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2021. 9. 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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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땅은 그다지 넓은 영토는 아니지만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을 지니고 있는 지역은 북쪽의 갈릴리 지역과 남쪽의 네게브 지역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게브와 갈릴리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강수량입니다. 갈릴리는 연 강수량이 600mm에서 1000mm 정도가 됩니다. 반면 네게브 지역의 강수량은 갈릴리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약 15mm에서 100mm 정도입니다. 당연히 갈릴리 지역은 많은 비가 내리기에 곡식과 초목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일 년에 100mm의 비도 내리지 않는 네게브 지역은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지요. 그나마 100mm 이하로 내리는 비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 집중됩니다. 그러니 4월부터 11월까지 일 년의 대부분의 기간, 네게브의 사막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네게브 지역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는데 일년 중 15mm에서 100mm의 매우 적은 비가 그래도 내리는 바로 그때 발생합니다. 이른바, ‘와디’라고 불리는 계절천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 년의 대부분이 너무도 건조하기에 평소에는 사람이나 차가 이동하는 긴 도로로 사용을 하던 곳이 비가 내리면 물이 흐르는 하천이 되는 현장이지요. 너무도 건조하여 그곳에 물길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곳이 순식간에 거대한 물길이 지나는 하천으로 변화는 그 장면을 누군가 촬영했고, 그 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공유되어 있습니다.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면,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영상을 딱 1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단 1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건조한 사막에 거대한 물줄기가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요. 구약의 시편을 보면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빗대어 노래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시편 126편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는 장면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 4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 126:4) 

여기에 등장하는 “남방 시내”가 우리가 조금 전 영상으로 보았던, 네게브 사막의 계절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려보내시는데,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신다는 시편의 표현은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을 마른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물길이 들어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기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힘입어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했습니까? 무려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남방 시내”라는 표현에 담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시편 126편이 노래하는 “남방 시내”라는 비유에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에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때가 임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네게브 지역의 계절천은 일 년의 대부분이 메마른 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상에서 직접 확인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단 1분 만에 거대한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장면을 목도할 수가 있었잖아요. 마찬가지로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며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유대인들의 해방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친 사막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걸아가는 길이 메마른 대지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계십니까?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며,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만 하면 사막과도 같은 우리의 삶에 거대한 은혜의 강줄기가 순식간에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인내’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아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혹은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에게 큰 신앙의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단락에서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등장하는데,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치하고 괴롭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를 받아보았던 당시의 성도들은 궁핍으로부터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고난에 괴로워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야고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라는 덕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7a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b절) 

농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년 열두 달, 사시사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나요? 모든 과실수는 열매를 맺는 철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므로 농부는 열매가 맺히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 7절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등장하지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른 비’는 농부가 파종을 하면 그 씨앗이 땅 속에서 제자리를 찾고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때 필요한 비를 말합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씨앗을 뿌린 후 매우 정확한 시점에 이른 비가 내려야 그해의 농사를 시작할 수가 있게 되지요. 그래서 이른 비가 내리는 타이밍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7절에 등장하는 ‘늦은 비’는 그렇게 뿌리를 내린 씨앗이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수분을 공급해주는 비를 말합니다. ‘이른 비’와 마찬가지로 ‘늦은 비’ 역시 곡식이 급성장하는 바로 그 시기에 정확히 맞혀 내려주어야 그해의 농사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의 비유, 특별히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확한 타이밍에 임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지지요. 지금 당장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니 농부는 씨앗을 심으면서도 ‘씨앗이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른 비가 내리지 않아 때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이른 비가 제때에 내려 씨앗이 뿌리를 내렸더라도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급성장하는 바로 그때 충분한 비가 내려야 하는데 아무리 하늘을 보아도 비구름이 보이지 않으면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경험이 많은 노련한 농부는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의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찍 오시지도 않고 늦게 오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는 종교적인 박해와 경제적인 궁핍 가운데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실천하기 위해 성도들이 주의해야 할 항목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9a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야고보서를 처음 받아보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아 삶의 근거지를 떠나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삶이 참 고달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삶이 너무도 괴롭다 보니 그 마음에 -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본문에 등장하는 원망은 그 대상이 크게 두 가지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유대교도들, 혹은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고 억누르는 이른바 부자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었겠지요. 만일 성도들의 원망이 자신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꼭 그렇지가 않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 괴로우니 자신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이나 부자들에게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원망을 쏟아내었던 것 같아요. 나의 삶이 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지금 나의 삶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아주 작은 일에도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마치 내 곁에 있는 다른 성도들 때문인 것처럼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원망하지 말라고, 특별히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보니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원망의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부자들, 혹은 함께 신앙생활하는 다른 성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나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한 나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준 것은 아니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더라고요. 나의 삶에 큰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를 향해 원망합니까? 바로 나 자신을 향해 원망합니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다른 결과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하여 지금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당하는 그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나 자신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원망하지 말라.’
‘자매들아, 원망하지 말라.’ 
지금 여러분이 큰 아픔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도 아니요, 여러분 곁에 있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형제들아, 본으로 삼으라

