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2022. 4. 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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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E. M. 바운즈는 설교에 있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강조한다. 설교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준비된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교자는 늘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설교 준비의 처음부터 설교를 마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들의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설교자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말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움직이시게 해야 한다." E. M. 바운즈는 계속해서 설교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려야 설교자가 말씀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길도 열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 강력한 결과를 가져오는 설교자는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데에 승리하는 사람이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에 강한 설교자는 강단에서 사람을 대하는 데에도 강하다." 

설교자의 기도는 구체적인 기도 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도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않는 것은 기도를 그만큼 중요한 사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반증이 된다. E.M. 바운즈는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과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이 모두 문제이지만, 이 가운데 더욱 악한 것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도하지 않으면 그 안에는 위선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실제 기도 시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기도에 별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기도는 필수적 요소다. 나아가 E.M. 바운즈는 설교자에게는 설교의 사명과 함께 기도의 사명이 주어 졌다고 선언한다. "기도를 자신의 주된 일로 생각하고,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기도에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다." E.M. 바운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설교자는 설교할 사명과 똑같이 또한 기도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우리 시대의 설교가 점점 그 능력을 잃어가는 근본 원인은 설교 자료나 설교 방법론의 부족이 아니라 기도의 빈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교자들의 기도가 빈곤한 현상은 곧 그들의 기도 시간이 현격히 줄어든 현상에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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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소그룹과 말씀묵상2022. 4. 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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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장총회(통합) 순교자기념선교회가 발행하는 『순교신학과 목회』(2022년 6월)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순교자기념선교회에 양해를 얻어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예배 시간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온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천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었던 제1차 유행 당시, 성도들 중에는 방역을 위해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 어떻게 마스크를 쓸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지금,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물론이요 대표기도를 하는 장로나 설교를 하는 목사들 중에도 마스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쓰고 예배할 수 있는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바르게 착용하지 않는 성도가 있으면 불안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코로나가 초래한 신앙생활의 변화에서 마스크 착용은 매주 작은 부분이다. 이른바 온라인 예배가 대중화되었고, 교회는 코로나 확진자나 유증상자들에게 온라인 예배를 권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생명처럼 지키며 강조하였던 주일 성수는 어디까지나 예배당에 몸으로 참여하는 예배였지만 코로나를 이유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을 이제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생활의 모습과 형태만 바꾼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의 양태만 변했다면, 교회와 목회자가 그에 적응하면 된다. 문제는 코로나의 확산이 신앙생활 자체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 가장 크게 위축된 목회 영역은 단연코 소그룹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고 약 2년 동안 정부는 교회에 단계별 방역수칙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르면 주일예배를 비롯한 정규예배는 예배당 규모의 20%부터 많게는 70%까지 성도들에게 개방할 수 있었다.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그나마 주일예배는 지속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일한 기간에 변하지 않는 방역수칙도 있었다. 곧, ‘소모임 금지’다. 소그룹의 활성화가 목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부터 시작된 약 2년의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소모임 금지의 시대’로 소그룹 목회는 축소가 아니라 원천 차단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한지 3년째가 되어 가는 지금, 한국 교회는 목회 현장을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다. 코로나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온라인 예배를 비롯한 자구책을 간구해야 했던 지난 2년 여 기간을 바벨론 포로 시대로 비유할 수 있다면, 팬데믹(pandemic)의 시대를 지나 엔데믹(endemic)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금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해야 했던 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소그룹 목회의 회복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소그룹 목회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급격한 변동의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가 무엇인지, 또한 팬데믹의 시기를 지나며 변화된 소그룹의 환경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

교회성장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원리는 그렇지 않으며,
방법론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Methods are many, Principles are few;
Methods may change, But Principles never do. 

코로나 팬데믹은 목회의 방법론을 보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들었다. 만일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급격히 변화하는 소그룹의 방법론만 뒤쫓는다면 정작 소그룹 목회에 면면히 흐르는 변하지 않는 원리를 놓치기 쉽다. 방법론이란 처음부터 다양하고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목회 현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 뒤에서 소그룹 목회를 관찰해보면 코로나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원리는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법론은 변하더라도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던 소그룹 목회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이다. 일찍이 소그룹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던 존 웨슬리는 대중설교만으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큰 한계가 있음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훈련을 시키지 않은 채 설교만하는 것은 살인자를 위해 자녀를 낳는 것과 같다. …(중략)… 정규적인 모임, 훈육, 규율 및 교류가 없으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더 빨리 영적 수면 상태에 빠진다.”[각주:1]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한국의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 조용기 목사다. 1981년 출판한 영문판 저서 『성공적인 구역』(Successful Home Cell Group)에서 조용기 목사는 사도행전 2장을 근거로 초대 교회 안에 성전에서 모이는 대형집회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급격한 부흥이 삼중축복과 오중복음을 설파하였던 조용기 목사의 설교와 그의 치유사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조용기 목사 자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이 초대교회의 가정모임에 해당하는 구역이라고 단언하였다. 

굳이 역사적 인물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설교만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던 목회자는 거의 없었다. D12, G12, 제자훈련, 큐티나눔방 등 소그룹 방법론을 적용한 다양한 양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었고 신학교에서도 소그룹 목회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한 한국 교회는 약 2년 간 소그룹 목회를 멈추어야 했다.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을 차단해야 했던 방역당국의 입장에서는 밀폐, 밀집, 밀접의 세 요소가 공존하는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하였던 것인데 방역당국의 기준과 의도가 무엇이었든 교회는 소그룹 목회가 멈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이 기간 한국 교회는 코로나의 시기를 지나며 기존의 소그룹을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을 적극 개발하였다. 대면하여 심방할 수 없으니 문고리 심방을 시행하고,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할 수 없으니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대면하여 교제할 수 없으니 온라인을 통한 만남을 추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본 한국 교회는 다시금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다른 노력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소그룹 목회를 대체할 수 없으며, 소그룹이 차단되니 목회의 원동력도 사라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 2년의 소모임 금지 시대는 목회 현장에서 소그룹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였다. 

