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021. 3. 2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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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에 대해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 단락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각주:1]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던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생의 선물이라는 것도 우리는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우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만을 묵상한다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걸아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그 길은 오늘 우리도 따라가야 할 제자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복음 12장 23절)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므로, 23절의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나아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8절) 

저는 어린 시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올림픽 등 중요한 대회에서 매달을 딴 선수들이 인터뷰를 하거나 연말 여러 가지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1등을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어린 시절 저에게만 있었던 생각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 교회 안에 넓게 퍼져 있는 일반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그 이미지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나아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의 핵심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들려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듯이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도 대단히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 그 과정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도 참된 영광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찬란한 영광의 중심에는 십자가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교회에서 많이 배우셨죠? 그러면 이제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성공을 이루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자신의 삶을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이 구절은 앞뒤의 문맥을 떼어놓으면 오해하기 참 쉬운 구절이지요. 문자적으로 보면 자신의 생명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언듯 깊은 절망 속에서 자살을 시행하거나 개인적인 야망과 포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뒤의 구절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앞의 구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본문 25절을 읽으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나 자신을 희생하기 싫어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문 25절에 나오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주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또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 본문 25절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장 26a절) 예수님은 지금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염두에 둔다면 25절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입술로 말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이육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누가 될까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본문 25절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한 번만 더 설명해 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 그리고 ‘미움’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 곧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나의 온 마음이 향하고 있어서 이 세상의 것들이 상대화되어 버리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온통 향하고 있어서 예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마음이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25절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설명드렸는데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해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는 많은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바로 나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나의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이제는 나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과 실천

여러분, 어떠세요? 오늘 본문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지요. 더 이상 우리에게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순종하려는 결단,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에게 적용하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면할 때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나는 성경말씀 중에 내게 이해되는 내용이 나를 더 괴롭힌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1등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인생이라는 사실도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나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워요.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걸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일은 우리의 본성이 거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일뿐 나의 삶이라는 현실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천국도 사랑하고, 예수님의 위로도 좋아하며,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만찬 자리도 사모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예수님과 함께 당하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며 어느 권사님과 나눈 짧은 대화가 계속해서 제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올해의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 좋겠다는 소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소원은 있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죠. 때로는 저도 너무 힘들거든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세요?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주님과 친밀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다시금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그러한 이상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대원칙이라고 설교할 수 있고, 여러분도 설교를 들으며 ‘아멘’이라고 응답하실 수 있지요.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저는 설교할 수 있고 여러분도 ‘아멘’이라고 응답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설교도 하고 아멘으로 응답하더라도 우리의 본성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니,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고, 예수님의 위로는 좋아하고 예수님께 함께하는 만찬을 즐거워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은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마음에 여전히 맴돌고 있는 그 날 권사님과의 짧은 대화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정반대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다는 대속의 은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것 위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나니

토마스 아 켐피스는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과 함께 금식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하늘나라의 첩경이 되는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평화가 있고, 
십자가 안에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각주:2]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본성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우리가 신앙생활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도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희생과 자기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가정이라면 여러분이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직장이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학교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신 장소가 교회라면 여러분이 계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여러분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학교와 바로 이 교회 가운데 풍성한 열매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음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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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05 “토마스 아 켐피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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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토마스 아 켑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1. 1, 3.  [본문으로]
  2.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2. 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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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1. 3. 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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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으로, 그 주제는 ‘심판’이다. 마태복음 25장은 3개의 비유로 되어 있는데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다. 그러나 양과 염소의 비유로 불리는 본문은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기보다 최후 심판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최후의 심판

본문은 최후의 심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마태복음 25장 31-32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심판주로 묘사하시는 이 구절은 오해의 여지가 없다. 비록 지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셔야 하지만, 마지막 때가 이르면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며 심판주로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실 것이다. 심판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의 외면과 회피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본문은 최후 심판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태복음 25장 34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장 41절) 

예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예비된 나라’, 곧 천국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34절에 등장하는 나라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요, 최후의 승리자들이 들어가는 천국이다. 반면, 예수님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을 명하신다.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임하실 때까지 유보되었던 형벌이 그날에는 더 이상 미뤄지지 않고 멸망하는 자들에게 선고될 것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심판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5장 46절)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심판주로 반드시 재림하며 그때에 모든 인간은 영벌에 처하는 이들과 영생에 들어가는 이들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 


