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1. 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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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례 교육을 하며 어느 성도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으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어떻게 세례 문답을 신청하게 되셨습니까? 세례 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오신 분에게 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저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성도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저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이 후회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딱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 2020년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얼룩져있기에, 새롭게 시작하는 2021년만큼은 지난 시간을 리셋하여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도 없고, 오늘은 지난 과거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기에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의 장애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제 첫발을 떼려는 순간이지요. 그러나 여호수아 1장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저지하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장애물이란 먼저는 위대한 지도자의 상실이었지요. 여호수아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라는 이름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은 모세를 언급하며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서술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어넣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을 정복을 위해 모세만큼 적합한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던 장애물은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욱 크게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장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실패의 경험입니다. 약 40년 전,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지도자로 모시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나안 정복 시도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향한 큰 죄악을 저지른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들은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패배하여 호르마 지역까지 쫓겨나고 맙니다. 그 후로 40년, 그들은 요단 강 서쪽의 땅 가나안 정복을 단 한차례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실패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발목을 여전히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2020년을 보내고 새로운 2021년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출발을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세상을 떠나버리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있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새 해를 맞이하였고, 새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떨쳐내지 못하여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은 지금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출발의 동력 -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장애물들이 있었지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내리 누르던 과거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이유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기 때문도 아니요, 과거의 모든 과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모세를 잃어버린 여호수아, 과거 실패의 경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 1:3-4) 

모세는 떠났지만 모세가 전한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모세가 전한 약속은 모세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살아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실패의 경험은 바로 이점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에게는 모세라는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40년 동안 보류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더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살아 있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모세가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정복을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과거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들에게 허락하신 말씀과 약속을 지금도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는 새로운 출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여러 가지 장애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새로운 출발의 기초는 인간 모세가 아니라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오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가 언제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출발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과거의 실패 경험을 떨쳐버리는 담대함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8) 

 


동행 공동체 

여호수아 1장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새로운 출발이 여호수아나 몇몇 개인의 출발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표현되는 전 공동체가 함께 발걸음을 떼는 출발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작하려는 새로운 출발은 요단강 서쪽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의 시대에 요단 동쪽은 점령하였고, 그곳에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차지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요단 서쪽을 점령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단강 서쪽을 향해 전진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은 아홉 지파만의 출발이 되고 맙니다. 12지파로 구성된 전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수 1:14) 

놀랍게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여호수아의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수 1:16) 

오늘 본문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가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들이 순종한 것은 일차적으로 여호수아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이 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른 지파보다 먼저 요단 동편을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다른 지파들이 요단 서쪽으로 점령하기까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가 선봉에서 전쟁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비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공동체가 어떻게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까요? 그저 한 사람이나 몇몇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향해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인간 모세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과거의 성공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든 새롭게 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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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1. 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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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며 그 시기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1-2) 

먼저 시기가 등장한다. 로마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고,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권력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종교 권력을 휘두르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다. 이처럼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을 틀어쥐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임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소명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사 6:1; 렘 1:2; 겔 1:1-3; 호 1:1). 이는 선지자들의 소명에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로마가 세계를 다스렸고 황제의 임명을 받은 총독과 왕이 각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시기와 함께 장소가 등장한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장소는 ‘빈 들’이다. 2절에서 ‘빈 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4절에 등장하는 ‘광야’와 동일한 단어다. 빈 들 혹은 광야라는 단어가 본문에 두 번 등장하는 샘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빈 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되며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요한이 전한 말씀과 세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준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설교자 요한 

요한의 역할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었다(3절). 그래서 그의 별명은 세례 요한이 되었다. 세례의 유래에 대해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요한 이전에 그와 유사한 종교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례는 이처럼 매우 독특한 것으로 요한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켰다. 그러나 본문은 요한이 전한 세례 의식보다 요한이 전한 메시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세례 요한’으로 그를 부르지만, 본문이 묘사하는 요한은 세례자보다 설교자에 가깝다. 본문의 대부분이 요한이 전한 메시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본문이 요한이 행한 세례 예식보다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에 집중하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례를 받았다고 참된 회개를 경험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7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라고 소리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9b절) 이것이 요한이 전한 경고의 메시지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요한은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가? 어떻게 회개가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 사람들은 요한에게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0절)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12, 14절) 

