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2021. 5. 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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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지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장 1절)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높이 머리를 들어야 했을까요?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분의 옷자락을 통해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의복을 통해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당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청색에 가까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구약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청색으로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청색이 높은 신분을 나타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른빛을 내는 염료가 당시로서는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짙은 청색의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색깔과 함께 의복을 통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 또 하나 있었는데, 옷의 길이입니다. 옷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신분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그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옷감이 귀했던 시대잖아요. 그런데 많은 옷감을 들여 옷을 길게 지어 입을 수 있다면 당연히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은 저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성전까지 그 옷자락이 이어졌고,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높으시며, 가장 거룩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장 2절) 

여기에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가 등장하네요. 우리는 스랍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중요하게 묘사하는 장면은 그들의 날개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개의 날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두 개의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랍이라 불리는 천서까지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발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절은 스랍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의 의도는 스랍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존재를 자세히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랍들조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기 위해 분주할 만큼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장 3절) 

본문이 묘사하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곧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땅에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우리가 배우게 되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살핌 등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이해가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분문에 등장하는 스랍들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급급하겠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에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랑으로 우리를 세밀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뚝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모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로마서 11장 22절)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만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면 이후로 그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자세와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6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1절 처음입니다. 본문 1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웃시야 왕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52년이 남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앉아 있을 때 국방은 튼튼했습니다. 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은 융성했습니다. 에시온게벨이라는 항구를 장악하여 국제무역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한 번성과 융성의 시기를 이끌었던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제 나라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에게 찾아온 첫번째 변화는 그의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죽음이 초래하는 정치적인 변화도 중요하지요. 그가 이루었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요. 웃시야의 죽음을 틈타 남유다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동태도 잘 살펴야겠지요.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민족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의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도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하나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 대해 탄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관심사가 바뀌고 나니, 이제는 그의 행동이 하나씩 바뀝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신중하게 내뱉었을까요? 선지자로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거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8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이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장 17절)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 선지자의 이 경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곳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도 체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도 거룩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장면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여러분, 제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영광 중에 이 성전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니 우리 인간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예단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그 장면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보여주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경에 기록해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었지만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그 장면을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이라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루터기 _ 거룩하신 씨앗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들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장 11-12절) 

본문 11절과 12절은 분명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죄악에 빠져있는 유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구절 안에 유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나요?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가 묻는 ‘때’는 회복의 때, 치유의 때,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죄악이 횡횡한 시대입니다. 지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남 유다에게 여러 가지 형벌을 내리시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둠과 죄악의 지나가고 새로운 회복의 때가 언제 도래하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랍게 하나님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답해 주십니다. 12절의 마지막입니다.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때도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마지막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장 13절) 

여기에 그루터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려나간 뒤에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남아 있는 밑동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큰 죄악에 빠져있었던 남 유다를 심판 하셨고,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인들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지요.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무리들을 본문 13절이 말씀하는 그루터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루터기라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본문 13절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 칼뱅은 13절을 주석하며 ‘그루터기’를 한 겨울의 모진 한파를 견디어 내는 나뭇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져 버리면 죽은 나뭇가지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면 잎은 다시 돋아난다. 즉 이 백성도 그와 같게 된다는 뜻이다.”한 겨울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에서 녹음으로 푸르러지듯,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대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는 그루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해 놓으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거룩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마지막 문장은 드디어 거룩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네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씨는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하였던 사람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도 최선을 다하여 거룩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 그 몇 명 되지 않는 거룩한 씨가 곧 그루터기가 되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하였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외면하고,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고 그저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만을 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6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도 조금씩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바로 그때,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씨앗인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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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5.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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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 생활에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한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할까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여도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가능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_ 겸손

본문은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관심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관심은 그들에게 공급해주시는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장 16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던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겸손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도, 그곳에서 매일 만나를 먹여주신 목적도 그들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들어주시는 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상관없이 우리는 쉬지않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내 삶의 공급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목적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였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에 무관심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 1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18절)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세월 이스라엘 자손에게 부족함 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영혼의 양식도 제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교회는 성찬식에 앞서 주기도문을 드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전통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기도문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응답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예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하셨고 지금도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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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기독교 인문학2021. 5. 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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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랜 시간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의 음식 문화도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수 없으니, 각자의 가정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이른바 배달음식이 활황을 누리고 있지요. 코로나 이전에는 배달음식이라고 하면 중국요리, 피자나 통닭 등 메뉴가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이제는 거의 모든 음식이 배달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밀 키트’(meal kit)라는 이름의 가정 간편식입니다. 이는 집 앞까지 택배로 배달되고 포장을 벗겨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일상적인 음식을 넘어 최근에는 전문 식당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먹을 수 있던 음식도 가정 간편식으로 판매되고 있으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식생활까지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합니다.

