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2025. 6. 29. 15:29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이름을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기적인 곡선과 독특한 구조로 유명한 건축가이지요. 그가 남겨놓은 많은 건축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단연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될 것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이지만, 사람들이 그 성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건물을 설계한 가우디가 이미 사망한 지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축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이 성당을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언제나 높은 기중기를 통해 여전히 공사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쉽지, 가우디가 착공하여 건축을 주도한 세월이 43년 그리고 그의 사망 후 100년의 세월이라니 그 오랫동안 건축을 하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실제로 건축 기간 스페인은 내전을 겪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재정부족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최근 파밀리아 대성당이 가우디가 사망한지 100주기가 되는 2026년(내년이네요)에 드디어 완공하게 될 것이라고 기사가 국내외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성당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는 약 100년 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을 기다리면서 완공이 임박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세계의 여러 언론이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 건물의 설계자가 안토니오 가우디이기 때문이겠지요. 비록 가우니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가우디가 설계한 대성당이라면 그리고 가우디가 설계한 대로 건축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분명히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삶과 인생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군가 처음부처 계획을 가지고 설계를 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지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인생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설계자는 누구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이시지요. 한 사람의 천재 건축가가 설계한 그대로 건물 하나가 세워져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하게 되리라 충분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각자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셨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인생길을 이끌어 가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삶이 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게 될 것을 확신하며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Move One. 감사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는 여러 가지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쁨의 서신”입니다. 이 별명을 듣기만 해도, 여러분은 빌립보서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서신 안에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면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까요? 실제로 빌립보서가 시작하는 오늘 본문부터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절) 

바울의 마음에는 언제나 빌립보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였는지 살펴보았지요. 그 모진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체험했던 바울이 그렇게 시작된 빌립보 교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은 몸으로 빌립보를 떠났지만 언제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렇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절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때마다 ‘너희 무리’, 곧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 말미암은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합니까? 바로 ‘기쁨’이지요. 이렇게 바울 자신의 마음에 있던 큰 기쁨을 이야기하며 시작한 빌립보서는 마지막 4장에 이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빌 4:4). 그러니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에 대해 노래하는 기쁨의 서신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빌립보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의 처지는 마냥 감사하고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빌립보서에 따라다니는 별명이 있지요? 그것은 ‘옥중서신’이라는 명칭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썼던 장소가 감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이제 교회 안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면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바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통을 당하며 더 괴로운 현실에 빠지느냐고. 아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바울이 이처럼 감옥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아니겠느냐고. 어쩐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데 바울에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빌립보서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이 편지 안에는 바울의 기쁨도 들어 있지만 바울의 슬픔, 곧 바울의 눈물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의 장면이 빌립보서 3장 18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빌 3:18a)

여기서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철저한 슬픔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b) 여기에 빌립보서의 또 다른 별명이 등장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눈물의 서신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바울은 지금 자유의 몸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그러한 바울을 향해 비아냥 거리는 현실 속에서 바울은 어떻게 빌립보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자, 오늘 본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본문 5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본문 5절을 함께 봉독해보겠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5절) 

물론 바울에게는 슬픔도 있습니다. 눈물도 흘립니다. 마음에 큰 슬픔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전히 살아 있으니 기쁘고,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있으니 즐겁고, 바울 자신을 통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땅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시니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쁨입니다. 물론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상황을 보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할 때도 많지요. ‘내가 지금도 눈물로 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마음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되니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찾아오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으니 우리 마음은 또다시 기쁘고,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 마음은 언제나 기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노래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은혜만큼은 결코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주시는 하늘의 기쁨, 천국의 기쁨만큼은 항상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a)

사도 바울의 권면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에 늘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Move Two. 확신

바울의 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은 지금 천국의 기쁨 하늘의 행복으로 가득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던 하나의 확신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기도 한데요. 본문 6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본문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시네요.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복음의 그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시작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였지요.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사도 바울 자신이 복음을 믿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빌립보에 살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관점, 세상의 관점에서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관점 세상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모든 과정을 믿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세워 주셨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셨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빌립보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시간은 참으로 유수와 같지요. 2025년을 시작한 것이 정말 엇그제같은데, 벌써 일 년의 절반이 지나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예배 자리에 참여하셨지요.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셨지요.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지난 반년 동안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신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착한 일을 지금도 완성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우리의 신앙생활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시작하신 것이 어디 한 두 가지뿐입니까? 아직 완성된 모습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 뿐이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좋은 일 선한 일을 풍성하게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도 여러분, 참 놀랍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난 좋은 일 선한 일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순간, 바울의 마음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6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친히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복음의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침내 완성하실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그대로 시작하신 하나님, 곧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나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 많지요. 당연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문제도 많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많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아직 우리의 신앙 경주는 지금도 진행 중이니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장애물이 너무 많고 그 과정이 너무 힘겹고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지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고난과 역경과 사단의 방해가 없었던 일이 단 하나라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던가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복음으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이미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Move Three. 기도

사도 바울은 비록 그 몸이 감옥에 갇혀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바울의 형편을 보면서 비아냥거렸지만, 그의 마음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이었지요. 바울은 이제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보시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그럼요.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 아니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은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그 믿음과 그 확신이 있는 사람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 여러분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모든 것은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욱 크고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시니, 이제 시작하는 2025년의 하반기에도 더욱 힘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제목이 길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도 제목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곧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를 위해 행하시는 그 좋은 일 선한 일의 마지막 최종 목적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본문 11절을 함께 봉독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1절) 

바울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기도하는 마지막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11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복음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해지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마침내 그 모든 열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아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반년 열심히 달려왔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신가요? 지난 6개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초라하신가요? 바로 지금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시작하신 일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것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 뿐, 지난 6개월의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선한 일 좋은 일의 작은 씨앗 하나만 심어 놓으셨어도 충분합니다. 선한 일의 씨앗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니, 여러분의 삶은 마침내 혹 30배 혹 60배 혹 100배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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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사도행전 강해2025. 6. 9. 17:12

자기 계발 분야의 전문가 가운데 제임스 클리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는데요. 그 책의 제목은 <아주 작은 습관의 힘>입니다. 이 책에서 제임스 클리어는 작은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한 문장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목표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You do not rise to the level of your goals. You fall to the level of your systems.