무리, 세리, 군인들이 질문하자 요한의 대답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무리로 통칭되는 일반인들에게는 자신의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강조한다(11절).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만 거두라고 말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명령한다. 자신이 처한 사회적 역할과 위치에 합당한 거룩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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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2. 3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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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치오프와 윌리엄 패트릭은 이 책에서 인간의 외로움이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원시 사회에서 홀로 고립된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굉장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며 사회적 유대감을 갈망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인간의 몸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신호다. 인간의 몸이 상처를 입으면 통증을 통해 상처를 인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원시 사회가 아닌 도시 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많은 경우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기보다 자신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외로움은 간섭효과를 일으킨다. 외로운 사람은 사회적 유대감이나 사회적 배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외로움이 깊은 사람은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도 과도하게 반응한다.”(p. 232) 이러한 간섭효과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자기 조절 능력의 손상이다. 결과적으로 외로움은 자신이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이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되어 현실로 나타난다. 한 마디로 현대사회에서는 외로움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기보다 사회적 배제에 빠지게 만든다. 

사회적 유대감은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아의 경우에 개인적, 상관적, 집단적이라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면 사회적 연결 관계, 다시 말해 유대감의 경우도 그와 일치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바로 개인적 연결 관계와 상관적 연결 관계, 그리고 집단적 연결 관계다.” (p. 113) 개인적 연결 관계란 부부나 연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상관적 연결 관계는 보다 넓은 친구나 가족을 말하며, 집단적 연결 관계는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발생하는 유대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세가지 차원 중에서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영역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인데, 그 세 가지 차원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이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 돌아보는 좋은 도구가 된다. 

이 책의 핵심은 외로움을 극복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얻는 전략에 있다. “바람직한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열쇠는 사회적 신호를 정확히 읽고 공감을 바탕으로 관계를 기술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다.”(p. 259) 인용한 문장을 음미해보면, 사회적 유대감은 사회적 신호를 읽을 수 있는 능력과 관계를 관리하는 기술에 달려 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과 기술의 문제이기에 저자는 사회적 유대감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라고 권면한다. 그 구체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EASE라는 알파벳으로 묘사한다. 

Extend Yourself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기) 
Action Plan (구체적인 행동계획) 
Selection (선택) 
Expect the Best (최선을 기대하기) 

저자가 제시하는 유대감 형성의 지혜 중에는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가는 대목이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는 유치하고 비과학적으로 들려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회적 유대감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이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지혜라고 강조한다.(p. 312)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국내도서
저자 : 존 카치오포,윌리엄 패트릭 / 이원기역
출판 : 민음사 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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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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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0. 12. 1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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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찾아오는 다양한 형태의 위기,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위기는 그 범위에 따라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 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가장 작은 범위인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는 원리가 범위를 확대하면 국가적, 나아가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도 담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것이 제1부에서는 개인적 위기를, 제2부에서는 6개 국가가 경험한 국가적 위기를,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세계가 맞이한 위기를 다루는 전반적인 구성에 담겨있는 대전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개인이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인을 12가지로 제시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국가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요인 12가지를 추론한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해법을 찾기 위한 이론적인 분석의 틀이 되어 이 책이 다루는 7개의 국가적 위기는 물론, 나아가 인류가 당면한 세계적 위기를 분석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아래의 표는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하는 개인적 위기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12개의 요인을 보여준다.