심판의 기준

본문은 최후 심판의 결과를 생생하게 묘사하지만, 본문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님께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의인은 사랑과 도움을 베풀었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자신들이 언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장 45절) 

일반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우리 사회의 약한 이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의 기준은 약한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조금 더 확장하면, 영생과 영벌은 인간의 선행에 달린 것이 된다. 그러나 40절의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는 표현에서 “나의 형제”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형제란 예수님의 제자를 가리키는데, 곧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선행 여부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연약한 형제를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이 되며,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연약한 형제를 외면하는 것이 예수님을 외면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토의 문제 

1. 본문이 생생하게 묘사하는 최후 심판의 장면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에는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는지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오늘 내가 섬겨야 하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요?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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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3. 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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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기를 원한다고 또다시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영화롭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두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화로운지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제목은 사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과 영화로움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시편 48편 10a절)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나님의 향한 찬송이 얼마나 이 세상에 흘러 넘치는지 바라보며 감격합니다. 시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에 이렇게 감격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라

시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편 48편 9절)

시인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고 찬양하기 전에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데, 그 대신 얼마나 많은 사건과 환경들을 깊이 묵상하지는 모릅니다. 만일 어느 직장인이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직장 상사로부터 참기 힘들 정도의 모욕적인 꾸중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직장인은 하루 종일 무엇을 묵상하고 있을까요? 오전에 들었던 직장 상사의 그 심한 언어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가정 주부가 집안에서 반드시 지출해야만 하는 비용이 있는데 지금 당장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주부는 하루 종일 무엇을 묵상하고 있을까요? 돈이 필요하다는 그 환경을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루 종일 깊이 묵상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깊이 묵상하는 그 대상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화로우심을 바라볼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29장의 가사가 이렇게 되지요.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 세상의 모든 풍파가 우리를 뒤흔들어서 약한 마음을 낙심하게 만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르지 못해요.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받은 복을 세어라”(Count your blessings)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오늘 본문을 기록한 시인과 같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나이다


자세히 살피라

시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결이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에 등장합니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시편 48편 12-13절)

시인은 시온을 돌아보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라고 명령합니다. 시인은 시온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워놓은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는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면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편 14절)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성벽을 쌓고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성벽이나 망대입니까? 아니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바로 이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깊이 분석하면서, 지금도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교회의 구석구석을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정확하게 분석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훌륭한 신앙인인가요? 목사님들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겠습니까?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를 자세히 살피는 목적은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가 견고하게 세워졌는지, 혹은 부실하게 세워졌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 성의 성벽과 망대를 자세히 살펴보아서 결국에는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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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1. 3. 1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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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덟 가지의 복을 선언하신 적이 있다(마태복음 5장). 그런데 본문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가지의 화를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을 선언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화를 선언하셨는가?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분명한 갈림길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복을 선언하신 대상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 사람들이요,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화를 선언하신 대상은 예수님을 마지막 순간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자들이다.

 

 

겉과 안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여섯 번째로 화를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겉과 안의 중요성을 뒤바꾸었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태복음 23장 25-26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모습만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라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 차게 되었다. 겉모습을 깨끗하게 가꾸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초지일관 강조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율법의 박사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율법을 잘 알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던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자신의 속마음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게 내버려 두었을까? 여기에 신앙의 역설이 있다. 머리로 하나님에 대해 잘 알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겉모습만 신경 쓰고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속마음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처럼, 지금도 자신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그것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 표현되었다.

 

 

박해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번째로 화를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와 의인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였던 박해를 말씀하신다(마태복음 23장 30-32절). 그런데 문제는 박해의 역사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마태복음 23장 32절)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들이 박해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저지른 박해는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악독한 죄다.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장 33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장면도 언급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 보내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송한 교회의 일꾼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마태복음 23장 34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곱 가지의 화를 선언하신 뒤, 예수님은 그 결론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감싸 안으려고 수없이 노력하셨지만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품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낸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마태복음 23장 37-38절)

 

 

토의 문제

 

1.    우리는 외모와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내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유혹, 나에게는 어떠한 것이 있나요?

