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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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제목으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언급하셨기에, 사람들은 이 비유를 그렇게 부른다(18절). 그러나 비유의 내용은 씨를 뿌리는 행위보다 씨앗이 뿌려진 땅에 초점이 있다. 크게 보아 열매를 맺는 땅이 있고 그렇지 못한 땅이 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땅 

당시 갈릴리에서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걸어오는 길에 씨를 뿌리는 농부를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농부는 목에 메는 주머니에 씨앗을 담고 걸어가며 씨앗을 뿌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뿌렸다'는 표현은 심는 것과 다르다. 씨앗을 심을 때는 땅을 고르고 그 안에 씨앗을 심고 흙을 덮는다. 그러나 갈릴리의 농부들은 씨앗을 심지 않고 뿌렸다. 그러니 그 가운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또 어떤 것은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지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직접 설명해 주신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농부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다. 단지, 농부가 뿌리는 씨앗을 "천국 말씀"으로 해석하는 대목에서(19a절), 이 비유의 농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길 가'는 천국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19절). 이들에게도 천국 말씀은 들렸다. 다만 깨닫지 못하니,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밭'은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박해나 환난을 당하면 넘어지는 사람이다(21절). 갈릴리 지역의 돌밭은 온도와 습기가 적절하여 씨앗이 다른 땅보다 일찍 발아한다고 한다. 말씀에 그 누구보다 쉽게 반응하지만 환난이 몰려올 때 다른 누구보다 먼저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가시떨기'는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져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이다(22절). 공개적인 박해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실패하는 단계를 가시떨기가 표현하는 듯하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본문을 주석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들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각 사람은 마음속에서 가시떨기를 제거해야 한다." 


열매 맺는 땅 

농부가 뿌린 씨는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23절) 

씨뿌리는 비유는 당시 갈릴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당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마지막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로 마친다. 당시 평균 수확은 약 열 배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숫자다. 그래서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는 <예수님의 비유>라는 책에서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이 풍성한 수확이라고 강조한다. 일반적인 농부는 좋은 땅에 씨가 떨어졌을 때 열 배 정도의 결실을 얻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 복음은 좋은 밭에 떨어질 때 백배까지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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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23. 2. 1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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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1900년대 후반까지도 서유럽이나 북미의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로 불릴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지요. 그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교회를 출석하고, 결혼식과 장례식 등 인생의 중요한 모든 의식을 교회에서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과 이러한 대답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기독교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지,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에 한 가지 표현을 덧붙여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이까?”(Are You a Re-born Christian?) 

매주 교회를 출석하며 지금도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이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b절) 

이 구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는 ‘비로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미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겨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이르러서,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에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야 성도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누군가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지켜보니 저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저들은 우리와 분명히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곧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예수’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고는 “당신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군요”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명찰을 달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꼭 성경책을 옆에 끼고 다니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힘주어 소개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당신은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 질문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당신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군요”라고 평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은 이러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하나님의 선물

저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두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a) 

모든 좋은 것들과 최고의 선물은 어디로부터 임합니까? 바로 위로부터 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야고보서의 말씀 그대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많은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지요.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모여 교회를 이루기 전에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교가 가르치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던 할례의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내가 할례를 받을 때, 내가 율법을 지킬 때, 곧 나의 노력으로 무엇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면, 안디옥 교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할례를 받지 않더라도, 비록 구약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심지어 율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본문 19절부터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9절)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전하네요.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은 예수님을 믿을 자격조차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0절)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헬라인이어도 괜찮습니다. 이방인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자격이나 공로가 전혀 없어도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변 사람들은 작은 예수,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인생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수고가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특권은 나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그리스도인의 특징: 나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첫번째 의미는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베풀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과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여러 마을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라고 파송하십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8b)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선물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단연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요. 그러면 이처럼 위대한 선물을 풍성히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아무런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는 자신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거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었던 하나님의 선물은 단지 복음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27절). 그들 가운데 온 천하에 큰 흉년이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분들이 계셨지요. 그런데 본문 28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온 천하에 거대한 흉년이 닥쳤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안디옥 교회보다는 예루살렘 교회가 더 큰 위기를 맞이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29-30절)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이지요.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였던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중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성도들도 그 사실을 잘 압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믿을 자격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힘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하고 그것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와 선물을 날마다 공급하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선물 가운데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십시오. 나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물로 다 주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격을 묻지 말고 값없이 나누고 베푸십시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 방식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할 때 그들은 비로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있었지요.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결코 따라올 수 없었던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장소도 예루살렘이고, 오순절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시작된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이고,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세우신 열두 사도가 있는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 있게 전하였던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교회는 어느 교회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넘어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았던 교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안디옥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안디옥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복음을 전하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역할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안디옥 교회와 같이 쓰임받기를 참으로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인 줄 믿고 거저 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거저, 값없이 나누며 베푸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시고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바로 이 교회를 사용하셔서, 지난 100년 동안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복음을 전하신 것을 넘어 앞으로 맞이할 100년에도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일에 우리 교회를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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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민수기 성경공부2023. 2. 1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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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광야에서 고기를 먹지 못한다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다(민 11장). 이번에는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한다. 좁게 보면 그저 가족 사이에 일어난 불평과 비난이다. 그러나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미리암은 예언자들의 대표다(출 15:20). 이들의 비난은 이스라엘 종교의 두 기둥인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연합하여 모세의 권위를 뒤흔드려는 시도였다. 