둘째,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이다. 소그룹이라는 방법론은 대형집회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점은 소그룹 안에서 인격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형집회로 구분할 수 있는 주일예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에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더라도 주일예배만으로는 교회 성도들 사이에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그룹으로 모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쉽게 인격적 만남이 가능해진다.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뛰어난 교육적 효과에 있다. 한 사람의 교사가 학생 50명을 가르칠 때와 학생 10명을 가르칠 때의 교육적 효과는 분명히 다르다. 동일한 원리로, 멘토링과 상호 모방이 가능한 소그룹에서는 신앙의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소그룹의 장점을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현대 사회와의 적합성을 꼽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권위 있는 소수의 주장보다는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대중의 의견이 중요해진 다원주의 사회다. 그런데 교회의 대형집회는 회중들에게 수동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반면 소그룹은 참석자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소그룹의 장점은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의 원리다. 

소그룹이라는 환경의 일반적 장점을 지적하였으니, 그에 따르는 위험성도 집고 넘어가자. 소그룹에서는 참여자들의 인격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기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이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소그룹에서는 기독교 교리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을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어렵다는 의미인데 자칫 오류나 죄의 문제를 묵인할 수 있다. 또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소그룹을 인도하다 보면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unapproved teaching)이 소그룹을 통해 전파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소그룹 환경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로버트 우스나우가 이야기한 ‘자기중심적 종교’(me-first religion)로 변질될 위험성이다. 소그룹은 참여자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자칫 공동체나 그 너머의 사회적 이슈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로버트 우스나우는 ‘자기중심적 종교’의 특징이 소그룹으로 모인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관찰하였다. [각주:2] 소그룹의 장점과 함께 이러한 소그룹의 위험성 역시 코로나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인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 목회를 통해 목회 현장의 활력을 불어넣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은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소그룹의 위험성은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다.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교회사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내었던 소그룹 목회는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속회, class meeting)과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구역, home cell group)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리교의 속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방법론적으로 너무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감리교운동과 순복음운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덕(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가치를 추구하였기에 ‘속회-신도반-선발신도반’이라는 다층적 구조의 소그룹을 구성하였다. 반면,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가치를 전파하며 교회 성장을 추구하였기에 구역이라는 단 하나의 소그룹 형태로 만족할 수 있었다. 동일한 원리로 랄프 니버가 제창하였던 구역 모델은 목회적 돌봄이라는 가치를, 칼 조지가 주장했던 메타 모델은 평신도의 리더십이라는 가치를, 그리고 닐 콜이 전파한 가정교회 모델은 제자도라는 가치를 담아내기 위한 소그룹 목회다. [각주:3] 이러한 소그룹과 여성의 관계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소그룹 목회의 원리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매우 효과적인 목회 방법론이지만 목회자나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인 영성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그 장점을 발휘할 수 없다. 일례로 교회의 시스템을 팀사역 중심으로 변환하면서도 담임 목사가 목회 리더십의 일부를 평신도 리더들에게 이양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메타 모델에 해당하는 팀사역 중심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는 평신도의 사역 리더십인데, 담임 목회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이와 다르니 교회의 팀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에 부합하는 소그룹 목회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팬데믹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이 크게 활성화되었던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영성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주창했던 사차원의 영성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공유하는 교회의 분명한 가치였다. 그리하여 조용기 목사가 추구하는 사차원의 영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은 교회의 성장에 핵심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팬데믹 시대에도 풍성한 소그룹 목회를 꿈꾸는 장로교 목회자들은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 장로교회가 추구하는 소그룹 목회의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이다. 칼뱅은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각주:4]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지식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암기식 지식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경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라면 경건의 지향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다. 사랑과 경외라는 개념은 언듯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칼뱅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미지 안에서 조화시킨다. 만일 하나님 앞에 선 성도의 모습이 주인 앞에 선 종의 모습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지향점인데 시대가 변하여도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경건의 가치가 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새롭게 소그룹 목회를 구성하려는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소그룹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러한 경건의 훈련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로 소그룹 목회의 중요성, 소그룹 목회의 일반적 특징 그리고 소그룹과 영성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를 정리하고 나면, 이제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점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향후 코로나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것이 한국 교회의 소그룹 목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3년 동안 진행되어온 목회 현장의 변화는 얼마든지 관찰하여 소그룹 목회의 관점으로 분석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며 소그룹 목회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 역량의 편중 현상이다. 목회 현장은 그 환경에 따라 대형집회와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절대비교가 아닌 상대비교를 한다면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보다는 소그룹 목회가 더 크게 위축되었다. 코로나 시대는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코로나의 시대에도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목회적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그 방향이 바뀌었다. 코로나로 대면 예배에 제약이 생기면서 한국 교회는 온라인 예배에 목회 역량을 집중하였다. 온라인 예배가 익숙해지면서, 또다시 온라인을 통한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대형집회와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으로 구분한다면, 그 대부분이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코로나 시대는 신앙생활의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측면에서 코로나의 시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는 성도들의 ‘참여’가 급감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도들의 참여가 줄어드는 동안 오히려 급증한 것도 있다.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코로나의 시대라고 한국 교회가 보유한 목회 역량의 총량이 갑자가 줄어들든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는 목회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나 성경공부의 영상을 제작하고 때로는 문서의 형태로 비대면 자료를 제작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창에서 ‘예배’나 ‘성경공부’를 검색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콘텐츠 목록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이 신앙생활을 위한 ‘자료’다.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참여’와 ‘자료’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일반적으로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에서 성도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자료라면 소그룹 목회에서 성도들이 체험하는 것이 참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의 시대는 목회 역량을 소그룹보다는 주일예배를 비롯한 대형집회에 집중하게 강요하였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참여는 줄어들고 자료는 넘쳐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 이전에는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가 공존하였던 목회 현장이 팬데믹을 지나며 대형집회 중심으로 모든 목회 역량이 편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둘째, 진실한 관계를 향한 갈망의 증폭이다.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지칭하기 위해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코로나 블루의 원인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들은 서로 연계되어 증상을 악화시킨다. 의학계는 아직 코로나 블루의 정확한 원인과 진단, 그리고 치유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코로나 블루의 원인과 해법은 있다. 코로나 블루는 사람과의 불리가 원인이고,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이 해법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블루로 표현되는 코로나 시대의 특징은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망은 소그룹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의 소그룹인 속회에 참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장차 올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받기 원하는 갈망”을 제시했다. 여기서 웨슬리가 이야기하는 갈망이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관계로의 갈망인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존 웨슬리가 성도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소그룹의 참여 조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갈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배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환경이 바로 소그룹이다. 

