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성경공부2022. 12. 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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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는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리고 분명하게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면(the real and visible presence of God among them)이 많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세우는 날부터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은 구름과 불의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셨다(민 9:15-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셨다는 사실은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애굽]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애굽인]도 들었으니 (민 14:14) 
[모압]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민 23:21) 

위의 첫번째 구절은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목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애굽인들도 들어 알고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번째 구절은 모압 사람 발람의 예언 가운데 일부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고 선언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분명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임재하셨고, 그것은 주변 나라 사람들도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이었다. 


민수기의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그리고 분명히 목격하였던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은 먼저 거룩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즉각 벌하신다. 원망하는 백성을 불로 사르거나(민 11:1-3, 다베라)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에게 나병이 생긴 것(12장)을 비롯하여, 민수기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적극적으로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무수히 등장한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 곧 이스라엘의 죄악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반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을 판결한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를 가까이 경험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민수기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첫번째 성품이 거룩이라면, 민수기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두 번째 성품은 용서와 인자하심이다. 민수기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지만 동시에 풍성한 은혜도 베푸신다. 민수기에 등장하는 두 번의 인구조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번성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신 실제적 증거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광야생활 40년을 형벌로 내리시지만(민 13-14장),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로 시작하는 민수기 15장의 계명은 그 순간에도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변함없음을 보여준다. 


민수기와 신약성경

신약성경의 저자는 민수기의 장면을 여러차례 인용한다. 위에서 민수기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품이 첫째는 거룩이요, 둘째는 용서와 자비라고 언급했다. 신약성경이 민수기를 인용하는 장면도 두 가지 주제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경고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 하였고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신약성경은 민수기를 인용하면서, 구원받은 성도들도 하나님께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죄악을 멀리 하라고 경고한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고전 1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전 10:5-6).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 시험, 불평 등의 죄를 멀리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0:7-11). 히브리서 역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참된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며 민수기의 사건을 언급한다(히 3:16-18). 그리고 이렇게 경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거짓 교사를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유다서 역시 민수기의 사건을 동일한 관점에서 해석한다(유 5). 

반면, 신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주목하며 민수기의 내용을 인용하는 책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구리뱀을 높이 들어올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요 3:15).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 사건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민수기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다(요 6:35). 신약성경의 서신서가 민수기를 성도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요한복음은 민수기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성취된 사건들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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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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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y Cartier-Bresson)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을 단수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은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사진집이 195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라는 작품입니다. 이 사진을 잠시 보시겠습니까? 기차역 뒤에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성이 그 웅덩이를 뛰어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모습이 그 아래의 물에 반사되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매우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사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대목은 물 위에 뛰어오른 남성의 발과 그 아래 물에 비췬 그림자의 발이 이제 막 부딪치려는 찰나!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역동성과 함께 안정성을 한 장면에 담은 데 있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자신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밀이나 노하우가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은 수수께끼와 같아서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입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은 잘 짜인 각본에 맞춘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폴 드 곤디(Jean François Paul de Gondi)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There is nothing in this world that does not have a decisive moment) 

비록 평범해 보이는 사람과 사물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결정적 순간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던 결정적 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향년 175세를 살았습니다. 오늘과 같이 의료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대에도 175세이면 매우 장수한 것이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던 아브라함이지만, 그의 삶을 변화시켰던 한 순간, 곧 그의 삶을 완벽하게 변화시켰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b-3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바로 이것이 결정적 순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만나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 당신은 75세 되는 그때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받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였는데,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정적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질문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과 동일한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내가 계획한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고 마치 수수께끼처럼 알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할 때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앙에 찾아오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 단위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대표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단연코 출애굽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세월은 자그마치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면, 나의 할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아버지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이제 나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세월이지요. 430년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의 손자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그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세대가 세대를 이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연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 무엇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전망이나 기대도 없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사건이지요. 그리하여 출애굽 사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사건과 대해 이야기한 내용과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순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니, 실마리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풀리듯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다고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바로 그때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신앙 공동체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지금도 기다립니다. 카리티에 브레송이 인용했던 문장, 곧 17세기의 프랑스 성직자였던 장 프랑수아 곤디의 문장 그대로, “결정적 순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다리라

