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2. 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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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지금이야 코로나의 여파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문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그곳의 랜드마크인 금문교가 세계의 유명 관광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 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몰려온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서 금문교를 관람하곤 하지요. 그런데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방향에 마련되어 있는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은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그 다리를 배경으로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으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요, 화장실도 없어요.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20-30분을 주차할 때까지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 카운티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의미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참 많이 보았지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의 일을 하고있을 때 자신을 찾아와 부르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도 모았지요.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고,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장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수 없이 보아왔지만 바로 그날 높은 산에서 뵙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마가복음 9장 2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동일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다음 구절이 설명하지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마가복음 9장 3절)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자, 예수님에게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설명하거나 묘사하기가 참 힘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빨래를 해도 그 옷이 그 정도로 흴 수는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는 모습이요,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그 순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영광스러며 너무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변화된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을 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마땅히 경배하며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아주 잠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출퇴근 길에 바라보았던 금문교나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머물며 사진을 찍는 금문교의 모습이 아니라,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비로소 보이는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의 참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월등히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사건의 목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자 그들의 눈에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문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과연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자(마가복음 8장 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로부터 정확히 6일 후,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할 수난과 죽음을 가르치신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시고 그곳에서 변형되셨습니다(cf. 마가복음 9장 2절).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다시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12절).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위치한 마가복음 9장이 채 마치기도 전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모든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9장 31절).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죠.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르치시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흐름은 교회의 절기에도 적절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지요. 곧,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그 모습이 변모되었던 오늘 본문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음 주부터 어떠한 절기가 시작되나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영광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명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비록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계속 말씀하고 계시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이지만,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게 되겠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실 것인데, 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40일간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 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겉모습은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생에는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며 헌신하였지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으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뿐이요,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전심으로 여러분을 응원하고 계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힘을 내어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십시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 하나님은 높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더라도 주님이 누구인지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넘기 어려운 한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딱 한 번만 일어났고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사건을 의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채포되어 심문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셨잖아요. 과연 단 한 번의 변화산 사건, 그 짧은 시간의 경험이 제자들에게 이 모든 십자가의 길을 넉넉히 이겨낼 힘을 줄 수 있었을까요? 단 한 주의 산상변모주일이 이후 40일에 걸쳐 지속되는 사순절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충분히 불어넣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본문 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장 7절) 

성자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 성부 하나님께서 그름 속에서 직접 말씀해주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러면서 이제부터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주님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끊임 없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비록 변화산의 사건은 단 한 번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리니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충분히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를 조금 더 멋지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의 마린카운티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이동하다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와 저의 아내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아픔이 찾아왔고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저희 부부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분명히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은 유학생활 내내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무지개는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경험 후, 지금까지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아름다운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저희 부부에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떠 있던 무지개를 통해 우리 주님의 영광과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던 저희는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도 우리 인생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없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분의 삶에 지금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인생의 산상변모주일에 비하여 우리 인생의 사순절이 더 길고 모질어,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되며 무의식의 저 먼 곳으로 잊힐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삶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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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2. 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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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 교사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참된 권위가 예수님께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도 고쳐주셨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참된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시니 귀신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게 참된 권위가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권위 있는 새 교훈”)


예수님께서 이처럼 참된 권위를 가지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뒤, 예수님은 곧 이어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지요.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축귀 사건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곧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에서 읽으면,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치유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었던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반면, 시몬의 집에서는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열병이라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던 것이지요. 또 하나의 대조점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사람은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사람의 성별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은 여러 언어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에 성별 구분이 명확하거든요. 그래서 영어 성경만 보아도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귀신 들린 사람을 남성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한 사람은 시몬의 장모였으니 당연히 여자입니다. 이처럼, 지난주 본문이었던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축귀와 오늘 본문인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사건을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보면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 곧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혔던 사람도 치유하시고 열병 들린 사람, 곧 육신의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도 치유하시고 여자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의 결론으로 마가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마가복음 1장 34a절) 

