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2022. 3.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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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 혹은 하나님의 이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이 한두 번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정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기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시대가 크게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의 시대는 과연 언제였을까요? 그 첫 번째는 모세의 시대입니다. 곧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을 집중적으로 행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시대 이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무더기로 나타났던 시대는 또 언제였을까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갈멜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도 내려주시고, 온갖 신기한 기적을 집중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집중적으로 경험했던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그 어떠한 시대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했을까요? 하나님의 기적을 그토록 많이 보고 체험했으니, 모세 시대의 사람들과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을까요? 정답은 ‘아니요’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열 가지 기적으로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기적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으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 생길만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그 땅을 점령해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지요.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여 주셨고,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갈멜산에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직접 보았다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바알 신이 나 아세라 신과 같은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완전히 회복될 만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같은 인생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가장 먼저 장소의 변화를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1절) 

오늘 본문 이전까지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요단 강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에게 이끌리어 어디로 이동하시죠? 광야로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누가복음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리고, 둘째로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에 임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한 마디로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장소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요단 강을 떠나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요단 강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광야는 고난의 장소요 시련의 장소요 시험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누리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곳인 요단 강을 떠나, 고난의 땅이요 고통의 땅이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과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무신 시간은 큰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가신 이유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신 시간은 세례를 받고 아오시는 정도의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신 기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거주하신 기간은 모두 40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드러나는 요단 강은 예수님께서 짧은 시간만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광야에는 40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거주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경험하신 체험과 광야에서 겪으신 시험,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머무셨던 짧은 시간과 광야에서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신 기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나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곤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간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한 분도 빠짐 없이 각자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아름다운 손길을 이야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삶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여전히 요단 강에 머물러 계신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현재 삶을 제가 다 알지 못하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요단 강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고통도 많고 고난도 많고 그래서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광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짧은 요단 강의 체험을 뒤로하고 오랜 시간 광야에 들어가 시험을 받으셨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때는 요단 강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였는데, 한때는 요단 강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체험하기도 하였는지 왜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고 불평하지 마시고도 말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의 삶이 광야 같은 인생일진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어 우리 주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떡 VS 약속의 말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지요.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첫번째 시험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2절) 

여기 2절의 말씀은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생활하시면서 겪으셨던 고통스러운 과정을 묘사해주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광야에 계십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먹을 음식, 마실 물, 거주할 집 등을 구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나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이것은 광야에서 생활했던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예수님에 대한 사단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3절) 

지금 사단이 예수님께서 던진 시험, 곧 사단의 첫번째 시험의 주제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광야에서 음식을 얻지 못하여 굶주리고 계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과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사단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기적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신다면, 돌로 떡을 만들든 혹은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지게 하시든 필요할 때마다 기적의 떡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모든 사람이 코로나로 건강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바이러스를 이겨내야 한다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적적으로 재물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기적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라고 사단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보다 구체적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절) 

예수님의 말씀을 무심코 읽으면 우리 육신의 양식이 되는 떡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다음에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마 4:4).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육신의 양식인 떡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그보다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첫 번째 시험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신명기 8장의 흐름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8장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신명기 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네요. 그리고 이제 이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 8:1)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4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광야 40년은 시험의 장소요,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에 대해 신명기 8장 1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은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광야 40년의 목적이 무엇인지 곧이어 그 목적이 등장합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여기에 시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시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자,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신명기 8장 3절에 등장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여기에 만나가 등장하죠?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입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떡은 일반적인 양식이 아니라 기적의 떡인 만나를 말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살 길은 기적의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 같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단은 그 대답이 기적의 떡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시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나의 삶은 광야같고 지금 나의 삶에는 기적의 떡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명기 8장 1절의 약속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마침내 그곳에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시는 손길을 참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

모세 시대는 구약 성경에서 손에 꼽힐 만큼 많은 기적이 일어난 때였지요.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아시잖아요.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떡을 매일 먹으면서도 그들에게 찾아온 시험에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기적의 떡을 원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그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또다시 수많은 기적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유대인들에게 기적의 떡을 먹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오병이어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여러분, 기적의 떡을 먹었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변하여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나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떡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신앙인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기적의 떡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사단의 첫 번째 유혹입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물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기적의 떡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기적의 떡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광야 같아서 기적의 떡을 갈망하기 마련이지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의 마음을 기적의 떡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넘어지고, 엘리야-엘리사 시대의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실패했으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사단의 시험에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단의 이 시험에 넘어졌을지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넉넉히 이겨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X2)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1) 

비록 지금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손이 지금도 우리를 돌보아 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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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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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많은 곡이 수록되어 있지요. 그 가운데 많은 찬양의 가사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 소절을 언급하며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찬송가 9장의 4절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이 짧은 하나의 문장, 이 짧은 하나의 기도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송가 9장은 이렇게 기도하네요.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도 있고 슬픔도 가득하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우리는 땅을 디디며 죄악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삶에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사의 정수는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정수는 고난과 슬픔을 기도하며 이겨낼 수 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더욱 중요한 본질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난도 경험하고 슬픔도 경험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에 ‘잇대어 있다’라는 표현이 참 독특하지요. ‘잇대다’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맞닿아 있다,’ ‘기대어 있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므로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는 우리가 지금 저 영원한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우리의 몸은 시간의 흐름 속에 철저히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생이요,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저 영원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그저 영원한 저 천국을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잇대어 있다는 것은 떨어져 있지 않고 맞닿아 있고 기대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자리는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유한한 세상이지만,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저 영원한 천국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한 천국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고난도 많고 슬픔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셨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유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영원한 천국을 경험하고 체험하실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나갈 것