야고보는 큰 고통 속에 빠져있던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자매들아”라고 부르며 두 가지 권면을 주었지요. 본문 7절에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그리고 본문 9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권면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한 번 더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따스하게 부르며 한 가지 권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0절) 

야고보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의 모범이 끝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제 욥이 등장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절) 

야고보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래 참았던 선지자들의 예와 욥의 인내를 언급하면서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지금 당장 큰 어려움을 당하고, 지금 당장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인내하는 사람이 어떻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답을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지금 당하는 고통이 결말이라면, 지금 당하는 아픔이 우리 인생의 결말이라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이 우리 인생의 최종 결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복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역경은 과정이지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전히 고난과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의 과정이지 결코 최종적인 결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펼치실 하나님의 위대한 결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구약의 예언자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야고보의 권면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떠올랐던 구약 선지서의 한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8) 

이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의 인내, 우리 성도들의 기다림만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인내와 또 다른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의 인내요, 누구의 기다림입니까? 이사야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누가 기다리신다고요? 우리 하나님도 친히 기다리신데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다리시는 지를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여러분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기다리시는 바로 그때, 곧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바로 그때를 하나님도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은혜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때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가장 정확한 때가 바로 그때이니까, 그것보다 먼저 비를 내리시면 정확한 ‘이른 비’가 되지 못하여 오히려 씨앗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되니 하나님도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정확한 그 시간보다 먼저 비를 내리면 ‘늦은 비’가 되지 못하여 곡식이 급격히 성장하지 못하고 썩어버릴 수도 있으니 가장 좋은 그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늦은 비를 내리시기 위해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깨달은 이사야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친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만 더 견디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서로 원망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네게브의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머지않아 여러분의 삶에 은혜의 강줄기가 흘러넘칠 것이니,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금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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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1. 9. 2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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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는 잠언과 그 내용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잠언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혜의 근본이라고 천명하는데 반하여,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염세주의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를 잠언과 함께 지혜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제부터 전도서의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전도서는 단순한 염세주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전도서는 잠언이 가르치는 전통적인 지혜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을 신앙적으로 해석해준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잠언의 지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잠언의 지혜를 보충해준다고 하겠다.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전도서 1장 1절은 전도서의 저자를 이렇게 알려준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1) 

위의 구절에 의하면, 전도서의 저자는 ‘전도자’이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코헬렛’인데, 이것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글 성경처럼 ‘전도자’로 번역할 수도 있고 지혜자, 설교자, 선생 등의 번역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이 정확히 코헬렛의 의미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전도서를 연구하면서 히브리어 단어인 ‘코헬렛’을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위에서 인용한 전도서 1장 1절에는 코헬렛(전도자)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담겨있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고,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전도서 1장 12절도 이 사실을 반복한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그래서 전통적으로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을 솔로몬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전도서나 그 외의 성경 본문에는 코헬렛을 솔로몬으로 명시한 적이 없다. 1장 1절에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히브리어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자손으로 번역할 수도 있기에 다윗 왕조의 어느 왕에게나 적용이 가능하다. 더욱이 코헬렛을 솔로몬이라고 말하기에는 전도서 1장 16절의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전 1:16)

전도서 1장 16절에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이 구절을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던 어느 누구도”라고 번역한다. 만일 코헬렛이 솔로몬이라면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이었던 사람은 다윗뿐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이전 기브온 족속의 왕을 지혜를 찾았던 사람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코헬렛이 솔로몬이든 그렇지 않든,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에 대한 중요한 정보는 전도서 12장에 등장한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전 12:9-10)