고상한 목표를 세우고 이상적인 꿈과 비전을 선포하더라도 매일 혹은 매주 작은 습관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내가 내세우는 목표나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습관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임스 클리어의 주장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입으로 선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날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소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교회와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 비전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전과 꿈은 우리의 작은 습관에 뒷받침되지 않으면 헛된 공상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작지만 강력한 습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매주 주일을 맞이하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습관이지요.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이지요. 시간을 정해놓고 혹은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습관. 이처럼 거룩한 습관이 우리 삶에 하나하나 자리를 잡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거룩한 비전과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된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뒤,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를 맞이하였고, 바로 그날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신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교회는 매년 부활절 이후 일곱 번째가 되는 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바로 오늘 2025년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자,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그들은 다양한 언어를 말하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지방에서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랍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가르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바로 이날 예수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 모두 삼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습관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의 설교 제목 그대로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제임스 클리어의 이야기를 기억해보세요. “우리는 목표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성령이 충만하고 그 순간 위대한 경험을 했을지라도 지속적으로 매일 매주 매월 새로운 습관 거룩한 습관이 성도들의 삶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어떻게 초대교회에 안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마침내 성도들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성도들의 습관까지도 변화시켰던 것이지요.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충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셔서 우리의 일상이 바뀌고, 우리의 습관이 변하여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에 분명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거룩한 습관으로 말미암아, 매일 펼쳐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습관 – 예배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시자, 초대교회에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묘사하는 성령의 거룩한 습관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예배의 습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2절) 

성령의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습관적으로 일상적을 행한 일들을 무엇입니까? 본문 42절 말씀이지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배우는 일이네요.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으니 그 위에 성령의 충만함이 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지만, 복음을 믿고 그 위에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했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했다는 사실이지요. 
자, 계속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본면 42절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여기에서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성만찬 예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제자들과 식탁을 나누시며 성만찬을 제정하셨지요.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초대교회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정기적으로 성만찬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2절의 마지막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성령의 충만을 입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밤낮없이 어디에서든 함께 모여서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며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42절에 등장하는 말씀을 배우는 일, 성만찬을 나누는 일,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언제 이루어집니까? 예배를 통해 이루어지지요. 그러므로 본문 42절이 묘사하는 초대교회의 거룩한 습관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단 한 가지만 꼽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예배지요. 여러분, 다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재하시면 예배를 드리고 싶어요. 그전에는 지루하게만 여겨지던 설교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그렇게 은혜가 될 수가 없고요. 그전에는 따분하게만 여겨지던 성만찬 예식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천국 식탁이 되고요. 그전에는 힘들게만 여겨지던 기도의 시간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가장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령충만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방언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예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환상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의 자리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께서 충만히게 임재하여 주셔서 여러분의 예배 생활이 다시금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 예배가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목천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든 기도회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하셔서 은혜로 가득한 예배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습관 – 교제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러자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예배의 습관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습관이 있으니 그것은 성도들 사이의 교제입니다. 본문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 다음에 어떻게 이어집니까? “서로 교제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활동입니다. 함께 떡을 떼는 것, 곧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혼의 양식을 얻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활동이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과 무엇을 했습니까? 교제하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모습이 본문 46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6절) 

본문 46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날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년에 한 번 한 것도 아니고 매월 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매일 행한 일을 본문 46절이 묘사해주고 있네요. 먼저 그들은 매일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예배를 말하지요. 그런데 초대교회의 더욱 중요한 특징은 그 다음에 등장합니다. 46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그들은 “집에서” 각자의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여기에서 떡을 뗀다는 것은 위의 42절과 달리 공식적인 성만찬 예식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가정에서 나누는 식탁의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너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목장의 예배를 드리거나 구역예배를 드리며 각 가정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밥을 나누고 떡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었던 경험이 많이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625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된 이후, 1950년대 한국 교회에 이른바 구역예배라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구역예배의 성경적인 근거를 제공했던 구절이 오늘 본문 46절의 말씀이었어요. 성전에서 모이는 공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각 가정에서 모이는 구역예배 혹은 목장의 예배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하고 가정에서 모이는 예배는 함께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그때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우리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의 본을 따라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마다 함께 모여 교제하기를 즐거워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최근 한국 교회는 큰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일 예배를 출석하는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한국 교회의 더욱 큰 침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0년 전, 20년 전에 비하여 급격하게 목장 모임, 구역 모임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목천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예배가 다시 살아나고, 뿐만 아니라 목장의 모임과 성도들 사이의 교제가 더욱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우리 교회는 성도들 사이의 교제에서 배제되시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매주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과 함께 만나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우리 목천교회 가운데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충만한 임재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습관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습관이고,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습관이지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성도들,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기를 기뻐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요. 그 장면을 먼저 본문 43절이 묘사하네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3절)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며 두려워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예배하는 습관, 교제하는 습관이 딱 자리 잡은 초대교회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기사와 표적, 곧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니 주변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 4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7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이 날마다 체험되시기를 바라시나요? 여러분의 삶 속에도 기도의 응답이 날마다 가득하시기를 바라시나요? 여러분의 삶 속에 날마다 간증의 내용이 풍성해지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십니까?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입어 예배의 습관 교제의 습관, 곧 성령의 거룩한 습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깜짝 놀란 기사와 표적, 곧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게 되는 것이요, 우리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항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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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에베소서 강해2025. 6. 2. 10:20

성경에는 놀라운 사건과 역사적 장면이 가득 담겨 있지요. 그리하여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성경의 내용을 영화로 제작하였는데요. 그러면 여러분, 신구약성경 66권 가운데 그 내용이 가장 많이 영화로 제작된 성경의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힌트를 드려볼까요? <십계>, <이집트 왕자> 이러한 영화를 떠올리시면 될 듯합니다. 네, 그렇지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많은 영화로 제작된 책은 출애굽기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의 많은 장면이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출애굽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웅장하고 흥미롭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웅장하고 역동적인 사건들이 가득한 출애굽기이지만, 그 사이의 모든 내용을 지나치고 처음 1장의 내용과 마지막 40장의 내용만 비교하면 참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 출애굽기가 시작하는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로 살면서 매우 강도 높은 강제노동에 동원되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도, 인권도, 내일에 대한 소망도 없었지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형편은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가 묘사하는 그 수많은 사건이 다 지난 뒤, 출애굽기 40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출 40:34)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위치한 성막에 충만하게 임재하였지요.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출애굽기의 마지막 구절을 한 목소리로 자막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 40:38) 

이제는 밤이든 낮이든 하나님의 영광이 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였고, 그들은 길로 행진하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사건들 하나하나만 따라가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근시안적 관점이었을 뿐이지, 조금만 넓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은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비참한 인생에서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는 어떠한 크고 작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있었습니까? 목사님, 지금까지 제가 살면서 격은 일들은 책으로 쓰면 장편소설이 되고, 영화로 만들면 출애굽기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매주 매월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인생을 조금만 넓게 본다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Move One. 변화의 복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지금 당장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들만 쫓아가지 말고, 잠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 보라는 권면이지요. 그러면 바울은 무엇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11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그때의 일 곧 과거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그 때에”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 곧 그때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11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우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은 무리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본문 12절 말씀도 보십시오. “그때에 너희는” 다시 한번 ‘그때에’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니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참된 소망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그 때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이 묘사하는 ‘그 때에’라는 단어와 대비되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니, 본문 13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제는’ 곧,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자, 이제는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본문 13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해 볼까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3절) 

그 때는 우리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은혜 밖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없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 아무런 소망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결과를 오늘 본문 19절이 분명히 선언하는데요. 본문 19절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9절) 아멘.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는 복음의 은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지요. 

