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2021. 11. 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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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귀에는 매 순간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 모든 소리를 동등하게 처리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지심리학에서는 ‘칵테일파티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운집한 파티장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시끄러운 파티장 안에서도 연인들은 주변의 소음은 무시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큰 불편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칵테일파티 현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콜린 체리라는 분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 과정에는 ‘칵테일파티 현상’이 일관성 있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참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때로는 기쁨의 함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요.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길을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처럼 예배당을 찾아 하나님을 예배하면 함께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TV와 라디오, 최근에는 핸드폰을 통해 나와 상관없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도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귀에는 매일 수많은 목소리와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지요. 그리고 이른바 ‘칵테일파티 효과’는 지금도 우리의 머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무엇을 듣고 무엇은 버릴 것인지 선택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담아 있는 것은 나의 귀가 들은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들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나온 일 년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보다 풍성한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지요. 올해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달려온 10개월 동안, 우리의 귀에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찌 감사할 것들만 있겠습니까? 지난 10개월 동안 여러분의 삶에 등장한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 가운데 불평하고 걱정할 거리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처지와 환경에 대한 불평과 근심으로 가득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나에게 들린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선택하여 듣고 마음에 쌓아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평과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은 모두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주셔서 나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무너트리는 생각과 이야기는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언어들만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충만

오늘 본문에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여러 권면이 등장하지요.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오늘은 본문의 여러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권면을 감사라는 주제로 살펴보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을 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충만’이요, 그 두 번째는 ‘찬양’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실천’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라 하라”(15a절) 계속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b절) 하나님께서 성도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의 목적이 등장하네요. 그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마음의 평강이지요. 하나님께서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골로새교회 성도들이여,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십시오’라는 권면입니다.

본문 16절에는 또 하나의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야기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은 넓은 의미로 신구약성경이라고 적용할 수도 있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15절과 16절의 말씀을 종합하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너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하고, 너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장한다, 혹은 풍성하게 한다는 것은 거의 동일한 의미죠.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지요.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잘못을 행할 때에도, 심지어 우리가 크고 작은 죄를 범할 그때에도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온전히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는 것을 넘어,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며 기도하는 바는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 곧 예수님의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하며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런 점에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충만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것이요,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해지는 것이요,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충만한 삶을 위해, 지금도 여러분의 귓가에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겠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에 집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온전히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며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감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찬양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5절)

바로 여기에 “감사하는 자”, 곧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 등장하지요. 눈치 채신 것처럼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이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자, 그러면 감사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절)

본문 15절과 16절에 감사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감사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기보다는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품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참 고맙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라는 권면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곧,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충만의 삶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해지면 그 충만한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합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지요. 나아가 감사하는 사람은 그 충만한 은혜를 자신의 입을 열어 표현합니다. 바로 그것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입니다.

본문 16절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가지 용어는 그 지시하는 바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는 주로 구약의 시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할 때 시편을 외우곤 했거든요.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도 시편을 찬양으로 부르는 것은 예배의 매우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또 ‘신령한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노래는 대중이 부르는 통속적인 민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노래’라고 했으니 사람들에게 익숙한 멜로디나 민요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를 덧붙인 노래를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본문 16절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16절의 마지막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여러분의 입술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10개월의 은혜를 기억하며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찬양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의 찬양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실천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첫번째는 충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특징, 그 두 번째는 찬양이지요. 자, 이제 감사하는 사람의 마지막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도 감사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러면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의 앞 구절이지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우리는 이미 감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과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성령의 충만을 누립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마음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니 그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이 묘사하는 감사하는 성도의 특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의 모습은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인 ‘찬양’은 주로 예배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지금처럼 여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표현하지요. 또 가정에서 식구들이 함께 예배할 때, 혹은 자신의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 이외에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이 ‘실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곧 나의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지요.

