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2. 5. 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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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이른 아침이면 나는 마음보다는 머리를 준비하는 데 몰입했다. 이는 내가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나는 항상 이것이 잘못임을, 특히 기도할 때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저를 고쳐주시고 마음 문을 열어주소서. 그러면 제가 선포하겠습니다." 로버트 맥세인의 말이다. 설교자는 이성을 동원하여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연구가 설교에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E.M. 바운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설교의 통로는 머리이지만, 그 원천은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통로를 깊고 넓게 했을지라도 원천의 깊이와 청결함을 잘 살피지 않으면 메마르고 오염된 통로가 되어 버린다." 설교자만이 아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에게 입 맞추며, 비참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아픈 자를 쓰다듬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성결하게 만들 수 있는가? 바로 기도다. "자기 마음과 씨름하여 그것을 정복한 사람, 그 마음에 겸손, 믿음, 사랑, 진리, 자비, 동정, 용기를 가르친 사람, 그렇게 풍성한 보석 같은 마음을 복음의 능력과 함께 당당한 지성을 통하여 듣는 사람의 양심에 부어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진실하고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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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2. 5. 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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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룻기는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아가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약속의 장소라 믿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맞이하자 그곳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흉년을 만난 이스라엘보다는 모압에서의 새로운 출발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내가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 나라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홀로 남겨진 나오미는 아들 두 명을 모두 모압의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두 아들 모두 자녀를 낳기도 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모압으로 이주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큰 슬픔 속에서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난 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베들레헴에 풍성한 곡식과 양식이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이지요. 자, 이제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어버린 가련한 여인 나오미는 모압에서 맞이한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지금 나오미의 형편에서는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나오미 입장에서는 며느리들이라도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솔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지요. 며느리들의 입장에서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재물도 없고, 고향에는 농사를 지을 땅 한 평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 생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적절한 혼처를 알아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처럼 당당하게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며 베들레헴을 떠난 나오미였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와 그의 가정의 모습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에 아직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남겨져 있었으니, 그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오미가 그의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룻 1:11)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3) 나오미는 지금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어버린 큰 슬픔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며느리들을 향한 미안하고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나오미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자 나오미와 두 명의 며느리가 크게 슬퍼하며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리고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이었던 룻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남겨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내일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자신이라도 곁을 지켜주겠다는 사랑과 연민이 룻의 마음에 가득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든 위기와 어려움을 그들은 견디어 낼 수 있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가정을 기쁨과 행복의 가정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행복을 위한 조건이 가득하신가요? 여러분의 가정에는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재물이 있고, 가족들은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고 모두 건강하며, 식구들이 함께 계획하고 시행하는 모든 것이 성공하고, 자녀들은 믿음과 신앙 위에 굳건하게 서 있기에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이 나날이 행복한 삶을 계신가요? 아니면,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와 룻의 가정과 같이 여기저기 부족한 것뿐이어서 점점 행복의 조건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계시지는 않으시나요? 우리의 가정에 부족한 것도 많고 아쉬운 점이 많이 보일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서로를 향한 사랑만이”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 곧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붙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삼 년 동안 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므로 이제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히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제자들에게 별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제자들에게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괜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니 오병이어만으로도 수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실 수 있었잖아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상대할 성경 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의 질문과 공격에 대답하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병자들이 찾아오고 귀신 들리 사람이 찾아와도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이 홀로 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영적 은사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재물입니까?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건물이나 시설인가요?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제자들에게 그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을 주님께서 새 계명으로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예수님 곁에 있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주님 곁에만 있으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 펼쳐지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잖아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 제자들의 모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의 모임 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험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아도 사람들은 우리의 모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신앙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모임,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모임과 우리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빚어 갑니다. 특별히 우리의 공동체가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면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덕목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실천하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때에도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서 내가 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이 나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멈추어 버리지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우리가 서로에게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려면, 나를 적대시하고 무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잘 알지만, 막상 사랑을 실천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새 계명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매우 단순한 사실부터 시작해보죠.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셨을가요? 그렇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 명령하셨다면, 예수님의 명령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완벽하게 나의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작은 일부분은 우리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위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무리들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 걸어오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포시 잡았습니다. 그리자 그의 몸에 있던 혈루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자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요 이적입니다. 그러면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행하신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은 여인의 질병이 치유된 이후에 등장합니다. 곧, 야이로와 함께 바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여인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그 여인의 처지와 형편을 모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신 뒤 마침내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지요.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그 걸음을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따스한 이야기를 건네는 정도의 사랑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행동이 됩니다. 이 정도의 사랑이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하루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곤 했어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떻게요? 그날 저녁 제자들과 따로 모인 자리에서 비유의 말씀을 쉽게 풀어주시지요. 한번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붙잡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정도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실천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캘커타의 성녀라 불리는 마더 테레사를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그녀가 생전에 행하였던 선행과 그가 실천했던 사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잖아요. 그런데 마더 테레사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일을 하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일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은 일부터,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친절하고 상냥하게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것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바꾸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분을 꼽는다면, 많은 분들이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실 듯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른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양자로 삼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잖아요. 과연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과연 우리시대에도 그와 같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하신 사랑의 모습 가운데 개인적으로 저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던 장면은 두 아들을 죽은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목회를 하셨잖아요. 극심한 통증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애양원의 한 성도가 목사님께 시원한 사이다가 마시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음료수 한잔을 마실 수 있도록 가져다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장면이었습니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대접하는 것, 어찌 보면 너무도 작은 봉사지요. 그러나 그 안에 얼마나 크고 위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지요.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여 양자 삼는 위대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음료수 한 잔 대접하는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으로 기억하지만, 목사님도 작은 일을 사랑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대접하는 사랑이나 지금 나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정도의 사랑은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되고, 비록 작은 것이지만 사랑으로 행할 때 여러분이 계신 바로 자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모신 천국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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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20 “마더 테레사”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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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2. 5. 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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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이후에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였던 존 맥케이(John Mackay)라는 분이 계십니다. 존 맥케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가지 이미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발코니’이고 또 하나는 ‘길’입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발코니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존 맥케이는 페루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는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발코니는 스페인의 가옥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인데, 건물의 위층 창문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자신의 집 앞의 길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발코니와 같다는 비유는 시시각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그 모든 장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 가운데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을 일어나고 그 가운데는 우리의 예상이나 계획을 뛰어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그때 성도들은 개별적인 사건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존 맥케이가 사용한 ‘발코니’라는 비유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존 맥케이는 ‘발코니’라는 비유가 하나의 이상으로 작용할 뿐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는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구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발코니’의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맥케인이 두번째로 제시한 비유인 ‘길’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발코니 위에 올라가서 길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넓은 시선으로 조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자리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설치된 발코니가 아니기에 그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길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길을 걸아가면서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입니다. 