본문 시편 80편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온 결정적 순간을 찾아본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출애굽의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시편 80편은 출애굽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회상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1절) 

여기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지금 시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셨던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러면 1절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어떠한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한 중앙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두 개의 그룹, 곧 천사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 본문 2절에도 등장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여기에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리를 잡은 열두 지파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진을 시작하면 열두 지파가 앞뒤로 하나의 긴 행렬을 만들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이때는 법궤가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앞에서 행진하는 여섯 개의 지파와 뒤에서 따라가는 여섯 개의 지파 그 사이에 법궤가 위치하였지요. 그리고 그 법궤를 중심으로 바로 뒤따라오는 지파가 오늘 본문 2절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러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본문의 표현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던 장면을 회상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시편 80편은 1절부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빛나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마치 모든 사진사들이 포착하고 싶어서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는 바로 그 순간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인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되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는 시편 80편은 감사와 찬송의 시가 아니라 간구와 탄식의 시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시편 80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모든 국민이 제국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 본문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80편은 나라가 멸망한 절망의 상태에서 출애굽이라는 과거의 결정적 순간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노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결정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한번 경험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며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이제 다시)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이제 다시) 빛을 비추소서 (1절)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이제 다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이제 다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2절) 


준비하고 기다리라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 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비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은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자신도 그 비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카리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만약 사진을 잘못 찍었다면 그림을 그릴 때 지우개로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다시 그리듯 사진을 다시 찍으면 됩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다 보면,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애굽의 사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최고의 결정적 순간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최고의 결정적 순간, 곧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리지요. 그런데 여러분, 대림절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삶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나의 삶에 친히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니,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는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제는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린 사진작가가 오늘 또다시 찾아올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스케치를 잘못 그린 화가가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결정적 순간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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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민수기 성경공부2022. 12. 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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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째 단어를 제목으로 잡는 히브리 성경의 전통을 따른 것이지만, 그 의미는 민수기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제시해준다. 민수기의 주된 내용이 시내산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광야 40년 동안의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민수기의 내용 및 구조

민수기는 모세오경의 네번째 책으로, 민수기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모세오경에서 민수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세 오경에서 족장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창세기는 서론,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신명기는 결론의 역할을 한다. 그러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모세 오경의 본론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그 내용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출애굽기부터 민수기는 크게 네 개의 장소(애굽, 시내산, 가데스, 모압 평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그 사이사이에 장소에 대한 이동을 묘사한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민수기는 네 개의 지역 가운데 시내산을 시작으로 가데스를 지나 모압 평지까지 이르는 세 곳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표에서 민수기에 해당하는 부분만 떼어내면 이동 경로에 따른 민수기의 구조가 된다.


저자와 저술 연대

전통적으로 민수기를 포함한 모세 오경은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졌다. 모세가 민수기의 저자라면, 저술 연대는 BC 1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후반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성경에는 모세가 직접 기록을 남겼다는 구절도 있다.

[출 24:4a]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민 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신 31: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신 31: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위의 구절을 살펴보면, 모세가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모세가 민수기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기록했다고 이해할 성경의 내용은 없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이 제기된다.