코로나 시대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관찰할 때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는 사람들의 내면에 찾아온 아픔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와 만남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스스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진실한 만남에 대한 갈망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향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존 웨슬리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이러한 갈망이 소그룹 목회의 전제 조건이라면, 코로나 시대는 외형적으로 소모임 금지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소그룹 목회를 위한 좋은 토양으로 일구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온라인 소그룹의 대중화다. 코로나 이전에도 온라인교회에 대한 논의는 지속되었지만, 한국 교회의 대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직접 대면하여 만나지 않는 온라인 교회는 공동체성에 심대한 결함이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뒤로하고 지금 당장 온라인 소그룹을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리는 온라인 소그룹은 영상기반(Video-based) 플랫폼을 통한 소그룹이다. 영상기반 플랫폼은 화상전화 방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줌(ZOOM)을 비롯하여 구글 행아웃이나 페이스북그룹 등 소그룹 목회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영상기반 플랫폼이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소그룹을 위한 플랫폼은 그 외에도 다양하다. 카카오톡의 그룹콜처럼 음성기반(Audio-based) 플랫폼을 이용한 소그룹도 가능하다. 음성기반 플랫폼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화통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소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외에도 비동시적(Asynchronous) 플랫폼이 있다. 카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SNS)가 이 범주에 속한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승인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글이나 사진을 남긴다. 다만, 온라인 공간에 들어오는 시간이 서로 달라 비동시적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비동시적 플랫폼은 소그룹의 역동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참여자들에게 부담이 적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온라인캠퍼스 담당자인 제이 크란다(Jay Kranda) 목사는 온라인 소그룹의 시작은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문자 기반의 비동시적 플랫폼을 시작으로 음성기반이나 영상기반 플랫폼으로 옮겨올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었지만, 온라인 소그룹의 또 다른 장점은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소그룹은 필연적으로 공통된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플랫폼은 디지털자료를 공유하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 사례로 보고된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한 경우다. 새들백교회는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영상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와 연동하여 영상을 시청한 참여자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책자로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그룹 리더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거나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참여자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배부하고, 책자의 질문을 중심으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하면 된다. 한편, 알파코스의 소그룹은 토크(talk)가 핵심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알파코스에서는 토크에 앞서 반드시 주제 영상을 함께 시청하도록 되어 있다. 알파코스의 창시자인 니키 검블(Nicky Gumbel)은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알파 코스를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례를 소개하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새들백교회와 알파코스는 온라인 모임을 위한 플랫폼을 이용하기에 양질의 디지털 자료를 보다 쉽게 공유하고 그와 관련된 열린 질문을 활용하여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을 살려낸 경우라 평가할 수 있다. 

온라인 소그룹의 성공사례가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온라인 소그룹은 오프라인 소그룹에 비하여 인격적 상호작용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구촌교회와 한국소그룹목회연구원이 2021년 9월에 실시한 “한국 교회 소그룹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소그룹의 참여자들은 온라인 소그룹의 장점으로 ‘모임의 편리성’(38.4%)과 ‘바이러스로부터의 안전’(26.8%)을 꼽으면서도, 온라인 소그룹의 단점으로는 ‘깊이 있는 대화와 나눔의 어려움’(30.4%)이라는 대답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온라인 소그룹의 이러한 단점은 ‘모임 사이의 모임’(meeting between the meeting)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대면하여 모이는 소그룹을 진행할 때, 공식적인 소모임 외에도 참여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교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소그룹 모임 사이에 이루어지는 참여자들의 비공식적인 만남을 ‘모임 사이의 모임’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비공식적 만남은 공식적인 모임 안에서 참여자들의 인격적 상호작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요소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을 소그룹으로 진행하는 중요한 이유는 전염병의 확신으로 대면 모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팬데믹 시대의 온라인 소그룹에서는 비공식적인 만남인 ‘모임 사이의 모임’도 차단되기 마련이요,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온라인 소그룹에서만 서로를 마주하게 되니 인격적 상호작용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각주:5] 이처럼 팬데믹 시대에 온라인 소그룹은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인격적 상호작용이라는 소그룹 목회의 핵심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를 위한 제언