모세의 권위와 온유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구스 여자가 누구인지 성경은 침묵한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cf. 출 2:16-22), 구스 여자는 모세의 두 번째 아내로 보인다. 구스는 함의 자손으로(창 10:6), 에티오피아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비방했다(1절). 모세의 결혼은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리암과 아론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2절)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모세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한다. 민수기 1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70명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다. 이 사건으로부터 용기를 얻었는지,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모세의 독특한 역할이나 권위를 인정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침묵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3절) 

온유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anaw)는 '온유' 외에도 '겸손'으로 번역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궁핍한 사람, 그 어디에서도 도움이 없어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위의 구절에서 모세의 온유는 경제적 궁핍이라는 의미는 없지만 사람들의 비방에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모세의 자세를 표현한다. 


하나님의 판결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모세의 위치와 권위를 의심하였다. 모세는 온유하여 그들의 비판에 침묵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즉시 개입하여 판결을 내려주신다. 하나님은 회막에서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6b절)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8a절)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역할과 권위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환상과 꿈으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 차원이 달랐다. "여호와의 형상"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는 말씀이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뒷모습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출 33:18-23). 모세는 비록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형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세에게는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위가 주어졌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0절) 

모세의 권위를 부정한 잘못으로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나병을 판결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 미리암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13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리암을 7일 동안 진영 밖에 가두라고 명령하신다(14절). 레위기의 규정에 의하면, 나병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진영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7일 동안 정해진 절차를 밟아야 한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뒤 일주일이 지난 뒤에 진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서, 모세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바로 그날  미리암의 나병을 고쳐주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암의 나병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 동안 행진을 멈춰야 했다(15-16절). 이 기간은 모든 사람이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권위와 역할에 대해 충분히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민수기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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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성경공부2023. 2. 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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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불평하자, 모세는 두 가지를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 첫째는 백성을 돌보는 책임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요, 둘째는 백성의 요구사항인 고기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부르짖었던 두 가지 항목에 모두 응답하신다. 


두 가지 응답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은 모세의 무거운 짐을 나눠질 수 있도록 협력자를 세워주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6-17절) 

출애굽기 18장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세웠다. 이들은 재판을 하며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는 시시비비를 가렸다.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직무를 시작하였고, 각 지파별 지휘관들도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면 본문이 이야기하는 70명의 지도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주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하신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두번째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먹여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18절) 

메추라기는 자고새의 일종으로 작은 새를 말한다. 봄에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가을이면 다시 돌아오는  철새로, 애굽과 시내 광야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그들의 이동 경로에 포함된다. 20세기 초 시나이 북쪽에 살았던 아랍 사람들은 그물을 이용하여 낮게 비행하는 메추라기를 잡곤 하였다. 하지만, 본문은 메추라기가 하룻길 되는 지면 위에 두 규빗쯤 (약 90cm) 내렸고, 모든 백성이 열 호멜(약 2,200리터) 이상 거두었다고 기록한다(31-32절). 하루 사이에 이 정도의 메추라기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위대한 기적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상반된 결과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두 가지로 응답하셨다. 그런데 고기를 먹여주신 응답과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응답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먼저 응답의 장소가 달랐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의 상징인 성막에서 주어졌다(24-25절). 반면 메추라기는 부정과 죽음의 상징인 진영 밖에서 주셨다(31-32절).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이끌었지만, 메추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졌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3-34절) 

이스라엘 백성은 충분한 고기를 씹었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원망하였던 본문의 사건을 언급하며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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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성경공부2023. 2. 1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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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내 광야'에서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미드바르)의 원어적 의미는 가축 떼를 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내 광야는 철저히 건조하여 아무런 생물도 살 수 없던 곳이 아니라, 약간의 나무와 풀이 있는 곳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어 농사는 할 수 없지만 목축은 가능한 지역이었다. 이스라엘은 비교적 풍요로운 시내 광야를 떠나 문자 그대로 척박한 광야로 행진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 다시 시작된다. 