 

2.    끝까지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려 했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수없이 은혜로 품으려 노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잘못과 실수를 받아 주시고 포용해주신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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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2021. 3. 1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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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거듭남’은 너무도 중요해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거듭남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네요. “진실로 진실로”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강조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말씀하시죠. “사람이” 이것은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듭남’을 신앙생활의 부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어서 거듭나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1900년대 후반까지도 서유럽이나 북미의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로 불릴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되면 교회를 출석하고, 결혼식과 장례식 등 인생의 중요한 모든 의식을 교회에서 진행하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과 이러한 대답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기독교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기독교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이 마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지,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에 한 가지 표현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거듭남이라는 표현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이까?”(Are You a Re-born Christian?)

 

매주 교회를 출석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주제인 ‘거듭남’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던집니다. 단지 교회의 성도 명부에 여러분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는 것 말고, 단지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예배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 말고, 단지 예배시간에 눈을 감고 기도하거나 조그마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것 말고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여러분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물론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답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거듭남의 첫단계 _ 회개

 

거듭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가 많이 있지만, 오늘은 거듭남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죠. 한자말로 표현하면 중생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거듭남, 중생 혹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면 모두 동의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듭남을 건물로 비유하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하려면, 아니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시작이라도 하려면 나 자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리모델링으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이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는 재건축, 곧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필요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곧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나에게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으니 그러한 단점을 고치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불가능해요.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없이, 그저 일부분만 수정해서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는 내가 하나님 앞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은 분명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매우 나쁜 소식으로 시작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먼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강도짓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많은 잘못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아시지요? 이 책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세상의 지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지혜자가 크리스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는데, 그 커다란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때 크리스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1] 이 책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경책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수많은 죄를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가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의 행실의 일부분을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처음부터 구제불능이니 아예 다시 태어나야 하는구나,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조차 없구나, 중생의 은혜가 없이는 나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회개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진심어린 회개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그래도 내가 이 정도면 신앙생활도 잘 해왔고 사람들에게 특별히 손가락질당할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거듭남의 첫번째 단계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셨지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강한 자는 정말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몸은 아파요. 몸은 큰 질병에 걸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건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의사가 아무리 많아도 쓸데없지요.아무리 의술이 뛰어난 의사도 그러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커다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는 큰 죄인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이요, 그로 말미암은 진실된 회개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지적하는 것 말고요.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들 말고요.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내가 죄인이며, 내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 _ 믿음

 

거듭남의 두번째 단계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등장하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이 유명한 이유는 이 하나의 구절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먼저, 이 구절의 뒷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여기서 영생이란 우리의 몸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첫 번째 탄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말하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 앞부분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이네요. 그리고 그다음을 주목해보세요. “독생자를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와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셨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단어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누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이 직접 그 행위를 한 로마의 군인들에게 있을까요? 그 모든 책임과 잘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군인들에게 돌리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니죠? 왜 그렇습니까?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유대지방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넘겨주었지요. 성경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넘겨주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따른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올바른 평가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넘겨주다’는 단어를 추적하다 보면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로마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빌라도, 예수님을 향한 시기와 미움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수년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던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예수님을 넘겨준 또 한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하였던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2]

 

성도 여러분,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일까요? 십자가에 담겨 있는 성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던 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죄악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벗어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생의 선물임을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자책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그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여러분은 과거의 죄악 된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 태어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 _ 거듭난 삶

 

회개와 믿음을 통해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거듭남의 단계를 세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마지막 단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이미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당황하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거쳐 거듭남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 앞에 자신이 없어지는 이유는 이제 말씀드리려는 거듭남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를 지속적으로 밝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장 21절)

 

여기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른 자”는 복음의 진리를 믿어 거듭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통해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은 빛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듭난 이후 자신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안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는 삶의 대원칙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잖아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믿으시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까?’ 질문하면 우리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어질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이유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거듭남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안에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미 거듭남을 체험하셨다면 이제는 다시 태어난 사람답게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로 이것이 거듭남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아직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미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다시 한번 여러분의 마음에 거듭남의 은혜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어둠이 아닌 빛으로,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슬픔이 아닌 기쁨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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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Bunyan, Pilgrim’s Progress, part I, v. 41.