 

배달음식, 가정 간편식 등이 일상화되면서 음식에 대한 현대 사회의 한 가지 이미지가 우리 안에 더욱 각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음식 혹은 식재료가 상품이라는 인식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상품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상품으로 생각하다보니 성경이 가르치는 음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은 생존에 꼭 필요한 음식이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기에 앞서, 다른 생명의 희생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채소와 나무, 곧 식물을 인간의 음식으로 주시는 장면입니다. 계속해서 창세기 9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시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세기 9장 3절)

 

하나님은 채소와 나무, 곧 식물을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물들도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허락하신 양식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식물이든 동물이든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음식은 단지 상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생물의 죽음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즈바(Morman Wirzba)라는 신학자는 <음식과 신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장소에서든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든 다른 생명이 죽어야 한다. 생명은 죽음에 달려있고, 죽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는 음식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음식은 상품이 아니다. 음식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곧 희생적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다.” [각주:1]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먹거리가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비용만 지불하면 식재료와 음식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곧 음식이 상품으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매일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어느 생물의 희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음식은 상품이기에 앞서, 나를 위한 다른 이들의 희생이요 보다 궁극적으로 여전히 나의 생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Morman Wirzba, Food and Faith A Theology of Eat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1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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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5. 2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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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언약의 핵심은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으로, 이는 하나님 백성의 대헌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십계명은 보다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했기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율법을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은 두 돌판에 기록하셨는데(신명기 4장 13절), 십계명의 정신을 보다 구체적인 율법으로 풀어놓으신 말씀은 ‘언약서’에 기록되었고 이 언약서의 존재가 출애굽기 24장에 등장한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애굽기 24장 7절)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22절부터 23장 33절까지가 언약서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배상의 책임

언약서에는 인간의 생명과 신체에 유해를 가한 사람에게 내려질 처벌을 규정한 뒤(출애굽기 21장 12-32절), 재산상의 피해를 배상하는 법률로 이어진다(출애굽기 21장 33절 ~ 22장 15절).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1. 부주의 
자신이 파 놓은 구덩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그곳에서 다른 사람의 짐승이 빠져 죽으면 이를 배상해야 한다(출애굽기 21장 33-34절).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로 자신의 소가 받는 버릇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속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소를 해하면 이 또한 배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출애굽기 21장 35-36절). 
가축만이 아니라 곡식에 대해서도 부주의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이 역시 배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밭이나 포도원에 짐승을 풀어 풀을 뜯게 하였는데, 그 가축이 타인의 농작물을 뜯어먹은 경우다(출애굽기 22장 5절). 혹은 불을 사용하다가 그만 다른 사람의 밭에 옮겨 붙은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출애굽기 22장 6절). 나의 부주의로 자신의 재산을 해쳤기에 자신의 부주의에 대해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2. 악한 행동 
타인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도둑질한 경우다. 의도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였기에 소 한 마리에 대해서는 다섯 마리로, 양 한 마리에 대해서는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출애굽기 22장 1절). 도둑질한 짐승이 여전히 살아있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더라도 두 갑절로 물어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2장 4절). 심지어 배상할 재산이 그에게 없다면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배상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출애굽기 22장 3절). 배상의 책임이 이토록 강력했던 이유는 타인의 재산을 악의를 가지고 탈취한 악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3. 의무 불이행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마지막 경우는 의무에 대한 불이행이다. 타인의 재산을 위탁받았는데 관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위탁받은 물건을 누군가 도둑질하였거나(출애굽기 22장 7절), 맹수가 가축을 해하였거나(출애굽기 22장 13절), 혹은 그 주인이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출애굽기 22장 15절) 의무 불이행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

위의 세 경우는 고대사회를 그 배경으로 하기에 현대사회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문이 가르치는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며, 악한 행동은 물론이요 자신의 부주의나 의무 불이행으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주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한 가지 특징은 타인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에 있다. 


