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4. 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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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바로는 밀고 당기는 협상을 계속했다. 여러 가지 재앙을 당한 바로는 모세에게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제안했다(출애굽기 8장 25절).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로는 다시 한번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광야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이야기한다(출애굽기 8장 28절). 그러나 모세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라는 것이다(출애굽기 8장 29절). 길게 끌었던 모세와 바로의 협상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마침내 결렬되었다.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출애굽기 10장 28-29절) 


흑암, 그 짙은 어두움

모세와 바로의 협상이 결렬되는 순간, 애굽 땅에 임한 하나님의 재앙은 흑암이었다. 당시에는 어두운 밤을 밝힐 불빛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모든 것이 멈추는 혼돈의 시간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능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리신 흑암은 매일 밤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어두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흑암, 곧 짙은 어두움으로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흑암이요(창세기 1장 2절),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심판의 흑암이었다(cf. 아모스 5장 18-20절). 

애굽의 바로 왕은 자신의 제국이 무너지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였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의 눈이 짙은 어두움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이 큰 흑암에 덮여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땅에는 빛이 있었다. 여기에 어둠과 빛이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장 5절)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한다(요한복음 8장 12절). 


재물에 대한 욕심

바로에게 빛이 사라지고 그의 눈이 어두워지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모세와 바로의 협상은 조금씩 합의점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합의할 수 없는 영역은 애굽을 떠나는 규모에 있었다. 모세의 입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모든 가축을 이끌고 애굽을 나가겠다는 것이다(출애굽기 10장 9절).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의 장정만 나가라고 이야기하다가(출애굽기 10장 11절), 이스라엘 모두가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소유한 양과 소, 곧 재물이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출애굽기 10장 24절) 

재물에 대한 욕심이 바로의 마음을 짙은 어둠으로 뒤덮었다면, 이스라엘 자손 역시 재물에 대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도 재물에 대한 욕심에 빠지면 하나님의 빛이 그들의 마음을 더 이상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에게 했던 모세의 대답은 가축을 끌고 가기 위한 핑계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빛이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했다.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출애굽기 10장 26절) 


토의 질문. 
나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욕심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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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4. 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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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바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출애굽기 5장 1-4절). 나아가 바로의 이간질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자신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출애굽기 5장 19-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출애굽기 6장 29절).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새로운 용기와 힘이 필요했다(cf. 출애굽기 6장 30절). 


바로에게 신과 같이

한번의 큰 실패를 경험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겠다.’(출애굽기 7장 1b절)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세워주신다(출애굽기 7장 1c절). 여기에 대언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비’인데,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예언자’ 혹은 ‘선지자’를 나타낸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듯 모세에게는 그의 말을 대언하는 아론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신처럼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애굽의 바로 왕은 초라하게 지팡이 하나를 잡고 자신을 찾아온 모세와 아론을 무시한다. 현재 애굽의 왕좌에 앉아 있는 바로와 40년 전 망명하여 미디안의 목자로 살고 있던 모세는 그 힘과 권세가 누가 보아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신과 같이 만들겠다고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실 것이고(출애굽기 7장 3절), 결국 바로를 비롯한 모든 애굽 사람들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출애굽기 7장 5절). 그러니 애굽에 재앙이 내리면 내릴수록 모세의 권세는 높이 올라가고 바로의 통치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의 기도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사무엘상 2장 7절) 

토의 질문. 
나를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나의 마음 자세가 어떻게 변할까요? 


이적을 보이라 

성경에서 이적[기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본격적으로 내리시기 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간단한 이적을 보여주신다. 아론이 모세의 말에 따라 지팡이를 던지니, 그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였다(출애굽기 7장 9-10절). 바로의 마술사들도 동일한 요술을 부렸지만,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리며(출애굽기 7장 11절)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은 마술사의 요술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러한 이적을 바로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셨다(출애굽기 7장 9절). 이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면, 바로는 10가지 재앙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이적은 1차적으로 바로에게 보여준 이적이었지만, 동시에 모세와 아론에게 보여주시는 이적이기도 했다.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이미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출애굽기 4장).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키는 장면은 모세도, 아론도 이때 처음으로 보았다. 바로는 이 장면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지만, 모세와 아론은 달랐을 것이다.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보다 뛰어나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더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이적[기적]의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기적]의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장 30-31절) 