2000년 교회사에서 매우 존경받는 성 안토니우스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AD 3세기와 4세기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다짐하며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생을 바쳤던 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르지요. 성 안토니우스는 당시 사막의 수도사들 가운데 가장 혹독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훈련하였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 안토니우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우스, 너의 영혼은 알렉산드리아에 거하는 한 구두 수선공만큼도 완전하지 못하구나.” 안토니우스는 깜쪽 놀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 구두 수선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지요. “자, 이리로 와서 저에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기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러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선생님, 저로 말하면 선행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일 뿐입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가 거주하는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제 일을 시작하는데,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해서 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늘 거짓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은 진실하게 지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보잘것 없이 시간을 보낸 때에는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교훈합니다. 이것이 제 단순한 생활의 전부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5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분별하고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분별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하게 하십시오. 나아가 여러분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마음의 진실함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거짓을 멀리하십시오. 사람들과의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십시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교훈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충만과 찬양과 실천의 삶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감사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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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11. 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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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지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는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비유를 사용하는데, 그 가운데 한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에 또는 단 기간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한 두 가지의 중요한 생각이나 행동 혹은 특별한 체험이 잠시 행복한 감정이 들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삶 전체를 행복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되지 않는다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데, 이번에도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의 예가 등장해요. 그 장군에게 주어진 자원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군인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전쟁에서 군마로 활용할 수 있는 말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군인들을 먹일 수 있는 군량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장군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군대로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전략을 짜는 일이 중요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입니다. 제화공이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의 종류, 가죽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제화공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가장 훌륭한 구두를 만드는 일이죠. 우리가 나의 삶을 행복으로 가꾸는 과정이 꼭 이와 같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처지와 형편이 다 다릅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어진 것들 것 나에게는 이렇게 부족하냐고 불평하면 내 삶을 행복으로 바꿀 수 없어요. 그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가장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가장 적절한 전략을 짜는 장군처럼, 마치 주어진 가죽을 가지고 최고의 구두를 만들어내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내용은 이후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온 행복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형편을 탓하기보다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나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교훈이지요.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와 같은 가르침에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로이의 마지막 왕이었던 프리아모스입니다. 그는 트로이의 왕으로 지혜롭게 자신의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통치로 말미암아 트로이는 번영하였고 프리아모스 왕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년이 되어 우연히 일어난 트로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장자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고 말지요. 프리아모스 왕은 적진에 들어가 비굴한 모습으로 아들의 시신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프리아모스 왕은 젊은 시절에는 행복했지만, 외부로부터 큰 불행이 거듭되면서 노년에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들었지요. 그렇게 열심히 성실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오늘 나의 행동이 내일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불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추구하던 행복이 얼마든지 빼앗겨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까요?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던 프리아모스 왕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불행이 겹쳐 몰려오니 그의 노년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헛되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우리 신앙인들이 애송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본문 1절과 2절은 매우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절) 

여기에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다’는 말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네요.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2a절) 

이 짧은 구절에 ‘헛되다’는 말이 세번이나 나오는데 그 의미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구약 전도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의 이 구절에서 헛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벨’입니다. ‘헤벨’이라는 단어는 의성어로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숨소리를 ‘헤벨’이라는 발음으로 나타내었던 것이죠. 이 단어가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해서 수증기, 연기, 안개와 같은 구체적인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추상적인 개념까지 포괄하게 되었는데 무상 혹은 덧없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추상적 개념과 관련하여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헤벨’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보면 독특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방의 우상을 이야기할 때 ‘헤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복을 받기 위함이지요. 정성을 다해 우상을 숭배해서 그 우상의 도움으로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을 받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방 우상에 대해 ‘헤벨,’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에게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우상은 우리 인간에게 단 하나의 복도 가져다줄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들은 ‘헤벨,’ 헛된 우상입니다. 

구약의 전도자(코헬렛)는 인간의 일생이 ‘헤벨,’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우상을 열심히 숭배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의 힘으로는 우리의 행복으로 이끄는데 큰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 9:11) 

우리는 마땅히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달리기 연습을 열심히 해서 빠른 경주자가 된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고 명철하다고 하여 큰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없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헤벨,’ 아침 안개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같이 헛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b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잠, 곧 휴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네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수고하는 인생, 고생하는 인생, 아침 이른 시간부터 늦은 밤까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다른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셨잖아요.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열매가 없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신 분도 계시잖나요?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의 구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는 말씀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 번역이 존재하지만, 표준새번역성경의 번역만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삶은 헛된 인생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가꾸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 수고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수고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노력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잠을 자고 있는 그때도 베풀어 주시는 넘치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하면서 그 축복의 대표적인 예로 가정의 행복을 말합니다. 시편 127편이 시작하는 1절부터 가정에 대한 소재는 다루고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1a절) 여기서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계속해서 3절부터 5절까지 자녀에 대한 내용을 노래하지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가정 생활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가정의 행복만큼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수고가 그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영역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정의 행복에 있어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아니지요. 가정의 시작은 결혼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를 찾기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수고할수록 나에게 적합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수고와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의 자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가정생활은 인간의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가정생활만큼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헛된 영역도 없어요. 그리하여 시편 127편은 인간의 행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가정의 행복이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3절) 

