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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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블레셋에 크게 패하였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전사하였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방인의 손에 빼앗겼다.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이 소식이 실로에 전해지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큰 충격에 빠진다. 


패전의 소식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던 한 베냐민 사람이 실로에 돌아왔다(12절).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쟁의 결과를 전했고, 온 성읍은 슬픔으로 부르짖었다(13b절).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를 만나 직접 소식을 전한다. 그의 보고는 군더더기가 없이 명확했고,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1)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2)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3)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4)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7절) 

엘리는 자녀를 율법에 따라 분명히 징계하지 못하는 등 여러 결점이 있었지만 대체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더 걱정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면서 승리를 확신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의 마음은 언약궤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다(13a절). 소식을 전하는 자의 보고는 그의 불안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1)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2)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패배였다. (3) 이 과정에서 두 아들도 전사하였도. (4) 무엇보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말았다. 언약궤에 대한 소식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18절) 

엘리는 전쟁의 소식을 기다리며 "자기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13절). 그가 아직 이스라엘의 사사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식을 듣자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떨어진다. 성경은 곧 이어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40년이 지났다고 서술한다. 98세의 나이로 시력은 거의 상실되었고(15절) 몸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엘리의 40년 간 지속된 사사의 역할이 멈추는 순간이다. 


이가봇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은 비느하스의 아내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19절) 

비느하스의 아내는 패전의 소식을 듣고 조산한다. 주변에서는 아들을 낳았다고 축하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말하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고 부른다(21절). 엘리에게 두 아들의 죽음이나, 비느하스의 아내에게 남편을 비롯한 가족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결정타는 가족의 죽음이 아니라 언약궤를 빼았긴 사실이었다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22절) 

이스라엘은 바야흐로 이가봇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언약궤를 이방민족 블레셋에게 빼았겼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떠나셨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역설이 있으니, 40년간 지속되었던 엘리의 시대가 끝나고 이가봇의 시대가 시작된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성경의 시선은 이가봇을 선언하는 실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긴 블레셋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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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성경공부2023. 1. 2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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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6장은 법궤의 행방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법궤 이야기"(ark narrativ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이른바 '법궤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블레셋은 BC 12세기 경 소아시아의 그레데 섬과 에게 해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해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서부 해안에 이주한 블레셋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의 배경도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략이다.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1b절) 

이스라엘이 진을 친 에벤에셀은 아벡 근처의 지역으로 이후 사무엘이 기념비를 세운 에벤에셀과 다른 곳이다. 사무엘이 에벤에셀이라고 이름하였던 지역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위치했다(삼상 7:12). 당시 블레셋은 매우 빠르게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 이스라엘은 칼이나 창을 벼리는 기술이 없었다. 사울 시대의 이스라엘 군인들 가운데 칼과 창을 소유한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 뿐이었다(삼상 13:19-22). 그러니 전쟁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2절).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패전에 대해 신앙적 이유를 제시한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3b절) 

이스라엘 장로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셨는가? 전도자는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고 권면한다(전 7:14). 전도자의 권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스스로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면, 그들의 다음 행동은 '회개'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채 손쉬운 해답을 구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가는 것이다(3c절).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본문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4절) 

위의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서술한다. 먼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다. 그런데 본문은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는 긴 설명을 덧붙인다. '그룹 사이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모세가 광야에서 제작한 바로 그 언약궤라는 의미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다. 이 궤가 지나가자 요단강의 물이 말랐고, 이 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자 성이 무너졌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설명하는 표현을 보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불리칠 것만 같다. 이스라엘 진영에 언약궤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블레셋 사람도 겁을 먹었다. 블레셋 사람들 역시 언약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본문 4절이 묘사하는 또 다른 사실은 언약궤 주변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2~3장을 읽으며 독자는 그들의 죄악,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그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알고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있으니, 아무리 언약궤를 가져오더라도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0절)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첫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4,000명이었다. 그런데 언약궤를 가져온 뒤에 치러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30,0000명이 되었다. 앞선 전투보다 더 처참한 패배였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았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하였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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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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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에는 문맥이나 논리적 흐름을 확증하기 어려운 구절이 여럿 등장한다. 이러한 경우는 논리적 흐름을 찾기보다 각 구절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것이 유익하다.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가 따라야 할 삶의 자세로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1절)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7).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긍휼의 자세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비판 역시 동일하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2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티와 들보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티는 작은 먼지요 들보는 건물을 받치는 기둥이다.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제거해 주겠다고 나선다는 예수님의 말씀(3-4절)은 유머를 가미한 과정법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명백하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만 비판하는 사람의 잘못된 태도를 꼬집는 말씀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5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산상보훈은 제자도에 대해 가르친다. 그런데 산상보훈은 제자가 지켜야 하는 사명이나 의무만 나열하지 않는다. 그에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핵심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선포한다. 팔복이 그 하나의 예라면(마태복음 5장 1-12절 "팔복,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 탐심을 경계하시는 말씀 역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베푸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신다(마태복음 6장 19-34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본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며(11절)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을 선포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8절)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응답의 약속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비유를 들어 다시 한번 설명하신다. 아들이 떡을 달라면 당연히 떡을 주지 돌을 주지 않는다(9절). 아들이 생선을 달라면 당연히 생선을 주지 뱀을 주지 않는다(10절).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소개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1절)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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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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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위선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바른 신앙을 해치는 무서운 요소다(마 6:1-18). 계속해서 예수님은 참된 신앙을 거짓 신앙으로 바꿀 수 있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 곧 탐심을 경계하신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예수님은 땅에 쌓아둔 재물과 하늘에 쌓아둔 재물을 비교하신다. 먼저 땅에 쌓아둔 재물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19절) 

