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2020. 11. 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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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위기와 돌파구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금송아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참다못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언하신다.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1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시내산, 하나님의 임재가 온 백성에게 충만하게 드러났던 언약의 장소를 떠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말씀은 더욱 절망적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3절) 더 이상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야 하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모세에게 가나안 입성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에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지 않는 일은 너무도 비극적이지만 자주 현실로 나타난다. 건물도 있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이 울리고 종교적인 장식품이 배치되어 있고, 예전은 빈틈없이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곳은 가장 비극적인 목회 현장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세를 따라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목회 현장으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절)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내가 친히 가리라"(14절) 


성막(Tabernacle)과 회막(Meeting Tent)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출 19-24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출 25장 이후). 성막은 회중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며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막에서 봉사하며 제사를 집례하도록 되어 있다. 출애굽의 후반부는 주로 성막을 만드는 내용으로 모세의 관심사 역시 성막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33장에 등장하는 회막은 성막과 구별된다. 회막은 성막에 있는 종교적 상징물도 전혀 없으며, 제물이나 제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자 그대로 '만남을 위한 장막'(Tent for Meeting) 일뿐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장소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제사를 집례하고 섬기는 성막이 아니라 진영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회막이었다. 회막의 위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닫지 않는 곳이니(7절) 모세는 더욱 깊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고,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11절). 그리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백성의 큰 죄로 인하여 신앙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 위험 속에서도,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친히 가리라"(14절)는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목회의 공적 공간은 성막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막과 구별되는 개인 경건의 장소인 회막이 반드시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성막에서의 사역이지만 성막에서의 사역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회막에서의 만남에 달려있다. 회막 목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기에 시내산에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결국 시내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예수님과 세명의 제자들도 변화산에서 결국 내려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구원의 체험, 사명의 체험 곧 시내산에서의 언약이 귀한 것이지만 언제까지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모세가 회막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것처럼, 목회자는 성막이 아닌 자신만의 회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는 점이다. 


회막 목회를 꿈꾸며..... 

회막은 모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모세 자신이 회막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을 앙모하는 백성들도 회막을 찾았다(7절). 이 점에서 회막은 목회자 개인의 영성훈련을 넘어, 하나의 목회적 특성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회막 목회는 목회자 자신이 회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아가 성도들도 각자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회막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약속 장소다. 그러나 '만남을 위한 장막'(Tent for Meeting)이라는 이름의 뜻을 성도들을 만나는 장소로도 해석하고 싶은 것은 나뿐일까? 목회자로서 성막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을 만나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일도 매우 중요하고 보람이 있다. 아울러 나 자신만의 회막, 곧 만남을 위한 나만의 장막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수 있다면, 또한 성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처럼 회막 목회는 목회자가 누릴 수 있는 값진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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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다니엘 성경공부2020. 11. 2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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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의 꿈이 두 개 등장한다. 다니엘 2장에 등장하는 꿈은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시작하는 역사의 흐름을 계시하는 꿈이다. 다니엘 4장이 소개하는 느부갓네살의 꿈은 크고 높은 나무가 그루터기만 남고 베어지는 내용인데, 이것은 느부갓네살 자신의 인생 여정에 대한 예언이다. 다니엘은 이 꿈을 해석한 뒤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라고 권면했지만(단 4:27) 왕은 자신의 삶을 돌이키지 않는다. 그 결과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은 다니엘이 해석한 그대로 성취된다. 


꿈과 그 해석의 성취 

본문은 꿈과 그 해석이 성취되는 구체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들었지만 여전히 교만하였고 그는 이렇게 자부한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30절) 

느부갓네살 왕은 정복자로 후대에 이름을 남겼지만, 동시에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가 건축한 바벨론 성은 이중 성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성벽 위를 양쪽으로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곽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슈타르 문은 높이가 14.3m에 이르며 양편에 575개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바벨론의 건축물 가운데 기원전 7세기에 재건된 지구라트도 매우 유명한데 그 높이가 약 90m에 달한다고 하니 느부갓네살이 건축한 바벨론의 웅장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바벨론 건축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자만은 <시리아 원정기>(The Expedition to Syria)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내가 레바논으로 원정을 조직했고, 내가 나라의 대적을 물리쳤고, 내가 흩어진 자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한 말을 내뱉자 그가 일 년 전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된다.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발톱과 같이 되었도다 (33절) 

본문 33절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본문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정신착란 증상이 찾아왔을 것이라는 정도다. 