가정의 행복,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

시편 127편은 크게 두 가지를 노래하지요. 첫째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데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헛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만이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시편 127편의 주제를 정리하고 나면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와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복음의 진리도 이처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는 모두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고행을 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참선을 하고 철학과 윤리와 종교를 제 아무리 연구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인간이 도저히 찾아 나설 수 없는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X2)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주어진 군대로 최선의 전략을 짜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요. 행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수고에는 너무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행복론을 주장한 뒤 약 500년이 흘렀을 때,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행복한 삶>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도들에게 행복한 삶을 위해 권면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이라는 책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그쳤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면 이제는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의 진리를 더욱 확신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2절, 표준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가 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반드시 행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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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10. 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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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1년에 출판된 책 가운데 <공간의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코로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나아가 전염병이 앞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어놓고 있지요.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주의 형태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간의 미래>라는 책에서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생활하는 집의 공간이 좁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집은 코로나 이전이나 코로나 이후나 평수가 똑같은데 왜 집의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까? 저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평일 낮시간에는 식구들이 학교나 직장을 나갔습니다. 주말에만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이 확대되었고 평일 낮에도 가족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이제 집은 가족들이 학교와 직장을 다녀온 후 쉬는 장소만이 아니라, 직장인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업무의 장소가 되고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듣는 학습의 장소도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가족들이 집에서 해야 할 활동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동일한 크기의 집이지만 가족들이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더 좁아졌다는 설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혹은 과거보다 더 넓어졌는데 실제로 느끼는 공간은 좁아지는 이러한 현상이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방에 요를 깔면 침실이 되었습니다. 그 방에 요를 치우고 밥상을 놓으면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밥상에 음식을 치우면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되었습니다. 방 하나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가정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다양한 물건과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8시간만 사용하는 침대가 넓은 공간을 하루 24시간 차지하고 있지요. 거실에 TV를 놓으니, 가족들이 함께 앉아서 TV를 볼 수 있는 소파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을 놓을 별도의 공간이 필요해졌습니다.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을 구비해 놓을 별도의 공부방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냉장고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언제부턴가 김치냉장고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세탁기에 이어 건조기도 생활필수품이 되어 한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만큼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부족한 공간을 늘리기 위해 편법이지만 발코니를 확장하여 실내공간을 넓혔습니다. 그렇게 공간이 확보되니 우리는 다시금 물건을 사들이고 우리 집의 공간은 그만큼 더 좁아지게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넓은 집을 소유했지만 역설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우리가 함께 묵상하는 호세아서는 1장부터 3장까지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4장에 접어들어,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첫 일성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한마디로 묘사하는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는 “없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호세아 4장 1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세번이나 등장하지요.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첫째로, 진실이 없습니다. 둘째로, 인애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덕목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보존하여야 할 가장 귀한 가치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지요. 

여러분, 호세아가 활동하였던 시대 북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지난 세 번에 걸쳐 호세아서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미 호세아가 활동했던 시대가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북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였고 그때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부강했던 시대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왕하 14:25) – 이것은 마치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가 늘어나니 정작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리할 자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루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는 돈을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지요. 그때 추기경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초대교회의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걸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은과 금이 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외치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은으로 촛대를 만들고, 금으로 교회의 기둥을 세우며, 대리석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 역시 과거와 비교한다면 큰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의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고, 우리 교회는 재정을 사용하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요, 감사한 일이지요. 그리나 우리의 소유가 늘어날수록, 우리에게 가진 것이 더 풍성해질수록 중세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그로 말미암은 재물과 권세는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사라지고 없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없고 없고 없다”라고 평가받지는 않겠습니까?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린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와 같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우리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소유가 늘어나자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과 인애가 텅 비어지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눈에 보이는 소유물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호 3:4)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 왕도 없어집니다. 지도자도 없어집니다. 제사도 없어지고, 주상도 없어지며,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였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예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 뒤에 베풀실 새로운 구원의 역사도 말씀하시네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 3: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점에서 호세아 4장 5절의 뒷부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참된 회복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회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도, 지도자도, 제사장도, 눈에 보이는 모든 자랑거리를 사라지게 하신다는 예언 하셨습니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나라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나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회복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온전히 성취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옛날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로보암 시대,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바로 그것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향한 진실, 우리의 이웃을 향한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물건들이 가득 쌓일수록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할 공간은 줄어들기 마련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가정에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공간의 미래>라는 책의 저자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의 관심을 옮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여 나의 사적 공간이 집에 가득 쌓아놓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 가정의 공간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가치 있는 가정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공급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움쳐지려 노력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미 받은 은혜에 자족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손에 금과 은은 부족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능력이 우리 모두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19943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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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10. 2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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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시편 34편에는 표제어가 붙어 있지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여기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을 통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블레셋의 성읍이었던 가드를 다스리는 아기스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골리앗이라는 그 누구도 쓰러트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블레셋의 장군 앞에서 사기를 잃고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지켜보았던 다윗은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의 손에는 가장 익숙한 무기였던 물매를 가지고,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큰 승리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윗의 승리를 오히려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시기심에 이끌려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 다윗은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지역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런데 다윗 자신이 전쟁에서 이겼던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군이었잖아요. 당연히 블레셋의 가드를 다스리던 아기스 왕은 다윗을 보자마자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잡아 죽이려 하였지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합니다. 나 다윗이 당신에게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요. 다윗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미친 척을 하였는지,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윗이 실제로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다윗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네요.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천천히 읽어보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다윗의 경험을 다윗 자신이 스스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바로 본문 6절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6절) 

본문 6절의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체험을 노래하는 구절이지만, 동시에 본문 6절은 다윗 개인의 인생을 묘사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의 체험은 지금까지 시편 34편을 노래하였던 수많은 신앙인들의 체험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경험아기도 하지요. 