여기에 각종 병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은 각종 병, 곧 육신의 아픔이든 마음의 상처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그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곧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많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모든 질병은 다 치유받아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아픔만큼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은 다 치유하셔도 나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드세요? 아닙니다. 각종 병으로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던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아픔도 넉넉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공적 장소에서 사적 장소로

귀신들린 남자를 고쳐주신 사건과 열병으로 앓아누웠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마가복음 1장 29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공적 활동이 행해지는 회당에서 개인의 공간인 가정으로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되어있으니, 한 형제였던 시몬과 안드레는 이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의 사적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본문 29절은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가버나움 회당이나,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도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가르치셨겠지요. 그러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나의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 사이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친밀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회당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있겠지만,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이 주님과 나누었을 그날의 식탁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모신 그 식탁에는 시몬과 안드레가 주님을 마주 보았고 그 곁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네다섯 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친밀함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회당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 것보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함께 둘러앉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친밀함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이 생전에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편지가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한번은 멀리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는 성도를 유진 피터슨이 상담했나 봅니다. 유진 피터슨이 여러 가지로 권유했음에도 그들은 무조건 큰 교회, 잘 짜인 교회 프로그램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유진 피터슨이 평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문장만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는 아마 절대 갖지 못할 것이다.”(p. 133) 이 문장에서 제 마음에 참 오래 각인되어 있는 표현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이 아는 목사” 성도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목회자’를 만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한편, 목회자의 입장에서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는 성도’들과 친밀히 교제하며 목양하는 일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래서 이 축복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던 유진 피터슨은 규모가 큰 교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장점들을 다 포기하더라도 이 ‘친밀함’만큼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값진 보물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회당에서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면 안돼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지금도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회당에서만 예수님을 만났던 무리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는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오는 용기

예수님은 회당을 나와 곧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들의 집에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지라 (마가복음 1장 30a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온몸에 열이 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현대의 의학적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증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과 같은 의학 지식이 없었기에 열이 나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와 같은 모든 증상을 그저 열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열제나 항생제가 있을 리 없으니 열이 펄펄 끓어오르면 그 원인도 모른 채 그 큰 괴로움이 다행히 모두 지나가기까지 그저 견디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열병은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증상으로 여길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너무도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사적인 장소인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이제 회당에서는 불가능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에 모시니 예수님의 눈에 열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식구가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사적인 장소, 나의 가정으로 모시며, 그분과 친밀함을 나누려 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가정의 가장 연약한 장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예수님께 보여드릴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것은 별로 불편한 일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하였지만, 회당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일은 놀라운 일, 깜짝 놀랄 일은 되어도 나의 문제나 우리 가정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집으로,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삶의 공간으로 모셔들이면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요. 나의 치부가 드러납니다. 나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나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지 않으면 주님을 나의 개인 공간에 모실 수도 없고, 그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원한다면 우리 가정에 병자가 있어도, 나에게 큰 문제 거리가 있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심각한 죄악이 도사리고 있어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 나의 문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죄에 대해 예수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마가복음 1장 30절)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오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기만 해도 상황 파악을 하셨겠지요. 모르실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을 주목해보세요. 사람들이, 곧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이 그 여자에 대해 곧 예수님께 다 아룁니다.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가정으로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아픈 상처가 있으시나요?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로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여러분의 과거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여러분의 영혼을 옥죄어 오는 습관적인 죄악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바로 그 자리에 모셔들이고 주님께 여쭈십시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깊은 내면의 모습과 우리 가정의 오랜 상처를 주님께 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예수님을 여러분의 사적인 공간으로,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모실 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치유의 역사는 단지 회당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분 인생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가정

시몬과 그 주변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열병으로 앓아 누운 여인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마가복음 1장 31a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모셔들이며 예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본문 31절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1장 31b절)