민수기의 저자와 저술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 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다. 민수기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사건에 대한 서술이요(Narrative), 또 하나는 제사 제도를 비롯한 예전이다(Ritual).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가데스를 지나 모압 평지에 이르는 이스라엘 자손의 여정을 그려준다. 그런데 약 40년 정도의 여정을 묘사하는 민수기에는 사건에 대한 내러티브 외에도 율법과 제사 제도에 대한 서술이 매우 많다. 이는 모세 오경 안에서 출애굽기와 민수기, 그리고 레위기와 민수기가 그 내용에 있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출애굽기는 이야기(narrative)가 큰 뼈대를 이루고 레위기는 율법(ritual)이 중심인 반면, 민수기는 이 두 가지의 병행이 특징이다. 민수기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드 볼스(De Vaulx)는 민수기 안에 병행하여 배치된 내러티브와 율법이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시내산에서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을 '이야기'로 서술하는 민수기가 그 사이사이에 율법과 제사법을 제시하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무엇이며,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핵심 관심사인 율법과 제사 제도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자료 비평학은 이를 근거로 민수기가 세 가지 자료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

민수기의 세 가지 자료란 J(야웨) 문서, E(엘로힘) 문서, 그리고 P(제사장) 문서다. 이 가운데 J문서와 E문서의 구분은 자료 비평학이 창세기를 분석할 때 사용한 도구다. 창세기에는 동일한 내용에 대한 두 가지 기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구분하기 위해 J문서와 E문서로 칭하였다. 민수기는 창세기와 달리 동일한 내용에 대한 두 가지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수기는 J문서와 E문서의 정확한 구분이 어렵고, 학자들은 JE문서로 통칭하기도 한다. 민수기의 이야기(narrative)는 JE문서에서, 민수기의 율법과 제사법은 P문서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자료 비평학은 J문서의 형성 시기를 BC 10세기경으로, E문서의 연대는 BC 9세기경으로, 그리고 P문서의 시기는 BC 6세기 이후라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자료 비평학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민수기는 BC 6세기 이후에 누군가 이러한 자료를 모아 편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이 민수기의 최종 편집 시기를 BC 5세기로 보는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 역시 빈약한 자료에 근거한 추정이기에 시간이 흐르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얼마든지 새로운 가설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


민수기의 율법과 제사법

민수기에서 율법을 말씀하는 본문은 상당수가 제사 예법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오경 가운데 레위기는 물론이요, 시내산에서 모압평지까지의 여정을 서술하는 민수기도 제사를 비롯한 구약의 예전(ritual)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구약의 예전(ritual)은 현대인들이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구약성경은 제사의 절차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그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법의 중요성과 의미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구약의 예전에는 하나의 순서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상징 언어의 하나인 예전의 일반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모든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폐기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제사를 비롯한 구약의 예법에 무관심하고 나아가 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을 단지 지루한 서술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민수기 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제사법을 비롯한 민수기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수기는 이야기와 함께 율법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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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의 구조 및 저술 연대,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인 "베미드바르"(bemidbar)로, 그 뜻은 "광야에서"이다. "베미드바르"는 각 책의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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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022. 12. 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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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여러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때로는 외부에서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부로부터 위기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외부로부터 위기가 찾아오는 경우입니다. 교회가 성령이 충만해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 지역의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인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구원자라고 전파하니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래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감옥에 투옥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매질을 하기도 하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외부로부터 몰려온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요. 그 위기 앞에서 초대교회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 내용을 읽어보면,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박해와 위협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협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용기를 주셔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외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힘 있게 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교회가 외부로부터 몰려온 위기를 기도하면서 이겨낸 장면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외부로부터 몰려운 위기도 있지만, 내부에서 발생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이지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1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과부란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생산 수단이 전혀 없어 하루 세끼의 양식을 얻기에도 힘들었던 분들을 말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구제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이 묘사하는 것처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은 교회의 구제를 더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이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는 교회의 구제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성도들 사이에 미움과 갈등이 빚어지고, 급기야 커다란 교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위기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자, 본문이 묘사하는 교회의 반응과 대처를 살펴보기에 앞서, 초대교회에게 임했던 외부로부터의 위기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위기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교회 안에 위기가 없이 그저 평안하다면, 그것은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에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위기도 없고, 고난도 없고,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이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그러한 은혜가 아닙니다. 지난 이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위기가 있지만, 고난이 있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는 눈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지만, 그 위기를 이겨내게 하시고,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위대한 섭리를 경험하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물론, 위기가 있지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외부에서 발생하여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외부의 위기도 있지요.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우리가 스스로 자처한 여러 어려움과 위기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있다고, 고통이 있다고, 어려움이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난 세월 속에서 이 교회를 은혜의 손길로 붙잡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우뚝 서도록 은혜로 붙들어 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직분자, 하나님의 창조적 대안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외부로부터 임한 위기였지요. 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부로부터 서로 오해하고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위기입니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위기와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위기를 대처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응법이 서로 다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산헤드린 공의회가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위기의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공격에 대한 그들의 대응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합심기도였지요. 그런데 교회의 내부로부터 기인한 갈등과 문제를 대처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본문 3절에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제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a절)