자,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첫번째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한 단어로 표현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너무도 곤고했습니다. 우리는 크지도 않은 재산을 잃어버려도 우리의 삶이 곤고해집니다. 계획한 바를 이루지 못할 때도 우리의 삶은 곤고해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다니고 있어요. 심지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갔더니 거기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뿐이네요. 그러니 다윗의 삶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여러분, 다윗이 지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이렇게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무엇인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쳤기에 블레셋 나라에서 생명을 구걸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어서 지금 곤궁한 상황에 빠졌나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상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펼쳐진 현실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도 미친 모습을 보이며 생명을 구걸해야 하는 곤고한 상황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 6절은 다윗의 경험을 묘사하지만 동시에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행동한 결과로 우리 성도들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렇게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큰 아픔과 시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왜 나의 삶이 이토록 곤고한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어요.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혹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는 것인지 우리 인간은 다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삶은 곤고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의 인생도 곤고하였고, 지금까지 시편 34편을 노래하였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형통의 삶보다는 곤고한 삶을 살아왔고,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곤고한 삶을 결코 피해 가지 않습니다.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두번째는 “여호와께서 들으시고”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다윗은 곤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기도를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다윗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 그 순간에도 곤고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 기도도 듣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시편에는 다윗의 이름이 표제어로 등장하는 수많은 시편들이 있지요. 다윗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사울의 모든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구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이 살아 움직입니다. 아직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도 그곳에서 살해의 위협을 느낍니다. 여전히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나 곤고한 삶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지요. 물론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곤고한 삶이 형통의 삶으로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곤고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지금도 듣고 계십니다. 

다윗이 묘사하는 자신의 경험, 나아가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 그 세번째는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큰 아픔을 당하며 마음이 곤고하고 심령이 곤고할 때를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셨다고 지금 당장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기에 마침내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체험이었고, 시편 34편을 노래하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다윗을 따라 본문 6절의 말씀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절)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34편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곤고하여 부르짖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성도님들 중에도 형통한 날을 살아가기보다 곤고한 날을 살아가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요? 마음이 곤고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보지만, 여전히 나의 삶은 형통으로 바뀌지 않아 괴로운 시간을 여전히 보내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심령이 곤고한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믿음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곤고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지금도 들어주시며, 마침내 여러분을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찬양으로 초대

다윗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시편 34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1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제안하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2절) 

다윗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이러한 찬양을 들으며 ‘곤고한 자들이’ 기쁨을 얻게 되네요. 그리고 다윗은 3절에서 자신의 곁에 있는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절) 

여전히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곤고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향해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을 향해서 권면도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절) 

이 구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 그리고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받는 복’을 노래하고 있지요.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얼마나 감미롭고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풍성한 행복으로 감싸는지,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책이나 글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으며 단지 실제 경험을 통해서 맛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면 여러분, 지금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가 지금은 큰 고통을 당하며 곤고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으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삼으신 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젊은 시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재물과 큰 권세와 큰 명성을 얻게 해 주신 그 복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저는 본문 8절의 말씀을 아무리 묵상하고 묵상하여도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선하심,’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받는 복’은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출세나 그가 왕으로 누린 권세나 재력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표제어를 다시 보세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어요. 심지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은 여전히 기세 등등합니다. 사울을 피해 이스라엘을 벗어나니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하여 지금 간신히 쫓겨나 생명만 붙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의 상황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서 모든 고통과 환란이 사라지고 그의 앞에 형통의 대로가 펼쳐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은 여전히 곤고합니다. 여전히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곤고한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에 누리는 복 아닙니다. 오히려 곤고한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입니다. 비록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비록 곤고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지만, 나의 부르짖음에 지금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사방이 꽉 막혀 어디로 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나를 붙잡아주셔서 또 한고비를 넘기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여전히 형통의 삶이 아니라 곤고한 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8절) 