물론, 내가 오늘 예수님을 믿었다고 내일 당장 완전히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오늘 예수님을 믿었다고 칼로 종이를 자르듯이, 혹은 가위로 실을 끊어내듯이 과거의 삶이 완벽하게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출애굽기라는 성경의 책 안에 영화로 제작할 수많은 소재와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에도 매일 매주 매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손길은 변함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조금도 헤어나오지 못했던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제부턴가 나의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오게 되잖아요. 
과거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일어난 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억눌려 살았던 분들도 계시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의 힘만 믿고 이 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고단하고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아름답게 바꾸어 가고 계십니다. 


Move Two. 화해의 복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때에’그리고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비교해 주었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변화, 곧 복음으로 말미암은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화해’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14a절)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등장하네요.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 곧 우리의 화목, 우리의 화해,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둔 갈등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곧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자신들만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존재라고 여겼지요. 그렇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미워했습니다. 반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인들이라고 경멸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당연히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서로 미워하고 싫어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것이 어디였을까요?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4절) 

여기에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담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멋진 성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멋지고 화려한만큼, 그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들은 절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거든요. 그러니 성전의 건물이 서로 분리시키고 나누고 갈등을 조장하는 장소였어요. 

반면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크고 화려한 건물은 없었습니다. 정해진 예배의 처소가 없어 성도들 가정에서 함께 모아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이는 유대교에 비하면 훨씬 초라하지요. 그러나 교회만은 그 안에 유대인들도 예배에 참여하였고 이방인들도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라운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화평이 되어주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헐어 버리셨습니다. 

15절 말씀도 보십시오. 이번에는 ‘법조문으로 된 율법의 계명’이 등장하지요. 구약의 율법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율법의 계명도 모두 폐해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15절 뒷부분이지요. “이는 이 둘로 –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하는 거예요 –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화평하게 하시고” 17절 말씀도 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 – 곧 이방인을 말합니다 – 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 유대인을 말합니다 –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인에게도 전하시고 이방인에게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이 놀라운 화해의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유대교는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도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멋진 두루마리에 쓰인 구약의 율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함과 웅장함이 결국은 사람의 자랑거리가 되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분열의 요소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교처럼 화려한 성전도 없고, 당시로서는 기록된 신약성경도 없었고, 교회의 예배형식도 초라했던 에베소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이 있어서,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과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삶을 분명히 변화시킵니다. 지금 당장은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 보면, 극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교회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데, 그 대표적인 변화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 안에서 서로 화해하는 화목이지요. 


Move Three. 부흥의 복음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구약 시대 수천 년 동안 결코 해결되지 않았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과 분열의 역사는, 비로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서로 화해하고 화목을 이루는 위대한 역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목의 역사는 교회의 참된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1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이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건물의 모든 자재들이 함께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는 본문 21절의 동사가 두 개로 등장하지요. 첫째로 서로 연결하여, 두 번째로 성전이 되어 가고. 이렇게 두 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을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누락된 하나의 동사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본문 21절에 등장하는 동사가 모두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연결되고, 둘째로 자라서, 셋째로 성전이 되어갑니다. 여기에서 ‘자란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부흥”이 됩니다. 

자, 성도 개인이 그 믿음이 자랍니다.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신앙이 성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개인의 부흥이지요. 
나아가, 우리 가정의 믿음도 자랍니다. 성장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자녀들이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믿음의 가정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정의 부흥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갈등과 분열이 사라지고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니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교회의 부흥이지요. 이 멋진 부흥의 모습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22절이 이렇게 묘사하는데요. 우리 자막을 통해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절) 아멘.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곁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을 잠시 둘러보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그분들이 어떠한 분들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그대로, 성령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분들, 성령 안에서 함께 신앙이 성숙해 가는 분들, 성령 안에서 함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분들이지요. 물론 단점도 보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단점은 있잖아요. 물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잖아요.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니, 우리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교회는 하나 되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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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4. 29. 09:23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절 예배를 드렸지요.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절은 하루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순절이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절기라면, 부활의 절기는 부활절을 시작으로 성령강림주일까지 모두 50일을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다시 한번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선포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계속해서 부활의 절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격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바랍니다. 


닫힌 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날, 곧 부활절 저녁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라고 되어 있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새벽에는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다시 살아나셨기에 더 이상 무덤에 안치되어 있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절 새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이 거의 흘러서 그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그날 하루 동안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요?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요 20:1-2). 여인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지요(요 20:3-10).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제자들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막달라 마리아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입니다(요 20:8).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그날, 하루가 지나는 동안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여러 차례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날 하루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수차례 들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슬픔과 두려움과 걱정을 다 물리치고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19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19a절)

여기에 그들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바로 ‘두려움’이네요.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대인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고 있으니,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어찌 그들이 방문만 꼭 닫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 문도 꼭 닫고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딱 한 번만 듣고도 내 마음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염려와 불평이 다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단 한 번만 듣고도 부활의 확신, 천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미 수차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열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두려움과 불안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이미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스스로를 바라보며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마음이 연약하여 늘 흔들리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오늘도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 예배의 자리를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방문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마음이 두려움에 가득하였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아가 그 마음의 문도 꼭 닫아 두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도 제자들에게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 주일 저녁에 열명의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후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행하였던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소망이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19a절)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문을 닫고 있어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들을 넉넉히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b절)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오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십니다. 그들이 굳게 닫아둔 문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 안으로 예수님께서 쑥 들어가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에 쑥 들어가셔서 그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는데요. 본문 20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주셨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늘 함께 계셨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모를 리 없지요.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만으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못 박혔던 손도 보여주시고, 창이 찔렸던 옆구리도 보여 주시네요. 그렇게 제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올 수 있도록 제자들의 마음에 확신과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20절의 뒷부분이지요.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말씀을 한번 들었다고 우리 마음의 모든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부활절도 보내고 부활의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더라도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 지금 앉아 계시니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여러분의 닫힌 마음을 찾아가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 걱정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방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를 찾아와 주셨지요.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났습니다. 부활주일을 지나고 그다음 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면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 되겠네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날도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모여 있던 열한 명의 제자들 중에는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가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바로 도마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도마는 부활절부터 한 주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26절은 이렇게 묘사하네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26a절) 