땅에 쌓아둔 재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좀은 곤충을, 동록은 곰팡이를 가리킨다. 예수님 시대의 재물은 주로 곡식이었다. 그런데 창고에 쌓아둔 곡식은 세월이 지나면 사라졌다. 곤충이 먹기도 하고 곰팡이가 생기기도 했다. 심지어 도둑이 들어와 가져가기도 했다(19b절). 한 마디로, 땅에 쌓아둔 재물의 특징은 유한성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 그러므로 땅의 재물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없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0절)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 위해서는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언듯 보기에는 나의 재물이 손해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쌓아둔 재물만이 영원하다고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눅 12:21) 하늘에 많은 재물을 쌓아둔 사람이 곧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4절)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재물을 추구하는 탐심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탐심은 불신앙과 동의어이며,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참된 신앙이다.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5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물질을 추구하는 탐심은 불신앙이다. 또한 물질이 부족하다고 내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도 동일하게 불신앙이다. 염려하는 마음이 어떻게 신앙과 연관되는지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6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8b절) 

위의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을 "너희 하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는 점이다(26, 32절). 하늘의 아버지께서 친히 먹이고 입히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탐욕이 불신앙이듯(19-24절), 염려의 반대말은 신앙이 된다. 물질을 섬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염려를 떨치기 위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추구할 삶의 방향을 이렇게 제시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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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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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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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경계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1절)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보이는 사람 앞에서 행동하려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신다. 구약 성경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살피신다. 


구제할 때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지 말라는 말씀을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에 적용하신다. 먼저 구제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2절) 

"외식하는 자"의 원례적 의미는 연극인을 뜻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 대본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거리에서 나팔을 불곤 했다. 음식을 나눠준다는 소식을 필요한 이들에게 전하는 실용적 측면도 있었겠지만, 나팔을 부는 사람들은 전시효과를 기대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3-4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몰래" 혹은 "은밀하게"하라는 뜻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 은밀한 중에 선행을 베풀 수 있다. 


기도할 때 

기도는 신앙생활의 핵심이요,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다. 그런데 기도할 때조차 하나님을 잊은 채 사람들만 인식하려는 유혹은 그치지 않는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절)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기도를 하기 위해 반드시 골방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는 기도를 강조한 말씀이다. 기도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 외에도 한 가지 권면이 추가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7절)

중언부언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여기는 불신앙의 결과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처지와 소원을 모두 아신다(8절). 기도의 응답 역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 가운데 베푸신다. 그러므로 많은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자세는 하나님을 여타의 인간처럼 생각하는 처사다. 구약의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권면한다(전 5:2).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기도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참된 기도를 좋아하신다." 


금식할 때

예수님은 은밀한 신앙생활의 원리를 마지막으로 금식에 적용하신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절)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의 고통을 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얼굴을 씻지 않았고(당연히 기름도 바르지 않았다),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렸다. 수염을 쥐어 뜯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에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신다. 특별히 로마의 통치가 시작되고 헤롯 가문이 왕위에 앉으면서, 금식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이질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의 통치를 받는 민족의 아픔을 금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금식이란 로마 정부에 협력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면서 자신들은 경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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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3. 1.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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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예수님의 반제(Antithesis)'가 계속된다.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될수록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의 참 의미를 왜곡하였는지,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율법의 바른 정신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맹세하지 말라 

맹세에 대한 가르침은 십계명의 제 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지만 그 맹세가 거짓으로 드러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3절)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에 따라 헛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맹세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서 맹세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신의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34-36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맹세할 수 없으니 하늘이나 땅으로 맹세하면서 거짓인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죄악이라고 지적하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7절)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표현을 보다 쉽게 풀어보면,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라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생활에 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좋아했던 성구 중에는 이른바 동태복수법이라 불리는 구절이 있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8절) 