성도 여러분, 어느덧 올해 2021년도 어느덧 10개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난 10개월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삶도 곤고하지 않으셨나요? 물론 나의 잘못과 실수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우리의 삶에 곤고가 찾아오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난 10개월을 다시금 기도하며 되돌아보면 나의 곤고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지 않으셨나요? 곤고한 삶을 살았기에 바로 그 자리에서 곤고한 자의 하나님게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위로를 누리지 않으셨나요? 우리의 삶은 여전히 형통의 삶보다는 곤고한 삶에 가깝지만 곤고한 가운데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사방이 막혀버린 듯한 상황에서도 피할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지난 10개월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다윗과 함께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에게 곤고한 삶이 멈추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를 찾아와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가십시오. 나의 삶이 형통의 삶으로 바뀌지 않아 여전히 부르짖고 있을지라도 지금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마침내 모든 환란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하나님이 되시니 곤고한 가운데 부르짖는 여러분을 그 모든 환란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이요,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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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가복음 강해2021. 10. 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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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 난해한 가르침을 기독교가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육신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한다면, 그래서 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가 찾아 올라가야 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믿는다면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육신의 가르침은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오라”고 요청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성육신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는 여러 전도와 선교 역시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전도와 선교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전도 행사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으니 많이 오셔서 많이 참석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때로는 마케팅의 원리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업이 상품을 홍보하듯 전단지나 홍보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한 마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갑니다. “오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전도와 선교의 방식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제약을 받는다고 아쉬워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성도들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 예배했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성육신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리가 더욱 안타까워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분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섬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마가복음의 핵심 문장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인자가 온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곧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두 구분으로 구분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입니다. 이른바 소외계층, 빈곤층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이유로 등장하는 섬김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지역에서 몸이 병든 환우들을 섬기셨고,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이들을 섬기셨고,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섬기신 수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한 대목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첫번째 청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이었어요. 당시는 마이크 시설도 없고 음향시설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셨지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군중을 상대로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제자들과 만나 그 말씀을 보다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신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도 피곤하셨겠지만, 예수님을 곁에서 수행하였던 제자들도 이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워라. 지금 바로 갈릴리 바다 반대편으로 가야 되겠다.” 제자들은 그 밤에 왜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항해를 합니다.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아둥바둥하고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간은 취침해야 하는 한 밤중이었어요. 큰 광풍에 배 안이 온통 바닷물로 가득한 순간에도 깊이 주무셔야 했던 밤시간이었다고요. 제자들이 다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도착했던 곳은 다름 아닌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이른바 ‘거라사의 광인’으로 알려진 그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은 그 밤에 배를 타고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셔야 했던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야 했던 사람도 많았으며, 예수님께서 봉사하며 섬겨야 할 사람이 언제나 예수님의 주변에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만큼은 풍랑을 헤치면서까지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 들린 그 한 사람을 섬기시기 위해, 그 한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기 위해 찾아가셨어요.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 맞은 편에 위치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치유를 선포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밤에 굳이 풍랑을 맞으면서까지 갈릴리를 건널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으시잖아요. 굳이 바다를 건너가시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보내어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이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지요. 저 하늘 보좌 우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여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 보좌 우편에서 능력으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요, 그 밤에 갈릴리를 건너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신 분이요,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대속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을 말씀해주시지요. 그 두번째 목적은 “대속”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마가복음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곧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섬김’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변방이었던 갈릴리를 떠나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마가복음의 후반부, 보다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8장 이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곳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오늘 본문 10장 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려 함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0장 45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대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보라고,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지었느냐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간에 대한 공정한 판단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겁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때 대속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에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곧 구원자는 대속의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인류의 구원자가 고난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구약성경의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막 10:4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너희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섬김과 대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대속과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기도 하시거든요.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2)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섬김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대속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 10:43a)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너희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너희는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재물의 힘과 권세의 힘과 사회적 지위의 힘을 총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권세를 부리려 하고, 서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10147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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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1. 10. 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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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에서 전도자(코헬렛)가 강조하는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다. 그러나 저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보다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도자가 강조하는 지혜의 실천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오늘을 사는 지혜

전도자가 관찰한 이 세상은 온갖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전도자는 이 사실을 보다 담대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굽게 하셨다!(전 7:13) 하나님께서 세상의 부조리를 허락하셨다면,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비조리를 말끔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해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그 무엇보다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인간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먼 미래는 물론이고 가까운 미래도 알 수 없다. 미래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3장에서 말씀하였듯,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측량할 수 없다(전 3:11). 그러니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바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바르게 대처하는 지혜다. 형통한 날에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요, 곤고한 날에는 일어난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자세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하여 일어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겸손을 요구하신다. 

전도자는 계속해서 세상의 부조리를 폭로한다. 의인 중에도 멸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인 중에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전 7:15). 이 정도의 의인이라면 마땅히 복을 누려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반대로 모두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악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도 복을 누릴 때가 있다. 이처럼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여 한쪽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역설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전 7:16) 

유대교 해석자들은 ‘지나친 의로움’을 하루 종일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혹은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않고 아각 왕을 살려주었는데, 이것은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행동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전도자는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도 말라고 권면한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혜를 찾았던 전도자 자신의 예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권면을 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전도자는 의로움이나 지혜에 있어서도 지나치지 말라고 권면한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 7:18)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것(그것이 비록 의로움이나 지혜라 할지라도)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열린 마음을 품는 것이다. 