여러분 본문 26절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부활의 주님을 다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본문 26절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 곧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부활의 주님을 믿고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분들이지요.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로만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성도들이 믿음과 확신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추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렇게 순수성만 강조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 모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예수님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도마를 위해 다시 한번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를 찾아가십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이번에도 주목해야 할 단어는 무엇일까요? “오사”라는 단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찾아가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다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난주에도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찾아가셨을 때 도마라는 제자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도마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지난주와 똑같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조금도 귀찮다 여기지 않으시고, 한 주 전과 동일한 행동과 동일한 말씀을 똑같이 하시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도마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시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여러분, 이 장면에서 도마라는 개인 인물이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주 전,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기 전까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문을 걸어 잠겄잖아요.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과 도마의 차이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냐 믿음이 약한 사람이냐의 차이라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주 전에 만났느냐 한 주 후에 만났느냐는 시간의 차이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정말 집중해야 할 대목은 예수님께서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도마를 위해, 한 주 뒤에 제자들의 모임에 한번 더 찾아와서 예수님의 손과 예수님의 옆구리를 또다시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찾아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이번에는 도마가 정말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이와같은 믿음의 고백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분들이 바로 이곳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역사가 매주 우리 교회 안에 가득히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조금 빠를 수는 있고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이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이 지난 그 다음 주일, 예수님은 아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모임에 직접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이 두 번째 방문은 당연히 도마 개인에게 큰 유익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두 번째 방문은 도마에게만 유익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까요? 물론, 열 명의 제자들은 한주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번 부활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부활의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찾아오시고 도마에게도 예수님의 못 박히신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그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던 열 명의 제자들은 다신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겠지요.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부활의 절기를 보내는 이 기간 동안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매주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매주 우리 교회를 찾아오셔서 아직 부활의 복음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도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은혜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여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에 쉽게 잠식당하지만, 
매주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부활의 생명,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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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5. 4. 13. 15:37

기독교 고전 가운데 토마스 아 킴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에 대해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 단락에는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이 한 번쯤 귀를 기울여야 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그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2. 11. 1, 3.

이처럼 토마스 아 킴퍼스는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과 함께 금식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탄하였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래전 토마스 아 킴퍼스가 지적한 그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천국은 좋아하고 위로도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만찬 자리도 사모하지만, 그곳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는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외면한 사람들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는 멀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만을 원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그들의 행태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등장하네요. 육체의 모양은 겉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겉모습을 자꾸 꾸미려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여야 하는 교회에서 조차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지요. 

12절 말씀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 곧 자신의 겉모습으로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네요. 당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 사회에서는 별로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면 할례를 받는 것이 어디에서 자랑거리가 될까요? 교회죠. 교회 안에서만, 성도들 사이에서만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는 정통 유대인이라고, 조상적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갑자가 예수님을 믿어서 교회에 입교한 성도들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고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2절에 겉모습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 정작 그들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나 십자가는 다 뒷전이고 자기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기 자신이 칭찬을 받고 자기 자신이 박수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킴퍼스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천국,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천국의 잔치는 좋아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사람들이지요. 

십자가는 멀리하고 자신의 겉모습을 자랑하던 사람들, 곧 사도 바울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점점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멀리하도록 부추기는데요. 본문 13절입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13a절) 

당연하지요. 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강요합니까?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3b절)

자기 자신만 겉모습을 자랑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 시대에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언급하는 ‘육체의 모양’이 사회적 지위와 평판 등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면, 우리시대에도 교회 안에서 겉모습을 꾸며대며 다른 사람에게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지 않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겉모습을 자랑하도록 부추기는 사단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넘어가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감당하려는 성도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영광의 자리, 칭찬받는 자리, 박수받는 자리에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수치가 없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십자가

사도 바울의 시대, 곧 신약성경의 시대에도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뽐내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는 멀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지적하고 그들의 행동과 신앙을 정확히 꼬집었지요. 그러면 성도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따라야 하는 바른 신앙의 길은 무엇일까요? 본문 14절에 등장하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4절)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학력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업적과 성과를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휘두르는 권세와 재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내게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선언이지요. 

여기에 ‘자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말하면서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마음에 쏙 드는 새 옷을 구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지금 무엇이 가득 자리 잡고 있을까요? 새로 구입한 그 옷이지요.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옷을 입고 외출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그 옷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자랑은 무엇이 됩니까? 새로 산 옷이 되겠지요.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볼까요?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손자들이 시험에서든 대회에서도 1등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좋은 대학에 입학을 했거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기업에 입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자녀들과 손자들의 기쁜 소식으로 가득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자랑입니까? 그 자녀의 성공과 형통이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자랑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지요. 과연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득한 사람이지요. 그 마음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가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선언 그대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하는데요. 본문 1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5절) 

사도 바울이 무엇을 선언합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용어로 말해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는지, 신앙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는지 직분을 받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드리는 사람인지 적게 드리는 사람인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15절 말씀 그대로이지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 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새로 지어진 피조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게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사람은 할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십일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직분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오직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강물과 같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목천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담대히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14a절)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세상 사람들은 서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경쟁하지요.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천국과 잔치와 위로는 좋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예수님과 함께 지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십자가 안에 사실은 너무도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 있는데요. 바로 그 비밀을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6절)

본문 16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여기에서 ‘이 규례’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문맥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귀한 줄 깨달아 예수님의 십자가만 사랑하리라는 그러한 규례지요. 그러한 규례를 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그러한 규례를 지키는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로 ‘평강’과 ‘긍휼’이네요. 