지금까지 논의한 소그룹 목회의 변하지 않는 원리와 소그룹 목회의 급변하는 환경에 근거하여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언을 세 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리더양성 소그룹을 먼저 재개하라. 여기에서 리더란 구역, 셀, 목장 등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말한다. 교회 안에 소그룹이 활성화된다는 의미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말한다. 그러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큰 타격을 입은 목양 소그룹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이겠는가?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회에서 구역장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를 훈련하는 방식이 소그룹이 아닌 대형집회의 특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구역장을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로 모아 담당 목사가 강의하는 방식이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함께 모일 수 없으니 어떤 교회는 영상을 제작하여 소그룹 리더들에게 배포한다. 영상을 공유하든 문서 자료를 배포하든 목회자가 평신도 소그룹 리더에게 자료를 일방적으로 공급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소그룹의 형태가 아니라 대형집회의 특성을 따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그룹 목회가 활성화되어 있는 시대에는 목회자가 대형집회의 특성인 설교나 강의를 통해 소그룹 리더에게 동기만 유발하여도 소그룹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이 소그룹에 참여하며 그 역동성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그룹이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는 강의와 설교만으로는 소그룹의 실제를 충분히 교육할 수 없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제자훈련은 리더양성 소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만 목양소그룹인 사랑방의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제자훈련원의 창립자인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소그룹 환경(리더양성 소그룹)과 교회 전체의 소그룹 분위기(목양 소그룹)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다. “제자훈련반이라는 소그룹을 강조하는 목적은 교회 전체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전 교회가 소그룹으로 묶여 가능한 많은 수의 신자들이 몸의 지체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게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제자반에서 훈련을 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각주:6] 

리더양성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목양소그룹의 리더를 양성하는 모임이니 소그룹의 특성이나 소그룹 인도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강의나 설명보다는 소그룹을 직접 체험하면서 체득하는 영역이 더 많다. 무엇보다 목회자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 참여하면서 모방을 통한 교육이 효과적이다. 그러면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리더양성 소그룹은 교회의 소그룹 목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나아가 교회의 모든 활동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 곧 그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그룹은 그것을 채택한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담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연결고리를 명확히 하는 가장 적절한 현장이 리더양성 소그룹이다. 개혁교회의 소그룹 목회는 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소그룹인 구역이 추구하는 오순절적이고 번영신학적인 조용기 목사의 영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 대신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개혁교회의 영성인 경건을 추구하는 소그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리더양성 소그룹은 담임 목사가 직접 목양 소그룹의 (예비) 리더들에게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인 경건의 가치를 보여주고, 경건을 함께 훈련하는 소그룹으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양성 소그룹부터 시작하다보면 교회 규모에 따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목회지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양성 소그룹에서 충분한 목양 소그룹의 리더가 배출된 이후에야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회의 소그룹이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소그룹 목회의 기초부터 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2~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온 한국 교회의 소그룹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무너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였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도 소그룹을 시작하라. 목회 활동을 그 규모에 따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와 소그룹 목회로 구분할 수 있다면, 전도의 방식도 동일한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곧 전도집회와 전도 소그룹이다. 20세기까지 세계 교회의 전도는 주로 전도집회가 중심이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먼저 전도 소그룹으로 변화된 곳이 영국이었다. 1980년대 영국에서 대규모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전도집회의 효과가 그 이전 세대에 비해 급격히 하락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연히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의 주최 측은 전도집회를 통해 회심으로 초청된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소그룹을 운영하였고, 전도보다는 전도 이후의 양육이 목적이었기에 그 이름을 ‘목양 그룹’(nurture group)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과는 주최 측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통계를 내어보니 전도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23%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한 반면 목양 그룹에 참여한 사람들은 72%가 이후 지역 교회에 등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 교회는 대형집회보다 소그룹을 전도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대표적인 전도 소그룹으로 꼽히는 알파코스도 1977년 영국의 목양 그룹 가운데 하나로 시작했지만 1986년 그 성격과 목적을 전도에 맞춰 개편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된 전도 프로그램이 되었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를 확성화 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이 필수다. [각주:7]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도 소그룹과 목양 소그룹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그룹 목회라고 하면 구역, 목장, 셀, 순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목양 소그룹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대체로 랄프 니버의 구역모델을 따라 목회적 돌봄을 통한 전도에 그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다. 목양 소그룹의 하나인 구역을 전도와 교회 성장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했던 조용기 목사는 목양 소그룹을 통한 전도와 교회 성장을 세포분열에 비유하였다. 건강한 어린이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세포가 분열하여 성장하듯, 교회 안에 건강한 소그룹이 정착되면 소그룹의 분화를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이론이다. 조용기 목사가 소그룹을 통한 교회 성장을 설명할 때 사용한 또 하나의 비유는 ‘교회의 뒷문’이다. 많은 새가족이 교회에 등록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않는 이유가 그만큼의 성도들이 교회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인데, 구역을 통한 목회적 돌봄은 교회의 뒷문을 잠그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목양 소그룹은 전도나 교회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관찰하는 바인데,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 

20세기까지 행해진 교회의 전도를 소그룹 목회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전도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된다. 새가족이 교회를 찾아오는 앞문이 전도 집회요,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뒷문을 잠그는 역할이 목양 소그룹이었다는 뜻이다. 부흥의 시대에는 전도 집회로 많은 새가족이 찾아왔고 구역을 비롯한 목양 소그룹은 빈번하게 분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전도 집회를 통해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한국 교회는 더욱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목양 소그룹은 분가를 멈추었다. 교회에 새가족이 늘어나면 목양 소그룹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지만 교회가 침체기를 맞이하면 목양 소그룹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여도 침체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목양 소그룹은 뒷문이지 앞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양 소그룹이 교회의 뒷문이라는 관찰은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가 교회의 전도에 달려있다는 통찰력을 준다.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양 소그룹의 활성화를 위해 어떠한 구조를 만들어야 할까? ‘전도 소그룹 – 목양 소그룹’의 구조다. 20세기까지 부흥의 시대를 견인했던 ‘전도 집회 – 목양 소그룹’의 구조에서 전도 집회를 전도 소그룹으로 대체한 구조다. 한국 교회는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팬데믹 시대는 이를 가속화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목양 소그룹을 포기할 것인가? 나아가 소그룹 목회를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의 전도 역동성은 전도 소그룹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일이지만, 전도 소그룹이 활성화되어야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날 수 있다. 동시에 목양 소그룹의 역동성이 살아나면 전도 소그룹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러한 선순환을 일으키는 시발점은 어디까지나 뒷문인 목양 소그룹이 아니라 앞문인 전도 소그룹이다.