내일을 대비하는 지혜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손을 놓지 말라’는 전도자의 권면을 구체적인 실례에 적용되는 대목이 전도서 11장에 등장한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1) 

여기에서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표현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해상무역에 투자하는 행위라고 이해한다. 떡을 물 위에 던지는 행위를 ‘투자’라고 해석하면, 뒤따라오는 구절은 그로 말미암아 큰 수익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을 뜻할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선행은 반드시 보상받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전도서 11장 1절은 투자 혹은 선행을 적극 권장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11장 2절은 투자와 선행의 방법을 알려준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 11:2) 

사람들에게는 재앙의 때가 임하기 마련이다. 재앙이 임하는 것도 다 때가 있지만 인간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미래에 임할 재앙의 때를 준비할 수 있는가? 지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행을 행하되 여러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지금 기회가 주어졌을 때 투자하되 언제 수익을 얻을지 모르니 오래 기다리면서 여러 곳에 투자해야 한다. 되도록 많은 곳에 투자하고,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면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의 날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전도자가 가르치는 지혜다. 그리고 전도자는 선행이든 투자든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전 11:4) 

풍세를 살펴 최고의 날을 기다리다 보면 파종할 시기를 놓친다. 구름을 바라보며 농부가 원하는 건조한 날씨를 기다리다 보면 추수의 때를 놓친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투자처를 찾거나 선행을 베풀 좋은 기회를 기다리다 보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알 수 없으니,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투자하고 기회가 있을 때 선을 행해야 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 11:6) 

전도자의 가르침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기한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지혜를 가르친다. 어디에서 열매를 맺을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라. 이것이 전도자가 가르치는 성도의 지혜로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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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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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1. 10. 1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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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처음(1장 2절)과 마지막(12장 8절)에 히브리어 ‘헤벨’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과 세 번씩 사용하며, 전도자(코헬렛)의 사상을 ‘헤벨’로 요약한다. 의성어로 시작된 이 단어는 추상적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헛됨’(vanity)과 ‘부조리’(absurd)다. 전도서가 관찰한 해 아래에서의 삶은 헛됨이 가득한 세상이요, 부조리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러면 헛됨과 부조리가 넘치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곧, 전도자가 가르치는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가? 


때를 따라 지으셨다

전도서의 매우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는 전도서 3장 1절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 

전도자가 때와 기한을 강조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선(善)이나 절대적인 악(惡)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지금 선하게 보이는 것도 때와 기한이 적절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곧 선과 악에 대한 결정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만사에 때가 있다는 전도자의 선언은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도서의 지혜는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때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도 주셨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피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때를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때를 분별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시기와 때를 정하여 그에 따라 운행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전도자의 지혜가 시작된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 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4) 


예배자의 자세

전도자의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전도서의 본문은 예배자의 자세를 가르치는 전도서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전 5:1)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예배를 위한 행위다. 비록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여 발걸음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표현은 당연히 순종을 의미한다. 말씀에 대한 진실한 순종이 우선이요, 제물을 드리는 것은 그 나중이다. 계속해서 전도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 교훈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 5:2)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표현이 강렬하다.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의 기한과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과 그 정해진 시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니, 하나님을 향한 기도 역시 경외의 마음을 품고 행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전도자의 교훈은 단순하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을 적게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마 6:7).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말이 많으면 실수가 생기듯(전 5:3),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중언부언하면 어리석은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도자는 서원한 것을 반드시 준행하라고 강조한다. 여기에 지혜와 대조되는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가 등장한다. 하나님께 서원하였다가 갚기를 더디 하는 경우다(전 5:4). 서원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없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이 세상이 헛되고 부조리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헛됨과 부조리가 발생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들의 세상이 해 아래의 삶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와 때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이것이 전도자가 역설하는 지혜요, 구약의 지혜문학이 가르치는 지혜의 핵심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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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1. 10. 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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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의 마음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전도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그 마음의 열정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불처럼 타올라야 주님의 일에 충성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전도사님은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의 교수님과 학생들이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다. 바비큐를 위해 불을 피우며 교수님은 이런 교훈을 주었다. “마른 장작에 힘 있게 타오르는 불꽃으로는 고기를 맛있게 구울 수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고기를 태워버리죠. 그러나 불길이 잦아들고 장작이 숯불로 변하면 그제야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구울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여러분들은 지금 숯불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로써 전도사님의 고민은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이후, 공원에서 바비큐를 구울 때마다 전도사님은 그날의 교훈을 떠올리며 자신이 타오르는 불꽃인지, 아니면 은은한 열기를 발하는 숯불인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일상의 사물이 과거의 기억과 교훈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 그 사물이 가까이 있다면 더 자주 그날의 교훈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구(敎具)를 폭넓게 사용하셨다.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으니 제자들의 머리 위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공중의 새를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예수님은 계속해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선을 돌려 주변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시간은 어느덧 흘러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고 더 이상 제자들의 곁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다. 사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무엇하나 풍족하지 않았던 그들은 시시각각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를 바라보며 주님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바쁘게 길을 걷으면서도 자신의 발길에 스치는 백합화의 향내는 주님과 함께 했던 추억을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비록 주님은 그들 곁에 안 계시지만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심을 그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예수님의 실물 교육: 어린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사용하셨던 또 하나의 중요한 교구(敎具)가 어린이였다. 하루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라는 질문을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것인데,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몰렸다. 그 열두명은 자타가 인정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단번에 무너트리는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중요한 가르침을 제자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 중요한 교구를 하나 사용하셨다. 이때 사용하신 도구가 ‘어린이’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6) 