그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활력이 넘쳐서 자신의 역할을 힘 있게 감당하고 손님을 즐겁게 접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서술은 단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육신을 완벽하게 치유하셨다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결혼을 했어요.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아내도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늘 동행해야 해요. 만일 시몬이 식구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식구들이 시몬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사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 외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하고 지원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아요.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그의 가정은 완벽하지 않았지요.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도 있었지요.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까지 모셔들였고, 그 가정의 가장 아픈 부위를 주님께 아뢰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회당을 나와 여러분의 가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회당이라면 예수님께서 언제든 들어가 가르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초대하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해야 우리 주님께서 들어가실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우리 가정에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지요. 우리의 마음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죄악이 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어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아픔을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영혼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죄악을 치유하시며 
예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요, 여러분의 가정은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축복의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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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34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막 1:21-34) 본문에서 여러 마을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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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1. 2. 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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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러너’다. 이 두 가지 타이틀은 그가 자신의 묘비명에 새기고 싶은 정체성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시절 카페를 운영했다. 그러다 문득 소설이 쓰고 싶었다. 그의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두 번째 소설 <1973년의 핀볼>을 모두 카페를 운영하며 짬을 내어 썼다. 그때까지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러너도 아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업 작가가 되게 위해 카페 경영을 접으며 달리기를 시작했고, 작가로서 그의 인생에는 언제나 달리기가 함께 있었다. ‘작가’이면서 ‘러너’로 살아온 것이다. 

 

글쓰기와 달리기.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글쓰기와 달리기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서술한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p. 128) 

 

달리기는 인생의 메타포이기도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글쓰기의 메타포였다. 달리기, 그것도 장거리 달리기는 인생의 메타포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 보다 특징적인 것은 달리기를 글쓰기의 메타포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며 배워왔다”라고 말한다.(제4장) 어떻게 달리기가 글쓰기의 메타포로 작용할 수 있을까?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p. 26) 

 

선두 주자가 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것으로 보통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p. 67)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p. 228)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는 일도, 달리기를 하는 것도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좋아서 글을 쓰고, 내가 좋아서 달리는 것이요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렇다고 글쓰기와 달리기를 낭만적인 것으로 서술하지도 않는다. 글쓰기와 달리기의 고단함,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뛴 이후 찾아온 마라톤에 대한 권태기 등을 진솔하게 서술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보다 ‘러너스 블루’(runner’s blue)라는 표현을 더 많이 마주치게 된다. 그래도 달리기를 향한 그의 애정은 책 전체를 통해 충분히 전달되었다. 진솔하기에 더욱 진심이 느껴진다. 

 

강물을 생각하려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p. 45) 

 

나는 매주 설교하는 목사로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글쓰기의 메타포로 사용하는 대목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는 소설을 쓰지 않지만, 매주 설교 원고를 쓰고 다듬고 회중을 향해 선포한다. 어느 목사가 다른 사람의 권유나 요청으로 설교자가 되었겠는가? 내적으로 소명을 확신하고 설교자가 되었고, 설교문을 쓰고 다듬으며 그것을 선포하는 과정은 외부의 시선보다 신앙 양심에 이끌리는 작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글쓰기와 달리기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듯, 매주 설교를 준비하여 선포한다는 것 역시 여간 고된 노동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결론을 향해 설교문은 나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설교는 비로소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렇게 매주 설교문을 완성한다. 고단하지만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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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맞을 것인가 피할 것인가 (우중런)

비 예보만 있어도 마음이 먼저 불편해진다. 축축한 공기, 다리를 휘감은 바지, 젖은 양말 등. 우리의 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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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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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 3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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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심리학자였던 잭 볼스윅(Jack Balswick)은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위의 세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대표적인 가정의 모습이지요. 가정의 모든 일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그 외의 식구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을 강요받습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말하는 첫 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의 형태로 권위가 부재한 가정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상실하였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가정은 혼란스럽고 때로는 서로 갈등합니다. 이것이 잭 볼스윅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가정의 형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인데, 가정의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면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자,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정, 권위를 잃어버린 현대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적인 가정.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권위 있는 새 교훈

오늘 본문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행하신 일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르치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마가복음 1장 21절) 그러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귄위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장 22절) 