순례자의 길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너무도 유명한 시편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편을 하나 꼽는다면 오늘 본문 시편 23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 1절부터 얼마나 아름다운 시구가 시작되는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계속해서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을 읊조릴 때마다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 어린양과 같은 우리를 돌보시는 장면,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니 어린양들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에서 평안하게 풀을 뜯으며 물을 마시는 모습이 우리 마음에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본문이 노래하는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많은 성도들도 이 시편을 사랑하고 애송하다 보니, 주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어 어린양을 돌보시는 장면의 그림이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액자로 걸려 있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저희 집에도 시편 23편의 시구를 그림으로 표현한 액자가 걸려있는데요, 그 액자에는 우리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성도님들이 시편 23편을 낭독하고 암송하면서 떠올리는 장면은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는 장면, 혹은 주님께서 어린양을 품에 안고 계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23편의 전체 내용, 곧 1절부터 6절까지의 모든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성도들의 삶은 발코니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나의 넓은 전망이 아니라, 길을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장면을 마주치는 지속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십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주님께서 누이신 푸른 풀밭에 그대로 누워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푸른 풀밭에서 다시 인도하셔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도록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의 유목민들에게 이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지요. 그들은 언제나 양 떼를 몰고 다니면서 양들에게 풀을 먹일 수 있고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동한다’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3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로움’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처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그 과정에서는 본문 4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등장하고, 때로는 본문 5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수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이 모든 길의 끝에서 우리는 본문 6절이 노래하듯 ‘여호와의 집’에 안전하게 당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을 존 맥케이의 비유를 인용하여 설명한다면, 발코니 위에 푹신한 소파를 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걸음 뒤에서 조망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한가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성도의 삶은 발코니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사이에 끼여 쉴 새 없이 부대끼는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요, 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길’입니다. 