바로 이것이 사도들이 내어 놓은 대안입니다.

본문 3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고 말씀하지요.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난한 과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구제 사업을 누가 주도하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열두명의 사도들이 교회의 구제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지도자들이니 교회의 중요한 사역인 구제에도 사도들이 직접 관여하고 주도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이 내가 받은 떡이 언제나 저 사람이 받은 떡보다는 작게 보이지요. 그러니 성경의 기록만으로는 실제로 구제하는 일에 헬라파 과부들이 차별을 받았는지, 아니면 히브리파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평하게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로 말미암아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서운했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구제하는 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책은 사실 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 일을 주도하는 사도들이 구제와 금전출납을 더 꼼꼼하게, 더 투명하게 처리하기 위해 노력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금전출납을 기록하는 방식도 개선하고, 음식을 나누는 방법도 개선하고,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구제하는 방법을 아무리 개선하고 사도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아무리 신경을 써도, 유사한 문제는 언제든 발생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단순히 구제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나 단순히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바른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또,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산헤드린 공의회의 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의 위기도 온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온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교회 안에서 조금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번에는 온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나 성도들의 합심기도가 해법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성도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도, 교회가 구제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교회가 내부적으로 서로 시기하고 갈등하고 나아가 미움이 싹트기 시작한 이 커다란 위기를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교회의 다양한 사역을 책임감 있게 감당할 수 있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비록 사도들의 제안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내부로부터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대안입니다. 곧, 설교의 제목과 같이 ‘직분자’가 위기를 맞이한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대안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직분이나 집사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은 그저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말씀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말씀한 의미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일곱 명의 집사님을 택하여 세우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사도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말씀하였으니, 일곱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집사님을 택하는 일,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누구의 역할입니까? 교회의 역할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점은 사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열두명의 사도는 교회가 세우지 않았지요.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후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가룟 유다가 사도의 직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는 그 한 사람의 결원을 자신들이 선택하여 보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제비뽑기의 방식을 선택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집사님을 뽑는 방식은 성도들의 선택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집사님을 세우는 실제적인 주체는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 집사님을 선택하는 역할, 직분자를 세우는 사명은 교회에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입니다.

여러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하나도 예외없이 수많은 위기를 맞이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문제와 위기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나아가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보다 성장하며 성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구제하는 방식을 개선해야 합니까? 금전출납의 좋은 양식을 도입해야 하나요? 도움이 조금은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알려주시는 창조적인 대안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마지막까지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충성된 일꾼을 세우는 일, 헌신된 집사님을 세우는 일,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직분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 교회가 일곱분의일곱 분의 집사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큰 위기 속에서 초대교회는 일곱 분의 집사님을 세우지요. 그 결과를 본문 7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절)

교회 안에 직분자가 세워졌습니다. 그러자 교회를 위기로 몰아갔던 시기와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왕서해서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직분자의 흩어짐