토의 질문.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 속에 펼치신 은혜의 역사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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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1. 4. 1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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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은 자신의 심리학을 적정 심리학으로 부른다. 적정 기술이란 첨단 기술을 추구하기보다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기술이다. 심리학에서도 ‘적정’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이른바 ‘정신과 의사’라는 자격증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한다. 정혜신은 정신의학이라는 첨단 기술의 가장 큰 맹점은 사람을 환자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최첨단의 정신의학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적정 심리학,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마음의 아픔과 치유 

사람의 마음이 아픈 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 소멸이다. 모든 인간은 '나'로 살고 싶고, ‘나’로서 인정받고 싶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나'로 살지 못하고 '너'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비극인데, 곧 자기소멸이다. ‘나’의 핵심은 겉모습이나 나를 묘사하는 다양한 수식어가 아니다. ‘나’의 핵심은 지금 나의 감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의 감정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자기 소멸에 빠지지 않고 나로서 존재하게 된다. 

마음의 아픔이 '나'의 상실이라고 주장하는 정혜신은 나를 잃어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심리적 CPR'이라고 강조한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해주듯, 자아 상실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자아를 인정하고 그 자아에 무한히 관심을 가져주는 역할이다. 심리적 CPR의 구체적인 방법은 질문과 경청이다. 너무도 흔하게 들리는 질문과 경청이라는 방법이지만, 이 책의 대답이 식상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질문과 경청의 목적이 '나'라는 인격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공감 VS 감정 노동 

사람의 마음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방법,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기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 '공감'이라고 정혜신은 확신한다. 그가 말하는 공감은 피곤한 감정노동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 같이 공감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 노동일뿐 진정한 공감이 아니다. 진정한 공감, 곧 도움이 되는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 사람 자신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주변부의 이야기만 무성할 때는 공감이 아닌 감정노동이 된다. 또한 상대의 감정은 언제나 옳고 공감이 필요로 하지만, 감정이 아닌 생각과 행동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이 아닌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을 공감이라고 오해하면, 그것 역시 바른 공감에서 멀어져 감정노동이 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과의 만남에서 공감이 아닌 감정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두서없는 말을 '친절히' 들으며 자신은 심리적 에너지를 소진한다. 심지어 그의 마음을 공감하지는 못한 채 그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트레스만 쌓인다. 

“누군가의 속마음이나 정서적 결핍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일은 이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다. 감정 노동처럼 그저 견디는 경우가 많다.”(228쪽) 

목회자라는 직업군이 정확히 이러한 경우다. 


공감의 구체적인 방법 

공감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떤가?'를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감정은 언제나 옳다는 스스로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가족이나 주변의 친구로부터 공감을 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특별히 목회자라면, 감정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건강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공감할 수 있다. 

정혜신이 주장하는 공감 혹은 심리적 CPR에 동의한다면, 이제 그가 제시하는 핵심 도구를 활용해보자. 

핵심 질문 -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의 아픈 상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그 사람의 상처를 기억나게 하여 더 아프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상처를 내어놓았을 때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지 않는 거절이다. 상처 난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태도는 오히려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라. 그리고 그의 감정에 공감하라. 

공감의 언어 - "당신이 옳다." (당신이 그런 마음이 생겼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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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1. 4. 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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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이 충분한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몸은 가장 가까이 붙어있지만 마음은 서로 멀어진 현실, 이것이 불행한 결혼생활의 핵심 이유다. 친밀감의 두 가지 기초는 안정감(security)과 중요감(significance)이다.

 

친밀감의 두 가지 기초

l   안정감 – 내가 진정 사랑받고 있으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

l   중요감 –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계속 중요하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 (p. 28)

 

안정감과 중요감은 모든 인간이 갈구하는 것이지만, 특히 여성(아내)는 안정감을, 남성(남편)은 중요감을 더욱 바란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 중에서 누가 먼저 안정감과 중요감을 배우자에게 제공해야 하는가? 여기에 신앙적 차원의 대답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감과 중요감을 누리는 사람이 배우자에게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서야 한다.