 

우리는 오늘까지 세주 째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으로, 두주 전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 노래합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7절의 내용인데 우리는 지난주에 그 본문을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가치를 노래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 8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은 하나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직 영원한 시간, 곧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내용이 본문 8절부터 등장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여기까지는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절)

 

여기에 등장하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랑하며 뽐내던 은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는 말씀이지요. 어디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뿐이게습니까?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고 다른 누군가가 자랑하면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드는 바로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한번 바라보면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요? 지금 여러분의 눈에 그토록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여전히 중요할까요? 아니면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덧없는 것들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두 흘러가버리는 덧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지식과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론에 이르렀지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제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본문 9절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9절)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도 있고 신앙이 미숙한 사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부분적인 지식만 가지고 예언하고 부분적인 정보만 가지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네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영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때가 되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어떻게 됩니까? 다 “폐하리라”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그럼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재능, 은사, 재물, 권세 그 모든 것이 잠시 있다 사라질 덧없는 것인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말하면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네, 물론이죠.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모두가 불완전한 것뿐인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자랑거리를 바라보며 평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영원이라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평가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만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영원이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계속 살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폐하여지는 것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완전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자, 본문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이아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절)

 

본문 11절의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한다는 말씀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앞의 내용과는 강조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바울은 영원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평가하면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을 하는 불완전한 모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1절로 넘어와서는 새로운 강조점을 첨가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의 뒷부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물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한 미완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치 어린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습도 완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한 강조점이 본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지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게 될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본문 1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의 영적인 지식이 얼마나 완전해진다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완전한 상태가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날로 새로워지며 마지막 날에는 온전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영원한 천국을 향한 소망, 그리고 내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의 믿음이 연약하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천국에 대한 나의 소망은 너무도 자주 흔들리지요.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 곁의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완전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유한 재능, 능력, 은사, 지식, 사회적 지위 이러한 것들로 자랑하지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마십시오.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작은 믿음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많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은 식어질 때도 많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가장 귀한 세 가지를 모두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절)

 

이제 지난 세 주에 걸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설교를 정리할 때가 되었네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마치 도장을 새겨 놓은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렇다고 여러분의 손과 발을 분주히 움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추동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 돌아보며 오래 참고 온유하여 상대에게 친절하게 행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사랑, 그리고 주님의 그 진실한 사랑을 따라 오늘도 여러분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 수도록 더욱 아름답고 더욱 온전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X2)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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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2.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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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영성가 가운데 한 명인 게리 토마스라는 분은 『체리쉬』(Cherish)라는 책에서 ‘소중히 여김’이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사랑과 소중히 여김은 구분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다와 소중히 여기다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것은 결혼식의 서약입니다. 수많은 부부가 이렇게 서약하지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로 서약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이 짧은 구절에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 사랑이 가정에서 표현되고 한 가정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인 소중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너무도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사람에게도 사용하지만, 물건이나 사물에 많이 사용하지요. 귀한 보석이 박힌 반지나 귀걸이를 신발장에 놓아두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는 귀한 보물일수록 방의 가장 깊은 곳에 잘 보관해 둡니다.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죠.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에게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그림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그는 그 그림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액자를 끼우고 최고의 조명이 비치는 장소에 그 그림을 걸어두겠지요.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리 토마스는 사랑하는 것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애써 구분하면서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지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비록 자신의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오직 진실한 사랑, 곧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노래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짧은 문장에서 주어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오래 참는다는 말씀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더 길게 연장되어 4절부터 7절까지의 주어는 어디까지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주어이고, 사랑이 주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4절부터 7절까지의 모든 문장은 동사로 되어 있어요.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 사랑이 무엇을 행하지 않는지를 서술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는 진실한 사랑의 중요한 하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품 수집가가 렘브란트의 진품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값진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나 목걸이가 더욱 빛나도록 소중히 관리하는 것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실한 사랑이 새겨졌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진실한 사랑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마치 도장을 찍듯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짧은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많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말씀 묵상을 통해 본문이 가르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 곧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덕목을 단 하나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요?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데, 본문이 소개하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단 하나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우리 모두의 삶에 진실한 사랑의 마법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멈춤