셋째, 목회자가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라. 대형집회 중심의 목회 활동은 모임을 주도하는 소수의 목회자가 다수의 평신도 참여자를 대상으로 펼쳐진다. 한 마디로, 철저히 목회자 중심이다. 이에 반하여 소그룹 환경은 평신도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모든 소그룹을 목회자가 참여하거나 주도할 수 없으며 상당 부분을 평신도 리더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과 역량은 주로 대형집회 목회 현장에서 발휘되며 소그룹 목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목회자의 역할이 적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특별히 팬데믹의 시대에는 직접 소그룹을 인도하는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 안의 모든 소그룹을 직접 이끌 수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참여하고 직접 인도하는 소그룹의 분위기는 교회 소그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한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참목자상』(The Reformed Pastor)이라는 책에서 목회자의 회개를 촉구했다. 백스터는 목회자가 시급하게 회개해야 할 항목으로 교만, 게으름, 세속적 관심, 분열 등을 언급하는데 그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목회자의 죄는 목양의 사명을 다하지 않은 죄다. “대개 사람들은 목회가 설교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베풀고, 병자를 심방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목회가 이 정도로 인식될 때 성도들은 목회자를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고, 목회자 역시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소명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의무를 제한해버리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유능한 목회자들 중에도 설교 준비에 열심을 내지만 영혼 구원을 위한 다른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양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각주:8]  이처럼 열심히 설교문을 작성하여 강단에서 외치는 것으로 목양의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는 풍습, 바로 이것이 리처드 백스터가 생각하는 반드시 회개해야 할 목회자의 죄악이었다. 나아가 그가 강조한 목회자의 개혁은 설교와 더불어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그들의 회심과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양의 책무를 말과 글로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매주 모이는 두 개의 소그룹을 인도하였다. 하나는 지난 주일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는 그룹이요, 또 하나는 청년들과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이러한 외침과 실천은 팬데믹 시대로 소그룹 목회가 크게 위축된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소그룹 목회는 쇠퇴를 넘어 붕괴되었다. 이제 소그룹 목회는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도 소그룹 목회의 그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다.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 - 예스24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목회 영역이 소그룹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시대에 소그룹 목회를 위한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목회 현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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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Wesley, “Rev. J. Wesley’s Journal on August 25, 1763,” in The Works of John Wesley, 8:254. [본문으로]
  2. Robert Wuthnow, ed., “I come away stronger”: how small groups are shaping Americ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356. [본문으로]
  3. 소그룹의 형태와 그에 따른 영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부에서 자세히 서술하였다. [본문으로]
  4.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2.1. [본문으로]
  5. 온라인 소그룹과 모임 사이의 모임의 관계에 대해서는 Allen White, Leading Online Small Group: Embracing the Church’s Digital future (LA: Allen White Consulting, 2020), 110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6. 옥한흠, 『다스쓰는 평신도를 깨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1998), 248-249. [본문으로]
  7. 교회 안에 전도 소그룹을 정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한진, 『팬데믹 시대의 소그룹 목회』(양주: 드림북, 2022), 119-123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8. Richard Baxter, 『참목자상』, 최치남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2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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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4. 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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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6) 

B.M. 바운즈는 데이비디 브레이너드라는 위대한 선교사의 기도를 소개하며 이번 장을 시작한다. "때대로 우리는 브레이너드가 아메리카 숲속에서, 죽어가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모든 개인의 뿌리에는 기도 - 은밀하고 뜨겁고 믿음이 실린 기도 - 가 있다."(윌리엄 캐리의 형제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한 선교사의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피해야 하는 두 가지 극단적 경향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것이다. 사막의 수도사나 고대의 은둔자들이 그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갈망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정작 그들의 깊은 영성은 다른 사람의 삶에 유익을 끼치지 못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로 인한 무한한 유익을 사람들에게 나눌 때에 비로소 유용하게 된다."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피해야 하는 또 하나의 극단적 경향은 철저히 사람들만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만의 일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경향도 피하고, 사람들만 의식하는 경향도 피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중보 기도다. E.M. 바운즈는 중보기도의 위대함을 이렇게 역설한다.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고하는 일은 훨씬 더 위대하다.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고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도는 문맥상 중보기도처럼 보인다.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는 권면이 그 앞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의인들을 향해 우리는 믿음으로 선언할 수 있다. "의인의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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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설교문2022. 4. 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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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금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하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괴로워하게 되지요. 우리 시대 젊은 청년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를 원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수저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어떤 이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지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때 오늘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오더라도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참고 인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내일을 바라보며 참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였던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대표적인 저서가 『희망의 신학』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을 낙관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희망이나 낙관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이지요. 그러나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낙관은 과거나 현재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나타나는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나 우리 사회의 형편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내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 미래가 낙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여러분의 삶은 낙관적이신가요? 여전히 9개월이 남아있는 올해의 남은 시간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미래는 낙관적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대로 지속되기만 하면 일 년 뒤, 오 년 뒤, 혹은 십 년 뒤에 마주하게 될 여러분의 미래를 낙관하실 수 있으십니까? 