그날 회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일이 두 가지였다고 말씀드렸죠. 첫 번째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행하신 두 번째 일, 곧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장 27절)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깜짝 놀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귀신들도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이 목격하고 체험하였던 예수님의 권위,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뭇사람이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어서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율법 교사, 서기관, 랍비 등 율법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 “위대한 랍비가 말하기를 ….”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없기에 모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를 인용할 필요가 없고, 위대한 랍비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그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안에는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7절도 다시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그다음에 등장합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당시 예수님 외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른바 축귀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귀신들을 결박할 권위가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물도 바치고 주문도 외우고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면서 뭔가 요란하게 행위를 해도 그들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위가 없으니 오랜 시간 귀신과 씨름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바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던 예수님의 모습에는 권위가 있었어요. 제물, 주문, 특별한 도구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귀신하고 무슨 거래를 하는 것처럼 밀고 땅기는 일 없어요. 예수님은 그저 권위를 가지고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마가복음 1장 25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니 귀신에게 ‘나오라’ 명령하면 귀신은 나가야 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이 권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권위는 어떠한 인간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만이 가지신 고유한 권위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저와 같은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어요. 그래서 말할 때마다 ‘성경이 말하기를…,’ ‘본문이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고 성경을 인용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모든 인간 설교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몸과 마음과 영혼에 큰 질병이 들어 괴로워하는 분들을 위해 우리가 서로 기도할 때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권위가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권위가 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그 교훈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온전한 권위와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5절) 

지난주부터 우리는 주일5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매주 주일5부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저에게 여러 가지 걱정이 찾아왔어요. 물론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주일 5부예배가 이제 막 신설된 예배이기에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아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찬양대나 찬양팀도 없고요, 별도의 예배인도자도 없어요. 봉헌위원도 지금은 전도사님들이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장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최대한 위축되어 있는 코로나의 제3차 대유행 중에 새롭게 시작된 예배이므로 성도님들이 얼마나 참여하실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가장 켰습니다. 이렇게 주일5부예배에 대해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어요. 찬양팀, 찬양대, 안내위원과 봉헌위원을 비롯한 예배 스텝, 그리고 그 무엇보다 온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회중들이 다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그 안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 예배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버나움 회당에는 예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여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기 이전에도 매주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했어요.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가버나움 회당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에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일5부예배를 준비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준비하여 갖춰놓더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모든 준비는 허사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일5부예배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진정으로 걱정하고 근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 막 신설되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여러 요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들만 열심히 준비하다 정작 모든 권위와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데 실패할 위험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건강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재물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성공의 기회를 잃어버릴까 걱정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가지고 계신 권위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가버나움의 회당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전에 수많은 안식일을 보내며 그곳에서는 회당 예배가 시행되었습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회당장과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어김없이 회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도,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도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안식일이나 그 바로 전주의 안식일이나 가버나움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가버나움 회당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치유를 얻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에 전파되면서(마가복음 1장 28절) 가버나움 동네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막 신설된 주일5부예배가 이러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찬양대요? 찬양팀이요? 예배 스텝이요? 더 많은 참석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시작된 주일5부예배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모든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장소가 예수님께서 친히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시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시간과 이 장소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행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며, 모든 아픔을 고치시며,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자리에 펼치질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권위를 기준으로 가정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으로 가정의 모든 권위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현대적 가정으로 가정 내에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형태를 말하죠.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이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가정으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세 가지 유형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먼저 첫번째 유형의 가정입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권위가 부여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정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적용해보면 어떤 힘 있는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양도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참된 권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노래하잖아요(시편 146편 2절). 