오늘 본문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길게 나열되어 있지요. 이러한 서술은 크게 두 가지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않는다’이고, 다른 하나는 ‘행한다’입니다. 이렇게 구분을 해놓고 보면,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본문의 말씀에는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보다 진실한 사랑이 행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이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행하는 것에 대한 서술이지요. 그러나 그 뒤에는 진실한 사랑이라면 결코 행하지 않는 것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4절 뒷부분부터 보십시오.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도 보십시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모든 것을 멈추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나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무엇을 행하는 것, 분주하고 바쁘게 무엇을 행하는 것이 사랑이나 소중히 여김이 아닐 때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지금 내 마음이 나에게 충동한 그것을 멈추는 것이 때로는 더 귀한 사랑이요 상대를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 백성이 따라야 할 율법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면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율법을 구약성경에서 압축적으로 기록해둔 말씀이 십계명이지요. 그러면 십계명의 구절을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구분해 보십시오.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열 가지 계명 중에서 딱 두 개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런데 여러분, 안식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멈춤’이거든요. 하던 일을 멈추고, 열심히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이잖아요. 그러니 제4계명 역시 문자적으로는 ‘행하라’고 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결과적으로 십계명 가운데 ‘무엇을 행하라’는 명령은 딱 하나가 남네요.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그렇습니다. 십계명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하는 말씀은 이것 하나입니다. 저는 한때 십계명의 말씀이 지나치게 부정 명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헌장을 말씀하시는 십계명에서 ‘너희는 정의를 행하여라,’ 혹은 ‘너희는 인애를 실천하여라’와 같은 멋진 명령을 주시지 않고, 고작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데 의문을 품었을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적극적으로 행할 때 일어나지, 소극적인 자세로 행동을 멈추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오히려 행동을 멈추는 것이 가장 멋진 행위가 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웅변이 되고, 나의 주장을 멈추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지혜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시기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에도 그 마음을 멈추어 세우는 것, 자랑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해서 절제하는 것, 상대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지만 무례히 행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상했다고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상하게 만드는 화를 내지 않는 것, 한 마디로 내 마음은 하고 싶지만 상대를 위해 그것을 멈추는 것, 바로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행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지금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의 행동이 혹시라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상대방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 상대방의 언어습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상대방의 행동을 그 사람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최고의 행동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 – 오래 참음과 온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사랑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진실한 사랑이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그것이 두 가지로 나타나지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합니다.” 우리말 ‘온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를 조금 더 풀어서 번역하면 ‘친절하게 행하다’가 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하였던 게리 토마스의 책 제목인 영어 단어 ‘cherish’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동일한 자세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래 참음’과 ‘온유’라는 덕목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였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채결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도 감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마치, 신약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언약이지요. 그러니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고 그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감격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뒤, 그 시내산을 채 떠나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다니…. 이 정도면 조금 전에 맺은 시내산의 언약은 파기될만하지 않나요?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벌을 내리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등장하는 두 가지 덕목입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이지요. 금송아지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하였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며 출애굽기의 이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가장 먼저 이 두 가지 덕목을 서술하고 있네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것은 진실한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진실한 사랑은 온유하여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오래 참음이나 온유함도 상대방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을 분주하게 행하기보다는 나의 말을 멈추거나 나의 행동을 멈출 때 우리는 오래 참을 수 있으며 온유, 곧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한 주간 오래 참음과 온유에 대해 여러 가지고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에 가장 크게 떠올랐던 답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조급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잡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약속 시간에 늦어 마음이 조급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지겠지요. 그러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요? 약속 시간이 촉박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지나가던 사람을 툭 치고 지나가는 일도 생기죠. 혹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다그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지금 조급하기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무례해집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조급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상대방을 향해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상대방을 향해 친절해질 수 있을까요? 먼저 나의 마음에 조급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나의 마음이 좀 넉넉해져야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풍경도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신 손길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요, 결국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진실한 사랑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으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선언한 뒤, 계속해서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의 특징을 서술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마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7절에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7절의 중요한 특징은 동일한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지 찾아보면서 7절의 말씀을 잃어보지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절) 


무엇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은사가 있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만 있다면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랑의 특징으로 멈춤을 강조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나의 말을 멈추고 나의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오래 참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멈춤이라는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마침내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이예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나의 말과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리하여 진실한 사랑의 특징인 오래 참음과 온유의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삶에 사랑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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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고린도전후서 강해2022. 1. 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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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도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입다라는 사람을 통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비극적 사건입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성급하게 서원하여 자신의 무남독녀를 제물로 바쳤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여성들의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에브라임 지파를 대상으로 한 이스라엘의 내전이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을 치르며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하루아침에 죽이고 말지요. 그러면 여러분, 입다라는 인물이 이처럼 역사적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입다는 싸움과 전쟁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입다를 ‘큰 용사’라고 묘사합니다. 그에게는 전쟁의 능력과 기술이 있었고,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그의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에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열등감이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입다는 첩의 자녀였거든요. 그래서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들이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말하면서 그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부터 입다의 마음에는 형제를 향한 미움,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가득했지요. 

그러한 입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암몬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는데, 이스라엘에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암몬을 물리칠 장수가 없는 거예요. 입다의 마음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전쟁을 치르는 능력만큼은 탁월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군대를 지휘하여 저 암몬을 물리쳐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입다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붙이죠.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쟁에 승리하면 이제부터 입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사사가 되겠다는 조건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입다가 군대를 이끌고 암몬이라는 나라에 맞서 싸운 그 마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민족에 대한 사명감인가요? 아닙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볼 사람들에 대한 연민인가요? 입다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입다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미움, 내 마음에 있는 분노를 실제로 터트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는 마음뿐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은혜를 주셔서 입다로 하여금 암몬 자손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이 일만 놓고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 모든 일은 사랑의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요, 미움과 분노 나아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입다의 능력이 빛을 발하여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에 통곡하는 소리가 가득한 역사적 비극이 펼쳐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의 공동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까요? 능력입니까? 재능입니까? 탁월한 은사입니까? 아니면 진실한 사랑의 마음입니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양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 안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의 언어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 많은 능력과 은사가 발휘되었지만 정작 교회의 내부에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죠? 음행의 죄, 우상숭배의 죄, 여러 가지 불의로 세상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모습 등 아름다운 열매보다는 인간의 추한 모습만 드러나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모이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교회 안에 성령의 열매는 사라지고 인간의 추한 모습만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외국어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고 천상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네,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지식이 충만하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받은 능력이 얼마나 큰 지 산도 옮길 수 있데요. 그런데 영적인 지식으로 가득하고 산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그들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이번에도 사랑이 없네요. 그러니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놓았네요. 그뿐이 아닙니다.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나의 물질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과 나의 몸까지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제 아무리 자신의 모든 재산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내어 놓아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베푸신 은사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능력과 재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지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우리 사회에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현실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면에서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희의 역사는 이제 130여 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독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은 기독교의 눈치를 봅니다. 많은 기업이 교회의 구매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이처럼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지금까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교회가 이 사회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에는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구절이 무엇입니까? 