느부갓네살의 신앙고백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이 정확히 성취되는 경험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다. 본문 34절은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하늘은 단순한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러러보았다는 의미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4b절) 

느부갓네살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권세를 잡으시며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이 부각된다.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들은 신들이 결혼과 투쟁을 통해 '탄생'했다고 가르친다. 곧, 이방의 신들에게는 영원성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영원한 분인데, 이방 민족인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을 고백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결론 - 찬양과 경배 

다니엘 4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느부갓네살 왕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서라는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 조서의 마지막 문장은 찬양과 경배로 끝난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37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높은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낮은 자]를 높이신다.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 백성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더라도, 마음을 겸손히 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 4장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의 개인 인생에 대한 꿈은 이렇게 다니엘이 해석한 대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다니엘 2장에 등장하는 인류 역사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꿈도 다니엘의 해석과 같이 반드시 성취되리라 생각할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이든 두 번째 꿈이든 모두 오래 전의 역사 기록일 뿐이지만,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4장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2장의 꿈도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든든한 소망의 근거가 되었다. 

 

다니엘 성경공부 목차

다니엘 연구 "묵시 문학" 다니엘서의 중요한 특징은 구약성경의 유일한 묵시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약성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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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다니엘 성경공부2020. 11. 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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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이야기는 커다란 위기로부터 시작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는데 무엇인가 의미 있는 꿈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의 내용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그 내용과 해석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명령한다. 누구도 느부갓네살의 꿈을 알아맞히지 못하자 그는 분노하며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벨론에 이주하여 왔던 다니엘도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칼바람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느닷없이 찾아온 거대한 위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이 은밀한 일 

본문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본문은 철저하게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니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물론 다니엘의 행동에 본받을만한 점도 많다. 친구들과의 합심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 등.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어디까지나 다니엘에게 왕의 꿈과 해석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다니엘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계시'가 본문의 핵심 주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이 은밀한 일'이다. '은밀한 것' 혹은 '은밀한 일'이라는 단어가 본문에서만 18절, 19절, 22절 모두 세 번 등장한다. 다니엘 2장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이 단어는 다니엘서를 제외하면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여기에 등장하는 '이 은밀한 일'은 다니엘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은밀한 일'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의 능력과 지능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초월적인 일이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이 힘을 합하여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곧,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현실이 실체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은밀한 일을 드러내신다(22절). 


묵시 문학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묵시, 혹은 묵시 문학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에스겔서와 다니엘서가 이에 속하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그렇다. '묵시'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이를 본문의 표현을 사용하여 단순히 설명한다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이 은밀한 일'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이 묵시다. 그래서 에스겔, 다니엘,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 문학에서는 환상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려는 '이 은밀한 일'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기에 일상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환상을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 세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묵시 문학을 읽거나 공부할 때는 환상을 보았다는 현상에 집중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이 은밀한 일'의 의미와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니엘서가 드러내려는 묵시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더욱 분명하고 풍성해진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묵시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왕을 폐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왕들을 세우신다'(21절)는 점이다. 

느부갓네살의 불호령에 다니엘을 비롯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가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 은밀한 일'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 인간들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은밀한 일'을 먼저는 꿈으로 느부갓네살에게, 그리고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드러내시자 전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더 이상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 죽음의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죽음의 위기를 느껴야 했던 사람은 느부갓네살 자신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세상의 모든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이라고 절망할 필요도 없고, 형통의 순간이라고 교만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간은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이 은밀한 일'을 드러내신다. 바로 그때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인생이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이다. (본문 20-23절의 다니엘처럼) 신약 성경의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이 은밀한 것'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그 날을 묵묵히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다. 

 

 

 

다니엘 성경공부 목차

다니엘 연구 "묵시 문학" 다니엘서의 중요한 특징은 구약성경의 유일한 묵시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약성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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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1. 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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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진 피터슨의 유고집이다. 그는 그의 아들 에릭 피터슨 목사와 자주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목회의 사명을 성찰하는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의 사후, 그 편지들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아들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였기에 이 책에는 목회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진솔한 심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상품화된 목회 프로그램 