시편 23편을 순례자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이해하면, 이제 본문 1절의 말씀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본문 1절이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 그리하여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그 말씀은 내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는 높은 발코니에 올라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은 모두 피하고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지나게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어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니 나를 괴롭히는 원수와 같은 존재는 처음부터 주님께서 다 물리쳐 주신다는 의미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절이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있지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벗어나 원수들이 가득한 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많지만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나를 지켜 보호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본문 4절은 이렇게 노래하잖아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로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바로 그때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여러분이 원수를 마주치는 바로 그 장소에서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출애굽부터 가나안까지

시편 23편이 묘사하는 신앙의 여정을 한절 한절 묵상하다보면, 구약성경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여정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모세를 부르시지요.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처음 알려주십니다. 모세 이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은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다음 구절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빠져나오고 홍해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이제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감에 부풀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그들 앞에 펼쳐진 신앙의 여정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40년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주 정도 광야를 체험한 것 아닙니다. 그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광야가 그들의 집이고 광야가 그들의 모든 생활공간이었어요.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마실 것이 없습니다. 더위나 추위를 피할 건물이 없습니다. 반면에 광야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이요, 밤마다 찾아오는 살을 에일 듯한 추위와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으로 말미암은 뜨거운 열기입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온 민족이 40년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으니 아말렉 사람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을 약탈하려고 시도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오늘 본문 4절과 5절이 묘사하듯 원수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았어요. 그런데 여러분, 광야 40년이 마쳐가는 바로 그 시점에 모세가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선포하였던 믿음의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먼저 신평기 29장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 2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옷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이 헤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신 8:4). 신명기 2장에는 더 놀라운 모세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신 2:7) 

이스라엘은 분명히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더위와 추위를 피할 장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들짐승의 공격은 늘 있었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말렉 군대의 위협은 늘 있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니,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이제 결론입니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오늘 본문 1절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1절의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믿음의 고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 40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을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하였던 믿음의 고백이지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때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노래했던 믿음의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편 23편의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만났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내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며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는 바로 그때에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니 비록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지라도,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이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가르쳐주지요.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로 소개하시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5절) 

성도들의 인생은 저 높은 발코니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크고 작은 일들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순례자의 길이지요. 그리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었고,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저 안락한 하늘의 보좌, 편안하게 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발코니에서 스스로 내려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의 가장 험한 길을 걸어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시고, 스스로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셔서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평안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신 희생의 결과인 줄 깨달아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의의 길을 향해 힘껏 달려 가십시오. 반대로, 여러분 가운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눈을 들어 먼저 그 길을 앞장서서 가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선한 목자가 되어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그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X2)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절)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의 순례길에 
이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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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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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그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9)