  개인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국가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1 위기 상태의 인정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개인적 책임의 수용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울타리 세우기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지원 다른 국가의 지원
5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례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자아 강도 국가 정체성
7 정직한 자기 평가 정직한 자기 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9 인내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유연한 성격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개인의 핵심 가치 국가의 핵심 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  57쪽, 70쪽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규정하는 위기란 현재 삶의 방식이 중요한 부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 원인은 다양하다. 외부로부터 위기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필란드와 일본의 예), 내부의 심한 갈등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칠레와 인도네시아의 예). 또한 외부 혹은 내부로부터 크고 결정적인 충격이 가해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 상황이 증폭되는 경우도 있다(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예). 이처럼 그 원인이 다양하고 또 그 범위에 있어 개인적 위기, 국가적 위기, 세계적 위기로 구분할 수 있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그것을 계기로 더욱 발전적인 내일을 만들기 위한 원리는 동일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하는 그 핵심은 ‘선택적 변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선택적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문제가 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영역에 선택적으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어떠한 변화가 위기에 대한 해법인지 미리 알 수 없기에 이 과정에서 실험 정신을 갖춘 인내가 필요하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얇지 않은 책이지만 주로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있어 흥미롭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필란드로부터 우리에게 가까운 일본이 최근 직면한 - 그러나 일본인들이 깊이 인식하지 않는 - 위기의 요인에 이르기까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폭넓은 연구 자료와 깊은 통찰력은 읽는 재미를 더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이르면 우리가 쉽게 외면하는 세계적 위기의 요인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지만, 결코 재미있게 읽고 끝낼 수 없는 책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개인의 위기든, 국가의 위기든, 세계적 위기든 직면하여 선택적 변화를 시도하라고 다그치기 때문이다. 

대변동
국내도서
저자 :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 / 강주헌역
출판 : 김영사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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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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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0. 12. 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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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을 맞이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1차 대유행으로 우리의 예배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3차 대유행은 성탄절 예배마저 온라인 예배를 강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복음을 축하하고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성탄절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고 때로는 공허함마저 몰려옵니다. 


영접하지 않는 세상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웅장한 필치로 시작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영광스러운 문장으로 시작한 요한복음의 본문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베어 나오는 것은 비단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성탄절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잠식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곧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본문이 서술하기 때문이지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0)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첫 번째 성탄절이 그러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지만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눅 2:7). 유대 왕 헤롯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율법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을 영접한 것은 목자들과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몇몇의 박사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첫번째 성탄절을 기억하며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였다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세 번이나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성탄절의 이러한 쓸쓸한 모습은 그로부터 약 2000년이 지나 또다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접하는 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첫번째 성탄절부터 약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둠을 틈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 3장),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물을 맛보았던 사마리아 여인(요 4장), 오래된 병을 치유받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요 5장),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된 맹인(요 9장) 등.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영접하는 자”에 대해서도 서술할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어둠은 여전히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굳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첫번째 성탄절부터 오늘의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한쪽이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배당에 함께 모여 성탄절을 축하하며 기쁨의 예배에 참여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지난 2000년의 긴 세월 언제나 그러하였듯 우리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 넘치는 것이요,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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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6 “칼 바르트”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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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12. 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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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유튜브의 시대입니다. 1900년대 TV의 등장이 문자와 활자의 시대를 영상의 시대로 대치하였지요.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보급으로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여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모바일 환경에서도 문자와 글보다는 영상이 대세를 이루는 형국입니다. 한 마디로, 예전에는 파워 블로거가 인터넷 환경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파워 유튜버가 모바일 콘텐츠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유튜브의 시대에 발 맞추어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른바 ‘비대면 예배’ 혹은 ‘온라인 예배’를 강요하며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방송시설이 매우 열악한 교회를 제외하고는 설교 및 예배 영상을 인터넷 공간에 전혀 공유하지 않는 교회를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몇몇 교회에서는 이 시기를 겪으며 영상 제작과 편집을 위한 별도의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알지만, 

여전히 목회 아카이브를 유튜브보다는 블로그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유튜브의 시대, 제가 블로그를 고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기독교와 글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영상이 아닌 글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콘텐츠가 무엇입니까? 단연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글로만 기록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물려준 귀한 유산도 대부분 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목사로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원하고, 기독교의 고전을 읽으며 교회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를 바랍니다.  

 

목회는 주로 언어를 통한 활동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모임이 영상으로 제작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도 언어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목회 언어를 글로 기록하면 목회의 핵심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글로 기록한 목회 언어는 신학적 재평가가 가능하고, 보다 나은 목회 언어를 개발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것이 제가 목회 아카이브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개인적인 이유와 목적입니다. 

 

제가 유튜브 시대에 블로그를 고집하는 두번째 이유는 경계를 넘어선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교회 역시 유튜브를 활용하여 다양한 영상을 공유합니다. 저의 설교와 강의도 적지 않게 인터넷 공간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저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한 콘텐츠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저희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중심으로 영상이 모바일 플랫폼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영상 콘텐츠는 경계선이 높습니다. 여러분이 주로 시청하는 유튜브 영상을 떠올려보면, 그 콘텐츠의 범주가 의외로 협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유튜브의 AI가 관련 영상을 끝없이 추천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지요. 

