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성경공부2022. 9. 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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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장은 이삭이 아내를 맞이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삭의 아내를 선택하는 이 장면은 단지 한 가정의 결혼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 이어지는 가교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세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구원의 계획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이제 그의 아들 이삭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등장인물을 기준으로 창세기 24장을 네 개의 장면으로 구분한다. 


1. 아브라함과 무명의 종 (1-9절) 
2. 종과 리브가 (10-27절) 
3. 종과 리브가의 친지들 (28-61절) 
4. 이삭과 리브가 (62-67절) 

지금까지 창세기의 주인공이었던 아브라함은 첫 번째 장면(1-9절)을 끝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은 아브라함에 의해 시작된 듯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로 완성된다. 아브라함은 한때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위해 사용되었지만, 그는 남겨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성과 비전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종에게 이삭의 아내감을 찾는 일을 맡기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3-4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지금은 이삭이라는 아들 한 명뿐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민족의 정체성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방 민족인 가나안의 여인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친족 중에서 여인을 선택하라고 당부한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지금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전히 고향 땅에 살고 있다면 자신의 친족 중에서 며느리를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거하는 가나안과 그의 고향 하란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종이 이렇게 질문한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5절)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답변은 단호하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6절)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 가나안 여인은 배제하였던 아브라함이지만, 이삭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분명한 비전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7a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지키며 보존해야 하는 정체성과 내일을 향한 비전이 동시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신앙인들과 함께 예배하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나라'는 비전도 주신다. 우리 각자에게는 다양한 삶의 자리가 있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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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9. 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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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농사를 짓는 그리스도인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교회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인 논에서도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제는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논에 물길을 내고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논에 나가보니, 누군가 자신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터트려 이 형제의 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논에 물이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올라오는 분노가 있었지만, 이 형제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수로를 복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형제의 기도제목을 다 들은 어느 교회 지도자 한 분이 크리스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형제가 항의를 해서 권리를 찾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형제여, 형제는 주님께서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소. 주께서는 올바른 일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원하시는 건 아닌지 기도해 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소.” 

이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로 제가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의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이 주변의 논에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놓았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워치만 니는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형제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했다.”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25a절)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그러한 예수님을 좋아하여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 주님 곁을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게 되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둘러보시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두 가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나요? 곧, 무리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큰 은혜를 받고 그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은혜의 식탁에 참여하며 하루하루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곁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나의 시간을 바치고 나의 물질을 드리며 나의 정성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주변에 몰려있는 무리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첫번째 조건이 본문 26절에 등장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6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을 말씀하시는데, 본문 27절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먼저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향한 사랑이나 나 자신을 향한 애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심지어 올바른 일이 아닌가요?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를 감내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 힘겹고 고단한 길을 비켜 지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우리 모두에게는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수 있는 권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가며 회피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이 불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행동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의 말씀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 배가 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는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마땅한 권리, 그 자연스러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 교회의 어느 지도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고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요구하십니다. 한마디로, 무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자양교회를 세우신 월리스 앤더슨(Wallace J.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그의 아내 릴리안 앤더슨(Lillian E. Anderson)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아직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양화진에 묻혀 있지요. 자양교회에서 항존직으로  피택받아 훈련을 받으시는 분들은 다 함께 양화진을 방문하여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곤 합니다. 일반 성도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항존직으로 선택을 받으면, 우리는 왜 양화진을 찾고 특별히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님의 묘역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지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머너먼 타지로 선교를 오셨고,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쳤던 분들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나아가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올해 항존직으로 피택되신 분들과 또다시 양화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함께 참여하셨던 어느 분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거나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신앙을 위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질문은 항존직으로 피택되어 교회의 일꾼이 되려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이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희생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나의 마땅한 권리와 나의 합당한 권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올바른 일을 넘어 더 위대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주변에 모여있던 무리는 될 수 있을 지라도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비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치러야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동일한 주제를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8절) 

망대를 건축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재력이 공사를 모두 마칠 수 있는 정도인지 여부를 사전에 따져 보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만일 이러한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공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완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손길이 그들에게 입혀질까요?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29-30절) 

자, 예수님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전쟁을 결정하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1절) 

전쟁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만 의존할 수 없지요. 냉철하게 양국의 군사력을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군대를 우리의 군대가 이길 수 있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승산이 있을 때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이죠.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비유에는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마지막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망대를 세우기 위해 기초를 놓았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자본이 없어 거기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약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다고 그 사람에게 망대를 완공하였을 때와 비교하여 절반 정도의 유익이 돌아가나요? 아닙니다. 아무리 절반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더라도 완공하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들인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뿐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군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승기를 잡았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적군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면 그 임금에게는 전쟁을 수행한 유익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전쟁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더 큰 피해가 그 나라와 그 왕에게 돌아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모든 소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끝까지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첫자리

