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자신을 향한 사울의 살해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였다(삼상 20장). 사울 앞에서는 자신의 생명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다윗은 도망자의 길을 떠난다.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지만(삼상 1611-13), 현실은 정바대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 (1-9절)
다윗은 제사장의 성읍인 놉을 찾아갔다. 놉은 실로가 파괴된 이후 성소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었다.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얻는다. 일용할 양식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는 도망자에게 필수품이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6절)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떡을 진설하여 바쳐야 했다. 이 떡은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정이 다급한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이 떡을 요구한다. 그만큼 다윗의 처지가 절박했다. 이후 예수님은 본문을 인용하며(마 12:3-4),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강조하신다(마 12:8).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9절)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릴 때 사용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물맷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사용한다. 이 칼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동안 다윗이 그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제 한 치 앞을 알지 못하여 언제나 칼을 곁에 두어야 하는 도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셋 망명의 실패 (10-15절)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떠나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을 시도한다. 다윗이 블레셋 망명을 시도한 근거는 아마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브레셋과 이스라엘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가 된 다윗을 블레셋이 받아주리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거둔 전공을 상기시키며 다윗을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1절). 위험을 감지한 다윗은 기지를 발휘하여 미친 척 연기를 하였고, 불행 중 다행으로 블레셋의 가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블레셋에서 참기 어려운 수치를 당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의 복을 노래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다윗은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제사장에게 음식과 무기를 구걸하고,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방인 앞에서 미친 체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으로 다윗은 억울하게 당하는 거대한 고난도 참고 인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에 대해 사유해보면, 인생의 고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또 내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결책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일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고난의 또 다른 특징은 내 안에 깊이 숨겨진 부정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평안하고 안락할 때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이 모가 나고 마음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숨길 수가 있지요. 내가 평안하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나에게 찾아온 아픔도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니 그 또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레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이나 평안할 때는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고통의 시기가 찾아오거든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일어날 때, 곧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합니다. 그러나 모레 위에 지은 집은 허물어집니다. 이처럼 홍수가 몰려올 때, 곧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고난의 일반적인 특징을 한두 가지 말씀드렸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왔을 때만 그것이 나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바라보며 공감해줄 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직접 겪는 아픔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성경도 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입니다. 욥이 큰 고통을 당하였지요.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욥 자신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욥 자신의 아픔일 뿐 친구들의 아픔은 아니라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영성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헨리 나우웬은 “가장 치유하기 힘든 아픔은 나 자신의 상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언제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나에게 아픔이 찾아올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사유도, 그리고 동서고금을 박론한 인생의 지혜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은 지독하리만치 개인적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 모든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위대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25a절)
지금까지 누누히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이나 고난은 언제나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통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아픔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고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범죄 때문에 당하신 대속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지요. 분명히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설명할 수 없어 단지 이 신비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가’입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께 옮겨갔습니다. 전가되었지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내가 지은 수많은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에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자,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전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 모든 공로와 은혜가 이제는 우리에게로 전가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절)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성경의 선언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이 위대한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가 합한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가지는 생사고락을 같이합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과 합해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도 합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예수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죽음이요,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죽음이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자, 로마서 6장 3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곧 우리의 고난이 된다고 말씀하지요. 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할 때,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려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과 하나되기를 추구하십시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고, 바로 그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례와 성만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르치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되는 중요한 현장이 어디인지 말씀합니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합하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요,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서 지금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였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한평생 세례를 한번 받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건은 한번 일어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이미 접붙여진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가 합하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은 어디일까요? 오늘도 우리가 행하게 되는 성만찬 예식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살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받아, 그것을 먹고 마시며 우리는 다시금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만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이 신비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그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이 있는 그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여 주실 것이요, 바로 그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얻고 예수님의 부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진행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도 엇갈리기 시작한다. 첫째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다. 둘째로 일반대중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14절).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금씩 깨닫는다.