[2]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No Condemnation in Christ Jesus,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112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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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3. 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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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눈의 띄는 변화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코로나로 인한 교회 활동의 변화를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코로나의 대유행 시기를 보내면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던 교회의 활동은 단연코 예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면할 수 없으니 비대면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활동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지요.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가 그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는 이 다섯 가지 영역이 모두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친교와 봉사 그리고 선교의 활동이 주로 멈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을 다 포기하면서도 단 한 주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던 것이 바로 예배요, 교회의 모든 역량이 집결되었던 영역도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교회의 예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협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코로나의 대유행은 교회와 성도들이 예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예배를 이야기하다보면, 대면 예배와 비대면, 특별히 온라인 예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이전까지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TV나 모바일의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생각했습니다.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나, 근처에 교회가 없는 선교지가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 속에서 예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상을 통해 참여하는 온라인 예배의 부정적인 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이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의 ‘시청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올려드리는 예배자의 자리를 떠나 영상의 단순한 시청자로 머물러 있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시청자인가? 이것은 영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예배자와 시청자의 구분은 온라인 예배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배자인가? 아니면 예배의 관람자인가? 


성전 정화 _ 예배자의 자리를 회복하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던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는데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던 로마의 화폐가 아닌 수리아의 화폐로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로마 화폐를 수리아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지요. 본문 14절이 이와 같은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이들은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요한복음 2장 14절)
[이들은 성전세를 납부하는데 필요한 수리아의 화폐를 환전해주는 사람들이었지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잘 알기에, 이들의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월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듭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까지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끌고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바쳐야 했는데, 먼 여행길에 짐승을 끌고 오다가 특정 부위가 상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닙니까? 그러니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 제물인 소와 양과 비둘기를 딱 준비해 두었다가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요? 당시는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당연히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성전세는 수리아 화폐로 납부하라고 하니 성전에 환전상이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요? 그러면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역정을 내며 그들을 책망하셨을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요한복음 2장 15a절)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성전에서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내쫓았을 때 그것들을 판매하던 장사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양과 소를 관리하기 위해 성전 밖으로 따라 나갔겠지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요한복음 16장 a절) 

예수님께서 소와 양은 직접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지만, 비둘기는 직접 날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를 날려 보내면, 그 주인들은 비둘기를 다시 잡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물로 사용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제물을 파는 상행위 자체를 멈추라기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장 16b절) 

기는 성전이잖아요.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라고요. 예수님께는 “장소”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시장으로 만들었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장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안에서 환전하는 장면을 보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대상은 상인과 환전상들이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제물로 쓰려고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샀겠지요. 그들이 성전세를 내려고 환전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망이 본문에는 없어요. 그들이 제물을 구입하기도 하고 환전도 했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성전 안에서 예배자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는 상인으로 있으면 안돼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는 환전상이 되면 안돼요. 성전 밖에서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농부가 될 수도 있고 어부가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핸드폰만 열면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어떠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든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우리의 자세가 예배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혹은 우리의 눈 앞에 예배 영상이 송출되고는 있지만 예배자가 아니라 시청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 예배자가 아니라 관리자의 자리에 있으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치지 않으실까요? 

‘너의 그 관심사를 가지고 이곳을 나가라’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 속에서 오늘도 예배에 함께 참여하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만큼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진실한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제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상점이나, 성전세에 필요한 화폐를 구할 수 있는 환전소라면 그 정도의 불편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예배는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도 없고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온전한 예배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과 환전상을 쫓아내시자, 성전을 관리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 곧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시는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기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요구하는 신비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크고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윤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한복음 2장 20절)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이라고 가리키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세 번째 성전입니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매우 아름다운 성전이었지요. 그래서 그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다시 세웠고, 이것이 두 번째 성전으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재건하였으니 규모도 작고 그 모습이 초라했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흘러오다가 기원전 약 20년, 이방인이면서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던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크고 웅장하게 재건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성전이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헤롯 성전을 자랑하듯 이야기합니다. 46년이나 걸쳐서 세워진 성전인데, 지금 보는 것처럼 이렇게 크고 멋진 성전인데 이 성전을 헐라니 그리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없는 허풍으로 들렸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6일 만에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3일 만에 성전 하나를 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상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진심이었고 예수님은 이 위대한 일을 친히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장 21절) 