전도자(코헬렛)는 지혜자였다. 지혜자인 코헬렛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12장 9절은 네 개의 동사를 사용한다. (1) 가르치다 (2) 생각하다 (3) 연구하다 (4) 잠언을 짓다. 계속해서 12장 10절은 코헬렛이 행한 작업의 과정을 묘사해주고 있다. 코헬렛은 “아름다운 말들,” 곧 지혜에 대한 경구들을 수집하였다. 모르기는 해도 컴퓨터나 핸드폰이 없던 시대에 그는 자신이 찾은 지혜의 말씀들을 열심히 메모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내어 기록해둔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였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메모를 기초로 편집하였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전도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번에 써 내려간 글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수집한 지혜에 대한 말씀(자료)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편집)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전도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코헬렛의 편집과 연구는 그 자신의 연구작업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도서의 구조는 화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락(3인칭, 1:1-11): 화자는 전달자(내레이터)이다. 
두 번째 단락(1인칭, 1:12-12:7): 화자는 코헬렛(전도자)이다. 
세 번째 단락(3인칭, 12:8-14): 화자는 전달자(내레이터)이다. 

두 번째 단락은 코헬렛(전도자)이 직접 1인칭의 화법을 사용하며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풀어낸다. 반면, 첫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은 전달자(내레이터)가 등장하여 코헬렛에 대해 소개하고 그의 이야기를 3인칭 화법으로 전해준다. 그러므로 전도서 안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에 등장하는 전달자는 누구일까? 성경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나 첫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의 전달자는 코헬렛의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며 전도서의 최종 형태를 편집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전도서 연구의 자세

전도서는 잠언과는 또다른 지혜의 전통을 전해주고 있다. 잠언이 지혜의 앞면을 보여준다면 전도서는 지혜의 뒷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잠언의 지혜든 전도서의 지혜든 그 깊이에 있어서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잠언이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지혜자들이 연구하며 탐구하였던 신앙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전도서 역시 오랜 세월 참된 신앙의 지혜를 찾고 연구하였던 지혜자들의 숨결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를 탐구할 때와 같이, 전도서의 지혜를 탐구하기 위해서도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경 66권 안에 잠언과 함께 전도서를 포함시켜 놓으셨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와 함께 전도서가 설파하는 지혜의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 보아야 비로소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지혜를 균형 있고 풍부하게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도서 성경공부" 글 목록

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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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야고보서 강해2021. 9. 1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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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한 달간 계속해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항목들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마땅한 성도의 삶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야고보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 혹은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등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또 하나의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요. 본문이 시작하는 11절의 처음부터 매우 분명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극심한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이곳저곳에 흩어져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큼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허물이 있었으니, 다른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화를 내고 성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차별 그리고 분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동반하였고, 그렇게 성도들의 마음이 멀어지고, 성도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의 마음이 가득해지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권면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야고보의 이 권면이 이천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너무도 시급한 권면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옛 생활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요 또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모임 안에 여전히 서로에 대한 비방이 멈추지 않고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계속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미움과 시기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 서로 한 마음을 품어 마땅한 우리의 공동체가 크고 작은 위기에 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진실로 우리의 모임이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또한 추석 연휴를 앞두고 우리 가정마다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본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a절) 


우리는 한 가족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인 이유와 근거를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한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본문 11절에 이렇게 권면하잖아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여기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곧 야고보서를 가장 먼저 받아보았던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 등장하지요. 무엇입니까? “형제들아”입니다. 이미 야고보서에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호칭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4장 11절만큼은 이 호칭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바로 앞에 전혀 다른 호칭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어떠한 호칭을 사용하였는지를 찾아보면서 야고보서 4장 8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 4:8) 

찾으셨나요? 두 가지 호칭이 등장하지요? 먼저는 “죄인들아”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또 하나의 호칭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나 혹은 팔레스타인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서 야고보는 ‘죄인들아’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 본문 11절에서 너무도 다른 의미의 호칭인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야고보의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호칭의 의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1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 의미를 살려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서로 형제이니, 너희는 서로 자매이니, 너희는 서로 가족이니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11절은 계속해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 혹은 “형제를 판단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지요(11b절). 그런 점에서 본문의 권면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가정 안에서 지켜야 할 윤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성경에 근거하여 바른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성도들은 서로 믿음의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서로 성씨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혈연으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잖아요. 한 가족이라면 서로의 잘못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비방하기보다는 감싸주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또 한가지,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으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위대한 믿음을 제 아무리 입술로 고백하더라도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할 뿐 형제를 그리고 자매를 용납하고 품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불만을 품을 만한 것도 많고 상대방의 언어와 행동을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식구이니기에 그래도 가족이기에 그래도 형제이고 자매이기에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받아주고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 판단이 아니라 실천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특별히 신앙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 그 첫째는 우리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판단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b절) 