시대의 표적 (1-4절)
예전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적이 있다(마 12:38).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분한 대답을 주셨지만, 그들의 자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절)
위의 구절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청한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병자를 치유하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일들이 마치 땅에서 일어난 무가치한 표적이라도 되는 듯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예수님은 하늘이라는 그들의 단어를 그대로 받아 하늘의 징조로 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2-3절)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시대의 표적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책망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은 너무도 신비하여 하늘에서 일어날 것 같은 기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시대의 표적이다. 곧, 요나가 물고기 배에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역사적 사건이다(4절, cf. 마 12:39-4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5-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떠난 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6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지 말라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7절)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떡과 물고기에 있었다. 이처럼 떡의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러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정성껏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오병이어)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칠병이어)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떡이 아니라 교훈에 대한 것임을 알려주신다(8-11절).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니 제자들은 거짓 교훈을 버리고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데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제 때가 되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다 확실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15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시며 믿음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18절)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약속하신다. 교회의 기초(foundation)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이요, 그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21절). 그곳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으로 이방인의 땅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예수님이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가나안 여자 (21-28절)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21절). 그 여자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23절).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며 이방인이나 사마리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마 10:5-6). 지금 가나안 여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자세가 꼭 그와 같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4절)
예수님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발언을 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6절)
예수님의 대답에서 자녀는 유대인을, 개는 이방인을 뜻한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대교의 문화에 익숙했던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한 의미인지, 이방인을 얼마나 크게 모욕하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여기에 가나안 여자의 두 번째 슬픔이 놓여있다.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린 첫 번째 슬픔 위에 예수님께 간청했지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거절당하는 두 번째 슬픔이 더해진다. 처절한 모욕과 슬픔 속에서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한 번 더 간구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7절)
가나안 여자는 자신에게 자격이 없음을 철저히 인정한다.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요청한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칭찬하시는데(28절),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결정을 바꾼다. 이방인이라고, 멸시받는 여성이라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는지도 모른다.
산 위에서 치유하심 (29-31절)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29절).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5장 1절에도 등장한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산에 올라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1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쳐주시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전통에 얽매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을 때(15:1-20),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갈릴리의 어느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참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예루살렘에서도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을 준수하는지 지켜보았고, 이내 예수님께 따지듯 질문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과 유대교의 전통이 충돌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신앙의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 강조하신다.
인간의 전통 VS 하나님의 계명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어기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공격한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1-2절)
장로들의 전통이란 랍비들을 비롯한 유대교 옛 지도자들의 가르침으로,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율법 외에도 많은 조항을 규정해 놓았다. 그 가운데 식사 전에는 손을 씻으라는 항목이 있었다. 장로들의 전통은 손을 씻을 물의 양과 질, 물을 붓는 방식, 손의 자세 등 세밀한 부분까지 정해놓았다. 그러니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장로들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3절)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 하나의 예가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이다(5절). 예를 들어, 누군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 밭의 소출 일부를 부모님께 드려야 했다. 이때 포도밭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선언하면(고르반), 포도밭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소출의 일부를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관습이었다. 포도밭을 하나님께 드리더라도 그 밭의 소출은 모두 그 밭의 주인이 소유하면서 말이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전통만 소중하게 따를 뿐,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는 처사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태를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며 한 번 더 비판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7-9절)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사람들의 참된 마음이 무엇인지 폭로하신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러니 그들의 말과 상관없이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질문, 곧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제자들에 대한 그들의 지적에 대답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1절)
장로들의 전통은 음식을 정결하게 먹기 위해 손을 씻으라고 규정해 놓았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힐 수 없다고 말씀한다. 반대로 아무리 정결한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사람을 더럽게 혹은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18-19절)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입술의 말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을 분명하다. 인간을 더럽게도 그리고 깨끗하게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요, 그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정결과 부정이 결정된다.
현대인들의 많은 질병은 섭취하는 열량만큼 몸의 움직임이 부족하여 발생한다. 비만,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대부분의 성인병이 그렇다. 그래서 의사들은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인들 가운데 운동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충분히 걷기만 해도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걷기의 유익을 알지만 걷기를 실천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걷는 존재>의 저자 애나벨 스트리츠는 이 책에서 52개의 걷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의 한글 제목은 <걷는 존재>이지만, 원서의 제목은 <52가지 걷는 방법>(52 Ways to Walk)이다. 그만큼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걷기에 대한 사유보다 실제적인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걷기의 유익에 대해서는 알지만 걷기를 실천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내용이다.