유진 피터슨은 목회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영성 형성이라고 말한다. 목사 자신의 영성을 형성하는 과정, 그 위에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목회 여정이다. "영성 형성은 우리가 일하는 기반이며, 적어도 목회 소명이 가장 넓고 깊게 뿌리를 내리는 기반이지,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것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 같구나."(p. 70) 영성 형성이 목회 사명의 기반이지만, 실제로 많은 목사가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푸념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중요한 이유로 유진 피터슨은 소비지상주의를 지적한다. "목회와 교회 생활을 너무나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두루 퍼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소비지상주의인 것 같다.... 우리는 요람에서부터 소비자로 키워졌지, 소비자는 수동성과 물성의 전형이다. 이 소비자성이 교회 생활을 포함하여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의 분위기를 조성한단다."(p. 49) 

현대 문화의 핵심인 소비지상주의는 목회 영역에서는 프로그램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포장된 상품을 사는 일과 프로그램에 동원되는 일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지. 그것이 관계에 충실한 인간이 되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상품으로 제공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교회로 향하며 그런 교회를 좋아한다. .... 어찌 보면 상품 교회, 프로그램 교회가 번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소비문화에 맞게 재편된 복음이라 할 수 있지."(p. 51) 

현대 문화의 소비지상주의와 목회 현장의 프로그램 중심 현상은 너무도 거대한 흐름이어서 쉽게 거스르기 어렵다. 문제는 상품과 프로그램이 인격성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하는 목회를 물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의 목사가 이와같은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유진 피터슨의 글에는 상품화와 프로그램화의 경향을 변화실 수 있다는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목사 개인이 이러한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할 일은 포장하기와 프로그램 운영을 계속 경계하고 (물론 그것들 없이 교회 일을 해나갈 순 없겠지) 인격적 요소를 내세울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인 듯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름을 부르고 단어 선택이나 메시지 전달 방법에서 비인간화된 형태의 대화를 최대한 피하도록 하자. '효율성'이 모든 것을 좌우하도록 허용하지 말자꾸나."(p. 53) 


목사의 길 

소비지상주의와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 현장은 목회의 인격성을 추구하는데 큰 방해물이다. 그러나 목회의 인격성을 손상시키는 위험은 목사 자신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목사라는 직업 자체가 오히려 영성 형성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룩한 단어와 거룩한 대상을 많이 다룰수록,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 전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하고 거룩하고 충만한 행위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둔해진단다."(p. 44) 

목사는 목회의 인격성을 상실하고 모든 대상이 물화되는 현실을 겪으며 그 돌파구로 사역지를 옮기는 방법을 간구하기도 한다. "목회자가 경력 중간에 찾아오는 침체형 피로와 그에 따른 권태감을 다루는 표준적 해결책 하나는 교회를 옮기는 것이다."(p. 151) 그러나 유진 피터슨은 이것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손쉬운 해결책이고, 결국 네 삶이 성령 안에서 인격적, 소명적으로 깊어지는 것을 가로막는단다."(p. 151) 

유진 피터슨은 그 대안으로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사가 묵묵히 걸어야 할 길은 보여준다. "남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성공을 추구해서도 안된다."(p. 216) "이천 년에 걸친 목회 전통의 공통 요소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 및 하나님과 관련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 일은 구체적인 현장에서 일어나고 철저히 인격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p. 217) 

이 책에 수록된 서른일곱개의 편지에는 날짜가 기록되어있고, 그 시간의 순서에 따라 편집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이 소개하는 유진 피터슨의 편지를 한통씩 읽으며 어느 진실한 목사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듯했다. 비록 세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목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발자취는 편지를 읽는 나도 익명으로 그 길에 동참하라고 초청하는 듯했다. "매일매일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 너, 우리 W 목사님, 너의 회중에 있는 린다, 책을 쓰는 나, 그리고 다른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는 산산조각 날 위험이 없다."(p. 160)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국내도서
저자 :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 홍종락역
출판 : 복있는사람 2020.09.15
상세보기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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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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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돌아보니 성경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봄철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맙니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에 힘이 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고 멋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풀이 마르듯 젊음은 사라지고 건강했던 육신은 질병이 찾아옵니다. 마침내 더 시간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듯 우리의 육신도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성경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시간이 더 흐르면 마침내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요, 곧 세세토록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기에 그 누구도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셨다는 복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인을 비롯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는 복음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날 다시 오시어 고인은 물론이요 유가족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족 여러분, 비록 고인의 육신이 마르고 떨어져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지금의 장면으로 말미암아 큰 아픔과 괴로움이 엄습할지라도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인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고인에게 영생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시어 고인과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비록 고인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육신도 시간이 지나 한줌의 재로 돌아가겠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고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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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0. 11. 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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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13절)