오늘 본문은 모두 열 절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참으로 다양한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나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 십자가의 길, 제자가 되기 위한 비용, 중도에 멈추었을 때의 위험성, 제자도를 미리 생각해볼 것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마음의 첫자리”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내 마음의 첫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던 중국의 어느 그리스도인 형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농부의 논에 나누어주자,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못되어 주변의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왜 당신은 스스로 내 논에 물을 대 주었는가?” 그러자 그 형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네.” 그러자 깜짝 놀란 농부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자네가 소작농이었나?. 그렇다면 자네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자 그리스도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나의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네. 그분은 나에게 옳은 일,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명령하셨다네. 그리하여 내가 나의 논에 있는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라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가요? 혹, 입술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듯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께서 참으로 내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 주님께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내 입술의 고백을 넘어 내 마음의 첫자리를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께 내어 드릴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된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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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8. 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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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레너드 스윗 교수는 인간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세 개의 영어 단어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가장 낮은 단계, 가장 열등한 단계의 먹는 행위로 레너드 스윗 교수는 그것을 Feeding이라고 명명했습니다. Feeding이라는 단어는 주로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가리키지요. 그래서 굳이 한글로 번역하면 ‘사육’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음식을 먹는 모습 속에서도 이와 같은 Feeding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먹는 것, 단지 배고픔을 잊어버리기 위해 먹는 것, 흔히 하는 말로 단지 살기 위해 먹는 것. 비워진 나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몸에 집어넣는 행위. 그것이 Feeding입니다. 
레너드 스윗이 이야기하는 먹는 행위의 두 번째 단계는 Eating입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영어 단어이지요. 레너드 스윗이 Ea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은 음식의 맛을 추구하거나, 더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니는 단계,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 조금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Feeding의 단계를 넘어서, 그리고 Eating의 단계를 넘어선 보다 높은 차원의 먹는 행위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Dinning입니다. 일반적으로 Dining은 우리말로 ‘정찬’ 혹은 ‘만찬’으로 번역하지요. 매우 잘 차려진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레너드 스윗은 Dining을 그 음식의 메뉴보다는 식사하는 사람의 정신적 차원, 무엇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풍성한 감사의 시간,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 여러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행복의 시간, 그것이 바로 레너드 스윗이 말하는 Dining이라는 높은 차원의 식사입니다. 

최근 여러분의 식사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하루 식사를 하시면서, 혹은 지난 한 주간 음식을 드시면서 여러분의 식사는 혹여 시간에 쫓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는 바쁜 Feeding의 단계에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고,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에 음식 자체에만 관심을 쏟으며 그 무엇인가를 먹는 Eating의 단계에 머물렀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음식과 식탁의 의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식사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람들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한 Dinning의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음식을 대하는 방식이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를 너무도 중요하게 여겼고 여기에는 그들의 신앙이 담겨 있었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식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일몰, 곧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 이르기 전에 온 가족이 식탁에 함께 앉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식탁 위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지요. 온 가족이 식탁에 자리를 잡으면 아버지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내와 자녀를 축복하며 식사가 시작됩니다. 이 자리에서 이른바 ‘하브루타’라 불리는 성경에 대한 대화가 중심이 됩니다.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켜 두었던 촛불은 스스로 꺼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가족들은 그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며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교의 한 랍비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 명이 한 식탁에서 먹으며 토라의 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식탁에서 먹는 것과 같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먹는 행위는 결코 Feeding이나 Eating의 차원이 아니었고,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참으로 고상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에도 인간의 악한 본성은 표출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식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한계는 ‘배타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탁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보니, 유대교 종파에 따라 엄격한 규칙을 정하여 지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율법 해석에 동의하고 그것을 준수하는 바리새파 친구들과만 식사를 했습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식사의 규례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며 그들도 그들끼리만 식사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배타성이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건전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그 넓은 포용성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받을 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어느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열린 식사 자리에 참여하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먼저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사람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지요. 먼저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7a절) 

예수님께서 그날 사람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하여 그곳에 앉는 모습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식사를 위해 놓아둔 의자가 일반적으로 영어 알파벳 “U”자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알파벳 “U”의 아랫부분에 주로 주인이 앉고 그 양쪽으로 그날 참석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앉곤 했지요. 주인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힘과 특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이 누가 보아도 높은 자리, 힘과 특권을 상징하는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7b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8-9절) 