그런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의 모조품

사랑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지요. 그러면 이렇게 중요하고 귀한 사랑의 덕목에는 이른바 모조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 제가 사용한 ‘사랑의 모조품’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고 평가받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용한 용어입니다.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덕목인 사랑에는 모조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있다” 그것도 “매우 많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하나의 비유로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철이나 동을 흉내 낸 모조품과 금이나 은을 흉내 낸 모조품 가운데 어떤 모조품이 더 많지요? 당연히 금이나 은같이 더 귀한 물건을 흉내 낸 모조품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흔하게 길가에 놓여있는 돌멩이의 모조품은 만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이아몬드나 루비와 같은 값진 물건의 모조품은 많이 만들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덕목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너무도 중요한 덕목이기에, 아니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선언할 정도로 가장 귀한 덕목이기에 그만큼 가짜도 많고 모조품도 많습니다. 

자, 그러면 진실한 사랑이 아닌 사랑의 모조품, 곧 거짓된 사랑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드는 진실한 사랑과 그저 흉내만 내는 사랑의 모조품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한구절,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마지막 종말의 때를 설명하시며 하신 말씀의 한 구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 

이번에는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엡 6:24) 

읽어드린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는 진실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거짓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진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진실한 사랑의 특징을 묘사하며 가장 먼저 무엇이라고 말씀하지요? “사랑은 오래 참고”(4a절)라고 말씀하잖아요.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의 차이를 구별하고 나면,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우리는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나의 재물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헌신하고 바쳤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은 계속해서 무엇을 말씀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니,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 주었는데 사랑이 없다고요? 나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는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요? 이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사랑, 곧 사랑의 모조품도 사랑이라는 겉모습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재물을 내어 줄 때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나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때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거짓된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사랑이 식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한 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내어 주었지만,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 그것은 잠시 타오르다 식어지는 사랑의 모조품이었기에 –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곧, 오래 참는 사랑이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랑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 점을 마음에 생각하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대감이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절망감이 일어나십니까? 그래 좋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능력도 변변치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변함 없는 사랑으로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다는 결단의 마음이 생기세요? 아니면 차라리 더 노력해서 나에게 부족한 능력을 얻으라고 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을 텐데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만이 나의 삶을 아름답게 열매 맺게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며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드시지는 않으세요?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진실한 사랑을 생각할 때, 기어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용했던 비유를 한 가지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에 진실한 사랑이 자리잡는 것을 도장과 인주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자, 도장에 인주를 충분히 묻혀서 종이에 찍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종이에서 도장을 떼어내고 나면 그 종이에는 도장과 동일한 모양이나 글씨가 분명하게 남게 되지요. 에드워즈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꼭 이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한 사랑,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던 그 진실한 사랑의 원형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형상, 곧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도장을 찍듯이 우리의 마음에 각인시켜 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의 성품이 남아 있게 된 거예요. 물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여 진실한 사랑보다는 쉽게 사그라드는 거짓된 사랑이 더 많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도장을 찍듯 분명히 새겨주신 주님의 진실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기에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행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분명히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행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진실한 사랑은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한 없이 부어지고 있으니, 그 주님의 사랑을 따라 행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넉넉히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소개하는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도 없었고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없었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분노와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고 있으니 거대한 적군을 물리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도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는 그칠 줄을 몰랐지요. 그러던 중 마침내 그 어두운 사사시대의 역사를 끝냈던 인물, 곧 마지막 사사로 평가받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그는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사무엘에게는 입다와 같은 탁월한 전쟁의 능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이 놀라운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에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느냐?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의견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거든요. 이렇게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닌 사무엘은 어떻게 그 비극적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던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미스바에서 민족의 영적 대각성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그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에게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최대 장점은 어린 시절 성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한평생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사무엘에게는 탁월한 은사도, 대단한 능력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평생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유창한 외국어나 아름다운 천상의 언어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겠지요. 지금 당장은 큰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면 사람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겠지요. 지금 당장은 나의 모든 재물을 내어주고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불사르게 내어주는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지금 당장은 빛을 발하지 않을 지라도, 묵묵히 내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따라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하시고 내 곁에 있는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하셨으니,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실력이 조금은 부족해도, 별로 화려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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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1. 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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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선언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세계의 주요한 종교를 창시하였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등 세계의 성인들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이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스스로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든지, 혹은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는 선언에 담겨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빈 들에서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였을 때 세상의 통치자들이 누구였는지를 나열하며 시작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장면을 묘사할 때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선지자들의 소명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역사적 신빙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도 로마 제국의 디베료 황제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렸습니다. 그가 임명한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와 같은 분봉왕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시대에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로마의 황제를 취재했겠지요. 그들은 총독의 행동이나 분봉왕들의 발언에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 세속 권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종교 권력을 틀어잡고 있었던 대제사장이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이름이 안나스와 가야바였다고 기록하여 주네요.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면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제일 먼저 대제사장들이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합니까?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들이 거주하는 권력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하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로마의 황제가 살던 황궁에 임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빌라도 총독이나 누가복음 3장에 등장하는 여러 분봉 왕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 2절에는 버젓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지요.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국민은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거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우리 나라가 문화 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대통령 한 명을 잘 뽑았다고 우리나라가 행복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 수많은 선거를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차기 대권주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의 이목도 청와대와 여의도를 향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로마에는 디베료 황제가 있었고, 유대에는 빌라도 총독이 있었으며, 분봉 왕으로는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디에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교회가 참 많이 있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시내에는 규모도 크고 건물도 화려하며 내부시설도 잘 갖추어진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제사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말과 행동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마음과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설교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임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빈 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왕궁의 화려함도 없고, 왕궁에 있을 법한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할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그저 황량한 빈 들처럼 보이는 분들이 계신가요?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빈 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사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찾아 빈 들로 갔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 요한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어요.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5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요한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축복이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기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죠. 15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밖에서 나를 도와주고 나를 이끌어주고 나아가 나를 구원해줄 구원자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세례 요한을 통해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하니 사람들의 마음에 헛된 기대감이 가득해졌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의 뒷부분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가요? 아니요. 요한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도하고 때로는 그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요. 이것이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거든요. 세례 요한은 분명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커다란 실망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민감하게 눈치 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대답해줍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6절) 