 

 

영적 연합, 정신적 연합 그리고 육체적 연합

 

래리 크랩은 영적 연합과 정신적 연합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영적 연합이란 부부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감과 중요감을 느끼는 것을 말하고, 정신적 연합은 부부가 서로 친밀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72) ‘영적 연합’과 ‘정신적 연합’이라는 표현은 우리 시대 부부들에게 생생한 표현법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부부의 친밀한 연합을 위해 부부 각자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 위에 부부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맺어야 함은 중요한 통찰이다.

 

부부는 영적 연합과 정신적 연합이라는 기초 위에 육체적 연합을 통해 보다 깊은 친밀감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많은 부부가 육체적 연합을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과 떼어놓고 생각한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래리 크랩은 부부의 육체적 연합을 방해하는 3가지 요소에 대한 연구를 인용한다(p. 145).

(1) 개인의 문제 (2) 관계의 문제 (3) 기술의 문제

 

이 가운데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문제다. 관심을 가지고 기술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부부의 육체적 연합을 방해하는 ‘개인’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래리 크랩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도구가 본인이 강조해온 영적 연합이라고, 관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신적 연합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책 전체가 하나의 논리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결혼 건축가>의 장점이다. 물론, 부부 생활의 현실에서는 이 책이 소개하는 이론과 차이가 나는 지점이 발견될 수 있지만, 적어도 독자들은 부부관계를 친밀하게 세워갈 수 있는 체계적인 성경적 로드맵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결혼의 3가지 기초 

 

래리 크랩은 성경적인 결혼을 위한 3가지 기초를 말한다.

1.    은혜.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와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라

2.    헌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자를 섬기기로 선택하라. 이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신앙으로 말미암은 섬김에 대한 열망이다.

3.    수용. 배우자의 유쾌하지 않은 점까지 받아들이라. 감정의 작용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용서’의 원리에 따라 배우자의 행동을 이해하고 수용하라.

 

이렇게 정리를 하면, 래리 크랩이 말하는 은혜, 헌신, 수용은 성도들이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이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성도들이 가장 먼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은

신앙의 여정과 궤를 같이 한다.

 

https://m.blog.naver.com/practicaltheologian/22322225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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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4. 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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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뜻 사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경에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장 8절)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세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모세의 탁월한 점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들인 후에는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명을 받은 모세는 마지막까지 충성된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을 받는다.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애굽기 4장 20b절) 

모세의 손에는 지난 40년 동안 목동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출애굽기 4장 2절). 이 지팡이는 그저 평범한 목동의 지팡이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에게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애굽기 4장 17절) 평범한 목동의 지팡이가 사명을 위한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화되는 장면이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그러면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모세는 여태껏 정치 조직을 갖춘 것도 아니요, 군사력을 모은 것도 아니며,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으니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평범한 물건도 하나님의 기적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가 손에 잡고 있는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요, 곧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명백한 증거다. 


내 아들, 내 장자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전해야 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애굽기 4장 22절)

바로의 눈에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하나님의 장자라고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바로의 생각이 틀렸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시선을 바라본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이 옳은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 평가하든 우리는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로 삼았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장자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애굽이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것은 수평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죄를 넘어,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장자를 빼앗아 자신의 노예로 삼은 죄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장자를 빼앗아 노예로 삼은 죄를 그들의 장자를 죽여 벌하신 것이다(출애굽기 4장 23절). 


토의 문제 

1.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명을 위해 헌신할 때 내 손에 있는 평범한 물건도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흔드는 세상의 유혹에는 어떠한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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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4. 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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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 특별히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두 가지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0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었고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주셨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나요? 그럼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시대,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요,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1-22절) 

예수님의 비유에서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강한 자’는 누구를 비유한 말씀일까요? 바로 18절에 등장하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를 굴복시키는 더 강한 자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강한 자, 곧 사단이 인간을 사로잡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설명했던 것입니다(엡 2:2).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강한 자, 사단을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 계신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단의 통치 아래에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주체가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며 세상적인 성공이라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참된 주인은 누구일까요? 네, 바로 그 순간에는 나의 마음이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그 순간에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4-26절)