초대교회의 집사님들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는 이유는 직분을 받은 분들이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오랜 세월 교회를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예루살렘 교회 역시 처음 일곱 분의 집사님을 세웠을 때, 집사님들이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 일곱 분의 집사님을 세운 사도행전 6장의 바로 다음 7장으로 넘어가면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이셨던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한 장 더 뒤로 넘어가서 사도행전 8장에 이르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있었지만, 스데반을 제외한 여섯 분의 집사님들은 모두 교회를 떠나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한평생 충성하리라 다짐하였을 일곱 분의 집사님들이 원치 않게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거대한 박해가 일어나 예루살렘의 모든 집사님들이 예루살렘과 유대땅을 벗어난 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집사님들이 흩어져서 떠나간 지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마리아였거든요.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처음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 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세워주신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들은 누구였을까요? 네, 오늘 본문의 주인공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집사님으로 선택을 받고 세워진 바로 그분들입니다. 이후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정말로 대단한 활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직분자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충성을 다하되, 여러분의 발걸음이 미치는 그곳에서 여러분의 손길이 닿는 그곳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한 일에 힘쓰십시오. 장로, 집사, 권사의 귀한 직분을 받으신 여러분이야말로 교회를 위한, 그리고 온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창조적 대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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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절기설교2022. 12. 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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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어느 집사님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의와 평화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재차 질문하였더니, 그분은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구한말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 성도들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우리나라와 민족이 더욱 풍성한 삶을 살도록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주기도문의 한 대목이지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제왕시

본문 시편 72편은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제왕시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시편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안에 인간 왕을 높이고 인간 왕을 위해 기도하는 시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이 그 대표적인 제왕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1절) 

여기에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시편 72편이 왕이 새롭게 등극하였을 때 불렀던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72편에는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두 개 등장합니다. 시편 72편의 표제어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20절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고 말씀하지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의 이름을 감안하면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때,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노래가 시편 72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제왕시와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시편에는 오늘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제왕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왕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절대 권력을 소유한 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지요.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왕을 높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본문 시편 72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2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장, 특별히 대부분의 동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간구와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간구와 기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보십시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1절) 

본문 11절은 간구와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간구와 기도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우리 왕 앞에 모든 왕들이 부복하게 하시고 모든 민족이 다 그분을 섬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추론한 것처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시편을 노래했다면, 그들의 노래는 솔로몬을 위한 중보기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라는 기도였겠지요.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이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72편을 ‘중보기도’라는 생각 하면서 본문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게 해 주시고]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게 해 주시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시고]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소서] (12-13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해 달라는 기도 했겠지요.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통해 힘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기도로 이해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이 땅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고대 사회와 같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하기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땅의 정치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이 땅에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사건으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이 당에 더 이상 삶이 고달파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본문 14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비록 이 땅에 억울한 희생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롭게 공의롭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은 시편 72편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유대인들이 시편 72편을 처음 노래하였을 때, 그들의 노래는 주로 중보기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서 많은 백성들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고 솔로몬이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를 기도하였겠지요.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가운데 응답해 주셔서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그는 우상 숭배에 빠졌고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았지요. 솔로몬의 과오는 이스라엘을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남 유대의 많은 왕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그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져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하는 처지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본문 시편 72편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유대인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물론,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했던 시편 72편을 간구와 기도 외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자,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문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실제로 한글 성경의 번역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예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기로다 (11절)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한 왕을 세워주십니다(요 19:19). 그리고 그의 앞에는 모든 왕들이 부복하고 모든 민족이 그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왕은 한 나라의 왕이나 한 민족의 왕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왕 중의 왕, 곧 만왕의 왕이 되시지요. 본문은 그러한 왕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성취되었습니까?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본문 11절부터 다시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는] 궁핍한 자의 생명을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구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네요)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2-14절)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왕과 통치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지요.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어느 인간 통치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셨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대림절을 보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5절) 