요한의 대답은 먼저 요한 자신과 예수님에 대한 비교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세례 요한은 자신의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를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는 증표로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시켜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의 삶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 오늘 우리의 삶에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곧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7절) 

본문 17절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심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농부가 가을 추수 때에 행하는 일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지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마지막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모든 심판을 보류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목격하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인류의 마지막 그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도 주님께서 친히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자, 세상에는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일 수도 있고 총독이나 분봉왕이 될 수도 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처럼 종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임하였지요? 빈 들에 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집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면이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우리의 심령이 회복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통치자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특징 하나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있는 왕궁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빈 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이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품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성도 여러분, 비록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빈 들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드시 자라날 것이요, 자라난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될 것이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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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12. 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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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본다는 새로운 경험에 흥미도 있지만, 비행기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른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착륙할 때까지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마음에 있었지요. 그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비행기에 대한 믿음,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에 대한 신뢰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이처럼 정반대였다면, 그들의 마음과 감정에 따라 비행기 여행의 안전이 좌우될까요? 그럴 수 없지요. 비행기와 조종사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설령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매우 유사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호수 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실 호수의 물은 표면만 얼어 있는 살얼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더라도 살얼음은 순식간에 깨어지고 그 사람은 호숫물에 빠지고 말겠지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수의 물이 꽝꽝 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지금 보이는 얼음이 살얼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조심조심 호수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비록 불안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호수의 물이 꽝꽝 얼어있기에 그는 호수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겠지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확신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신뢰하는지 곧 우리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대상입니다. 믿음이 확고하고 그리하여 분명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다면, 살얼음을 꽝꽝 얼어 있는 얼음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비행기와 조종사를 신뢰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을 품더라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호수의 얼음이 살얼음 일지 모른다고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무사히 호수를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의 토대는 든든하고 확고하다는 사실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시인의 기도

오늘 본문 시편 80편은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편 80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명한 확신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기보다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뒤 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 안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노래하는 장면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두 가지 대목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2-13절) 

시편 80편이 묘사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 12절과 13절이 묘사하는 내용은 북이스라엘이 아람이나 앗수르제국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침략을 당하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현재 형편은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이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현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은 본문 16절입니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6절)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습니다. 포도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모든 주민이 앗수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시인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전통적으로 두가지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신명기 언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신명기 언약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르칩니다.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한다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임하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직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은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요. 다윗의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완전히 불탔습니다. 그것이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입니다. 도저히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 믿음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악인은 벌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저 악한 앗수르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10개의 지파가 모두 멸망했잖아요. 그러니 신명기 언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를 이렇게 이방인의 손에 던져주시니 다윗 언약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처럼 사마리아 성이 점령당하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 차 계십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게 기도하고 있지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의 흔들리고 나의 확신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가 흔들리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의 마음도 흔들렸고, 시편 80편을 읊조렸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나의 눈에 펼쳐지는 현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괜찮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보다 믿음의 대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바로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시편 80편을 노래하는 시인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다시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내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표현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바로 그 법궤에 두 개의 그룹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오늘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완전히 멸망해 버린 절망의 현장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민족의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시인은 2절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기도는 확신에 찬 기도라기보다는 믿음이 흔들릴 때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상이지요. 시인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기도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상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보내며 오늘 본문 시편 80편을 읽곤 하였습니다. 교회가 대림절 기간에 시편 80편을 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본문 시편 80편에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을 노래하였던 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시인이 기도하며 간구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나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를 기다리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여 가슴 답답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인생에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성탄절이 오지 않아 여전히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만 계속되는 분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시편 80편에서 시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편 80편이 계속 노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는 그 반대의 방향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3절) 

본문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여기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해달라는 기도이니, 본문 3절에서 돌이키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마치, 비행기를 탑승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비행기에 결함이 없고 그 비행기의 조종사가 잘 훈련을 받은 베테랑이라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겨울의 강추위로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얼음의 강도가 안전을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감정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성탄의 진리가 우리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도 나의 두 다리로 얼어있는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도 절망적이고 도저히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 그것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발걸음까지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 믿음이 흔들리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찾아올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믿음의 걸음을 계속 내딛으십시오. 대림절이 지나면 반드시 성탄절이 찾아오듯, 오늘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 주님께서 깊숙이 찾아오시는 그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감정은 요동치고 흔들릴 수 있지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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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21. 12. 1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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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고전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었다고 알려진 책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지요.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해석자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해석자가 한 번은 크리스천을 매이 넓은 객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나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그 객실에 들어서자 옆에 있던 해석자가 하인을 불러 청소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이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나 크리스천은 거의 질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해석자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크리스천이 들어가 보았던 넓은 객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이지요. 객실에 먼지가 가득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온갖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마음이라는 넓은 방에 가득한 먼지와 더러운 것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로 쓸어냈던 하인의 이름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빗자루질을 했습니다.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율법으로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금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있던 죄악과 부정적인 생각이 더욱 가득히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존 번연을 『천로역정』에서 묘사했던 것입니다. 