만일 형제라고 하면서, 만일 자매라고 하면서 서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네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이 명시적으로 형제를 향한 비방과 비난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레 19:16) 

레위기의 율법은 서로를 비방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곧 이어 더욱 강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면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든 신약의 서신서든 동일하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서로 자매라고 입술로 말은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방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비방을 넘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판단하는 행동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11절은 율법을 대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곧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와 자매에 대한 비방과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는 율법의 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11c절). 여기에 율법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등장하네요.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준행자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재판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12a절) 

입법자, 곧 율법을 제정하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또한 재판관, 곧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조차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전달자였지 율법의 제정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야고보조차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성도들을 교훈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 성도들이 따라야 할 삶의 규정을 제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율법에 따라 사람을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자신의 생각을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신 내용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며 회개를 촉구할 뿐이었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율법의 제정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재판관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말씀의 준행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의 제정자나 재판관이 되려 한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메튜 헨리(Mathew Henry)라는 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어요. “재판관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율법에 복종하기를 싫어한다.” 부인하고 싶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너무도 정확히 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율법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서로 형제가 되었다면, 너희가 서로 자매가 되었다면 서로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이 이토록 분명할진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의 재판관이 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말씀의 준행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본문은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지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의 메시지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 것은 본문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사 의문문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질문이지요.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2b절) 

로마서를 읽다 보면 사도 바울도 거의 동일한 수사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교회 안에도 성도들이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이 일어났거든요.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했던 중요한 이슈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우상에게 마쳐진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먹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고리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 비방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형제 들이여 서로 비방하지 말라’ 권면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서로 비판하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롬 14장).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해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롬 14:4) 

사도 바울의 이 질문,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던지는 질문,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 두 가지 질문은 바울의 목소리나 야고보의 육성이 우리의 귓가에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은 강력한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너는 누구냐?”라는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살피라’고 우리를 촉구합니다.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분이 계십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시절, 미국에서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역사가들은 이때의 부흥운동을 이른바 미국의 제1차 부흥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운동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의 어두운 면도 분명히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향해 열정을 품은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이 변색되거나 신앙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신앙적인 열정이 참된 것인지 혹은 거짓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까를 깊이 연구하여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남게 되었던 한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종교 감정론>(Religious Affection)입니다. 자,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짓된 신앙의 열정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다. (X2) 

언듯 보기에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기도하고,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이 잘못됐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이고, 그 사람의 말대로 잘못을 고쳐나가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된 열심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거짓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도 바울도 이처럼 거짓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분명히 질문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성도 여러분, 혹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 좋다고 평가받는 우리가 거짓된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을 때 당당히 바른 이야기를 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은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열심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 가족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는 다른 성도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비방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의 재판관이 되시니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말씀의 재판관이 아닌 준행자가 되어 형제들을, 그리고 자매들을 용서하고 품어주며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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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9. 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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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노년에 자신의 사역을 계승해야 할 디모데에게 사역의 자세와 목표에 대해 교훈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을 참된 경건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디모데전서를 통해 바울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참된 경건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여 경건한 삶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장애물이 무엇인지 언급하면서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다른 교훈

복음만이 성도들을 참된 경건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다른 교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3절)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본문 3절이 지적하는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불편한 현실이지만, 바울이 다른 교훈을 경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초대교회 안에도 ‘다른 교훈’이 존재하였고,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복음에 마음과 관심을 묶어 두지 않으니 다른 교훈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4절) 

여기에 변론과 언쟁이 등장한다. 복음의 진리는 너무도 명백하여서 우리는 복음에 대해 변론할 것도 없고 언쟁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다른 교훈’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 외에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언어에는 다른 교훈에 대한 언급이 더욱 많았고, 이는 서로에 대한 분쟁과 비판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본문의 ‘다른 교훈’을 “허황된 잔소리”라고 평가하였는데 허황된 잔소리가 무성해지자 성도들의 마음은 점차 참된 경건으로 인도하는 복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욕심

복음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인도한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욕심이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9절) 