이 이야기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 있던 한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마칩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여러분, 한 번 귀신이 떠나갔다고 해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나의 삶에 변함 없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단의 통치 아래로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고 있지만, 나의 삶에 구체적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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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4. 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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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AD 2세기 고대교회 안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였습니다. 먼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을 부활절 날짜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은 구약성경에 따라 아빕월 14일 – 그런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아빕월을 닛산월이라고 불렀어요 – 그러니까 닛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고, 그날 저녁에 붙잡혀 바로 다음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그 날짜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금식도 하고 성만찬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해진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키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지겠지요. 마치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해 놓으니 매년 성탄절의 요일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AD 2세기경,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던 것과 달리,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을 중심으로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요.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기독교에서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지역의 교회들은 요일, 곧 주일에 부활절을 지킬 수 있도록 날짜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요일이 달라집니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AD 2세기 소아시아 교회와 로마의 교회는 서로 다른 날 부활절을 기념하는 두 가지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각주:1]

그런데 이러한 전통에는 날짜와 요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준보다 더 중요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닛산월 14일, 곧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기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매우 강하지요. 반면,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삼는 전통은 바로 그 요일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 가운데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더 그르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부활절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고대교회로부터 견지하였던 진리의 두 기둥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 기독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리,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입니다. 


복음의 두 기둥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진리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복음의 두 기둥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면서 복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지요. 그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절과 4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두 기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하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이요, 또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시기만 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에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셨다면 이번에도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의 상태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게는 지난 사순절이요 짧게는 지난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셨다면 이제는 부활의 복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만 있으면 안돼요, 그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인생의 참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바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부활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새로운 희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의 두 기둥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1a절)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이야기하면,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전한 복음,’ 그 복음은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요 또한 너희가 이미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복음을 알려주고 가르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처음 믿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복음의 은혜가 나의 마음에 가득 넘쳐서 찬양을 한 곡 불러도 감격이 되고, 기도를 한마디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구원의 감격’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1~2년이 아니라, 10년이나 20년, 혹은 그 이상 하신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느꼈던 그 구원의 감격이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혹은 10년이 지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그렇게 나의 삶에 소망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구원의 감격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흩어져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어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로 치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점차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면서 세상의 걱정, 세상의 염려, 세상의 자랑, 세상의 관심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기에서 알게 한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알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알려주겠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알죠, 설명할 수 있죠. 마음으로 동의하죠. 그러나 그 복음이 그들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니,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오늘 본문을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면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강조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자,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두 가지 기둥을 서술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5절부터 보세요.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중략)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지금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보이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괴로워는 우리 각 사람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곧 객관적인 진리로서 부활을 실현하신 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열두 사도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오백여 형제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야고보를 찾아가 만나주시고 나아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도 바울을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한 명씩 찾아가 만나주시니 그들의 삶에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에 참된 소망이 임하게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삶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시고 임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가 영생의 충만한 은혜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절 논쟁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좀더 구체적으로 AD 2세기 고대교회에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닛산월 14일이라는 날짜를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고, 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계산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절을 계산하는 기준이 다르다 보니, 한쪽에서는 부활절을 맞이하였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고난주간을 보내며 금식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이지곤 하였지요. 그래서 교회는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자, 그러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과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는 전통 가운데 무엇이 점차 기독교 전역에 확산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요. 21세기 이 땅의 교회가 지키는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날짜가 정해져 있지만 그 대신 매년 요일이 다르고, 부활절은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매년 주일에 지키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AD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일이라는 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매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계산법을 간단히만 말씀을 드릴까요? “매년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맞이하게 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편할까요? 닛산월 14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만월, 바로 그다음 주일’이 편할까요? 당연히 사람들이 부활절 절기를 지키는 데는 닛산월 14일이 훨씬 편하죠? AD 2세기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검색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손쉬운 닛산월 14일이라는 고정된 날짜를 포기하고 주일이라는 요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진리의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가운데 더욱 중요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서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고난주간과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부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닛산월 14일은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하잖아요. 그러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지요. 계산이 복잡하다고요? 기억하기 어렵다고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계산하기 아무리 어려워도, 기억하기 힘들어도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절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곧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그들이 행한 위대한 사건과 업적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로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귀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나타나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일이 많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여러분의 삶에 너무도 크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삶을 그 토대부터 바꾸어 놓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실 때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이 찾아오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실 때 허무한 우리 인생이 비로소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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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립 샤프,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이길상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205-2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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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4. 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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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장은 야곱이 애굽에 데려간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그러면서 야곱이 애굽으로 간 사건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야곱의 애굽행을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글성경에는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출애굽기의 첫 시작이 “그리고”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 