권위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던 가정의 유형, 그 두번째는 가정 내의 권위가 모두 사라진 현대적 가정이었지요. 이러한 가정의 형태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면 그 누구에게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요. 이러한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모든 권위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세도 없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에게 실망해 보아야,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권위라는 기준으로 가정을 구분할 때, 마지막 유형은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가정의 유형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나 자신에게도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참된 권위와 권세가 있음을 알기에 그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삶의 작은 성취도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주님의 권위 아래 위치시키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에 역사하시니,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참된 권세가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오직 주님의 권위 아래에 두십시오. 
그 옛날 가버나움의 회당을 찾아가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던 주님께서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찾아와주시고,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선포하셔서 
여러분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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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34절 “회당에서 가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막 1:21-34) 본문에서 여러 마을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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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1. 2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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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라고 하면, 흔히 미래를 점치는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예언서를 읽다 보면, ‘사자언체’(messenger style)가 많이 등장한다. 사자언체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와 같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표현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자언체는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율법에 그 기초와 근거를 둔다. 그런 점에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모세도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 18장 18절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모세가 선지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백성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분류법이 기독교의 구약성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만, ‘타낙’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성경은 율법서(토라), 예언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인들이 역사서로 부르는 책들이 타낙에서는 예언서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유대교 전통에서는 예언서다. 그 이유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므리 왕조 시대(아합과 이세벨)의 예언자 _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성경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도 남 유다는 약 150년 이상 존속하였다.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70년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였고,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재건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역사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다. 

구약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엘리야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엘리야의 시대적 배경을 열왕기상은 이렇게 서술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장 29-34절)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은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의 유물 가운데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와 ‘키르벳 엘 콤’(Khirbet el Qom)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그의 아세라로 너를 축복하노라”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데, 위의 문구에서는 북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와 아세라 우상이 부부 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만큼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와 관련된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갈멜산에서의 대결이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하였다. 이 대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선언하셨다. 이처럼 갈멜산에서의 사건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갈멜산에서의 승리 뒤에도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겨진 사역을 위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가 세워진다. 


예후 왕조 시대(여로보암 2세)의 예언자 _ 아모스, 호세아, 요나 

시간은 더욱 흘러 북 이스라엘은 이제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송하신다. 

아모스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런데 아모스 1장 1절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드고아 목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드고아 지역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 이스라엘이 아닌 남 유다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였다. 한마디로,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룹이 아니었다. 그는 남 유다에 거주하던 목자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로 통렬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4장 4-5절) 

벧엘과 길갈은 당시 유명한 성소가 있던 곳이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모스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고 조롱한다. 벧엘의 성소에서 어떠한 죄를 범하라는 것인가?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드리며 수은제와 낙헌제를 드리는 것이 아모스가 지적하는 죄의 내용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처럼 독설을 내뱉는 이유, 곧 벧엘에서 드리는 제사까지도 이스라엘의 죄악이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사회적 불의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아모스 2장 6-7절) 

아모스 선지자의 언어는 이처럼 매서웠지만 그 안에도 희망은 담겨있었다. 다만, 북 이스라엘이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아모스 5장 14-15절) 

호세아 역시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아모스서가 주로 사회적 불의를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지적했다면, 호세아는 그들의 종교적 타락을 질타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을 꼬집는 방식은 독특했다. 부정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세아 1장 2절)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 고멜이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고, 고멜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호세아는 선지자의 역할을 위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 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 과연 그들의 종교적 타락은 어디서부터 회복이 가능할까? 호세아는 그 시작점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장 1절) 

고멜의 음행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보여준다면, 그녀를 끝까지 품었던 호세아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하였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아모스와 호세아 외에도 요나가 있다. 요나서에는 그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왕기하에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와 선포했던 메시지를 기록해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열왕기하 14장 25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역사 흐름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성경이 묘사하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상숭배로 점철되어 있으며 불의가 가득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앗수르에 의한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지만, 죄악으로 치닫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한다. 곧, 그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위대한 예언자들, 곧 엘리야와 엘리사, 아모세와 호세아와 요나를 북 이스라엘에 파송하셨다. 그리고 심지어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다. 비록 구원 역사의 흐름이 유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을지라도,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나아가 이방민족 니느웨도 긍휼히 여기셨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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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1. 1. 2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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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설교집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설교집이 아니다. 우리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흔히 듣는 설교와 그 형식과 내용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편집부는 서론에서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설교집은 종교적 언어에 알레르기가 있었던 사람이 쓴 책입니다.” 