과연 얼마나 많이 욕심을 부려야 경건의 삶을 방해하는 탐심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수준 이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탐심에 빠진 사람이요 그들의 믿음은 참된 경건에서 벗어나 파멸을 향하게 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0절)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가르친다. 시편 34편 10절이 노래하듯,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복음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탐욕은 인간들에게 언제나 ‘더 소유하라’고 다그치니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 풍성함을 빼앗아 늘 궁핍에 처하게 만든다. 탐욕이 경건한 삶의 큰 장애물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토의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에게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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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성경공부2021. 9. 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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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결론은 두 개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하나는 미가라는 인물과 단 지파의 이야기이며(17-18장), 또 하나는 어느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일로 불거진 이스라엘의 내전이다(19-21장). 이 두 개의 사건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방종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본문은 그 첫 번째 이야기의 일부다. 

에브라임에 거주하였던 미가라는 사람은 큰 돈을 들여 신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때마침 그의 집을 찾아온 레위인을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았다(삿 17장).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행해서는 안 될 우상숭배의 죄악이었다. 그런데 미가의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죄악이 이제 단 지파의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단 지파의 신상 탈취

단 지파는 가나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점령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 일을 위해 파송받은 정탐꾼 다섯명이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 집에 큰 신상과 제사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탐을 마치고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정탐꾼들은 동료 군인들에게 미가의 집을 소개하며 이렇게 제안한다.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삿 18:14) 

단 지파의 군인들은 정탐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미가의 집에 들어가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탈취한다. 단 지파의 군인 육백 명이 무장하고 있으니, 미가의 제사장은 그 장면에서 반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은 단지 반항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동의하였다. 단 지파는 그 제사장에게 이렇게 제안했기 때문이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삿 18:19) 

이 장면은 사사시대에 팽배하였던 ‘힘의 논리를 따르는 성공주의’를 보여준다. 미가와 그의 가족들은 떠돌이 레위인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받아주었고, 그를 ‘아들처럼’ 대해주었다(삿 17:11). 그러나 미가의 제사장은 그러한 미가의 집을 배반하였다. 한 가정의 제사장이 아닌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성공이 그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는 단 지파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호위하고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호의에 대한 배신은 단 지파도 마찬가지다. 미가는 정탐꾼 다섯 명을 자신의 집에 유숙하도록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배반으로 갚았으니, 육백 명의 군대를 앞세워 미가의 집에서 값진 것들을 빼앗아 가고 있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성공주의,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의 행동을 좌우하였던 시대적 흐름이었다. 


단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

단 자손이 데려간 제사장의 이름이 본문의 마지막에 나온다. 곧 요나단이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삿 18:30) 

요나단은 모세의 둘째 아들이었던 게르솜의 자손이었다. 본문 30절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여러 대를 뛰어넘는 자손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장면이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요나단을 게르솜의 아들이 아니라 게르솜의 자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단 지파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장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단 지파는 라이스에 정착하는 그날부터 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론의 자손이 아닌 게르솜의 자손으로 제사장을 세웠고 미가의 집에서 탈취해온 신상을 우상으로 숭배하였다. 단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과 그를 지파의 제사장으로 세운 단 지파는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미가의 집을 배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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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2021. 8. 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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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b절) 

세 가지 교훈이지요.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나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말씀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쉽게 분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만 똑 떼어서 읽어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 혹은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내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말의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급하게 분노하다 보면 이후 큰 후회를 낳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권면은 신앙생활과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 곧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말씀은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단순한 삶의 지혜를 넘어 신앙생활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교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 본문에서 ‘듣기는 속히 하라’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본문의 앞뒤 문맥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위치한 야고보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여기에 “진리의 말씀”이 등장하지요.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등장하는 야고보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여기에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명령이 등장하네요. 그러므로 본문 19절에 등장하는 권면, 곧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언어생활에 대한 권면으로 적용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잠히 듣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언어를 덧붙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교부 가운데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지요. (예전에는 영어식 이름인 어거스틴으로 주로 불렸고, 요즘에는 원래의 로마식 이름은아우구스티누스로 주로 부르곤 합니다. 어떻게 부르든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니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이전에 심취하였던 종교였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마니교 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계속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아니, 내 말을 들어보시라니까요!’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또 당신이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라 
우리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너무도 강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주관을 가지고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나름의 유익한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믿음이 바르게 성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면 저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잠시 보류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참 좋은 덕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든든한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분의 말씀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권면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 모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와 같이 나의 주장을 내세울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도 아니라,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분노의 위험성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에는 여기에 한 가지 권면이 추가되어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러면서 본문 20절은 성을 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절) 