'걷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고 하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아니, 걷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걸음마를 뗀 이후 우리 모두는 걷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우리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다채롭게 걷는 방법은 모른다. 그래서 걷기를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재미가 없으니 하고 싶지 않고, 걷기의 유익은 인정하지만 실제로 걷지 않게 된다. 애나벨 스트리츠가 제시하는 52가지의 방법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걷기에 다양한 의미와 재미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그녀가 52가지의 방법을 제시한 이유는 매주 하나씩 실천하면 일 년 동안 즐겁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인데,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금 나에게 적합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듯하다.
애나벨 스트리츠가 제시하는 걷는 방법은 때로 서로 상충하는 것도 있다. 제2장은 바른 자세로 빨리 걸으라고 권한다. 반면 4장에서는 천천히 걸으라고 조언한다. 15장에서는 혼자 걸으라고 말하고, 43장은 모두 모여 함께 걷는 유익을 강조한다. 26장은 햇살 아래에서 걷기 위해 정오 시간에 걷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46장은 밤길을 걸으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읽으며 굳이 무엇이 다른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인지 질문할 필요는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심지어 상반된 경우라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 걷기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걷는 대로 좋고, 바른 자세로 빠르게 걸으면 그 나름대로 유익하다. 햇살 아래에서 걸으며 경험하는 것과 밤길을 걷는 경험은 서로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제시하는 방법들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다채로운 걷기를 위한 조언이다.
걷는 방법은 다채롭기에 이것이 정답이고 저것은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으며 누리는 즐거움을 증가시키기 위해 피하거나 멀리해야 할 것은 분명히 있다. 바로, 핸드폰 사용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에서 달리는 동안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 GPS 기계 사용을 멀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러너들이 주로 사용하는 GPS 계기는 핸드폰과 워치다. 걷기도 마찬가지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습관은 걸으며 주변을 관찰하거나 냄새를 맡는데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면 변하는 날씨가, 계절이 바뀌는 풍경이 보이고, 새의 목소리가 들린다." (p. 59) 강변이나 공원을 걸을 때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그곳에서조차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사람들의 자세다.
실외운동인 걷기는 걸으면서 마주치는 생경한 풍경이 신선함을 제공한다. 평소 다니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색다른 풍경을 맞이할 수 있다. 때로는 걷는 시간만 바꾸어도 된다. 인공조명 아래에서 시곗바늘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인들도 거리로 나가 걷기만 해도 자연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걷기는 조금만 정성을 들여도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단, 조건이 있다.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와 열린 마음이 그것이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를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듯합니다.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 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는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인지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못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라도 가볍게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선언하면 모두 끝나는 일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깊이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죄악을 깊이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살펴보는 일이지요. 바로 그때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깊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죄 용서의 복
본문 시편 32편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시편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던 이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그 복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어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2절)
다윗이 노래하는 신앙의 참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 것, 나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신앙의 참된 축복입니다.