글의 형식과 내용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성을 지닌다. 형식이 다르다는 것은 새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저자나 화자가 적극적으로 다른 형식의 언어를 선택했다면, 그는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이 종교적 언어를 애써 회피하려 했다면 그것은 단지 형식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새롭게 담아내려는 내용이 있었을 터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유진 피터슨이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던 내용 가운데 하나가 ‘오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라는 주제는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제26~29일)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말한 것을 듣는 자나 보는 자가 심각하게 오해한 몇 가지 사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오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요한은 믿음을 발전시키고 싶었습니다.” (제26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시는 그 걸음을 바라보며 인간들이 범했던 오해를 유진 피터슨은 3가지로 지적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마리아의 오해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이 항구적인 죽음이라고 오해했다. 둘째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오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움켜잡고 있는 그것을 버려야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 예수님을 오해했다. 셋째는 예수님께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찬양했던 무리들의 오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했다. 그리고 유진 피터슨은 인간의 오해를 예수님이 그대로 수용하여 더욱 깊은 믿음의 성숙으로 이끄셨다고 요한복음의 의미를 분석한다. 

“예수님은 그 헌신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서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 복음은 그 모든 헌신을 흡수하고 받아들여 부활이라는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제 27일) 

“예수님은 그 오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신에게 하려는 일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 오해를,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종과 생명을 얻는 이해로 바꾸셨습니다.” (제 28일)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에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환호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행진을 따랐습니다. …. 그리고 그들의 필요와 욕망과 소원을 궁극적으로 채워 줄 부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그 열광과 기대를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제29일) 

유진 피터슨의 성경해석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해석에 대한 논의에 앞서, 설교 언어의 변화가 새로운 주제를 포용하는 방식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보자. 많은 강단에서 행해지는 웅변조의 설교, 곧 선포와 책망의 설교 언어는 ‘오해’라는 주제를 너그럽게 포용하기 어렵다. 선포와 책망의 어조에서 ‘오해’란 속히 교정되어야 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은 종교적 언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였기에, 오해라는 개념을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것의 유익을 설교할 수 있었다. 

사복음서 설교
국내도서
저자 :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 양혜원역
출판 : 복있는사람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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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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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 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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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흥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데이빗 왓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교회 공동체에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이 땅의 교회는 예배당을 교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가 종결된 후에도 성도들이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의 출석인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아우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코로나로 말미암아 더욱더 성도들의 예배 출석이 크게 위축되면서 이러한 걱정은 이제 더 큰 위기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우리 시대 교회가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 이유도, 우리 시대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자꾸 쇠퇴한다고 눈에 보이는 출석 인원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의 삶이 없음을 더욱 근심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변함없는 일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가복음 1장 16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마가복음 1장 19절)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며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조금 더 걸어가시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 장면은 당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어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부라는 직업은 몇 세대를 이어 가업이 되었죠. 그래서 본문에는 서로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래,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어부의 일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으니 그들 모두는 어부를 가업으로 잇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해변에서 함께 살아가던 여러 이웃과 마찬가지로, 어부라는 가업을 이으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매우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장 5절). 지금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참 성실한 사람들이죠. 네, 그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업을 잇는 것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라도 그들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사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인생의 참된 가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하는 듯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여 아직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수 없었던 갈릴리 어부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밤을 새워서 열심히 그물을 던집니다. 성실하지요. 날이 새어 그물을 깁으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그의 가족들이 바라볼 때 든든한 아버지, 듬직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어요. 거기에는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제자도가 없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러한 열정과 성실함 속에도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제자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밤을 새우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없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마가복음 1장 17-18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가복음 1장 20절) 