지금 야보고서는 사람이 성을 내는 것, 곧 화를 내는 것을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무너트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그러나 분노라는 주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본문이 성내기를 더디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단지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19절에 등장하는 3가지 권면의 순서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두 번째로, ‘말하기는 더디 하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붙이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걷어 치우라고 말씀하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어떻게 받으라고요?)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 성내는 마음과 온유한 마음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요. 만일 나의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가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분노의 감정을 가라 앉히고 온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느냐, 아니면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느냐는 문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더 큰 주제로 확대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절) 

야고보서는 이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네요. 그러니 지금 내가 화를 내느냐 그렇지 않으냐, 분노를 조절하느냐 조절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또한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말씀을 들을 뿐 실천하지 않아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야고보서 1장의 흐름을 조금 더 따라가다 보면 분노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주제로 확장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여기에 경건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네요)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내가 예배에 잘 출석하고 있으니까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니까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기의 혀를 재갈물리지 않아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말씀하였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입을 절제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을 뿐이지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의 표현처럼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어떻다고요? 헛것입니다. 반면 본문 27절은 참된 경건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절)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되 온유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 찾아와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제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의 마음에 분노를 쌓아두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느냐의 문제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의 시작점이 무엇이라고요? 지금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어찌 보면 매우 작은 그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힘주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 


고통의 상황과 점화 사고

분노는 감정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감정은 주변 환경이나 우리가 마주친 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요, 분노도 이와 같은 감정이기에 특정한 상황에 마주치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너희는 분노의 감정을 전혀 품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명령하시죠? ‘성내기를 더디 하라’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날 때 성을 내는 것, 곧 나의 언어와 나의 행동으로 화를 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이 화를 내기 위해서, 곧 분노를 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고통의 상황입니다. 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고통의 상황입니다. 비유로 이것을 설명하면, 마음에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고통의 상황은 마치 연료와 같습니다. 가스가 되었든, 기름이 되었든 연료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잖아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상황이 그러한 연료가 됩니다. 그런데 고통의 상황, 곧 나에게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특정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발하지는 않습니다. 연료가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곳에 불이 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불이 타오르려면 연료를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불꽃을 점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불을 붙이는 것을 ‘점화 사고’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생각이죠. 그러므로 고통의 상황이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분노의 감정이 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상황은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연료를 충분히 제공하지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때 우리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연료가 가득한 그곳에 불길을 당기느냐 당기지 않느냐에 따라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분노를 폭발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의 상황은 찾아옵니다. 그 가운데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크고 누구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더 작은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언제나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는 너무도 크고 무겁게 여겨지는 고통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지요. 고통의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가며 나의 마음과 행동에 분노가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 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의 감정이 사그라들게 만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두 가지 선택의 결과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도 극명하게 달라지게 만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큰 고통이 몰려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위대한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참 감사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내기를 더디 하는 은혜’를 주신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참된 경건을 향하여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복음

‘성내기를 더디 하라’ 이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분노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노하기를 더디 해야 마침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수긍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고, 화를 억제하기가 너무도 어려우신 분들이 계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 감추어진 하나의 대전제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장 19절 이후의 말씀을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함께 묵상하고 있기에 너무도 중요한 하나의 대전제를 살펴보지 않고 본문이 가르치는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야고보서의 복음, 곧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무엇을 속지 말아야 할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6-17a) 

여기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께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 오늘 설교의 주제인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 곧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제하는 힘도 내 스스로의 결단이나 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야고보서가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옛 성품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능력이 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하나의 말씀을 실천하며 온유한 마음을 품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나의 의지로는 힘들지요. 나의 결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모두 믿으시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번 한주 딱 한 가지만 실천해보자고요. 무엇을 실천할까요? ‘성내기를 더디 하라,’ ‘노하기를 더디 하라’ 이 말씀 한 구절만 실천해보자고요. 노하기를 더디 하면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경건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시니, 너무 멀리 있는 것 바라보지 말고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이 한 가지 말씀만 실천해보자고요. 이번 한 주도 우리에게 고통의 상황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복음의 은혜를 허락하셨으니, 이번 한 주간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이 은혜도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보다는 내일 참된 경건의 삶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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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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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의 기도,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유명한 복음주의 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제임스 패커라는 분의 저서 중에 <하나님의 인도>(Guard us, Guide u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직접 하늘의 음성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잘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그런 음성이 들려왔다 해도 단지 부분적인 것일 뿐, 하나님의 인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를 포함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시고, 그때마다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소망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알지 못하고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사도 바울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고린도를 방문하려던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15-16절). 이러한 바울의 계획은 신중하였고 기도하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17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23절).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계획을 바꾸니,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비난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라느니,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라느니,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라느니 여러 가지 말로 바울을 헐뜯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해나가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한계 속에서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믿음 위에 서게 만드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24절).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8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19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0절) 