먼저, 평강은 평화 혹은 화평을 말하지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세상의 자랑으로 자기 자신을 뽐내려고 하면 결국 그 안에는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랑을 다 뒤로하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샬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때 주어지는 첫번째 축복은 평강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지요. 인간의 모든 부족함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경이 말하는 긍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는 언제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부정하고 겉모습을 자랑하라고 부축이지만, 그러한 삶에는 언제나 갈등만 있고 모든 것이 늘 부족합니다.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나뉘었던 마음이 다시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 곧 주변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는 멀리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묵묵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평강도 주시고 긍휼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봉헌 찬양으로 부를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의 후렴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양의 후렴구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두 가지 믿음을 노래합니다. 먼저는 최후 승리를 얻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어 빛난 면류관을 받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최후 승리의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빛난 면류관을 받는 그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찬양의 후렴구는 또 하나의 진리도 노래하지요. 곧,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쓰려면 험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씌워주시는 빛난 면류관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귀한 줄 알고,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최후 승리를 주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난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험한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끝까지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 모두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시고 부활의 빛난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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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강해2025. 3. 21. 09:57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가 진정한 용기에 대해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요.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두려움을 마주하지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두려운 마음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면, 그리하여 그때의 경험으로부터 일종의 트라우마가 형성되어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더 큰 두려움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제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두려운 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처음부터 제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신앙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두려운 마음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되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두려움을 정복하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항해하던 중에 큰 풍랑을 맞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만난 거대한 풍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장소와 위치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시면, 배가 이미 육지를 수 리나 떠났을 때 바람이 거세지고 물결이 일어났다고 서술하지요. 제자들이 거대한 풍랑을 맞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육지에서 수리를 떠난 곳이지요. 그런데 성경책 중에는 이 대목을 “바다 한 가운데”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거대한 풍랑을 맞이한 지점은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난 장소, 곧 바다의 한 가운데라는 의미입니다.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풍랑을 맞이했다면 쉽게 돌아올 수라도 있었겠지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풍랑을 맞이하면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에게 닥친 그 밤의 풍랑은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습니까? 바다의 한 가운데에서 만납니다. 그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태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풍랑의 특징으로 풍랑을 맞이한 장소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그 풍랑을 맞이한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해가 저물어 갈 때, 곧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저녁식사로 음식을 나누어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루가 끝나가는 밤 시간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수 리를 항해한 뒤, 곧 한 밤에 거대한 풍랑을 맞이했겠지요. 그러면 이 풍랑이 언제까지 이어집니까? 오늘 본문 2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여기에 등장하는 밤사경은 지금의 시간으로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가 됩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해가 저무는 밤시간부터 이제 곧 해가 떠오르는 새벽까지 하룻밤을 꼬박 거대한 풍랑과 맞서 싸우느라 기진맥진했다는 뜻이 되겠네요.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어렵고 다시 돌아오기에도 어려운 바다의 한 가운데, 그것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그 시간에 제자들은 고난의 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날 밤 제자들이 맞이한 거대한 풍랑에 대해 가장 의아한 점은 제자들이 왜 그 밤에 바다 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는가라는 점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결이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기상이 악화하여 거센 풍랑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한데, 도대체 제자들은 그 밤에 왜 바다 한 가운데로 항해를 시작했을까요? 그 대답이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22절에 등장하거든요.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2절)

누가 그 밤에 제자들의 항해를 재촉하였습니까? 예수님이 재촉하셨네요. 여러분, 제자들은 그 밤에 예수님 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 직후의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은 풍성하게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신데, 제자들의 입장에서 왜 예수님 곁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예수님을 남겨둔 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라고 재촉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배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만난 풍랑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했나요?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죄를 범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풍랑을 당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러한 요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을 접어두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당하는 인생의 풍랑이요, 고난의 밤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매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삶이 늘 형통하기만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면 형통의 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생의 풍랑이나 고난의 밤은 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인생의 풍랑이나 고난의 밤을 다 비켜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의 가르침이 그와 다르니 저로서는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해를 시작했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인생의 가장 힘겨운 밤을 맞이하고 고난의 풍랑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의 밤도 인생의 풍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신앙이 있든 신앙이 없든 상관 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풍랑과 고난의 밤을 맞이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마음에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선사하는데, 인생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함몰되지 않고 그 모든 역경을 마침내 이겨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후의 목적지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거대한 풍랑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인생이 크게 흔들리며 요동치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더하여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으로 여러분의 삶에 찾아온 거대한 풍랑을 모두 이겨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큰 풍랑을 맞아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큰 풍랑을 맞아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으니, 이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실 것으로 예상이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위기로부터 구해줄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풍랑을 잔잔하게 만들어 주시거나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즉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즉시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네요. 지금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밤이 새도록 풍랑을 맞아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난 즉시 풍랑을 잔잔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보다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네요.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워 주시지는 않고, 가장 먼저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제자들이 만난 거대한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지도 그리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나요? 거대한 풍랑으로 밤이 새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다고요?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실 듯한데요.

여러분, 조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지난밤이 새도록 제자들 앞에는 거대한 풍랑이 있었지요. 그러면 그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좌초했나요? 제자들이 바다에 빠졌나요? 그 결과 제자들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었나요? 아닙니다. 밤이 새도록 거대한 풍랑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사실 제자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난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고생했지요. 바닷물이 일어나서 온몸이 땀과 바닷물로 흠뻑 젖었겠지요. 이렇게 고생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무서운 풍랑이 몰아치면서 하룻밤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실제로 제자들 중에는 다친 사람도 없고 바닷물에 빠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으세요? 어떻게 그 거대한 풍랑이 제자들이 탄 배를 덮치고 있는데, 배가 좌초되지 않고 제자들이 바다에 빠지지도 않고 다치거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저는 그 비밀에 대한 대답이 본문 23절에 담겨 있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재촉하셨습니다. 다른 무리들도 모두 흩어보내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 밤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네요. 그러면 제자들을 풍랑이 이는 바다로 보내신 예수님은 그 밤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겠지요. 오늘 밤 그들에게 고난의 밤이 찾아올 것인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셨겠지요. 그 결과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거대한 풍랑을 맞아야 했지만, 그 어떠한 풍랑도 그 어떠한 물결도 제자들을 삼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셨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니, 여러분의 삶에 아무리 어두운 고난의 밤과 인생의 풍랑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삶은 안전합니다.  

제가 어느 성도님의 가정을 심방하는데,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으로 “나의 등 뒤에서”라는 곡을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 찬양을 선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큰 아픔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제 등 뒤에 계신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 등 뒤에서 저를 붙잡고 계셨더라고요.” 네, 맞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인생의 풍랑을 맞이한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생을 풍랑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도 안전하를 나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제 아무리 거대한 인생의 풍랑이 우리를 덮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니, 인생의 풍랑이 여러분의 삶을 결코 침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의 문제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떠한 질병도 여러분을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내기를 바랍니다. 
재정의 문제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혀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왜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에 몰려드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풍랑을 이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과정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바다 위를 걸어가는 사건이지요.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나에게 오라” 초청하셨고, 예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걸으며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한 번 물리쳤다고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본문 30절은 이렇게 말씀하잖아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뼈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0절) 