이 구절을 열쇠로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해석하면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헌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무너지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하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상인들과 환전상들만 보일 뿐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그런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가득한 새로운 성전을 완성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셨지요. 비록 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건축한 성전이지만 하나님의 집을 시장으로 바꾼 상인들과 환전상을 책망하며 모두 쫓아내셨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인간들이 건축한 성전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코로나 시대, 예배가 많이 위축되었다고 말합니다. 딱 보아도 한국교회의 예배 참석자의 숫자가 지난 1년 동안 급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는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는 수많은 예배의 영상이 쏟아져 나오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교회와 예배를 비방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를 일구어갈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헤롯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여전히 자랑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자를 위한 제물을 보다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많은 성전세를 걷기 위해 환전의 편리성을 주장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이 오답이라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는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고, 오늘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감당하셔야 했던 십자가의 죽음,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한지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흘러 넘칠 때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모임은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을 들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서만이라도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고정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여전히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참된 예배자로 만드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오늘 우리의 모임을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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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1. 3. 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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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트집 잡았다(마태복음 21장 23절). 이에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대답하시는데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본문이 소개하는 ‘혼인잔치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첫 번째 초대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잔치와 같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2장 2절)

어떤 이들은 이 잔치가 ‘혼인 잔치’라는 데 주목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성도를 신부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잔치를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 된 교회의 혼인으로 해석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이 비유에서 성도들은 분명히 신부가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잔치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으니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마태복음 22장 4b절). 단 한 가지, 아직 손님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 초청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한다. 여기에 ‘그 청한 사람들’(마태복음 22장 3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었는데(마태복음 22장 4a절) 여기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어 율법의 말씀을 전하셨고, 이후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며, 세례 요한과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셨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마태복음 22장 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셨지만,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초대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그들은 자신의 밭과 사업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펼쳐진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마태복음 22장 6절) 

결혼 잔치에 초대하였다고 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였고, 마침내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자신이 며칠 뒤에 당하게 될 십자가의 죽음이 암시되어 있다.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였으니 이들에 대한 임금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태복음 22장 7절)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적 현실이 되었는데, AD 70년 하나님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군대를 예루살렘에 보내셨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예수님을 끝까지 거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다. 


두번째 초대

임금은 새로운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초대한다. 이번에는 종들에게 길거리로 나가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명령한다. 첫 번째 초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묘사한다면, 두 번째 초대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번째 초대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심지어 임금이 보낸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온다(마태복음 22장 10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장 9-10절) 

첫번째 초대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초대에서는 민족과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가 악인이든 의인이든 모두 초대를 받는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과 달리 교회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심지어 의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천국 잔치에 참여한 성도들 중에도 그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2장 11-13절) 

여기에서 임금이 제시한 기준, 곧 “예복”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번째 초대를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예복”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임금의 초대를 받아 이미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넘어 복음에 따르는 합당한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기에 이러한 해석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참고. 마태복음 7장 21절) 


두 가지 교훈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했던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통해 최소한 두 가지의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첫번째 초대와 달리 두 번째 초대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심지어 악인까지도 임금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초대가 모든 경계와 범위를 초월하였기에 나 같은 죄인도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 비유가 암시하고 있듯(마태복음 22장 6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둘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끝까지 왕의 초대를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심판하신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서도 하나님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신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hanjin0207.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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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2. 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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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대표적인 저서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r Homo?)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단순히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이제 너희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만 하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받아야 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안셀무스는 꽤 통쾌한 대답을 해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숙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이 크고 무거웠던만큼 예수님은 그토록 모진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성도의 고난

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시편 25편과 마찬가지로 탄식시입니다. 곧, 깊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이지요. 성경은 일반적으로 신앙인이 당하는 고통에는 다 목적이 있고, 그에 따르는 유익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지금 당장 너무도 아프고 쓰리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감추어진 성도의 유익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은 시편에 너무도 많아요. 그 가운데 하나인 시편 34편의 몇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편 6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19절)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경은 고난을 통해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을 시편에서 찾아본다면, 시편 119편이 될 것 같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편 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 고난을 통해 또다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고난을 통과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더욱 성숙할 나 자신을 소망하게 됩니다. 