여기에 등장하는 ‘자는 자들’은 곧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죽음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진리란 한번 태어난 인생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죽음이라는 무서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죽음이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돌아가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넘어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할 최후의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의 내용, 곧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변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cf 살전  1:9-10).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우리처럼 복음의 내용을 알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마음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던  교회의 형제자매가 원치 않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그의 인생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큰 슬픔 속에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마치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cf. 살전 4:13b)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 있다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아픔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만 같은 큰 아픔이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도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은 너무 멀게만 느껴져 오늘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희로애락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기독교의 궁극적인 소망, 곧 성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소망의 근거 – 예수님의 부활

죽음의 문제, 곧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인 죽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이라는  뜻이지요. 네, 이것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떠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존에 대해 성경이 내어놓는 모든 대답은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켜 주셔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믿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삼켜진 성도들이라도 그 마음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잠자는 성도들을 먼저 일으켜 주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당한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후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 공중에 올려진다는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이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이나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b)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경험한 성도들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살아남은 성도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과 마지막 죽음까지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과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앞에  당한 고통과 아픔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인 죽음을 당한  성도들까지도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고 일으키신다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어찌 잊으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성도들보다 죽음을 당한 성도들을 먼저 앞세워 일으켜주시고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통과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만  보호하여 주시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여러분들은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순간이라도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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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1. 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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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예측'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 그리고 최근의 디지털 혁명으로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무한에 가까운 정보는 보다 정확한 예측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촉진하였는가? 네이트 실버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정보의 양은 무한정 늘어났지만, 그 안에서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고 신호에 근거해 보다 정확히 예측하는 일은 여전히 초라한 성적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른바 각 분야의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예측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다. 네이트 실버는 전문가의 예측이 가장 크게 실패하는 영역으로 정치와 경제를 꼽는다. 정치평론가들이 수많은 예측을 내어 놓지만 그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는 무작위로 내어놓는 예측이 현실이 될 확률보다 그 다지 높지 못하다. 심지어 전문가들이 복잡한 계산으로 내어 놓은 경제 분야의 예측도 현실이 되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전문가들도 소음에 섞여 있는 신호를 정확히 구별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측의 실패 요인 

 

예측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분야가 있다. 날씨는 지진보다 예측의 정확도가 높은데, 기상을 측정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데 반하여 현재의 기술로도 여러 지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료가 풍부할 때에도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는 무수히 많은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잉적합(overfitting)이다. 과거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도하게 복잡한 모델을 만들면, 과거의 현상을 잘 설명하기에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부적절한 모델이 되는 현상이다. 

 

이 책에는 신호와 소음을 혼돈하는 많은 이유가 등장하지만,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가는 결정적인 원인은 예측가의 자만심이다. 많은 전문가가 자신이 제시한 예측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모든 모델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양질의 정보에 근거하여 최선의 예측을 내어놓으면서도 예측이 빗나갔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빗나가는지 그리고 빗나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또 빗나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예측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p. 345) 그럼에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가지고 예측을 하는 경우가 많다. 네이트 실버는 이와 같은 예측을 평가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복잡한 현상을 예측하면서 지나친 확신을 보이는 건, 이 예측이 해당 문제를 철저하게 고찰한 뒤에 나오지 않았거나 통계 모델에 대한 과잉적합의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또는 진리에 다가서는 것보다 명성을 얻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징표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p. 592) 

 

 

보다 정확한 예측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에서 네이트 실버가 제시한 보다 정확한 예측법은 크게 두 가지로 통한다. 먼저 여우의 법칙이다. (pp. 101-110) 

 

여우의 법칙 1 - 확률적으로 생각하라 

여우의 법칙 2 - 날마다 새로운 예측을 하라 

여우의 법칙 3 - 집단 지성을 활용하라 

 

여우의 법칙과 함께, 네이트 실버는 베이즈 정리가 모든 예측의 기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베이즈(Thomas Bayes)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무결점의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인간이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률을 무지와 지식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지점으로 이해하게 됐다. '확률'을 더 철저하게 이해하는 일이 과학(진보)의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p. 364) 

 

베이즈 정리의 수학적 형식에서는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의 개념이 등장한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추론이 사전확률이라면 그 사건을 겪으며 확률을 새롭게 수정한 것이 '사후확률'이다. 그러니 베이즈 정리는 네이트 실버가 강조하는 여우의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베이즈 정리는 먼저 진리를 확률적으로 접근하고(여우의 법칙 1), 사전 확률에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여 사후 확률을 도출하며(여우의 법칙 2), 이 과정에서 집단 이성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여우의 법칙 3). 여기에 베이즈 정리의 장점이 등장하는데, 확률의 개념으로 예측 활동에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지나친 자만심과 확신을 배격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증거가 등장할 때마다 사전확률을 수정하여 조금 더 정확한 사후확률을 도출한다. 