희망은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라는 점에서 낙관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과 낙관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낙관이 과거나 현재에 잠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망은 현재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로는 내일에 대한 낙관이 불가능할 때, 지금의 모습에만 집중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을 그때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좋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애굽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을 선포하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사형수가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고 낙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희망입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곧 출애굽의 이야기였지요. 그 옛날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셨다는 이야기는 유대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너무도 먼 옛날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이사야 43장이 선포되었던 때를 기준으로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은 천 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거든요. 너무도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 그래서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열 지파에게 일어난 일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이스라엘의 열 지파, 곧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앗수르의 민족혼합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너무도 멀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정책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제국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형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일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이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15절) 

여기에서 특징적인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온 우주 만물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만물의 창조자라고 말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이끌어주셨지요.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흔히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묘사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혹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창조자’라고 묘사하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묘사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주시고 구속하여 주신 사건은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드는 일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창조자’가 되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와의 연속성이나 어떠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오래 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던 출애굽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지요. 그런데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계속해서 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을 뒤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를 바닷물로 물리쳐주신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이 흐르게 하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셨지요. 그 장면은 20절에 등장합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처럼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나오게 되는 출바벨론을 예언하는 오늘 본문은 예전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내일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일까요? 과거에 출애굽을 경험했던 민족이니 이후에도 바벨론에서 자유의 몸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내일을 낙관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사건은 약 천년도 더 넘게 지난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18-19a절)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새로운 역사이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약 이천 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사순절, 고난 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는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의 멸망은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기에 지금의 현실을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내일을 낙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매년 반복되는 식상한 이야기요 지금 나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그 어떠한 낙관적인 전망도 불가능하여 소망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한 우리의 심령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의 자세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내일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지요. 그런데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명령형으로 시작하네요.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명령은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참된 소망을 품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십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지요. 동일한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제 시작된 4월 한 달 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고 믿으시나요? 앞으로 남은 2022년의 9개월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여러분에게 보이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하지도 말고 옛날 일은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하지도 마시고, 여러분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도 마십시오. 그 대신 여러분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내일에 대해 열린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자세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찬송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1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셨을 때,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많은 노래들이 등장합니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과 미리암이 불렀던 찬양이 그렇지요. 모든 대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렀던 찬양도 그 예가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오늘 본문의 약속처럼 자유인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시편 126편을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직접 체험한 뒤에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터져 나온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이 이야기하는 찬송은 조금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내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21절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체험하였기에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소망하면서 부르는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에 그 마음에 희망을 품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부르시는 찬양은 어느 쪽에 가까우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현장을 체험하였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때는 옆에서 누가 찬양을 부르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모두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이 나의 삶에 나타나지 않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희망을 부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현실은 내일에 대한 낙관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라도,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쳐나고 여러분의 입술에는 찬송이 흘러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그 하신 말씀,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는 이 말씀을 
반드시 실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cf. 민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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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3. 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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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1-3절) 

E. M. 바운즈는 기독교의 '정통'(orthodox)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3장을 시작한다. "우리는 정통을 사랑한다. 그것은 좋다. 정통이 최고다. 정통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하고 정연한 가르침이요, 진리로 거짓과 싸워 이김으로 차지한 상패요, 정직을 무너뜨리는 물결과 불합리한 미신과 불신을 막기 위해 믿음이 쌓은 둑이다." 정통은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고 수호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이단의 가르침이 만연하고 세속화의 거센 물결이 교회를 위협하는 오늘날 기독교 정통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지키며 수호하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정통은 커다란 위험성도 안고 있다. E.M. 바운즈는 이렇게 썼다. "수정같이 단단하고 투명하며, 모든 것을 점검하고 타협 없이 싸우는 정통이라 할지라도 문자에 불과할 수 있다." 정통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앙생활의 깊은 차원을 체험할 수 없다. 

정통이 문자에 머무르면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것처럼, 기도 생활 역시 형식적인 기도에 머무르면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 E.M.바운즈는 죽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죽은 기도일수록 길다. 짧은 기도, 살아있는 기도, 진심이 담김 기도, 성령으로 하는 기도 -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며 뜨겁고 단순하며 기름부음이 있는 기도 - 가 요구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체험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배웠던  정통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경험이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기도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도요, 문자를 넘어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다. 바로 그때 E. M. 바운즈가 노래하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행위요, 가장 숭고한 노력이요, 가장 신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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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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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날 저녁 주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자신을 팔아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 가운데 리더로 손꼽힐 수 있는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날 밤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유월절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던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의 충만한 기쁨, 하늘의 풍성한 즐거움을 약속해주셨지요. 그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을까요? 삶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의 공동체

오늘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을 키우는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아흔아홉 마리가 있고, 그의 눈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이 무리를 떠나 홀로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지요. 마침내 잃어버렸던 그 한 마리를 되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잃어버렸던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들에 놓아두었던 아흔아홉 마리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잃은 양의 비유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다른 두 개의 비유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동일합니다. 본문에 이어 등장하는 비유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네요.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의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장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동일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즐거움이 가득 넘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즐거운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을 때,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불편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더라도 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기쁨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처럼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으로 점철될 때가 많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비유에는 큰 기쁨을 누리는 대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기쁨을 누리고 누가 기쁨을 잃어버렸는지 살펴보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지도 알 수 있겠지요. 자,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보다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배경이 등장합니다. 과연 누가 등장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제일 먼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곧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고 말씀합니다. 이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람들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들이 잃은 양, 곧 목자가 돌보았던 백 마리의 양 가운데 목자의 돌봄으로부터 벗어났던 한 마리의 잃은 양입니다. 어떠한 이유로 목자와 양 떼로부터 이탈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양 자신의 잘못과 실수가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양은 무리로부터 이탈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목자와 양 떼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점차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고, 맹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그 양은 생명의 큰 위협을 느꼈겠지요. 그렇게 이제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절망뿐이라고 자포자기할 그때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목자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목자의 어깨에 업혀 양 떼로 돌아오는 이 양의 마음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목자를 만나 양 떼로 돌아온 한 마리의 양, 곧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온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은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네요.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무엇에 해당할까요? 그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해당하겠네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들에 풀어놓았을 때 그 들판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에 기쁨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자가 이끄는 양 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평과 원망과 시기심만 가득해졌습니다. 