토의 질문 

오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요? 지금 내가 타인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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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2021. 5. 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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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판된 책 가운데 <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비교할 때 훨씬 불행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행복은 감소하는 현상, 이것을 ‘풍요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비롯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풍요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니 오히려 행복 열풍이 불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행복 열풍은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의 길은 숨기고 거짓 행복만을 추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입니다. 소확행은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생활이 고달프니 점심시간에 고급 커피 한잔을 즐기며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일주일간 힘겨운 삶을 살았으니 주말에는 잠시라도 여행을 떠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경험하라고 말입니다. You Only Live Once. 이른바 ‘욜로’ 역시 동일하게 권면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지금 당장 원하는 그것을 체험하라고,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고단한 삶을 살면서 커피 한잔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과제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그것을 체험하는 것도 때로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소확행과 욜로로 대표되는 행복 열풍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의 행복을 그저 한 순간의 즐거운 감정으로 축소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단지 그 순간만의 좋은 느낌을 행복으로 여기며 나의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고, 참된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참된 행복의 길

시편의 문을 여는 시편 1편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복 있는 사람은.” 곧 참으로 복된 인생, 참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노래하는 행복한 인생은 소확행이나 욜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 우리의 인생 자체를 복된 인생, 행복한 삶으로 가꾸어 가도록 초대하지요. 

자, 시편 1편이 묘사하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인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행복한 사람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측면에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본문 1절에 등장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편 1절)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 곧 행복한 삶을 위해 피해야 할 것이 세번에 걸쳐서 등장하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서 지금 당장 재물을 얻을 수 있겠지요. 부정한 방법으로 지금 당장 지위를 얻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 지금 당장 칭찬과 평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재물과 지위와 평판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행복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을 보면 지혜라는 추상명사가 마치 인간처럼 말을 하며 독자들을 지혜로운 길로 초청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지혜의 의인화’라고 불러요. 마찬가지로 잠언에는 미련이라는 추상명사가 마치 인간처럼 말을 하며 독자들을 미련한 길로 이끄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그 미련이라는 추상명사가 의인화되어 나타날 때 한글성경은‘미련한 여인’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미련한 여인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도둑질 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언 9장 17절) 문장으로 써 놓고, 눈을 읽으면 이것은 거짓 행복을 설파하는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요.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 행복을 따라가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하나님은 시편 1편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복된 인생, 참된 행복의 삶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와 악을 멀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2절은 참된 행복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 2절) 

우리의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비결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보면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또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격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큰 위기의 순간을 만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핵심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 보지요. 예수님께서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장 36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의무감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조금씩 넓히려고 노력합니다. 비록 이 세상은 자신의 것을 움켜잡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즐거워하여 매일 조금씩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면 나의 삶에는 거짓 행복이 아닌 참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하지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아니, 나는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말씀을 즐거워한다면, 그래서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그날의 감사한 일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나아가 내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면, 그렇게 조금씩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면 나의 인생이 복된 삶, 참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 행복의 인생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말씀을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닙니다. 단지 종교생활로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말씀이 그저 좋아지고 말씀대로 그저 살고 싶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말씀이 진리로 믿어지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즐겁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말씀을 즐거워하니, 그의 삶은 매일 조금씩 변하여 이 사회가 권하는 거짓 행복이 아닌 성경이 약속하는 참된 행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신명기 10장 12절)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10장 13절)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요, 나아가 그 말씀을 살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훼방꾼

사실 우리 모두는 오늘의 설교를 듣기 전에도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에서 발견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 곧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누가 있습니까? 악인이 있고, 죄인이 있고, 오만한 자가 있습니다. 여기에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할 때, 행인 1 2 3이 무대에 오르지만 그들이 각각 누구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 주위에 악인도 있고 죄인도 있고 오만한 자도 있어 복 있는 사람을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복 있는 사람’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한 명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자는 모두 복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며 복된 길을 가려는 한 사람 주위에 죄인과 악인과 오만한 자의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서 참된 행복을 따라가려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나는 혼자인데, 나의 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은 그 숫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복된 길을 걸어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훼방꾼이 존재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어떠한 훼방꾼들이 있으세요? 본문에 등장하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대표되는 훼방꾼들은 오늘 우리에게는 특정한 인물일 수도 있고, 지금 내가 처해있는 특별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죄와 악을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따라 참된 행복을 추구하려 할 때 반드시 우리 주변에는 나의 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이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된 행복의 길을 따라가려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장면도 본문에는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한명이요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과 6절에 이르면 복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른바 ‘의인’들인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으로 등장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그다음을 주목하세요. ‘의인들의 모임’이 등장하지요. 처음에는 나 혼자 외롭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나의 곁에는 의인의 모임, 의인의 회중, 곧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있어 나의 걸음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거짓 행복을 권하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곁에는 함께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기준