리처드 세실의 글을 인용하며 이번 장은 시작된다. "오늘날 목회에서는 영적 영향력이 눈에 띄게 부족하다. ... 우리는 지나치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취향과 편견에 맞추려 애쓴다. 사역은 중대하며 성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들이 영적인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현실을 꼬집은 내용이다. 거룩한 목회의 직분이 이렇게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E.M. 바운즈는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여기서 헌신이란 "교회에 대한 헌신, 의견이나 특정한 기관에 대한 헌신, 정통 교리에 대한 헌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 그리고 그분의 뜻의 실현"만을 위한 전적인 헌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기로 헌신한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이때 그의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가 된다. "기도는 헌신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헌신의 제조자이다. 헌신의 영은 기도의 영이다." "헌신 없이 참된 기도가 있을 수 없고 기도 없이 참된 헌신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기도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기도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헌신하지 않으니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역행하는 나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기도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헌신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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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2. 5. 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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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여러 선배 목사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마다 목양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양일념”입니다. 열아홉 살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던 저는 목양일념이라는 글씨에 담긴 선배 목사님들의 진심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신학교를 입학했던 저에게는 목양보다는 크고 화려한 사역, 그래서 교회 역사에 한 줄이라도 기록될만한 사역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그 어른들의 다짐, 곧 목양일념이 얼마나 귀한 가치였는지 이제는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크고 위대한 일,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일들보다 화려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지라도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목양의 사명이야 말로 얼마나 값지고 귀한 사명인지요. 이것은 성공주의와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이지만 너무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열심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날이었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는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그를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평생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예수님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 베드로를 불러 이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로 삼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년의 시간이 지난 뒤,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물고기를 낚기 위해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잃어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은 그날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명을 어부라는 상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네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입니다. 곧 목양의 사명이지요. 이 목양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하십니다. 16절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그때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에게 사도의 사명을 재차 확인하시는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베드로는 교회의 사도가 되어 위대한 일을 참으로 많이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에 대해, 율법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베드로의 지혜에 감탄할 정도였지요.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가책을 받고 회개하여 그날에 성도의 숫자가 삼천 명이나 더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사역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대단한 사역을 감당했던 베드로이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고기를 낚는 어부라고 표현을 하든 양을 먹이는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든 그 의미는 동일한데, 곧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여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입니다. 

어떤 분들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영혼 돌봄의 사명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한평생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가 목양일념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목양의 사명이기에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제가 먼저 목양일념의 자세로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베드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던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말씀에서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벧전 2:9)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며 영혼을 돌보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과 사역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핵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 주셨다는 말씀을 들으면, 과연 내가 돌보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필요만을 집중하였던 시선을 돌려서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성도들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며 그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는 권사의 직분을 받으신 분들이 계시지요. 우리 중에는 구역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돌보고 목양하는 구역장의 사명을 받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또 우리 중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모든 역할이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실천하는 너무도 소중한 현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현장 한 곳을 반드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의 가정이지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모의 귀한 역할을 허락하신 분들에게는 자녀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혼을 돌보는 가장 귀한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 모두는 마땅히 목양일념의 자세로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에 앞서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주목하면서 본문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질문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17절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반복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였는데, 그 실패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사랑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두 가지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확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해석과 묵상을 모두 귀하게 여기면서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더욱 집중하여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 귀한 영혼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그 아름다운 길에서 벗어나 화려한 일, 사람들이 칭찬하는 일,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박수 받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목양의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영혼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 이르자,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 예수님께 대답하지요. 본문 17절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을 조금 풀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큰 실수를 하여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러나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세 번의 반복된 질문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이끌어 내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남은 한평생 목양일념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사역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애굽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대신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더 많은 시간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명은 광야에서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이었지요.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권세를 부리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면 40년의 광야 기간이 모세에게는 그렇게 힘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백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었기에 너무도 힘겨운 사역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감당했던 사역이 목양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 11:11-12) 

모세가 묘사하는 자신의 사명은 마치 젖먹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양육해야 하는 목양의 사명이지요. 내가 낳은 한두 명의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목양하는 사명도 너무 크고 힘에 겨운데, 이처럼 어려운 목양을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감당해야 하니 모세는 너무도 괴로워 하나님께 불평하듯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세는 과연 어떻게 40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하나의 대답을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양육하는 목양의 사명을 40년 동안 완수하였던 모세가 이제는 그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바로 여기에 천방지축으로 하나님의 마음도 몰라주고 모세의 마음도 몰라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품고 양육할 수 있었던 모세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물론 힘겨울 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영혼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뜻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비록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많지만, 크게 근심하면서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야기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영혼을 돌보는 그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배우자로, 부모로, 자녀로, 그리고 형제와 자매로 불러주셔서 가정 안에서 식구들을 믿음으로 양육할 사명을 주셨으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가꾸어가는 이번 5월 한 달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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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2. 4. 2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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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구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 목사님이 찾아와 고민을 토로했다. 그 목사님은 권사님 한 분을 심방하였는데 연로하신 권사님은 허리가 아파 많이 괴로워하셨다. 목사님은 권사님의 허리 디스크가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해드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정도 연세에 과연 허리 디스크가 나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는 질문이었다. 후배 목사의 이 경험은 성도들을 심방하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겪는 일인데, 과연 목회자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