과연 무엇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는 큰 기쁨을 선사하였고, 과연 무엇이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들판에 늘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에게는 기쁨이 아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은혜와 의무의 차이입니다.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목자의 들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목자의 양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홀로 남아 맹수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자가 찾아왔잖아요. 그러므로 이 한 마리의 양에게는 목자의 울타리, 목자의 들판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당연히 그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지요. 반면,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무감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목자가 어디로 이끌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들로 하여금 목자의 들판을 떠나지 않게 붙잡고 있었어요. 이러한 의무감이 그들을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두고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은혜의 체험을 가지고 목자의 들판에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있지만, 동일한 그 자리에 책임감으로 앉아있는 양에게는 기쁨이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주님의 푸른 들판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서 주님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나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주님께서 주시는 꼴을 받아먹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 주님의 들판에서 쫓겨나야 했고 주님의 양 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사나운 맹수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이 없이 자포자기하고 있을 그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어깨에 짊어지시고 주님의 들판과 주님의 양 떼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잖아요.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랍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은혜로 시작한 신앙생활이니 당연히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불평과 짜증이 가득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무와 책임감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들판에 앉아 있는 것이 은혜였는데, 어느덧 그 자리는 내가 떠나서는 안되는 의무와 책임이 된 것이죠. 그 자리를 떠나면 벌을 받을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리를 떠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러니 마음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마음으로 앉아 계시나요? 주일을 맞이했으니 마땅히 예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앉아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만일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시간이 문제지 그분들의 마음에는 신앙생활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기쁨이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의 자리라고 여기시는 분들은 잠시 잠깐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으로 내 마음에 즐거움을 빼앗기는 순간도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기쁨

신앙생활의 기쁨, 그것은 은혜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임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의무과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은혜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혹 은혜가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았을 때, 그리하여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분문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본문 1-2절에 등장하는 세번째 등장인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등장인물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등장인물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관찰해보면 이 두 그룹의 사람들 외에 본문에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지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양 백 마리를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가는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하고 있는 큰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이 목자의 기쁨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누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5-6절)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기뻐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은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큰 기쁨을 부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원천이 있다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차장오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요 우리를 발견하여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 주님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에서 의무와 책임으로 바뀌었다면, 나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의무와 책임만 남아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전히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발견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그 누구보다 즐거워하셨던 주님의 기쁨이 다시 한번 여러분의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삶의 거대한 풍랑이 몰려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예배생활, 
나아가 주님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인생에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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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3. 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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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5-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양한 역할과 사명이 주어져 있다. 교회에서 교회학교, 구역장, 찬양대원, 중보기도팀 등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 혹은 자녀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학생은 학교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무슨 일이든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의 참된 의미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헛되다. 문제는 성령의 역사를 가장할 뿐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바울은 그것을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복음을 그저 문자로 기록해둔 조문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논리정연하고,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가득하여도, 심지어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더라도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E. M. 바운즈는 이러한 사실을 실감 나는 예화로 설명한다. "진주를 밭에 뿌린 것과 같이 생명이 없다." 진주는 아름답고 값진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품은 아름답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거기에서는 생명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율법 조문이 아닌 영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을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가 그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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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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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셨던 핵심 메시지는 ‘회개’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때부터” 여기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그러므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생활을 일삼았던 나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다가 그 삶을 돌이켜 믿음의 길로 돌이킬 때,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오랜 해오신 분들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자신이 익숙한 삶의 방식과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지 않던가요? 복음은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지요? 복음은 차별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복음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교만하여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복음의 진리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니 그 방향을 돌이켜 복음의 진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을 매우 오래하신 분들은 아마도 충분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급격히 부흥하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아 1900년대 후반이었지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문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철야기도도 참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철야기도는 말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도하고 그 다음날 새벽기도로 이어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의 많은 내용이 회개 기도였습니다. 저 장로님, 저 권사님은 회개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열심히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지요. 교회학교에서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한다면, 그 기간 내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지요? 수련회나 성경학교에서 쉬지 않고 드렸던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너무 약해진 것은 물론이요, 참된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듯하여 애석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회개의 기도가 사라져버린 이 현상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복음의 진리에 바르게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니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니, 지금도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져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요 이 땅의 교회는 어느덧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회개라는 주제는 듣는 이들에게 편안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의 진리를 떠나려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회개가 있을 때만 우리의 내일에는 참된 소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에 회개의 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진심 어린 회개가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심령에 회개의 참된 능력이 나타나 우리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내일이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두 개의 큰 비극적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1절)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는 제물로 사용했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외에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최소한 다섯번 등장합니다. 그러니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정치권력자가 저지른 학살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덞 사람이”라고 시작하네요. 실로암이라는 장소에 세워져있던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이 생명을 잃어버렸네요. 본문 1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권력자 한 사람의 횡포로 말미암은 비극이라면, 본문 4절이 묘사하는 장면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일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자,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큰 재앙을 만나 생명을 잃어버린 이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저지르지 않은 큰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 죄가 사람들에게는 가려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십니까? 본문 5절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다음이지요.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을 말씀하시네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본문 5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곧 예상치 못했던 재앙으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러한 재앙을 당할만한 죄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예수님께서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재앙을 당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가운데 어느 지점을 반대하며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을 만나 죽음을 당한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도” 그렇습니다. 큰 재앙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희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그 다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기독교의 진리, 곧 기독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의 복음은 그 시작이 비극적인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먼저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의 말씀 그대로이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져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리하여 로마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예수님께서 지금 강조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도”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만이 아니라,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열매를 얻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이전의 상태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심판이나 멸망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덧붙이시는 이른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처럼 쉬운 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지기를 고용하여 무화과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나아가 무화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자, 이제는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겠지라는 마음으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포도원의 주인은 결단을 내립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7절) 