여러분, 이 장면도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위험해 보이지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람이 빠져가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러나 사실은 결코 위험한 장면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31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시거든요. 베드로가 잠시 물에 빠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의 생명을 결코 해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다 건져 주신다고요. 그러므로 베드로의 안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장면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31절을 계속 보세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의 마음에 또다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무엇으로 이어집니까? “왜 의심하였느냐?” 그것은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가장 귀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고 마네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이 두려워하는 현실은 사실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정말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말로 우리 인생에 소망이 없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지만, 반대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진정한 용기는 우리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까? 인생의 풍랑을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까? 고난의 밤을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인가요? 아닙니다. 누가 어떠한 풍랑을 맞았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난의 밤이 찾아오고 인생의 풍랑이 휘몰아쳐오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에게도 두려워할만한 인생의 풍랑은 언제든 몰려오지요.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찾아오는 두려움을 물리치지 못하여 의심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면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더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을 힘입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셔서, 우리 인생의 모든 풍랑과 고난의 밤을 넉넉히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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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3. 2. 14:51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는 단연코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이 금문교를 방문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금문교는 남쪽의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북쪽의 마린카운티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대부분의 관광버스는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다리를 건너는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그 옆에 넓은 주자장과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소에 정차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금문교를 관람하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주차장이 넓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도 있지만 눈으로 금문교를 관람하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그다지 좋은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문교를 조금 더 멋있게 내려다보며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남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마린카운티로 올라가는 도로가 아니라, 그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북쪽 마린카운티에서 남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빠져나와 언덕을 쭉 올라가면, 주차장이 매우 협소한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습니다. 주차장도 매우 좁아서, 시간을 잘못 맞추면 주차할 때까지 30분 이상을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언덕을 단 한번이라도 올라가본 사람은 다시는 금문교를 관람하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설치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 높은 언덕에 올라야 태평양의 바다와 샌프란시스코 시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금문교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나 평소에 보았던 방식을 벗어나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28-2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이전에 산 아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날 산 위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9절) 

이 구절에서 “용모”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와 같이” 빛났다고 했으니, 이것은 비유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그저 “해와같이”라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29절을 계속보시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네요. 마가복음에는 이 장면을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는 장면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날에 보았던 예수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로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 특별한 날에 산 위에서 ‘변형’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사람들의 눈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잠시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위대한 영광이 잠시 잠깐 제자들의 눈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친밀하신 분이시지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가정 집에도 들어가셔서 그 가정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이요 우리의 각 가정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굶주리거나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어 빈손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풍성과 충만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게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태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전히 가득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꿇어 경배해야 하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별세 (30-31절) 

제자들이 산 위에 올라가니,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 광채가 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겹쳐서 일어납니다. 곧,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등장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흐름, 곧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1절)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네요.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변화산의 사건 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뒤 다시 한번 자신의 수난과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체없이 나아가시는 것이 계속되는 누가복음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 출발점에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자신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그 영광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변화산의 사건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이러한 흐름은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 곧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 ‘산상’이지요 – 용모가 변화된 사건 – ‘변모’입니다 –, 그리하여 산상변모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오는 수요일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게 되지요. 이러한 교회력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되신 사건 후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의 주님이시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목상하며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겉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밝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로 지금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서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지만, 나의 삶에 부활의 영광은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것인지 기약이 없어 가슴 답답한 인생의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분은 안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곧 여러분의 삶에 잠시나마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하여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인생의 사순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계시니, 다시금 힘을 내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그 고난의 끝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그의 말을 들으라 (32-3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의 주님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32절에 이렇게 말씀하지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네, 그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3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을 금방 떠나고 말았네요.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아 베드로는 아쉬웠던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을 모시고, 모세를 모시고, 엘리야를 모시자고 제안하잖아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33절 뒷부분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영광의 장면이 짧게 끝나 아쉬워하는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5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목격하였으니 – 그 장면을 직접 보았으니 –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딱 한 번만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 곁에 늘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주시잖아요. 그러므로 변화산의 그 위대한 장면을 한번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더 크고 위대한 장면을 보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의 진면목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도로 옆에 위치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각종 편의시설도 있고, 주차장도 넓지만 금문교를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가 없어요. 그보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좁은 길을 타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편의시설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주차공간도 비좁지만, 그 언덕을 오를 때 비로소 금문교의 참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그 주변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저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 언덕을 참 많이 찾아 갔습니다. 타지에서의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특별히 그날은 저희 부부에게 모든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올랐지요. 그리고 조그마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없이 태평양을 바라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 그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자기 저의 눈에 너무도 멋진 무지개가 보이는 거예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맑은 하늘에 무지개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썼다, 눈을 비볐다 떴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분명하게 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제가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무지개다” 그렇게 저희 부부는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던 무지개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너무도 아름다웠던 무지개를 보았지만, 저희의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매일 불안하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유학 생활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 소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금문교의 하늘에서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큰 위로가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외지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 캘리포니아의 그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경험 이후 지금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희는 그날에 보았던 무지개를 다시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날의 무지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빛나던 무지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날마다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펼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본다면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변화산의 사건이 있지 않으셨나요? 오늘 본문의 사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는 현장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분명히 있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난의 날들이 가득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것도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화산 사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비록 여러분의 삶에 인생의 사순절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상변모주일은 일년에 단 한주로 너무도 짧은 반면, 우리 인생의 사순절은 일년에 40일이나 되어 너무도 길고 모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있었던 변화산의 사건이 계속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천의 모든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며 조금 더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응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격려와 응원에 새 힘을 얻어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모두 통과한 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볼 때 여러분의 전 생애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깨닫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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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5. 2. 9. 16:34

기독교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르침, 곧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주신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지요. 나는 죄인인데, 나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는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 나의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세리를 부르신 예수님

우리는 지난 주에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7절)

예수님께서 이번에 제자로 부르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레위라는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름이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이름을 마태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는 우리가 흔히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본문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셨지요. 이번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어부들이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장면과 세리가 세관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느낀 감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칭찬받을만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직을 당하고 지탄을 받을만한 장면이었지요. 왜 그렇습니까? 당시는 로마 제국이 유대인을 지배하던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라는 직업은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직업이었으니,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요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배신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은 세리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맡기면서 각 지역마다 세금으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총액만 정해두었습니다. 세리들은 현대적 개념의 월급과 같은 수입이 없었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양도받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둬 로마제국이 정해둔 금액만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가 자신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세금을 과도하게 걷거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온갖 불의를 행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를 읽다 보면 그 시대 가장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두 개의 직업군이 함께 등장하는데,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창녀’였다면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당연히 경건한 유대인이라 자청하던 사람들은 세리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이 회당,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떠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지금 세관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남성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죄악을 바로 지금 행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이라고요? 죄인을 위한 복음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을 하시네요. 세관에 있던 레위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그 죄인을 자신의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일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8절)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으니, 그 세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걷은 세금, 돈이 가득했겠지요. 여러분, 그 시대는 지금처럼 세금을 계좌로 송금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실물 화폐로 모든 거래가 진행되던 시대였지요. 그러니 세금을 걷으면 다 실물 화폐로 거두었을 것이고, 그 모든 세금을 당연히 세관에 보관해 두었겠지요. 그런데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한평생 물고기를 따라다녔던 어부가 두 배를 가득 채운 만선의 축복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한평생 돈을 추구했던 세리, 자신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방하였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까지도 다 참아내며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세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 모든 돈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본문 28절의 말씀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일어나”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지요. 여전히 레위는 신앙도 민족도 다 버리고 오직 돈만 쫓아가는 ‘죄의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으니, 이제 그 죄악 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변화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돈만 좇았던 사람이, 이제는 돈을 등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악에 물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회개의 사건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난 레위의 삶에 이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됩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29절) 