시편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사람, 곧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을 훼방하는 악인들도 등장하지요. 그리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들, 곧 의인과 그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의 결말이 얼마나 다른지도 보여 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 3절)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편 4절) 

이 구절에서 악인들, 곧 죄와 불의를 행하면서까지 지금 당장의 거짓 행복을 쫓는 사람들은 무엇에 비유합니까? ‘바람에 날리는 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가지 이미지, 곧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 안에는 모두 시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그다음 단어입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여기에 시간의 개념이 담겨 있지요? 참된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사시사철 행복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가운데 참된 행복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바로 가을 한철입니다. 4절도 보십시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겨’ 혹은 ‘쭉정이’는 농부가 키질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농부는 언제 키질을 할까요? 당연히 추수 때입니다. 추수하여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섞여있는 것을 키질합니다. 그러면 가벼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 곡식과 분리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의 유쾌한 감정만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러한 거짓 행복을 좇는 사람들의 삶이 불행으로 판가름 나는 것도 봄여름가울겨울 가운데 추수의 때인 가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습니다. 그것은 참된 행복과 거짓 행복을 명백히 구분하는 기준이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쫓으며 추구하는 것이 거짓 행복인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설파하는 거짓 행복은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이 아닌 불행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참된 행복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욱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오늘이 청년주일이지요?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불어넣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청년들조차 자신의 인생 자체를 보다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에 탐닉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통감하며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풍요의 역설’이 지배하는 시대, 그리하여 행복의 열풍이 불어오고 있지만 그것은 잠깐의 만족만 제공하는 거짓 행복이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먼저 이 세상이 설파하는 거짓 행복의 길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외로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행복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곁에는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으니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거짓 행복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행이 되지만 말씀을 즐거워하는 인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의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될 것이니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행복을 따라가는 여러분의 인생도, 그리고 여러분의 뒤를 이어 말씀을 즐거워하게 될 이 땅의 청년들의 인생도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더욱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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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서론(1편-2편) “복 있는 사람”

구약성경 시편에는 150개의 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그렇다 보니 시편을 묵상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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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5. 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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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출애굽 자체가 출애굽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더욱 위대한 비전이 있었고, 이제 그 비전을 이스라엘 자손과 공유하려 하신다. 그 비전이란 시내산 언약이다. 출애굽기에서 시내산 언약은 19~24장에 서술되어 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시기 위한 준비과정을 그려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선포하고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여 시내산 언약을 맺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신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이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애굽기 19장 4절)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 지금까지 출애굽기를 읽어온 독자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이는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동시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출애굽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은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과 연결된다. 물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에도 그들을 업고 안아 주시며 시내산까지 인도하셨다(cf. 이사야 46장 3절). 

출애굽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이 전혀 개입할 틈이 없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가 이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비전을 선포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키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인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비전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등장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기 19장 5-6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히브리 민족, 조금 더 넓혀 애굽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시각을 넓혀 주신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주신 출애굽의 사건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도 그들의 눈을 들어 보다 넓은 곳을 바라보라는 요청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애굽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영역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켜야 한다. 출애굽이라는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출애굽 이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그들의 자발적 응답을 요청한다. 

“제사장 나라”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는 역할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해 백성을 하나님께 인도하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중보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이라는 개인이나, 레위인이라는 특정 지파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비전을 선포하신다. 곧,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는 비전이다.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출애굽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유인이자만,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불의와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라는 명령이요, 하나님의 비전이다. 


백성의 응답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선포하셨다. 이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응답할 차례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애굽기 15장 8a절)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현현하실 준비가 되었다(cf. 출애굽기 15장 9-15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비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일구어가는 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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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주제별 시리즈설교2021. 5. 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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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순차적으로 해설하는 시리즈 설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도제목이나 두 번째 기도제목과는 달리 세 번째 기도의 제목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비교’가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여기에서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하늘’과 ‘땅’은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땅 위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군과 천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요. 그러나 땅에 있는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거역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합니다. 바로 이 싸움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는 열망이 바로 이 기도 제목에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현장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현실이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곧 영적 전쟁터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본문을 기록한 시인도 영적 전쟁터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시편 119편 150절) 

지금 시인의 바로 옆에 악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법에서 멀어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없도록 괴롭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시편 119편 145-146절) 

시인은 하나님께 제발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교훈,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는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던지, 145절의 기도가 146절에서는 단어만 바뀌고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원래 그래요. 오늘 본문이 쓰여진 구약 시대부터 포스트모던 시대라 불리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진심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의 기도