 

반면, 블로그는 유튜브보다 경계선이 낮습니다.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면 평소에 접속하지 않던 사이트나 블로그도 쉽게 방문하게 됩니다. 저는 목회 아카이브가 저희 교회라는 경계, 성도라는 경계를 넘어 더욱 다양한 분들과 필요한 정보와 유용한 관점을 나누며 소통하는 장(場)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 아카이브에 기록해둔 저의 목회 언어가 목회 자료가 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참고할만한 콘텐츠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진정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아카이브를 운영하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의 목회 언어를 되돌아보는 신학적 성찰이며, 이 과정에서 여러 목회자와 성도들을 초대하여 우리의 신앙과 교회 현장에 대한 진솔한 대화와 기도를 나누는 것입니다. 

 

유튜브 시대, 

저의 블로그 ‘목회 아카이브’를 방문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영상이 아닌 글의 장점과 매력을 알고 계신 여러분들의 피드백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목회 아카이브’의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이메일, 방명록, 댓글로 남겨 주시면 저 역시 성심껏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한진 목사

hanjin02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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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다니엘 성경공부2020. 12. 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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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니엘이 힛데겔 강에게 본 환상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그 환상을 보았던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1a절)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4절) 

고레스 3년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바베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제일차 포로 귀환이 있은지 얼마 지나는 않은 시간이다. 첫째 달은 유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는 때로, 다니엘은 유월절을 지키며 금식을 했던 것 같다(cf. 2-3절). 환상을 받은 장소는 힛데겔 강가인데, 곧 티그리스 강변이다. 

다니엘은 세 이레 동안 고행하며 기도하였다. 본문에는 다니엘이 무엇 때문에 스스로 괴롭히며 기도하였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을 다니엘 9장과 연결하여 문맥을 파악해보면, 다니엘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다니엘 9장의 뒷부분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70년의 의미를 일흔 이레로 해석해 주었다(단 9:24).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고, 다니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천사의 등장

다니엘에게 환상을 전해주기 위해 천사가 찾아온다. 그 천사는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다(5절). 세마포 옷은 제사장을 상징하는 것으로(cf. 출 28장) 이 천사는 ‘하늘의 대제사장’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천사의 정체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본문은 천사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6절) 

‘같다’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이는 천사의 외모를 그 무엇과도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천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묵시를 전달하는 천상의 존재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다니엘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

천사가 나타났을 때 다니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다’(7절). 다니엘도 ‘몸에 힘이 빠졌고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다’(8절). 다니엘과 주변 사람들은 천사를 만나 환상을 본 후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두려움이 그들을 압도하였다. 

다니엘의 환상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마주치게 될 역사의 과정을 그려준다. 그 역사는 결코 장밋빛 환상이 아니었다. 안티오코스 4세와 같은 하나님의 대적자가 출현하여 유대 백성을 박해하는 고난과 아픔의 역사다. 다니엘의 환상은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의 터널을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다니엘과 주변 사람들은 천사를 만나고 환상을 보았을 때 용기를 얻기보다 두려움을 느꼈다. 

묵시(말씀)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 앞에서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소망을 모두 포기하게 만든다.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소망을 품게 하는 것이 묵시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니엘 성경공부 목차

다니엘 연구 "묵시 문학" 다니엘서의 중요한 특징은 구약성경의 유일한 묵시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약성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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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0. 12. 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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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의 삶을 여러 비유로 묘사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doors)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열린 문’(계 3장)과 ‘좁은 문’(마 7장)이다. 


열린 문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요한계시록 3장에는 소아시아에 위치하였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가 등장한다. 그 편지에는 하나님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묘사한다(7b절). 다윗의 열쇠란 통치권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믿음이다. 요한계시록 3장은 계속해서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7c절)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언제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원한다. 진학의 문, 취업의 문, 결혼의 문, 성공의 문 등. 그래서 성도들은 인생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계속 이어지는 구절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a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열린 문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여기까지 읽으면 본문의 뜻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바로 뒤에 성경이 말하는 열린 문의 특징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b절) 

열린 문의 특징은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열린 문은 큰 능력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작고 부족하기에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기도 하며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성실히 순종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앞길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이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열린 문’이다. 