시편 22편의 고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상황도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삶에 큰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 아픔은 너무도 쓰라렸지만,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시고 나아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고통은 더해가기만 하고 그 아픔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2편이 꼭 그와 같은 고난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 

지금 시인은 자신의 몸에 질병이 찾아왔다거나, 지금 당장 극심한 궁핍에 시달린다거나,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자들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정황이 그다음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22편 2절)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고난이 찾아왔다고요? 아닙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기도했다고 말하잖아요.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밤낮 부르짖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신앙인들에게도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축복으로 바꾸신다는 말이 최소한 시편 22편에는 안 맞아요.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기억하며 기도하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 4-5절) 

이 구절에서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다윗의 시’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지만, 시편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150편으로 묶여진 것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라는 점을 기억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의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그 무엇이 되었든,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에게 행하셨던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였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과거에 큰 구원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구원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어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편 22편 6절) 

인간이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배웠고, 성경을 통해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인가 봐요. 내가 사람이라면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었으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셔야 하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그들을 큰 고통에서 구하여 주셨다면서요. 나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믿으며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만은 외면하고 계시니,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벌레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시편 22편의 깊은 탄식입니다. 


대속의 고난

여러분, 어떠세요? 성경이 고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시편 22편과 부합하지 않죠.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으로는 시편 22편의 탄식이 해석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시편 22편의 탄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시편 22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것은 ‘대속의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그것을 ‘대속’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마태복음은 그 의미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장 46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1절 외에도, 시편 22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묘사하는 장면이 참 많아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16절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편 22편 16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잖아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17-18절)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죄를 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밤과 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어요.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였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귀를 닫으셨으며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섭고 그토록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무거웠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무서워야 했고,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치명적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그렇게 참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 인간들이 겪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감당하시는 대속의 고난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을 예언한 또 다른 예언자인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4-6절) 


구원의 은혜

시편 22편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견디셔야 했던 대속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대속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모습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만, 시편 22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의 대전제는 시편 22편의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이 묘사하는 대속의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의 후반부는 22절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22편 22절)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형제들에게 선포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예수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편 22편 24절) 

우리가 곤고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아왔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위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전반부, 곧 1절부터 21절까지와 후반부, 곧 22절 이후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집고 넘어가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21절 이전, 곧 전반부에서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대적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뿐, 그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11절)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를 버리셨지요. 철저히 한 사람의 고독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후, 곧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이 등장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특징 하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홀로, 고독하게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의 고독한 대속의 고난이 우리 모두의 구원과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고 있는 죄의 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 하나님은 그 죄를 벌하지 않고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너희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모질었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안셀무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범죄 한 인간이지만,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버리시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직접 체험하였던 사도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1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안에서 
우리는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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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2. 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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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사상가이기도 했던 스캇 펙이 저술한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첫 장에서 스캇 펙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고통의 감정을 회피하려는 성향’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의 문제를 질질 끌고 외면하면서 그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하기보다 그 문제를 그저 회피하는 것인데, 이러한 자세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이른바 탄식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탄식시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5편도 대표적인 탄식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25편에는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극심한 고통과 아픔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시편 25편 16-19절) 

오늘 본문 시편 25편 외에도 시편 전체의 약 1/3 이상이 탄식시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노래가 모여 있는 시편의 약 1/3 이상이 탄식시라니, 인간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했던 스캇 펙의 이야기가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너 나할 것 없이,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이라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그 고통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 아픔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겠지요. 시편의 탄식시를 읽고 묵상하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유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아픔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신앙인의 지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시편 25편을 통해 어떠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라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 시편 25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그 첫 번째는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라”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편 25편 1절) 

우리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러한 고통이 내 삶에 엄습하는가?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에게 찾아온 고통과 아픔의 원인을 더듬어 찾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의 삶에 찾아온 고통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제 아무리 던져보아도 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욥에게 찾아온 고난이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사단은 왜 하필 욥에게 그 극심한 고난을 내리도록 계략을 썼던 것일까요?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수없이 질문했지만,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에는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왜 나에게 이러한 아픔이 찾아왔는지 질문하는 것은 신앙인의 지혜가 아닙니다. 