번성

야곱은 그의 자손 70명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로부터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출애굽기 12장 40절은 출애굽의 사건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주인공인 모세는 레위의 4대손이므로(민수기 26장 58-59절), 레위와 요셉의 시대로부터 4대가 이어지는 세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긴 세월의 흐름이 출애굽기 1장 6절과 7절 사이에 놓여 있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장 6-7절) 

4대가 지나갔던 430년은 한 개인이 가늠하기에 너무도 긴 세월이었지만, 그 오랜 세월 하나님의 섭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애굽에 내려간 70명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게 된 것이다. 이미 오래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장 2절)는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1장 7절은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약속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8절) 

세월이 오래 흘렀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들은 아담도, 그리고 아브라함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 사람들은 잊었지만 하나님은 그 오래 전의 약속을 기억하셔서 성취하고 계신다. 


학대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매우 강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이 겪은 불행의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애굽은 요셉이 총리로 다스리던 시대와는 다른 왕조가 세워져 있었는데(출애굽기 1장 8절),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의 두려움은 미움과 시기가 되었고 급기야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기에 이른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 1장 11절) 

성경의 기록 외에도,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 이 사건을 기록해 두었다. “애굽인들은 고된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살시키기 원했다.” 이처럼 애굽 사람의 학대는 이스라엘 자손의 말살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는데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출애굽기 1장 12a절) 애굽 사람들의 학대는 더욱 가혹해졌다.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출애굽기 1장 14절)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학대를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마지막 40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충만히 임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보호받는 장면으로 마친다(출애굽기 40장 34-38절). 어떻게 이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제부터 출애굽기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토의 질문

1.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확신하였지만, 그 성취가 더디어 의심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나요?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2. 출애굽기는 구원의 책입니다. 큰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주신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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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1. 3. 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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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란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먼저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이란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함께 묵상하였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거듭남의 비밀 등을 먼저 머리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지식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하여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두번째 요소인 동의는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종파가 가르치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파로 분류되는 이단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동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데,’ (그들은 성육신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은 대속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겠어?’ (마음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동의입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세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있고 동의하지만 믿음의 마지막 세 번째 요소인 신뢰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 이순신 장군이 군사전문가로서 매우 큰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큰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그 누구도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우리나라와 민족을 지켜줄 수 있다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동의와 신뢰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이제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맡기는 신뢰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인간에게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였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지식,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라는 동의,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 가운데 어느 단계에 있으십니까? 


고통과 신뢰

시편 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은 지금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인이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한 두개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편 31편 9절) 

시편 31편은 지금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아픔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시편 31편 10a절) 

지금 시인은 고통과 근심 때문에 몸과 마음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만성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분위기가 암울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시편 31편의 분위기는 이러한 예상과는 정반대입니다. 큰 고통 중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아픔이 지속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31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소망이요, 오히려 평안입니다. 참 놀라운 반전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아픔 속에서도 시편 31편은 어떻게 그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31편 3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든든히 깔려있고, 그 위에 간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편 31편 4절) 