먼지가 가득한 마음

빌립보서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이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부르는 하나의 별칭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기쁨의 서신답게 빌립보서의 마지막 장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단지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의 삶에는 기쁜 일도 일어나지만 슬프고 짜증 나고 괴로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누군가를 향해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항상 기뻐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더 화를 내고 더 짜증을 내고 더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거든요. 마치 분노라는 먼저, 짜증이라는 먼저, 증오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방을 깨끗이 하겠다고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는 율법이라는 여종의 행동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옆에서 권면한다고, 혹은 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조절해보겠다고 하여 생각처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계속 이어지는 본문 5절은 관용을 권면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본문 5절도 자세히 보시면 ‘모든’이라는 단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처럼, 본문 6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네요. 우리 주변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요. 작은 것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보아도 지나치게 자신의 것만 챙기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도 우리의 마음이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요? 성경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명령하셨으니, 저 사람에게도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면 우리의 불편한 마음이 변하여 관용의 마음으로 바뀔까요?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천로역정』을 썼던 존 번연의 비유로 돌아가 보죠. 우리 마음에 이기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하고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한데 그 마음을 깨끗이 치워보겠다고 아무리 비질을 하여도 욕심과 이기심의 마음이 먼지처럼 가득 일어날 뿐 나의 마음은 관용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기쁨과 관용의 비결

그러면 성도들에게 기쁨을 명령하고, 관용을 명령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다시 4절과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도 중요한 표현이 4절과 5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이 구절의 가장 처음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음식을 먹고 즐거운 활동을 할 때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마음이 즐겁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들어나고 내가 소유한 것이 풍부해지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기쁨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재산이 허무하게 사라져 궁핍해지면 마음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그러한 모든 조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만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 안에서, 그도 그러한 주님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관용에 대해 권면하는 본문 5절의 말씀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고요?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뒤에 무엇이라고 덧붙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근거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때, 내가 지금 아웅다웅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보일까요? 본문 5절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말씀은 또 한편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시는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놀라운 역사가 찾아오게 될 것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조그마한 유익에 뭐 그리 집착할 이유가 있겠냐고요. 그러므로 본문 5절이 말씀하는 관용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삶에 펼치실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관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관용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보다는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관용보다는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기뻐하라, 관용을 알게하라는 명령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관용이 가득 차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힘을 써서 내 마음에 비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짜증, 불평, 분노의 먼지가 일어나게 돼요. 오히려 이기심, 탐욕, 욕심이라는 먼지가 내 마음을 더욱 채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기쁨과 관용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 평강

바울은 성도들이 그 마음에 품어야 하는 덕목을 두 가지 제시하였지요. 곧 기쁨과 관용입니다. 이제 본문 6절로 넘어오면 성도들이 그 마음에서 경계해야 하는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절) 

여기에 기도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네요.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가 등장해요. “다만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다음,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구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먼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기 바라는 것, 곧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 6절이 기도에 대해 권면했다면, 바로 다음 절인 7절에는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 등장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겠지요. 실제로 본문 7절에는 기도의 응답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내가 원하는 바,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 