내가 자의로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 정도의 권세와 사회적 지위라면 이 정도 자리에는 앉아도 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누가 등장하나요? 그 잔치를 주관하는 주인이 등장합니다. 주인이 와서 자리를 다시 조절하면서 끝자리로 옮기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느냐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반대의 경우도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0절)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처세술을 알려주는 좋은 말씀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내가 스스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게 될 것이니 더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교만해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그러한 나를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고 더 부끄러운 곳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누구든지 한번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식사자리에서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으면 마지막까지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식사 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마지막까지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모임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높임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자랑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권세도 누리고 특권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 7절과 같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높은 자리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임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한없이 낮추어질 뿐이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냉정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요? 그러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먼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 역시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지금도 밤낮없이 경쟁하고 있잖아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7절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 번만 읽어도 어떠한 말씀을 하고 계신지 쉽게 이해가 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을 잘 표현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자, 비유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가 드리는 질문에 마음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주인이 등장하죠. 처음에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끝자리로 옮기고, 처음에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높은 자리로 이동시키는 주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비유라면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이 주인은 실제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늘 그렇듯,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현실이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교만을 멀리하고 겸손의 마음을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의 주인이 되어 마침내 우리를 가장 적절한 자리로 옮겨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은 교만한 자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올려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할 때

예수님은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권면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2절) 

지금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할 때 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 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살펴보니 잔치를 주관하여 손님을 초대한 사람이 예수님의 표현대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을’ 청했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만’ 초대한 이유는 12절 뒷부분에 나오지요.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너에게 갚음이’ 되도록, 곧 내가 다른 사람을 초대할 때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오늘날 이른바 자기계발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가 아닌가요? 여전히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자기 계발서를 읽어보면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말하지요.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식사자리에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3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니리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절)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 초대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들, 곧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은 아무리 식사 자리에 초대하여 정성으로 음식을 대접해도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지 이제 말씀하시네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사람, 저는 사람, 맹인들에게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는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때는 언제입니까? “의인들의 부활 시에” 의인들의 부활하는 그때,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러면 여러분,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선행을 갚아주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네,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니, 그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가난하고 힘없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낮추어도 이 세상에서 높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되돌려줄 수 없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겸손하기 위해 노력하고 힘 없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위한 자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식사자리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대하셨던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전혀 달랐지요. 예수님은 세리들, 죄인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같은 바리새인들만 초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식사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베푸신 식사 자리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초대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죄인과 세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식사는 자신들만의 모임, 자신과 동일한 바리새인들만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그들의 식탁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단호합니다. 만일 바리새인들 사이의 잔치에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위한, 곧 ‘너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식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는 나만을 위한 자리가 아닌 너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자리를 넘어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한 그들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십니까? 우리가 나를 위한 자리를 넘어 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바로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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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8. 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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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곧,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의 치유로 말미암아 어떠한 마음이 들었습니까?) 
기뻐하니라 (17절)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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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7. 1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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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전도서의 주제는 전도서 1장부터 명백히 드러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허무주의자의 외침처럼 들리는 이 구절은 계속되는 예증을 통해 전도서의 분명한 주제로 자리 잡는다. 그러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전도서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서를 읽으며 애써 “은혜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기에, 해 아래의 현세적인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강조하는 전도서의 전체 주제를 ‘영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전도서를 어떠한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 어려워하는 성도들에게 데이비드 깁슨은 그의 책 <인생, 전도서를 읽다>에서 명쾌한 대답을 내어 놓는다.

전도서의 간결한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곧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성취(gain)가 아니라 선물(gift)이다.(p. 51) [각주:1]