지금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너무도 위태로운 상황이지요. 지금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지기가 도끼를 휘두르면 큰 재앙을 만나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처럼 위태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무화과나무가 포도원 주인이 제공하는 풍성한 돌봄과 영양분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원 주인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잘 조성된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오랜 시간 포도원지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처럼,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가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지금 당장이라도 도끼에 찍혀 큰 재앙을 만날 운명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 하나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오늘 나의 삶에 적용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서 절대로 제거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으신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아니라, 너희도”(X2)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회개의 열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니 찍혀 버려질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이 정도의 평안을 허락해 주시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로 지금 당장 큰 재앙을 당해도 전혀 이상 할 것 없는 우리들에게 이처럼 평안을 허락해 주실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절이 그 이유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서지요. 그리고 간청합니다. 조금 더 유예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지금 포도원 주인은 물론이요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일년을 더 기다릴 수도 있고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모든 좋은 거름을 다 줄 수도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에 대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의 의미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본문의 ‘열매’를 ‘회개의 열매’라고 이해하면, 마지막 두 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가 올해는 회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제가 필요하면 도랑도 파주고, 
필요하면 거름도 줄 터이니 
그가 회개하기만 한다면(X2)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도 지금도 우리에게 기다리며 기대하고 계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변하지 않는 운명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만이 우리와 우리 교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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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3. 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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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익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문은 생명의말씀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장 9a절 )

E. M. 바운즈는 교회에 대한 현실 진단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 그리고 교인수 증대를 위해 새로운 방법, 새로운 계획, 새로운 조직을 궁리하는 데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있다." 바운즈가 이 문장을 기록한 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교회의 주된 관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방법, 계획, 조직에 여전히 온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을 놓치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방법과 계획과 조직을 추구하는 동안 하나님은 복음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혹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더 좋은 방법과 계획과 조직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 

E. M. 바운즈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설교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여러 가지 비유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 하나의 비유는 '하나님의 기름이 통과하는 금관(金管)'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보내야 하는 설교자는 금관으로서 스스로를 깨끗하고 흠이 없도록 관리해야 한다. 바운즈는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에 집중한다. 복음은 바울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일꾼이 되어 그의 전 인격이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설교자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생명을 주는 능력에 있어서 설교가 사람을 능가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한다. 그리고 죽은 설교는 영혼을 죽인다. 모든 것이 다 설교자의 영적 특성에 달려 있다." 

이제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E. M. 바운즈의 대답은 명확하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만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기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준비보다 앞서야 하는 것, 모든 준비보다 최후까지 집중해야 할 것은 기도다. "기도는 사람을 만든다. 기도는 설교자를 만든다. 기도는 목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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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누가복음 강해2022. 3. 1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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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으로도 많이 알려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은 처음부터 승패가 너무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친히 이끌었던 페르시아의 군대는 25만 명에 이르렀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급하게 징집한 그리스 군대의 숫자는 칠천 명에 불과하였지요. 그러나 그 칠천 명 중에는 조상 때로부터 전쟁의 용사로 살아왔던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점령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에는, 한쪽은 높은 절벽이 놓여있고, 또 반대쪽은 깊은 바다가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은 좌우의 폭이 18m에 불과했던 그곳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테르모필레,’ 곧 열문이라는 뜻입니다. 스파르타인 300명은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로 그곳 테르모필레를 막아섰지요.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는 스파르타인들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다음 날 아하수에로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정예부대를 투입했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25만 명의 잘 훈련된 대군이 고작 스파르타인 300명에게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파르타인들의 저항은 매우 강력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오래지 않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인 가운데 배신자가 나타났고, 그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절벽 위를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좌우폭이 18m인 매우 좁은 지역에서 싸운다면 제아무리 거대한 군대라 하더라도 300명의 용맹한 스파르타인들을 소탕할 수 없었지만, 이제 페르시아 군대는 그들을 앞과 뒤에서 포위할 수 있으니, 스파르타인 300명이 2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더 이상 막아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남겼던 메시지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투스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300명의 용사로 25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길을 회피하지 않았고, 스파르타인답게 최후의 항전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지요.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걸어가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단 한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 이것이 전사로 한평생을 살았던 스파르타인의 삶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일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여, 나는 성부 하나님이 기대하신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노라” 


거부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 그들이 활동하던 장소,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예수님이 제발 떠나면 좋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다른 이유를 댑니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는 이 이야기는 복음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전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곧 헤롯에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이 정확한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들은 것인지 혹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위협하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분명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에서 떠나시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를 원했던 사람이 헤롯일 수도 있고 그 이야기를 직접 예수님께 전달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분명히 말했던 이야기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구약성경의 내용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그런데 예수님의 이 한탄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적대시하였던 헤롯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일반 시민들도 그 주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품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끝까지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그들을 향해 성부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하는 많은 죄악이 있지요. 우리 인간이 범하는 수많은 죄 가운데 너무도 중요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죄를 하나 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중대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만 꼽는다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언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유대인들이 범한 죄악이 두 가지로 요약되어 있네요.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악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매주 주일이 돌아오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만 저지르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던 사람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죄의 목록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무감각의 죄”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요청했지요. 그들의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께 직접 전달되었을 때, 예수님은 매우 확고한 대답을 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2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을 고치시는 것은 누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겠다는 이 말씀은 아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멈추거나 중단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이 멈출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시네요.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에서 제 삼일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이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장면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공생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33절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로서 걸어가야 하시는 공생애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죠.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런데 그 길의 최종 목표지가 어디입니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마침내 성부 하나님께도 외면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가리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할 때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호의를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인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5a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니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5b절)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동일한 뜻을 담고 있는 긍정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가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아직은 기회가 있으니 돌이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이끄는 25만명의 군대에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싸움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파르타인으로서 스파르타인답게 행동하며 죽는 길을 선택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스파르타인들의 이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다툼을 그치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살라미스 전투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테르모필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었다.”

예수님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제자들에게는 배신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실패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결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당당히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은 더 이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지 않는 것,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생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심령마다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분명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지금도 따라가시는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따스한 품에 품어 주시는 그 은혜가 언제나 충만히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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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