대림절 찬양

시편 72편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시편 72편을 자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작곡가였던 아이작 와츠가 시편 72편을 기초로 작고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Jesus shall reign”으로,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다스리시고>입니다. 이 찬양은 시편 72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하지요. 그래서 햇빛을 받는 모든 곳이 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찬양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이작 와츠는 시편 72편을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기도와 간구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의 2절 가사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니 그 기도 향기 되어서 주 앞에 상달하도다” 아니,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시편 72편의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왜 또다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지요.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 완성의 모습도 그려주는데,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16-17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하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시편 72편을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거짓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유익만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성도들에게 참된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절기설교 목록 (Contents)

[대림절] 시편 72편 11-17절 “만왕의 왕”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다 보면, 성도님들께 함께 기도하고 싶은 기도 제목을 질문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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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서평2022. 12. 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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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된다는 민주주의 사상을 반대하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주의 공부>의 저자 얀-베르너 뮐러는 포퓰리즘(특별히 우익 포퓰리즘)을 자신이 '진짜 시민'의 대변자라는 주장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자신이 대변하는 진짜 시민과 다른 (혹은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가짜 시민이라고 여긴다.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자신들이 선거에서 이기면 그것이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가짜 시민에 의한 부정선거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은 평등과 자유다.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입장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진짜 시민과 가짜 시민을 구분하여 평등이라는 가치를 훼손한다.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저자는 다음의 두 가지 명제를 주장한다. 
1. 민주사회의 국민은 다른 시민을 제명하거나 다른 시민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p. 64) 
2. 국민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국민 개념이 '자명하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p. 65)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면, 불일치와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약속은 우리 모두가 뜻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것이 아니다."(p. 69) 여기에서 저자는 의견의 불일치와 비존중(disrespect)를 구분한다. 의견의 불일치는 민주주의를 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동일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존중하지 않는 비존중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에게 반대파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충실한 반대파"(loyal opposition)의 존재가 필수다. 충실한 반대파는 상대방의 승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는 얼마든지 그들이 승리할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치도 포기하지 않는다. 애덤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불확실성"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선거는 제도화되어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선거의 승패는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민주주의에 역동성과 창의성을 불어넣으며, 충실한 반대파의 자리를 보장할 수 있다. 

"제도화된 불확실성"을 실현하기 위해 저자는 두 가지 인프라가 필수라고 역설한다. 곧, 언론과 정당이다. 이 두 가지는 대의 민주주의를 위한 매개 기구라고도 부를 수 있다. 물론, 언론과 정당은 불확실성을 통한 역동성을 창출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인터넷 플랫폼이 중요해진 시대에는 알고리즘이 그것을 양극화를 강화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언론과 정당이 매개 기구가 되어 민주주의의 인프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외적 다원주의와 함께 내적 다원주의가 존재해야 한다. 외적 다원주의란 다양한 시각의 언론과 다양한 정치 철학을 담지한 정당의 존재를 말한다. 그와 함께, 혹은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내적 다원주의다. 언론과 정당이 그 내부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토론하고 대화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영국 철학자 오노라 오닐은 매개 기구가 민주주의 인프라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접근성과 자율성이 있어야 하고 또한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역사상 공짜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p. 179) 의견의 불일치를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효율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인프라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사회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매개 기구의 접근성과 자율성 그리고 평가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관심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효율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들여야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 가치는 그 모든 것을 투자하기에 충분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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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v. Hanjin Lee
전도서 성경공부2022. 11. 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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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1a절)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서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구절은 문맥을 고려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도자(코헬렛)는 앞 단락(전 11:7-10)에서 세 번이나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직 젊을 때 창조주께서 주신 인생이라는 선물을 즐겁게 누리라는 뜻이다. 노년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그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전도자는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권면한다(1절). 여기에서 곤고한 날이란 죽음이 임박한 노년을 말한다. 본문 7절은 보다 명확히 말하는데,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한다. 

전도자는 노년의 시기를 비유로 묘사한다. 본문 3절에 등장하는 네 종류의 사람은 인간의 신체를 나타낸다. 