열린 문의 중요한 특징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먼저,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10절). 당연한 이야기다. 요한계시록 3장이 약속하는 열린 문은 나의 큰 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험의 때를 맞이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은 참으로 힘겹다. 이때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이 되셔서 그 시기를 견디게 해 주신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약속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전의 기둥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할 때 그 앞에 세워둔 두 개의 기둥(야긴과 보아스, cf. 대하 3:17)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전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하는 기념비다. 자신의 능력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드러내는 예증(기념비)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니 적은 능력을 가진 인간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영광스러운 약속이 아니겠는가?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14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시는 ‘문’은 열린 문이며 동시에 좁은 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의 의미는 언듯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린 문의 구체적인 의미가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삶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제 열린 문의 의미가 서로 상응한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시며, 좁은 문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비교하신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차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두 개의 문 모두 열려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들어가는 ‘열린 문’의 정의를 미리 살펴보지 않았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모두를 주님께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 약속의 문으로 착각할 뻔하였다. 그러면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13절). 문도 크고 길도 넓으니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세를 낮추어야 그리로 들어갈 수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14절) 한 번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서 좁은 문이요,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다. 문이 닫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사형통의 문이 아닌 것이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교회는 물론이고 성당과 법당에서도 자녀들의 인생에 크고 넓은 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아름답고 때로 숭고하기까지 하다. 아울러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기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열린 문을 두시고, 좁은 길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좁은 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며, 열린 문이 우리로 하여금 성전의 기둥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8장 13절 & 마태복음 11장 29-30절 / 인생의 멍에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이 지우는 짐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우는 짐을 지고 살아가지요. 가정에서 살림하시는 분들도 그 나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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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성경공부2020. 11. 2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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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는 1-6장의 전반부와 7-12장의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다. 전반부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후반부는 다니엘이 받은 환상과 묵시를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이 위치한 다니엘 7장은 후반부의 시작임과 동시에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제국들의 이야기 

다니엘서의 전반부에서 다니엘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기보다 꿈의 해석자로 등장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고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글씨를 해석하였다. 그런데 후반부로 접어들자 다니엘이 꿈을 꾸고 환상을 받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도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여 도움을 청하는데 이때의 해석자는 하나님의 천사다(단 7:15-16).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다니엘이 그의 침상에서 꿈을 꾸며 머리 속으로 환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단 7:1)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환상은 큰 바다에서 나오는 모양이 각기 다른 네 개의 짐승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해석은 네 개의 짐승이 바벨론을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네 개의 제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곧 독수리의 날개가 달린 사자(4절)는 바벨론 제국을, 세 개의 갈빗대를 문 곰(5절)은 메대-바사 제국을,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6절)은 헬라 제국을, 그리고 용처럼 생긴 짐승은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네 개의 제국에 대한 두 가지 해석에 대해서는 다니엘 2장 31-49절 "꿈의 해석과 느부갓네살의 찬양"을 차고하라) 그런데 이와 같은 제국의 흐름은 이미 전반부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확인한 바 있다(단 2장).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환상은 전반부에 등장했던 묵시를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다니엘서는 메대-바사 제국과 헬라 제국의 흥망성쇠(단 8장) 및 헬라 제국에서 일어날 죄악(10-11장) 등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 7장의 환상은 후반부의 서술을 위한 서론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인자 같은 이' 

본문이 소개하는 다니엘의 환상은 세상에 등장하는 네 개의 제국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환상의 결론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통치로 끝난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9-10절) 

여기에 등장하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비록 세상에 여러 제국이 등장하지만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을 통치하시며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다. 본문 10절은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는데, 그분의 심판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의 황제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본문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함께 '인자 같은 이'를 소개한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13-14절)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 두 분은 같은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 보좌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앉아계신 분이 계시고, 또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이분은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시는 메시아다.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셨다. 많은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고소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대제사장이 가장 중요한 핵심 질문을 던진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지금까지 모든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주님이셨지만 이 질문에는 침묵하지 않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 26:64)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이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는 계속되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에 의해 온갖 죄악이 범람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의 환상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요, 메사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리라는 예언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묵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무리들의 고함소리에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현장은 인류의 죄악이 극에 달한 현장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다니엘서를 인용하시며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말씀하신다. 비록 세상의 권세자들이 온 땅을 죄악으로 물들이고 있었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고 계셨다. 