 

 

교회 안의 승리주의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한국 교회 안에는 이른바 ‘승리주의’의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에서 승리주의란 고통, 빈곤, 무능 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여기며 신앙의 힘으로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여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위의 경우에 적용한다면, 목사가 성도들을 심방했다면 마땅히 성도들의 건강과 재물과 형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시에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신앙의 힘으로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기도는 물론이요 힘이 부족할 때에는 목회자의 기도를 덧입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회에서는 이른바 ‘기도제목’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성도들마다 다양한 기도의 제목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건강, 재물, 형통, 인간관계 등이 대다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도제목을 묻고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 사이의 만남 속에는 승리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곤 한다.

 

신약성경을 통해 그 시대에도 교회 안에 승리주의가 폭넓게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들’(프뉴마티코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과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소위 ‘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며 스스로가 대단히 높은 영적 수준에 올랐다고 자부하였다. 한 마디로,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든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묘사된 구절이 고린도전서 4장 8절이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고전 4:8a)

 

이 구절에서 “이미”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얻을 최후의 승리를 믿는다. 그런데 이들은 그 최후의 승리를 “이미” 성취한듯 행동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소위 ‘영적인 사람들’의 오류는 과도한(overrealized)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닌데,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성취한 듯 지속적인 성화와 거룩의 삶에 힘을 쏟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사람들의 태도와 사도들의 헌신을 비교하는데, 앤서니 티슬턴은 그 차이를 오늘날의 용어로 이렇게 서술하였다. “사도들은 검투장에서 검투사가 되어서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반면에 고린도교회에 속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방청석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처절하게 싸우는 사도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

 

소위 ‘영적인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대답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들은 하늘의 지식을 이야기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신비한 영적 통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지혜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영적 수준을 자랑하려고 했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의 증거가 삶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사랑을 노래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부활을 선포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이 성령의 은사를 논하는 12장과 14장을 철저하게 상대화시킨다고 지적하였는데, 참된 신앙의 길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며 능력과 성취를 추구하는 승리주의가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며 끝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찾아와 연로하신 성도님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질문했던 후배 목사님에게 한국 교회 안에도 승리주의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그러나 교회의 분위기와 상관 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신앙의 힘은 나이를 역행하는 건강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의 재물도, 자신의 노력을 훨씬 뛰어넘는 성공이나 형통도 아니다. 반대로 신앙의 힘은 연약한 가운데서도 발휘되는 지혜요, 아픔 속에서도 누리는 기쁨이다. 웃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도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교구 목사의 기도는 마땅히 이러한 신앙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이어야 하며, 성도들이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신앙의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공감의 간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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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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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신형섭 교수의 주장은 한결같다.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은 교회학교만으론 불가능하고 부모의 주도적인 역할이 필수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교회학교와 부모가 협력하여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교육목회의 생태계가 필요한데 이는 전교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먼저, 다음 세대 신앙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살펴보자. 현재 한국교회의 구성비율은 성인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성인의 21%가 기독교인인데 반하여, 대한민국 청소년의 3.8%만이 기독교인이다. 선교학의 개념을 빌려 묘사한다면, 미전도종족은 북위 4도에서 40도에 위치한 4/40창이 아닌 4세부터 40세에 해당하는 4/40창에 존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세대 간의 불균형에 대해 자녀 세대의 신앙이 아니라 부모 세대의 신앙이 무너진 증거라고 분석한다. "수치적으로는 다음 세대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부모 세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정상적인 믿음의 부모라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우리 자녀들이 미전도종족이 된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p. 66)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메마른 것은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부모 세대입니다."(p. 71) 최근 교육부서에서 사역하는 신학생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교회학교 결석의 첫 번째 원인이 가족여행이라니, 이러한 분석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이 메마른 가장 중요한 원인이 부모세대의 신앙 붕괴라면,  이에 대한 해법 역시 부모 세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 양육자로 준비되어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주도해야 한다. 저자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핵심이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생활과 분리된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는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부모가 먼저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자녀들에게 가정예배의 시간과 자세를 강요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주입하려는 시도가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모 세대가 자녀의 신앙 교육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가정예배와 성경공부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역량이 요구된다. 여기에 교회의 역할이 있는데, 곧 부모를 신앙 교육의 사명자로 세우는 일이다. 