먼저, 삶은 성취가 아니다. 연약한 인간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내일의 성공을 위하여 오늘 수고해보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모든 것이 헛되다’(히브리어. 헤벨)고 반복하며 강조하는 전도서의 의도다. 삶은 성취가 아니기에, 곧 우리 인간은 그 무엇도 스스로 성취할 수 없기에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삶을 멈추라는 권면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전도서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나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요소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것이 지혜요,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의 선물을 포기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데이비드 깁슨이 전도서의 주제로 제시한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라는 명제는 기독교의 복음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께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성취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소망은 어디로부터 임하는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로부터 희망적인 전망이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죄악으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지만, 공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오늘의 수고만이 내일의 성취를 보장한다는 오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은 구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여 성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 역시 성취가 아니라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전도서가 ‘헛되다’를 연발하며 성취의 가능성을 그토록 부정하였던 이유도 성취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선물이라는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삶이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야 비로소 선물로 주어진 오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밤낮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목적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성취’가 된다. 그러나 내일의 성취를 위해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마치 헛된 바람을 잡기 위해 이미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전도서는,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삶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수고를 통해 성취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을 그대로 누리려고 애써보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상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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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한 도서 리뷰가 <목회 아카이브>와 네이버 블로그에 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단행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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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하면 이렇다. 이 책의 역자인 이철민은 ‘gain’이라는 단어를 이 책 전반에서 ‘유익’ 혹은 ‘수익’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는 ‘성취’라는 단어로 통일성 있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깁슨은 ‘gain’과 ‘gift’를 대조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단어를 하나의 쌍으로 묶어 주제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알파벳 ‘g’로 시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한글 번역에서도 ‘ㅅ’이라는 동일한 자음으로 시작하는 ‘성취’와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또한 ‘성취’라는 단어는 현대인들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개념으로 유익이나 수익보다는 삶의 방향과 태도를 나타내기에 적합한데, 이것이 데이비드 깁슨의 의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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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7. 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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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는 순간의 사고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을 동시에 잃어버렸다. 비극적인 상실을 경험한 그는 자신의 경험 위에 신학적 성찰을 더하여 ‘상실’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가 다루는 상실의 종류는 다양하며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실을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상실은 그것을 겪는 각자에게 고유한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며, 그 결과가 누적되고, 상실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상실에 대한 제럴드 싯처의 서술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지혜를 선사한다. 

고통과 상실이 찾아올 때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회피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상실을 경험하면 많은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데 이 역시 회피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상실과 그로 인한 고통은 회피한다고 사라질 수 없다. 상실 앞에서 회피라는 전략은 성공하지 못하며 마침내 상실로 인한 고통은 불쑥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니 제럴드 싯처는 전략을 수정하여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 구약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을 반복하며 강조한다. 우리말로 ‘헛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헤벨’은 헛되다는 의미와 함께 부조리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헤벨’을 외치는 전도서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이 사라지는 상실의 경험, 나아가 왜 나에게 이러한 상실이 찾아왔는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제럴드 싯처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러한 전도서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상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 그것은 우리가 디뎌야 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53쪽)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내 삶의 아픔과 고통을 인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의 현실을 인정한다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이미 사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죽음의 강을 넘어간 가족이 돌아올 수 있는가? 이미 실직하거나 큰 재산을 잃어버렸는데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는가?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잃어버렸는데,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다시 예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가? 그러면 고통을 인정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전도서의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여기에 답하는 최선의 방법은 복음의 원리다. 고통과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뜻한다. 과거에 누렸던, 혹은 미래에 성취하리라 기대하였던 이상과 꿈이 헛된 신기루였음을 깨달으며 자신의 유한성을 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은혜가 아니라, 주어진 한계적 상황에서 신기루를 쫓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이미 주어졌으며 여전히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며 누리는 은혜다. 

그날의 비극은 나를 하나님께로 밀어냈다. (중략) 독신자 부모로서 나는 심한 좌절과 피로감을 경험했고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완벽한 아버지가 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시도록 초대했다. 나는 이제 거의 날마다 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나의 연약함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길 기도한다. (중략) 나는 상실을 겪으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배웠고, 내가 가진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건을 기회로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특권이며, 부모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섬기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기회인지도 깨달았다(122-123쪽). 

물론, 상실 이후의 삶이 상실 이전의 삶보다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록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안에 있다. 

지금 내 삶의 무대는 산에서 사막으로 옮긴 것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황혼에 물든 사막도 아름다울 수 있듯이

그런 내 삶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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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2. 6.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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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가운데 성도들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 기도를 시작했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나의 여러 소원을 아뢰며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기도제목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변화를 경험하기도 하지요. 때로는 낙심과 절망의 상태에서 시작된 기도가 확신과 감사의 기도로 마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시편 16편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 기도 가운데 믿음의 확신으로 변화되는 하나의 예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믹담"이라는 표제어를 가지고 있는 시편 16편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그러나 다윗의 부르짖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변화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절)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신다는 다윗의 확신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구절은 시편 16편 5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5절) 본문 5절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세 가지 단어로 묘사합니다. 곧, 산업, 소득, 그리고 분깃입니다. 다양한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은 나의 기업"이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땅이 그들의 기업인 이유는 그 땅이 먹을 양식을 공급하는 원천이며, 삶을 영위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업'이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직장이나 일터가 개인과 가정의 기업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개념을 넘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노래합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모든 원천이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오늘의 시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확신이 되었고, 주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노래하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탄식이 변하여 확신이 되니,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절) 본문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지금 이 자리는 너무도 위험하여 하나님께로 피하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바로 이곳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실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현실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탄식하며 부르짖는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되니, 이전에는 당장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의 고통과 아픔을 벗어났을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신다고 확신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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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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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두 가지 은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곧 방언과 예언이다. 방언과 예언은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방언은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지만 예언은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다. 방언과 예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본문 1절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1) 사랑을 추구하며 
(2)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3)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 