다윗은 구약시대의 인물인데,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길이 있었을까요? 구약의 율법에 따라 범죄한 모든 인간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죄를 저지른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가축을 끌고 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위한 속죄가 되게 하셨습니다(cf. 레 1:4).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죄악을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 용서의 방법에 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조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도 그리고 신약성경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죄용서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복을 받으셨습니까? 마음의 평안, 가정의 화목, 교우들과의 교제, 물질의 축복 등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입을 열지 아니할 때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죄 용서의 축복을 노래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죄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선포합니다. 본문 3절부터 이제 다윗 자신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여기에서 입을 열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죄의식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하루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쇠할 정도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다윗이 지금 묘사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죄를 범하였지요. 곧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의 잘못이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지지 않고 씨앗이 되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맺게 되었습니다. 곧,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있었습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당연히 다윗 자신의 아이였지요. 그런데 다윗은 오늘 본문 3절의 표현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윗은 명령을 내려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전쟁에 대해 질문하는 듯하더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아에게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하룻밤 휴가를 줍니다. 다윗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분명히 다윗 자신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면서 그 아이를 다윗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우리아의 아이로 바꾸려는 시도였지요. 그런데 우리아는 그날 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시도가 이렇게 실패합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본문 3절 그대로이지요.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절)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다윗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입을 열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게 되지요.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입니다. 그렇게 밧세바는 사별하였고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행동한 다윗의 의도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마치 다윗과 밧세바의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다윗의 두번째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처리하고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합법적인 혼인관계를 맺었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자인 다윗 왕을 공개적으로 비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다윗의 죄악은 감추어지는 듯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가 없잖아요. 다윗이 큰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다윗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감히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짓누르고 계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메마름입니다(4절). 나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깊이 숨겨두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결코 감출 수 없으니 우리의 영혼은 메마름, 곧 영적 기근과 영적 고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영적인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몸에 큰 질병이 찾아온다거나, 삶의 환경이 급격히 변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침체를 겪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큰 죄악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순식간에 바싹 메말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나의 죄를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숨길 수 없기에 회개하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되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복할 때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숨기려 할 때 그의 영혼을 메말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을 다윗은 얼마나 큰 수치와 모욕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받더라도 회개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절)
다윗이 자신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께 다 자복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하나님의 손이 주야로 그를 짓누르는 듯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죄악이 그의 마음에 가득할 때는 그의 뼈가 쇠하고 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서 그의 영혼이 바싹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회개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6a절)
이 구절에서 “주를 만날 기회”라는 번역에 미주가 되어 있지요. 미주를 보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까? “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라” 죄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할까요? 당연히 회개의 기도지요. 다윗은 계속해서 회개가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와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6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거대한 홍수를 마주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요. 그런데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모두 회개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홍수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홍수가 그 사람을 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홍수가 와도 두렵지 않고 홍수가 그 사람을 쓰러트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권이지요.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절)
아니, 앞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짓눌러서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져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은신처가 되어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보호하신다고 노래하네요.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지요? 딱 한 가지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담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되니 이제는 환난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 용서의 축복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동행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환란이 찾아오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회개라는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시작된 사순절 기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십시오. 우리의 회개가 깊어질수록 사순절을 보내며 누리는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은 두 가지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22-33절)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마 8:23-27절)이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교훈하신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사건의 배경은 오병이어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 무리를 모두 흩어 보낸 뒤 산에서 기도하셨다(22-23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4절)
제자들은 항해 중에 큰 풍랑을 맞이한다. 가다라 지방으로 배를 타고 건널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함께 타고 계셨다(마 8:23-24).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 제자들은 큰 풍랑으로 고생을 하였고, 그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모두 아시고 그들을 돕기 위해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신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6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을 분명히 경험하였다. 그 장면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고, 제자들의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다(마 8:26).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고 또다시 두려워한다. 심지어 그들을 돕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7절)
예수님의 말씀이 들렸지만 제자들에게 의심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장면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2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걷기 시작한다(29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바람으로 의심과 두려움이 생겨 물에 빠져 들어갔다(30절). 이처럼 믿음과 의심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베드로의 마음에 공존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바른 믿음에 대해 교훈하신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1-32절)
예수님께서 처음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마지막 반응은 질문이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마 8:27)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 한번 거친 바람을 잔잔하게 하신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감탄과 경배로 바뀌었다.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할 만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도 전해졌다. 예수님은 따로 빈 들에 가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계신 곳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도 세례 요한의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을 터이다(13절). 그렇게 요한의 죽음으로 모두가 슬퍼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무리들을 바라보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곤 하셨다(마 9:36).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불타오르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4절)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몸이 아픈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사람들을 모두 흩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한다(15절). 가진 것이 별로 없던 제자들은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6절)
병자를 고쳐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저녁 한 끼라도 먹이려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 모든 무리를 흩어 보내시는 것을 보면(마 14:22-23),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녁 식사를 먹이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없으셨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이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잃어버린 무리들을 바라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었다.
풍성한 식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다(16절). 그러나 가진 것이 별로 없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있는 그대로 대답한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7절)
제자들이 가져온 것은 초라한 음식이었다. 남자만 5000명이 되는 수많은 사람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은 음식을 제자들의 손에서 받으시고(18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이 시작된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20-21절)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남자만 5000명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도록 거두었다. 한 마디로, 풍성한 저녁 식탁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것은 보잘것없는 음식이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선물로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