건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적극적 응답이다. 

예수님은 마태와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예수님의 천국 공동체에 마태를 포함시키신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0절) 

위의 구절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은 세리와 죄인이라는 각각의 그룹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리 곧 죄인들'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도록 천국의 식탁에 초대하셨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2-13절)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호세아 말씀에 대한 인용이 누락되어 있는데, 마태는 이것을 본문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죄 용서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자세가 담겨 있다. 제사를 비롯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죄를 용서받는 참된 믿음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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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7.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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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바다는 고요하다가도 갑자기 거대한 풍랑이 일어나곤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로 이동하던 중에 그와 같은 풍랑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가르치신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랐다(23절).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거대한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4절) 

큰 놀이 일어났다는 것은 땅이 흔들리는 지진을 의미한다. 그 힘이 얼마나 컸는지 물결이 배를 뒤덮을 정도였다.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큰 놀에 두려웠고 주무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시는 듯했다.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한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데 왜 풍랑을 맞이해야 했는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6절)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작았다. 풍랑을 맞이하면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는 작은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풍랑을 통해 그들의 작은 믿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의 신앙이 더욱 성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그러면 제자들의 믿음이 성숙하기 위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계속되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27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성경은 이 질문에 분명히 답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요,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두려움 없이 인생의 풍랑을 맞서기 위해 필요한 신앙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때가 이르기 전

예수님과 제자들이 풍랑을 뚫고 도착한 지역은 가다라 지방이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만나신다. 그들은 마을을 떠나 무덤에 거주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28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시니 귀신이 소리 지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29b절) 

귀신은 예수님께 "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심판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한 성취의 날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신다(30-33절).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귀신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어둠의 공격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34절) 

풍랑(자연재해)과 귀신(영적 전쟁)이 예수님의 발걸음에 제동을 건 데서 멈추지 않고, 가다라 지방 사람들도 예수님을 거부한다. 예수님의 사역이 지속될수록 예수님에 대한 반대도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직은 완성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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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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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의 치유와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의 기적이 계속된다. 본문에는 열병을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14-15절)에 이어 귀신 들린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한다(16절).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포괄하였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치유를 서술하며, 다시 한번 구약의 성취를 강조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7절) 

위의 구절이 인용하는 구약성경은 이사야 53장 4절이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장면에서 고난 받는 종의 예언을 인용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십자가의 고난에 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메튜 헨리는 본문을 주석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죄를 담당하셨고, 그의 생애의 이적들로써 질병을 짊어지신  것이다. 이런 이적들이 중지되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을 때에 그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죄야말로 병의  원인이요 그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제자도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바른 제자의 모습을 갖춰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본문에는 그릇된 제자도의 예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어느 서기관이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19절) 

서기관의 각오는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입술의 고백일뿐 그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서기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0절) 

예수님은 자신의 길이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강조하신다. 아마도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며 누리는 영광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도의 핵심에는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이 놓여있다. 서기관에게 결여된 제자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1절) 

당시 유대인의 관습은 부모의 장례를 위해 매일 기도, 율법공부, 성전봉사, 할례준수, 유월절 양 잡는 일 등의 신앙적 의무를 모두 면제하였다. 그만큼 부모의 장례는 자녀에게 중요했다. 이 제자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 당연하다는 듯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2절)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순위를 정확히 밝혀주신다. 여타의 신앙활동보다 부모의 장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 무엇도 앞설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본문은 그릇된 제자도의 예를 두 가지 보여준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을 뿐 바른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의 명령]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4절) 

[제자들의 순종]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3절) 

이들이 한 말은 본문에 한 마디도 나와있지 않다. 참된 제자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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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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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9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열 가지 기적을 서술한다. 예수님의 열 가지 기적은 5~7장이 소개하는 산상보훈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산상보훈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1) 가르치시고 (2) 전파하시고 (3) 고치시는 세 가지 활동으로 요약하였다(마 4:23). 산상보훈(5~7장)과 열 가지 기적(8~9장)을 마치며 마태복음은 다시 한번 예수님의 사역을 위의 세 가지 활동으로 요약한다(마 9:35). 또한 산상보훈을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서술(마 5:1)과 기적이 시작되는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서술(마 8:1) 역시 산상보훈과 열 가지 기적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장치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르치시는 분이요(산상보훈) 동시에 천국을 사람들에게 이루어주시는 분(열 가지 기적)이다. 


나병환자의 치유 (1-3절) 

나병환자의 겉모습은 비참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2절) 

나병환자에게는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예수님은 제자도를 가르치는 산상보훈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33).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3절)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부정을 입게 된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었으니 율법 조항에 따르면 예수님도 부정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부정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나병환자가 정하게 [깨끗하게] 되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역할과 구약성경의 제사장 역할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나병의 여부를 진찰하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다(레 13~14장). 그러나 그들에게는 치유할 의무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예수님은 나병을 진찰하는 제사장의 역할은 그대로 인정하신다(4절). 예수님의 주요한 사역은 나병환자를 진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다(마 5:17). 