시편 25편은 자신의 삶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아픔과 그 고통을 가지고 주님을 우러러보았지요. 그리고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 채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을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2)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 찾아온 아픔과 고통을 회피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다는 것은 아프고 괴로운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짊어진 채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뢰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2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나를 부끄럽게 않게 하시고” 지금 부끄러움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잖아요.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지금 당장 내가 패배하고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개가를 부를 것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요. 그 모든 괴로움을 다 짊어지고 있어요. 그 모든 아픔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모든 아픔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모든 아픔을 주님께 아뢰라, 그의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편 25편 3절)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2절과 3절은 그 분위기가 상당히 다릅니다. 2절에서는 지금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는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 것 같아요.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여주시고, 오히려 까닭 없이 속이는 자 곧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죠. 이러한 차이, 곧 2절에서는 지금 당장 큰일 날 것처럼 탄식하며 기도하지만 그다음 구절인 3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시편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탄식시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셔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2000년의 교회사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관용어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Sursum Corda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음을 들어 올리다’가 됩니다. 이 말은 우리 예배와 우리 기도의 핵심을 묘사해주는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신앙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만큼이라도, 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시간만큼이라도 여러분의 영혼으로 주님을 우러러보십시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온다 하더라고 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그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주시기 바랍니다. 


시선을 나 자신에게 두라

나의 삶에 큰 고통과 아픔이 찾아왔을 때,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 그 두 번째는 “시선을 자신에게 두라”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시편 25편 6절) 

여기에 갑자기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언급되지요. 시편 25편이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하는 이유는 이제 새로운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편 25편 7절) 

시편 25편이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던 시편 25편은 이제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뿌리 깊은 죄성을 발견하였지요. 신앙인으로 살아갔지만, 그래서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지만, 내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나의 삶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도 아니고, 나를 괴롭히는 대적자들도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 똬리를 치고 있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고통이라는 계기를 통해 철저히 깨달았던 것이죠. 그리하여 시편 25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하며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자신의 죄악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오셨지요.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여 ‘내 영혼이 주님을 우러러보나이다’ 기도하며 간구하셨지요. 그리하여 그 모든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을 받으며 지금까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참으로 잘하셨고,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나 대적자들이 아니요, 바로 내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참된 지혜입니다. 

시편 25편은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편 25편 8절) 

하나님께서 그분의 도로 누구를 교훈하십니까? 죄인인 우리를 교훈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시선을 나 자신에게 향하여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요한일서 1장 9-10절) 

고난과 고통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인의 모습만 있다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참된 신앙인이요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는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지혜만이 아니라 나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려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지혜까지 배운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요한 일서가 말씀하는 것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나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 자신에게 돌려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십시오. 사순절의 첫 번째 주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죄인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성숙

나의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 시편 25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시선을 나 자신에게 두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지혜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정체성이 각각 담겨 있습니다. 곧,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이 두 가지 정체성은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시편 25편이라는 하나의 시편 안에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도 있고 동시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죄인의 모습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죄인의 모습은 오늘 우리 안에도 어색하지만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 주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인의 모습도,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도 영락없이 우리 모두의 정체성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인의 모습과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의 모습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에 큰 고통과 아픔이 계속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 순간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게 되어 나의 죄악이 하나님께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깨달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시니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성숙이죠. 

스캇 펙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고통을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찾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인데, 그것을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더욱 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강조하기를, 너 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아픔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대처할 수만 있다면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목을 한 문장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문제(고통)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아직도 가야 할 길, p. 20-21)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찾아오셨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도 말고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아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 자신에게로 돌리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거대한 아픔과 고통이 여러분의 삶을 에워쌀지라도 날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더욱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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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2. 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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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4장 14절)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본문은 ‘승천하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부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승천).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나의 아빠가 되시지만(주님의 기도 01 "우리 아버지여" / 갈라디아서 4장 1-7절)동시에 그분은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하늘에 올리어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장 16절)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서 벗어나 승천하셨고 우리는 슬퍼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우리는 당신을 우리 가슴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으로 예수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나의 삶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슬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승천하신 그 주님을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 부르며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지금도 하늘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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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