이 책은 부모를 신앙 교육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교구를 자녀의 연령에 따라 개편하여 교구 사역과 교회학교가 협력하며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수련회나 신앙 캠프 등의 교회학교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부모를 동참시킬 수도 있다. 부모와 자녀가 비전트립이나 전도여행에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가 세례를 받거나 특별히 입교를 할 때 부모가 함께 교육에 참여하여 부모에게 주어진 신앙교육의 사명을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다음 세대의 신앙 전수를 위해서는 부모 세대를 가정에 파송된 사명자로 세워야 한다는 목회적 절박함이 공유된다면, 부모가 자녀의 신앙 교육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방향성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공유되었다면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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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Book Review) 목록

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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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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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 46:5) 

E.M. 바운즈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다." "우리 시대는 아침의 신선함과 이슬을 주님께 드리고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선함과 충만함을 받아 분주한 하루 생활 중에도 기쁨과 힘이 충만한 설교자를 필요로 한다." 

물론, 기도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른 이침에 기도하는 것을 선호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저녁 늦은 시간에 깊이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 특별히 이른 아침에 기도하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린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다. 곧,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찾는 강한 열망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아침 일찍 하나님을 찾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영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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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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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하나의 일화를 전해 들었다. 목사님이 병원에 임원한 환우를 심방하였다. 이분은 스스로의 종교를 개신교라고 밝힌 분이다. 그런데 이분은 최근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으니, 불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듯하여 좋다고 대답하였다. 목사님은 잠시 그분의 이야기에 긍정을 해주고, 이렇게 답변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도 평화를 참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지, 평화라는 의미의 '샬롬'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다. "아~ 그렇네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이미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기독교 안에 가득 담겨 있다는 점을 잊은 채,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눈을 돌리는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처럼 들렸다.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중세 시대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옥죈 암흑의 시대요,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 이성이 암흑의 시대를 뚫고 나온 승리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고대역사에 대한 서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인간성과 이성을 중시 여기는 문화였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이성을 말살시킨 암흑시대가 중세 천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이러한 근대적 성공 스토리가 역사의 왜곡이요, 무신론자들의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문명이 중세 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이 로마제국을 굴복시켰던 기독교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마제국이 이방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고대의 문명이 손실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 문명이 그나마 후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대의 유산을 간직하고 보존했기 때문이다. "4세기 그리고 5세기 초에, 고전 문학의 문화가 마지막으로 꽃 피어난 것은 대체로 교회 교부들의 업적이었다. 즉 당시의 가장 위대한 수사학자들, 가장 정교한 형이상학자들, 가장 혁신적인 문장가들이 교부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p. 104)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적 과학이 태동하였던 모판 역시 중세 시대의 대학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피조세계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던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근대의 과학적 사고를 탄생시킨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트는 근대가 계몽주의 시대였다는 신화가 고대 기독교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리고 제 3부 "혁명: 그리스도교가 발명한 인간"에 이르면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기독교는 세례 의식을 통해 기존의 사고나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완전히 바꾸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로 고대의 영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환희'와 '해방'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교도들의 삶과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로마 제국을 다시금 다신교 사회로 바꾸려 노력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조차 자신의 눈으로 관찰한 사실을 이렇게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무신론을 확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낯선 사람들에게도 베푼 그들의 자선, 죽은 자들의 무덤을 돌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삶을 이어가는 감동적인 거룩함 등이었다." (p. 263) 이는 2세기 후반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목격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말하기를 "옛날 신들의 신전들에게 바친 돈은 순간적 쾌락을 위해 축제와 술 마시기에 낭비되었지만, 교회에 헌금한 돈은 가난한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에게 사용되어,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온전히 장사 지내주고, 늙은이들에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었다"(p. 279-80) 