레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여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잔치를 베풀고 있네요. 오직 돈을 좇아 살아갔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며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만 당하던 레위의 집에 먼저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면서 천국의 잔치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천국의 잔치를 맛보며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불러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실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돈만 쫓아가던 세리도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됩니다. 하물며, 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당에 앉아계신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지 못하시겠냐고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회개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말씀만 따라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셔서, 예수님을 모시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으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세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회개하고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0절) 

이 장면에서 누가 비방합니까?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네요.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를 구별된 사람들, 곧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향해 비방합니까? “그 제자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네요. 어떻게 비방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서 어떻게 세리 –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라고 말씀드렸지요 –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교제하느냐고 비방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사람들의 출신, 특별히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었던 레위의 출신을 몰라서 이렇게 비방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다 알지요. 다 알면서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너희가 어떻게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 하느냐’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비아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아, 맞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너희가 원래 죄인이었지. 너희가 원래 세리였지. 너희가 원래 제자가 될 자격도 없었던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지. 그러니 너희들이 여전히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구나.’ 뭐~ 그런 식의 조롱이었어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의 마음에 뿌리 깊게 박힌 마음이 무엇입니까? 자만심이지요, 자만심. 너희 같은 죄인들이 무슨 제자냐? 너희 같은 출신들이 무슨 제자가 될 수 있느냐? 적어도 나처럼,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한평생 예루살렘에서 율법의 법도를 정통으로 배운 사람이나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철저한 교만의 마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 설교의 제목을 떠올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입니까? 바로 죄인을 위한 복음이지요.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너희들은 다 죄인이지만, 나야말로 의인이라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머물만한 조그마한 자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는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저 구별된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들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제자들이 자신을 향한 비방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신하여 대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1절) 

예수님께서 먼저 비유로 대답하시네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시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주의하실 것이 하나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의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의 관점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다 병들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아니, 다 죽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

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과 심판의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두 가지고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먼저, 자신이 신앙의 관점에서 심하게 병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그 서기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해요. 온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해요. 특별히 그들은 교만의 죄, 위선의 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조금 안다고 율법을 조금 지켰다고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자신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인 척,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의인인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중한 질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확신하니, 그들에게 최고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반면, 예수님은 또 하나의 분류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 그리하여 자신이 영적으로 중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지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시라고 예수님께 무릎으로 기도했던 베드로,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해 스스로도 혐오하였던 세리 마태와 같은 이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곧 죄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결론을 내리십니다. 본문 32절이지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2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곧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 용서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생의 은혜.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은혜, 과연 누가 받아 누리게 됩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 못할 죄인도 없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복음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의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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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5. 2. 8. 10:24

데이빗 왓슨이라는 분이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지요. 데이빗 왓슨은 이 책에서 성도 개인의 제자도와 교회 부흥의 연관성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데이빗 왓슨의 논리를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만일 어느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당연히 그 교회는 지배와 경쟁, 시기와 미움이라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사랑과 온유, 겸손과 화평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교회, 교회 성도들이 자신 있게 불신자를 초대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결과적으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제자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교회는 출석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여있지만, 그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제자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졌다면 누가 그러한 교회를 찾아오겠습니까? 심지어 그 교회 성도들조차 부끄러워 다른 사람을 교회로 초대하거나 인도하지 않으니,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데이빗 왓슨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성도들의 제자도와 교회의 부흥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 당시 미국 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에 부흥이 사라진 이유를 데이빗 왓슨은 바로 제자도의 부재에서 찾았던 것이죠.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쇠퇴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박해를 받아 교회가 쇠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큰 고난을 받아 쇠퇴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회, 곧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도가 살아있는 교회는 때로 박해를 받기도 하고, 때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문제지 결국은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교회에 재정이 넘쳐나고, 심지어 세상의 권력까지 교회가 틀어쥐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이 사라진 교회는 시간이 문제지 결국 쇠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길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미움도, 다툼도, 시기도, 갈등도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와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올해 우리가 선포했던 표어와 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Move One. 예수님의 부르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1절).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곧 갈릴리 호숫가에 계실 때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2절)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셨네요. 이 배는 지난 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출항했다가 돌아온 배였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이 배에서 내렸고 지난밤에 사용한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고 있었던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장면은 당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해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어부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부라는 직업은 몇 세대를 이어 가업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 외에도 갈릴리 해변에는 많은 어부들이 살고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보신 그 장면 – 곧 본문 2절이 묘사하는 어부들의 모습은 – 당시에 누구라도 목격할 수 있는 흔한 장면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 2절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적합한 매우 중요한 장점 하나가 드러난다고 설명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장점이란 ‘성실함’이지요. 네, 맞습니다. 베드로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지난 밤에도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소득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그물을 씻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분명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성실하여도,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더라도 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라도 그들의 삶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의 형편에 대해 한 가지를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이미 많은 스승들, 많은 랍비들이 있었고 그들도 자신을 따르는 여러 제자들을 두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랍비들을 따라 그들의 제자가 되었던 학생들은 주로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열심히 배웠던 사람들, 그리하여 이름난 선생님이나 랍비들이 주로 살았던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이지요. 한 마디로, 예루살렘에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웠던 사람들이 위대한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시몬 베드로와 같이 저 북쪽의 변방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이들을 친히 찾아가 제자로 불러주신다는 사실이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셨던 장면 곧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거나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 모습은 당시 갈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그려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 – 곧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 – 은 당시 갈릴리 해변은 물론이고 유대 나라 전체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당시 스승으로 불리던 많은 랍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제자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들이 아니 모여 있는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의 어부들을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아주고 계시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찾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께서 지금도 아무런 조건도 없는 우리를 주님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을 축복하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Move Two. 말씀에 대한 순종

 

예수님께서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데, 가장 먼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3절)

 