예수님께서 지켜 보셨던 장면, 곧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거나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모습은 당시 갈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은 당시 갈릴리 해변은 물론이고 유대 나라 전체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당시 스승으로 불리던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제자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들이 아니 모여있는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의 어부들을 스승이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직접 갈릴리의 어부를 찾아가 그들을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찾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셔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찾아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다가 우리의 인생을 허무로 끝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찾아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시며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시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셨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 열방을 축복하는 복의 통로로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비로소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세상을 축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나이 80세에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삶을 부러워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었을 뿐,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주시지 않으니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40년의 세월이나,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생활하였던 40년의 세월은 겉모습은 너무도 다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두 번이나 보내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가 그를 부르시잖아요.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이 모세의 삶을 압도한 뒤에야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은 75년의 세월을 살았고, 모세는 80년의 세월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새롭게 맞이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일상을 뚫고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셔서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제자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어부였던 그들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품꾼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한 비전, 곧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소망만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겠지요.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계속 읽어보면 그들의 모습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마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씨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마가복음 4장 11절) 

무슨 뜻입니까? 외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풍성해 깨달아야 마땅해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열심히 비유로 말씀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세요.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마가복음 4장 13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면 뭐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들에게 떠 먹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요. 

그뿐이 아닙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이지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cf. 마가복음 8장 1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었어요. 바로 얼마 전에 오병이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번에도 음식을 먹여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신앙의 건망증이 걸린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마가복음 8장 4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셔도 이해하지 못해요. 예수님께서 위대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그 기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거 동락하였지만 예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계획도, 예수님의 구원 사역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의 세월을 보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지 못했던 결정적인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라고, 그러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시잖아요. 예수님을 향해서 항변하면서 말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라니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셔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그 순간,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마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0절)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제자들’라는 단어,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다’라는 한글자 단어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 단지 저 한 사람만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물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품꾼들도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자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시는 그 중요한 순간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렸고 제자들은 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가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제자들의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넘어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약속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이 실패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주님을 떠나가셨습니까? 그리하여 다시금 나 자신만을 위하고,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이십시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비록 실패하였고, 비록 낙심하였고, 비록 주저앉아 있었을 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일어서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을 
세상을 축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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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1. 1. 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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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조나단 포클루다(JP, Jonathan Pokluda)는 청년사역으로 유명하다. 그는 미국의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인 워터마크회중교회(Watermark Community Church)의 청년사역기관인 “포치”(Porch)를 이끌었다. 그가 포치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매주 참여 인원이 약 150명이었는데, 그가 사역을 내려놓을 때는 약 7,000명이 매주 참여했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원리를 소개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추는 미래세대(Future Church)를 나이로 구분하면 19~35세에 해당한다. 이들은 2000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하여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millenial generation)로 불린다. 이 책을 리뷰하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청년’ 혹은 ‘밀레니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청년 목회의 키워드 - ‘진정성’ 그리고 ‘투명성’

밀레니얼세대는 ‘진정성’(authenticity)에 열광한다. 반대로 내가 아닌 어떠한 모습으로 가장하는 ‘가식’을 혐오한다. 그러므로 청년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가식이야말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혹은 교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p. 17-18) 저자가 지적하듯 교회는 진정성보다는 가식과 외식이 가득하다. 최소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니 가식이라는 장애물을 거두기 전에는 교회가 어떠한 행사를 진행하고 그것을 홍보하더라도 청년들이 교회로 발걸음 하지 않는 것이다. 

조나단 포클루다(JP)가 진정성을 강조하면서 함께 다루는 개념이 ‘투명성’(transparency)이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교회 안에서만 그런 척하는 위선은 교회의 투명성을 해한다. 저자는 교회의 투명성이 그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의 투명성에 좌우된다고 강조한다. 가식을 거두고 교회 지도자들도 여전히 개인적 죄악과 투쟁하고 있음을 청년들에게 보여줄 용기가 있는가? ‘진정성’과 ‘투명성’은 밀레니얼 세대를 교회로 이끄는 핵심 키워드이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 두 가지가 오히려 그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청년들에게 성경을 - 그 어려움과 해법 

저자는 밀레니얼세대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어려운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biblical illiteracy)와 ‘회의론’(skepticism)이다. 