기독교는 이처럼 기쁨과 해방을 선포하며 이는 성도들의 거룩과 자선의 삶으로 이어졌지만, 데이비드 하트는 그보다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혁명이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곧, 사람의 인격을 발견하고 모든 인간이 신적인 인격을 소유하였음을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세상의 질서가 하나의 피라미드로 조직되어 최상위의 존재인 신은 하위의 존재인 물질세계나 인간과 접촉할 수 없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성육신의 교리와 기독론으로 인간이 신적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존재라고 선포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선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인격을 발견하게 하였고, 나아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교의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승리는 인간의 양심적 행위들 속에 씨를 뿌리는데 성공한 도덕적 직관의 이상스럽고도 비실제적이며 전적으로 이 세상적이 아닌 애타심(unworldly tenderness)이다."(p. 366)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의 이 책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데이비드 하트는 기독교가 초래한 위대한 혁명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사라진 근대 사회에 무엇이 남을 것인지를 끊임 없이 질문한다. 기독교라는 든든한 사상적 토대가 사라진 후, 과연 인격과 애타심이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중요한 가치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또 다른 혁명의 필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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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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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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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E.M. 바운즈는 계속해서 기도에 있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언제나 기도를 길게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짧은 기도가 능력이 없거나 연약한 기도라는 뜻도 아니다. 성도의 삶에는 짧은 기도가 필요한 때가 있고, 짧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과정은 생략할 수 없는 필수 요소다. "우리의 짧은 기도는 그것에 앞서 드려진 긴 기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짧고 능력 있는 기도는 이에 앞서 오랫동안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E.M. 바운즈는 제6장에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하였는지 많은 예를 제시한다. 

기도에 대한 명언 

  • 대감독 테이트, "나는 보다 위대하고 보다 깊고 보다 진실한 기도 생활을 원한다."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나는 나의 오두막집에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오랜 시간을 기도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존 플레처, "나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그의 친구에 대한 인사는 항상 이것이었다. "내가 기도하면서 당신을 만나는가?"
  • 캐논 리돈(Cannon Liddon), "끈질김은 성공적인 기도의 진수입니다. 끈질김이란 몽롱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 해밀턴 감독, "기도를 가장 흥미있고 동시에 가장 필요한 과제로 생각하여 진지하게 준비하고, 또한 꾸준히 지속할 일로 여기고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에서 별로 많은 효험을 이룰 수 없다."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했던 사람들의 예

  •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 새벽 4시부터 8시까지 기도하는 시간에 드렸다. 
  • 켄(Ken) 감독 - 매일 새벽 3시 종이 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 애즈배리(Asbury) 감독 - "나는 할 수 있는 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보낼 작정이다."
  • 사무엘 러더포드 -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다.
  • 조셉 얼라인 - 새벽 4시에 일어나 8시까지 기도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다른 상인들이 일을 하려고 왕래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아, 이 얼마나 수치인가, 나의 주님이 저들의 주인보다 못하단 말인가!"
  • 옛날 감리교도의 기도 - 아침 4시(혹은 5시)부터 개인기도, 저녁 5시(혹은 6시)부터 개인기도 


하루 기도시간 

  • 마틴 루터, "만약 내가 매일 새벽 두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는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 나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가 없다."
  • 앤드류(Andrews) 감독 - 매일 5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에 드렸다.
  • 존 웰취(John Welch, 스코틀랜드 설교자) - 하루 8시간 내지 10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잘못 보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영혼이 3천 명이나 되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요."
  • 저드슨 박사 - 매일 9시, 12시, 3시, 6시, 9시에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주님을 위해 단호히 임하십시오. 이를 지속할 수 있도록 모든 실제적인 희생을 치르십시오. 그대의 시간은 극히 짧다는 것을 명심하여, 그대의 사업과 친구들이 그대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E.M. 바운즈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기도의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기도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새벽부터 3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불가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기에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참된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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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