오늘 본문이 약속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강,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화평이 기도 응답의 내용입니다. 7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 응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베풀어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이야말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기도의 응답, 혹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평강”이 등장하는 장면을 복음서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거의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던 바로 그때입니다. 이제 유월절 식사를 마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시지만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 것과 그들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어려운 질문으로 공격을 해와도 제자들은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풍랑이 이는 바다를 항해해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 그들을 따라왔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도 주님께서 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제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고통의 무게는 그만큼 크고 무거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겨둔 채 그들을 떠나야 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없이 기독교 공동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약속을 한 가지 해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a)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율법이 우리의 마음을 강제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에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충만한 평강이 흘러넘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은 매울 넓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너무도 지저분하고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율법이라는 하인이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방을 쓸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방은 깨끗해지기는커녕 바닥에 가득했던 먼지가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그 방에 물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방 안에 가득했던 먼지가 가라앉았고 그 소녀는 방을 말끔히 청소할 수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방에 물을 뿌려 온갖 더러운 먼지를 말끔히 치워버린 소녀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변 사람에게 기쁨이나 관용과 같은 마음의 덕목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마음에 먼지만 일으킬 뿐이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쥐어짜서 기쁨이나 관용의 감정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먼지만 일어납니다. 그 대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은혜가 뿌려질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 넘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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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기도문 10 “존 번연”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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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1. 12. 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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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라는 분은 『마음을 이끌다』(Leading Minds)라는 책에서 리더십과 리더가 전하는 이야기의 관계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리더들을 3가지로 구분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일반적인 리더’(ordinary leader)로 그들의 특징은 전통적인 이야기,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리더와 구별되는 두 번째 리더는 ‘혁신적인 리더’(innovative leader)입니다. 혁신적인 리더의 특징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입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마지막 세 번째로 구분한 리더는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visionary leader)로 기존의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리더를 말합니다. 당연히 하워드 가드너는 마지막 비전적인 리더가 가장 높게 평가하였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호세아서와 이후 살펴보게 될 아모서스를 읽어보면 이들은 참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워드 가드너의 구분을 굳이 적용하자면,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이야기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의 사건이요, 또한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곧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죄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호세아를 비롯하여 북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워드 가드너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비전적인 리더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통적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곧 내일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지요. 호세아를 비롯한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 위에 현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는 죄악의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미래를 일구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문장으로 농축되어 있는 구절을 찾는다면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 이야기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네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주셨던 장면, 나아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약속을 체결하는 장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구원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시지요.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10a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두 가지 비유로 표현되어 있네요. 먼저는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연상해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목을 축일 수 있는 한방울의 물만 만나도 너무 귀하죠. 하물며 메마른 광야에서 달콤한 포도송이를 만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을 만났을 때 그들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삶은 비천했습니다.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셨어요. 그러니 열방에 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바로 다른 어떤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의 하나님 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야기도 이와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와 상관없이 살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친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처럼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셨을 때의 감정을 두 가지 비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광야에서 포도”라면 두 번째는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를 경작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화과나무에 처음으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열매는 마치 광야에서 만난 포도처럼 탐스럽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화과나무에서 귀한 첫 번째 열매를 만난 농부는 그 첫 번째 열매로 만족할까요? 그것이 아니면 농부가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계속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겠지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을 만났던 하나님의 마음이요 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바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어제보다 더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던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전통적인 이야기 외에도 북 이스라엘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죠.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0b절)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의 사건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을 맺은 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지요. 그러므로 바알브올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바알브올의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바로 이것이 지금 북 이스라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현실이라고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좋아하고 우상을 사랑하더니, 결국 우상처럼 가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드러내는 북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러나 오늘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기대와 바램과 역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님들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사랑하여 우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변하는 분들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도사리는 유혹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기대하시지만, 오늘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였고 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어느덧 이 세상을 본받아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전통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 북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이야기로 끝이 나지요. 그러면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하였던 비전적인 리더들의 이야기, 곧 전통적인 이야기와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모든 이야기를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갈 비전을 노래하는 새로운 이야기는 본문에 없는 것일까요? 물론, 문자적으로는 하나의 문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절에는 내일에 대한 비전의 이야기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호세아 선지자의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문자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한 문장으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는 충분히 내일에 대한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동시에 이제는 그들이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써내려 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어요. 그리하여 여로보함2세 때에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대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외부에서는 앗수르와 아람의 위협을 당하며 내부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어요.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농축하여 서술해주었지요. 그러면 여러분, 이제 북 이스라엘이 내일의 참된 비전을 위해 써 내려가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지요. 지금까지 써왔던 바알브올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왔던 우상숭배의 이야기, 지금까지 써 왔던 죄악의 이야기를 모두 그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이야기를 나의 삶을 써 내려가는 것, 바로 그것이 내일에 대한 참된 비전이라 호세아는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은 어떠한 이야기를 써 내려온 삶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야기는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닮아 우리도 추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이야기, 곧 어제보다 거룩한 오늘의 삶을 써 내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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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빌립보서 강해2021. 12. 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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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지요.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서신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편지를 보낸 바울과 편지를 받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애틋하고 정서적으로 깊은 교류가 있었던 교회를 꼽으라면 빌립보 교회가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제2차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가 되었으니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소중한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많은 교회 가운데 빌립보 교회가 그의 마음에 특별하게 각인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다녔지요. 그때마다 바울을 물질로 도움을 주었던 교회는 오직 한 곳 빌립보교회였거든요. 바울은 기본적으로 자비량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 자신이 스스로 일하여 수업을 얻었고, 그것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진행하였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한 곳,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다른 선교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에 빌립보 교회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빌립보서는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들보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감정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1장을 통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정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 두 가지는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곧 감사와 확신입니다.

 

 

바울의 감사

 

자, 첫번째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은 감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절)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의 처지와 상황은 마냥 감사하고 마냥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빌립보서에 따라다니는 별명이 있지요? 그것은 옥중서신이라는 명칭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가 있었던 곳은 감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이제 교회 안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고. 바울이 참으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라면 잠시 고난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화위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바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고통을 당하며 더 괴로운 현실에 빠지느냐고. 아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 바울이 이처럼 감옥에 갇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 아니겠느냐고. 어쩐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던데 바울에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바울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빌립보서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이 편지 안에는 바울의 기쁨도 들어 있지만 바울의 슬픔, 곧 바울의 눈물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의 대목이 빌립보서 3장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기서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닙니다. 철저한 슬픔의 눈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8) 그러니 지금 바울의 처지는 마냥 기뻐하고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가득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감사, 그 실체가 본문 5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5절)

 

바울이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복음에 참여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기쁨과 감사의 이유는 복음에 참여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표현하는 기쁨의 참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넘어 이제는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참여하는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도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풍성한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있다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절)

 

오늘도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 옛날 바울의 마음에 가득 찼던 그 기쁨과 그 감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상황을 보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할 때도 많지요. ‘내가 지금도 눈물로 말한다’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놀라운 은혜만큼은 날마다 누리십시오. 나아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 감사와 그 은혜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쁨과 감사의 샘물이 날마다 풍성히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확신

 