인간에게는 ‘아니오’가 분명히 있습니다.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연약한지라 기도하면서도,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지라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 알지 못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예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이라고 소리를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춥고 어두운 저녁, 여러 차례 얻어맞은 수백 명의 포로들이 한 시간에 걸쳐 수용소 지휘관의 일장연설을 듣고 행진한 후에, 어둠침침한 막사로 돌아와서는 남은 밤 시간 내내 침묵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때 어느 막사에서 누군가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동료 포로 몇몇이 그 기도에 함께 했습니다. 기도소리는 옆 막사의 포로들에게도 전해졌고, 그들도 그 기도에 합세했습니다. 막사 하나하나가 그 기도에 동참했고, 마침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기도가 끝날 때, 수백 명의 포로들이 도전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고 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함께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완성하는 단 하나의 고백, 그것은 바로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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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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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의 기도, 그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어느 상점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화재는 얼마나 컸는지 상점의 모든 상품들을 잿더미로 만들었지요. 상점이라는 것이 들여온 물건을 팔아서 그것으로 이윤을 남기는 곳인데, 들여다 놓은 상품들이 모두 타버렸으니, 그 손해가 얼마나 컸겠어요. 사람들 모두는 이 화재로 말미암아 상점이 당장 폐업을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화재가 있은 바로 다음 날,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고, 그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잖아요. 상품이 다 타버렸는데 어떻게 장사를 계속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그 간판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어떠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이지요.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여섯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 그 첫 번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3가지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을 따라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지금 당장 응답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지금 당장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지금 당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을 따라 열심히 기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빠지고, 여전히 죄를 범하며, 여전히 궁핍한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 큰 화재가 일어나 그 안에 있는 모든 상품을 태워버린 현장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어느 크리스천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은 그때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치며 희망을 붙잡았던 바로 그 크리스천과 같이,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는 우리 역시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주님의 기도를 직접 전해 들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는데,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드높이 올려지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까?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다. 

또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는데, 그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손아귀로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헤롯입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데, 특별히 그 시대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이 지시하는 본뜻, 율법의 본의를 완벽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제목을 알려주시지만, 제자들이 보기에 그러한 기도는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여섯 개의 기도제목을 모두 알려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에 반드시 확신에 찬 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려울 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현실로 지금 당장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을 지라도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흔들리려는 마음을 굳세게 붙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Ⅱ 

오늘 본문은 스가랴서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스가랴 1장 1절이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오 왕 제2년이라는 정확한 연도가 등장하지요. 그런데 다리오 왕 제2년이라는 연대는 에스라서에도 등장합니다.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 년까지 중단되니라 (스 4:23-24) 

이 이야기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징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바벨론에서의 포로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자, 나라가 식민통치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고 백성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백성들이 기도하자마자 바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나요? 아닙니다. 70년의 세월이 필요해요.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뜨겁게 기도했지만 여전히 현실 속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황제입니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70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그 동안 유다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자신들을 속박했던 바벨론 땅을 벗어나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땅이 아니었지요.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은 70년 전에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라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증언하지요? 그 역시도 정치적 책략에 휘말려서 성전 건축이 무한정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던 해까지 성전 건축이 미루어졌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성전 건축이 미루어지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당연히 기도 했겠지요. 열심히 기도했을 거예요. 그런데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을 높이는 제사가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선지자 스가랴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재건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슥 14:9)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따라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어디로 인지 날아가 버린 것 같지는 않으세요? 마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70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던 유대인들처럼, 마치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 건축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처럼 나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 것인지 그 청사진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바로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우리의 믿음을 입을 열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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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8. 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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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그 여섯 번째 기도제목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할 때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시험을 모두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이 견디기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친히 대신 지셨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악’은 인격적인 악의 실체인 사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13절).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어려워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4-15절)