본문을 기록한 시인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치열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 새벽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편 147-148절) 

위의 구절은 시인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더하여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오늘 아침 새벽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고 하여, 오늘 당장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늘 나의 삶에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그날 하루 안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였을까요? 안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날도 새벽녘에 눈을 뜨고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면 하루하루 살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해야 할 거 같잖아요?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야 할 거 같잖아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세상적으로도 잘 되어야 할 거 같잖아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고 오늘 당장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지만, 그 뜻이 언제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지도 마십시오. 그저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합니다.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인내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실 것을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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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5. 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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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생활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은 먹을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셨다.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충분히 내려주신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철새의 한 종류인 메추라기는 아프리카에서 겨울을 지내고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그 과정에서 체력이 다한 새들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만나는 곤충에게 나오는 달콤하고 끈적한 물질이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 의해 마르고 굳어지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자연현상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풍족하게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비와 같이 베풀어주신 특별한 기적이요 은혜였다(cf. 출애굽기 16장 4절). 


먹을 만큼, 수효대로

하나님께서 매일의 양식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지만 이스라엘 자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매일 아침 그것을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를 거두는 일에도 규례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출애굽기 16장 16절) 

한 오멜이 어느 정도의 양인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성경의 여러 번역에서는 대략 2리터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더욱 중요한 점은 ‘먹을 만큼’, 곧 ‘수효대로’ 거두라는 규정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나가 만나를 거둘 때는 많이 거둔 사람도 있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돌아와서 그 양을 제어 보니 모두에게 정확히 필요한 만큼이 되었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출애굽기 16장 18절) 

여기에 만나와 관련된 두 번째 기적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매일 하늘에서 내렸다는 것이 첫 번째 기적이었다면, 두 번째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장면을 인용하며 ‘균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린도후서 8장 13-15절). 현대의 용어로 표현하면 ‘분배 정의’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양식이 모두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균등하게 돌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배 정의는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든 사람이 먹을 만큼, 곧 수효대로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이 바치는 헌금은 성경이 강조하는 균등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출애굽기 본문을 인용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에서 강조하는 바가 바로 연보(헌금)이기 때문이다. 

토의 문제. 
오늘날 교회의 헌금이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매일의 양식

모세는 만나를 거둔 당일에 모두 먹고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말했다(출애굽기 16장 19절). 그런데 모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다음날까지 남겨두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양식이 귀한 광야에서 오늘 조금 먹으면서까지 내일을 대비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남겨진 모든 양식을 못쓰게 만드셨다(20절).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매일의 양식을 만족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복음 6장 11절) 쌓아둘 재물이 아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믿음을 전제한다. 곧, 하나님께서 날마다 공급하신다는 믿음이요, 오늘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만족한다는 믿음이다.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곳에서 나는 소출을 먹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신앙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천성에 들어가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바로 이것이다. 

토의 질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닮긴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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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출애굽기 성경공부2021. 5. 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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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거듭남의 사건은 신앙생활의 완성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다. 


되돌아보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나왔다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에는 ‘전쟁’이라는 현실이 등장한다. 지금 당장이야 하나님께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다른 길로 인도하시지만 가나안 정복을 위해 전쟁은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출애굽기 13장 18절). 더위와 추위, 목마름과 배고픔 등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끝이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고 삶의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광야 생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생활의 고단함은 어쩌면 숙명이다. 그러니 전쟁을 맞이하는 것도, 먼 길을 돌아가는 것도, 그 과정에서 힘에 겨워 치키고 넘어져도 그것은 어쩌면 가나안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많이 아프지만, 출애굽의 위대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애굽기 13장 17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신약시대 성도들의 삶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단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납하실 수 없었다. 그러니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그 여정이 아무리 힘겹고 버거워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토의 질문. 
나의 신앙 여정을 지금 가장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닮아 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향해 걸아가는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언제나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기근과 목마름을 겪어야 하고 적군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걷는 광야 길도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 광야 길에서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13장 21-22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본문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언제나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도, 심지어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지켜주셨다. 그러니 비록 광야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이렇게 고백하듯 말이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38장) 