먼저, ‘성경에 대한 무지’다. 밀레니얼 세대는 ‘교회에 출석한 적이 없는’(unchurched)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교회 생활이나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지 않다.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더욱 낮춰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조나단 포클루다(JP)는 밀 레니엘 세대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보충학습’(remedial education)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성경에 대한 회의론’이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의 삶에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회의적이다. 성경에 대한 회의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경이 그들의 개인적 순결, 그들의 친구관계, 그들의 직업, 그들의 돈, 그들의 인생 목표 … 곧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주라.”(p. 35) 조나단 포클루다(JP)는 이러한 성경의 가치를 변증하는 방법으로 과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최근 연구가 성경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나는 성경의 가치를 변증하는 저자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과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주장은 다양하고 그들의 연구 결과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므로 그것이 성경을 변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목회자나 리더가 자신의 삶을 근거로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참된 행복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대안일 것이다. 그것은 목회자와 교회의 진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법도 되기 때문이다. 


전도폭발의 청년 목회 적용 

이 책은 밀레니엘세대를 위한 목회 가이드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조나단 포클루다(JP)가 전도폭발의 내용을 깊이 학습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청년목회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청년들을 처음 만나면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는데(p. 29-30)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른바 전도폭발의 ‘진단 질문’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또한, 목양의 현장에 리더를 동행시키라고 권면하는데(p. 140-141) 이 역시 분명히 언급하지 않지만 전도폭발에서 강조하는 ‘현장실습’이다. 현장실습이란 훈련자가 훈련을 받는 사람과 동행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원리다. 

미국에서는 전도폭발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임상훈련을 시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포클루다(JP)는 그 내용을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목회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그 원리는 여전히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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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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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1. 1.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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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1-4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며 마태는 이러한 오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물론이요, 애굽을 거쳐 갈릴리로 정착하신 과정이 모두 구약의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열한 절에 불과한 오늘 본문에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주장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장 15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장 17-18절)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3절) 

하나님은 예수님의 출생과 어린시절을 놀라운 섭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때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즉흥적으로 계획을 세워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실 때, 오래전 선지자들을 통해 전하셨던 말씀을 하나하나 성취하는 방식으로 모든 과정을 섭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르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데, 이미 오래전 신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섭리하시므로, 신구약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편 19절) 말씀하셨으니, 비록 나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말씀하셨으니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향한 중간 단계임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하셨으니,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위대한 섭리를 펼쳐 보여 주실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모든 과정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메시지를 본문에 담아두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며 인용하는 구약의 성경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장 15절) 

여기에서 ‘애굽으로부터 불렀다’는 것은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모세 시대에 애굽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인이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태어난 모세는 기사회생하여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지요. 본문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태복음 2장 16절)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이 사건을 서술하며 또 하나의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장 17-18절)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모세의 이야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는 위협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죽음을 면하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유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위기를 벗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쓰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위대한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였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역설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하신, 그리고 완전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온 땅에 통곡하는 소리가 가득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고통의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그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펼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강해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2장 13-23절 “구원자 예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인지가 중요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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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1. 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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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마태복음 6장 9절)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우리 아버지”가 먼저 등장하고 그 뒤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이 뒤따라 나옵니다. 우리는 원문의 순서를 따라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 5절) 

갈라디아서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바울은 하나의 비유를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곧 집주인의 어린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갈라디아서 4장 1-3절). 제 아무리 집주인의 아들이라도 어렸을 때에는 그 집의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정해준 때까지는 주인의 아들이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아래에서 지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율법 아래에 있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율법의 시대에는 인간이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이나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지요.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것은 곧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율법의 아래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을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의 의미를 묵상하는 우리가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대한 명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인가?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6절)

우리가 아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6개의 기도 제목이 등장합니다. 6개의 기도제목 하나하나가 위대하고 그 각각에 응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의 마음은 감동합니다. 그러나 6개의 기도제목을 다 올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 세상의 그 어떠한 아버지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행복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또 다른 특권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특권,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장 7절)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상속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에게, 곧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졌던 장면을 염두에 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상속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량, 곧 죄용서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불러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넌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큰 위기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나의 앞길이 막막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의 삶을 인자하게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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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