위의 구절에 숫자를 붙여둔 이유는 바울의 주장이 하나의 논리적 흐름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에 대해 길게 노래하였던 이유는 사랑이 성령의 은사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가장 먼저 사랑을 언급한다(1번). 또한 방언과 예언이라는 은사를 다루고 있기에, 신령한 것(성령의 은사)을 사모해야 한다고 권면한다(2번). 그러면 1번과 2번의 주장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가? 신령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을 추구한다면, 성도들은 방언과 예언 가운데 무엇을 더 원하게 될까? 그 대답이 3번,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이다. 방언과 예언은 모두 성령의 은사이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대방이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본문 4절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과 예언의 결정적인 차이는 듣는 사람이 그 의미를 깨듣는지 여부다. 바울은 이러한 차이를 몇 가지 예를 통해 설명한다. 

 

사도의 사역 (6절) : 복음을 전하는 사도는 회중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해야 한다. 
피리나 거문고 (7절) : 이러한 악기는 음계를 통해 뜻을 전달한다. 악기가 정확한 음을 내야 듣는 사람에게 정확한 음악이 전달된다. 
나팔 (8절) : 7절에 등장하는 악기가 평화로운 장면을 대표한다면, 8절에 등장하는 나팔은 전쟁의 장면을 묘사한다. 성도들 역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나팔 소리처럼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야 교회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외국어 (10-11절) : 인간의 모든 언어는 다 뜻을 담고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언어(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방언이 그와 같은 경우다. 

 

이 모든 비유는 교회 안에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성도의 언어생활에 사랑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기본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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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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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4:12)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시대의 중요한 특징은 기도에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은 기도에 전심전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시간을 빼앗기는 봉사의 일을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위임하기도 하였다(행 6:4). 바울의 서신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간절히, 그리고 밤낮없이 기도하였는지 알게 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달함으로써 그 고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설교가 끈질긴 기도의 향기로 뒷받침되도록 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만 기도에 집중했던 것이 아니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기도를 그들의 중요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하나의 예가 에바브라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기도를 소개한다(골 4:12). 에바브라가 드리는 기도의 특징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펼쳐지기를 위한 기도, 곧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였다. 사도들도,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는 평신도 지도자들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에 헌신하였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요, 성령 하나님은 초대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셨다.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그들의 본문과 생각과 말과 설교를 그들의 골방에서 얻는다면,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죄로 물들고 어두워진 옛 하늘과 옛 땅은 기도하는 사역자의 능력 아래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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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5. 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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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찰스 스펄전은 설교에 있어 기도의 유익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개인 기도가 사역에 가져다 주는 빛나는 축복 하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글로 기록할 수도 없는 무엇 -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 기름 부으심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그리고 쉼 없이 뜨거운 간구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양털이 하늘의 이슬로 젖을 때까지 간구의 타작마당에 깔아 두어야 한다." 

E.M. 바운즈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의 기술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나 기름 부으심은 설교에 필요한 많은 기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여타의 기술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기술이다. 설교를 위해서는 진지함, 성실, 신중, 열정, 끈기 등의 덕목이 필요하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이러한 덕목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한다. 선한 목적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들, 예컨대 설교, 기도, 예배, 전도, 목양 등은 기름 부으심을 통해 인간의 활동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가 된다. 설교자가 한평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교자의 모든 노력이 열매를 맺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E.M. 바운즈는 분명히 선언한다. "기름 부으심은 서재가 아니라 골방에서 온다." 인간의 기도가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유도할 수는 없다. 기름 부으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신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항목이 있다. 한번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고 영원히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름부음은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있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부 선물이다. 그것은 처음에 받을 때와 같은 과정에 의하여 계속되고 증가된다.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 그리고 그것을 귀하게 여겨서 지칠 줄 모르는 열심으로 추구하고, 그것이 없는 다른 모든 것은 실패와 배설물로 여기는 자세가 이 기름 부으심을 계속 유지하는 길이다." 설교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늘 사모하고 간구하는 것은 설교자가 한평생 견지해야 할 마땅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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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