 

 

 

다니엘 성경공부 목차

다니엘 연구 "묵시 문학" 다니엘서의 중요한 특징은 구약성경의 유일한 묵시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약성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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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2020. 11. 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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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출판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는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의 설교 사역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보다 성숙한 설교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한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이 처음 출간된 2005년 당시 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공부하던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설교를 되돌아보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 책을 저술한 지 50여 년, 한국어 번역이 출간된 지 약 15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해왔던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2020년에도 한국 교회는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수많은 사역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때 오래전 오직 참된 설교만이 목회 현장에서 가장 긴급한 사역이라고 외쳤던 그의 외침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전문적인 설교학자도 아니며, 그의 저서 <설교와 설교자>도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설교학 저술도 아니다. 그저 교회가 쇠퇴하고, 그 근본 원인으로 설교가 쇠락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며 ‘설교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어느 노(老) 설교자의 외침이다. 그렇기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예배당에 텅 비어버린 예배와 설교의 현장 속에서 그의 외침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당시 교회의 문제점을 과거 의사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설명한다. 질병에 걸려 큰 통증을 느끼는 환자에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며 진통제로 당장의 통증만 사라지게 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환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통증을 제거하는 약이 아니라, 질병을 바르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당시의 교회가 성도들의 근분 문제를 해결하는 설교 사역은 뒷전으로 물리치고 성도에게 약간의 유익을 끼치는 여러 가지 활동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참된 사명은 “인간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이며 화목케 하는 것”이다(p. 47). 문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그분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 오직 복음의 진리를 그들에게 선포하는 설교만이 그 대안이라는 것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일관된 논지다. 

여기에 전도 설교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그 내용에 따라 전도 설교와 양육 설교로 구분한다(p. 95). 그리고 그는 교회 강단에서 전도 설교가 점차 사라지는 현상을 개탄한다. 전도 설교의 부재 현상은 예배당에 앉아 있는 회중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에 대한 마틴 로이드 존스의 통찰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가 처했던 문화적 배경과 전혀 다른 지금의 한국 교회에서도 분명히 유효하기에 조금 길지만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 문제에서 강단이 주로 부닥치게 되는 위험은, 현재 교회에 다니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전부 그리스도인으로 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실수요 흔한 실수인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가정이 위험하고 잘못된 이유는, 그럴 경우 무슨 예배를 드리든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맞추어 설교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는 항상 교육적인 메시지만 전할 것이며, 전도적인 요소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pp. 226-227). 

우선 저 자신의 경험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수년 동안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했고 정기적으로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다른 사람들도 제가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그 가정은 틀렸습니다. 그들은 저의 상태를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필요했던 것은 죄를 깨우치고 저의 필요를 보여 줌으로써 진정으로 회개케 하는 설교, 중생에 대해 말해 주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전부 그리스도인일 것이라는 가정, 그렇지 않다면 회중석에 앉아 있지 않으리라는 가정에 근거한 설교만 늘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것이야말로 특별히 20세기 교회가 저지른 가장 중대한 잘못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pp. 227). 

물론 교회 안에는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여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전도 설교가 그들에게는 무익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신앙생활의 초보단계에만 필요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단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신앙생활이 깊어지고 믿음이 성장한다는 의미는 복음의 깊이를 더욱 깨달아 가는 것이요, 자신의 전 존재와 모든 삶을 복음의 관점에 맞추어 날마다 재조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는 전도설교와 강해설교(biblical preaching, 연속설교가 아님)다. 시간이 지나며 이 책의 종이가 바래지듯 전도 설교와 강해 설교에 대한 강조도 시대의 흐름에 너무 뒤처진 듯 들린다. 그러나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 예배의 위축과 목회의 쇠퇴를 지켜보는 지금, 마틴 로이드 존스의 외침은 잠들어 있는 설교자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설교와 설교자
국내도서
저자 :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 정근두역
출판 : 복있는사람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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