토의 질문. 
나의 신앙 여정에서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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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요한복음 강해2021. 4. 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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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 첫째 아이가 태어난 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병원 문을 나왔을 때 느꼈던 저의 감정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분명 아이를 안고 있었지만 무게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포근한 느낌만 전해졌지요. 3kg이 조금 넘는 조그마한 생명은 무게가 아니라 감촉이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아이를 안고 업는 일은 아빠인 저에게 행복이라는 촉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아이는 저에게 더 이상 촉감이 아니라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은 아빠가 예전처럼 자기를 번쩍 안아주고 업어주기를 원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들을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그저 서 있는 아들을 안아줄 뿐이지 예전처럼 번쩍 안거나 업고 다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젠가 제 아들이 자기의 등을 나에게 향하고 쪼그려 앉으면서, 저에게 업히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빠를 업어줄 수 있지만, 아빠는 더 이상 아들을 업어줄 수 없게 되는구나.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부모가 자녀를 안고 업어주는 장면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6장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이사야 46장 3절) 

마치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아주고 업어주듯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처음부터 안아주고 업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부모의 차이점이 그 다음 구절에 등장합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장 4절) 

시간이 흐르면 아들은 아버지를 업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노년이 되기까지, 그의 백성이 백발이 되기까지 가슴에 품고 등에 업으면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장 7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양의 문은 양이 우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문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었던 양들이 이제 저녁이 되어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딱 하나밖에 없지요. 곧 양 우리에 나 있는 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어느 통로를 이용해야 천국이라는 우리의 본향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또 다른 표현과 그 의미가 동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찾아보면서 요한복음 10장 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장 9절)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어떠한 유익을 얻지요? 구원을 받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드렸던 바로 그 내용이지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유익을 더 말씀하시네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10절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바는 명확합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도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의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우리는 부활절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기쁨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면서 제 마음 한쪽에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너무도 명확하고,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은혜를 충만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한 영생을 누리는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지난 몇 주 동안 제 마음에서 말끔하게 제거할 수 없었던 의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예수님을 말미암아 지금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부활의 메시지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하여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는 그 풍성한 삶과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요? 과연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부활의 이 기쁨 계절을 보내는 저의 마음 한쪽에 찜찜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여러 차례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유익을 말씀하시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이 장면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양들이 저녁이 되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출입구, 곧 양의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주목해 보세요.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천국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또 천국에서 나와야 할까요? 이 구절에서 ‘들어가며 나오며’는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들은 저녁에 우리에 들어갔다가 그다음 아침이 되면 풀을 찾아 나서기 위해 우리에서 나와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천국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데, 그 천국에서 다시 나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거든요. “들어가며” 그리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최후 심판의 날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면 다시 천국에서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 “들어가면”의 삶이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의 삶이에요. 우리는 예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매일 그곳에서 나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은혜

이쯤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들지요. 매일같이 안전한 우리를 떠나야 하는 양들처럼 험한 세상살이로 내몰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풍성한 ‘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약속하셨잖아요.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도 하시고, 지금 이곳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은혜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한복음 10장 14-15a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친밀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예수님을 아는 친밀함이죠. 

목사는 매일 아침 양들을 안전한 우리에서 이끌고 나와 초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은 지금 당장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가득 채워놓고 그곳에서 우리를 사육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매일 아침 우리를 데리고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고 가세요. 풀을 찾아 떠나는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풀을 찾기 위해 걸어가는 길에서 더위에 목이 마르기도 하고, 맹수들의 위협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내가 알고 주님께서 또한 나를 아시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예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그 주님을 알아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샘물이 나올 때까지 참고 견디며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어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14-15절)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구절이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내용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양을 공격하기 위해 사나운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삯꾼이야 당연히 양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먼저 구하겠지요. 그러나 삯꾼이 아닌 목자라도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는 장면을 보면 열이면 열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구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목자가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처음부터 제거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하락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이끌고 나오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목마름과 궁핍을 겪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공격도 받지요.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괴로운 광야길이라면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주님을 아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욱 누리십시오. 우리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나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주어 그 모든 과정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을 부모가 이제 막 태어난 자녀를 안고 혹은 업고 다니는 장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인간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만 번쩍 안거나 업어서 데리고 다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노년이 되어서도, 혹은 백발이 되어서도 번쩍 안아 주시고 등에 업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거나 업어주는 장면을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부모가 데려가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아이의 발은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거나 혹은 업어서 인도해주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안고 혹은 업어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대신 우리는 한 가지를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안고 업고 다니시기에, 우리는 아무리 성인이 되어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어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실제로 이사야서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안전한 우리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요. 그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매일 안전한 나무 그늘 밑에 건건초를 공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이끌어 내시네요.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기도 하고, 심지어 맹수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 주님이 이끄시는 장소로 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여러분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장소에 와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선한 목자요, 
여러분의 좋으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친밀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든 상관 없이 예수님께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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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