위의 구절을 동태복수법이라 부르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말씀은 재판관에게 공정한 판단을 명령하는 규정이지 개인의 보복을 명하는 구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손해를 입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상대에게 보복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율법은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마음에 도사린 분노와 복수심을 정당화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3절)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변하지 않는 율법의 말씀이다. 그러나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은 성경에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실천하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 말씀을 피할 길을 찾아 나섰다. 그 하나의 결과로 이웃이라는 개념의 경계를 만들었다. 어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한다(눅 10:2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과 원수라는 유대인의 경계를 허무는 말씀이다. 이웃이든 원수든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모두 사랑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을 이웃과 원수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은 이러한 구분을 뛰어 넘어 나의 모든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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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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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뛰어날 것을 요구하셨다(마 5:20).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예수님의 반제(Antithesis)'는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의 참된 의미를 저버렸는지, 그리고 (2) 예수님께서 어떻게 율법의 바른 의미를 되살리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수님을 새로운 율법의 창시자가 아니라 율법의 성실한 주석가라고 평가하였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6계명이다(출 20:13).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계명을 심판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절)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은 반대로 살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악을 행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의인이라고 자부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오류를 분명히 지적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2절) 

예수님은 생명을 빼앗는 살인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 노하고, 라가라 비방하고, 미련한 놈이라 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율법의 참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 사이의 원망과 갈등이 생각나면, 예배를 멈추고 먼저 원망과 시비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23-24절). 살인이 아니더라도 원망과 갈등만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이 아니겠는가?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의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한다(출 20:14).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명백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조차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계명을 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욕을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율법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피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찾아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1절) 

율법의 전문가답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신명기 24장 1절을 찾아내어 인용한다. 이로써 그들은 이혼 증서를 써주면서 자유롭게 아내를 버렸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아내를 맞아들였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간음을 행하며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여인들의 삶을 불행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2절)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제 7계명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인용하는 신명기의 구절은 예외 조항이라는 점을 확증하셨다. 거룩한 부부의 관계를 그 누구도 쉽게 깨뜨려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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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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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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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복을 선언했다면(마 5:1-12),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르친다.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소금과 빛으로 표현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3-14절) 

"너희"라는 대명사는 본문의 바로 앞에 나왔던 팔복의 대상,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들은 장차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이 아니라 이미 소금이고 이미 빛이다.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그들에게는 복음으로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비추는 사명이 주어졌다.  남은 과제는 그 사명을 감당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제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진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면 산 위에서 비추는 빛처럼 세상 사람들이 그 빛을 바라보게 된다. 

예수님은 소금과 빛의 사명이 구체적으로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신다(16절). 또한, 팔복 선언(마 5:3-12)과 소금과 빛의 사명(마 5:13-16)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팔복이 가르치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마태복음 5장 1-12절 "팔복,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 온유한 행동,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 긍휼히 여기는 것, 화평하게 하는 말과 행위 등이 제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율법의 완성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해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슈였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공격했다(행 6:13). 바울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행 21:17-26). 율법에 대한 논쟁은 교회 안에서도 격렬하여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요 안건이었다(행 15장). 이것은 초대교회만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고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7절)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율법의 완성이란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율법의 조문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넘어 그 참된 정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대 민족 중심의 율법 해석과 적용에서 벗어나 열방을 구원하는 복음의 관점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을 대하는 자세 역시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어야 한다. 

뱅크스(R. Banks)는 위의 구절에서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 이전에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본문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양용의 교수는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는 율법의 연속선상에서 서 계시면서도 율법의 한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율법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경시하는 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율법주의도 반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8절) 

"천지가 없어지기 전"이라는 표현은 특정 시한을 지칭한다기보다, '결코'라는 의미의 과장법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효력이 멈춘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율법은 완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예수님은 다음 구절에서 율법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시점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절) 

17~18절은 '율법'이라는 단어를 쓰고, 19절에서는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17~18절과 19절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17~18절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율법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한다면, 19절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때를 서술한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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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023. 1. 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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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여러분, 참으로 진리의 말씀인지요.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누구든 지식이 있는 사람이 공동체의 리더가 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올라가지요. 그만큼 사람들은 지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하면  지식만큼 공동체를, 특별히 신앙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공동체를,  특별히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그런 점에서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율법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미워했고, 다른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말씀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신이 높아지려는 몸부림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그 지식으로 자신의 죄악 된 마음을 감춥니다. 어떻게요?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조항을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을 죽이지 않은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입니다.