예수님 시대에 어린이는 사회적 등급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속하였다. 그 부모에게는 귀한 자녀이지만, 다른 사람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결정할 권리나 특권이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는 가장 작은 존재요,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들의 모임 한 중앙에 예수님은 어린이를 세워주셨고, 주님께서 친히 안아 주셨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도, 안드레도, 요한도 주님께서 한 중앙에 세워주신 일이 없었는데 아무런 권한이나 주도권도 없었던 어린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대우해주셨다. 제자들의 눈에 잊을 수 없는 이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그 모임의 중심에 세워 주시고 친히 안아 주셨던 것처럼, 세상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자를 영접하여 섬겨야 함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평소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의 눈앞에 어린이들이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3) 

한글 성경에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주체는 당연히 어린이들의 부모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문장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였다. 제자들은 얼마 전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채,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어린이들과 그들을 데려온 부모를 대하였다. 그것은 정중한 거절이 아닌 “꾸짖음”이었다. 제자라는 자신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들을 꾸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제자들은 예수님께 혼쭐이 났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며 크게 노하셨던 예수님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는 자신들을 향해 크게 노하셨으니 이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는 크게 화를 내셨다. 그러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어린 자녀는 또다시 받아들이고 축복하여 주셨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6)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 분명히 각인되었다. 제자라는 이름, 사도라는 위치, 교회 지도자라는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주님께서 화를 내며 혼을 내시지만 아무런 권리도, 특권도, 결정권도 없는 어린이는 주님께서 안아 주시며 축복하셨던 그날의 장면이 말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지위가 높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을수록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성도를 품고 섬기며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어린이를 마주칠 때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안아 주셨던 어린이는 대략 몇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 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이디온’만으로는 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 주셨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의 힌트를 준다. 주님께서 그 아이들을 안으신 채 안수하여 주셨으니, 한 팔로 안을 만한 정도의 어린이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미취학 어린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교회를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목양하는 동안, 제자들의 눈 앞에는 언제나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젉은 엄마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직은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없어, 하루 24시간 엄마의 손을 놓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 꼭 그 또래의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안아 축복해주시지 않았던가. 제자라는 지위에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은 사도라는 권위 있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무명의 여인들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5)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사도들은 또다시 작은 자를 품어 안으셨던 주님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마음도 점검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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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1. 10. 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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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전도서 연구 01”에서 이미 다루었다(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그러면 전도서의 저술 연대는 언제일까? 성경 내에 구체적인 정보가 희박하기에 저술 연대 역시 추정에 의지해야 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전도서 안에는 최소한 두 명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는 오랜 시간의 편집 과정을 거쳐왔다는 의미인데, 학자들 사이에 이견은 존재하지만 최종 편집의 시점은 대체적으로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론하고 있다. 


그리스 사상: 무한한 가능성과 성공주의

전도서의 최종 편집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때가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후 그리스는 세계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군사적 우위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뛰어났던 문명을 이룩하였던 그리스의 제국주의 정책은 유대인들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사회 역사학자 로스토브체프(M. Rostovtzeff)는 그 시대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지배적인 정신은 인간의 무한한 능력과 그들의 이성에 대한 신뢰로 특징된다.” 사람들은 낙관주의 세계관에 심취하였고, 도전과 성공을 향해 진취적 기상이 강조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였던 그리스 문화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견지하였던 여호와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대사조였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믿던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었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참된 행복의 길이 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도 그리스의 문화에 편승하였음이 분명하다. 

전도서의 저작 시대가 기원전 3세기라면,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전도자)은 그리스 문화가 유대인들의 전통적 신앙을 뒤덮는 역사적 현장의 산 증인이었을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가르쳤던 코헬렛은(cf 전 12:9-10) 인간의 가능성과 그로 말미암은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번영 속에서도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린 사회적 억압구조,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차별, 노동 착취, 개인 수공업자의 파탄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그리스의 지성인들이 설파하였던 낙관주의의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전도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강조하며 선포하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낙관주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부조리를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세상

전도서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구절은 단연코 1장 2절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여기에서 ‘헛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는 ‘헤벨’인데, 숨소기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시작하여 숨, 안개, 수증기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나아가 추상적 개념을 표현할 때는 헛됨, 무상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헤벨’의 추상적 개념에 대해 영어권 학자들 가운데 전통적인 번역인 ‘헛됨’(vanity)보다 ‘부조리’(absurd)로 번역하는 이들이 있다. 폭스라는 학자는 ‘헤벨’의 의미에 대해 “원래 함께 잘 어우러져 화음을 내야 하는 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할 때, 혹은 둘 다 옳은 원리들이 융합되지 못하여 비롯되는 갈등/모순”이라고 설명한다. 전도서를 계속 연구하다보면, 1장 2절에 다섯 번이나 강조된 ‘헤벨’의 추상적 의미를 ‘헛됨’과 ‘부조리’ 두 가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부조리도 지적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전 3:16)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재판석에 악이 존재한다. 해 아래에 학대가 가득하다. 여기서 학대란 학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요, 학대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잘못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억압과 징벌을 받는 상황을 뜻한다. 곳곳에 학대가 자행되고 있지만, 참된 위로자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코헬렛이 관찰한 해 아래의 세상이었다.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는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내 허무한 날(부조리한 세상)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7:15)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부조리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부조리하도다) (전 8:14) 