 

인간의 마음이 욕심에 이끌리면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됩니다(15절).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한다면, 그 시험과 악의 존재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힘과 능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7절)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위로부터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곧, 모든 성도들을 시험과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시험에 빠지고 악의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탄식이요, 동시에 우리를 시험과 악의 실체로부터 구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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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시편 강해2021. 7. 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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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샤를 드 푸코는 프랑스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였고, 수도사가 되어 사하라 사막에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원주민의 총에 맞아 순교한 인물입니다. 그의 책 <사하라의 불꽃>은 샤를 드 푸코가 사막의 수도사로서 자신이 지나온 영혼의 여정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십니까? 아니면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신가요? 어떤 분들은 일상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샤를 드 푸코의 대답은 참 의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분명히 믿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샤를 드 푸코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믿음, 그리하여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큰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오랜시간 준비한 것이 실패하기도 하고, 또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요인으로 나의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나의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을 찾아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어렵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그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비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주시는 경험을 하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때만 계속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한두달 기도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 달이 1년이 되고, 두 달이 5년이 되고 10년이 되어도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만 흐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그 오랜 시간 하나님의 손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어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를 맞이하게 되지요. 바로 그때, 샤를 드 푸코의 경고는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요, 그래서 예배도 참석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가 너무도 어려워집니다. 


어리석은 자

본문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성도들에게 찾아오는 이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1절) 

여기에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이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의 표현을 단순한 무신론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들 – 이 세상에는 영적인 존재도 없고 신적인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않았던 가나안 사람들도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많은 신들을 섬겼지요. 그러니 본문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없다”라는 생각은 모든 영적인 존재와 신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믿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위대한 기적으로 이끌어내 주셨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삶에 찾아오셔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믿지 못합니다. 자신의 일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의식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채 매일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실제 나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단순한 무신론과 구별하기 위해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오히려 더 주님을 찾게 됩니다. 거대한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에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삶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실천적 무신론에 너무도 쉽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인간들의 마음을 살펴보시네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각이 있는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본문 1절의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지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3절) 

이 말씀 역시 불신자나 우상숭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처럼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게 되면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여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또 다른 별칭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삶에서 미끄러져 악을 행하는 자리에 앉고 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일 뿐, 그 믿음이 자신의 삶을 선한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은 어리석은 자, 곧 죄악을 행하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네, 그들은 이처럼 악을 행합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무서운 말씀은 바로 5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절) 

나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 마음에는 무엇이 찾아온다고 말씀합니까?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을 잊어버린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나의 눈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하여 나의 마음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이 끝을 알 수 없는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분은 안 계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 지 반드시 점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에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여러분,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고, 그러한 나의 마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끝을 알 수 없는 걱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가난한 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성도들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유혹이 찾아옵니다.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 지금도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잊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더 이상 경외하지 않게 되는 유혹입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늘 경외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많은 성도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 가난을 포함해서 정치적 권력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으며 때로는 신체적 건강도 없는 장애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는 그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분명히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이르면 느닷없이 ‘가난한 자’가 등장하네요. 그러면 우리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 14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구약성경의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탄하시는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떠오르지요. 하나님께서 온 지면에 큰 홍수를 쏟아붓는 이 사건의 배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너 나할 것 없이 큰 죄악에 빠진 현상이었거든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악한 생각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창 6:5-6). 그래서 하나님은 근심하며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 시대에도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열심히 방주를 만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방주를 만들어 있었던 노아의 눈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오랜 시간, 노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끝까지 붙들고 방주를 마지막까지 건조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은 노아의 삶에 현실이 되었지요. 

[어리석은 자들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우리는 코로나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려오기 전, 함께 모여 예배하다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봉사하면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그만큼 교회의 모든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첫 번째 갈림길은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심지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러하듯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실천적 무신론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요. 그 마음에 하나님을 잊은 어리석은 사람은 죄악을 행하는 자리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바로 이때에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

시편 14편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사람들 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때를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절) 

히브리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지요. 그 430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지요. 그 70년이라는 세월은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던 세월이었어요. 그러나 70년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이르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켜 주시잖아요. 43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도 길어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잖아요. 그러므로 아무리 오랜 세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지속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괜찮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만 한가지,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만큼은 반드시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아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지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날 것이요,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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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