빌립보서 1장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울의 감정, 그 첫번째는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마음은 두 번째 감정인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바로 앞의 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로 넘어오면 갑자기 주어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 6절에서 주어는 누구입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라고 되어 있네요.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죠.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장면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나의 물질을 들여 봉사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고,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의 주체는 실상 누구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바울은 그 마음에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의 이 확신은 사실 빌립보교회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었습니다. 자,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바울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라는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더니 결국에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또한, 1차전도여행의 중심지였던 아시아 지역을 2차전도여행에서도 다시 방문하는 것이 바울의 처음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서 바울이 가려고 하는 길이 계속 막히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16:6-7). 그러니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순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처음에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빌립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치며 주인에게 큰 수입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여종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오히려 선한 일을 한 바울을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빌립보 도시의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심하게 매질을 하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어디 그 뿐인지 아세요? 바울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관리들이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한 행동으로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바울에게 제발 이 성 빌립보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를 나와야 했어요. 여기까지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2차전도여행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참 놀랍지요. 바울이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바로 그날 밤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쫓겨나듯 빌립보 성을 떠나왔지만 간수장과 그의 가족, 그리고 강가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었던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빌립보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할 때 오직 그 빌립보 교회만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은 분명히 깨달았지요.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완벽한 실패였지만, 빌립보에서 자신의 사역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교회들 안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펼치고 계십니다. 코로나의 상황으로 한국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무엇보다 교회학교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과 같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가 맞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만큼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우리는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확신이지요. 그리고 본문이 말씀하는 감사와 확신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거나, 바울과 같이 위대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 그러한 감사와 확신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노래하는 바울의 감사와 확신은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인 바울 자신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 아닙니다. 본문이 이야기하는 감사와 확신은 바울이 아닌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감사와 확신이었어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울을 따라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함께 김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행한 일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한 것뿐이에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신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겠지요. 그들은 저 멀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리자, 있는 자리에서 바울을 위해 기도했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선교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통해 행하실 일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울과 같이 전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처럼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등의 고난을 감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동참할 수는 있잖아요. 우리가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와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는 업을지라도 오늘 나의 삶을 통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확신이 가득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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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1. 11. 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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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과 연시가 되면 우리 사회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내일에 대한 예측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이 흐른 뒤 전문가들의 예측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과연 이것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전문가들의 예측과 그 이후에 일어난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시대 전문가들의 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가 있다면 기상 예측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상청의 예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기상예측이 가장 정확한 분야라고 하니 참 흥미롭습니다. 경제계의 예측 – 예를 들어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한 전망 – 이나 정치계의 예측 – 이를 테면 내년 선거의 향방이 어떠하리라 – 는 것은 정확히 맞추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근대적 참모 제도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전쟁만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도서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의 모든 삶이 좌우됩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중요한 관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성경의 선언이지요. 여기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어떤 직감이나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내년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축복의 말씀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다 깨달을 수 없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연말과 연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는 내일에 대한 예측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바로 준비입니다. 


언제 VS 어떻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내용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멋진 성전을 자랑하듯 예수님께 소개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날이 이르면, 곧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 상전이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날은 언제 임하게 될까요? 과연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 위기의 날, 대변동의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이러한 질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언제’입니다. 언제, 나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그날이 찾아오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의 이 질문은 내일에 대한 예측을 원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누가복음 21장의 대부분의 내용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대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사람들의 질문, 곧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예측’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도 매우 중요한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본문 35절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5절) 

여기에 등장하는 ‘이 날’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바로 그날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았던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 번째로 세워진 성전으로 헤롯 왕이 세웠다고 하여 ‘헤롯 성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다고 하여 이른바 ‘솔로몬 성전’으로 부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그날에도 단지 성전 하나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지가 황폐해지는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그날의 참화는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5절에 등장하는 ‘그날’은 단지 종교시설 하나가 무너지는 날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기의 날이요, 대변동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그 위기의 날, 그 대변동의 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건강했던 몸에 질병이 찾아오는 것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어떤 분들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직이 그날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요. 어떤 분들에게는 큰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분들에게는 자녀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우리 중에는 그날이 이미 찾아온 분들도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 그날이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그날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그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큰 위기와 대변동의 날이 불현듯 찾아오겠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대변동의 날을 피해 갈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부족하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이 위기의 날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든 기대는 헛된 기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 임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도 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날을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자, 우리의 삶에도 위기의 그날이 찾아오고 나의 삶에도 대변동의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계속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3가지입니다. 첫째로,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술 취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방탕과 술 취함이 등장하지요.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함이나 술 취함에 깊이 빠져 계신 분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것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쉽게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앗은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떨어지자마자 새가 와서 먹어버렸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묘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삶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들은 어느 정도 이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 번째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이 단계만 넘어서면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분들, 그래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도 너무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 넘어지는 ‘생활의 염려’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 깊은 밑바닥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우리가 왜 근심합니까? 그 이유를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단순합니다. 지금도 내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바로 불신앙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생활의 염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요, 내 마음이 생활의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불신앙이 가득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가 본문 34절의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뜻밖에” 나에게 위기와 대변동의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뜻밖에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날이 찾아와서 우리 삶에 무서운 덫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거리들이 많이 몰려올지라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날들이 하루하루 쌓일 때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위기의 그날, 대변동의 그날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조심하여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6절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6절)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나의 마음을 지킬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이 구절은 나에게 그날이 찾아오지 않는다거나 나에게 위기의 때나 대변동의 시간이 찾아오는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그리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지요.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인자 앞에 서도록” 우리 성도들에게도 거대한 고통의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은 그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모든 일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능히,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수시로 점검하라는 말씀이지요. 본문이 시작하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방탕함이나 술 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영적인 민감성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이 시작하는 34절의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이나 본문이 마치는 36절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36절에는 깨어 있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이 덧붙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AD 3세기경,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도시를 떠나 사막에서 기도와 수도에 전념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막의 수도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제 막 사막에 들어와 수도자의 길을 시작한 사람이 명망이 높은 스승님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자네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도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네.”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 수련생은 다시 한번 스승님께 질문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며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함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빛이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아침 여러분의 마음에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듯 매일 우리의 삶을 찾아오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큰 위기의 날, 모든 것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대변동의 날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함으로 깨어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들은 그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 모든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든든한 손길을 우리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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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