제7계명의 왜곡

자,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전문가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자신의 지식으로  율법의 처음 의도를 흐리고 있는지, 그 두 번째 예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 7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이지요. 우리 다 함께 마태복음 5장 2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 하겠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십계명의 제 7계명이지요. 십계명의 제 7계명을 듣고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곧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금지하는 간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남녀 문제를  지나치게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기 이전의 혼전 관계, 결혼의 문제, 그리고  결혼한 부부들 사이에서 서로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문제, 나아가 이혼의 문제, 재혼의 문제를  구별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녀의 문제를 그렇게 구별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분명한 기준 속에서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지하신  간음은 대상을 바꾸어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철저하게  일부일처제를 강조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성관계를 맺으면,  서로에게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성적인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율법의 두 기초, 곧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경험을  다 잃어버린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십계명에 명백하게 나와 있는 ‘간음하지 말라’라는  제 7계명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간음을 하고 싶어요,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드러내고 어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으로 간음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요.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조항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5장 31절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찾아낸 합법적인 방법입니다. 뭡니까? 이혼 증서를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이 간음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간음을  금지하셨으며, 간음을 행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인지를 가르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라는 대전제 속에서도 예외 조항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조항, 합법적으로 지금의 아내를 내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찾아내서 자신의 숨은 의도를 숨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전서 8장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설령 그 지식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신명기 24장의 이혼 증서에 대한 구절을 차라리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 오경 전체에서 이혼 증서에 대한 가르침은 신명기 24장에 딱 한 번  나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욕망, 곧 간음하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 구석에 있는 말씀도 찾아낼 수 있는 역시 성경의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죠. 만일  그들이 신명기 24장에 나오는 이혼증서에 대한 말씀을 몰랐다면 자신의 아내가 미워지고 다른  여자가 아름답게 보일 때 그래도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설령, 다른 여자와 간음을 행했을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자신이 율법을  범했다고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서 율법에 대한 지식만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어느 날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는 싫증이 나고 다른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 이혼증서 하나  써주고 합법적으로, 조금도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아내를 쫓아낸 거죠. 이혼증서 하나를 받았을  뿐,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던 유대사회에서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걱정 혹은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왜  그렇죠? 자신은 율법에 있는 대로 합법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 여자의 일생은  망치고, 자신은 간음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기준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간음을 하고 싶은 욕심을 가득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간음이란 한 여자에 대한, 혹은 한 남자에 대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마음에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서 간음을 행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의 율법 지식을 총  동원해서 예외 조항을 찾아내고, 그 예외 조항에 따라 합법적으로 간음을 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이미 마음속에 간음을 행하고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너희는  십계명의 제 7계명을 어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9-30절)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단호합니다. 조금의 타협도 없지요. 우리의 눈이 나의 마음에 간음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면 눈을 뽑아 버리면서까지도 율법의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손이 나의 마음에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 손을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간음을 행하고 싶어요. 이 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간음을 행할 길을 찾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29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왜 그렇습니까?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30절도 보십시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왜 그렇습니까?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간음을 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와요. 그때 우리의 본성은 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는  내 마음의 유혹을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때 단호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비록 나의 눈이  뽑히고, 나의 손이 잘려나가는 듯한 손해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간음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이혼에 대해서도 분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3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간음에 있어서 예외 조항을 이용했습니다. 이혼증서만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예외 조항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면, 십계명의 제 7계명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비록 신명기 24장의 말씀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법화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는 간음죄를 행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비록 그 여자가 이혼증서를  받았더라도 그 남자는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혼의 제도를 간음을 행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화하는 데 사용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불순한 의도를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꼬집으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6절b "그리스도의 세계" 성경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천지장조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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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1. 2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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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니 각지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마 4:25).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신다(1절). 산상보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팔복 

예수님은 여덟 가지 복을 선언하며 산상보훈을 시작하신다. 팔복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복 개념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예수님은 복으로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만이 참으로 복된 길이라고 제자들을 초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3절)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단어가 없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한다(눅 6:20). 가난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선사하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가난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사람이 복 되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절) 

애통은 가난한 자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궁핍하고 고통스럽기에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슬픔을 넘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애통 그 자체가 복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슬픈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복 되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약속하신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절) 

다른 사람의 악한 행동으로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당했음에도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고 양보하는 것이 온유다. 세상은 온유한 자가 언제나 손해를 볼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으신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6절) 

인간의 의는 상대적이다. 나의 관점에서는 정의롭지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불의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의의 한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기에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마침내 만족을 얻는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절) 

나에게 찾아온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도 힘겨운 일이다. 그런데 긍휼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나의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는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긍휼히 여길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겨주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절)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간사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세상의 처세술은 자신의 속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절)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고 분쟁이나 갈등이 일어날 때 앞장서서 이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평화의 사자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랑하신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0절)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복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팔복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벌을 받으면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고 거짓으로 홍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누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복 된 사람인지 분명히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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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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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