중풍병자의 치유 (5-13절)

하인의 중풍병을 치유해달라고 요청하는 백부장의 신앙에는 몇 가지 탁월한 점이 있었다. 먼저 그는 하인을 위해 간구하고 있다. 자녀를 위해 그리스도께 간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으나, 하인을 위해  주께 나온 사람은 이 백부장이 유일하다. 또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철저히 신뢰하였다(8-9절).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구원이 유대인이라는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1-12절) 

백부장의 믿음과 그로 말미암은 하인의 치유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됨을, 오히려 유대인 중에는 구원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많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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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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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산상보훈의 최종 결론은 실천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1절) 

예수님은 먼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주신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입술로만 주님을 찾았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22절).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의 믿음이다. 그리고 나무와 열매의 비유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마음에 자리 잡은 믿음은 그의 행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마태복음 7장 13-20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천국에도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야고보서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논리다. 믿음이 있다고 말로만 떠드는 것으로는 그의 마음에 자리한 믿음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는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일 뿐 바른 믿음으로 평가할 수 없다(cf. 약 2:18). 


환란과 시험의 날 

예수님은 실천을 강조하시며 건물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그러나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문제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언젠가는 비와 창수와 바람을 맞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석 위의 집]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5절) 

[모래 위의 집]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7절)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환란과 시험의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날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오는 최후의 심판날일 수도 있고,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환란의 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시험의 때가 찾아오기 전에는 입술로만 주님을 부르는 신앙과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건물의 기초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란과 시험의 날이 찾아오면 그 차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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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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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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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의 길에 대해 다양한 내용을 말씀해 주셨다. 지금까지 설명한 제자도는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과 상치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회피하는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3-14절)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치신 제자의 길이 바로 이 좁은 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도가 좁은 문이라는 사실은 산상보훈의 시작부터 명백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팔복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 심지어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경우를 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저주로 여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의 차이는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저주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다. 십자가만이 부활의 복된 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나무와 열매의 비유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15절).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거짓 선지자는 산상보훈이 가르치는 제자의 길을 방해하는 존재,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유혹하는 존재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들의 열매다. 그들의 말이 아무리 그럴싸하여도 그들의 행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들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거짓 선지자를 불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6절) 

신앙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믿음과 신앙은 확인할 수도 없고 평가는 더욱 불가능하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나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어떠한 기준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열매가 나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처럼, 지금 나의 결정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인지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인지를 확인하면 정확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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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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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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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에게 행하신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언약궤를 찾아오는 데 그들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였다. 


벧세메스의 기쁨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벧세메스에 도착하였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3절) 

언약궤가 도착했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환영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생업을 위해 밀을 베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들어 궤를 발견하였고, 그들에게 기쁨이 찾아왔다. 언약궤의 귀환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4-15절)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 가운데 제사를 드렸다. 다만, 법궤는 레위인들만 다루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위인들이 궤와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처리하였다. 


언약궤를 모시는 방법

벧세메스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제로 드렸던 금 보물도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두었다(18절). 이처럼 벧세메스는 언약궤가 도착하여 큰 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19절) 

율법의 규정은 성소의 모든 기구를 레위인 가운데 고핫 자손이 메고 옮기게 되어 있다. 이때 고핫 자손 역시 성소의 기구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고핫 자손이라도 성소의 기구를 만지거나 심지어 보기만 하여도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민 4:15, 20) 그래서 제사장이 성소의 성물을 모두 덮어두면 고핫 자손이 들어와 어깨에 멜 수 있었다(민수기 4장 "레위 지파의 가문별 역할"). 본문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레위인조차 보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언약궤를 들여다보았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참고로, 사무엘상하를 계속 읽다 보면 성소의 성물을 만지면 죽게 된다는 규정에 따라 생명을 잃은 사람도 등장한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과정에서 그 궤에 손을 대었던 웃사가 그 주인공이다(삼하 6:6-7).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0절) 

많은 사람의 죽음은 벧세메스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과연 거룩하신 하나님을 누가 모시며 살아갈 수 있는가? 시편 24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성도들이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노래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 24:3)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언제나 이렇게 질문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상 숭배에 찌든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헛된 기대만 품었던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물론, 헛된 우상인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갈 수 있는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언약궤를 들여다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장면(19절)이 역설적으로 그 대답을 제공한다.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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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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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블레셋에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고(삼상 5장) 이제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직접 찾아오신다. 


보상의 속건제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문 지 일곱 달이 흘렀다. 블레셋에는 다섯 개의 주요한 성읍과 그 지역을 다스리는 다섯 명의 통치자가 있었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문 일곱 달 동안 하나님은 그 다섯 성읍에 모두 독종의 재앙을 내리셨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운다.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3절)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위의 구절에서 속건제라는 제사가 등장한다. 이후 그들이 설명하는 제사의 절차는 레위기에서 규정한 속건제의 규정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속건제 제사가 보상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쳤을 때 그는 상대방의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이때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다(레 5:14-6:7).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속건제 제물로 독종과 쥐의 형상을 만든 금을 바치라고 권면한다. 금을 바친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속건제의 보상이었다. 

언약궤가 블레셋을 떠나는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났던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블레셋 사람들이 금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을 얻었던 장면과 유사하다(출 12:35-36). 블레셋의 제사장은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라고 이야기하며, 출애굽의 사건을 소환한다(6절).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전쟁터에 나타났을 때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셨던 장면을 기억했다(삼상 4:8). 


벧세메스로 가는 길 

블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를 드리며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과연 지금까지의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인가?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7절) 

그들은 젖이 여전히 나오고 있는 소, 곧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암소를 이용했다. 그 송아지를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면 과연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기 새끼를 찾아 돌아올 것인가? 만일 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그 소들이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재앙을 내린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우연으로 볼 수 있다는 계획이었다(9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12절) 

암소의 모습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벧세메스를 향해 곧 바로 진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슬피 울었다. 새끼를 생각하며 슬퍼하였지만, 하나님은 암소의 발걸음을 정확히 이끄셔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역사임을 명백히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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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