[팔과 다리]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허리]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치아]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눈]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본문 4절이 묘사하듯, 노년이 되면 귀가 어두워진다(맷돌 소리가 적다). 그런데 잠귀는 밝아 작은 소리에도 잠을 설친다(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5절) 

살구나무 꽃은 노년의 상징인 흰머리를 가리킨다. 메뚜기도 짐이 되듯 노년에는 가벼운 짐도 지기 어렵다. 정욕이 그친다는 말은 성욕의 감퇴를 말한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노년의 특징을 다양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머지않아 영원한 집인 무덤에 들어가고 조문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전도자의 긴 연설이 끝나고 전도자의 교훈을 전해주는 전달자(내레이터)의 마무리 발언으로 이어진다. (전도서의 구조에 대해서는 전도서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개관)를 참고하라) 내레이터는 전도자의 발언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번, 그리고 전도자의 발언이 마친 뒤에 또 한 번 그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악한다. 

[서론]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결론]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8) 

모든 것이 헛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레이터는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자세를 이렇게 권면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3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은 전도서뿐 아니라 구약 성경의 모든 지혜 문학(잠언, 전도서, 욥기)의 최종 결론이다. 

 

 

"전도서 성경공부" 글 목록(Contents)

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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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성경공부2022. 11. 2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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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근대적 참모 제도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전쟁만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전도자(코헬렛)도 인간이 미래의 일을 조금도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분명한 한계를 지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라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1절)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은유적 표현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친절을 베푸는 행위다.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자선을 행하면, 마침내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온다는 가르침이다. 고대 이집트 문헌 가운데 하나인 <안크셰숀크의 가르침>(Instruction of Anchshechonq)에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선한 일을 행하고 그 일을 물 위에 던지라. 물이 마르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이윤을 얻기 위한 사업이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 전도서의 최종 편집 시기가 BC 3세기라면, 본문 1절의 배경은 그리스 시대에 융성했던 해상 무역일 가능성이 높다. 해상 무역에 투자하면 시간이 흘러 이윤을 얻게 되리라는 뜻이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2절) 

본문 1절을 해상무역에 대한 투자로 이해하면, 2절은 현대인들의 용어로 분산투자가 된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는데, 재앙의 날을 대비하여 한 곳에 투자하지 말고 여러 곳에 나누어 투자라하는 말씀이 된다다. 만일, 본문 2절을 친절과 자선으로 해석하면, 미래에 닥칠 재앙의 날을 대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미리 베풀라는 교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4절) 

내일을 위한 투자든, 재앙의 날을 대비한 친절과 선행이든 최적의 기회가 찾아오는 법은 없다. 씨를 뿌리기 위해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린다면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다. 곡식을 거두기 위해 구름이 거치기를 기다린다면 곡식을 거둘 수 없다. 바로 지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행을 행하고 내일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코헬렛의 참된 지혜, 곧 그의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6절)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은유를 자선이나 투자와 같은 구체적인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무엇이 되었든 전도자의 교훈은 변함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라. 

 


기쁘고 즐겁게 살라 

전도자는 인간의 최종 운명인 죽음의 위력에 대해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우울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의 교훈은 정반대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7절)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았으니 나의 눈으로 빛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실로 멋진 일이다. 전도자는 죽음 이전, 곧 지금 살아 있는 동안 기쁘고 즐겁게 살라고 반복하며 강조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8a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9a절)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10a절) 

위에서 인용한 8~10절 모두, 뒷부분에는 죽음과 심판의 날에 대해 말씀한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권면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으로 오늘을 기쁘게 즐겁게 살아가는 자세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기에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은혜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일서 설교>(Homilies on the First Epistle of John)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당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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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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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성경공부2022. 11. 2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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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단락(10장 1-11절)에 이어 본문 역시 일관된 흐름이나 문맥을 찾아보기 어렵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전도서 10장 1-11절 "지혜의 유익과 한계"), 이러한 경우에는 각 구절의 의미를 독립적으로 살피는 것이 유익하다. 