예수님 주변에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배의 갑판에 오르셔서 – 마치 지금 제가 강대상 위에 있고 여러분들이 회중석에 앉아계신 것처럼 – 모든 사람들을 한 눈에 바라보며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르신 그 배가 누구의 배입니까? 3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당연히 그 자리에 시몬 베드로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베드로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부르실 때 우리를 가장 먼저 이끄시는 장소가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앞으로 수없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던 그 장소는 기적을 체험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먼저 여러분의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리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은 동일하고,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동일할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더라도.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면, 여러분을 특별히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사로잡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은 “말씀을 마치시고”라고 되어 있네요. 그리고 이제 시몬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더 깊은 장소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지요.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갈릴리 호수의 특정한 장소, 곧 수심이 깊은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더욱 깊은 뜻도 담겨 있으니, 시몬 베드로에게 더 깊은 신앙의 세계, 더 깊은 믿음의 세계, 더 깊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이지요.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네, 사실입니다. 그날 밤 시몬만이 아닙니다. 시몬과 함께 동업하였던 야고보와 요한도 그날만큼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물고기를 전혀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에게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5절을 계속 보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지난 밤, 밤을 새우며 그물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거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현실적인 조건이 충분하지요. 그런데 어디 그뿐인가요?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목수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어부인 베드로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이번에도 실패하면 조금 전에 씻어서 정리해두었던 그물을 다시 손질해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현실적인 조건은 너무너무 많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제자는 어떠한 사람이라고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이 한 가지를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셔야 해요.

 

 

Move Three. 두 가지 기적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니”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절 말씀도 보십시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귿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배 두 척이 모두 만선이 되는 큰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보면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깜짝 놀랐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말씀하시네요. 본문 10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0절)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역자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만큼 놀라웠던 것이지요. 그렇게 날라고 무서워하던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 베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 바로 그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진짜 기적은 이제부터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베드로에게 배 두척이 모두 물고기로 가득하는 만선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지요. 그런데 진정한 기적은 이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인 11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1절)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배를 육지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지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버려두었다고 했으니, 조금 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두 배를 가득 채웠던 물고기도 포함되었을까요? 네, 당연히 포함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애에 처음으로 경험해 본 배 두 척에 물고기가 가득 차는 만선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 얼마나 귀한 지 그 모든 물고기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물고기가 배 두 척에 가득하게 집은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물고기를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기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가 행한 기적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를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재물,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 때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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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5. 1. 26. 17:07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똑같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들의 마음에 귄위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니 병자가 치유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리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이 들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여 주셔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자리에 가득 임재하기를 바랍니다. 


Move One. 회당에서 가정으로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그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38a절)

여기에서 회당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가버나움 회당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 어디로 가십니까? 시몬의 집, 시몬의 가정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사역을 행하셨던 장소가 두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어디입니까?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식적인 예배의 장소인 회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사역하지 않으셨지요? 또 어디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잖아요. 곧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적 공간인 가정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의 장소였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장소가 어디였다고요? 회당과 가정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어디라는 뜻입니까? 그 첫 번째 장소는 회당이요, 또한 각 사람의 가정이라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장소인 바로 이곳 예배당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시면 안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이제는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서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는데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 현장을 참여했는데요. 그런데도 부족할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주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꼭 모셔와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네, 반드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셔 들이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38a절) 

여기에서 “열병”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면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심하게 오르는 증상을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 증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증상을 겪고 있으니 더욱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시몬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라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권세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당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시몬의 가정에는 큰 아픔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네요. 여전히 가정에 돌아오면 장모님이 중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무리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더라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나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시몬은 회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셔옵니다. 그러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었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39a절)

예수님께서 그 열병을 향해 꾸짖으시네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실 때도 귀신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막 1:25; 눅 4:35). 예수님은 회당에서 행하신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도 열병을 꾸짖으시며 그 여인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회당이나 시몬의 가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보면 회당과 시몬의 가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존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9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까이 서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 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은 저 멀리서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도 시몬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께서 그 장모의 치유를 선포하시면 그 여인은 그 즉시 치유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녀의 질병을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들인 시몬이 누린 은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시몬과 같이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을 우리의 가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교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시지요?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에 돌아가셔서도 말씀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십시오.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듯,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일상이 변화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시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예수님을 예배당에서 만나는 것에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으로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마다 아픔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많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까지 들어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치유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깊숙이 들어가셔야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Move Two. 사명을 감당하는 가정

시몬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회당에서 받은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장모의 열병까지도 치유를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치유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그 다음에 어떻게 말씀합니까?)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9절)

시몬의 장모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일어나 무엇을 하였지요? 수종을 듭니다. 여기에서 ‘수종을 들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단어, ‘디아코니아’의 동사 형태인 ‘디아코네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들을 세우지요. 이때 집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eacon’이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된 뒤 곧 일어나 예수님의 일행을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그녀가 이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나아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여 주시자,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치고 누가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장모가 등장하기도 하잖아요. 당연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업인 어부의 일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만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기간 시몬 베드로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겠지요. 만약,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가 있었을까요? 시몬의 가족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의해 주고 응원해 주기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가정으로 예수님을 모셔오잖아요. 그리하여 장모님을 비롯하여 온 식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먼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일에도 온 가족이 동의하고 지지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도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 가정의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분 가정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온 가족이 예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한 귀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Move Three. 전도의 방식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역을 하시고, 오후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안식일 하루가 마쳤을 때, 가버나움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오늘 본문 40절이 그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네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0절)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유대인의 시간으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마칩니다.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직접 보고 또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이 – 어떠한 노동이나 일을 할 수 없는 –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이 되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서 눈의 띄는 표현이 두 가지있네요. 그 첫 번째는 “온갖 병자”입니다. ‘온갖’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종류의 모든 환자들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몸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는 물론이고, 귀신이 들려 그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남자도 데려오고 여자도 데려왔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다 데려왔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시네요.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든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님께 데려온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명 한 명 다 손을 데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우리의 질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면하시는 우리의 아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하실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에 온갖 병자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쫓겨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의 이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41절을 계속 보시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이 소리지른 이야기가 그 내용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이 소리치는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 43절에 나옵니다. 본문 4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3절)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다른 동네에서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표현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방식,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그대로 똑같이 다른 곳에서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마지막 절인 4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4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셨을까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회당에서만 가르치셨을까요?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듯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의 가정에도 들어가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주시며 그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에게 찾아오는 온갖 병자들을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다 영접하여 일일이 손을 얹으며 고쳐주셨겠지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만나주시고, 한 가정 한 가정 직접 찾아가주시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도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섬김도 사랑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귀신이 선택하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전도의 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전도대상자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리게 하셨다면,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치유하여 주시고 회복하여 주실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예수님,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도 모시고 싶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로 말미암아 큰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아픔이 있더라도 모두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아픔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예수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치유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됩니다. 나아가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교회의 일꾼이 되는 복된 가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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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