다베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평했다. 그런데 본문은 그것을 "악한 말"이라고 묘사한다. 광야 생활에 대한 불평이 악한 이유는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모욕이며, 또한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부정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1절) 

하나님은 악한 말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 진영 끝을 불 사르셨기에 그곳의 이름이 '다베라'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사르신 것은 진영의 끝으로 이스라엘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시내 광야를 출발한 이후 그들의 첫 번째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작은 벌을 내리신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은 멈출지 않았고 그들의 불평이 더할수록 하나님의 벌도 점차 거세진다. 


이스라엘의 탐욕과 모세의 탄식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풍성한 만나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의 불평은 끝이 없었고, 이번에는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친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4b-5절) 

모든 것이 척박한 광야를 지나며 불평이 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면 왜 모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평을 심각한 죄악으로 보았는가? 위의 구절은 그 대답이 된다. 광야 생활에 대한 불평은 곧 출애굽 이전에 대한 회상으로, 종으로 살았던 애굽을 나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역행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 대목에서 만나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7-9절). 오늘날에도 시나이 반도를 여행하는 사람은 성경의 만나와 유사한 물질을 발견할 수 있다. 에셀 나무나 곤충에게서 달콤한 방울이 나오기도 하고, 이끼 종류에서 달콤한 맛이 나기도 한다. 성경이 묘사하는 만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찾을 수는 없지만 어떤 이들은 성경의 만나가 그 가운데 어떤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나가 시내 광야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일부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풍족한 식량이 제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만나로 풍성한 양식을 날마다 베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cf. 시 78:23-25), 이스라엘 백성이 탐심을 부리며 내뱉는 모든 불평은 모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모세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모세가 하나님께 토로하는 마음의 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백성을 돌보는 일이 너무 무겁다(11-12절). 둘째, 백성의 요구사항인 고기는 먹여줄 방법이 없다(13-14절). 이스라엘의 탐욕과 불평은 이미 모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실 차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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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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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은 표적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단지 놀라운 일에 머무르지 않고 천국 복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데 있다(요 20:31). 그러나 유대인 중에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한 채 더 많은 기적만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표적 보여주기를 원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말했다(고전 1:22).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특성 때문일까? 지금까지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또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3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39절)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판하신다. 이제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표적이다. 요나의 표적이란 사흘 동안 요나가 울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40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최고의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떠한 기적을 행하셔도 믿지 않는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이 천국 복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예수님을 믿을 만한 표적이 부족했다고 불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악한 세대의 결말 

바리새인을 비롯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표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분한 표적을 보여주셨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표적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이다. 그들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43절). 귀신이 나가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축귀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여 그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그 마음의 집이 청소도 되어 있고 수리도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텅 빈 상태로 방치되었다. 귀신은 다시 그에게 들어오고 더 악한 귀신 일곱도 데려온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5b절) 

처음부터 귀신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나쁜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한번 쫓겨났다 다시 들어오니 그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치유와 축귀라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다. 그런데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나중 형편은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표적을 거부하는 악한 세대의 결말이다. 


예수님의 가족 

마태복음 12장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을 거부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12장의 마지막은 비관적이지 않다. 비록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하였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49-50절)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가족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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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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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에 대해 바리새인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난했다(마 12:24). 예수님은 이에 대해 계속 답변하신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비난이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고 고발하신다.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다(31절). 이 세상은 물론이고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을 수 없다(32절). 언어를 잘못 사용한 결과가 이처럼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과 언어의 관계 (33-35절)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종종 말씀하셨다(cf. 마 7:16-20). 이번에도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인간의 언어와 마음의 관계를 보여주신다(33절). 나무가 사람의 마음에 해당한다면, 열매는 입술의 열매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가 좋듯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게 되어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4절) 

바리새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그들의 입술도 악한 말만 내뱉는다. 마치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만 맺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5절) 

마음에 무엇을 쌓아 두었느냐가 관건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선을 쌓았기에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악을 쌓았기에 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마치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오듯 사람들은 마음에 있는 것만 입으로 말할 수 있다. 마음에 선을 쌓은 선한 사람이 선한 말을 하고, 마음에 악을 쌓은 악한 사람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심판의 기준: 언어 (36-37절) 

예수님은 마음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최후 심판의 기준으로 적용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36-37절) 