우매자의 언어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2절) 

전도자(코헬렛)는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언어를 비교하는 듯하다. 그러나 계속되는 구절을 살펴보면 전도자의 강조점은 우매자의 언어에 있다. 전도자는 지금까지 인간의 지혜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는 지혜자의 언어를 높이기보다 우매자의 말에 대해 비판한다.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13절)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우매로 시작하여 미친 것으로 마친다. 한 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은 말만 한다. 그에게는 지혜로운 언어가 없으니 말수라도 적으면 좋으련만,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다.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14절) 

우매자의 말이 어리석은 이유는 알지 못하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도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든 혹은 지혜롭게 보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 누구도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전 7:23-24; 8:1a). 그러므로 사람의 겉모습이 지혜자든 우매자든 상관없이 말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우매자다. 


두 종류의 나라 

[ 화가 임하는 나라]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6절) 

[복이 임하는 나라]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7절) 

화가 임하는 나라와 복이 임하는 나라를 대조적으로 서술한다. 화가 임하는 나라의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잔치에 빠져있다. 복이 임하는 나라의 대신들은 취하지 않는 것을 보면(17b), 화가 임하는 나라의 대신들은 밤낮 잔치를 벌이면서 취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 복이 임하는 나라의 왕은 출신 성분이 고귀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출신지나 집안을 그의 능력과 구별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출신 성분을 그 사람의 됨됨이로 여겼다. 그러므로 복이 임하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왕이나 대신과 같은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앉아 있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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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연구 01 “전도서의 저자와 구조”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함께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으로 분류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잠언이 지혜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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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성경공부2022. 11. 2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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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일관된 주제는 "지혜"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나 흐름은 발견하기 어렵다. 지혜 문학 중에는 이처럼 일정한 문맥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때는 각 구절을 깊이 묵상하는 방법이 유익하다. 


지혜와 우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1절) 

비유가 흥미롭다. 평소 지혜롭게 행동한 사람도 한두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집단도 한두 명의 어리석은 사람이 모임이나 조직을 해할 수 있다. 지혜로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리석은 행동으로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것은 한순간에 가능하다. 그만큼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은 파급력이 크고 빠르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2절) 

오른쪽은 힘과 권능을 상징하고 왼쪽은 그러한 덕목의 결여를 의미한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른쪽을 "옳은 일"로, 왼쪽을 "그릇된 일"로 번역한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마음이 오른쪽과 왼쪽에 있다는 말씀은 두 사람의 마음이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마음은 주변 사람들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특별히 우매자의 말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쉴세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3절). 


세상을 요동하는 것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5절) 

위의 구절에서 주권자는 왕을 의미한다. 왕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재난이 무엇인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임명하는 잘못이다.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6절) 

적절한 위치를 벗어나 세상을 요란하게 만드는 일에 대한 경고는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주제다. 구약성경의 또 다른 지혜 문학인 잠언에도 동일한 주제가 등장한다. 이른바 '숫자 잠언'에는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을 나열한다. (숫자 잠언에 대해서는 잠언 연구 14 “숫자 잠언과 그 교훈”를 참고) 곧, 종이 임금이 되는 것, 어리석은 자가 배불리 먹는 것, 꺼림을 받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 여종이 안주인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다(잠 30:21-23). 


유익과 위험성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8-9절) 

함정을 파고, 담을 헐고, 돌을 떠내고, 나무를 쪼개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직업이다. 그만큼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유익한 일 안에 위험성이 도사린다. 사람들은 유익을 얻기 위해 수고하지만 그 안에 위험성은 늘 상존하니 생산적인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10-11절) 

무뎌진 연장은 생산성이 낮지만 날을 갈면 적은 힘으로도 많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 지혜가 이와같다. 지혜와 기술은 생산성을 높이고 성공하기에 유익하다(10절). 그러나 지혜와 기술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뱀을 부리는 비상한 주술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뱀에게 이미 물렸다면 자신의 능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혜가 유익하지만 무력화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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