 

 

이 책의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그러나 예측이 현재 주어진 정보에서 소음을 거둬내고 신호를 조합하여 의미있게 실체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이 책이 말하는 예측은 현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과 평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측은 기본적으로 정보 처리의 한 유형, 즉 새로 나타난 자료를 이용해서 세상에 대해 더 진리에 가깝고 더 정확한 개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한 마디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여우의 법칙이나 베이즈의 정리는 진지하게 참된 것(진리)을 찾고 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소중한 지혜라 하겠다. 

 

 

신호와 소음
국내도서
저자 : 네이트 실버(Nate Silver) / 이경식역
출판 : 더퀘스트 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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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0. 2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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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충분히'라는 어정쩡한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있어 그 방향과 범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공적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공감대를 이룬 듯하다. <광장에 선 기독교>(A Public Faith)에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지적하는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의 신학적 배경은 분명히 서구의 기독교이지만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현실 인식은 한국의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기능장애 

미로슬라브 볼프는 공적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기능 장애'라고 표현한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적 종교가 공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상승'(ascent)과 '회기'(return)가 바르게 일어나야 하는데, "기독교 신앙이 신비주의 종교처럼 실천되어서 상승이 창조적인 회귀로 이어지지 않고 황량한 회귀가 될 때 기능장애가 일어난다"고 설파한다(p. 30). 볼프는 기능장애의 현상을 두 가지로 묘사한다. 그 하나는 나태함이고 다른 하나는 강요다. 나태함이란 신앙을 개인의 내면으로만 간직한 채 공적 영역에서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가는 신앙을 말하며, 강요란 기독교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드러내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태도다. 

신앙의 기능장애인 나태함과 강요는 서로 상반된 개념인 듯 보인다. 이른바 신앙이 약하면 신앙을 그저 마음에만 간직하는 나태함에 빠지고 신앙이 강하면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앙을 주입하려는 강요로 이어지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양 극단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는 지적은 이 책이 선사하는 매우 탁월한 식견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볼프는 두 개의 대조적인 개념을 표층적 신앙과 심층적 신앙으로 제시한다. 신앙의 기능장애로서 나태함과 강요는 정반대의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표층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기독교의 폭력에 대한 치유책은 기독교 신앙에 덜 충실한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정의된 의미에서의 기독교 신앙에 더 충실해지는 데 있다." (p. 70) 

"표층적이면서 열정적인 신앙의 실천은 폭력을 촉진하기 쉬우나 심층적이면서 전적으로 헌신된 실천은 평화의 문화를 낳고 유지된다." (p. 71) 


심층적 신앙 

기독교의 기능장애, 곧 나태함과 강요를 극복할 수 있는 심층적 신앙인의 공적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대안을 묻는 이 질문에 답하는 대목이 <광장에서 선 기독교> 제 5장 "정체성과 차이"다. 여기에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제시하는 대안은 '내부적 차이'다. 

"기독교를 구분하는 차이는 늘 주어진 문화 세계에 내부적이어야 한다." (p. 132) 

저자가 주장하는 내부적 차이는 예시를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식생활의 예를 계속 들자면, 식사라는 것은 꼭 개인 또는 공동의 본능적인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눔과 예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 (p. 135) 

"환대의 장소가 되려면 안방은 좀 줄이고 손님용 방을 만들고 거실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두번째 방식을 깨닫게 해 준다." (p. 135) 

식문화 및 주거문화와 같은 우리 사회의 문화로부터 기독교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기독교의 공적 영역이 우리 시대 문화의 외적 요소를 거부하거나 변화를 강요하는 외적인 차이와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 안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담지하는 내적인 정체성과 차이를 말한다. 그러니 이러한 변화는 나태함이나 강요와 다르고, 표층적 신앙을 넘어 심층적 신앙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공적 역할이다. 