지금 대적자들이 쳐놓은 그물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그물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고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시편 31편의 뒷부분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편 14절)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기에 “그러하여도”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앞에 9절부터 13절까지 시인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그리고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그러한 일이 모두 자신의 삶에 닥쳐오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저는 시편 31편을 읽을수록 이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신뢰가 형성되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당당함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으니 그 마음에 드넓은 대양과도 같은 평강이 넘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큰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지요. 물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의 일생 동안 뼈아픈 가시가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이 사람을 누가 불쌍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표제어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굳이 다윗의 삶을 이 시편에 대입하지 않더라도, 그래서 다윗이 누렸던 권력과 다윗이 이룬 성취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편 31편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부러운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의 연수가 더해지고 특별히 목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도 시편31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을 너무도 닮고 싶어요.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더니 재정의 문제도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고 자녀들에 대한 근심도 모두 다 사라졌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 같아요. 그 대신 한 평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때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도 그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은 더욱 풍성해져서 이제는 나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가득하다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큰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큰 확신과 평안을 누렸던 한 신앙인의 믿음의 깊이를 헤아려보십시오. 그에게 닥친 고통이나 환란이 사라졌든 그렇지 않든, 그가 당한 아픔이 이후에 전화위복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인생의 굴곡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뿌리 깊게 내렸기에 이제는 그 어떠한 아픔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의 거인, 믿음의 어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몰려옵니다. 시편 31편이 노래하듯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은 나의 일생동안 지속되며 나의 모든 날은 괴로움의 연속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크기나 그 아픔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삶에 거대한 고난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우리의 신앙은 정말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평화를 누리며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뢰와 수용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가 시편 31편을 묵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시편 31편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시편 31편 5절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시편 31편 5a절)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일곱가지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라는 뜻으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였기에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인용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다 인내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시편 31편을 인용하며 성부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장면을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을 인내하신 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이 끝나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그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보십시오.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였던 모습, 곧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누리며 모든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신앙의 거인은 결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됩니다. 곧 신뢰는 수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지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에 곧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뢰는 예수님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지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죽음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넉넉히 받아들이며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의 마음이 있다면 그 신뢰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빚어가실지 몰라도, 심지어 지금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나에게 복이 아닌 화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곧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지식은 있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지식과 동의의 단계까지는 나아갔지만 여전히 신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를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신뢰를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여드리죠.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빠가 지켜보고 있었죠. 아빠는 높은 바위에 올라간 아이에게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높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면 혹은 바위 아래에 건장한 남자가 서 있기는 하지만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이 아이는 바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이미지에서 저의 시선이 머무는 장명은 아이의 표정입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밑에 있는 아빠의 표정을 보면 어금니가 보일만큼 웃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지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저 아래에 아빠가 없다면,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저 사진에서 아이에게 불안한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 아래에 나의 아빠가 있고 나는 그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내어 맡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도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수용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시편 31편을 노래하였던 시인과 같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도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거인이요, 믿음의 어른으로 성숙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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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마태복음 성경공부2021. 3. 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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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7장 27-44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에 대한 인간들의 비방과 조롱으로 가득하다.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며 침을 뱉고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는 때리는 로마 군인들의 희롱(27-31절)을 시작으로, 지나가는 자들과 대제사장들의 비방이 계속되었고(39-43절), 마지막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하였다(44절). 예수님의 십자가 형에 대한 묘사는 단 한 절에 불과하지만(마태복음 27장 35절),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그분에게 인간들이 쏟아 놓은 비방과 욕설이 더욱 부각되어 드러난다. 


인간의 비방과 사탄의 시험

예수님을 향한 인간들의 비방은 역설적이다. 그들의 입에서 ‘유대인의 왕’ 혹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의 희롱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는 희롱이었다.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태복음 27장 28-29절)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죄패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한 글귀가 붙어 있었다. “유대인의 왕 예수”(마태복음 27장 37절) 지나가는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들먹이며 예수님을 모욕하였고(마태복음 27장 40절), 대제사장들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고 말하며 희롱하였다(마태복음 27장 42절). 이들은 ‘유대인의 왕’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에 대해 하나의 공통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진정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복음 27장 40b절)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태복음 27장 42b절) 

이러한 논리의 결정판은 대제사장의 발언인 43절에 등장한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복음 27장 43절)

여기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이들의 논리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였던 사탄의 논리와 동일하다는 것이다(마태복음 4장 3절, 6절). 이들은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예수님께서 완성하여 가시는 십자가의 구원을 회방하고 있다. 


예수님의 반응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이 없다.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 대해서도 침묵하신다. 그 모든 수치와 치욕을 인내하신 것이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자의로 행동하신 장면이 딱 한 구절 등장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태복음 27장 34절) 

예수님은 왜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하셨을까?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6장 29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를 벌일 때까지 고난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예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계신 지금 고난의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신다. 

쓸개 탄 포도주가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의 온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오롯이 감당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거들먹거리며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희롱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아픔을 인내하시며 참된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의 길을 걷고 계셨다. 


토의 질문 

1. 인간들이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여 우리의 입술로 죄를 지은 적은 없는지 되돌아봅시다. 

2.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모든 수치를 인내하시며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마태복음 성경공부" 글 목록 (Contents)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 언약의 성취자"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장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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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