전도자가 부조리한 세상을 폭로하는 여러 구절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전 9:13-16) 

큰 군대가 성읍을 에워싸고 공격할 때 한 사람의 지혜는 그 성읍을 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던 요압이 반역자 세바를 잡기 위해 아벨 성을 쳤을 때 한 지혜로운 여인으로 말미암아 말머리를 돌렸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cf. 삼하 20:14-22). 지혜로운 여인에 대한 이 이야기는 지혜가 얼마나 큰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도자는 성읍을 구한 지혜로운 사람이 가난한 삶을 살았으며, 또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전통적인 격언을 인정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의 지혜는 멸시를 받는 현실을 강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처럼 부조리로 가득하다면, 신앙인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코헬렛은 먼저 세상의 부조리를 인정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야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의 참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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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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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1. 10. 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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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전도서 1장 2절의 말씀일 것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이 문장은 전도자(코헬렛)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내레이터가 전도자의 교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으로, 내레이터는 전도서의 가장 처음(1장 2절)과 마지막(12장 8절)에 이 문장을 배치하였다. 마치 전도서의 모든 말씀을 이 두 문장이 감싸고 있는 듯한 형태다. 


“헛되다”(헤벨)

전도서의 핵심 개념인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벨’이다. 헤벨은 숨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시작된 낱말이다. 그러므로 헤벨의 1차적인 의미는 ‘입김’이다. 동시에 안개, 수증기, 연기와 같은 가시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것이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내면서 무상, 덧없음 등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헤벨이 사용된 용례를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헤벨)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헤벨)보다 가벼우리로다 (시편 62편 9절)

사람은 헛것(헤벨)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편 144편 4절)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헤벨)니라 (잠언 21장 6절) 

‘헤벨’에 대한 구약성경의 용례에서 주목할 점은 이방 우상을 ‘헤벨’에 비유한다는 점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조롱거리이니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렘 51:17-18) 

전도자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헤벨)고 선언한다. 이방 우상을 섬기는 것이 헛되듯 인간들의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뜻이다. 전도서 1장 2절은 ‘헤벨’을 다섯 번이나 반복한다. 성경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는 강인함을 상징한다. 미국 국방부의 건물도 오각형이라는 점을 기억해보라(Pentagon). 전도자는 이처럼 강한 어조로 모든 것이 헛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간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선언(1장 2절) 이후,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된 근거를 제시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 1:3) 

여기에 전도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3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 ‘해 아래’는 창조주와 구별되는 피조물의 삶과 운명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인간은 ‘해 아래’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해 아래’는 헛됨(헤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수고’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모든 노력이다. 전통적인 지혜는 수고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가르친다. 만일 충분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도자의 주장이다.
  • ‘유익’(이트론)은 ‘헛됨(헤벨)의 반대개념이다. 전도자가 인간의 수고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수고가 유익한가? 아니면 헛된가? 

 

전도자는 위의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지혜를 얻으려는 수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지혜를 많이 얻어보았고(1:16), 지혜를 얻기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1:17a). 그러나 그 모든 수고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1:17b). 바람을 잡으려 한다는 것은 ‘헛됨’(헤벨)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전도자는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즐거움과 쾌락도 살펴보았다(2:10). 그러나 전도자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2:11). 이제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2-23)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은혜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의 주장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전도자의 주장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오래전 랍비들 중에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전도자의 주장에는 예외가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곧,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배우는 수고는 예외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와 유사한 해법을 제시하는 분들이 있다. ‘해 아래’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해 아래의 모든 것은 헛되지만 하늘 위의 것은 영원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전도서의 말씀은 해 아래의 헛된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 위의 것을 바라보라는 교훈이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강조하는 전도서의 말씀을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는 논리의 비약이 크다. 

전도자가 강력하게 비판하는 태도는 근거가 희박한 낙관주의다. 지금 열심히 수고하면 내일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한 공격이다. 물론, 오늘의 수고가 내일의 유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전도자는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전도자가 내어놓는 중간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24) 

모든 것이 헛되다. 그러나 지금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있다.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이요, 기쁜 마음으로 수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고’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도자가 헛되다고 설파하였던 수고와 다르다. 2장 24절에 등장하는 ‘수고’는 즐겁게 일하는 것, 나의 일에서 지금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는 저 멀리 있을 것만 같은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것을 누리는 행복이다.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야말로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 곧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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