예수님께서 심판의 기준으로 언어를 제시하신다. 어떻게 최후 심판의 기준이 인간이 내뱉은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성경은 심판의 기준이 인간의 마음이요,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맞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지금 내 뱉는 언어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과 언어의 관계 때문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 인간의 언어는 모두 그의 마음으로부터 기인한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 마음의 쌓아둔 것이 결국에는 말을 통해 나오기에, 사람의 말이 그의 마음을 비춰준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언어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 언어가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평가하셨다(34절). 그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들의 언어가 그만큼 악독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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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평가하는 두가지 방식 (사도행전 28장)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평가하며 살아간다. 상관이 부하직원을 평가하지만 동시에 직원도 상관을 평가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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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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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치유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 사람이 말도 하고 앞도 볼 수 있었다(22절). 예수님의 치유가 계속되니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23절). 당시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바리새인의 공격과 예수님의 반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고대하던 메시아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바빠졌다. 질투와 분노가 가득해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을 쏟아놓는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4절) 

바리새인은 예전에도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마 9:34). 그들은 이번에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다만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본문은 예수님의 반론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5절) 

만일 귀신의 왕이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귀신들이 서로 분쟁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렇다면 분쟁하는 나라나 가정이 스스로 무너지듯, 귀신의 세력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니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7절) 

예수님은 또 하나의 반론을 제기하신다. 예수님 외에도 당시에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새인의 자녀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축귀는 인정하였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축귀만큼은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난하니 일관성이 부족한 주장이다. 


축귀와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공격에 반론을 충분히 제시하셨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축귀의 더 깊은 의미를 밝혀주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8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축귀와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다시 한 번 강조하신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9절) 

여기에서 강한 자는 귀신을 의미한다. 강한 자가 어느 집에 자리를 잡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모습은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빼앗긴 영적 상태를 묘사한다. 구원 받기 이전에 인간이 처한 실존이다. 그들의 영혼과 삶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역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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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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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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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앞 단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논쟁이 시작되었다(마 12:1-8). 본문은 손 마른 사람을 놓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며 논쟁이 시작된다. 


안식일에 행하신 선한 일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도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 자리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고발할 기회로 여기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질문한다(10절). 여기에서 옳다는 것은 율법 규정에 합당한 일(lawful)을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수사 의문문으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을 말씀하신다(11절). 사람들은 자신의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끌어내었다. 양은 귀중한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답하신다. 

[바리새인의 질문]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0b절) 
[예수님의 대답]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12b절) 

손 마른 사람은 안식일을 맞아 바리새인의 회당에 참여했다(9절).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규범대로 회당 예배에 참여하며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된 쉼이 없다. 손이 말랐으니 안식일만 아니라 평일에도 노동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고 있지만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에게 온전한 쉼을 주시는 일이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3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하시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분노하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모의한다(14절).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은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마다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1:29). 손 마른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음에도 – 손이 말라있기에 손을 펼(stretch our) 수가 없었다 –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몸과 마음의 쉼을 얻게 되었다.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규율에 얽매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한다. 

본문과 관련하여 교회에 내려오는 전설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가 사용한 히브리어로 된 마태복음에 손 마른 사람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대목이 나온다고 제롬은 기록했다. “주여 나는 벽돌공으로서 나의 노동으로 살아왔나이다. 오 예수여, 주께 구하오니 내 손을 회복시키사 양식을 구걸하지 않게 해 주소서.”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역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떠나신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다(15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16절). 예수님은 왜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답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사라지고 능력을 행하는 예수님만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경계하셨다. 본문은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를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며 확증한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19-20a절) 

예수님의 사역은 치유와 축귀의 기적을 광고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요란한 소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보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의 영혼을 찾아가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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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성경공부2023. 2. 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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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앞단락(마 11:25-30)에서 마음의 쉼(rest for your souls, NIV)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쉼이 안식일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제자들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밀밭 사이를 선택하신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먹기 시작한다(1절). 현대인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것이 도둑질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얼마든지 허용되는 행동이었다. 문제는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안식일 규정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2절)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두 장면으로 대답하신다. 첫째 장면은 다윗과 관련된 일화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하나님 앞에 진설하는 거룩한 떡을 얻어 먹은 적이 있었다(삼상 21:16). 또 하나의 장면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제사장은 상번제를 매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민 28:3-8). 안식일이 되면 상번제에 더하여 안식일의 번제도 드리도록 율법이 규정해 놓았다(민 28:9-10). 예수님께서 구약의 두 장면을 인용하신 이유는 율법이나 안식일 규정에 대한 예외 사항을 제시하여 필요에 따라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윗이 율법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았고, 제사장도 그들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초월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분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6절)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다윗이나 제사장보다 크신 분이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신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8절) 

사람이 안식일을 맞이하여 쉼을 얻는 길은 안식일의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믿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쉼과 평안을 주신다. 이어지는 단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안식을 얻은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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