"그리스도인이 한 문화에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란, 크고 작은 거부, 차이, 전복들, 그리고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대안 제시와 시행을 통해, 많은 문화적인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네트워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p. 137)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어진 문화 속에서, 문화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이질적인 것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것이다."(p. 138) 

 

광장에 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 김명윤역
출판 : IVP 201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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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0. 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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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복음의 진리를 교회 안에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확신하고 선포한 복음은 이신칭의로 알려져 있다. 곧, 행위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초기 작품 가운데 복음에 대한 이해가 명료하게 드러난 <크리스천의 자유>는 복음의 진리를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한다. 그리고 이신칭의는 두 가지 명제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개신교회가 이신칭의에만 집중한다면, 루터가 발견한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계승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마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공개장'(서문)에서 자신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은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루터가 보기에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타락도 문제였지만, 그 모든 것의 뿌리는 불경건, 곧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었다. 

사실 나는 불신적(不信的) 교훈을 날카롭게 공격했으며 나의 대적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부도덕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불경건 때문이었습니다. [각주:1]

나는 어느 사람과도 그의 도덕에 관해서 싸우지 아니하고 다만 진리의 말씀에 관해서만 싸운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에게나 무엇이든지 양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려는 힘이나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대해서 달리 생각한다면, 그는 내가 실제 말한 바를 올바로 생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틴 루터가 그토록 수호하기 원했던 '경건'의 내용은 무엇인가? 마틴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에서 복음을 다음의 두 명제로 요약한다. 

(1)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主)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2)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從)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루터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정의하였는데, <크리스천의 자유>를 저술하면서도 두 가지 명제로 구성된 역설을 사용한다. 역설이란 언듯 보기에는 논리적 충돌로 보이나 실상은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는 '만물의 주'이면서 동시에 '만물의 종'이라고,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고 역설의 기법을 사용한다. 물론 루터에게 있어 첫 번째 명제가 두 번째 명제보다 우선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언약의 말씀을 신앙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무와 열매가 따로 떨어질 수 없듯이 마틴 루터가 제시한 두 가지 명제는 함께 있을 때에만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표현한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의 주장은 분명하다. '선한 열매를 원하는가? 그러면 좋은 나무를 심으라.' '좋은 나무를 심었는가?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복음이 선사하는 놀라운 크리스천의 자유이지만, 복음의 한쪽 측면이다. 복음의 다른 측면은 크리스천이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는 모든 만물의 주가 된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만물의 종이 된다. 

크리스천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에게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얻는 자유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요, 사랑에 근거한 선행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그런데 오늘날의 개신교가 신앙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크리스천의 자유만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만물의 종이 되려는 자세를 포기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것은 루터가 강조한 크리스천의 자유에 있어 절반에만 해당하는 데도 말이다.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국내도서
저자 : 말틴 루터 / 지원용역
출판 : 컨콜디아사 200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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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 인용문은 지원용이 번역한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사용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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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0. 10. 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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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의한 멸망,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 

예레미야 46장부터 51장은 이방 민족에 대한 예언이다. 46장부터 51장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46장부터 49장까지 그리고 50장과 51장이다.

46장부터 49장이 다루는 나라들을 보면,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 등 많은 유다의 주변국들이 거의 등장한다. 이처럼 많은 나라들을 언급하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는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신흥 강대국을 일으켜 오리엔트 지역을 점령하게 하셨으니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거스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과거에 세계를 호령하였던 애굽도,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다도 바벨론이라는 하나님의 칼에 쓰러진다는 예언이다. 그러나 50장과 51장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던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예언이다. 그러니 46장부터 49장이 바벨론을 일으켜 여러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라면, 50장과 51장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여러 민족,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회복하신다는 예언이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한 유다 멸망 
B.C. 538년. 메대와 바사에 의한 바벨론 멸망  (고래스 칙령) 

 

바벨론의 멸망은 유다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의 고래스 왕이 유대 민족을 귀환시켰기 때문이다. 


참고구절. 에스라 1장 1-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유대인의 과제 

본문 3절은 바벨론이 함락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할 것임이니라" 
바벨론 주민에게는 메대와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하는 그 날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하는 날이 된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되어 끌려온 유대인에게는 귀환의 날이다. 그래서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귀환을 묘사한다.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예레미야서는 1장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49장까지 한결같이 바벨론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어 끌려가라고 권면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켜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메대와 바사로 하여금 바벨론을 함락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바벨론으로 가라'가 아니라 '바벨론에서 도망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옛날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이제는 바벨론에서 나오라.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같이 하라 

그러나 유대인의 과제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공간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옛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출 19-24장), 바벨론에서 나온 유대인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포로 귀환을 허락하실 것이니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신앙적 회복을 요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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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